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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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의 남관


1911년 11월 25일 ~ 1990년 3월 30일 (향년 78세)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수상
5.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화가이다. 본관은 영양(英陽)[1].


2. 생애[편집]


191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구천리 778번지에서 아버지 남영환[2]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남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3년간 다니다가 11세 때 청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해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일본인 선생님이 그림을 권유하였으나, 집안에서는 환쟁이가 된다고 난리가 났다. 이후 대구고등보통학교(現 경북고등학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자 15세 때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중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도쿄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2년간의 연구과정을 수료한 뒤 쿠마오카(熊岡) 미술연구소에서 회화 연구를 계속하였고, 일본의 권위있는 상을 휩쓰는 한편 동광회 회원으로 추천되기까지 하였다. 26세 때에 호류지 금당벽화를 관람한 남관은 회화에서 정신적인 면을 추구하기로 하였고, 이후 그가 그린 추상화의 씨앗은 그때부터 심겨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광복 후 1945년 귀국하였는데, 이때까지는 인물화와 풍경화 위주의 그림을 그렸다.

1947년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이쾌대, 이인성, 이규상 등과 결성하였고, 1949년까지 연례 회원 작품전을 꾸준히 가졌다.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서양화부 추천 작가 위치에 올랐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서울에 남아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서울이 수복되자 부산으로 내려갔고, 밀다완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부산 피난시절에 김환기, 이중섭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중섭은 제주도에 있다가 부산으로 왔고 부인과 자녀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매일 울면서 은지화를 그렸다고 한다. 이때 남관이 이중섭의 어려운 상황을 문광부에 이야기하고 문화국장 최완복(후에 한국외대 총장 역임)의 소개로 이중섭이 북에서 들고온 그림 한점을 100만원을 받기로 하고 팔았는데, 끝내 그림값은 받지 못하였다.

당시 홍익대학교국제시장에 있었는데, 남관은 이종우 윤효중, 김환기 등과 함께 출강하였다. 학생으로는 박서보가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이던 1952년 일본 동경에서 제1회 도쿄비에날레와 파리의 살롱 드메 동경전을 관람하고 남관은 그의 예술의 방향성을 바꾸게 되었다.

이후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일본에서 공부한 것이 모두 허사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울고 싶었습니다. 일본에서 서양화라고 가르친 것이 모두 기교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마흔살이 되어서야 깨달았으니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그리하여 프랑스행을 결심하고 1954년 10월 미도파백화점화랑에서 개최한 도불 기념전 작품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추상화적인 변화가 나타났음을 알게 해줬다.

1954년 12월 파리로 유학을 떠났고 아카데미 드라그랑드쇼미에르에 입학하여 추상미술에 몰입하였다. 그 당시 몽파르나스 공동묘지 바로 뒷집 헛간에 거처를 마련할 정도로 곤궁한 생활을 하였던 남관은 무료개방 날짜 마다 대화백들의 그림을 감상한 이후 자신의 공부가 헛것임을 절감하고 데생부터 새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굶주리며 영양실조에 걸리며 머리가 전부 빠져 대머리가 될 정도로 그림에 몰입하면서, 동서양을 융합한 독창적인 그의 회화는 프랑스에서도 점차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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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인>(1955)

당시 김환기도 파리에서 유학을 하였고 서로 의지하면서 작가생활을 이어나갔는데, 김환기는 힘들어서 파리 유학을 포기하며 남관에서 '남아서 꼭 대성하라'는 당부를 남기며 프랑스를 떠났다. 이후 김환기는 1970년대 미국에서 그의 회화적 절정을 성취한다.

이에 남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감환기 씨의 작품은 대단합니다. 원로작가가 이렇게 대담한 변모를 꾀했다는 것은 고귀한 일입니다."

