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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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남
Nam Ki-nam


파일:남기남 감독.jpg

출생
1942년 4월 17일
전라남도 광주부
사망
2019년 7월 24일 (향년 77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학력
서라벌예술대학 전문학사

1. 개요
2. 일생
3. 연출 특징
4. 작품 목록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주로 저예산 액션 영화를 많이 찍었으며 7080 세대들에겐 어린이 영화 감독으로 유명했다. 별명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카메라잡이.


2. 일생[편집]


1942년 전라남도 광주부 출생으로, 17세 약관의 나이에 영화배우를 꿈꾸며 서울로 상경했으나 명동의 한 다방에서 인기 배우 최무룡과 마주치고는 이 정도 외모 갖곤 절대 안되겠다 싶어 연기가 아닌 연출가로 방향을 틀었고, 서라벌예술대학[1]을 졸업한 후 1960년 한형모 감독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연출부에 들어가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변장호, 장일호, 임원식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받다가 1972년, 《내 딸아 울지 마라》로 감독 데뷔한 이래 주로 무술, 코미디, 액션 분야에서 100여 편이 넘는 셀 수 없는 작품을 감독했다. 셀 수 없는 건 일단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1996년에 법적으로 영화 의무납본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영화나 방송 프로그램, 음반 등이 체계적으로 보존되지 않아 당대에 영화와 방송자료들의 보존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래서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등 각종 영화 사이트마다 그의 작품 수에 대한 설명이 각각 다르다. 생전에 본인도 본인이 감독한 작품의 수가 헷갈린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영화를 많이 찍을 수 있었던 이유는 비슷한 처지였던 고영남 감독 문서에 잘 나와 있지만, 1970년대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영화관객수가 떨어진데다가 사전검열이 강화되면서 국내영화의 경쟁력이 급속히 저하되자 1973년에 영화업계에 대한 일종의 당근으로 영화수입편수를 크게 제한하는 대신 국내영화를 많이 찍은 영화사에게 외화 수입의 우선권을 주는 방향으로 영화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악용해 영화업자들이 싸구려영화를 몇편씩 찍고 영화수입권을 얻는 식의 일이 영화업계에서 횡행하게 되었고, 그때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빠른 시간 내에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감독 남기남이었다.[2] 저예산과 적은 시간 안에 빠르게 영화를 찍어냄으로서 부족한 작품을 채워내는 감독으로의 역할을 한 것. 사실 스크린 쿼터제 폐지론자들은 이런 제도의 악용을 지적한다.[3]

사실 임권택 감독도 B급 영화라든가 정부 우수영화, 반공영화 등을 찍었으나,[4] 적어도 그는 이런 와중에서도 《짝코》나 《아벤고 공수군단》 같은 진짜 걸작도 꽤 찍었다.

1989년, 비공식적 기록으로는 180만 관객을 동원한 《영구와 땡칠이》로 반짝 전성기를 맞기도 했으며 당시 《영구와 땡칠이》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을 흥행에서 눌렀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확실히 영구와 땡칠이가 큰 흥행을 한 것은 맞아서 1990 년 1월호 로드쇼에선 아예 이 영화가 집계에 없던 반면에 스크린 지에선 1위로 선정했다. 스크린 관객 수치에선 적어도 서울 43만으로 서울 30만이 채 안되던 《최후의 성전》을 이기기는 했다. 아무튼 큰 흥행을 기록했다는 점에 대해서 이견이 없지만 전국 관객수가 180만인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서울에서나 관객수 집계를 하던 수준이었고 전국기준으로 집계한 것이 1990년대 후반으로 생각보다 오래되지도 않았다. 그나마도 체계가 완전히 잡히게 된 것은 2003년의 일이었고. 하여간 인기는 정말 대단했고, 대원동화가 이때 번 돈으로 애니메이션 판권사업과 만화출판 사업을 시작하면서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는 업체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 만화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영광을 뒤로하고 남기남은 자신의 주특기(?)인 어린이 영화나 무협, 액선, 코미디 영화에서 벗어난 진지한 정극 영화를 찍으려다가 지속적인 흥행실패로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는데 본인 말로는 32억원이 공중분해되었다고 한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외화수입개방 때문이다. 1984년 외화수입이 전면 개방되고,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부터는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등장한다. 기존 남기남의 방식으로는 어린이 영화를 만드는 것[5] 외에는 통용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린이영화로는 먹어줄만했지만 새로 진지한 정극영화를 찍기에는 유행에서 심하게 뒤쳐져 버렸고 빨리찍기에 익숙해진 나머지 작품성을 높일 연출실력도 부족한데다가 경쟁자도 많다보니 걸어줄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 후 나름대로 재기를 시도하지만 시원찮았고[6], 2002년에 <너 없는 나>로 복귀한 후 2003년에 개그 콘서트 출연진을 주연으로 한 여름시즌 코미디 영화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큘라》로 그럭저럭 흥행을 했지만 그뒤로 비슷한 류의 여름 영화가 몇 편 나오다 말았고 본인이 만든 '바리바리 짱'조차 그 분위기에 휩쓸려 묻혔다. 이후로도 영화는 만들기는 했지만 몇편 건것이 전부 그나마 극장개봉도 아니고 그리 유명한 것도 아니다. 아마추어 평론가는 제외하더라도 씨네21에서 지속적으로 밀어주었으나....남기남 감독이 2000년 초반, 호러존이란 사이트와 인터뷰를 한 걸 보면 씨네21에서 은근히 괴작감독으로 까듯이 소개한 탓에 여길 무척 싫어했었다. 2001년 6월 18일부터 22일까지 KBS2 <인간극장> '충무로의 전설, 찍지 남기남' 편이 방영된 바 있다.

