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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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사히 신문 로고.svg 아사히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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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이 2000년 투표로 선정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의 리스트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나쓰메 소세키
무라사키 시키부
시바 료타로
미야자와 겐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츠오 바쇼
다자이 오사무
마쓰모토 세이초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리시마 타케오
무라카미 하루키
엔도 슈사쿠
세이 쇼나곤
요사노 아키코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모리 오가이
요시카와 에이지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류
이시카와 다쿠보쿠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노우에 야스시
미우라 아야코
아베 코보
다카무라 고타로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후지사와 슈헤이
시마자키 도손
나카하라 츄야
고바야시 잇사
세리자와 고지로
31위부터는 링크 참조.





나쓰메 소세키
(なつ((そう(せき|Natsume Sōseki


파일:1200px-Natsume_Soseki_photo.jpg

본명
나쓰메 긴노스케 (夏目金之助)
출생
1867년 2월 9일
무사시국 에도 우시고메 바바시타요코마치
사망
1916년 12월 9일 (향년 49세)
도쿄부 우시고메구 와세다 미나미초
직업
소설가, 수필가, 비평가, 영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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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니시키카소학교 (심상과 / 졸업)
도쿄부제1중학교 (정칙과 / 중퇴)
세이리츠학사 (수료)
제1고등중학교 예과 (졸업)
제국대학 (영문학 / 학사)[1]
문부성 문학박사[2]
활동 기간
1905년 – 1916년
묘소
도쿄도 도시마구 조시가야 묘지
부모
아버지나쓰메 고헤이 나오카쓰
어머니 나쓰메 지에
배우자
나쓰메 교코[3] (1896년 결혼)
자녀
나쓰메 후데코 (1899-1989)
나쓰메 쓰네코 (1901-1936)
나쓰메 에이코 (1903-1979)
나쓰메 아이코 (1905-1981)
아들 나쓰메 준이치 (1907-1999)
아들 나쓰메 신지 (1908-1975)
나쓰메 하나코 (1910-1911)
장르
소설하이쿠한시평론, 수필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905)


1. 개요
2. 생애
3. 영향력
4. 특징 및 성향
4.1. 주변국 국민 비하
4.2. 기타
5. 작품 목록
5.1. 중 · 장편
5.2. 단편
5.3. 그 외
6. 한국어 번역
7. 관련 인물
7.1. 목요회
8. 작가 연보
9. 여담
10. 매체에서
11.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파일:AS20191009000977_comm.jpg

吾輩は猫である。名前はまだ無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일본소설가, 영문학자, 비평가다.

일본 최초의 근대 문학가이자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로, 근현대 일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1] 1984년부터 2004년까지 1,000엔 지폐 도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20세기 초 무렵에 활동했던 작가지만 현대에 와서 지금의 시점으로 다시 읽어도 세련되고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2. 생애[편집]


1867년 2월 9일 현재의 도쿄도 신주쿠구 기쿠이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의 집안은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던 가문이었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상당히 쇠락한 상태였다. 나쓰메 가문은 가구라자카에서 다카다바바에 이르는 이 일대 11개 마치(町)를 관할하는 나누시(名主) 직을 대대로 세습해 왔다. 나누시란 막부다이묘로부터 특정 지역의 행정 ‧ 경찰 ‧ 사법 업무를 위임 ‧ 하청 받아 수행하는 직책으로서, 대체로 그 지역의 유지가 맡았다. 담당 업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권력과 함께 급여 외의 부수적인 수입도 얻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소세키의 아버지 나쓰메 고헤이 나오카쓰 또한 그 아버지로부터 나누시 직을 물려받았다.

소세키는 나쓰메가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金之助)이다. 그가 태어난 때는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한 대혼란기였다. 1867년에 대정봉환이 선포되고 1869년 이르기까지 신정부군과 막부군 간의 내전이 지속되었다.(보신전쟁) 막부가 붕괴하고 신정부가 대권을 잡은 이후에도 신정부가 체계를 잡을 때까지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막부의 녹을 먹던 나쓰메 가문은 가세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긴노스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고품점에 양자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를 데려옴으로써 그의 입양생활은 며칠 만에 끝이 났다. 낡은 가재도구를 늘어놓은 가판 옆에 밤이 늦도록 나와 있는 아기가 너무 불쌍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고헤이는 50살이 넘었고, 어머니 지에도 40살을 넘긴 나이였다. 그들에게는 그 많은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1868년, 킨노스케는 다시 시오바라 쇼노스케(塩原昌之助) 부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시오바라는 지금의 신주쿠 2초메(新宿二丁目)에서 나누시를 맡은 젊은이로, 어려서부터 나쓰메가의 일을 도우며 동시에 나쓰메가의 후원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시오바라 내외를 이어준 것도 나쓰메 고헤이였다. 시오바라 부부에게 긴노스케의 입양은 나쓰메가에 은혜를 갚는 일이었으며, 또한 대를 이을 아들을 들여 자신들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킨노스케는 시오바라가에서 시오바라 긴노스케라는 이름으로 유년을 보내게 되었다. 시오바라 부부는 킨노스케를 제멋대로 하도록 오냐오냐 키웠는데, 이는 나중에 장성한 그로부터 봉양을 받기 위해 계산된 행동이었다. 후에 소세키가 쓴 글들을 보면 어린 긴노스케도 양부모의 행동에 애정이 담겨있지 않았음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시오바라 긴노스케로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면 좋았겠지만, 그가 7살 때 사건이 터지고 만다. 쇼노스케의 불륜 행각이 들통나고 만 것이었다. 부부싸움이 이어졌고, 킨노스케는 잠시 나쓰메가에 맡겨졌다. 그는 양부모에게 들은 대로 친부모를 할아버지, 할머니라 믿고 지냈다.

킨노스케는 얼마 안 있어 다시 시오바라가로 돌아갔지만, 시오바라 부부는 그가 9살 때 이혼하고 말았다. 시오바라는 불륜 사건 때문에 호장(戶長)[2] 자리를 잃게 되었다. 결국 킨노스케는 파양되어 나쓰메가로 돌아왔다. 조부모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실은 친부모였다는 것도 이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어린 킨노스케에게 충분히 충격적인 일대 사건이었지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륜을 저질러서 자신이 맺어준 인연과 이혼한 것도 모자라, 일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찾아온 시오바라의 뻔뻔함에 고헤이는 대노하였다. 친부와 양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 속에서도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킨노스케의 호적 문제였다.

