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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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남도부.jpg

南到釜[1]
1921년 12월 14일 ~ 1955년 8월 1일

1. 개요
2. 생애
2.1. 일제 시대
2.2. 광복 후 정국
2.3. 강동정치학원과 제3병단 시절
2.4. 남도부 부대와 6.25
2.5. 제3지대 개편
2.6. 제4지구당 개편
2.7. 최후
3. 53년 10월 1일 생존자 명단
4. 남도부의 전향 여부
5. 관련 작품


1. 개요[편집]


경남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출생의 빨치산으로 본명은 하준수(河準洙)이다. 본관은 진주(晋州).


2. 생애[편집]



2.1. 일제 시대[편집]


1921년 12월 14일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2]에서 아버지 하종택(河鍾澤)과 어머니 이의영(李義英)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하종택은 천석꾼으로 함양군에서 손꼽히는 거부였으며 24년간 병곡면장을 지냈다.

남도부는 진주중학교 3학년 재학중이던 1937년 일본인 교사를 폭행 한 후 퇴학당했다. 퇴학 후 일본 카와구치시로 유학을 가서 준일상업학교(駿壹商業學校) 4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이어 1943년 니혼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그해 주오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다가 일제의 학도병동원령이 내려지자 이를 피해 귀국하여 함양 서북쪽에 있는 대봉산(1245.8m)[3]으로 도망간다.

이후 징병 거부자들이 계속해서 대봉산으로 도망쳐 오자, 이들을 규합하여 지리산으로 이동하였다. 지리산에서 그를 포함한 73명의 징병 거부자가 모여 '널리 나라의 빛이 되자'라는 뜻의 '보광당(普光黨)'을 만든다. 보광당은 주재소의 총기를 탈취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다.[4] 보광당의 인원은 징병 거부자들이 계속 입산하여 150명까지 늘어난다.


2.2. 광복 후 정국[편집]


감격의 해방이 오자, 함양군으로 들어가 일제에게 충성을 하던 순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자치적으로 군수와 경찰서장을 선정하는 것을 돕는다. 이후 여운형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서 함양을 접수하러 오는데, 건준은 함양의 자치군수(양지환), 자치경찰서장(박갑수)을 인정하면서 양쪽은 자연스럽게 합쳐진다.(즉 건준 산하의 인민위원회인 셈 쳐주게 된다.) 이후 남도부는 정신적 지도자로 여운형을 추종하게 된다. 하준수는 보광당 출신의 인원 50명 정도로 '조선건군준비위원회'(건군)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된다.

미군정은 함양군에 미 24군단 40사단 예하 약 1개소대 병력의 군정대를 파견한다. 이들의 첫번째 조치는 하준수가 가둬둔 일제 순사들을 석방시켜 주라는 것(...) 일제에 충성을 다하며 하준수등의 징병 대상자를 추적하고, 심지어 교전까지 하던 이들 조선인 순사들은 해방된 조국의 경찰로 재등용 되었다.

그래도 초기에는 하준수의 주오대학 선배인 정범석(이후 건국대 학장 역임)이 통역관을 맡고 있는 덕분에, 미군정대장 루이스 대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스 대위가 하준수 편을 들어 경남도지사(미국인)가 보낸 일제 순사 출신 경찰관들이 함양경찰서를 접수 하는 것을 막았다가 1946년 초 헌병들에게 잡혀가버린다. 이후 일제 순사... 아니 경찰들과 하준수의 관계는 최악이 된다. 이때 조선공산당도 하준수를 포섭하려고 하는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는 그냥 무시한다.

하여간 남도부도 반대한민국 빨치산 조선인민유격대 인기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독립운동사 인기보다 훨씬 좋은 희한한 현상의 수혜자이다. 1920년대 이래 국내 독립운동을 이끌어 온 조선공산당을 빨치산이 무시하는 게 긍정적인 일처럼 강조되는 걸 보면.

그 후 함양군내 우익 인사였던 장인 이민종의 추천으로 이승만의 경호대장으로 뽑혀서 서울로 올라갔지만,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친일 인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다. 고향에 내려오니 하준수가 조직하였던 건군은 지리멸렬 하였고 경찰들은 하준수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국 경찰들에게 시달리다가 1946년 늦여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피신한다.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면서 남로당 측에서는 하준수를 입당시키려고 공작하는데, 하준수가 추종하는 여운형은 3당 합당에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좌우합작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라, 하준수 역시 입당을 거부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까지도 하준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였고, 그냥 일제시절 자신을 잡아 학병으로 보내려고 했던 일제 순사들을 싫어할 뿐이였다. 그런데 그가 정신적으로 추종하던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되자, 남로당에 입당한다. 즉, 하준수는 좌익에게 우호적인 중도좌익쯤 되었는데 중도좌익을 이끄는 여운형의 죽음으로 더이상 무소속으로 버틸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남로당에 합류한 것이다. 이후 남로당 함양군당이 개편되어 군당위원장에는 하준수를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리산에 들어온 공산이론가 박우럭이 임명되고, 부위원장에 하준수가 임명된다.

이후 군정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횡포에 많은 청년들이 하준수를 찾아 지리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하준수는 인근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는 무장 투쟁을 하였다. 이때 하준수가 이끄는 부대원들은 1천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말이 사실이라면 당시 어떤 야산대와도 비교 할 수 없는 대병력이였다.