2010년에 동자대소동이 공개되고 2010년 1월 10일 전국 6군데정도 극장에서 상영하다가 2011년 1월 6일 개봉 후 대한극장에선 나흘 정도 상영되고 막을 내린 듯하다. 애초에 2008년도에 제작되었는데, 홍보비가 없어서 이때까지 개봉을 시도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2010년 10월 29일에 DVD출시 예정이었다가 공식적으로 4번 이상 밀렸다. 결국 2011년 DVD발매 되었다. 차기작은 "달무리"라는 영화로 1950-60년대 배경에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들여온 여자와 성불구가 된 남자의 욕망이 주제고 부동산이나 철거 문제를 다루는 등, 사회적인 내용이라지만 제작가능성이나 개봉가능성은 없었다.

2019년 7월 24일 오후 6시 30분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 고인은 당뇨로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했으며 약 3개월 전 순천향대학교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고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하다 병상에서 눈을 감았다. 유언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고 한다.(관련 기사). 유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가 있다.


3. 연출 특징[편집]


이름이 남기남인 이유가 '필름을 왜 남기남?'이라는 썰렁한 농담이 있을 정도로[7] 많은 작품을 빠른 시간 안에 찍어내는 특유의 기술로 유명하다. 데뷔 초기에는 드라마를 찍었으나, 시대가 뒤집혀서 그가 일을 못하게 된 상황에서[8] 타이완의 제작자와 손잡고 당시 이소룡의 사망 이후의 틈을 탄 짝퉁 이소룡 영화들를 찍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빠른 작업속도는 충무로에서 알려져서 여러 싸구려 영화들을 찍게 됐다. 그러다보니 그의 작업 전반은 개그맨의 캐릭터에 의지한 개그물이나, 액션만 있는 액션물로 차게 되었다. 그래도 본인 입장에서 아쉬움이 있었는지 간간히 예술성 있는 영화를 찍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시도다. 하지만 그 특유의 엉성함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일종의 컬트 영화로서 간간이 소비되는 정도의 위치에는 올라섰다.