킨노스케가 파양되어 돌아왔을 때, 나쓰메가는 메이지 유신 이전의 권세를 회복한 상태였다. 나누시가 폐지된 이후에 고헤이는 제4대구(大区)의 구장(区長)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도쿄가 6개의 대구로 편성되어 있었으니 구장이란 오늘날의 구청장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직책이었던 셈이다. 그의 권세는 그의 자택에서 카구라자카의 구청에 이르는 자신의 출근길을 나쓰메자카(夏目坂)라고 이름 붙이고, 그가 사는 동네의 행정구역명을 우물(이, 井)에 국화(기쿠, 菊)가 그려진 나쓰메 가문의 문장에서 따와서 기쿠이초(喜久井町)라 명명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친부는 킨노스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대를 이어 고헤이의 노후를 책임져 줄 아들들이 있는 마당에 어린 긴노스케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시오바라가 이혼하여 긴노스케를 키울 수 없게 되었으니 그를 먹이고 재우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나쓰메가가 맡게 되었지만, 호적은 계속 시오바라가에 남겨두어 시오바라로 하여금 양육비를 부담하게 하였다. 시오바라 또한 이혼까지 한 처지였으니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줄 킨노스케를 호적에 붙들어두려고 하였다. 따라서 긴노스케의 학비며 용돈은 모두 시오바라가 부담하였다.

양가의 의견 일치로 긴노스케는 나쓰메가에 살면서도 시오바라츠 킨노스케로 남게 되었다. 친부는 긴노스케를 조금도 아들로 대해주지 않았으니, 그는 친부모와 살면서도 남의 집에 얹혀사는 꼴과 같았다. 긴노스케가 나쓰메 긴노스케로 돌아온 것은 21살 때의 일이었다. 그것도 나쓰메가의 대를 이을 장남과 차남이 연달아 결핵으로 죽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변변찮은 3남보다 학문에 재능을 보이던 긴노스케가 탐나게 된 고헤이는, 시오바라와의 교섭 끝에 과거의 양육비 조로 240엔을 지불하고 긴노스케의 호적을 돌려받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온 것이다! 하지만 킨노스케가 소세키라는 필명으로 유명해지자 시오바라는 계속해서 그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 후로도 아들―돈을 둘러싼 친부와 양부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소세키는 인격 형성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두 가문 사이에서 받은 고통으로 평생 정신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으로는 무너져 가는 자아를 붙들고 광기를 극복하기 위해 썼던 글들이 그를 문호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친부와 양부 사이에서 거래와 흥정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은, 그를 누구보다도 예민한 근대 사회의 비판자로 만들었다.

11살의 소세키는 나이에 이미 친구들과 회람 잡지를 만들어 <마사시게론>(正成論)이라는 일본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한 논문을 한문으로 써냈을 만큼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평소에도 한문, 한시를 애독, 애송했다고 알려져 있다.

총명하던 소세키는 제국대학[3]의 등용문이라 여겨지는 대학 예비문[4] 예과에 입학했다. 예비문 입학 전 소세키는 원래 도쿄부립 제1중학교를 다녔으나 한문을 배우기 위해 중학교를 중퇴하고 한문학 교육 기관인 니쇼학사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영어를 배워야 전망이 좋다'는 형의 권유에 따라 다시 영어를 가르치는 세이리쓰학사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고 대학 예비문에 진학했다.

대학 예비문 예과 시절에 복막염을 앓아 낙제한 적도 있었지만, 추스르고 심기일전하여 결국 졸업 때까지 수석을 차지했다. 이후 대학 예비문 예과를 졸업하고 본과 영문과에 진학한다. 본과 시절에 훗날 근대 하이쿠를 발전시킨 마사오카 시키[5]와 교우하면서 '소세키'라는 아호를 쓰게 되었다. 마사오카의 영향을 받아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하이쿠에 심취했다. 이어서 제국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1892년에는 분가와 동시에 본적홋카이도로 옮기고[6] 그해 5월 도쿄전문학교[7]의 강사로 출강했다.

1893년에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 강사와 중·고등학교 선생을 했으며, 이때의 경험이 그의 작품 세계에 자주 드러난다. 1896년귀족원 서기관장[8]인 나카네 시게카즈의 딸 교코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1900년 문부성국비유학생 1호가 되어 영국으로 2년간 유학을 떠난다[9]. 원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등록할 예정이었으나 포기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영문학 강의를 청강했다. 하지만 유학 비용 부족과 고독감으로 신경쇠약위궤양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영국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방대한 소설과 시를 읽다가, '무엇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애당초 인간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고민하게 된다. "소세키가 한밤중에 불도 켜지 않고 흐느껴 울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일본인 친구는 글로 남겼다. 소세키는 영국 런던 유학 중에 신경쇠약, 특히 감시공포증에 시달렸다. 또한 독일에서 온 유학생 이케다 기쿠나에[10]에게 영감을 받아 과학이란 학문에 심취하기도 하고, 홀로 영문 모를 연구에 몰입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케다가 일본 정부에 보낸 전보에 한마디로 요약되어있다. "나쓰메 미쳤다." 정부로부터 귀국하라는 연락이 왔지만, 일단 할 일은 다 마친 뒤에 귀국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얻은 신경쇠약 증상은 귀국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사실상 소설을 창작한 것 자체가 이 신경쇠약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도피 행위였다고도 한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영국 유학시절에 런던 탑을 관광하며 느꼈던 감정을 단편소설 <런던탑[11]>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영국 유학 기간 동안에는 다니던 학교도 휴직하여 연봉이 적게 나왔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빚도 많이 졌으며 양부와 유학 즈음에는 완전히 몰락한 처가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가 유학 중에 100엔, 일본에서 머물던 시절에 100엔, 귀국해서 100엔 정도의 빚이 있었다. 이 당시 목수의 하루 일당이 1엔, 임시 교사의 월급이 8엔이던 시절이다. 특히 장인인 나카네 시게카즈가 고위 관직에 있었던 터라 상당한 원조를 받았었지만,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직후에 정권이 교체되면서 물갈이를 당해서 관직을 박탈당한 데다가, 손을 댔던 주식까지 폭락하는 바람에 거액의 빚을 지게 되어서 원조가 끊기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상당 부분을 장인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나쓰메 부부의 가계도 더불어 파탄이 난 것. 결국 제1고등학교 강사,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를 겸임했고, 메이지대학에도 출강하며 벌이를 늘렸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신경쇠약을 다스리고 잔돈푼도 좀 벌어볼 목적으로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 다른 일이란 바로 문예지에 첫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한 것이다. 처음에는 1화 분량의 단편으로 기획되었으나 반응이 좋아 계속 연재하게 된다. 처음 작품을 연재한 지면은 하이쿠 잡지인 <<호토토기스[12]>>. 앞에서 언급한 <런던탑> 등 다수의 단편을 발표하고 1906년엔 단편집을 출판함과 동시에 2번째 장편 작품인 <도련님>을 <<호토토기스>>에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7년에 드디어 교직을 전부 사직[13]하고 1년에 100회 가량 연재 소설을 쓰는 조건으로 아사히 신문의 전속 작가가 된다. 1909년에는 대학 시절 친구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대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고 그 여행기인 <만한 여기저기(満韓ところどころ)>를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1911년에는 문부성에서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통보받았으나 거부했다.

