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소네 야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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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71-73대 내각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
中曽根康弘 | Nakasone Yasuhiro


파일:中曽根康弘.jpg

출생
1918년 5월 27일
군마현 다카사키시 스에히로정
사망
2019년 11월 29일 (향년 101세)
도쿄도
재임기간
제71대 내각총리대신
1982년 11월 27일 ~ 1983년 12월 27일
제72대 내각총리대신
1983년 12월 27일 ~ 1986년 7월 22일
제73대 내각총리대신
1986년 7월 22일 ~ 1987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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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친 나카소네 마쓰고로
배우자
나카소네 츠타코
자녀
장남 나카소네 히로후미
장녀 후타가와 미치코
차녀 아츠미 미에코
친인척
친손자 나카소네 야스타카
증손자녀
학력
타카사키기타 심상소학교 (졸업)
타카사키 중학교 (졸업)
시즈오카고등학교[1]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 / 학사)
신장
178cm[2]
정당

지역구
(구) 군마 3구 → 기타간토 권역 비례대표
의원 선수
20 (중)
의원 대수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약력
고등문관시험 합격
내무성 관료
중의원 의원
제7·25대 과학기술청장관
제38대 운수대신
제12대 타쿠쇼쿠대학 총장
제25대 방위청 장관[3]
제16·21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34-35대 경제산업대신
제15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45대 행정관리부장관
제11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71-73대 내각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 세계평화연구소 회장
군사 경력
임관
단기현역사관 (6기)
복무
일본제국 해군
1941년 ~ 1945년 8월
최종 계급
소좌
참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1. 개요
2. 관력(文武官歷)
3. 성향
4. 평가
5. 논란 및 망언
6. 평생 현역: 총리 퇴임 후의 행보
7. 선거 이력
8. 기타



1. 개요[편집]


제71-73대 일본 총리이자 중의원을 지낸 일본 정치인 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 시대까지 덴노 4명을 경험한 역사의 산 증인이자 마지막까지 살아있었던 쇼와 시대 총리였다.[1]

전후의 총리 가운데 재임기간이 4년 346일(1806일), 약 5년으로 5번째로 길었다. 아베 신조, 사토 에이사쿠, 요시다 시게루, 고이즈미 준이치로 다음으로 길게 총리직을 지냈다.

2018년 5월 27일 100세 생일을 맞아, 역대 일본 총리 가운데서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에 이어 두 번째로 장수를 기록했다.

그러던 2019년 11월 29일 101세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에 여권뿐 아니라 다마키 유이치로, 에다노 유키오, 마쓰자와 시게후미 등 야권의 많은 정치인들도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중핵파고인드립을 쳤다.(...) 댓글들의 반응은 "아무리 성향이 정반대라해도 고인을 모독하는 것이 맞냐"라며 당연히 차가운 반응이다. 다만, 중핵파 입장에서 나카소네는 일본국유철도 민영화의 주범이기 때문에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활동 기반으로 삼고 있는 신좌파 단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이를 갈면서 증오하던 존재였다.

이로써 쇼와 시대 총리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관력(文武官歷)[편집]




군마현 타카사키시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1941년 내무성 문관으로 출사(出仕)하였다.

내무성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병역 해결을 위해 일본 해군단기현역사관(약자로 단현)[2] 제6기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주계[3] 중위로 임관했다. 최초 발령지가 바로 중순양함 아오바였다.

아오바 근무 시절에는 이제 막 임관한 초급장교임에도 해군병학교 출신의 병과 사관들과 서열싸움을 벌이는 등 만만치 않은 사람임을 과시했다. 그리고 첫 실무 배치를 받았을 당시 자신은 동기들과 함께 밖의 구석진 데로 끌려가 선임 사관들에게 이유 없이 귀싸대기를 맞았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일본군의 병영부조리가 상당히 심각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주계 사관들과 해군병학교 사관들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해군병학교 사관들이 전방에서 구르는데, 주계 사관들은 엘리트 대접을 받으며 군 생활 대부분을 후방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연은 인연인지라, 나카소네는 전후에 아오바의 위령비가 건립될 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일본 사회가 워낙 민관군 가리지 않고 똥군기가 많았던 시대라, 군대에서 몇 대 맞는 정도론 군대가 그렇지 뭐 하고 넘겼을 것이다.