그 빠른 속도의 비결은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는 그의 작업 방식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나 풍문이 돌고 있다. 예를 하나 들자면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라는 영화는 도입부에 갈갈이 삼형제에서 내려오는 씬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잘 찍고 갑자기 남 감독이 삼형제에게 제자리 점프를 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지만 영화를 완성하고 시사회장에서 그 이유를 알았다고 한다. 바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영화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찍은 것이다. 또 다른 일화로는 《영구와 땡칠이》의 실내 세트를 짓는 일주일 동안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타킴》라는 제목의 액션 영화를 미국 가서 찍었다. 이 작품에선 강석현신성일이 나온다. 최수종을 캐스팅해서 슈퍼맨 일지매라는 영화를 찍었을때도 최수종의 스케줄이 워낙에 바빠서[9] 하루 날을 잡고 클로즈업, 표정샷만 잔뜩 찍은 다음 뒷모습이나 복면쓴 장면은 대역을 활용해서 찍은 다음에 편집을 통해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재빨리 영화를 만들다보니 최수종이 신기해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 외에도 리허설을 시켰는데 카메라를 돌려서 찍어버렸다거나, 소림사 촬영 당시 허가를 받으러 갔으나 거절당했는데 이미 올라가는 길, 내려오는 길에 필요한 장면을 후딱 다 찍어버렸기에 허가를 받지 못해도 상관이 없었다거나, 시간이 아까워서 빨간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 카메라 렌즈 위에 빨간 셀로판지를 덮어씌웠다든가 하는 일화들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그만큼 빨리빨리 영화를 찍어서 그럴듯한 영화 만들기에는 그야말로 천부적인 천재성을 발휘했던 것. 영화 자체의 작품성이나 예술성과는 큰 관련이 없는 재능이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국의 에드 우드라는 비교를 하기도 한다. 이 비교는 씨네21에서 처음 시도했다. 하이텔 시절의 모 평론가는 그를 로저 코먼에 비유했다. 사실 유명인사들의 리즈시절에 작업했다는 점이나 현역 유명인들을 출연시키는 점에서는 로저 코먼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남기남이 심형래, 최수종, 백일섭 등과 작업했듯이 코먼은 잭 니콜슨,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작업했다. 그리고 이들이 유명해진 뒤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하다! 로저 코먼은 컬트 영화 《흡혈식물 대소동(Little Shop of Horror)》을 이틀 만에 찍어서 기네스북에 오른 적도 있다.

씨네21의 인터뷰를 봐도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신이 멍할 수준이다. 저작권의 개념은 없고[10] 빨리 싸게 찍는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타입이다. 씨네21 인터뷰는 그나마 포장을 하려고 했는데도 그 모양이다. 코먼과 비교하려고 해도 비교하기가 미안해지는 수준이다.

물론 남기남이 한창 전성기였던 1970~80년대에는 국제저작권협약(UCC) 및 베른협약 미가입국이라 저작권 인식이 시궁창이던 시절이기에, 해적판이 넘쳐났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만화나 영화, 소설 모두 검열은 심했지만 이는 정권의 구미에 맞지 않는 내용을 검열하는 것일 뿐 저작권 보호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이 때문에 함부로 해적판을 출시하거나 외국소설을 연극화할 때 저작권 따위 무시하고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정도. 출판계를 보더라도 속 양들의 침묵이나 화산논검 같은 위작 도용 팬픽 소설이 공공연하게 출판되던 것이 90년대 초반까지의 상황이었고, 그 이전 70~80년대에는 외국 유명 소설의 경우 "번역비가 들기는 하지만 인세는 줄 필요가 없어서 많이 남는다"고 해적 번역판 출판에 뛰어들었던 출판사들이 자기네가 번역한 원고를 통째로 도용당해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책을 찍어내는 바람에 번역비만 날리고 쪽박찼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까지 남아있을 정도.

