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타 히데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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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 히데토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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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1998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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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FIFA 월드컵/리저브




나카타 히데토시의 기타 정보




일본의 前 축구 선수

파일:나카타 히데토시.jpg

나카타 히데토시
中田 英寿(なかた ひでとし | Hidetoshi Nakata
출생
1977년 1월 22일 (47세)
일본 야마나시현 고후시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신체
175cm / 체중 72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소속
유스
니라사키 고등학교 (1992~1994)
프로
벨마레 히라츠카 (1995~1998)
AC 페루자 (1998~2000)
AS 로마 (2000~2001)
파르마 FC (2001~2004)
볼로냐 FC 1909 (2004 / 임대)
ACF 피오렌티나 (2004~2006)
볼턴 원더러스 FC (2005~2006 / 임대)
국가대표
77경기 11골 (일본 / 1997~2006)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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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후
5. 플레이 스타일
6. 평가
7. 기록
7.1. 대회 기록
7.2. 개인 수상
8. 나카타에 대한 말, 말, 말
9.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의 前 축구 선수. 현재는 국제축구평의회(IFAB) 축구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벨마레 히라츠카[편집]


9살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어린 시절 이미 미우라 카즈요시의 뒤를 이을 스타 선수의 재능을 보였다.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1995년에 벨마레 히라츠카[1]를 통해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 시즌을 치른 18살의 나카타는 26경기 8골을 터뜨리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1997년에는 J리그 베스트 XI에 뽑히기도 했으며,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한 이후 AC 페루자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2.2. AC 페루자[편집]


파일:external/www.sportcafe24.com/Hidetoshi-Nakata.jpg

1998년 여름 세리에 A의 페루자에 입단했다. 당시 나카타는 J리그에서 단 네 시즌밖에 안뛴 21살의 새내기 선수였으며 아무런 지원도 없이 혼자서 힘으로 이탈리아로 진출해서 활약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첫 시즌인 1998-99 시즌, 리그에서만 33경기 10골(4PK) 4어시스트[2]를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자신의 패션 센스와 현지 팬들의 감각이 일치했는데, 현지의 반응도 엄청 좋았다고 한다. 이후 팀 내 주전 선수로 도약, 1999-00 시즌 겨울에 세리에 A의 명문 클럽 AS 로마의 러브콜을 받았고 곧 이적했다.


2.3. AS 로마[편집]




2001년 5월 6일,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2-0으로 밀리고 있던 상황에 토티와 교체된 나카타는 후반 24분 30m 중거리 슈팅으로 만회골을 기록하고 경기 종료 직전 빈첸조 몬텔라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2-2 무승부를 이끌었다. 00/01 시즌 로마는 유벤투스를 승점 2점차로 제치고 스쿠데토를 차지했는데 나카타의 유벤투스전 활약은 리그 우승의 분수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벤투스전 인생 경기 하나만 가지고 그의 로마 소속 활약상이 좋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AS 로마로 이적하기는 했는데 당시 AS 로마의 주전 공격형 미드필더는 다름 아닌 프란체스코 토티였다.[3] 그렇게 첫 시즌에 주 포지션이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고 시원치 않자 그 다음 시즌이자 우승 시즌에는 아예 토티의 백업 자원으로 분류되었다. 당시 출전 시간은 531분에 불과했으며,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기 힘들다.[4] 당시에도 나카타가 토티의 포지션 라이벌로 등장하면서 토티가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출처 자체가 불분명하고 신빙성이 낮은 루머였다.[5]

당시 세리에 A가 세계 올스타를 연상시킬 만큼 유명한 선수들이 많았고 이른바 7공주 시절이었다는 압도적인 수준이었다는 이유로 올드팬들 사이에서는 나카타가 스쿠데토 멤버였던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견들도 많다. 그러나 7공주 시절이라며 추억 보정으로 얘기되는 것과 달리 실상은 UEFA 랭킹이나 유럽 대항전 결과들을 볼 때 나카타가 AS 로마로 이적하고 활약하는 시점에서 압도적이었던 세리에 A의 전성기는 끝이 났고 오히려 재정 규모에 맞지 않는 과도한 투자로 쌓인 거품이 빠져가기 시작하고 유럽 대항전에서도 그 전의 모습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동네북으로 전락한 시기였다.[6] 정확히 1999-00 시즌부터 라리가에게 유럽 리그 랭킹 1위 자리를 내줬고, 1995-96 시즌 유벤투스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이후 2002-03 시즌 AC 밀란이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할 때까지 세리에 A의 어느 팀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으며[7], UEFA 유로파 리그의 경우 1998-99 시즌 파르마 이후로 우승팀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8] 2009-10 시즌 인테르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거둔 뒤로 세리에 A에선 그 어떤 유럽 클럽 대회 우승이 없었다가 공교롭게도 인테르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당시 감독이던 주제 무리뉴가 다시 세리에 A로 돌아와 감독을 맡았는데 그게 바로 AS 로마였고 감독을 맡은 첫 시즌인 2021-22 UEFA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에서 우승하며 12년 만에 세리에 A 구단에 유럽 대항전 우승컵을 다시 안겼다.