1916년에 지병의 악화로 인해 188회를 마지막으로 <명암>의 연재를 중단했다. 결국 그 해 12월 9일 위궤양 악화로 인한 내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49세. 사망 익일 시신은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해부학실에서 병리학자 나가요 마타오에 의해 부검[14]되었는데 이때 적출된 뇌와 위가 기증되어서 뇌는 에탄올에 잠긴 상태로 현재까지도 도쿄대학에 계속 보관되어 있다.


3. 영향력[편집]


나쓰메 소세키는 근현대 일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여겨진다. 윤상인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는 “나쓰메 소세키는 한마디로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영웅”이라며 “그의 텍스트가 일본 국민의 의식을 만들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평했다. 그의 영향력은 거의 모든 일본 중요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모리 오가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요코미쓰 리이치, 가지이 모토지로, 무라카미 하루키, 에토 준 등이 있다. 심지어 중국 작가 루쉰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목요회를 열어 당대, 특히 다이쇼 시절 이름을 날린 작가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다.

일본의 셰익스피어, 현대 일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이름난 문학 평론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소세키론을 쓸 만큼 현대 일문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는 작가다. 언문일치를 주장한 후타바테이 시메이와 함께 현대 일본 순수 문학의 본령인 사소설이라는 체계를 최초로 대중들에게 선보였다.[15] 그는 일본의 근현대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에게는 영어영문학과의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수준의 입지로, 멀리 갈 것도 없이 국내에 많이 알려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읽어보면 이 사람이 일본 문학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이 작가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드러나는 재미있는 사례로는, 나쓰메의 소설을 연구한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론을 썼는데 시간이 흘러 몇십 년이 흐르자 그 소세키를 연구한 사람을 연구한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소세키 연구 일대기를 연구하기도 한다. 메타메타 평론 게슈탈트 붕괴 평론

쉽게 설명하면, 기존의 일본 문학은 배운 사람이나 이해하는 어려운 한문체 말투로 쓴 소설이었는데, 영국으로 유학까지 가서 영문학을 전공한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 문학에서 배운 일반 대중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쓴 언문일치체로 썼다. 그것도 일본어가 가진 리듬감을 살려서 소리내서 읽으면 더 재미있는 만담. 일본의 전통 예능 라쿠고강담 스타일을 글로 썼다. 한국으로 치면 판소리 사설체를 글로 그대로 옮겨 적은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이것은 현대 일본인이 그의 소설 원문을 읽어도 불편함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모던) 문학으로 분류하는 기점이 됐다. 일반 대중 시민이 읽는 신문에 연재했기 때문에 신문 독자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체가 필요했다. 같은 시기 신문에 연재됐던 이수일과 심순애의 원작이 된 <金色夜叉, こんじきやしゃ>(1897년~ 1902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 도 마찬가지로 일반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언문일치 소설이었다. 일본 문학사적으로는 언문일치를 이룩한 혁명적인 인물이다.

또 소세키는 한국 문단에도 큰 영향을 줬다. 소세키의 작품은 이광수[16]염상섭 등 1910년대, 20년대 한국 문단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산시로』의 산시로가 도쿄로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변화하는 일본 사회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을, 염상섭의 『만세전』에서 이인화가 조선의 현실을 묘지로 인식하게 되는 것과 비교해 보는 등의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4. 특징 및 성향[편집]


사실 소설의 대부분이 그것을 쓴 작가 본인이 강하게 투영되는 경향을 보여주기는 하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구샤미 선생이나 <도련님>의 화자는 작가와 사실상 동일 인물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로 작가의 삶과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일단 두 작품 다 화자나 중심 인물의 직업이 선생이다.[17] <도련님>의 배경은 시코쿠[18] 에히메마쓰야마시이다.

초기 단편소설인 <런던탑>은 런던 유학 시절 작가 본인의 경험을 풀어낸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이라면 에세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런던탑에서 작가 혼자 리처드 3세가 어린 왕 형제를 런던탑에 가둔 일이나 제인 그레이가 처형당한 일 등 영국사를 바탕으로 신나게 공상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런던탑이라는 작품 앞부분에 당시의 궁핍한 유학 생활 실태가 묘사되어 있다. 그의 작품이 근대화에 비판적인 것도 이때 근대화 1번지인 영국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개고생한 탓인 듯.

작품생활 전반기 작품과 후반기 작품의 분위기가 정말 크게 다르다. 초기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처럼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며 유머러스한 작품들이 많았다면 후반기엔 그의 대표작인 <마음>을 비롯하여 전부 인간의 내적 갈등을 다룬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이 다수이다. 그래서 초기 작품을 읽고 이어서 후기 작품을 읽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읽으면 기분이 다소 묘하다. 그 이유는, 전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인 <문(門)>을 집필하던 1910년 6월, 위궤양으로 입원. 8월에 이즈의 슈젠지 온천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 800그램의 피를 토하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슈젠지의 중병(修善寺の大患)'을 겪는다. 의사의 기록을 보면 약 30분간 죽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의 죽음의 체험과 병상에서의 생활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준다. 전기에는 작품 속에서 죽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후기의 작품에는 병고에 시달리는 인물과 자살하거나 죽는 사람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후기 작품에선 대체로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그 관계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 각 개인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본격 아침 드라마 연애 소설 작가로 거듭난 것인가 싶겠지만, 사실 대놓고 연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끓어오르는 연애 감정과 배덕감 등으로 고뇌하는 개인의 모습을 조망한다.

그의 탐미주의적 작품에서 대체로 인텔리, 지식인 출신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당연히 그의 출신 탓이겠지만. 연구자들은 소세키를 통해 근대 지식인 유형을 연구하기도 한다. 1908년에 연재한 <산시로>, 1909년에 연재한 <그 후>, 1910년에 연재한 <문>의 세 작품들은 연재 순서뿐만 아니라 내용, 작중 배경이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어서 소세키 연구자들 중엔 이 세 작품을 일종의 3연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제목을 밋밋하게 짓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 제목이 장황하지 않고 간소하며, 작품 내용과도 그렇게까지 크게 관련이 없는 것을 제목으로 삼곤 한다. 심지어 이듬해 춘분까지 연재한다고 <춘분 무렵까지>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도 있다.

소세키의 문학관은 '좌국사한'(춘추좌씨전 국어 사기 한서)에서 터득됐다고 한다. 웅숭 깊은 동양 고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근대적 불안과 고뇌'를 깊게 응시했다. 그는 영국 유학을 갔는데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이보다 진지했던 적은 없다'라며 영국 인상을 작품 '런던 소식'에 적어 놓았다. 그 충격이 근대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어진 것이다.