결국 남기남은 평균적인 80년대 한국 문화상품 제작자의 저작권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11]. 다만 이 인식 수준이 90년대 이후 더 발전하지 않은 것이 문제일 뿐. 그나마 영화는 투입 자본 규모 자체가 출판보다는 크기 때문인지 해적 출판과 같이 통째로 도용하기는 어렵고, 그 남기남조차도 장면 짜깁기 도용밖에 못 한 것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는 남기남이라는 인물의 등장과 활동 전반에 대해 시대적 배경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남기남의 전성기였던 80년대 당시의 한국은 고속성장의 성과로 빈국 대열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나름 중견국가로 자리잡았고, 내부적으로도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과 여유를 누리는 경제적 계층이 자리잡아 팽창해나가는 상태였다. 따라서 이전 시대에 비해 영화와 같은 문화상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상황이었던 것. 하지만 동시에, 80년대 당시의 한국은 21세기의 한국과 비교하면 경제적으로 훨씬 가난했고 문화적 경험도 일천했으며 소비자들의 구매력 역시 부족했기에 충분한 비용과 시간, 노력을 들인 작품을 만드려고 시도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스크린쿼터제 역시 부작용이나 악용은 어쨌건 한국에서 영화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영역을 확보해주는 구실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 당시 영화업계의 빈곤한 사정상 대다수의 제작사들은 제대로 비용과 시간, 노력을 들여 만든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을 때 그 손실을 감당할 여유가 거의 없었던 것. 결국 이런 상황에서 요구된 것은 '싸고 빨리 만들 수 있는' 싸구려 문화상품으로써의 영화였고, 남기남은 바로 이런 싸구려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기에 80년대 당시 나름의 맹활약을 보인 것이다. 결국 남기남의 영화들은 작품으로써는 결코 높게 평가할 수 없지만, 상품으로써는 당대 시장의 상황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상품으로써도 가능하면 명품이나 양품이 좋은 것은 당연하지만 좋은 물건만으로 시장이 성립하기는 어려우며, 특히 사람들이 가난할때는 싸구려 양산품 역시 시장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남기남의 마지막 흥행작이자 나름 화제작이었던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 역시 이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갈갈큐라는 2003년작이고, 이 시점은 남기남의 전성기던 80년대에서 벌써 한 세대가 지난 시기이다. 그 기간동안 남기남이 치열하게 성장하고 발전해온 것도 아니고 20년 전 센스 그대로 "우끼지! 잼있지! 무섭지! 우와~" 하고 있으니 현대의 빠른 사회 변화, 특히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의 한국의 초고속 성장 및 그에 수반하는 사회 변화에 비추어보면 당연히 작품으로써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20년(한 세대) 전의 과거란 곧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 봤던' 과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남기남의 대표작인 영구와 땡칠이를 보고 자란 어린이들이 딱 어른이 되어 나름의 구매력을 갖기 시작할 시점에 나온 작품이 바로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인 것. 따라서 작품성 이전에 (조잡한 영화지만 보고 실컷 웃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향수, 그리고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적 수준이 향상된 상황에서 20년 전의 센스를 그대로 들고나오다시피한 작품이 주는 일종의 키치적 즐거움 덕분에 이 작품이 나름의 관심을 얻으며 농담거리로라도 소비되고, 어느 정도의 관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갈갈큐라는 순수 관객수로도 손익분기점을 좀 넘긴 작품이었지만, 당시 인터넷에서는 엽기 문화코드에 부응하는 짤방 거리로 상당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남기남은 그 뒤에는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잊혀졌지만... 그거야 농담도 1절만 해야 재미있는 것이다.


4. 작품 목록[편집]


  • 뒤돌아 보지 마라 - 1979년작.
파일:external/www.iphotoscrap.com/1441449151-m.jpg
반공 액션영화로 조총련들이 마약을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밀수하려 할 때 한국의 대공수사본부는 수사원 백일섭을 파견한다. 황당한 일들의 연속 끝에 일본 형사들이 급습하여 체포하는데. 격투 장면에서 맞는 장면과 소리가 일치되지 않는다. 다운로드 서비스도 있다.

  • 열번 찍어도 안 넘어진 사나이 - 1980년작. 12월 24일 개봉
이주일, 백일섭 주연. 만수는 광주역에서 라이터 수리점[12]을 한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과시가 심한 성격 탓에 문제를 잘 일으킨다. 교훈과 정의를 중요시하는 당시 검열이나 심의 덕에 전혀 개연성없이 조폭 박쥐파를 소탕하게 된다.

  • 여자 대장장이 - 1982년작
백하촌에서는 3년마다 마을의 경비를 담당하는 경비대장을 권법대회로 뽑는다. 현직 대장 조칠은 흉악해서 마을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주인공 호생은 대장간의 딸 취취와 친한데, 취취는 초반부에 악당들과 격투를 벌이고, 그뒤로는 비중이 없다.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 없는데, 소주인이 누구인지 가리는 건 솔로몬왕의 재판(아기를 둘로 자르자고 하니, 아기를 넘겨주겠다는 어머니를 승소시킨)을 카피한 거다.

당시에는 이소룡을 필두로 권격영화가 많이 나와서, 홍콩을 무대로 한듯한 권격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예를 들면 이형표 감독의 애권(愛拳).

