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中野富士見中学いじめ自殺事件

1. 사건 개요
2. 이지메의 경위
3. 죽음의 장소
4. 교사들의 행적
5. 후폭풍
6. 사건 처분



1. 사건 개요[편집]


파일:Screenshot_20200308-183503_YouTube.jpg
피해자 시카가와 히로후미(鹿川裕史)군
1986년(쇼와 61년) 2월 1일 일본 도쿄도 나카노구에서 일어난 이지메 자살 사건. 하술할 이지메 수법 때문에 '장례식 놀이'(葬式ごっこ) 사건으로도 불린다.

일본에서 일어난 이지메에 의한 자살 사건 중에서 사회적 여파가 무척 컸던 사건이다. 당연히 이 사건 이전에도 이지메 피해자가 자살한 사건은 있어 왔으나 일본 전국 단위로 엄청난 파장과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당시 한국 신문에도 보도될 정도였다.(#)


2. 이지메의 경위[편집]


피해자인 시카가와 히로후미(鹿川裕史, 1972년생) 군은 동급생들과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밝고 웃음이 많던 성격으로,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오던 와중 1985년 중학교 2학년으로 진급하여 이전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다른 반이 되었다. 같은 초등학교에서 그대로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진급 후에도 학급 친구들과 친한 사이였지만, 온화한 성격 탓에 무리 내에서 간식을 대신 사오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하굣길에서 자신의 가방을 들라는 부탁까지 그대로 들어주었다.

이를 재밌어한 무리 내의 아이들로 인해 2학기가 되자 괴롭힘은 따돌림으로 발전하여 B반, D반 등 다른 반 학생들까지 가담하게 되었는데, 프로레슬링 놀이랍시고 기술을 걸어 바닥에 집어던지고,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수염을 그린 뒤 복도에서 억지로 춤을 추게 시키고, 책상과 의자로 쌓은 공간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둬 두고, 모형 총기의 과녁이 되게 하거나,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옷을 벗는 게임을 강요당하여 옷을 벗게 시키는 와중 히로후미 군 외의 상대방은 지더라도 옷을 벗지 않는 등 몹시 가혹한 따돌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해자들은 밴드를 만들고 히로후미 군을 억지로 집어넣어 보컬과 드럼 담당으로 배정한 것도 모자라 매니저 직책까지 겸임시켜 심부름꾼으로 써먹는 모욕을 주었고, 밝고 명랑하던 히로후미 군은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해 가다가 그달 중순 이틀간 가출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교사에게는 가출 사유를 '아버지가 무서워서' 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저 그런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11월이 되자 A반 학생들은 '히로후미가 죽었다고 치자'면서 칠판 앞에 히로후미 군의 책상을 놓고 교실에서 향을 피우며 히로후미 군의 사진을 영정 사진처럼 만들고는 빈 우유병에 꽃을 꽂아 이른바 장례식 놀이를 하였다. 그 옆에 있는 색지에는 '시카가와 군에게. 잘 가. 2학년 A반과 그 외 일동이. 쇼와 60년 11월 14일'라는 글과 함께 반 전체의 방명록이 남겨져 있었는데, '등신', '죽었다니 잘됐다', '꼴 좀 보라지' 따위의 악의로 가득 찬 욕설이 잔뜩 쓰였다. 게다가 방명록을 채우는 데에는 교사까지 4명이나 동참했는데, 학생들에게는 깜짝 이벤트를 꾸미고 있다는 식으로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히로후미 군은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다쳐서 자주 지각했는데, 이날도 교실에 늦게 도착한 뒤 위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뭐야 이게~!" 하며 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침묵하였다고. 색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에게 "이거 어떻게 생각해? 여기 선생님도 써 놨다고!" 라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이후에 다른 친구에게 "나 저번에 한 번 죽었어" 라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전부터 히로후미 군은 반에서 무시당하던 상황이었고, '장례식 놀이'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었으니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아무리 깜짝 이벤트라고 소개받았다고는 하지만 교사까지 참여하였던 이 끔찍한 '놀이'는 상식적으로 도를 넘은 미친 짓거리였다.

11월 26일, 히로후미 군이 무리의 멤버인 3학년생 3명과 있을 때 1학년생이 히로후미 군을 가리키며 "넌 약한 놈이야, 내가 더 강해" 라고 시비를 걸어왔고 이에 다른 멤버들이 싸움을 부추기자 일대일로 싸우게 되었는데,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집으로 돌아온 히로후미 군의 상처를 본 히로후미 군의 아버지가 무슨 일인지 묻자 히로후미 군은 같이 있었던 3학년생들의 이름을 털어놓았고, 아버지는 즉시 3학년생들을 찾아가 크게 다그쳤다. 그러나 그 뒤에 고자질했다는 이유로 그룹 멤버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11월 28일, 이지메의 주범인 A가 히로후미 군에게 주스를 사 오라며 1000엔을 건넸는데 히로후미 군은 주스를 사고 남은 650엔을 주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며칠 후 A가 잔돈을 찾자 히로후미 군은 돈을 다 써버렸다 말했고, 이에 A는 히로후미 군을 빈 건물로 데려가 또 다시 폭행했다.