그럼에도 당시 유럽에 진출한 아시아 축구 선수들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아시아 축구와 유럽 축구와의 수준의 차이가 컸던 것을 감안하면 어찌 됐든 아시아 역대 최초의 스쿠데토 멤버[9]인 만큼 아시아 축구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여지는 충분하다.


2.4. 파르마 FC[편집]


2001-02 시즌 안정적 주전 확보를 위해 파르마로 이적했는데, 당시 이적료가 1,850만 파운드(약 2,600만 유로)라는 세리에 A급 선수 랭크. 당시 가이스카 멘디에타가 발렌시아에서 라치오로 이적할 때 이적료로 4,800만 유로를 기록하는 등 7공주 시대답게 선수들 몸값이 펑펑 뛰었던 때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상당한 이슈였다. 하지만 파르마 팬들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후이 코스타를 노리고 AC 밀란과 경합했지만, 3,000만 파운드에 AC 밀란으로 이적하면서 꿩 대신 닭 격의 영입이였기 때문이다.

파르마로 이적한 나카타는 초반에 좋은 모습을 보였다. 특히 2001-02 시즌 유벤투스와의 코파 이탈리아 결승 1차전에서 골을 넣는 등 맹활약하며 파르마의 통산 3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에 기여했다.[10] 그러나 그 이후 팀 내에서 겉도는 모습을 보인데다가 전체적인 기량까지 크게 하락했는데 속사정을 살펴보면 파르마 시절 프란델리 감독과 전술적 견해 차로 인해 불화가 있었고 고질적인 부상으로 인해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특히, 본인의 베스트 포지션이 아닌 윙어로 올라오면서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점점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늘어갔고 이는 경기력 저하로 이어졌다.[11]

첫 시즌에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의 시즌 평점에서 리그 전체 선수 중 최하위 7위에 머무르며 심각한 평가를 받았다. 세 번째 시즌 겨울에는 볼로냐로 임대를 떠났으나 기량이 떨어질대로 떨어져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5. 말년[편집]


볼로나에서의 임대 생활이 끝난 이후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했으나,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며 현지 팬들의 신랄한 비판들을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시즌에는 파르마 시절에 불화를 겪었던 프란델리 감독이 부임하면서 볼턴 원더러스로 임대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볼턴에서도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의 경기에서 프리킥으로 골을 넣긴 했으나 그 외에는 활약이 거의 없어 현지 언론으로부터 팀 내 최저 평점을 받고 말았다.[12] 애초에 나카타의 플레이 스타일이 프리미어 리그의 스타일과도 그렇고, 특히나 킥 앤 러시 축구를 구사하는 샘 앨러다이스 당시 볼턴 감독의 전술에 맞지 않으니 예견된 결과였다.