파일:external/image.cine21.com/M0020302_1.jpg
  • 평양박치기 - 1983년작
이대근백일섭고등학생으로 나오는 영화. 스토리에 개연성이 없는데, 중반부에 갑자기 반일 영화가 된다.

파일:external/oldcine.co.kr/oldcine_1938.jpg
1982년 홍콩의 오사원(吳思遠)감독이 제작한 용지닌자(龍之忍者; Ninja in the Dragon's Den)의 일부 신을 무단으로 도용한 다음 몇몇 장면을 새로 찍어서 짜깁기한 작품으로, 퀄리티야 말이 필요없다. 흑역사. 흑룡통첩장의 극장개봉 신문광고와 금성마그네테크[13]에서 출시한 VHS 케이스 표지에서 "一名 : 龍의 忍者"라 표기한 탓에 나중에 1989년 벧엘프로그램에서 VHS로 진짜 용지닌자가 출시되었음에도 용지닌자의 국내 극장 개봉명을 흑룡통첩장으로 아는 사람들이 꽤나 있다. 그러나, 벧엘프로그램에서 낸 용지닌자도 개차반인게 삭제와 오역이 엄청나서 국내 비디오만 보면 욕나온다..... 참고로 이 영화 용지닌자에서 최종보스가 바로 한국배우인 황정리.

  • 심형래의 탐정큐 - 1985년작.
심형래 주연의 하드보일드 느와르를 표방한 것 같아도, 그냥 황당한 코미디 영화. 심형래와 그 친구들은 무슨 사무실을 차리는데, 어느 집안에서 사람들이 연이어 죽자 그걸 수사한다. 결국 그집 재산을 가로채려는 며느리(결혼식은 안 올렸다)의 소행임을 밝혀낸다. 그런데 부자라도 집에 방공호가 있고, 그 안에 큰 동굴이 있다.1985년 한국의 부잣집에는 대부분 방공호와 동굴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여기서 집안의 큰아들로 나오는 배우는 김동현(1950)이다.

파일:attachment/남기남/23.jpg
  • 따귀 일곱대 - 1987년작.
심형래가 영구 기믹이 아니라 천재 기믹으로 나오는 이색작. 백일섭이 회장 역으로 나오는데, 심형래가 결혼을 조건으로 백일섭의 따귀 일곱대를 때린다는 내용.[14]


  • 누가 붉은 장미를 꺾었나 - 1990년작.
김청 주연의 액션(?) 영화로 박근형, 김상순, 윤문식 등도 출연한다. 마지막에 엄청난 반전이 있는 영화.

2003년작이며 정창욱 감독과 공동제작. 윤택 등 웃찾사 개그맨들도 이곳에 나왔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

파일:/pds/200805/21/03/b0007603_4833880f1e532.jpg
  • 바리바리 짱 - 2005년작.
심영 역할로 유명한 김영인이 출연했다. 출연 장면 모음 그리고 대통령 역으로 그 분이 출연한다(...) 유튜브 링크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1시간 23분 짜리를 7분으로 요약했는데도 더럽게 지루하다. 출연진들의 연기는 수준 이하고[15] 주글래 살래 수준으로 똥망작이다. 이 감독이 진짜 30년 동안 영화감독에 일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연출 실력이 완전 카메라를 처음 찍는 사람이 연출직을 맡는 수준이다.[16]