히로후미 군은 이 일을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낌새를 눈치챈 히로후미 군의 아버지는 A의 집을 찾아가 “당신 아들 잘 관리해라. 이 이상 내 아들한테 들러붙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식으로 격하게 화를 냈고, A의 부모는 A를 추궁하였다. 그러자 히로후미 군에게는 "시카가와 히로후미, 죽여버린다"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으며, 폭행 또한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12월에 또 다시 히로후미 군의 아버지가 A의 집에 따지러 갔는데, 이 때문인지 그룹 내에서 이제 그만 괴롭히자는 의견이 거세졌음에도 괴롭힘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새해를 맞아 그룹 일행들과 함께 첫 일출을 보러 산에 올랐는데, 이때 찍은 사진에서 히로후미 군은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밝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룹 친구에게 받은 연하장에는 "목욕하고 머리 감고 다음 주에 보자!" 라는 내용이 있었으며, 담임 교사에게는 "근하신년 61년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카가와 군은 훌륭한 인성을 갖추고 자기 주장이 뚜렷한 심지 있는 청년이 되길 바래요. 우리 힘내자!" 라는 연하장을 받는 등 이때까지 히로후미 군의 상황이 아주 심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학기가[1] 되어서도 이지메는 계속되었다. 3학기 개학식 날에 계단의 층계참에서 여러 명으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고, 피가 묻은 셔츠를 가방에 숨기고 돌아가려다가 3학년에게 들켜 다시금 구타를 당했다. 히로후미 군의 결석이 잦아졌고 이지메당하는 모습을 다른 교사가 목격하여 해당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기도 했으나, 이지메를 방지할 만한 엄격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잦은 결석도 꾀병인가 하며 넘어갔을 정도로.

히로후미 군이 마지막으로 등교한 날은 1월 31일으로, 5교시가 시작한 늦은 오후에야 등교해 2학년 교사와 상담실에서 3~40분 정도 상담하던 도중 이지메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교사는 이야기를 듣고 히로후미 군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히로후미 군을 마중나왔으면 하는 의사를 전했고, 어머니가 학교에 도착하자 그는 어머니와 함께 귀가하며 '이젠 다 싫다'며 마지막 울분을 토했다. 이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 3인은 히로후미 군을 찾으며 히로후미 군의 신발을 화장실 변기에 버리는 등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선 뒤 히로후미 군은 그대로 행방불명되었고, 부모가 도심의 게임 센터 등을 찾아다녔으나 히로후미 군은 보이지 않았다. 히로후미 군은 그 시각 이미 아버지의 고향인 이와테현에 도착한 뒤였다.


3. 죽음의 장소[편집]


1986년 2월 1일 밤 10시경, 이와테현 모리오카역 근처에 있는 쇼핑몰 'FESAN'의 경비원이 지하 1층 구내를 순찰하던 도중 화장실 문이 영업 시간 종료 후에도 굳게 닫혀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문을 열어 보았고, 옷걸이에 비닐끈을 묶어 목을 맨 히로후미 군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화장실 바닥에 놓인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家の人へ そして友達へ

とつぜん姿を消して 申し訳ありません

(原因について) くわしいことについては

(いじめた人の実名) に聞けばわかると思う

俺だってまだ死にたくない

けどこのままじゃ 生き地獄になっちゃうよ

だけど俺が死んだからって

他のやつが犠牲になったんじゃ

意味ないじゃないか だから

もう君たちもばかな事するのはやめてくれ

最後のお願いだ

昭和六十一年二月一日

鹿川裕史

가족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갑자기 사라져 면목 없습니다.

(원인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가해자의 본명)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도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그래도 이대로 있다간 생지옥이 되고 말 거야.

하지만 내가 죽었다고 해서 또다른 애가 희생양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

그러니 너희들도 이제 멍청한 짓 그만해.

마지막 부탁이다.

1986년 2월 1일

시카가와 히로후미


히로후미 군의 가방에는 사복 여벌옷, 접는 우산, 연하장 2장, 사진 3장과 집을 나올 때 부친에게 받은 이케부쿠로 선샤인 60 전망대 입장권이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죽기 몇 시간 전에 그곳에 들렀던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에는 선샤인 60이 일본 내에서 가장 높던 빌딩이었으므로, 히로후미 군이 처음부터 자살을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가출하여 좋아하는 장소를 둘러보던 와중 생각을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버지는 "히로후미는 죽기 전 마지막 이틀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철 안에서도 마음 속으로는 계속 방황했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4. 교사들의 행적[편집]


사건 직후 취재에 나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학교 교장은 '자살 원인을 들은 적은 있으나 이지메라고 해도 친구끼리 프로레슬링 놀이나 심부름을 시키는 정도'라고 발언한 걸 보아, 교사들에게 이지메 행위를 보고받고도 가벼운 장난 정도로 치부했던 모양이다.

