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방어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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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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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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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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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5고지-406고지 전투


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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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참전 국가
2.1. 유엔군
2.2. 공산군
3. 주요 전투 및 작전
4. 전개
4.1. 8월 전투 상황
4.2. 9월 초 ~ 9월 15일 이전 전투 상황



1. 개요[편집]


낙동강 방어선 전투, 미군 전사에는 Battle of the Pusan Perimeter (부산 교두보 전투)[1]로 기록되어 있는 이 전투는 1950년 8월과 9월 사이에 유엔군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이자 유엔군의 후방거점인 부산을 중심으로 설정한 사각형 모양의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 일대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벌인 여러 전투를 의미한다.


2. 참전 국가[편집]



2.1. 유엔군[편집]


지상군
육군
해병대
공군
해군

2.2. 공산군[편집]




3. 주요 전투 및 작전[편집]




4. 전개[편집]



4.1. 8월 전투 상황[편집]


파일:korean_war_north_invasion_line_kor.png
* 통영은 8월 17일 북한군에 의해 일부 점령[2]되었다가 19일에 탈환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제대로 전쟁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 데다가 국가 차원의 전쟁 계획도 없었고, 육군 차원의 방어 계획이 있긴 했지만 그나마도 1950년 3월에서야 나왔다. 각 사단들이 이를 받아서 작전 계획을 짠 건 그해 5월이 되어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있던 병력과 물자를 너무 이른 한강교 폭파로 제대로 날려 먹은 대한민국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서울을 대신하는 임시수도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겨 자리 잡았다. 더글러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임시 수도 부산에 미8군사령부를, 일본UN군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의 전력은 너무도 열악해 전라도 방면은 사실상 방어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전라도에서 일부 잔여 국군 부대와 경찰 병력 등이 지연전을 펼치면서 소규모 교전을 벌였으나 전황에는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당시 전라도를 공격하던 방호산의 북한군 6사단은 마산 전투 이전까지 별다른 대규모 교전조차 없었을 정도였다. 7월 20일 대전과 전주가 북한군에게 점령된 뒤 23일 광주, 26~27일 여수 점령 등 대한민국의 방어선은 계속 동남으로 밀려나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 시기, 북한은 대한민국의 90%를 점령한 상황이었다.

8월 초의 시점에서 미군은 산악지대에서의 방어선 건설 및 방어를 사실상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지연전의 결과 일반적으로 설치하던 길목을 막는 방어선은 쉽게 북한군이 우회해서 포위한 후 협공을 가하기 때문에 답이 없었고 충북 영동군에서 벌어진 원형 방어진 도입 및 대규모 부대가 원형 방어진을 방어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는 북한군의 우회공격도 막아낼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포위되므로 만만치 않은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낙동강 같은 거대한 강을 방어선으로 선정하고 강 양쪽의 개활지에서 북한군이 도하를 시도할 때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갈아버리는 게 방어선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방어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방어선을 낙동강 방어선, 낙동강 전선으로 흔히 말한다.

물론 낙동강의 흐름 특성상 미군이 담당한 서부전선, 특히 칠곡~함안을 남북으로 잇는 구간에서 낙동강과 그 지류를 끼고 막긴 했지만 낙동강이 부산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남강 합류부 부터는 강을 방어선으로 삼기에는 위치, 방향이 모두 안좋으므로 거기서부터는 남해안까지 고지를 중점으로 한 산악방어선을 펼쳐야 했으며 마산 - 대구 가도등 중요한 교통로도 보호해야 했기에 마산 전투같은 산악전도 벌어진다.

여기에 더해서 북한군 4사단과 북한군 6사단이 전라도를 경유해서 경상도 서부를 공격하는 우회작전을 뒤늦게 알아차린 탓에 간발의 차로 병력을 방어선에 배치하는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원래는 대전 전투 패배로 이미 반신불수가 된 미국 제24사단으로만 낙동강 서부전선을 막으려고 했으나 뒤늦게서야 경상도 서부를 공격하는 북한군 사단이 2개라는 것을 알아채고 미국 제25사단을 황급하게 일선에서 빼낸 후 재배치를 해서 간신히 방어선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북한군 6사단이 목포나 여수를 점령한 이유는 원래 남침 계획에 따라서 북한 본토로부터 해상보급을 받기 위함이었는데 이미 한국 근처의 제해권은 유엔군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 일에 쓴 2일간의 시간이 치명적이었다. 이런 곳을 점령하지 않고 그대로 경상도 서부로 진격했으면 낙동강 방어선을 제대로 만들기도 전에 돌파에 성공해서 6.25 전쟁을 북한군의 승리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북부의 경우에는 한국군이 안동같은 중요 요충지를 확보하려고 했으나 화력이 강하지 않으면 강 상류에서의 방어선은 쉽게 붕괴되고 병력도 부족하므로 결국 대구 근처까지 밀려서 영천·신녕전투같이 대구 북부부터 동해안까지의 산악전을 펼치게 된다. 동해안의 경우에는 영덕 방어전에서 최종적으로 밀리면서 포항까지 방어선이 내려갔다. 그래서 낙동강 방어선임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높지가 않다.