이렇게 가뜩이나 경기력도 저하된 마당에 라이벌이자 후배인 나카무라 슌스케의 급성장 등은 나카타의 대표팀 내 입지도 좁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려운 상황에 지친 나카타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 1무 2패로 탈락한 후인 7월 3일, 29세라는 이른 나이에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대표팀 은퇴도 아니고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나카타의 은퇴 소식은 당시 일본 축구계를 뒤집어 놓았고, 대한민국중국 등 여러 외국들도 은퇴에 대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로 꽤나 놀랐다. 현역 은퇴가 아니라 대표팀 은퇴 아니냐고 의아해하기도 했고, 이렇게 은퇴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팬들은 금방 다시 복귀할 것이라는 의견을 냈지만, 그는 끝내 선수로 영영 복귀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나카무라 슌스케가 주도한 파벌에 왕따를 당하면서 국가대표팀에 진저리를 느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당초 파벌 운운은 루머에 불과하고 이 은퇴는 국가대표 은퇴가 아니라 현역 은퇴였다. 은퇴 이유로는 클럽에서도 국가대표팀에서도 예전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자 한계를 느끼고 그만뒀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U-17 대표로 93년 U-17 월드 챔피언십(현 FIFA U-17 월드컵)에 출전했고, 95년에는 월드 유스 챔피언십(현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했다. 두 대회 당시 일본 대표팀의 중심은 언제나 나카타였다는 걸 생각하면 전형적인 엘리트의 길을 걷고 있었던 셈.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에도 합류해서 애틀란타 올림픽 예선 1차전 브라질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둔 멤버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13] 일본은 2승 1패를 했으나 골득실에 밀려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97년 5월 한일전에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3.1.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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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는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맹활약했다. 도쿄 대첩으로 회자되는 당시 지역 예선에서 일본은 2위를 차지, 본선 직행에는 실패했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이란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일본은 3-2 승리를 거두고 사상 최초로 본선에 진출했는데 3골 모두 나카타가 어시스트한 골이었다.

그 후 월드컵 본선에서 일본 대표팀은 3전 전패했지만[14] 나카타는 월드컵 올스타팀 62인 후보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대회가 끝난 후 세리에 A에 진출했다. 그리고 1997, 1998년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상까지 수상하며 전성기를 맞이한다.


3.2.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편집]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준우승을 이끌면서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3.3.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조국에서 열린 2002 한일 월드컵에 참가해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오노 신지, 야나기사와 아쓰시, 이나모토 준이치와 함께 일본의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에 기여했다. 대회가 끝난 이후 월드컵 올스타팀에 리저브 멤버로 선정된다.


3.4. 2006 FIFA 월드컵 독일[편집]


2006 독일 월드컵에도 참가하였으나 호주와 브라질에게 각각 1-3, 1-4 역전패를 당하며 1무 2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브라질 전 패배 후 나카타는 그라운드에 쓰러져 한동안 눈물을 쏟았으며, 이윽고 국가대표 은퇴는 물론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4. 은퇴 후[편집]


그 후 약 3년 간 세계 여행을 한 그는 현재 사업가, FIFA 홍보 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은퇴 후에도 여러 자선 축구 경기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2018년 6월 29일에는 월드컵 전 일본 대표 특집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일본주(日本酒)를 홍보, 마케팅하는 JAPAN CRAFT SAKE COMPANY의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매실주맛 킷캣이 나카타가 검수한 상품이다. 2020년 3월 16일에 릿쿄대학에서 "나카타가 4월 1일부터 경영학부 객원 교수로 취임한다."고 발표했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 전형적인 클래식 10번으로 중앙에서 볼 간수도 훌륭하고 시야도 넓어서 전진 패스, 스루 패스를 쫙쫙 뿌려댔다. 수준급인 중거리슛도 주무기이다. 현대 축구의 빌드업부터 마무리 패스까지 도맡아 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진출 전부터 일본 내에서는 피지컬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선수였지만, 유럽 진출 후에는 유럽 빅리그의 피지컬 좋은 수비수들과의 몸빵에서도 밀리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특히 힘과 별개로 무너지지 않는 신체 밸런스가 상당히 좋았다.

종합하자면 훌륭한 몸빵을 바탕으로 중앙에서 버티고 볼 간수를 하면서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패스를 시원시원하게 뿌려주는 공격형 미드필더였다.[15] 세트피스도 뛰어나서 일본 국대의 세트피스를 도맡아했으며 나중에는 오노 신지, 나카무라 슌스케 등과 팀 내 최고의 키커를 두고 경쟁하기도 했다. 그 중 오노와 누가 프리킥을 찰 것인가 경기 중에 가위바위보를 했던 것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6. 평가[편집]


1990년대 일본 축구를 대표했던 미우라 카즈요시를 잇는[16]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였다. 일본 축구의 축복이라 불린 선수였지만, 짧았던 전성기로 인해 29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면서 큰 화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1990년대 후반 한일전 때는 한국 대표팀이 가장 경계했던 일본 선수이기도 했다. 특히 1999년 한일 올림픽 대표팀 정기전에서는 나카타의 킬패스에 번번이 수비가 뚫리면서 무려 4골을 먹히고 1-4 대패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나카타 히데토시는 그야말로 한일전의 최대 적수나 다름없었고, 집중적으로 나카타를 방어해주는 것만 전담해줄 수 있는 마크맨(최성용)까지 붙여야 했을 정도였다.[17][18][19]

무시무시한 스루 패스 능력으로 공간을 만들고 침투시키는 능력 하나만큼은 일본에서 최고였다. 항상 빈 공간으로 킬패스를 찔러주고 치명적인 슈팅 찬스를 만들어주는 플레이를 보여줬기 때문에 한국 팀에게 나카타는 언제나 골치 아픈 선수였다.

