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

최근 편집일시 :


파일:이집트 국기.svg
{{{#!wiki style="display:inline-flex; vertical-align:middle; text-align: left"
이집트
관련 문서

<^|1><height=34><color=#000,#fff><bgcolor=#FFF,#1f2023>
[ 펼치기 · 접기 ]

}}}


나일강
النيل | Nile River


나일강의 지형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7px-River_Nile_map.svg.png

나일강 부근의 행정구역도
1. 소개
2. 길이
3. 역사
4. 인근 국가 관계
5. 그 외
6. 관련 문서



1. 소개[편집]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 여러 나라에 걸쳐 위치한 거대한 강. 유역 면적은 3,400,000km².

아프리카 대륙을 반쯤 종단하고 있으며, 백나일강부룬디의 산악 지대에서 발원해 르완다탄자니아 서북부를 거쳐 빅토리아호로 흘러들고, 우간다남수단에 이른다. 과거에는 탕가니카호에서 시작된다는 설도 있었다. 청나일강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하는데, 이 두 지류가 수단 공화국의 수도 하르툼에서 합쳐지며, 이후 사하라 사막을 지나 이집트를 지나고 최종적으로 지중해로 흘러나간다.


2. 길이[편집]


일반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으로 여겨지고 있다. 길이는 기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약 6,650km이다. 대개 어린이용 과학 서적에 나오는 내용은 1위가 나일강, 2위가 미시시피강, 3위가 아마존강으로 나온다.

다만 미시시피강의 경우 본류인 미시시피강 자체는 2위는커녕 10위권 안에 드네 마네 하는 수준이고, 지류인 미주리강의 발원지인 로키산맥의 분수령[1]에서 뉴올리언스의 삼각주까지 잰 거리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마존강을 세계 2위로 쳐주기도 하는 듯. 참고로 아마존강은 여러 조사 기록의 평균이 6,296km인데, 최장 기록은 2008년 브라질 국가지리통계국(IBGE)의 위성 사진 촬영에 의한 것으로, 나일강은 6,853km고, 아마존강은 그보다 139km가 더 긴 6,992km라고 한다. 아무래도 아마존강은 정글 지대이다 보니 수원을 명확하기 짚기 어렵다는 점이 반영된 듯하다. 다만 본류의 길이에서 논란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유량이나 지류의 총 길이, 유역 면적까지 포함시키면 강이 훨씬 복합적으로 형성된 아마존강이 훨씬 거대한 강이다. 이쪽은 애초에 순상지 사이의 해협이 강이 된 것이다.


3. 역사[편집]



이름인 '나일'은 '강'이라는 뜻의 고대 셈어 나헬(nahal)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역시 히브리어로 강을 뜻하는 나할 'nachal'(히브리어 'נח"ל‎')의 어원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나일강을 이테루(jtrw)[2]또는 하피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냥 '강'이라는 뜻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나일강이 아는 강의 전부였으므로. 이후 이 단어는 크다는 뜻의 '아(ꜥꜣ)[3]'가 붙은 이테루-아(jtrw-ꜥꜣ)의 형태로도 쓰이다가 이것이 콥트어에서 이아로(ⲓⲁⲣⲟ)로 변형되었는데, 나일강의 경우에는 남성형 정관사 "프"가 붙어 피아로(ⲡⲓⲁⲣⲟ/ⲫⲓⲁⲣⲟ. "The River")라고 불렸다.[4]

나일강은 일반적인 다른 강에서는 찾기 힘든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다. 강이 가끔 범람한다는 것이야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나일강은 '정기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범람의 이유는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의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봄철에 에티오피아에 폭우가 내리면 5월경부터 청나일강 상류에 홍수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 홍수는 6월에 수단 하르툼에 도달하고 9월 아스완, 10월 카이로에 도달한다. 11월이 되면 수위가 낮아지면서 갈수기에 접어드는데 갈수기의 수량은 홍수기의 60분의 1에 불과하다.