소세키의 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독서가 취미가 아닌 사람도 이해가 잘될 정도로 술술 읽힌다는 점이다. 또 그가 사망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전혀 세월이 느껴지지 않고 현대 문학 같다는 평도 많다. 소설가 고바야시 교지(小林恭二)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전혀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가히 기적이다."라고 평했다. 일본 문학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소세키만큼 다양한 장르와 문체를 구사한 작가는 일본뿐 아니라 외국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4.1. 주변국 국민 비하[편집]


제국주의 시대의 인물이지만 딱히 작품이나 글 등에서 제국주의나 인종주의 등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편. 다만 <만주와 한국 여기저기(滿韓ところどころ)>에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들이 단편적으로 등장하기는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고 보기에는 부족하지만, 주변 나라들을 그가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중략) 인력거는 일본인이 발명한 것이지만 끄는 사람이 중국인이나 조선인인 경우에는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그들은 어차피 남이 만든 것이라는 생각으로 털끝만큼도 인력거에 존경을 표하는 방식으로 끌지 않는다. 고려의 고적지를 보러 갔을 때는 엉덩이가 방석 위에 닿을 틈이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결국 조선인의 머리를 탁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험한 대우를 받았다. 끄는 방법에 기술이 없어 단지 무턱대고 달리기만 하면 능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에서 완전히 조선식이었다. (하략)

<만주와 한국 여기저기(1909), 서은혜 외 <일본문학의 흐름(2007)>에서 번역문 재인용


승객의 불편을 헤아리지 않고 무작정 끌고 달리는 점을 문제삼아, 인력거를 끈다는 행위에 어떠한 존경도 없이 텅 비어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차별적 언행이 꽤 발견된다고 위 글을 번역 출간한 김유영 동덕여대 일본어학과 조교수가 지적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반전주의와 천황제 비판을 보이면서도 일본인들은 자랑스럽다, 영국인들은 당당하다, 러시아 건축물은 훌륭하다 하면서 피식민지 하층민은 더럽다, 불쾌하다 하여 기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인터뷰도 했다.#

<만주와 한국 여행기>의 다른 내용을 기사에서 언급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안에 늘어선 대부분은 중국인, 인도인 쿨리였다. 한 명도 더러운데 둘 이상이 모이니 더욱 볼꼴사나웠으며 거북하다. 인력거도 모두 저 소란스러운 패거리들이 끌었고 내지(일본)보다 느낌이 안좋다.(24쪽부터)" 또한 일본 소설 <암살>에서 인용한, 나츠메 본인이 '만주일일신문'에 기고한 <한만소감-하> 역시 이런 시각이 보인다. 요약하자면 "일본인으로 태어난 것은 다행이다. 일본인이 제일 불쌍한 줄 알았는데 만주, 조선에 있다 온 동포가 문명 사업에서 활약하고 우월한 존재가 된 것을 보면 일본인도 믿음직하다. 난 중국인이나 조선인으로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그들 앞에서 승자의 패기를 가지고 일하는 동포는 운명의 총아이다."라는 내용.


4.2. 기타[편집]


말년의 작품인 <점두록>에서는 반군국주의적 작품 성향을 보였는데, 1차 세계대전에 주목하여 전쟁이 부른 참상을 지적했다. "저 탄환과 저 화약과 저 독가스와 그리고 저 육탄과 선혈"이라 묘사하며 전쟁에 항변하는 모습을 보였고, 트라이치케를 예로 들어 독일 군국주의가 어디까지 성장하여 통일 독일까지 이루어 내었는지를 상세하게 살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군국주의자와는 다소 거리가 먼, 반군국주의자, 평화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19]

소설의 단어량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소세키 전집을 번역한 번역가 송태욱은 “소세키 번역은 다른 책보다 3배나 더 걸렸죠. 뒤로 가도 2배는 더 걸린 것 같아요. 단어량이 (일본) 현대 작가에 견줘 10배 이상 많아요. 한자 가운데 유일한 용례가 소세키 것인 경우도 종종 있어요. 미시마 유키오의 단어량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소세키에는 미치지 못하죠.”라고 말했다.#

또 소세키는 평소 한문과 한시를 애송했고 조예 또한 깊었다. 한자 조어 역시 많은데 신진대사(新陳代謝) 등의 한자를 조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출처가 불명이다. 무의식(無意識), 가치(價値) 등은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졌거나 뜻이 덧붙여진 일본식 한자어인 것은 맞으나, 소세키의 조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저회취미(低徊趣味)'라는 고유한 한자어도 소세키의 조어다. 그 밖에 아테지(当て字)라고 하는, 고유어, 서구 외래어 등 본래 한자어가 아닌 낱말을 그럴듯하게 한자로 적는 방식도 애용했는데 현재에도 쓰이는 '낭만(浪漫)'이 그런 사례이다. 프랑스어 '로망'을 제대로 옮길 말이 없어서 '낭만주의'라는 한자로 음차하여 옮겼다고 스스로 밝혔다. 浪漫은 일본어 발음으로는 '로만'이다. 일본어의 도니카쿠(兎に角: 어쨌든), 다쿠산(沢山: 많이, 잔뜩) 등 소세키가 사용한 아테지 중 일부는 지금도 쓰이고, 한자어 역시 쓰이는 것이 많다.


5. 작품 목록[편집]



5.1. 중 · 장편[편집]


제목
발간 연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吾輩は猫である
1905년
도련님
坊っちゃん
1906년
풀베개
草枕
1906년
태풍
野分
1907년
이백십일[20]
二百十日
1907년
우미인초
虞美人草
1908년
갱부
坑夫
1908년
산시로
三四郎
1908년
그 후
それから
1910년


1911년
춘분 지나고까지
彼岸過迄
1912년
행인
行人
1914년
마음
こゝろ
1914년
한눈팔기
道草
1915년
명암
明暗
1916년


5.2. 단편[편집]


제목
발간 연도
런던 탑
倫敦塔
1905년
환영의 방패
幻影の盾
1905년
환청에 들리는 거문고 소리
琴のそら音
1905년
하룻밤
一夜
1905년
북망행
薤露行
1905년
취미의 유전
趣味の遺伝
1906년
문조
文鳥
1908년
열흘 밤의 꿈
夢十夜
1908년
긴 봄날의 소품
永日小品
1909년


5.3. 그 외[편집]


제목
발간 연도
종군행[*신체시 ]
従軍行
1904년
칼라일 박물관[*기행 ]
カーライル博物館
1905년
문학론[*평론 ]
文学論
1907년
문학평론[*평론 ]
文学評論
1909년
만한 이곳저곳[*기행 ]
満韓ところどころ,
1909년
생각해 내는 일 따위[*수필 ]
思ひ出すことなど
1910년
현대 일본의 개화[*강연 ]
現代日本の開化
1911년
나의 개인주의[*강연 ]
私の個人主義
1914년
유리문 안에서[*수필 ]
硝子戸の中
1915년
소세키 하이쿠집[*시집 ]
漱石俳句集
1917년
소세키 시집 인보부[*시집 ]
漱石詩集 印譜附
1919년


6. 한국어 번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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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nnamed-7.jpg

현암사에서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서 나쓰메 소세키 장편소설 전집을 2013년 9월부터 2016년 6월까지 4차에 걸쳐 완간했다. 1차분으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풀베개』, 『태풍』, 2차분으로 『우미인초』, 『갱부』, 『산시로』, 『그 후』, 3차분으로 『문』, 『춘분 지나고까지』, 『행인』, 4차분으로 『마음』, 『한눈팔기』, 『명암』이 출간되었다. 노재명이 옮긴 『태풍』, 『그 후』를 제외하고 전부 송태욱이 옮겼다. 디자인이 상당히 고급스러워서 평이 상당히 좋다.