세리에 A에 진출하며 우승도 하던 전성기 시절인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는 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자국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아시아 선수들에게 동경 혹은 자극의 대상이기도 했다.[20]

전성기가 짧았고 다득점을 하는 플레이 스타일이 아니었던 데다 팬들의 지나친 고평가[21]에 대한 반동으로 나카타의 커리어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22] 어쨌거나 차범근에 이어서, 그리고 후대의 박지성, 손흥민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은 확실하다.


7. 기록[편집]



7.1. 대회 기록[편집]







7.2. 개인 수상[편집]


  • FIFA 올해의 선수 후보: 2001 (27위), 2002 (30위), 1998 (38위), 1999 (40위)[23]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2 (리저브)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볼: 2001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스타팀: 2001
  • J리그 베스트 XI: 1997
  • J리그 20주년 베스트 XI: 2013
  •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1997, 1998
  • 아시아 이달의 축구 선수: 1997년 5월, 1998년 3월
  • AFC 아시안 올스타[24]: 1997, 1998, 1999
  • 다이너스티컵 MVP: 1998
  • FIFA 100: 2004
  • 골든풋: 2014
  • IFFHS 레전드: 2016
  • 일본 프로스포츠 대상: 1997
  • AFC 아시아 월드컵 올타임 XI: 2020[25]


8. 나카타에 대한 말, 말, 말[편집]


파일:나카타 히데토시 jap.jpg

일본 국적을 지닌 여러 선수들이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진정한 슈퍼스타는 없다. 혼다의 경우도 완벽한 성공은 아니다. 과거 세리에 A에서 활약했던 나카타 히데토시의 경우엔 카리스마와 개성, 실력을 모두 갖췄다는 점에서 뛰어난 평가를 들을만 했지만 나카타 이후 그의 뒤를 이을 만한 선수는 아직 없다.

아르센 벵거


나카타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선수다. 그는 아시아 그리고 일본 축구의 얼굴로서 기억될 것이다.

샘 알라다이스


그는 기술적인 선수이며 특별히 빠르지는 않지만, 순발력이 뛰어나다. 그는 상대로부터 공을 빼앗는데 능숙하며 신체적으로 뛰어나거나 키가 크지는 않지만 자신보다 훨씬 큰 선수를 상대할 수 있는 뛰어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프란체스코보다 뛰어나다.

파비오 카펠로


그를 영입한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솔직히 그가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

루치아노 가우치 (前 AC 페루자 칼초 구단주)


히데가 굿 플레이어인 것은 확실하다. 어디에라도 있다고 할만 한 선수는 아니다. 미드필더로서 필요한 자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라고 말할 수 있다. 피치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스테미너와 패스 능력, 거기에 돌파하면서 슈팅까지 이어갈 수 있으니 좋은 미드필더라고 할 수 있다. 넓은 시야, 뛰어난 주력과 지구력, 강력하고 정확한 슈팅 능력이 그의 장점이다.

디노 조프



9. 여담[편집]


  • 22살 때 AS 로마로 이적한 후 前 소속구단인 쇼난 벨마레가 2부 리그로 강등당하여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자, 자신이 직접 벨마레의 스폰서가 되었고[26], 지금까지도 계속 스폰서를 해오고 있다.

