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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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부 허난성 남부의 지급시. 뤄양에서 남쪽으로 200km, 정저우에서 서남쪽으로 260km, 시안에서는 동남쪽으로 35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고대부터 교통, 전략의 요충지였다. 현재도 관할 인구는 1027만명이고 시내 인구만 해도 200만명인, 중국 전체에서도 결코 작지 않은 도시이다. 시가지 동쪽에는 국내선 공항인 난양 공항이 있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었고 또한 신석기 문화 중 하나인 양사오 문화(仰韶文化)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한 지역이다보니 주나라 때 부터 이미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참고로 난양(南阳)이라는 이름은 주나라 때에 생겨나서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유지된 이름이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여러 번왕국들이 난양시를 통치하였으며, 초나라가 이들을 모두 통합한다.
한나라때는 중국의 주요 철 제련지로 번성하였으며, 당시 난양시는 뤄양시, 한단시, 쯔보시, 청두시와 함께 오도(五都)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광무제 유수 일가의 고향 및 본적지이기도 하다.
형주 북부(지금으로 따지면 후베이성)에 속해있다가 언젠가부터 허난성으로 소속이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신해혁명 때에는 허난성 자체가 청나라 조정의 손을 들어 준 지역이기 때문에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맹공을 받은 지역이었다.
1948년, 중국공산당이 점령하였으며 1994년 지급시로 승격된다.
정저우-샹양간 고속철이 지나고, 시안-신양간 일반철도가 지난다. 시가지 동쪽 끝에는 난양 장잉 공항(南阳姜营机场)이 있다. 중국의 주요 대도시를 연결하며, 국제선은 없다.
중국 인민해방군 로켓군 66기지 663여단이 DF-31A로 무장한 채로 주둔하고 있다.
후한 말 삼국시대에는 삼국지 관련으로도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삼국지에는 완성(宛)으로 등장하는데, 본디 이곳은 광무제의 고향이자 그가 거병한 곳이어서 후한 조정에서도 많은 신경을 썼기에 당대 중국 전체에서도 인구가 상당히 많은 동네에 속하였다. 완이라는 지명은 오늘날까지도 시내의 완청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또한 이곳은 형주에 머물던 시기 유비의 주요 본거지로 유비가 형주 자사 유표에게 의탁할 당시에 현령으로 지내던 신야가 바로 현재의 난양 지급시의 관할하에 있다. 시내 중심부에서 서남쪽으로 70km 떨어진 신예현이 바로 그곳이다.[1] 그리고, 제갈공명의 출사표의 구절에서도 자신의 출신지인 '난양' 을 언급하는데,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선비)로 남양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라고 언급한다.
시내에는 완청구 말고도 워룽(와룡)구가 있는데, '와룡 선생' 으로도 잘 알려진 제갈공명이 어린 시절을 보낸 땅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내 남쪽에는 그의 사당인 무후사가 있고, 그곳에는 악비가 쓴 출사표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관내의 덩저우시에는 청이 동녕국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이주된 대만 원주민 후손들이 수백 명 규모로 거주하는 마을이 있다. 중국 본토에서 고산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성은 허난성인데, 이들이 고산족으로 분류되어 있는 데 따른 것이다.
1. 개요[편집]
중국 중부 허난성 남부의 지급시. 뤄양에서 남쪽으로 200km, 정저우에서 서남쪽으로 260km, 시안에서는 동남쪽으로 35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고대부터 교통, 전략의 요충지였다. 현재도 관할 인구는 1027만명이고 시내 인구만 해도 200만명인, 중국 전체에서도 결코 작지 않은 도시이다. 시가지 동쪽에는 국내선 공항인 난양 공항이 있다.
2. 역사[편집]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었고 또한 신석기 문화 중 하나인 양사오 문화(仰韶文化)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한 지역이다보니 주나라 때 부터 이미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참고로 난양(南阳)이라는 이름은 주나라 때에 생겨나서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유지된 이름이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여러 번왕국들이 난양시를 통치하였으며, 초나라가 이들을 모두 통합한다.
한나라때는 중국의 주요 철 제련지로 번성하였으며, 당시 난양시는 뤄양시, 한단시, 쯔보시, 청두시와 함께 오도(五都)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광무제 유수 일가의 고향 및 본적지이기도 하다.
형주 북부(지금으로 따지면 후베이성)에 속해있다가 언젠가부터 허난성으로 소속이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신해혁명 때에는 허난성 자체가 청나라 조정의 손을 들어 준 지역이기 때문에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맹공을 받은 지역이었다.
1948년, 중국공산당이 점령하였으며 1994년 지급시로 승격된다.
3. 교통[편집]
정저우-샹양간 고속철이 지나고, 시안-신양간 일반철도가 지난다. 시가지 동쪽 끝에는 난양 장잉 공항(南阳姜营机场)이 있다. 중국의 주요 대도시를 연결하며, 국제선은 없다.
4. 군사[편집]
중국 인민해방군 로켓군 66기지 663여단이 DF-31A로 무장한 채로 주둔하고 있다.
5. 기타[편집]
후한 말 삼국시대에는 삼국지 관련으로도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삼국지에는 완성(宛)으로 등장하는데, 본디 이곳은 광무제의 고향이자 그가 거병한 곳이어서 후한 조정에서도 많은 신경을 썼기에 당대 중국 전체에서도 인구가 상당히 많은 동네에 속하였다. 완이라는 지명은 오늘날까지도 시내의 완청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또한 이곳은 형주에 머물던 시기 유비의 주요 본거지로 유비가 형주 자사 유표에게 의탁할 당시에 현령으로 지내던 신야가 바로 현재의 난양 지급시의 관할하에 있다. 시내 중심부에서 서남쪽으로 70km 떨어진 신예현이 바로 그곳이다.[1] 그리고, 제갈공명의 출사표의 구절에서도 자신의 출신지인 '난양' 을 언급하는데,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선비)로 남양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라고 언급한다.
시내에는 완청구 말고도 워룽(와룡)구가 있는데, '와룡 선생' 으로도 잘 알려진 제갈공명이 어린 시절을 보낸 땅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내 남쪽에는 그의 사당인 무후사가 있고, 그곳에는 악비가 쓴 출사표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관내의 덩저우시에는 청이 동녕국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이주된 대만 원주민 후손들이 수백 명 규모로 거주하는 마을이 있다. 중국 본토에서 고산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성은 허난성인데, 이들이 고산족으로 분류되어 있는 데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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