한편, 이 시기 남로당과는 별개로 북로당에서 남한에 비밀군사단체 '인민혁명군'을 조직하였다.[5] 인민혁명군에서 대전 이남의 제2지구를 담당하는 이혁기는 과거 여운형을 추종하던 자였다. 이혁기는 전북책임자 겸 지리산공작책임자로 오영주를 임명하고, 하준수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후 하준수는 48년 4월 20일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이 회의에서 상당히 공산주의에 동조하게 된다.

남한으로 돌아온 하준수는 5.10 단정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5.7 천왕봉무장봉기'를 일으킨다. 5.10 단정 반대 투쟁 즈음하여 남한 각지의 군당별로 50~100명 가량의 야산대 조직이 꾸려지며 그 활동이 활발해 지는데, 하준수는 이러한 남로당-도당-군당으로 이어지는 조직 밖에 위치해 있었다. 위의 문단에서 나오다 시피 이시기 하준수는 북로당에 가까웠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직전 북한에서 남북조선대표자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남한 대표 1,080명을 황해도 해주로 소집하였다.[6]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는 8월 21일 열렸는데, 육군본부의 <남도부사건기록>과 이를 참조한 듯한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 의하면 하준수는 이 때 월북하여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으나 대의원으로 선출되지는 못했다고 한다.[7]


2.3. 강동정치학원과 제3병단 시절[편집]


북한에서 하준수는 남로당의 정치학교의 후신인, 그 유명한 강동정치학원의 특별전술연구반 부대장 겸 군사교관으로 부임하였다. 평남 강동군에 위치한 강동정치학원은 원장 박병률(소련공산당원, 소련파), 정치부원장 박치우(남로당계), 군사부원장 서철(88특별여단 출신, 북로당계)로 구성되었다. 하준수와 김달삼은 서철 아래의 군사교관이였는데 주로 소련파로 약 30명 가량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준수는 경험을 살려 게릴라전을 가르쳤는데 그가 담당한 특별전술연구반은 3개월, 6개월 짜리의 다른 과정과 달리 무려 3년6개월이라는 무시무시한 교육과정을 갖고 있었으나, 실제로 3년6개월간 수학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빨리 좀 졸업 시켜 남파시켜라. 6.25 다 끝나겠다 이놈들아 실제로는 길면 1년 극단적으로 짧으면 2~5일만 배우고 남파되었다. 이 강동정치학원에 이현상이 훈련생으로 들어왔는데 이는 특이한 경우였다. 이현상 같은 중앙당 고위간부급은 평양 당학교에서 교육 받다가 모스크바로 유학가는 것이 보통이였다. 이후 조선인민유격대 1병단 사령관이 강동정치원장 이호제였고, 3병단 사령관이 교관인 김달삼과 하준수였던 것을 비추어 볼 때, 2병단 사령관이 될 이현상이 훈련생 신분이였다는 것은 이례적.

당초 당정치학습에 치중하던 강동정치학원은 48년 10월 19일밤에 일어난 여순사건을 기점으로 군사교육을 강화한 유격대원 양성기관으로 변신한다. 이때부터 1,2차에 걸쳐 훈련생들로 부대를 편성하여 남한 침투를 시도하였지만 군경에게 포착되어 실패한다. 49년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고, 대남 정치공작을 담당한 남로당계 박헌영과 이승엽은 앞선 실패를 거울 삼아 대시 대규모 유격대를 남파 시킨다. 이때 태백산 지구를 담당할 제3지구를 편성하는데 사령관에 김달삼(학병 출신 일본군 소위, 이승진의 가명), 부사령관에 하준수, 나훈, 성동구가 임명되며 총인원 300명이였다. 이들은 49년 8월 4일 38선을 넘어 남하 하였는데 주로 밤을 이용하여 남하한 덕분인지 매우 순조로와 경북 영일군 송라면 지경리까지 내려간 후 예정된 대로 해상에서 중화기등을 보급 받았다.

제3병단은 경북 영천군, 영일군, 청송군등 3개 군에 펼처져 있는 보현산(1,124m)에서 활동 했는데 이때부터 '동해여단'이라고 자칭했다. 이 이름은 하준수 부대라는 이름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명칭이였다. 이후 국군 6연대 반란군 80명, 1병단 잔여세력 100명, 9차 남파부대 100명과 합류하여 총인원 600명에 달하며 태백한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벌였고 하준수는 3병단 독립 1대대장이 되어 나름 분투한다. 그러나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이성가 소장) 산하 국군 3사단(이형근 준장)과 전투 끝에 아작나고 지휘부와 호위대등 60명을 이끌고 50년 4월 3월 북상한다. 여기서 인민영웅 대접 받으며 환대 받았는데, 박헌영 부수상과 이승엽 사법상등 남로당계에게도 러브콜을 받았지만,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김일성 수상에 의해 중장으로 승진되고 '남도부(南到釜)라는 가명을 받는다. 이 남도부라는 이름은 6.25때 남도부 부대가 수행할 작전명이기도 하였다.