  • 홍명보J리그에 진출했을 때 같이 벨마레에 있었는데 그때 영어책을 항상 끼고 다니면서 해외 진출을 준비한 것을 보고 야망이 큰 선수라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칭찬했었다. 여튼 이러한 인연 때문에 홍명보와 나카타는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27]

  • 사실상 아시아 선수들이 유니폼팔이가 된다는 개념을 만들어낸 시조급이다. AC 페루자 칼치오 입단 당시 일본에서 유니폼이 많이 팔리고[28] 경기마다 일본인이 찾자[29] 이에 고무된 구단 측에서 한국에서 안정환을 입단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작 한국인들이 유니폼도 안 팔리고 경기장도 찾지 않자 구단에서도 대놓고 안정환에게 한국인들이 왜 유니폼과 경기장을 찾지 않냐고 하기도 했다고.당시기사 물론, 나카타가 현재 통용되는 유니폼팔이들처럼 실력이 없는데도 유니폼만 잘 팔았던 선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래부터 유럽 관광을 잘 다니고 즐기던 일본인들이 유럽 리그에 소속된 자국 선수가 활동하자 그 현장에서도 찾아가서 놀라운 구매력을 보여준 덕분에 유럽이 일본 시장을 다시 보게 되었으며 이후 실력이 조금 모자라도 일본 출신 선수들은 재정 수입을 바라고 마케팅용 선수로 영입하는 경우가 늘어서 덕분에 많은 일본 선수들(이나모토 준이치, 스즈키 다카유키, 다카하라 나오히로, 니시자와 아키노리, 나카무라 슌스케 등등)이 유럽에 진출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 발롱도르 주관사인 프랑스 풋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선수다. 나카타는 발롱도르 후보에 3차례나 올라 (1998, 1999, 2001) 발롱도르 후보에 2회 이상 오른 유일한 아시아 선수다. 다만 나카타의 활약상을 봤을 때 정말로 당시 세계 50인 안에 들만한 실력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당시 발롱도르는 다음 년도인 2002년에도 단순히 월드컵 개최국의 스타들이었던 설기현, 이나모토 준이치를 후보로 뽑으며 아시아 쿼터의 존재가 의심될 정도로 아시아 선수들에게 관대했다.

  • FIFA 올해의 선수상에서도 4차례나 득표하며 순위권에 올랐다. (1998, 1999, 2001, 2002) 우리나라에서는 홍명보가 2차례 순위에 오른 적이 있다. (1996, 2002)

  • 나카타는 자국 언론을 싫어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기자들이 자신의 발언을 자극적으로 바꿔서 보도하곤 했기 때문이다. 나카타가 '기미가요는 촌스럽다'는 발언을 했다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가 대표적이었는데 이 보도로 인해 나카타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우익들의 협박을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 나카타는 아사히의 기사와 달리 기미가요는 촌스럽다고 발언한 게 아니라 스포츠 경기 직전에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이었고 현역 시절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한 적도 없었다. 실제로 월드컵 등에서 그는 다른 일본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기미가요 잘만 불렀다.[30]

  • 본인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반농담성 게이 의혹을 받고 있는 선수 중 하나다.[31] 심지어 구글에 Is Hidetoshi까지만 입력해도 "Is Hidetoshi Nakata gay?"가 자동완성되거나, 남자와 함께 사진이 찍혀도 찌라시에 크게 실린다. 아무래도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과, 게이들이 구독하는 잡지에 표지 모델로도 나오는 등 꽤 성소수자에 우호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32]

  • 옷 잘 입는 패셔니스타로도 유명해서 미국의 남성지 GQ에 소개된 적도 있고 미국의 패션 잡지 '베너티 페어'에서 선정한 제 68회 베스트 드레서 남성 부문 8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 나카타는 인맥이 엄청난 선수로 유명한데 자신과 친한 선수들만 해도 대부분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들이다.[33] 자신이 주최한 자선경기에 초청한 선수들 면면을 봐도 유럽 생활을 성공적으로 보냈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신이 주최한 자선 경기에 주제 무리뉴 감독을 초청한 적도 있다.

  • 이름의 구성 방식 때문에 재일 논란이 있기도 했었다. 이름인 英寿는 일본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 조합인데 비해, 한자를 우리식으로 독음하면 '영수'가 된다는 것. 다만 이 논란 자체도 바보같은 게, 한국에서 영수는 대부분 永秀나 永壽로 쓴다. 英寿란 이름은 한국에도 없다. 나카타는 이 논란에 대해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일본 여권이 있고, 부모님이 일본인이니 일본인이 맞지만, 국적이 무슨 소용이냐''며 쿨하게 대꾸한 바 있다.#

  • 2006년 비키니 차림의 여친과 보라보라 섬에서 2박 3일의 휴가를 보내는 모습이 일본 잡지에 실리며 열애가 공개되었는데,# 이 상대가 국내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바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한일합작 아이돌그룹 써클 멤버로 활동했던 중국계 일본인 바이슈에(시라 유키)였기 때문.