  • 동자 대소동 - 2010년작
남기남 감독의 마지막 작품으로, 정종철, 박준형 주연의 영화로 DVD 출시되었는데, 놀랍게도 2만원이 넘는다. 원래 신품은 그 정도로 비싼 게 당연하지만... 메뉴가 어처구니없게도 본편과 '선택 보기' 외에 없고 색 보정이나 조명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 게다가 18mm 필름으로 촬영한 느낌을 내서 8, 90년대 영화, 그것도 뉴스의 한 장면 같은 기록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해 준다. 표지는 완전 HD로 촬영된 것 같지만 그뿐이다. 참고로 박노식LA 용팔이처럼 결말에는 표창장을 수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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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앙대학교 영화학과의 전신. 예상 외로 남기남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한 사람이다. 사실 이렇게 영화 공부를 제대로 했으니까 많은 영화를 찍은 것이기는 하다.[2] 남기남은 빨리 대충 싸게 많이 찍었다면, 고영남은 많이 찍기는 더 많이 찍는데 대신 최소한의 퀄리티는 유지하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상영된 영화수에서 한국 역사상 1, 2위를 다투는 고영남과 달리 남기남은 순위권에 들지 못한다. 당시에는 찍었다고 등록하는 것이 중요했지, 영화를 실제로 극장에 거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남기남의 영화 상당수는 실제로 극장 상영은커녕 비디오도 나오지 못하고 영화사 창고에서 썩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3] 다만 현재의 스크린쿼터제와 당시 영화법은 다르기는 하다. 당시 영화법은 외화수입을 수십편 수준으로 제한한 형태이고 1987년 이후의 스크린쿼터제는 외화 수입을 제한하지는 않고 한국 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날짜를 지정하는 식이다.[4] 서중석 저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에 따르면, 그가 이런 작품을 찍게 된 건 선친이 6.25 때 몰락한 좌익 집안이라 영화 만드는 데 제약이 따랐기에 "나도 반공영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알아줬으면 한다"는 생각에서 제작해왔다고 한다.[5] 방학 전에 찍어서 방학 때 개봉, 어린이날 특수용 등 빨리 찍을 필요가 있다.[6] 그 시절에 만든 영화들 중 극장 개봉한 것은 <천년환생>(1998) 한 편뿐이었고, 그나마 그것도 땜빵용 개봉이었다.[7] 이건 씨네21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 개그가 원조다.[8] 당시 유신 정권으로 인해 영화사의 수가 제한됐고, 그 시대가 뒤집히는 동안 (본인 주장으론) 큰 작업을 준비하던 그는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9] 이 당시에는 서울뚝배기에 출연했었는데 일일연속극이다보니까 일정이 빠듯할수밖에 없었다. [10] 홍콩 영화 용지인자(龍之忍者)의 장면을 무단으로 짜깁기해서 흑룡통첩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무협 영화 팬덤 내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11] 90년대 초중반까지도 지상파 TV 프로그램에서 무단으로 외국 음악(특히 일본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는 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고, 이에 대한 비판마저도 '공공성 있는 방송사가 저작권을 위반하면 되냐!'가 아니라 '왜색'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정도로 문화산업 종사자들 중 상당수에게 저작권 인식(타인의 저작물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 자체가 없고 좋아보이는거 있으면 그냥 써도 된다고 여기는 경우는 흔했다. 특히 저작권 인식이 없는 나이든 세대가 책임자 지위에 있을 경우, 그나마 저작권을 좀 인식한 젊은 세대가 '이건 좀 위험한데요...'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야. 그냥 써' 하면 대들지 못해 그대로 진행되는 일도 있었을 정도이며, 1989년 정부가 베른협약 가입을 추진할 때 영세 출판사들이 이를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이 문제는 2000년대 가까이 되어서야 해결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편이다.[12] 그 당시에는 일회용 라이터도 잘 없었고, 대부분 지포나 고급 가스라이터였기 때문에 고장이 나면 수리점에 맡겼다. 일회용 라이터가 늘어난 것은 80년대 초중반 이후다.[13] 1987년 금성사에 합병됨. 비디오 제작은 삼영프로덕션이 맡았다.[14] 부연하자면 "결혼을 승락받고 싶으면 내 따귀 일곱대를 때려봐라."라는 내기를 백일섭이 걸자 심형래가 갖은 잔머리로 퀘스트(?)를 수행하는 내용. 그래서 마지막 일곱대까지 때린 직후 엔딩이 뜬다.[15] 코미디언이라서 그렇다 보기 어려운 것이 김현숙은 정식 코미디언이 아니고 연극배우 출신이고, 류담도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해 현재는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병만도 정극 연기를 잘 소화해낸 적이 있다. 애초에 코미디언도 희극을 하는 배우고 연기력이 없으면 개그를 소화하기 힘들다. 김영인은 야인시대심영(야인시대)역의 내가 고자라니로 잘 알려졌듯이, 연기력이 훌륭한 편에 속한다. 결국, 이들의 발연기는 감독의 연출 부족과 대본의 문제다.[16] 말만 영화감독을 30년 동안 일한 사람이지 30년 전부터 지금까지 발전한 게 하나도 없다. 리허설도 안 하고 영화를 대충 찍어대니 실력이 늘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