어찌되었든 실제로 확보한 낙동강 방어선은 내부에 대구 - 경주 - 부산 - 마산 - 대구같이 원형의 교통망이 있는데다가 부산 외에도 마산과 포항같은 항구도 존재하고 영일비행장을 기지로 한 미국 공군의 지원도 받을 수 있으므로 더 이상 물러설수가 없는 방어선이었다. 물론 그 아래로 데이비드선이 있긴 했지만 이건 경상남도 경계의 산악지대만으로 구성된 방어선이며 모든 교통이 부산을 중심으로 한 방사선 모양인지라 유사시 병력의 측면이동이 어려워서 여기까지 밀리면 그냥 한반도를 포기하는 수순에 돌입하게 되므로 후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실제로 확보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낙동강은 중간에 크게 만곡을 그리면서 흐르는 구간이 있는데 이런 지형적 특성을 노리고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서 창녕군 일부 지역까지 파고들어 창녕·영산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북한은 대구 남쪽의 창녕을 기반으로 해서 대구를 북, 서, 남쪽 3면으로 협공하려 했으나 창녕에서 국군의 분전으로 대구가 남쪽까지 포위당하는 상황은 면했다. 창녕읍 만옥정공원에 현재 창녕지구 전승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따라서 실제로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잡은 면적이 좁았지만 낙동강이 지나면서 육로 교통의 요지인 칠곡, 대구 일대가 방어전선의 중심격이었고 이곳에서의 혈투가 워낙 인상 깊어 이름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붙어서 통용되고 있다.

본 항목에 있는 일일 전선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시점에도 제주도울릉도 같은 도서 지역들은 북한군이 진입하지 않았다. 부산으로의 진격에 사활을 걸고 있는 와중에 바다 건너 섬까지 병력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 본토를 완전히 장악하고 자잘한 도서 지역들을 공략하는 것이 북한 측의 큰 그림이었을 수 있었겠지만, 의외로 국군의 저항이 극심한데다 설상가상으로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과 비슷하게) 낙동강 방어선 안쪽으로 몰려든 피난민들과 현지인들 중 청장년들을 닥치는대로 육군과 해병대에 징집시켜 부산과 제주도 훈련소에서 양성 후 전선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어 이들의 전체적인 계획 자체를 무산시켜버렸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은 북한 출신 5만 명과,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반(半)강제로 모은 민병대가 5만 명을 더해 총 1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에 비해 UN군은 20만 명으로 병력이나 화기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특히 공군과 해군의 전력은 일방적이어서 동해안 지방에서는 미군 전함에서 막강한 함포 사격으로 북한군 방어진에 구멍을 숭숭 뚫을 정도였다.

그러나 방어할 때에는 항상 병력이 부족하였으며, 결정적으로 한미 양군의 정예 2개 사단+2개 연대들을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군함에 실었다가,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서 급히 다시 내려 투입했다가를 2회 반복하며 약 2개월간 해상에서 대기하느라 전력과 시간을 소모하였다. 이 정도의 군단급 병력이면 충분히 북한군 진영을 뚫고 나갈 정도의 전력이 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다가는 서울에 도달할 때까지 1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날 것이 예측되었고 그나마도 이건 모든게 잘나가는 상황인데다가 실제 상황을 감안하면 진격하던 병력이 매복이나 당해서 개박살날 위험성이 컸다. 실제로 경상남도 구간에서 방어선을 진주까지 밀어내려던 킨 작전이 매복에 제대로 걸려서 실패한 사례까지 있었다.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더 큰 한 방을 노리고 있었으니 어쨌든 최정예 군단급 병력이 전선에서 빠진 영향은 컸다. 당시 국군이나 미군이나 보병의 훈련도, 경험, 사기가 바닥을 기어 전투력이 북한군보다 부족한 면도 있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된 직후인 8월 초부터 하순까지 교통의 요지인 대구를 목표로 공격을 가해왔다. 특히 대구 북방을 담당하던 국군 제1사단 정면으로 북한군 주공인 3, 13, 15사단과 1사단의 일부 병력이 집중돼 유학산-수암산-다부동을 잇는 선에서 엄청난 격전이 벌어진다. 이것이 다부동 전투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두지휘를 감행한 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비롯해 1사단 장병들은 1:3의 전투력 열세 하에서도 어떻게든 방어선을 지켜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 결과 "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의 피해를 보았다"백선엽 사단장의 회고대로 제1사단은 무시무시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끝끝내 방어선을 사수해냈으며, 결국 누적되는 피해를 못 견딘 북한군이 대구 공격을 포기한 8월 하순을 기해 낙동강 전선 최대의 위기는 종식된다. 미 극동사령부와 8군 사령부는 다부동 전투가 일단락된 시점에서 피아 전력차가 완전히 역전, 북한군이 작전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의 위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낙동강 전선을 두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이곳을 완전히 사수한 것으로 오인되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한때 나마 일부 무너졌다. 물론, 이미 밀고 내려오면서 북한군의 전력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국군과 유엔군이 바로 대응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당시로서는 위기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4.2. 9월 초 ~ 9월 15일 이전 전투 상황[편집]