  • 이나즈마 일레븐 2에 나오는 유명한 사기 캐릭터이자, 애니메이션 3기에서 본격적으로 나오는 히데 나카타는 나카타 히데토시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히데 나카타의 모히칸 헤어스타일도 AS 로마 시절 나카타의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따왔다. 한창 잘나갈 때에는 프로 에볼루션 사커에서도 사기캐였다. 분명 스탯은 그 정도가 아닌데 숨겨진 보정치가 많이 추가돼서 실제 사용감은 지네딘 지단보다 낫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 무라카미 류의 소설 <악마의 패스>는 주인공 야하네 도지가 멜레니아라는 가상팀에서 활약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사실 이 소설은 나카타 히데토시의 세리에 A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소설이다. 특히 1999-2000년 AC 페루자와 좀 비슷하게 그려지는데, 당시 페루자가 약체이기는 했다. 나카타가 처음 이적한 98/99시즌이자 작중 1년전 시점의 페루자가 강등 바로 윗순위로 간신히 살아남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페루자는 지금보면 진짜 엉망진창이었는데, 유스 출신인 젠나로 가투소는 임대보내다가 나카타가 들어오기 전해에 레인저스로 이적시켰고, 2부 리그 시기에 좀 쓰다가 세리에 A 승격 이후 임대만 전전 시키다가 역시 가투소와 같은 해에 에버튼으로 이적시킨 선수가 바로 마르코 마테라치다.[34] 이런 상황에서 하드캐리 했던 나카타의 활약을 좀 더 과장해서 쓴 소설이 악마의 패스인 것. 여담으로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당시 세리에 A 7공주 시절 상대팀 선수들 보는 맛도 쏠쏠하다.[35]

  • FIFA 18 러시아 월드컵 DLC에서는 국가대표 아이콘으로 등장했다.[36] 그 후 후속작인 FIFA 19 에서는 아이콘으로 출시되었다. 프라임 카드 능력치는 88. FIFA 23에서는 히어로로 강등되었다.

  • 2019년 2월 PES에서 박지성, 프란체스코 토티와 함께 출시됐는데 해당 게임을 만든 회사가 일본 기업인 코나미라서 그런지 능력치가 과장되어 있다는 평이 많다. 능력치 자체는 박지성과 같은데 마스터리그에서 키웠을 때 만렙 능력치가 박지성보다 높기 때문.

  • 라이크 라이프에서는 구기 대회와 관련해서 언급되기도 했다. 참고로 한글 패치판에서는 박지성으로 변경되었다.