2.4. 남도부 부대와 6.25[편집]


김일성 수상은 6월 중순 하준수에게 남도부라는 가명과 중장 계급을 주는 자리에서 "6월 24일, 군단을 이끌고 강원도 울진으로 침투하라. 배로 동해안을 통해 울진에 침투하면 (대구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신불산을 거점으로 하여, 모든 후방에서 오는 기차를 전복하고, 군수물자를 철저하게 막아라. 나는 6월 25일 새벽에 총공격을 할 것이다. 10일 후 우리는 대구에서 만나자. 대구에서 만나, 우리가 함께 부산으로 진격하자"라고 하였다. 또한 "남도부 동지, 남도부 동지의 이름 '南到釜'는 바로 남도부 동지가 총사령관으로서 지휘할 제7군단 작전명이오"라고 하였다.[8][9]

하지만 정말 남도부가 중장계급을 받았는지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남도부 부대의 참모장이었던 성일기는 북에서 파견된 장교로부터 각 지대장이 정규군으로 포함될 경우 중장이 될 것이기 때문에 남도부가 공화국의 중장이 아니냐고 들었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성일기는 남도부를 매우 좋게 묘사하는데 남도부가 인민군 중장이었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제7군단 소속으로 남도부와 함께 남파되었다 돌아온 제3병단 잔여 세력, 이호제와 함께 남파 되었다가 돌아온 제1병단 100명, 회령 제3군관학교(유격간부 양성소, 교장 오진우) 출신 120명, 30연선(沿線) 유격대원 300명, 50년 3월 3병단을 구출하러 남파되었다가 중간에 격파당하고 양양으로 돌아온 김상호․김무현 유격대원 200여명, 최고인민회의 남한 출신 대의원 20여명등이 편성되었다. 이들의 총 숫자가 766명이라 766부대라는 이름으로 각종 한국전쟁 책에서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꼭 나온다. 일단 남파 된 것은 750~766명 정도라고 한다. 군단이라며

사령관인 남도부 인민군 중장 아래로, 제7군단 정치위원에 리승엽의 장인이자 조선공산당의 창립멤버인 안기성이 임명되었다. 안기성은 해방후에는 남로당 중앙감찰위원을 지냈고 월북 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신분이였다. 참모장에는 강정수, 정찰참모에는 김진구가 각각 임명되었다.

그런데 766부대는 오진우가 이끄는 1천명의 인민군 정규군이고, 남도부 부대와는 별도라는 설이 있다. 소설 <북위38도선>이나 영화 포화속으로도 이쪽을 따랐다. <북위38도선>에 따르면 766부대는 오진우가 이끌며 가장 먼저 출발하고 빨치산은 남도부 부대(동해안 남부담당)와 강정수 부대(동해안 북부 담당)등 2개가 있으며, 남도부 부대의 경우 참모장은 김정수 총위, 정치위원은 안철이라고 한다. 부대 구성도 이태의 <남부군>과는 상당히 틀린데 1•3병단의 극소수의 생존자, 다 죽고 10명 남은 김상호 부대, 김무현이 사망하고 27명 남은 김무현 부대, 중국팔로군 출신 조선족 의용군 100명, (38연선부대 출신이자)회령제3군관학교의 보충인력, 남한 최고회의 대의원 20명이 보강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노가원의 <남도부>에서는 남도부와 강정수 부대를 합쳐서 750명이지만, <북위38도선>에 따르면 그 둘은 별도의 부대이니 남도부의 부대도 그 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쪽이 맞는지는 자료 검토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이후 행적을 보았을 때, 강정수는 단순히 남도부의 독립 부대가 아니라 처음부터 별도의 부대일 가능성은 맞는 것 같다. 어쩌면 제7군단 예하 부대가 766부대와 남도부 부대, 강정수 부대가 속해 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남도부가 7군단 사령관은 아니라는 것이다. 7군단 정치위원이라는 이승엽의 장인, 안기성은 50년 7월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오진우의 766부대는 삼척에 상륙한 다음 태백산맥으로 잠입해 인민군 정규 5사단과 함께 강릉을 노리는 등 최소한 정규부대의 조공으로 보이고, 남도부는 목적지가 아예 경남 신불산이다. 이후 오진우는 인민군 43사단장을 지낸다. 즉, 오진부의 766부대는 적 후방에 침투해 유격활동을 벌이는 빨치산 부대가 아니라, 적 후방에 침투해 주공을 보조하는 특수부대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남도부 부대는 남도부 부대, 동해여단, 팔공산부대, 남한유격대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남부군이 이현상 부대라고 불렸던 것처럼, 이들 역시 남도부 부대가 가장 유명한 이름이였는데, 남한유격대가 일반명칭이였는데 이때문에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이라는 남도부의 책 제목이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남도부가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의 위치를 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려면 남한 전역의 유격대와 연락이 닿아야 하는데 후술하겠지만,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서부 빨치산들과 연락이 닿은 적은 단 한 번이다. 그것도 경남도당 간부가 찾아와서 지휘권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친 게 전부였다. 경상북도와 낙동강 이동을 관리하는 책임자 제 4지구당 위원장은 경북도당 위원장 출신인 박종근이었으며 남도부는 박종근과의 협의아래 해당지역 유격대장직을 맡아 낙동강 이동 경남 빨치산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박종근이 파견한 지구당 부위원장인 이영섭에 비해 딱히 유격대장인 남도부가 우위에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시중에 아무런 한국전쟁 책이나 찾아서 초반부를 펴보면, 개전 첫날 766부대의 활약이 반드시 적혀 있다. 예를 들어 국방 군사 연구소 <한국전쟁(상)>을 보면 " 07:00경에는 임원진에 유격부대인 제766부대가 상륙하여 1개 부대는 태백산맥으로 침투하고, 1개부대는 삼척방향으로 북상하였다... 육군본부가 6월 28일에 제 8사단을 강릉에서 제천방향으로 전환시키고"라고 나와 있다. 결국 8사단은 후방은 766부대가 활동해서 불안하니 동해안 축선을 따라 후퇴하는 대신 대관령을 넘어 그냥 원주로 후퇴해버렸다. 그바람에 부산에 주둔해 있던 3사단 23연대가 이들을 막기 위해 올라온다. 또한 766부대는 이현상의 남부군이나 다름 없는 빨치산 유격대이지만 인민군 정규군 취급 당한다. 당장 나무위키의 한국전쟁 항목 안에 있는 전술지도를 봐도 연대급의 766부대로 나온다(진짜로 오진우가 이끄는 연대급 정규군일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남도부 부대는 꼴랑 750명밖에 안 되었고, 유격대의 특성상 탱크 한 대, 야포 한 문 없었고 주문진 경찰지서와 울진군 호구면지서를 습격한 게 전부였지만, 국군 8사단의 6,866명의 정규군이 그대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그것도 8사단의 담당지역인 동해안 후방지역으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 국군 6사단 담당 지역인 영서지방으로 도망쳤다. 다만 북한의 주공세는 서부전선의 동두천-의정부 축선이 국군을 후려패는 '망치'였고, 동부전선에서는 춘천-홍천 축선 수원으로 우회해서 서울 후방에서 국군을 붙잡고 늘어질 '모루'였다. 강릉쪽의 동해안 축선은 치고박는 주전선에 비해 보조전선에 지나지 않아 국군 8사단의 어이없는 도주와 766부대의 생각지도 못한 전과는 축소되어 알려진 감이 있다.[10]

