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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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태섭.jpg
성명
나태섭(羅泰燮)
이명
왕중량(王仲良)
생몰
1901년 6월 26일 ~ 1989년 5월 9일
출생지
황해도 안악군 문산면 원성리
본관
나주 나씨
사망지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구문천리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중국에서의 활동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
2.4. 광복 이후의 경력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나태섭은 1901년 12월 16일 황해도 안악군 문산면 원성리에서 부친 나관혁, 모친 김관옥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는 왕중량(王仲良)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해서, 본명보다도 왕중량으로 잘 알려졌다. 그의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중동학교에 입학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그는 1920년 3월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사이 3.1 운동에 참가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후 고향인 안악군의 봉심학교(奉三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기관인 대한적십자사의 부회장 안정근(安定根)의 지시를 받고 고향 선배인 최익형과 함께 매화동과 안악, 신천, 재령, 사리원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또 고시복, 김상직, 권영선[1], 최한병 등의 동지를 규합했다.

그러던 중 최익형이 일본 경찰에게 붙들리면서 나태섭의 행적이 노출되었다. 이에 그는 타지에서 장사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집안의 재산 일부를 정리한 후 봉삼학교에서의 교육과 독립운동 자금의 지속적인 모금을 고시복 등에게 부탁한 뒤 1923년경 원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원산에서도 일제 경찰의 추적이 계속되자, 결국 그는 1927년 5월 경 상하이로 망명했다.


2.2. 중국에서의 활동[편집]


나태섭이 1927년 7월 상하이에 도착한 뒤 1934년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미해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 독립운동 단체나 상하이 한국독립당과 관련있는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934년 2월 경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만에 입교했고, 거기서 이범석, 조경한(趙擎韓), 윤경천(尹敬天), 한헌(韓憲) 등 교관들에게 각종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나태섭은 1934년 8월 한인특별반을 중도에 그만뒀다. 한인특별반 운영을 총괄하는 김구와 교육과 훈련을 주관하는 지청천 사이에 발생한 불화로 인해 김구가 한인특별반 입교생 중 자신의 휘하에 있는 인물 25명을 난징으로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나태섭은 김구의 주선에 따라 학생 13명과 함께 난징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여 중국의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육군기계화교경학교(陸軍機械化交輕學校) 수업도 이수했다.

또한 나태섭은 1934년 12월에 조직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 결성식에 참여하여 제1대장으로 선임되었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은 김구의 지도력을 절대 옹호하고 철저한 복종을 규율화함으로써 김구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하는 사조직 성격이 강한 특무활동기구였다. 그는 특무대독립군의 결성식에 참여하여 "본인은 특무대에 가명하여 김구 선생님의 지도와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본 대의 규칙을 엄수할 것을 자에 서약함"이라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하고, 특무대의 참모인 안공근에 의해 제1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6월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서 보병과를 졸업한 나태섭은 같은해 11월 10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보궐 선출되었다. 이에 앞서 제 29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새롭게 당선된 의원들에 대해 심사가 진행되었는데, 나태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왕중량(王仲良), 나이 37세, 직업 학업, 학식 군교필업, 경력 모지군교를 졸업하고 군사연구를 더욱 하는 중이며 청년계의 신망이 유함.


그러나 나태섭은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1939년 10월 3일에 개회된 제31회 임시의정원 의회까지는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중국군과 전투 진행지역에서의 일본군의 각종 배치현황 등 정보 수집이나 임시정부의 항일특무공작원의 모집과 같은 별도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의 산하단체로 결성된 한국국민당청년단의 단장을 맡아 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의 단원들에 대한 보호 및 대일정보 수집, 동지 규합, 인쇄물 등 선전활동, 친일분자 및 일본인 정보원들에 대한 처단 등 임시정부의 옛 경무국에서 진행하던 일들을 수행했다.

이후 나태섭은 임시정부의 특별 지시에 따라 이하유(李荷有), 조시제(趙時濟) 등의 동지와 함께 광서성으로 파견되어 대일군사 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과 정찰, 초모공작을 위한 기초정보 수집 등의 활동을 수행하면서 고향인 안악으로 사람을 보내 고향 후배인 고시복 등을 중국으로 망명하게 했다. 또한 1937년 말에는 중국 관내 각지를 이동 중인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을 충칭으로 옮기는 일을 중국군과 협의해 중국군의 차량을 지원받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을 충칭으로 옮기는 데 일조했다.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편집]


1938년 5월 7일, 중국 창사의 조선혁명단 본부인 남목청에서 개최된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포회의에서 조선혁명당의 이운한(李雲煥)이 난입해 권총을 발사하여 김구, 유동열, 현익철, 지청천 등 지도자들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벌어졌다.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고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을 입고 상아의원으로 후송되었으며, 현익철은 병원에서 사망했다.[2]