  •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127화에서 노민정권오중이 TV로 나카타 히데토시가 나오는 경기[37]를 보다가 노민정이 좋아하면서 나카타가 한 골 넣으라고 응원하자 권오중이 이유를 묻는다. 노민정이 나카타가 잘 해서라고 하자 권오중은 황선홍, 고종수한테 안된다고 그러고 다시 노민정이 나카타가 잘 생겨서라고 하자 권오중은 안정환, 이동국이 더 잘 생겼다고 말한다. 당시 한국에서의 나카타 히데토시에 대한 양가적 인식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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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쇼난 벨마레[2] 출처 기사[3] 당시 AS 로마의 스쿼드는 프란체스코 토티,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카푸, 알다이르, 빈첸초 몬텔라 등 슈퍼스타들이 즐비했다.[4] 대신 UEFA컵에서는 선발로 기용되어 토티가 리그 우승에 전념하는데 쏠쏠한 도움을 줬다.[5] 만약 토티가 진짜로 당시에 불면증에 시달렸다면 자신이 AS 로마의 주장으로 있으면서 세리에 A의 다른 빅클럽들을 제치고 반드시 우승을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에 의한 중압감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당시 팀 내 최고의 선수이자 세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이었던 전성기의 토티와 백업 선수에 불과했던 나카타는 레벨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나카타의 실력이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상대가 너무 안 좋았던 것.[6] 과도한 투자를 한 세리에 A의 중소 규모 클럽들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결국 재정난에 시달리며 빅클럽에 스타 플레이어들을 이적시켜야 했다. 나카타와 같이 로마에서 우승을 한 피오렌티나 소속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AS 로마 이적, 라치오 소속의 파벨 네드베드의 유벤투스 이적, 알레산드로 네스타의 AC 밀란 이적, 피오렌티나 소속의 후이 코스타의 AC 밀란 이적, 파르마 소속의 잔루이지 부폰릴리앙 튀랑의 유벤투스 이적, 파비오 칸나바로의 인터밀란 이적이 그러한 경우다. 빅클럽들은 빅클럽대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해도 우승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결국 다른 나라의 빅클럽들에 스타 플레이어들을 이적 시켜야 했다. 유벤투스 소속의 지네딘 지단과 인터 밀란 소속의 호나우두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이 그러한 경우다.[7] 1998-99 시즌부터 2001-02 시즌까지는 어느 세리에 A팀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커녕 결승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1999-0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AC 밀란이 조별 리그에서 최하위로 탈락했으며, 2000-01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인터 밀란이 조별 리그 진출조차 하지 못하고 스웨덴의 헬싱보리에게 밀리며 예선에서 탈락, 유벤투스가 지단의 박치기 퇴장 징계의 영향이 있다고 하지만 조별 리그에서 최하위로 탈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7공주로 대표되는 평준화가 몰락하고 AC 밀란, 인터 밀란, 유벤투스 등의 빅클럽으로 선수들이 쏠리고 나서야 이들 빅클럽을 중심으로 세리에 A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시 우승을 했다.[8] 일부 세리에 A 팬들은 7공주 시절 리그 우승이 유럽 대항전보다 더 중요해서 유럽 대항전은 포기하고 리그에 집중한 거라고 변명을 하지만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할 경우의 수익이 리그 우승보다 더 크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오히려 1997-98 시즌부터 리그 챔피언들만 나가던 유러피언컵이 리그 챔피언이 아니어도 리그 상위권 팀들이 나갈 수 있는 UEFA 챔피언스 리그로 개편 되었기 때문에 유럽 대항전 진출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수익을 노리고 과도한 투자를 하면서까지 리그에 집중했던 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9] 두 번째는 SSC 나폴리 소속으로 2022-23 시즌 스쿠데토를 따낸 한국의 김민재.[10] 유독 유벤투스에 강했다. 페루자 시절에도 1998-99 시즌 유벤투스전에서 혼자 2골을 넣으며 분투했지만 아깝게 3-4로 지기도 했다.[11] 그래도 파르마라는 팀 자체에 대한 애정은 어느 정도 있어서 2015년엔 파르마가 세리에 B로 강등되어 안타깝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하였다.[12] 이 무렵에 볼턴과 인접한 지역에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과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는 기사도 실린 적이 있었다. # 이로 인해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것인지 박지성의 첫 자선경기에 나카타가 나오기도 했다.[13] 당시 브라질 올림픽 대표팀 멤버는 디다, 호베르투 카를로스, 주니뉴 파울리스타, 히바우두, 호나우두... 그야말로 초호화 라인업이었다.[14] 아르헨티나, 크로아티아 상대로 0:1로 패배했는데 당시 크로아티아는 다보르 슈케르, 즈보니미르 보반 등 전설들이 활동하던 황금 세대였다. 또한 경기 내용도 그렇게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래서 마지막 경기인 자메이카는 충분히 이길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결과는 자메이카에게도 1:2로 패배하고 말았다.