이 덕분인지 6월 27일 박헌영 부수상이 평양방송을 통해 이른바 '남조선 8대열사'를 발표하는데 이현상, 김지회등과 함께 이름이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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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면지서를 습격한 다음날인 6월 26일 남도부 부대는 분화되어 참모장 강정수로 하여금 350명으로 '강정수 부대'를 편성하여 경북 안동 방면으로 나가게 한다.[11] 여기에 추가로 정찰참모 김진구로 '김진구부대'를 편성하여 남도부 부대보다 먼저인 남파되었던 김달삼을 찾는 역할이였다. 김달삼은 (그의 생존설이 사실이라면) 이미 6월초순 안노주, 송재헌, 조용구와 함께 경북 청도 운문산지구에 침투하여 그 지방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인민군 남하 때 호응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후 계속하여 없는 병력에서 조금씩 차출하여 김달삼을 찾으려 파견하는데 결국 못 찾았다. 강정수 부대는 51년초 이전에 전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8사단의 명예를 위해 좀 더 부연 설명 하자면 8사단은 고작 766부대가 무서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전방에는 중공군 164사단에서 소속변경한 최강의 인민군 5사단 1만1천명과 38선 경비1여단 5천명, 10사단 5연대가 있었고, 후방에는 남도부의 766부대 750명과 연대급(?)의 945 해군육전대가 침투해 있는 상황이였다. 즉 앞뒤로 짜부당할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대관령을 넘어 후퇴한 것이다. 그래도 후방에 있는 적이 8사단이 도저히 뚫지 못할 대병력도 아니고 1/10밖에 안되는 경무장의 게릴라 집단으로 힘으로 뚫으면서 전술적 후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후 남진하면서 내려오는 인민군 5사단은[12] 텅텅빈 동해안을 따라 남진 하다가 7월 1일 경북 영덕에서 경북 영덕에서 대한민국의 수치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중령이 이끄는 23연대를 만난다. 일단 병력부터 압도적이고 여기에 탱크처럼 생긴 SU-76 자주포가 밀고 들어오자 후퇴해 버린다. 이때 남도부 부대도 경북 영덕 칠보산 700고지에서 같은날 23연대와 교전한다. 육군 본부의 기록에 따르면 23연대는 칠보산 전투에서만 50명이 전사하고 후퇴하여 칠보산 700고지를 빼았긴다.[13]

이후에도 계속 3사단 23연대를 밀고 내려가, 무려 4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는 영덕전투와 영화 포화속으로의 배경이 된 포항전투 당시 유격전을 벌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남하하여 도착한 곳이 태백산맥의 최남단인 경남 울주군 신불산(1209m)이다. 그가 받은 작전명이자 가명인 남도부 처럼 부산으로 진입하기 위한 최종거점이기도 하다. 사령부를 신불산 배냇골에 자리잡고 이곳에서 부대 개편을 실시하였다.

