나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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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라크 나시리야.jpg

아랍어 ٱلنَّاصِرِيَّة
영어 Nasiriyah
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이라크 서남부의 도시. 바스라 서북쪽으로 120km, 나자프에서 동남쪽으로 140km, 아마라에서 서남쪽으로 100km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 양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64만명으로, 이라크에서 9번째로 큰 도시이다. 19세기 문타피크 부족의 거점으로 세워져 그 부족장 나시르의 이름이 붙여졌고, 바그다드와 바스라 사이의 무역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현대에는 이라크 바트당의 거점이었으나 현재는 쉬아 세력이 더 강하다.

주요 관광지로 서남쪽 15km의 우르 유적이 있는데, 바로 옆에 나시리야 국제공항 (이맘 알리 공군기지)가 있어 접근이 용이하다. 그 옆에는 군기지와 정유공단이 있다. 바둑판 형태의 시가지 서부에는 디카르 대학교와 나시리야 화력발전소가 자리한다. 옛 수메르 지역의 중앙에 위치하여 우르 외에도 남쪽 10km의 키시가 (쿠아라), 서남쪽 25km의 에리두, 동북쪽 35km의 라가쉬, 서북쪽 35km의 라르사 & 바드 티바라, 북쪽 40km의 기르수, 서북쪽 50km의 움마, 서북쪽 60km의 자발라 등 고대 수메르 유적들이 지척에 다수 분포한다. 시내에도 우르, 수메르 구가 있다.

2. 역사[편집]


아마라, 라마디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오스만 제국 시기에 세워진 도시로, 1872년 현지 문타피크 부족의 셰이크 나시르 앗 사둔 파샤가 건립하였다. 설립과 함께 나시리야는 문타파크 산작의 치소가 되었고, 나시르 앗 사둔 파샤는 그 산작베이 (총독)가 되었다. 후자의 아들 사둔 파샤 역시 나시리야의 무타사리프 (징세관)을 역임하였고,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집권 전까지 사실상 이라크 남부의 통치를 맡았다. 그 무렵 나시리야에선 가죽, 곡물, 버터가 생산되었고 6백개의 석조 주택과 더 많은 진흙 벽돌 건물이 있었다. 또한 무역의 활성화로 350개의 상점과 5개의 칸 (여관)이 있었다. 도시는 비옥한 농지와 대추야자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다른 주요 도시들과 성벽이 둘러지지는 않았다.

1차 대전 중인 1915년 7월, 영국군은 4백의 전사자를 내며 도시를 점령하였다. 1920년경 나시리야에는 6천 5백의 주민이 거주하였고, 특이하게도 아랍 무슬림 외의 인구가 적지 않았다. 10%의 만다야교도, 8%의 유대교도, 5%의 페르시아인, 4%의 루르인, 소수의 튀르크인과 기독교도 등이 거주하였다 한다. 1930년대에는 유수프 살만 유수프 (파흐드)의 주도 하에 이라크 공산당의 첫 지부가 세워졌고, 50년대에 바트당을 세우는 푸아드 알 리카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초기 바트당은 나시리야 출신이 다수였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의 이라크 진격에 있어 나시리야는 그 최북단 점령지였다. 그해 3월에 미군이 철수하자 현지 쉬아 주민들이 반정부 봉기를 일으켰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며 잔혹히 진압되었다.

2003년 봄 이라크 전쟁 시에 나시리야는 대도시 외의 도시들 중 미군에 가장 격렬히 저항한 곳 중 하나였다. 10여일간 이어진 전투 끝에 미군은 바그다드 점령 시와 비슷한 34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이라크군은 4백여명이 전사하였다. 그해 11월 폭탄 테러로 30여명이 사망하였다. 2017년 9월 재차 테러가 터져 83명이 사망하였다. 이라크전 당시 한국군이 주둔하였고, 2020년에는 서희부대가 배치되기도 하였다. 2019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유전 시설을 장악하였고, 2022년 봄에도 밀값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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