담임의 인터뷰는 더욱 가관이었다.
  • "굴욕감에 참을 수 없었던 거겠죠. 정신적으로도 지쳐있었고 어느 쪽이냐 하면 기운 없는 애였으니까요"
  • "친구들이 심부름을 시키고, 소동을 일으키고 장난스러운 행위를 강요하는 등 정신적인 압박이 주 요인입니다"
  • "맞는 일은 적었으며 당사자도 히죽히죽거리고 있었다"
라며 자살 원인을 이지메가 아닌 히로후미 군의 개인 문제로 돌리는 등 고인모독발언까지 했다. 이 교사는 사건 이전에도 이지메의 주범에게 얻어맞아 다친 적이 있었고, 학생들에게 무시당해 수업 중에 학생들이 소동을 일으켜도 모른 척하던 무책임한 교사였다.


5. 후폭풍[편집]


피해자의 장례식은 그해 2월 3일경 치러졌다. 해당 영상 57초 부분에 보면 여동생이 "오빠 가면 안돼"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2]

이 사건으로 후지미중학교 전체가 뒤집어졌다. 가해자들조차 제대로 변명하지 못하고 죄책감을 호소했는데, 특히 유서에 이름이 거론되었던 가해자 2명은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그 중 한 명은 사이비 종교 집단에 빠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다른 사건도 일어났다. 옆 반의 2학년생 L군이 수업 중에 지적받은 것을 계기로 M군에게 "넌 시카가와 2세다. 시카가와처럼 자살해" 라고 싸움을 부추기며 앞자리의 N군과 M군을 때린 것이다. 이어 M군은 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교사는 아랑곳 않고 칠판에 필기를 계속했으며, 싸움이 심해지자 그제서야 겨우 말렸다. M군은 "선생님 너무하다, L을 죽이고 나도 자살하겠다, 칼을 가져오겠다"며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고, 당황한 교사가 M군을 뒤쫓아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 그 모습을 지나가던 경찰이 발견하여 주동자인 L은 폭행 혐의로 경찰에 넘겨졌다.

TV와 신문 등에 연일 보도되자, 피해자인 히로후미 군의 가정도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죽어도 싸다', '아들이 죽었다니 잘됐네'의 악성 장난 전화도 쏟아졌다고.

그리고 8년 뒤인 1994년, 시카가와 군과 같은 반이었던 학생이 《장례식 놀이, 8년 후의 증언》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사건의 진실을 밝혔다. (風雅書房 「『葬式ごっこ』 八年後の証言」 豊田充・著 五味彬・撮影)

6. 사건 처분[편집]


담임 교사인 F는 무단으로 학원 아르바이트 일을 겸했던 건까지 합해서 교직 정지, 즉 파직당했고, '장례식 놀이'에 가담하였던 교사와 교장에게는 감봉 처분이 내려졌다. 처분을 받은 교장과 교사 2명은 3월 말에 스스로 퇴직하였다. 히로후미 군의 이지메에 가담한 16명도 상해와 폭행 혐의로 서류 송청되었으며 주범 A와 B의 부모에게 2,200만 엔의 손해 배상이 청구되었고 도쿄 지부는 보호 감찰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1994년 도쿄 지부는 '장례식 놀이'는 인정하지만 사망 직전에 일어난 폭행이 자살로 이어졌다며 이지메 자체를 부정하였다. 증인으로 참석한 교장과 교사들도 자살의 원인을 이지메가 아닌 가정 문제로 돌리면서 유서에 적힌 '바보같은 짓거리 그만해'는 부모에게, '다른 녀석'은 동생을 뜻하는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해석을 내세웠으며, 이에 유족들과 공판을 열어 2달 뒤 도쿄 고등 법원에서 "'장례식 놀이'는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고통을 느낄 일이니 이를 멈추지 못한 학교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지메와 자살의 결과는 불명이다"라는 다소 안이한 판결을 내린다. 어쨌건 가해자들에게 1,150만엔의 배상 청구가 되긴 했다.

이 판결 이후 일어난 오코우치 사건이 이지메 문제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이지메 피해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8 06:42:17에 나무위키 나카노후지미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일본의 학교는 3학기제. 대략 12월 하순~1월 중순에 겨울방학을 하고 1월 중순~3월 중순이 3학기이며, 3월 중하순에 봄방학을 한 뒤 4월에 새 학년을 시작한다. 중3, 고3 등 졸업반은 3학기 기말고사를 치르지 않는다.[2] 원본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