사령관 남도부 중장

정치위원 안철

참모장 김정수(인민군 총위(현재의 대위), 51년 봄 월북중 38도 연선에서 사살)

제1작전참모 김진구(밀양 노동자 출신)

제2작전참모 남경근(51년 중순 사살)

제3작전참모 홍죽송(대열참모, 팔로군 출신)

제11대장 윤종구(제1병단 생존자, 양산, 원동, 동래 담당)

제19대장 추일

제23대장 홍길동(가명, 울산 머슴 출신, 울산 담당)

미상부대 성상성(관동군 하사관 출신, 청도 담당)

제5대장 안철제

직할대장 김진기(1,2,3중대 편성. 중대는 평균 10명의 소대 2개로 구성)

군의 문주암

총원 150명


실록 <남도부>에는 위와 같이 나오지만, <북위38도선>에 따르면 김진기의 직할부대와 동래부대(윤종구), 울산부대(홍길동), 청도부대(성상성)등 3개 부대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추일은 윤종구의 후임이라고 한다.

처음 남하 할때 비해 병력이 딱 1/5로 줄었는데 지휘부는 으리으리 하다. 이후 대부분의 빨치산에서 보여지는 전형적인 기형적으로 비대한 지도부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는 남한 출신의 유격대원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북한군식 전술이다. 설마 김일성이 중장 계급장 달아주며 떠받들어 줬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당시 북한군은 유격대에게 무기와 장비를 주지도 않고, 알아서 한미연합군에게 노획해서 사용하라고 하고, 작전시 선두에서 육탄돌격하여 고기방패가 되라고 했기 때문에 병력 소모가 기형적으로 빨랐다.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 최후의 공세였던 9월 대공세의 영천전투 참가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북한 정규군과의 합동전투는 없었다. 9월 14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북한 정규군은 낙동강 전선을 버리고 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에 약속한데로 김일성과 부산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꿈이 되어버렸다. 인민군도 떠나버리고 적진 한복판에 남도부 부대만 남겨져 버렸다.

이전에 이미 위원장 박일, 부위원장 백오가 이끄는 지방당 유격대원 수십명이 합류 하였다.

또한 중대한 변화가 있었는데 제2군단 낙오병 700명을 이끌고 길원팔이 합류한 것이다. 길원팔은 남도부의 일본유학시절 동문으로(길월팔은 상과, 남도부는 법과) 둘은 잘아는 사이였다. 그는 경북 포항출신으로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북위38도선>에서는 관련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보통 길원팔은 51년 남하하기전 북쪽땅이었던 강원도 인제군에서 채명신의 백골병단에 사살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길원팔 부대가 경상남도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들은 신불산 일대에서 상당기간 유격전을 펼치다가 거점인 배냇골이 한번 포위당하자, 그날밤 후속공격을 예견하고 과감히 오랫동안 고정진지화 시켰던 본거지를 버리고 후퇴한다... 고 <남도부>에 나와 있다.

하지만 안재성의 <신불산>에서는 갑자기 남도부가 북상한 속 이야기가 나온다. <북위 38도선>에서는 배냇골 포위시 2차 공격을 앞두고 남도부의 결정으로 근처 산으로 후퇴한 사실과 북상이야기를 분리해서 서술한다. 실제 주인공 성일기가 배냇골 전투도 겪었고 북상에도 참가했기 때문에 이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 남도부 부대는 낙동강 동부에 위치한 경남도당 동부지구당과 합쳐 명칭을 '동해남부지구당'으로 바꾸고, 지구당 위원장에는 공인두가, 유격대는 남도부가 맡았다. 그런데 낙동강 서쪽에 있던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는 동쪽에서 빨치산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선은 끈긴 상황이였다. 이에 산하 유격대인 조용구 부대, 차만리 부대, 허다와이 부대를 합쳐 조용구에게 지휘하도록 하고 동부지구로 파견해 지구당이 살아 있으면 연락망을 구축하고, 파괴되어 있으면 재수습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용구는 경남 남해출신으로 6.25당시 차진철의 제1소대 소속 문화지도원이였다. 이후 안강, 기계전투에서 실종 되었는데 그런 그가 50명의 인원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신불산으로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동부지구당이 명칭까지 바꾸어 남도부 부대와 합쳐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반발하였다. 조용구는 자신은 경남도당의 전권을 위임받고 온사람이라고 조직 개편을 인정 할 수 없다고 하고, 남도부는 자신은 조선로동당 중앙으로 부터 권한을 위임받고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위원장인 공인두는 어찌할바 모르다가 각 군당 위원장과 주요 간부를 소집하여 전체 회의를 하였다. 그런데 조용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 간부들은 똘똘 뭉친 방면에 남도부는 혼자였다. 위원장 공인두는 태도가 불분명해 결국 수적으로 밀리는 남도부가 부대를 이끌고 북상하겠다고 화를 내며 회의가 파장되었다.

결국 남도부는 북상하고 동부지구당은 본래 이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조용구는 경남도당의 명령을 왜곡하여 자신이 위원장으로 앉고 원래 위원장인 공인두를 부위원장으로 격하시킨다.

한편 유격전을 벌이며 북상하던 남도부는, 마침 제4차대공세를 위해 51년 2월 10일 남하하던 중공군과 강원도 원주에서 만나게 된다. 길원팔은 그대로 월북해버렸고 남도부 부대만 강원도 횡성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박종근이 이끄는 경북도당 유격대와 만나게 된다. 박종근은 경북 의성 출신으로 방준표, 박영발처럼 모스크바 유학까지 갔다온 중앙당의 사상가이다. 이때는 중앙당의 선전부장으로 내정되어 소환 명령이 내려졌지만 전선이 교착되어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위원장 이영섭은 다른 도당과 마찬가지로 북로당 출신이였다. 함경남도 북청 사람으로 함흥시당 위원장을 역임한 조선 로동당 중앙위원이였다. <북위 38도선>은 남도부 부대가 경북 일월산에서 박종근의 경북도당부대와 만났다고만 서술한다.