노재명은 하늘연못 출판사에서 출간한 소세키 중단편 전집 번역때도 평이 안좋았던 역자로 송태욱이 전부 번역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의견이 많다.

송태욱이 번역한 작품에 있는 '번역을 마치고' 란 명칭인 역자 후기에 쓰인 문체가 번역가가 아닌 등장인물이 후기를 남긴 듯한 느낌을 줘서 재미있다. 다만 노재명이 번역한 작품에는 역자 후기가 없다. 예를 들자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는 '진지하게 읽지 마시라. 그랬다가는 메이테이 선생에게 늘 당하고 마는 구샤미 선생 꼴이 나기 십상이니. 그냥 힘 빼고 즐기시라. 코믹소설, 뭐 그런 거라 생각하시라. 이러저러한 걸 풍자한 것 아니겠나, 하며 의미 맞추기에 골머리를 앓다가는 고양이한테도 무시당할 터. 그러다 보면 웃어넘기지만은 못할 여운이 묵직하게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하략)'라고 썼다. 『도련님』의 역자 후기 끝에서는 '이 무엄한 것들 같으니라고.'라고 썼다. 이 진지하지 못하고 무엄한 역자 같으니라고


7. 관련 인물[편집]



7.1. 목요회[편집]


목요회(木曜会)는 매주 목요일에 나쓰메 소세키의 자택에서 열린 모임이다. 당대의 소설가나 학자가 참가하였으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회합을 가졌다고 한다. 이들은 다이쇼 시대의 대활약을 했고 이들에 의해 소세키의 영향은 어마어마한 문화 영역에 이르러, 다이쇼 후기부터 쇼와 초기의 지식인 사이에서 표준적인 가치관을 형성한다. 일본의 문학 교수 혼다 아키라는 이걸 보고 소세키 산맥이라고 평을 했다. 소세키는 자신의 후계자를 기를 목적으로 모임을 열지는 않았다. 다만, 소세키와의 교류를 통해 소세키의 식견을 듣고 감탄한 인물들이 소세키의 문하생이 되었다. 목요회는 소세키 입장에서 세속의 유행이나 희한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마음 터놓고 애기할 수 있는 인물들과 허심탄회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소세키의 집에는 고미야마 도요타카나 스즈키 미에키치, 모리타 소헤이 등이 출입했었지만,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손님이 증가해 일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기 때문에, 1906년 10월 중순경, 스즈키 미에키치의 제안에 의해 면회일을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이후로 정했다. 이 날은 누구라도 자유롭게 와도 되는 것으로 했기 때문에, 과거의 제자 이외의 학생이나 그 외의 인물도 많이 오게 되었다. 소세키의 서재는, 소세키가 그들과 여러 가지 화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논의하는 살롱과 같은 장소가 되어, 이윽고 '목요회'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이하는 목요회에 참가한 대표적인 인물들.

  • 다다타카 이케자키 (1891~1949) : 평론가이자 정치가. 친구인 스즈키 미에키치를 개입시켜 소세키와 만나, 소석에게 있어서 첫 전기 「평전 나쓰메 소세키」를 썼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892~1927) : 소설가. '단편 소설 「코」가 소세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소세키가 아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주요 작품으로 지옥변이나 톱니바퀴 등이 있다.
  • 아베 지로 (1883~1952) : 철학자, 평론가. 자전적 소설 산타로의 일기는 다이쇼 시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후 인격주의라는 사상을 제창하였다. 1923년부터는 길게 토호쿠 제국대학(토호쿠 대학)의 교원을 맡았다.
  • 아베 요시시케 (1883~1966) : 철학자, 평론가, 교육자. 제일 고등학교에서 소세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모교 교장을 지냈으며, 전후 문부대신, 가쿠슈인대학 원장을 지냈다.
  • 이와나미 시게오 (1881~1946) : 이와나미 서점 창업자. 이와나미 서점을 개업해, 「마음」을 시작으로 하는 소세키의 작품을 많이 출판했다.
  • 우치타 하켄 (1889~1971) : 소설가, 수필가. 소세키 전집의 교정을 맡았다. 작가로서의 대표작으로 「명도」나 「위작 오배는 고양이다」 등이 있다.
  • 기쿠치 간 (1888~1948) : 소설가, 평론가. 아쿠타가와의 작품을 재평가했다. 그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 구메 마사오 (1891~1952) : 소설가, 극작가. 아쿠타가와와 함께 작가로서 평가되었다. 소세키 사후에는 희곡이나 대중용 소설을 많이 썼다.
  • 고미야 도요타카 (1884~1966) : 독문학자, 평론가. 소세키의 전집 편집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 「나쓰메소세키」등의 평전을 썼다.아베 지로의 초대를 받아 도호쿠 제국대학(도호쿠대학)에서 정년까지 근무했고, 그 다음은 가쿠슈인대학에서 가르쳤다.
  • 스즈키 미에키치 (1882~1936) : 소설가, 동화 작가. 소세키에게 소설을 평가받지만, 소세키 사후 동화 작가로서 활약해, 잡지 「붉은 새」를 편집했다.
  • 다카하마 교시 (1874~1959) : 하이쿠, 소설가.  소세키의 친구 마사오카 시키에게 하이쿠를 배웠다. 소세키에게 소설 집필을 권유했고 소세키는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게 된다.
  • 쓰다 세이후 (1880~1978) : 화가. 소세키의 책 「한눈팔기」나 「명암」 등 소세키의 책의 표지의 그림을 그렸다. 또 소세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 데라다 도라히코 (1878~1935): 물리학자, 수필가. 소세키의 교사시절 제5고등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광범위한 물리학 연구를 했지만 요시무라 후유히코의 이름으로 많은 수필을 썼다.
  • 구메 마사오 (1891~1952) : 소설가. 하이쿠 짓기에 능숙했으며 소세키 말년에 아꼈던 인물 중 하나다.
  • 나카 간스케 (1885~1965): 소설가, 시인, 수필가. 제일 고등학교시절 소세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 소설 「은수저」가 소세키에게 높게 평가되었다.
  • 노가미 도요이치로 (1883~1950) : 노가쿠 연구자, 영문학자. 제일 고등학교에서 소세키에게 배웠다.영문학에서는 특히 연극 연구를 잘했고, 나중에는 노가쿠 연구로 이름을 날리고, 교원을 지낸 호세이 대학에는 그 이름을 딴 노가쿠 연구소가 있다.아내는 소설가 노가미 야요이코다.
  • 노무라 덴시 (1880~1948) : 교육자. 소세키의 제자로 학교 교사직을 맡은 후, 나라현립 도서관의 관장이 되었다. 한편으로 고향 가고시마의 방언 연구에도 힘썼다.
  • 하야시바라 고조 (1887~1975) : 영문학자, 하이진. 소세키의 제자로 쿠메 마사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소세키에게 소개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구작에도 열심이었다.
  • 마쓰오카 유즈루 (1891~1969) : 소설가. 소세키의 장녀 후데코와 결혼했으므로 소세키에게는 맏사위가 된다. 소세키의 아내이자 자신의 장모인 쿄코의 담화 구술을 받아서 편집해 「소세키의 추억」을 간행했다.
  • 마쓰네 도요조 (1878~1964) : 하이진. 에히메현 심상중학교에서 소세키에게 배운다. 상경 후, 소세키의 소개로 마사오카 도키와 만나, 구작을 시작해 잡지 「시부카키」를 창간했다.
  • 소헤이 모리타 (1881~1949): 소설가. 소세키의 권유로 히라쓰카 라이초의 연애를 「매연」이라고 하는 작품으로서 발표하고, 소세키가 아사히 신문의 지면에 만든 「아사히 문예란」에서는 편집을 담당했다.
  • 와쓰지 데쓰로 (1889~1960): 철학자, 문화사가, 윤리학자.소세키에게 배운 것은 없었지만 소세키를 경애하며 사귀게 되었다.『고사순례』 등 문화사 방면의 저작도 많다. 1934년부터는 도쿄 대학 교수로서 정년까지 근무했다.