1941년 11월 20일에 해군 육전대의 제2설영반(별칭 야베(矢部)부대)의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26일에 구레시 진수부에서 참모장 나카지마 토라히코(中島寅彦) 해군 소장에게 임명장을 받고 발락파판 상륙작전[4]에 직접 참가하여 실전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수송선에 타고 있었는데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죽을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발릭파판에서 군인 3천원(員)이 노름을 하거나 현지 여성을 습격하는 등 군기가 문란하자 현지 여성을 모아 위안소를 지어서 부대를 안정시켰다. 이 일화는 스스로 해군 수기 앤솔로지에서 자랑했고 일본군 공문서로도 교차검증었다. 그 뒤 타이완, 일본 본토 등을 옮겨다니며 계속 근무했으며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버섯구름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전해진다. 패전 후 해군 해산과 동시에 주계소좌로 전역한다.

파일:nakasone_navy.jpg
해군 주계중위 시절[5]

이후 내무성에 복귀했다가 1947년 중의원 총선때 고향에서 출마하여 당선에 성공함으로써 정계에 입문, 정계은퇴까지 무려 20선 의원을 지낸다. 재밌는건 총리임에도 총리재임 당시에 1위를 하지 못했다는 것.(중선거구제였기에 일단 당선은 된다.) 역시 총리 출신인 후쿠다 다케오(1952년 정계 입문)가 1970~80년대 선거에서 계속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인데, 오부치 게이조도 이 지역구에서 1963년부터 당선되어왔기 때문에 졸지에 (구) 군마 3구는 수십년간 계속 전현직 총리의 지역구가 되었다.[6]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입각해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 최초의 원자력 관련 예산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공로를 세웠는데, 예산 액수는 2억 3,500만엔이었다. 이는 농축 우라늄의 원소번호 235에서 유래한 것이었다.관련기사 2차대전 당시 원자폭탄으로 패망한 것을 보고서 일본의 독자적 원자력 능력 확보 필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라는 설명.

이후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장관을 역임하다가 1982년 11월 자유민주당 총재에 당선되어 제71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71.jpg
71대 총리 취임 후
재임 초기, 통일지방선거와 참의원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면서 순탄하게 총리직을 수행할것 같았지만. 록히드 재판의 영향으로 1983년 총선거에서 중의원 과반에서 6석 모자란 250석의 패배를 거두면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신자유클럽과 연정을 구성하면서 내각은 무너지지 않았고, 일본경제의 활황과 더불어 지지율은 상승일로를 거듭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경기침체가 닥쳐오기는 했지만 지지율에 큰 타격까지는 입히지는 않았고 결국 임기말인 1986년 중·참 동시선거에서[7] 자민당은 역사상 최다 의석인 300석을 얻었고,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도 역사상 최대 의석인 72석을 추가해 총합 143석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소비세 신설계획을 발표하는 바람에 지지율이 급락하여 1987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씁씁하게 패배하기도 했다. 어쨌든 소비세 신설안을 폐기한 뒤, 다케시타 노보루를 후임 자유민주당 총재로 지명하고 11월에 공직에서 퇴임하였다.


3. 성향[편집]


우익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로서 재임 기간 중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여 한국과 중국의 지탄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극우 세력에게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인해 협박편지를 받은 적도 있다.(자세한 내용은 세키호타이 사건 문서 참고) 하지만 대체론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양호한 시절을 보냈다. 미국 공화당로널드 레이건 행정부(1981년 ~ 1989년)와 전두환 정부(1980년~1988년) 시기와 정확히 겹치는 임기 때문에 전두환-레이건-나카소네의 한-미-일 삼국협력과 한-미 동맹, 한-일 협력관계의 전성기였다.