특히 8월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이 작전한계점을 무시하고 곧장 9월 공세를 벌이던 9월 8일, 국군 8사단은 일시적으로 대구와 경주를 잇는 동서축선 보급로의 요지 영천을 상실한다. 이날 월튼 워커(1889년~1950년) 장군은 정일권(1917~1994) 3군 총사령관에게 예고 없이 찾아와 아래와 같은 놀라운 명령을 내렸다.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고 있는 2개 사단을 골라둘 것

지명도가 높은 각계각층 명사들 10만 명의 리스트를 준비해 둘 것

반공단체의 지도층 및 경찰 간부들을 민간인 리스트에 포함할 것

이 대통령에게 당분간 비밀로 해두기 바람[3]


정일권은 순간적으로 미국이 도망갈 준비를 한다는 것을 느꼈다. 해당 명단은 미국이 철수할 때 소개할 인원들의 명단을 짜라는 얘기인데 이 대통령에게 당분간 비밀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은 당시 철수 계획을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하거나 협조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미군의 이러한 생각은 이승만 대통령이 독선적으로 강행한 1953년도 반공포로 석방 사건으로 증명됐다. 행선지는 하와이 또는 제주도쯤일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정일권은 너무 중대한 문제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개전 초 신속하게 몽진을 하였던 이승만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 이승만은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장서 싸울 것이오!"라고 화를 내었다.[4]

다행히 위기는 일시적이었다.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15사단에는 후속 전과 확대 부대가 없었으며, 2군단이 상대적으로 전선이 안정되어 있던 1사단, 6사단에서 병력을 동원하고 육본 예비대까지 끌어모아 영혼의 한타 역습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이 영천 전투에서 무리하게 경주로 향하던 북한군 15사단이 격멸당하고 영천이 탈환되면서 워커의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UN군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전개했다. 낙동강 전선은 밀리고 밀리다 못해 부랴부랴 만든 전선이 아니었다. 이미 전쟁 발발 초기부터 이 전선은 국군과 유엔군이 교전에서 우위를 지킬 수 있는, 즉 붕괴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설정한 전선이었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에게 조금씩만 땅을 양보하면서 지연전을 펼쳤고, 낙동강 전선에 도달한 순간 북한군의 전투력에 한계가 오면서 지연전이 아닌 지역 방어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실제로 점령한 낙동강 방어선은 애초에 계획한 것과 달랐고 후방의 데이비드선은 장기간 방어에 부적당하여 부산 교두보 철수시 지연전 목적이나 달성할 수준이었다. 이래서 낙동강 방어선의 전선이 일부 붕괴하였을 때 미국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을 마주했으므로 부랴부랴 철수 계획을 세운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 계획 도중에 전선을 다시 회복했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대구, 칠곡, 영천 등지를 두고 벌어진 다부동 전투, 왜관 전투, 영천·신녕전투, 남쪽의 영산, 진주, 마산 일대에서 벌어진 영산 낙동강 돌출부 전투, 마산 전투 등에서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국군과 유엔군 전선을 절단할 수 있었던 대구를 놓고 벌인 다부동 전투, 대구, 포항을 포위할 수 있는 영천이라는 아킬레스건을 두고 벌인 영천·신녕전투, 부산과 가까운 마산을 두고 벌인 마산 전투 하나라도 실패했다면 워커라인 후방으로 적이 침투, 전선이 무너지며 대한민국이 끝장날 뻔했다. 다만 국군과 유엔군들이 밀려 낙동강 전선에 몰림으로써 연적선이 줄어들어 전력보강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공세 종말점에 거의 다다른 인민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이 전쟁 발발 직후의 상황을 수습할 기회도 됐다. 즉, 아무리 국군이 부실하고 유엔군이 부랴부랴 도와줬다고 할지라도, 몇 차례의 공세만 막아내기만 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 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전후방의 종심이 짧았기 때문에 낙동강 전선을 돌파당해 적의 남하를 허용했다간 곧바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것이다.

이후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진행되어 모든 낙동강 방어선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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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단어 'Perimeter'에는 교두보라는 뜻이 없으니 '부산 주변부 전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도 볼 수 있다.[2] 17일 01시경 북한군의 제7사단 51연대 및 104치안연대가 원문고개 서쪽(당시 통영군 광도면)까지 남하하였다. 이에 즉응한 한국군 해병대의 상륙(김성은 부대, 통영 상륙작전)으로 17일 03시부터 통영군 군내에서 교전이 벌어졌으며, 북한군은 18일 다시 후퇴하였다.[3] 정일권 회고록 233~238페이지[4] 이승만이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의 피난을 권유받은 시점도 대략 이때로 추정된다. 품에서 권총까지 꺼내 들면서 딱 잘라 거절했지만, 서울을 버릴 때의 언행을 보면 정말 부산을 끝까지 사수했을지는 미지수다. 만일 미국이 철수를 할 시점까지도 이승만 대통령이 철수를 반대했다면 결국 떼놓고 갔을 텐데, 그러면 최후의 선택지는 제주도에 정부를 차리는 것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