이런 범람은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주고, 홍수에 잠겼다가 드러난 땅은 지력이 매우 높아진다.(강바닥의 진흙은 영양이 풍부해서 조선 시대엔 이를 퍼내서 밭에 뿌리기도 했다. 나일 범람은 그런 천연 비료를 생으로 퍼붓는 것이나 마찬가지.)나일강의 범람 시기는 인간이 확실하게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쪽에 만들고, 강물이 늘었다가 다시 줄어들면 잠겼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쑥쑥 잘 자라게 된다.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빈 농지에는 다시 홍수가 내려와서 지력을 보충해 준다. 그리고 이런 범람은 다른 이득도 있다. 나일강 유역은 비와 같은 강수량 자체는 적어서 농사를 하려면 물을 끌어다가 쓰는 관개 농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관개 농업을 장기간 행하면 지력 소모뿐만 아니라 토지에 소금이 쌓이는 염해가 발생할 수 있다. 한때 나일강 유역만큼이나 번성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현대에는 사막이 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나일강 유역은 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면서 이런 소금을 씻어내는 결과가 나와서 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 이런 농사짓기 좋은 환경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파라오 투트모세 4세가 군대를 이끌고 최초로 이집트 영역을 벗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원정을 했을 때,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한 이집트인들이 보고 가장 놀란 것은 거꾸로 흐르는 이테루였다. 남에서 북으로만 흐르는 이테루(강)만 보다보니,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은 비상식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강의 흐름 방향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에서 아주 중요하다. 북쪽이 위쪽으로 표기된 지도에 익숙한 우리 시대 사람들은 상/하 이집트 개념을 북쪽이 상이집트, 남쪽이 하이집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남쪽이 상이집트, 하류인 북쪽이 하이집트다. 즉, 나일강이 흐르는 방향은 현대의 나침반처럼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지리적 방향의 척도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지리적 방향 개념은 상류 방향(남쪽)/하류 방향(북쪽)의 두 방향뿐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는 이집트의 지리적 특성상 강 유역은 농업이 가능한 비옥한 땅이지만, 강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거주가 불가능하고 통과도 극히 곤란한 사막이 시작되니, 지리적 차원에서는 동, 서 방향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집트 역사에서는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와 중동, 아나톨리아 지역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과 교류하거나 분쟁을 벌이는 부분이 많아서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 이집트 역사 초기의 수천 년간은 실질적으로는 외부와 교류가 없었거나, 그나마의 교류도 역시 나일강 유역을 따라 있는 누비아 지역과의 교류가 많았고, 사막을 건너야 하는(그나마도 거리가 짧은 동쪽 사막이지만) 중동 지방과의 교류는 이미 이집트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게 된 후기에 주로 있었다. 그 전 수천 년간은 종종 이민족이나 대상의 접근은 있더라도, 단순히 '외부인'으로만 생각하지, 동, 서쪽 지역을 생활 영역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옥한 땅에 폐쇄적인 환경으로 오랜기간 안정적인 문명을 일군 것 또한 오늘날까지 많은 유물과 기록을 남긴 요인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5] 더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역사고대 이집트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기적으로 범람하면서 많은 양의 퇴적토를 나일강 하류 연안으로 가지고 왔기에, 농업 생산력이 높아져 고대 이집트 문명을 번영시켰다. 또한 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예측할 필요성이 크게 작용하여 이집트 천문학과 역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주기 예측과 범람으로 인한 토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측량술[6]과 수학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나일강의 신인 하피가 인간이 수학을 하게 만들었다고도 한다.[7] 비록 이집트만큼 영향력이 크진 않았지만, 수단과 에티오피아에서도 이른 시기에 문명과 국가가 발흥한 것 역시 (이집트의 영향도 있지만) 나일강의 덕이 컸다.[8]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해 강가에 쌓이는 퇴적토는 굉장히 비옥했으며, 농부들은 범람이 끝난 후 씨앗을 대충 뿌린 후 소와 돼지를 풀어 씨를 밟아 심게 하였다. 게다가 기온마저 원체 따뜻한 지역이다보니 이렇게 대충 심기만 해도 엄청난 양의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일강의 농민들은 사실상 씨를 뿌리고 수확만 하면 되었기에 다른 지역의 농민들에 비해 굉장히 일이 쉬웠으며 수확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이러한 잉여 기간 동안 농민들은 국가의 각종 건축 사업 등에 참여하여 추가 소득을 얻을 수 있었으며, 덕분에 이집트는 피라미드를 비롯해 압도적인 규모의 유적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이런 나일강의 중요성은 현대에도 여전해서, 아래에 언급하듯이 이집트는 나일강의 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여러 방법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진 현대에는, 토지 구획을 쓸어버리는 나일강 범람이 마냥 좋다고만은 보기 어려웠다.)현대 이집트의 인구 분포도 거의 대부분이 나일강 유역과 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같은 면적당 무식한 수준으로 많은 벼가 생산되는 걸로도 유명한데 아프리카의 강 주변에서 평균적으로 헥타르당 3톤의 벼가 수확되는데 여기선 9.3톤이나 생산된다. 사기맵