2.5. 제3지대 개편[편집]


여기서 50년 12월자로 내려온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명의의 명령 제10호 - 남한유격지대 개편 명령을 접수한다. 이에 따르면 "제3지대 : 울산•일월산•안동 일대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로 구성"이라고 되어 있는데 남도부 부대와 경북도당이 해당된다. 육군 본부의 <남도부사건기록>에 따르면 51년 2월 14일자로 지대장 박종근, 부지대장 남도부등 200명의 부대로 재편성하게 된다. <북위38도선>에는 51년 10월에 접수되었다고 한다.

비록 제3지대로 통합되기는 했지만 경북도당과 남도부 부대는 근본이 서로 다른 부대라(경북 행정 조직 Vs. 훈련된 유격부대) 같이 섞이기 힘들었다. 결국 상의하여 박종근과 안철은 일월산에서 종전처럼 유격투쟁을 하고 남도부와 이영섭은 낙동강 쪽에서 유격투쟁을 하기로 했다. 양 진영에서 2인자인 안철과 이영섭을 주고 받았다는 점을 볼 때 상호간에 상당히 협조가 잘 되었던 것 같다.[14]

결국 제3지대는 경북도당의 북부와 제5지대 지역에서 활동하는 남부의 남도부 부대로 이분된다. 신불산으로 돌아온 남도부와, 경북도당 부위원장이자 정치부지대장인 이영섭의 손에는 '김일성 명령 제10호'가 들려 있었다. 즉, 당중앙이 남도부를 인정해줬다기보다는 이미 조직개편이 있었고 신불산은 경북과 낙동강 이동을 관할하는 박종근의 구역에 있었는데, 박종근이 낙동강 이동의 경남지방의 5지대 지역에서 남도부의 지휘권을 인정해줬기 때문에 조용구는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나고 동부지구당은 해체된다. 다만 조용구가 월권으로 5동부지구당 위원장이 된 것은 문제지만, 경남도당이 낙동강 이동의 지역에 동부지구당을 만들려고 노력한 점 자체는 문제가 없다. 아직 지구 개편을 알리는 소식이 지리산에 있던 경남도당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끝나지 않고 부산 침공을 명령받고 내려온 남도부 부대를 북상하도록 만든 지난 간부 회의에 대한 책임이 추궁되어, 조용구와 그의 심복인 여성간부 노쌍순은 출당 조치 되었다. 조용구의 종파주의적인 행태를 용인한 전 위원장 공인두와 조직부장 백호는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경남 함양 출신의 조용구를 따라온 50여명의 대원들을 각 유격대에 분산시켜 버려 철저하게 싹을 밟아 놓는다.

새로운 편제는 다음과 같다.
  • 북부 : 지대장 박종근, 정치부장 안철, 참모장 한종갑, 정치주임 김일식, 정치선전부장 유응재, 일월산을 거점으로 함. 윤종구, 도영호, 안철제 부대 70명
  • 남부 : 부지대장 남도부, 정치부지대장 이영섭, 간호장 지춘란, 울산 갈산고지 거점 - 동래부대(남명근), 청도부대(성삼성), 울산부대(홍길동)등 130명

둘이 합쳐 200명 설도 있지만, 당시 경북도당 선전부장이자 제3지대 정치선전부장을 하던 유응재에 의하면 경북도당만 300명이였다고 한다. <신불산>에서는 남도부 부대 300명이 신불산 까지 내려왔다고 하며, 또한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서는 주변의 야산대를 흡수한 남도부 부대가 300명 달한다고 한다. 정원석의 <북위38도선>에는 직할대 150명에 30명규모의 전투부대가 3개가 있어 220~250명 정도라고 하는데 이쪽이 가장 정확 할 것으로 추산 된다.

그런데 '김일성 명령 제10호'에 따라 경남의 제5지대장이 되어야할 길원팔이 남하직전 강원도 인제에서 인민군 군복을 입고 침투한 국군 특수부대인 백골병단에게 붙잡혀 버린다. 부대장인 채명신 대령은 약식 군사재판을 열고 지대장 길원팔 중장과 참모장 강칠성 총좌(현재의 대좌)를 총살해 버린다.[15] 이에 남도부는 길원팔 대신 제5지대장이 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어쨌든 제5지대가 담당해야 할 지역은 공백이 되었고 3지대 부지대장인 남도부가 담당하였다.

이후 일월산에 남은 윤종구 부대를 대신하기 위해, 38연선부대 11지대장 출신이였던 제2작전참모 남명근이 동래부대장이 되고 후임 작전참모에는 차진철을 임명한다. 그러나 남명근은 곧바로 전사하고 추일이 부대장이 된다. 남명근 뿐만이 아니라 계속 되는 전투로 주요 간부들이 죽어나갔는데, 51년 가을에 청도 부대장 성삼성이 전사하였고, 후임으로 대열참모 홍죽송이 이었지만 그마저 제데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매복에 걸려 전사한다. 51년 겨울에는 동래부대장 추일이 생포된다. 후임에는 제1작전 참모 겸 직속대장 김진구가 임명된다.