8. 작가 연보[편집]


연도
사건
1867년
1월 5일, 에도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 초[21]에서 아버지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 어머니 나쓰메 지에의 5남 긴노스케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나쓰메 가문은 대대로 명주였으나 당시 가운이 쇠퇴해 있었기 때문에 생후 얼마 되지 않아 요츠야의 고기구이점에 맡겨졌지만, 곧 집으로 돌아온다.
1868년
11월 신주쿠의 명주 시오바라 쇼노스케의 양자가 되어, 시오바라 성을 자칭한다.
1869년
2월 양아버지 쇼노스케, 아사쿠사의 소노스케와 함께 아사쿠사 미마초로 이사간다.
1870년
종두가 원인이 되어 포창을 앓고 얼굴에 반흔이 남는다. 첫 번째 여름의 도깨비 기와라는 세시풍 노래로 만들어질 정도로 마마 자국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22]
1874년
양아버지 쇼노스케와 양어머니 야스의 사이가 멀어진다. 그래서 한때 키쿠이쵸의 생가에 잠시 머물렀다. 아사쿠사 도다 학교 하등 초등학교 제8급[23]에 입학한다.
1876년
양어머니가 시오바라 가문에서 파양된다. 가문에서 제적된 채 양모와 함께 생가로 옮겼다. 이치가야나기초 이치가야 학교[24]로 전학 간다.
1878년
2월, 회람 잡지에 '정성론'을 쓰다. 10월, 긴카 초등학교[25]·소학심상과 2급 후기를 졸업한다.
1879년
도쿄부 제일중학교 정칙과[26] 제7급에 입학한다
1881년
1월, 친어머니 지에가 사망한다. 부립 일중을 중퇴하고 사립 후타마쓰 학교[27]로 전학간다.
1883년
9월, 간다 스루가대의 성립 학사에 입학한다.
1884년
9월, 제일고등중학교[28] 예과 입학 동급생으로는 나카무라 고로, 하카야이치, 마사키 나오히코, 하시모토 사오고로 등이 있었다.
1885년
나카무라 고로, 하시모토 사고로 등 약 10명과 사루가쿠쵸의 스에토미야에서 하숙한다.
1886년
7월, 복막염으로 낙제한다. 이 낙제가 전환점이 되어, 나중에 졸업할 때까지 수석을 꿰찬다.. 나카무라 고레코와 혼조 코토 의숙의 교사가 되어, 학원의 기숙사로 이사한다.
1887년
3월 맏형 다이스케, 6월에 둘째형 에이노스케가 폐병으로 사망한다. 소세키는 급성 트라코마를 앓아 집으로 돌아간다. 여름에는 처음으로 후지산을 등산한다.
1888년
1월, 시오바라 가문에서 복적되어, 성이 나쓰메로 돌아온다. 7월, 제일 고등 중학교 예과를 졸업. 9월 영문학 전공을 결심해 본과 일부에 입학한다.
1889년
이때부터 마사오카 시키와 친해진다. 5월, 시키의 문집 '칠초집'의 비평을 쓰고,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1890년
7월, 제일고등중학교 본과를 졸업한다. 제국대학[29] 문과대학 영문과의 입학한다. 뛰어난 성적으로 문부성의 대비생(장학생)이 되다.
1891년
7월, 뛰어난 성적으로 특대생이 된다. 이떄, 두 번째로 후지산에 등산한다. 12월 가마쿠라 시대의 수필 '방장기'를 영역한다.
1892년
4월, 본적을 홋카이도 고시쿠니 이와나이군 후키아게마치에 이적하다.[30] 5월, 도쿄전문학교[31] 강사가 된다.
1893년
7월, 제국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대학원에 입학한다. 10월, 도쿄고등사범학교[32]의 영어교사가 된다. 고등사범의 교장은 강도관 창설자로 유명한 가노 지고로라는 유도의 대가였다.
1894년
2월, 결핵 징후가 있어 요양에 힘쓴다.
1895년
4월, 마쓰야마 중학교[33]에 부임한다. 10월, 귀족원 서기관장 나카네 시게이치의 장녀 나카네 교코와 맞선을 보고 약혼을 한다.
1896년
4월, 쿠마모토현의 제5고등학교 강사가 된다. 6월, 나카네 교코와 결혼한다. 7월, 교수가 된다.
1897년
6월, 친아버지 나쓰메 나오카쓰가 사망한다.
1898년
10월, 하이쿠 결사 '자명음사'의 주재가 된다.
1899년
5월, 장녀 나쓰메 후데코가 태어난다.
1900년
5월, 영국으로 유학을 간다. 도중에 파리 엑스포를 방문한다.
1901년
1월, 딸 나쓰메 쓰네코가 태어난다.
1903년
4월, 제일고등학교 강사가 되며,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를 겸임한다. 9월, 딸 나쓰메 에이코가 태어난다. 이때부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904년
4월, 메이지대학 강사를 겸임한다.
1905년
1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데뷔작인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하이쿠잡지 '두견'에 연재한다. 12월, 딸 나쓰메 아이코가 태어난다.
1906년
4월, 소설 '도련님'을 하이쿠잡지 '두견'에 발표한다. 또 이 해 잡지 '신소설'에 소설 풀베개를 발표한다.
1907년
1월, 소설 '태풍'을 하이쿠잡지 '두견'에 발표한다. 4월, 모든 교직을 사임하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한다. 이때부터 직업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6월, 장남 나쓰메 준이치가 태어난다. 또 소설 '우미인초'를 아사히 신문에 8월까지 연재한다.
1908년
1월부터 4월까지 소설 '갱부'를, 6월부터 7월까지 소설 '문조'를, 7월부터 8월까지 소설 '열흘 밤의 꿈'을, 9월부터 12월까지 '산시로'를 아사히 신문에서 연재한다. 12월, 아들 나쓰메 신지가 태어난다.
1909년
1월부터 3월까지 소설 '긴 봄날의 소품'을 아사히 신문에서 연재한다. 3월에는 양아버지로부터 돈을 받지 못했고 이러한 일은 11월까지 계속 되었다.
1910년
3월부터 6월까지 소설 '문'을 아사히 신문에서 연재한다. 3월, 막냐 나쓰메 하나코가 태어난다. 6월, 위궤양 때문에 우치사이와이초의 나가요 위장병원에 입원한다. 8월, 요양을 위해 슈젠지 온천으로 간다. 8월 24일 밤에는, 구토가  심해지고 일시 위독 상태에 빠진다. 10월, 나가요 병원에 재입원한다.
1911년
1월부터 4월까지 소설 '춘분 지날 때까지'를 아사히 신문에서 연재한다. 12월부터 다음해 11월까지 소설 '행인'을 아사히 신문에서 연재한다. 11월 29일 막내 하나코가 원인 불명으로 돌연사한다. 소세키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이때의 충격은 소설 '춘분 지날 때까지'에 영향을 준다. 이 사건은 훗날 소세키의 사체 해부의 원인이 된다.
1913년
1월 심한 노이로제가 발생했고 3월에는 위궤양이 재발한다. 5월 하순까지 자택에서 앓아 누웠다.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본적을 옮긴다.
1914년
4월부터 8월까지 소설 '마음'을 아사히 신문에서 연재한다. 11월, 본인의 수필 '나의 개인주의'에 대해서 가쿠슈인보인회에서 강연한다.
1915년
6월부터 9월까지 소설 '한눈팔기'를 아사히 신문에서 연재한다. 12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구메 마사오가 그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 당시에는 류머티즘으로 고생한다.
1916년
1월, 류머티즘 치료를 위해 요양한다. 5월부터 12월까지 소설 '명암'을 아사히신문에서 연재한다. 
12월 9일, 오후 7시 전, 위궤양으로 사망한다.