남관은 원래 결혼하여 슬하에 남윤씨를 두었으나 도불 후 이혼하였고, 소설가 김진옥씨와 재혼하였는데 그녀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유명한 시 '저녁에'의 작가 김광섭의 딸이었다. 김환기의 대표작 중 하나의 이름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인 것을 볼 때 둘의 사이가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6.25의 비극적 체험과 동양의 심상을 추상적표현으로 구현시키는 그의 회화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화시키고, 시간, 공간 및 역사의 표상을 내재화 시킨 것이었다.

점차 유명해진 남관은 한국인 최초로 1958년부터는 파리의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 초대되었고, 1961년 출품작 '동양의 풍경'은 프랑스 정부가 사들여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1962년 작품 '허물어진 제단'은 파리시가 구입하여 현재 파리 시립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예술적 성취가 무르익어가면서 1966년 프랑스 망통국제회화비엔날레에서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절정을 맛보았다. 이때의 수상은 P.R.피카소, 베르나르 뷔페, A.타피에스 등의 세계적 거장을 꺾고 수상한 대상이라, 세계적으로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거장 타피에스는 망통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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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5)

1968년 프랑스 68혁명의 여파로 귀국한 이후에는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면서 고국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방학 때에는 파리의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서독 스위스 등 세계 각지에서 초대전을 갖고, 1990년 3월 제1회 도쿄 아트엑스포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동백림 간첩사건에 연루되 옥고를 치른 뒤 프랑스로 건너간 이응노는 1973년 자신의 작품을 남관이 모방하였다 하자, 남관이 이에 반론을 폈고, 김흥수와 하인두까지 끼어들어 잡음이 있기도 하였으나 논란은 곧 잦아들었다. #

이후 이응노와 그의 부인 박인경은 백건우-윤정희 납북사건에도 연루되어 이후 사망할때까지 국내에 귀국하지 못하였다. #

유럽에서 큰 성공을 이룬 화가였으나 남관은 유난히 금욕적이고 은둔자적인 면모, 타협을 모르는 깐깐한 성격으로 다른 화가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외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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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상>(1984)

17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으나 입상작이 사전 담함된 것을 알고 심사장을 뛰쳐나와 문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고, 1983년 예술원상 후보에 올랐으나 자존심을 내세워 서류제출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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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2)>(1979)

홍익대학교에서 10여년간 후학을 양성하며, 작업실과 집에만 거주하며 작품활동에만 열을 올리다, 80년대에는 전시회 중 12점의 작품을 도난당하고, 국제적인 그의 명성을 이용한 사기를 당하여 20여점의 작품을 도난당하기도 한다.

이때의 아픔 이후 작품활동을 접고자 하기도 하였으나 예술혼으로 이를 극복해내고 왕성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90년 오랜 지병으로 사망하였는데 그때 남긴 유언이 "환기, (김)환기" 였다고 한다. #


3. 평가[편집]


남관의 초기 미술은 인물화, 풍경화 등 구상미술에 주안점이 있었으나 유럽의 미술을 접한 이후 추상화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전쟁의 비극, 생명에 대한 갈망, 인간에 대한 긍휼 등의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추상화 초기에는 붉고 어두운 색을 많이 이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세련된 푸른색과 상형문자, 마스크 등의 형상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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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 대화>(1978)

세계적인 미술평론가 가스통 디일은 "동서양 문화의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예술가"라는 찬사를 남관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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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태>(1978)

남관의 작품은 파리 퐁피두센터, 파리 시립미술관, 룩셈부르크 국립박물관, 토리노 국제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역사의 흔적(1963), 센 강변(1968) 등이 삼성미술관에 대화, 절규 등이 소장돼 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 가칭 이건희 컬렉션에 남관의 작품이 포함되어 많은 이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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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축제, 이건희 컬렉션>(1984)


4. 수상[편집]


  • 1966년 망통비엔날레 대상
  • 1974년 제6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미술부문
  • 1981년 은관문화훈장
  • 1990년 제 35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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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령공파(會寧公派).[2] 아버지 남영환은 안동시 길안면 구수2리 남촌마을 출신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