아울러 2차대전 참전, 방위청 장관으로 재직했던 경력을 살려서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도 적극 나섰다. 전후 처음으로 GNP 대비 1%를 넘어선 방위비의 책정,[8] 소련 위협에 맞서는 일본의 '불침 항공모함화', 해상교통로(SLOC) 1천해리 방어 등을 내세워 무기 도입을 대폭 확충한 것이다.[9]

파일:external/img.47news.jp/PN2012010501000966.-.-.CI0003.jpg
1983년 방한 당시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10]

파일:external/blogimg.goo.ne.jp/bcd3e3022b4390642061ad30230f7124.jpg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하는 모습.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를 '론'과 '야스'라고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특히 한일관계에서 진전을 보여, 1983년 현직 일본 수상으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전두환과 정상회담을 가졌고[11], 1984년에는 전두환이 답방함으로서 한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레이건과 나카소네 인형은 갓 NLPDR이 자라나던 학생운동 시위에서 동네북처럼 규탄당하고 인형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전두환도 나름대로는 명분이 있었다. 바로 반일이 아닌 "극일". 환단고기를 강조하는 정훈교육이 이때부터 이뤄진 것도 그 맥락과 닿는다는 평가가 있다. 한편 고령의 히로히토는 방일한 전두환에게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미 나카소네 임기 말부터 무역마찰[12]로 악화된 미일관계는 소원해지고, 미국의 데탕트 외교와 한국의 북방정책이 강화되면서 한미일 삼각동맹도 이전보단 약해졌다.

일단 우익 성향이였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반공이라는 이념을 둘다 가진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스히로의 한국에서의 이미지는 그리 나쁜편은 아니였다. 지금이였으면 엄청나게 욕을 먹었겠지만 그리고 당시에는 과거사 문제가 그리 부각되지도 않았으며 현실적으로 차관을 받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1982년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 마찰이 없지 않음에도 배상과 사과에 대해 그리 적극적이지가 않았다. 다만 그와 별개로 한국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나카소네 정부와는 별개로 일본매체나 일본 민간에서 선수들 숙소를 일본에 두자는 등 1988 서울 올림픽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생각하면서 혐성질을 한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일본 보수정치인의 아이콘이며 한국의 거물급 정치인들과 두루 친분이 있었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와도 돈독한 사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일본 정부 대표단 자격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와 함께 참석한 적도 있었다. 그 외에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와도 관계가 돈독해 1990년 잠실 롯데월드 어드벤처 매직아일랜드 및 1997년 롯데호텔 부산 개장식에도 참석했다.


4. 평가[편집]


그야말로 1980년대 일본 정치를 대표하는, 전후(戰後) 체제로의 전환을 본격화한 지도자. 당시에는 대통령적 수상(大統領的首相)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가 총리 재임 기간에 누렸던 막강한 권력을 빗댄 것이다.

재임 중 누적된 적자로 국가재정에 압박을 주던 전매공사(현재의 일본담배산업/JT)와 일본전신전화공사(현재의 NTT), 일본국유철도(현재의 JR그룹) 민영화를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요 인물로 평가된다.

1985년플라자 합의 채택으로 엔화가 급강세를 보였고, 몇 년 못가 일본을 덮친 버블붕괴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그가 퇴임한 후 한참 뒤에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재평가 과정에서 나온 거고, 총리 재임 당시에는 일본 경제가 절정기에 이르렀던 시절이라 평가는 굉장히 호의적인 편이었다. 실제로 당장 일본 수출이 줄어들 것만 기대하고 일본침몰만을 학수고대하던 서구 경제가들은 의외로 1989년까지 일본이 짱짱하게 버티면서 역관광 당하는거 아니냐고 쇼크를 먹기도 했다는 후문.