9.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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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984
1984~2004
2004~

  •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 1천 엔 지폐의 모델이었다. 이전까지 일본은 패망 이후 1963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1천 엔 지폐의 모델로 사용했으나 주변국들이 맹렬히 반발했다. 그런 반발을 무시하고 사용했지만 1984년 1천 엔 지폐의 모델을 이토 히로부미에서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하여 2004년 말까지 사용했다. 2004년 11월부터는 모델을 노구치 히데요로 바꾸었다. 문학계에서는 5천 엔에 히구치 이치요.

  • 그의 필명 소세키라는 말은 한자로는 돌로 입을 헹군다는 의미이다. 진서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본래 안빈낙도의 생활을 의미하는 '돌을 베고 시냇물로 입을 헹군다.'는 표현을 어떤 사람이 잘못 인용하여 '시냇물을 베고 돌로 입을 헹군다.'고 하여 남들이 비웃자, '시냇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것은 더러운 말을 귀에서 씻는다는 의미이고, 돌로 입을 헹군다는 것은 속세의 일을 버린다.'는 비유라고 우겼다는 데서 나온 말로, 말장난을 하거나 무리하게 억지를 쓰는 것을 일컫는다. 일종의 말장난을 아호로 삼은 것.

  • 일본에서 제인 오스틴을 최초로 높게 평가한 인물이다. 소세키의 1907년 저서 『문학론』에서 "오스틴을 감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도 현실주의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 당연하겠지만 당대 일본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 1909년에는 당대 손꼽히는 잡지 ‘태양’의 작가 투표에서 1등을 차지한 인물이기도 했다.


  • 영어 문장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月が綺麗ですね)라고 번역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문서 참고.

  • 장남 나쓰메 준이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도쿄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악장을 지냈다.

  • 예민한 신경 탓에 신경성 위장병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식탐이 많아서 배가 아픈 와중에도 꾸역꾸역 입 안에 먹을 것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위장병으로 입원했을 때 배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배 위에 올려놓은 곤약을 떼어먹었을 정도.

  • 달콤한 음식을 즐겨서 양갱을 좋아했으며, 딸기 을 외국에서 주문해서 한 달에 8캔을 먹었다고 한다. 특히 집에는 서양 문물인 아이스크림 제조기를 구비하였을 정도.[34] 공교롭게도 동시대의 대문호인 모리 오가이도 그와 비슷하게 단것을 좋아했다. 단팥을 좋아해 단팥빵을 즐겨먹었다고.

  •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꽤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나쓰메 소세키가 광장을 걷다가 한 남자와 부딪쳐서 책과 서류를 쏟았다. 그것을 보고 그 남자와 젊은 육군 소위가 책과 서류를 주워주는데, 이때 젊은 육군 소위는 훗날 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도조 히데키였고, 부딪힌 남자는 안중근이었다는 것이다...인데 명확한 출처가 없고, 도조 히데키가 소위였던 기간이 1905년 4월~1907년 12월인데 이 당시 도조는 소위 임관 후 러일전쟁에 참전하고 황해도에 주둔한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고, 안중근은 상하이에 다녀온 후 고향 황해도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35] 반면 나쓰메 소세키는 교직 때문에 계속 일본에 있었고, 만주와 조선을 여행 온 것은 그 이후인 1909년도의 일이다. 해당 일화는 나쓰메 소세키를 다룬 만화 도련님의 시대에 등장하기 때문에 널리 퍼졌지만, 사실이 아니거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소세키가 아닌 다른 사람일 확률이 높다. 해당 책 기준으로는 해당 시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고증오류를 감수하고 창작했다는 평이 많은 듯.