[15] 다만 지쿠 감독이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던 시절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기도 했다.[16] 참고로 미우라 카즈요시는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17] 여담으로, 일본의 축구 만화인 우리들의 필드에 나오는 한일전에서는 한국팀이 일본팀의 에이스이자 주인공인 다카스기 카즈야를 무력화시키고자 전담 마크맨을 붙히는 스토리가 나온다. 참고로 이 만화에서 윤성용은 주인공의 스태미너를 이기지 못하고 후반 막판에 토하면서(...) 리타이어하는 바람에 판정패. 그래도 그나마 카즈야를 후반 막판까지 묶어놓은 덕분에 게임 자체는 0대0으로 끝났다.[18] 참고로 실제 한일전에서 한국팀이 나카타에게 전담 마크맨을 붙이기 시작한건 만화에서 해당 내용이 나온 뒤였다. 만화의 내용은 나카타보다는 당시 한일전에서 미우라나 마에조노같은 일본의 키플레이어를 전담 마크맨을 붙여 막아내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19]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정식 A매치에서 나카타가 한국을 상대로 골을 넣은 적은 없었고, 최전성기인 AS 로마 시절 2000년에 잠실에서 열린 한일전에서는 하석주가 결승골을 넣는 것을 봐야 했다.[20] 2002 월드컵 당시 피파 월드컵 홈페이지에 일본 대표팀 동료 오노 신지가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진출하면서 나카타를 라이벌로 의식하는 듯 한 내용이 실린 적이 있고, 한국의 경우 이천수레알 소시에다드 진출 당시 목표로 삼는 선수로 나카타를 들면서 자신이 나카타를 넘어서겠다고 의식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고,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진출 당시 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얼굴이 나카타에서 박지성으로 바뀌는 한국 만평도 나온 적이 있다.[21] AS 로마의 역대 베스트 11에 포함되거나 토티의 포지션 경쟁자로 등장해서 토티가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루머 등이 이에 해당된다.[22] 자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급격히 늘어나던 시기에 선구자로서 빅리그에서 뛰었다는 점, 현역 시절 자국에서 과대평가 및 신격화되었다는 점, 은퇴가 빨랐다는 점, 은퇴 이후 뛰어난 후배 선수들의 등장으로 인해 현역 시절 과대평가된 만큼 오히려 실제보다 폄하되고 있다는 점 모두 한국의 박지성과 유사한 특징이다.[23] 2002년에는 2점, 1998년, 1999년, 2001년에는 1점을 득표하며 순위에 올랐다.[24] 2000년에 폐지[25] 팬투표, 옵타 선정 베스트 XI에 모두 포함되었다.[26] 유니폼 스폰서 계약(자신의 홈페이지 'Nakata.net')과 벨마레 후원회 계약. 전직 선수가 팀 스폰서가 된 사례는 전세계적으로도 드물고, 일본에선 이 사례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후 J리그와 여자축구 리그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음으로써 대인배 인증.[27] 일본식 이름 문화를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일본에서는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웬만큼 친해지지 않으면 힘든 경우다. 나카타는 홍명보를 '명보상'이라고 부르고 홍명보는 나카타를 '히데'라고 부른다고 한다.[28] 유니폼 7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무려 84억원 어치였다고..[29] 2002 월드컵 당시 피파 월드컵 홈페이지에서 나카타 덕분에 페루자도 기존의 관광 코스였던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와 더불어 일본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고 소개했었다. 페루자란 곳이 별볼일 없는 곳은 결코 아니지만 이탈리아의 다른 명소들에 비하면 이름값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할 수 없는 건 사실인데 이런 조그만 동네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대거 찾으니 구단과 주민들 입장에선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30] 아사히 신문의 나카타 기미가요 발언 왜곡 보도는 일본에서도 전형적인 날조와 왜곡 보도의 표본으로 취급받고 있다. #[31] 다만 원래 일본 2ch에서는 나카타 뿐만 아니라 반농담성 게이 의혹 제기를 받고 있는 노총각 유명인들이 제법 있다.[32] 다만 나카타가 연애를 한번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일본 여배우 시바사키 코우와도 잠깐 동안이지만 사귄 적이 있고 # 그 전에도 일본 여배우 미야자와 리에와 염문설이 돌았던 적이 있다.#[33] 예를 들면 루이스 피구, 호나우지뉴,파비오 칸나바로, 페르난도 이에로[34] 이후 마테라치는 00/01 시즌에 재영입되었다.[35] 게임 시작 전 배치도에 파르마, 피오렌티나, 유벤투스 로스터가 있는데, 이게 ㅎㄷㄷ하다. 파르마에는 잔루이지 부폰, 릴리앙 튀랑, 파비오 칸나바로, 디노 바조, 아리엘 오르테가, 에르난 크레스포가 있고, 피오렌티나에는 프란체스코 톨도, 후이 코스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뛰고 있고, 유벤투스는 에드빈 판데르사르, 치로 페라라, 잔루카 잠브로타, 안토니오 콘테, 에드가 다비즈, 잔루카 페소토, 지네딘 지단, 필리포 인자기,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의 팀이다.[36] 미로슬라프 클로제 등의 선수들과 같이 추가되었는데 한국에선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일본인 선수인데다 같은 포지션에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지뉴 같은 레전드 선수들이 있어서 그런듯하다.[37] 권오중이 일본과 호주의 경기라고 언급한 것과 경기 화면 모습을 보면 방영 시기 얼마 전에 열렸던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경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