재임기에 맞이한 총선에서 사상 최대의 압승을 거두고, 전후 총리 가운데 재임기간이 네번째로 길었던 게 그냥 가능했던 게 아니다. 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추월하기 전까지는 전후 세번째 최장수 총리였으며 요시다 시게루가 2차대전 패전의 수습과 한국전쟁이라는 비상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비상 내각에 가까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이즈미 이전까지 실질적으로 전후 2번째 장수 총리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아무튼 총선의 압승도 그렇고 재임시절에는 수상으로서 평가가 좋은 편이었다

아울러 일본 정치인 중에서도 거의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한 이미지메이킹을 선도한 인물로 꼽힌다. 일본인치고는 크고 당당한 체구(178cm로 역대 총리 2위[13])에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있어서인지 텔레비전을 통한 정견 표명이나 쇼맨쉽을 발휘하는 행동이 많았으며 비교적 약한 당내 기반을 이러한 미디어 정치로 상쇄했다. 후일 등장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극장형 정치'의 원조격인 인물.


5. 논란 및 망언[편집]


1985년 야스쿠니 참배 며칠 전 그는 야스쿠니를 미국 알링턴 등 전몰장병 묘지와 동급으로 놓고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거나, 도쿄재판 사관을 자학적이라고 비판하며 "전후는 총결산됐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리영희 교수는 월간 말 1994년 6월호 칼럼 <일본인 망언 규탄 전에 국민 총반성이 필요하다>에서 해당 발언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당시 서독 대통령의 패전 40주년 기념사와 비교하며 냉철히 비판했다.[14]

1986년 9월 22일 자민당 연수 강연회 연설에서 "미국은 흑인과 남미계 민족 등으로 인해 지적 수준이 아직 낮다(しかも日本はこれだけ高学歴社会になって、相当インテリジェントなソサエティーになってきておる。アメリカなんかよりはるかにそうだ。平均点から見たら、アメリカには黒人とかプエルトリコとかメキシカンとか、そういうのが相当おって、平均的にみたら非常にまだ低い)"[15]."란 발언을 해 미국 흑인과 남미계 미국인들을 격분하게 했다. 변명이랍시고 9월 24일 중의원에서 "미국은 다민족 국가인 관계로 교육이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일본은 단일민족 사회이기 때문에 교육을 하기 쉽다. 연설 전체를 읽으면 알 수 있다. 다른 나라를 비방하거나 인종차별을 한 건 아니다(米国はアポロ計画や戦略防衛構想で大きな成果を上げているが、複合民族なので、教育などで手の届かないところもある。日本は単一民族だから手が届きやすいということだ。演説全体を読んでもらえばわかる。他国を誹謗したり、人種差別をしたわけではない)."란 말을 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어 미국 정계가 들고 일어났고 결국 나카소네는 9월 27일 미국 정부, 의회, 국민들에게 진상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이외에도 나카소네는 1997년 10월 4일, 홋카이도 오타루시의 강연회에서 주일미군을 "망보는 개"에 비유하여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일본은 주일미군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파수견(把守犬)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돈을 내고 미군을 주둔시켜 파수견으로 쓰는 격이며 그것이 현명하다.

나카소네는 미일안보체제를 주제로 강연하는 도중 주일미군을 일본을 위해 망보는 개로 칭했으며, 이런 나카소네의 발언에 미국은 매우 불쾌해 했고 그 당시의 미일관계는 1997년 외환 위기이라는 복합적 요인과 맞물려 최악으로 치달았다. 나카소네의 이같은 발언에 당시의 조선일보도 주한미군에 대해 "탈냉전시대 미국의 전략이 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주한 미군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라는 논평을 냈었다.[16]

또한 이 자리에서 록히드 사건으로 유죄 확정된 중의원 사토 고코를 총무청 장관에 기용하도록 당시 현직 총리였던 하시모토 류타로에게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자 "정차가는 성인군자일 필요는 없다. 정치가가 도덕의 기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나, 그것이 제1의 조건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되받아친 바 있다.


6. 평생 현역: 총리 퇴임 후의 행보[편집]


파일:external/www.asahicom.jp/AS20150501004689_comm.jpg
2015년의 모습
하지만 퇴임 후에는 편치만은 않았다. 1989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잠시 자유민주당을 2년 가까이 탈당해야 했던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렌고가 내놓은 후보에게 낙선된다는 소리[17]까지 나올정도로 열세였으나 당선되었고, 이후 1996년에 정계 입문 50년만에 비례대표 종신 순번 1번을 달성하기도 했다.[19] 결국 그가 정계 은퇴를 한 것은 고이즈미가 정년제를 주장하며 비례대표직 사퇴를 종용한 2003년에서야 였다.[20] 당시 그의 나이 85세로 정계 진출 57년 만이었다.