이후 나태섭은 1938년 7월 1일 현익철을 대신해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겸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39년 10월 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군사특파원으로 선임되었다. 군사특파원은 1938년 7월에 구성된 군사위원회의 위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주임 조성환은 1939년 당시 군사부장으로써 군사위원회의 책임자였고, 나태섭과 함께 군사특파원으로 선출된 이웅(이준식)과 황학수 역시 군사위원회의 위원들이었다. 이후 나태섭은 조성환, 황학수, 이웅(이준식), 노복선(盧福善), 서파(徐波) 등으로 구성된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시안을 향해 출발했다.

군사특파단 일행은 10월 하순 시안에 도착한 뒤 먼저 시안성 안의 통제방(通濟坊)에 판사처, 즉 사무실을 설치했다. 임시정부에서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국인 장교들에게 한국광복군으로 참여할 것을 명령하였고, 중국군을 제대한 인원들을 군사특파단에 참여시켰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외무장 조소앙의 차남인 조인제(趙仁濟)와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 노백린의 차남 노태준(盧泰俊),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춘생(安椿生) 등이 군사특파단에 참여했다. 이밖에도 현지에서 이석화(李錫華)와 김자동(金紫東) 등이 군사특파단에 참여했다.

군사특파단의 주요임무는 시안에 군사거점을 확보하고 화북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과 한국광복군으로 모집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나태섭은 1940년 11월까지 시안에서 군사특파단 단원으로서 활동하다가 1940년 11월 시안에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시안판사처가 설치되면서 끝마쳤다. 단장 조성환은 한국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된 지청천의 후임으로 군무부장에 선임되었고, 나머지 단원들은 서안총사령부의 간부로서의 활동을 계속했다.

나태섭은 1940년 8월 10일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황학시, 조시원과 함께 총사령부 참모로 임명되었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시안판사처의 부관조(副官組)의 부관으로도 활동을 지속했다. 또 제2지대가 편제되었을 때 고시복, 지달수(池達洙), 유해준(兪海濬), 이욕해(李慾海) 등과 함께 제2지대 창설 간부로 선임되었다. 1941년 2월엔 지대장 고운기, 지달수, 유해준과 함께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로 진출하여 모병 및 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 뒤이어 중국군 제12전구 사령장관 부작의(傅作義)의 예하 각 부대와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받으며 수원성 포두를 중심으로 하북성(河北省)의 북평(北平), 천진(天津), 당산(唐山)지역과 장가구(張家口)에 이르는 지역에서 선전 및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모집한 한인 청년 중 한 명이 일본군에 투항하는 불상사가 벌어져 유해준이 일본군에게 붙잡히자, 나태섭 등은 시안으로 철수했다. 그 후 1942년 12월 24일에 고시복, 이지일(李志一), 조지영(趙志英)과 함께 군무부의 부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어 1943년 3월 30일에는 군무부 총무과 과장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에서 군사활동의 실제적인 일들을 추진했다.

1944년 2월 8일, 나태섭은 군무부 산하의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었다. 군사학편찬위원회는 한국광복군의 훈련 등과 관련된 각종 군사학 서적을 편찬하거나 저술하는 일, 또한 각종 군사법규를 기초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1944년 6월 1일에 생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중일전쟁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충칭에 모여든 독립운동자들과 그 가족의 생계 유지 및 전시 하에서의 식량의 통제, 보건, 아동 교육 등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 임시정부 요인과 독립운동자들, 그리고 그 가족의 생활을 보존하는 막중한 업무를 담당했다.

나태섭은 1945년 7월 1일부터 개최된 한국독립당 제4차 전당대회에서 황학수, 이상만, 이복원, 민필호 등과 함께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고, 7월 16일에 열린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민필호와 함께 상무감찰위원으로 선임되어 광복을 앞두고 한국독립당의 각종 활동을 감찰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2.4. 광복 이후의 경력[편집]


나태섭은 광복 이후에도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 각지에 남아있는 한인교포들의 안전한 귀국과 재산 보호 등 잔무 처리와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제반문제를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1946년 5월에야 환국한 그는 1948년 10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국군으로 복무해 6.25 전쟁에 참여헀고, 1956년에 예편했다. 이후 말년을 조용히 지내다가 1989년 5월 경기도 화성시 황념면 구문천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나태섭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권영선과 동명이인이다.[2] 이운한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이었다가 분란을 일으켜 당에서 제적당하자 앙갚음하려고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