이어 군경의 제1차 대토벌작전이 실시되는데 토벌대에게 남도부 부대는 전투를 철저히 회피하면서 숨어다녀 큰 피해 없이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일월산의 제4지구당(박종근의 경북도당)은 토벌대에 의해 전멸한다. 남도부의 정예부대였던 윤종구 부대 28명도 전멸하였다. 이 소식은 제4지구당 유격지도부 부부대장이자 제3지대 전투부대장 도용호가 도망쳐 알려준다. 도영호는 유격 지도부 부장으로 임명된다. 이제 제4지구당 지역에는 길원팔도 박종근도 없다. 남도부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도용호는 차진철과 마찰 끝에 공석인 청도 부대장으로 나갔다가 일주일만에 부대가 전멸하면서 사살당한다. 얼마후 동래부대장 김진구가 사살당한다. 후임은 부산 사람으로 트럭 운전 조수 하다가 온 백두흠이 임명되었다.


2.6. 제4지구당 개편[편집]


하지만 51년 8월 31일자로 로동당이 중앙정치위원회 명의로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당 사업과 조직에 대해서’라는 ‘94호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당시 인편에 의한 전달 수단이 전선의 고착화로 막혀 있어 52년 8월경에야 남도부에게 전해진다. 94호 결정서는 기존의 유격전 만을 위한 지대 개편을, 다시 장기전으로 대비하여 당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지구당으로 개편하라는 것이었다. '미해방 지구에 있어서의 당 사업 조직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제111호 결정서'도 동시에 도착한다.

이에 따라 제3지대(경북도당)와 제5지대(남도부 부대)는 통합하여 제4지구당을 만든다. 이에 위원장으로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 부위원장에 남도부, 정치위원에 남도부 부대 정치위원이였던 안철이 임명된다. 그리고 94호 결정서에 의해 조직지도위원회를 구성해야 하는데 아마도 이상 3명에 경북도당부위원장 이영섭이 추가되어 조직된 것으로 추정된다.

4지구당 산하에는 2~3개 군당이 합쳐져서 소지구당이 되었다.

1소지구당 - 부산시당+동래군당

2소지구당 - 밀양군당+청도군당

3소지구당 - 울산군당+경주군당+양산군당


각 소지구당에는 남도부의 유격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즉 기존의 경남도당 조직은 당사업+유격활동을 병행하고, 남도부 부대는 유격활동만 전담하였다. 예를들어 3소지구당은 12명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남도부 산하의 백두흠부대 50명이 배속되었다고 한다.

실록 <남도부>에서는 김진기, 도영호, 홍길동, 백두흠, 성상성, 서상호, 추일, 김진구, 남명근 부대가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북위38도선>에 의하면 실제로는 부대는 3개였고 부대장들이 계속해서 전사하면서 계속해서 위의 인물들이 돌아가며 부대장이 바뀐 것이라 한다. 아마도 남도부 재판 판결문에 부대장들의 이름이 나열된 구절이 있는 것으로 봐서 여기서 인용한 것 같다. 또한 실록 <남도부>에서는 9개 소지구당이 있다고 나오나 정확한 지역가 부대장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16] 그에반해 <신불산>에서는 7개 소지구당이 있다고 하는등 정확한 편제는 불분명한 감이 있다. 대략 경남도당 동부지구의 소지구당과 남도부 부대의 유격대로 이원화 되었지만, 어느정도 연대 되어있는 조직으로 보인다.

박종근은 이미 사망한 상태라 위원장은 공석이였고 52년 11월에 중앙당에서 남파된 이구형이 임명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구형은 이미 전멸당한 경북도당을 부활시켜 도당 부위원장 자격이였다.

시점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박종근이 지구당 개편즈음 하여 팔공산 인근에서 유격투쟁하다가 전사한다. 대략 군경의 제1차 대토벌작전이 끝나는 시기인 52년 2월쯤 토벌대에게 포위되었다가 자살 한것으로 추정된다.[17]

공세인 그러자 신불산 사령부에서 열린 제4지구당 조직위원회를 통해 위원장에는 남도부 중장, 부위원장에는 이영섭이 선출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쪽 주장에는 남파된 이구형은 부위원장으로 합류했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이영섭 역시 경북도당 부위원장으로 제3지대 정치 부지대장이였다. 즉 경북도당은 전멸당해 실체가 없는데 부위원장만 이영섭과 이구형으로 두명이였다. 자꾸 옥상옥으로 간부들만 추가되고 일선의 전투원들은 급속히 소모되어 갔다.