총리 퇴임 직후인 1988년부터는 세계평화연구소(현 나카소네평화연구소)를 창립하여 이사장을 지냈으며, 2005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건 아태지역의 차세대 지도자상도 시상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박철희 서울대 교수, 이신화 고려대 교수, 그리고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 등이 수상한 바 있다.[21] 2010년에 히라누마 다케오일어나라 일본을 창당하자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히라누마를 지지했다.

2017년 기준으로 만 99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일본 보수 진영의 원로로 정치 현안에 대해 자주 발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100세가 되는 2018년 5월 기사에는 도보가 불편하고 지팡이를 들 손마저 부상당한 상황이라, 자신이 회장으로 있고 평소에 늘 참석하던 '신헌법제정의원동맹'에는 불참하고 대신 메시지만 보냈다.# 장남 나카소네 히로후미(1945년생)도 모리 요시로 내각의 문부대신 이래 과학기술청 장관(지금은 문부과학대신으로 합쳐진 직위), 그리고 아소 다로 자민당 내각의 마지막 외무대신을 지냈다. 심지어 2017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손자인 나카소네 야스타카가 비례대표로 중의원에 입성하여, 생전에 3대가 국회에 등원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다.

2014년에는 집단적 자위권은 현 정세상 필요없다고 발언하며 아베 신조 정권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2019년 11월 29일, 노환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향년 101세. 사후 대훈위국화장경식이 추증됐다. 생전 받은 대훈위국화대수장과 함께 일본 최고 등급 훈장을 모두 받은 것이다.


7.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7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군마 3구



65,484 (25.7%)
당선 (1위)
초선
1950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45,261 (16.3%)
당선 (2위)
재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개진당



71,967 (22.5%)
당선 (1위)
3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5,878 (20.6%)
4선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3,399 (26.5%)
5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6,274 (24.2%)
당선 (2위)
6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6,274 (24.2%)
7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4,504 (26.2%)
8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2,731 (21.5%)
9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6,823 (29.4%)
당선 (1위)
10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3,879 (24.3%)
당선 (2위)
11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6,454 (13.8%)
당선 (4위)
12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5,961 (23.7%)
당선 (2위)
13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6,930 (23.8%)
14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7,970 (30.1%)
15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5,381 (28.1%)
16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무소속|
무소속
]]

86,552 (19.9%)
당선 (3위)
17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4,387 (16.4%)
당선 (4위)
18선[22]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비례대표
(키타칸토)
1,962,854 (32.8%)
당선 (1위)
19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924,629 (28.3%)
20선


8. 기타[편집]


애니메이션 카미츄! 4화에 나오는 총리대신은 이 사람이 모델이다. 작중 배경인 당시 총리였던 1983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친미적 성향이 잘 나타나 있고, 무능의 끝을 달린다. 미국한테 잘 보이겠다고 삽질하다가 험한 꼴을 당한다.

냉전 시기 서방진영을 대표하는 정치가 중 한명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진영이나 제3세계에도 상당히 너그러운 면모를 보였다. 실제로 1950년대에 젊은 국회의원 시절,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소련, 중국, 이집트 등을 방문하였고 이때 나세르와 회담한 후 나세르의 검소함을 극찬하며 평생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1988 서울 올림픽에 공산권 국가들을 참가시키기 위해 동독 등을 순방한 적이 있다.

정당 내부 규합을 굉장히 중요하게 주장하였는데 예시로 오히라 내각에서 국무대신들 중 가장 힘있는 자리인 대장대신(현 재무대신) 자리를 보장받았지만 당무 전반과 정당 인사권 등을 가지고 있는 간사장 자리를 따로 요청할 정도였다.

이후 재무대신이 되는 요사노 가오루의 어머니의 지인이었으며, 나카소네의 소개로 원자력 발전에 요사노가 입사했고 요사노가 그의 비서도 된다.