  •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소세키의 풀베개를 좋아했다. 말년에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일부분을 낭독 한 바있다.

  • 현실적이고 이지적인 지식인의 이미지가 있지만 의외로 괴담을 무서워하는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잠자기 전에 괴담 비슷한 이야기만 꺼내도 잠을 못 자니까 그만두라며 질색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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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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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수필, 평론집


  • 그의 출생지는 현재의 도쿄 신주쿠구 와세다에 있는데, 요시노야가 되어 있었다가 현재는 야요이켄이 되어 있다.(...) 그래도 식당 앞에 비석이 하나 남아 있기는 하다. 파칭코가 되어 있는 이케다야 등과 함께 일본 내에서 미비한 문화재 보존을 한탄할 때 꼭 나오는 사례 중 하나.


10. 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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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현대 중문학의 아버지가 루쉰이라면 일본에는 나쓰메 소세키가 있다는 식으로 나란히 세워지곤 한다. 실제로 둘은 동시대를 살아갔다. 인상도 묘하게 닮았다.[2] 7~8개의 마치를 엮은 소구小区의 행정 책임자.[3] 도쿄대학이 도쿄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1897년 교토제국대학의 개교로 복수의 제국대학이 생겨 제국대학 간 구별이 필요해져서 바꾼 이후부터다. 그 전에는 그냥 제국대학이었고, 최초 개교했을 때에는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종전 후 1947년, 식민지의 경성제대와 다이호쿠제대를 제외한 본토의 7대 제국대학들의 간판에서 '제국'이 일괄 삭제되어 지금의 도쿄대학을 신제 도쿄대학, 제국대학 이전의 도쿄대학을 구제 도쿄대학으로 구별해 부른다.[4]도쿄대학 교양학부. 소세키가 수학하던 중 제1고등중학으로 분리되었다가 이후 제1고등학교로 개명된다. 제1고등학교는 1949년 신학제 개편 때 신제 도쿄대학으로 재통합되었다.[5] 시바 료타로언덕 위의 구름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소세키의 첫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마사오카의 필명인 시키(두견새)에서 따온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에 연재했다.[6] 병역기피설이 유력하다. 당시 개척을 위해 홋카이도로 본적을 옮기면 징집이 유예되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징집 면제를 내리는 것에 가까웠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홋카이도 개척을 촉진하기 위해서 홋카이도 거주민에게 병역 면제를 내렸는데, 이 규정은 1898년에 폐지되었다.[7] 도쿄전문학교가 와세다대학으로 승격된 것은 1920년이다. 이날 사숙인 게이오기주쿠(경응의숙)도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동시 승격되었다. 그래서 소케이는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이 되었고, 이는 소케이가 현재까지도 일본 양대 명문사학으로 굳건히 서 있는 기반이 되었다.[8] 귀족원의장 비서실장 겸 대변인에 상응하는 직책이다. 내각총리대신 비서실장 겸 대변인인 내각관방장관의 전신도 내각서기관장이었다.[9] 소세키는 자신의 에세이 문학론에서 '영국 유학은 관(국가)의 명령이었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더라면 절대로 안 갔다. 2년 동안 굉장히 고생했다'는 내용을 적은 바 있다.[10] MSG의 원료인 글루타민산을 발견한 화학자[11] 倫敦等. 프랑스-불란서와 같은 맥락. 페르소나 3의 시험 문제 답안으로 '론돈탑'이 나온 바 있다만 사실 한국 한자음을 따르자면 윤돈탑이라 읽는 것이 맞는다.[12] 호토토기스는 우리말로 '두견새'를 뜻한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이라며 성격을 비교한 일화에서 언급된 바로 그 노부나가에게 끔살당하는 새가 호토토기스이다.[13] 소세키의 연봉은 1,500엔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걸 접고 작가로 뛰어든 것이다.[14] 원인 불명 돌연사하여 막내 하나코가 부검을 요청했다.[15] 시메이의 작품 중 <뜬 구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현대 일본어로 정리한 판본이 아니면 현대인이 읽기에는 다소 어색하여 읽는 데 품이 조금 든다.[16] 이광수가 도쿄를 유학하던 중에 쓴 일기에서 그가 소세키의 『산시로』를 읽었다는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평론 「문학이란 하(何)오」에서도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적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17] 다만 <도련님>의 화자는 이과 출신의 수학 교사이다. 그래서 그런지 수업 장면이 별로 안 나온다.[18] 소세키는 마쓰야마와 구마모토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배경에도 도고 온천이 나오는데 이 온천은 지금도 있다. 마쓰야마에는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도련님 경단"이라는 군것질거리를 파는데 맛은 그냥 경단.[19] 위에서 그가 중국인이나 한국인에 비해서 일본인이 더 우월하다는 식의 서술을 한 것과 비교해 보면 뭔가 모순되어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 나쓰메 소세키와 동시대 인물 중에 백인 우월주의자면서 동시에 반군국주의자였던 우드로 윌슨같은 사례도 있으니, 이상하게 볼 것은 없다. 다만, 소세키에 대해서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에 불과할 뿐, 진짜 선민의식을 가진 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20] 등산 소설이다. 한국에는 단권으로는 없고 단편집 '긴 봄날의 소품'에 수록됐다.[21] 현 도쿄도 신주쿠구 키쿠이마치[22] 이 흉터 때문에 소세키는 외모 컴플렉스에 빠진다.[23] 현 타이토 구립 쿠라마에 초등학교[24] 현 신주쿠 구립 아이치 초등학교[25] 현 치요다구립 오차노미즈 초등학교[26]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의 전신[27] 현 후타마쓰 학교[28] (구제)도쿄대학 예비문의 후신으로, 후에 제일고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된다.[29] 후의 도쿄제국대학. 1897년에 교토제국대학이 개교하여 제국대학 간 구별을 위해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된다.[30] 징병제를 피하기 위해서 이적했다는 설이 주류다. 일본 제국에서는 특정 지역에 거주하면 병역이 면제되는 규정도 있었는데, 홋카이도, 오키나와, 오가사와라 등은 징병제 시행 초기에는 징병을 시행하지 않아 홋카이도, 오키나와, 오가사와라 거주자들은 징병이 면제되었다.[31]와세다대학[32]쓰쿠바대학[33] 에히메현립 마쓰야마히가시 고등학교의 전신[34] 타임보칸 24 시즌 2에서 나온 내용.[35]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인 《도련님의 시대》 1권에 나오는 일화이나, 이 만화에서는 소설적 재미를 위해 각색한 일화가 많기 때문에 실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고 전제한다면 안중근이 일본에 갔다는 기록은 없기에 최소 일본에서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만주나 조선에서 있었을 것이다.
키리타니 켄타
하세가와 히로키















11.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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