4. 인근 국가 관계[편집]


나일강에 대해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는 이집트이다. 그리고 수단 또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에티오피아, 남수단, 우간다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콩고, 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 케냐 등도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4.1. 아스완 댐 문제[편집]


이집트의 아스완 댐은 1889~1902년 영국에 의해 건설되었고, 증축 공사가 1910년, 1942년 두 번 더 있었다. 현대적 의미의 댐이 된 것은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교묘한 양팔 정책으로 미국영국의 지원을 얻어내면서였다. 하지만 1956년 중동 갈등으로 지원이 철회되고, 1960년 현대적 의미의 댐 건설이 비로소 시작됐으며 11년 뒤인 1970년 7월 21일에 공사가 완공된다. 그리고 1964년부터 수원 저장을 시작해서 1976년 수원 한계량을 채우게 되었다.

아스완 하이 댐과 아스완 로우 댐으로 나뉘는 데, 특히 아스완 하이 댐이 규모가 크다. 길이만 3,830m이며 넓이는 기본 구조물로만 980m이다. 중심축의 넓이는 40m, 길이 111m 이다. 최대 11,000m3의 수원이 매초 내보내질 수 있으며[9] 추가로 5,000m3의 수원 방출구가 있다.

하지만 아스완 하이 댐의 건설로 인해 아부심벨 대신전과 팔레 신전 등의 문화 유적이 물에 잠길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네스코 등에서 문화재 구출 작업을 펼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신전은 해체되어 옮긴 뒤 다른 지역에서 재조립되었다.

한편으로 아스완 하이 댐이 지어지자 수량 문제로 다른 나일강 인근 국가들과 이집트의 관계가 매우 나빠졌다. 심지어 이집트 대사관이 짱돌로 공격받은 일도 있었을 정도로 감정이 심각하게 나빠졌다. 나일강은 하류를 관장하는 이집트뿐만 아니라, 청나일강과 백나일강을 놓고 벌어지는 수단, 남수단, 에티오피아 등의 분쟁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남수단에선 백나일강 근처 소유권을 두고 부족 갈등이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이 때문에 이집트와 수단 공화국 사이의 국경선은 완전히 닫혀 있다.


4.2.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 문제[편집]


에티오피아가 나일강 상류에 을 건설하고있어 나일강 하류 국가들과 분쟁을 빚고 있다. 자세한건 문서 참조

5. 그 외[편집]


파일:배데숙 이집트.jpg
나일강 위의 유람선

지금은 관개 목적과 치수 사업을 위한 댐 건설로 인해 범람을 못해서 하류의 비옥한 농토가 조금씩 상황이 악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1년 2작으로 효율 1.8정도 된다. 그러나 강이 자연적으로 배출하던 광물 성분은 사라졌고 되려 소금기가 농작지와 고대 유적들로 스며들어 염해 피해를 야기한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지중해 연안 어업은 댐 건설 이후 나일강의 미네랄이 줄어들며 극히 안 좋아졌다. 무엇보다 나일강 농업이 19세기 이집트 인근 면화 사업의 융성으로 주목받게 된 탓에, 댐은 환경이나 농경민의 생활의 고려가 적었던 산업적 차원에서 건설되었다. 그 결과 이집트는 댐에 대해서 별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통은 나일강을 장강이나 아마존강처럼 강 폭이 넓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넓은 곳은 약 300m 정도이고 좁은 곳은 약 100m 정도로 매우 좁다. 이는 폭이 넓은 곳은 1km는 되는 상류[10]에서 하류로 흐를 때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비가 그나마 오는 삼각주의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비해 조금 더 상류에 있는 멤피스나 카이로 같은 지역은 비가 거의 오지 않고, 지류 또한 없으니, 강물이 유입될 요소가 없기에 그런 것이다. 따라서 좁기도 좁거니와, 상류로 갈수록 폭도 좁아진다.