일본에서 실시된 각종 역대 전후 총리 평가 여론조사에서 요시다 시게루,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와 같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의 한국인 기준으로도 마냥 우파적이지는 않은 일이, 후지오 마사유키 문부대신의 파면이다. 1986년 7월 출범한 나카소네 3기 내각의 문부대신인 후지오 마사유키가 동년 9월 10일 발매 예정이었던 문예춘추 10월호에 "한일합병은 한국 측에도 책임이 있다[23]"는 발언 등을 하여 한국이 반발하여, 그를 파면하고 사과의 말을 하기도 했다. 파면하기 전 따로 불러 "내가 당신 입장이면 사임한다"는 말로 에둘러 사임을 요구했지만 후지오가 거부하여 파면시켰다고. 사실 후지오는 이 발언 전에도 문부대신 취임 직후에 "불평하는 녀석은 세계사에서 그런 일(조선 및 청나라 지배 등) 한 적 없는지 생각해보라. 이쪽(일본)이 (과거사의 과오를) 인정하는 건 좋은데, 상대(한국, 중국)가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일본이) 곤란한 게 당연하다."[24] 등의 망언을 하여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산 적이 있는 인물이긴 했다.

나카소네가 처음 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제1회 중의원 선거 때부터 연임하고 있던 오자키 유키오가 현역이었다. 그러니까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과 정치를 한 사람과 코로나19 펜데믹이 시작되기 두 달 쯤 전에 죽은 사람이 함께 현역 의원이던 시절이 있었던 것.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 본인이 직접 출연해 한일회담과 관련된 증언을 했다.

그가 사망하고 수 개월이 지난 2020년 9월, 일본 정부는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엄수하고자 장례식 비용으로 약 9600만 엔을 계상했다.# 그리고 얼마 뒤 장례비용이 1억 9천만 엔으로 갑절 가까이 뛰어올랐다.# 전직 정부수반의 장례식에 20억 원 정도의 예산을 사용하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는 않지만, 사망 직후의 장례식이 아닌, 한참 지난 후에 치르는 뒷북 치는 장례식에서 이 정도 예산을 사용한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격분하면서 이러한 행동을 비난하였다.

국장 치르는 날에 조기를 게양하는 등 조의를 표하기로 하였는데, 국립대에까지 조의를 강요하였다.#[25] 국장에 후미히토 황사 부부, 남관표 주일대사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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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존 총리 최고령 타이틀은 2004년 스즈키 젠코가 사망한 후 무려 15년째 유지했던 타이틀로, 쇼와 시대 총리 중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한 인물이 되었다. 또한 헤이세이를 넘어서 레이와 시대가 개막하는 것까지 보았다. 레이와개원(2019년 5월 1일) 당시 100세였으며, 나루히토 즉위식 때까지도 생존해 있었으나, 워낙 고령이라 불참석하고, 즉위식 한달 후 사망했다. 나카소네보다 1년 더 살아 최장수 총리를 기록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메이지 시대에 태어나 헤이세이 시대까지 살았다.[2] 태평양 전쟁 개전 직전에 일본 해군에서 초급 사관들이 모자라자, 대학 출신 등 고학력자를 시험을 거쳐 선발하고 해군 중위로 임관시키던 제도를 말한다. 이 전전의 해군단기현역사관출신은 전후에도 엘리트로 군림하였고 선망받는 이미지가 있었다. 만화 천재 유교수의 생활 주인공 유교수가 전쟁 전 해군경리학교를 나온 단기사관이었다고 언급되기도 한다. [3] 대한민국 해군보급, 경리 병과에 해당하며, 피복, 서무, 회계 등의 업무를 맡는 병과다.[4] 일본은 개전 초기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점령을 위해 타라칸, 마나도, 발락파판, 켄다리 등에 연이어 상륙했으며, 일본군의 진공을 막기위해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 연합군(ABDA)이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해전을 묶어서 자바 해전이라고 부른다. 결과는 연합군의 참패와 일본군의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점령으로 끝났다.[5] 견장 테두리에 주계과를 뜻하는 흰색 줄이 있다.[6] (구) 군마 3구의 또다른 터줏대감이었던 야마구치 츠루오라는 인물은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1960년에 군마 3구에 첫출마해서 중선거구제 하에서 한번을 제외하고 모두 당선된 군마 3구의 터줏대감 중 1명이었지만 사회당은 38년간 만년야당이어서 총리직에 오르지는 못했고 무라야마 내각에서 총무청 장관을 역임했다.[7] 원래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을 비롯한 야당측에서 중의원 해산이 되면 선거에서 패배할게 뻔했던지라 중의원 해산을 반대하던 입장인데 자민당에서 선거법을 빌미삼아서 선거법 개정안과 함께 의회해산안을 단행했다. 물론 선거결과는 야당의 참패로 나왔던 것은 덤. 그래서 죽은 척 해산이라고 한다.[8] GNP 대비 1%는 1970년대에 미키 다케오 수상이 방위비 상한선의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다.[9] 이러한 계획에 따라 일본이 도입한 무기들이 F-15J 요격기, 공고급 이지스함, 그리고 자국산 지원전투기(FSX. 이후 F-2 바이퍼 제로) 개발 등이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군사강국 일본을 대표하는 주력으로 남아있다.[10] 나카소네에게 수교훈장 광화대장을 수여했을 때의 모습이다.[11] 이 회담을 성사시킨 주요인물 중 하나로 세지마 류조가 있었다.[12] 당시 나카소네 자신이 TV방송에 출연하면서 외국제 상품을 사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국민 여러분들도 외국 제품을 사다 쓰세요"라고 말하는 퍼포먼스를 보였지만 정작 국민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사실, 일본 시장은 기존 브랜드 파워가 굉장히 막강하여 신규 진입자는 터무니 없는 고가 고성능/터무니 없는 저가품으로 승부를 내야 했다.[13] 1위는 유일한 180cm 오쿠마 시게노부[14] 이 칼럼은 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도 수록됐다.[15]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지적수준 발언이란 단락으로 소개되어 있다.[16] 미군은 망보는 개, 나카소네 돌출발언, 미군은 망보는 파수견, 주한미군을 보는 눈[17] 하지만 막상 선거에서 이 후보가 낙선되었다.[18] 나카소네, 후쿠다 둘 다 지역기반을 타카사키시에 두고 있었으나(정확히는 나카소네가 해당 지역의 중심지 출신이었고, 후쿠다는 해당 지역의 변두리 출신이었다.), 당시 지역조직은 전직 총리대신 후쿠다 다케오의 아들 후쿠다 야스오가 장악을 한 상황이었다.[19] 원래는 지역구 출마를 하려고 했으나, 군마 4구에서는 후쿠다 야스오에게 밀렸고[18], 차선책으로 고려한 군마 5구에서는 타케시타 노보루의 강력한 푸쉬를 받은 오부치 게이조에게 밀렸다. 결국,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가 종신 비례대표 1번을 제안했고, 나카소네는 이를 수락하면서 지역구 출마를 포기했다.[20] 1996년 소선거구제로 전환될 당시, 지역구 공천에서 밀려났지만, 당시 자민당 지도부는 종신 비례대표 1번을 보장했다.[21] 특히 김태효 교수는 이명박 정부 시절 불과 40대의 나이로 청와대 대통령실 대외전략비서관으로 재직하며 주요 외교안보 현안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브레인이었고, 청와대 재직 중인 2009년에 수상했다. 그러다가 2012년 한일 군사정보교류협정 체결이 막판 무산되자 문책성으로 사직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카소네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재부각되어 친일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 교수는 자신의 여러 논문에서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을 강력히 지지해온 바 있다.[22]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23] 원문: 日韓併合には韓国側にも責任かある。[24] 원문: 文句を言っているヤツは世界史の中でそういうことをやったことはないのか考えてごらんなさい。こっちが認めるのはいいんですが、相手も認めてもらわんと困るじゃないか。あたりまえのこった。[25]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과학대신은 '강제성이 동반된 내용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법적인 강제성이 없다고 해도 정부기관에서 내려온 공문을 국립대학에서 '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