6. 관련 문서[편집]



[1] 미주리강 탐험대가 넘어간 그곳 맞다.[2] 현대의 이집트어 표기 관행에 따름. 학계에선 신왕국 전까지는 야트라우/jatɾaw/, 민중이집트어 시기에는 야ㆆ르/jaʔɾ/로 발음했으리라 추정.[3] 원래 아르/ʕaʀ/였다가 민중어 시기 아ㆆ/ʕaʔ/로 발음되었으리라 추정.[4] 비슷한 경우로, 강을 지칭하는 한자 '河'는 본래 황하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였다. 그러다가 낙양 - 장안 지역의 무리한 개발로 토사가 강에 대대적으로 유입된 왕조 이래로 바뀐 강물 색을 따라 '황하'로 불리게 되었다. 중국에 다른 강도 많았으므로 이후 '河'가 강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널리 쓰였지만 원조는 황하라는 이야기. 마찬가지로 '江'자도 원래는 장강(양자강)만을 의미했으나 일반적인 강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된 글자다. 즉 '하', '강' 모두 river이지만 황하를 황강, 양자강을 양자하로 부르는 경우는 없다.[5] ≪하지만 이는 너무 비약적인 상상이 아닐까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일대를 종으로 관통하는 나일강을 기점으로하면 너무나도 명확하게 동/서, 혹은 최소한 어느 한 기준점을 가진 좌/우의 지정은 절실하다. 그저 강 건너라고 하기에는 그 강을 기점으로 너무 많은 사람과 너무 많은 지점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지점을 가지고 이쪽편과 저쪽편은 필히 구분했을 거란거다. 그게 동과 서의 지칭은 아닐 수 있지만 이집트의 동서를 구분할 수 있는 명칭이나 개념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일강을 기준으로하는 파라오가 사는편과 그 건너편, 이정도의 구분은 분명 있었을 것이고 그게 지금의 기준으로 동과 서였을 거란 거다. 사람 몸에도 상하좌우가 있는데 그걸 인지하고 구분한 이후로 강의 상류/하류를 알면서 그 좌우를 구분 안했다는게 말이 안된다.≫라고 반론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반론이 오히려 위의 주장을 너무 비약, 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 몸에도 상하좌우가 있지 않으냐"고 하지만 '나를 기준으로 한 상하, 좌우, 전후의 방향 개념'과 '지리적 방향의 객관적 기준인 동서남북'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전후좌우를 따지는 개념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지극히 힘들지만 위의 주장은 '지리적 방향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좌우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냐"고 반론하는 것이 오히려 비약이라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다른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도시'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얼마, 동쪽으로 얼마만큼 가야 한다"고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 문화권에서는 "상류 방향(남쪽)으로 얼마만큼 가면 (가던 방향 기준) 우안에 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이런 점에서 고대 이집트의 경우 (거리와 결부된) 지리적 방향 개념, 달리 말하면 '목적지까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를 설명하는 개념이 1차원적이었다는 것이다.[6] 이 범람으로 인해 정적분의 기원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나일강의 범람은 지력을 공급하는 고마운 존재지만 그 대가(?)로 농지를 엉망진창으로 뒤섞어버리기 때문에 지주들끼리 병림픽의 장이 되었을 정도이고,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곡선을 간단한 도형으로 근사시키는 측량법이 생겨났다.[7]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나일강이 있었기에 이집트 문명이 발흥할 수 있었다는 얘기.[8] 달력의 1월 1일도 사실은 태양과 시리우스가 같이 뜨는 날로 이날부터 나일강의 범람이 시작되어서 정한 것이라 한다.[9] 서울 청계천하루 수량이 약 4만 세제곱미터이다.[10] 청나일, 백나일. 각각 아비시니아 고원과 빅토리아호에서 발원한다.[11] 양국은 나일강 수자원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8 04:09:35에 나무위키 나일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