3개 예하부대중 유일하게 최초의 부대장이 살아있던 울산부대장 홍길동 마져도 52년 가을에 전사한다. 울산부대 정치지도원인 인민군 현역 중위 김광섭이 후임이 되었지만 2달만에 전사하였다. 이로서 청도부대와 울산부대는 사실상 전멸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은 동래 부대 백두흠의 15명 가량 뿐이였다. 그러한 백두흠도 52년 겨울 유천역 철로 폭파 작전을 나갔다가 미군의 무장 열차를 만나 사살 당한다.[18]

그런데 남도부는 '94호 결정서'에서 남한 빨치산들을 싸잡아 비난한 것에 대해 분노하여 일종의 파업상태로 아무일도 안하고 있었는데, 그가 위치한 신불산이 임시수도 부산과 가까운 관계로 이승만은 수시로 빨치산이 나타났다며 계엄령을 걸어 야당 탄압 및 정권 연장을 위한 개헌의 수단으로 애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국사교과서에서도 잘나오는 '부산정치파동'이다. 실제로는 특무부대장인 김창룡이 대구형무소 중형수, 무기수 7명을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고 빼내서 52년 5월 24일 공비가 나타났다며 부산 금정동에서 사살 한후, 계엄령을 내린 것이다. 5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47명이 검문에 불응한다며 그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한다.[19]

51년 11월 30일 부산 조병창 화재 사건도 있다. 이것은 남도부 부대가 일으켰다는 설도 있지만,(실록 <남도부>는 남도부가 했다는 설을 지지) 김창룡을 사살한 허태영 대령이 옥중에서 작성한 글 의하면 "(김창룡이) 한 지방민을 매수하여 대남간첩으로 가장시켜 이 간첩이 조병창 직원에게 지령하여 방화한 것이라고 날조했다."라고 되어 있다.

어쨌든 남도부 부대는 본의 아니게 이승만 정권의 권력 연장을 위해 애용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활발한 유격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주로 여러 부대로 분산하여 상당한 교란 작전을 벌인다. 주로 대구와 부산을 오가는 군용차량을 공격하고 파괴하는데 맞쳐줬다. 이는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가 그의 저서에서 남부군등의 빨치산 활동을 비판하며 "(남부군은) 이기지 못할 전투만 골라서 한 셈이었다. 지금처럼 기관총을 거치한 경찰의 토치카를 백주 대낮에 정면 공격 하는 대신 모든 빨치산이 열명, 스무명씩 수백개의 소조로 나뉘어 그 독특한 게릴라 전을 펼쳤으면 어땠을까?"라고 하는데 남도부 부대의 유격활동 방식이 바로 이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군의 악양전투 같은 굵직굵직한 대규모 작전이 없었다.[20]

남도부의 대규모 교전을 철저히 회피한 유격활동 방식 덕분에, 국군의 51년말의 1차 대토벌작전은 잘 넘겼다. 그에 반해 52년의 소강기때 보급투쟁 나갈 때마다 몇명씩 계속 죽어나가 예하부대 3개는 사실상 전멸하고 이제는 사령부만 남았다. 군사도시 대구와 임시수도 부산이라는 매우 위험한 지역에 위치 해있다는 불리한 점도 작용되었다. 또한 다른 도당 부대는 산하의 군당, 면당 조직에서 조금씩이라도 병력 보충이 되는데 남도부 부대는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다. 애초에 전라남북도나 낙동강 이서 경남지역은 인민군이 한 번 점령했을 때 부역했던 이들이 인민군 후퇴시 우르르 입산해 빨치산 활동 시작시부터 병력이 많았지만, 남도부 부대의 활동지역은 항상 대한민국의 통치권으로 6.25 이전의 구빨치(6.25 발발이후 김상선같은 극소수 입산자)+북에서 파견된 남도부 부대가 전부로 원 병력자체가 적었다.

그나마 한국전쟁도 끝난지 3일후인, 53년 7월 30일에 북한에서는 남로당 최고간부들을 숙청하였고, 이에 동조하여 빨치산들은 남부군 사령관이자 제5지구당 위원장인 이현상을 숙청하였다. 남도부는 남로당을 통해 당원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현상, 이승엽등과의 관계는 소원하며 오히려 김일성 쪽에 가까워 무탈하게 넘어갔다. 아니 그를 숙청할만한 주변 세력이 4지구당내에서 남아있지 않았다.

이어 53년말 국군의 2차 대토벌작전이 시작되어 남한내 빨치산이 깡그리 쓸려나갔는데, 여기에 대부분의 도당 위원장과 그 후임은 물론 도당 유격대가 산산 조각 났고, 오직 제4지구당 위원장인 남도부만 남았다. 이보다 얼마 전에 북한의 '결정서 111호'가 도착하는데, 여기에는 기존의 유격활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장차 휴전을 대비하여 도심으로 침투하여 지하공작을 실시하라는 것이였다. 앞서 언급한데로 남도부 부대는 소규모 단위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남도부가 직접 모든 부대를 이끌고 대규모 작전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신불산에서 남도부는 특별한 움직임 없이 조용했다.[21]


2.7. 최후[편집]


더이상 기존처럼 산악지대에서 유격투쟁을 벌이는데는 한계점에 봉착해 있었다. 게다가 북한의 '결정서 111호'도 도심침투를 지시하고 있었다. 남은 유격대원은 겨우 9명. 사령관 남도부, 경북도당 부위원장 이구형, 부사령관 유응재(본명 홍영식), 부관 홍만식(본명 이원양), 연락원 문일준(본명 문덕준), 참모장 차진철, 간호장교 지춘란, 남대원 김병수, 여대원 김상선이였다. 지휘부 7명에 대원 2명이다. 조직 잘 돌아간다[22]

여기에 부위원장 이영섭 아래로 10여명의 지구당 인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영섭은 2차 대토벌작전에서 신불산이 포위되어 더이상 저항하기 힘들어 이동하는 과정에서 53년 12월 사살된다. 이로서 사령관급에서는 남도부만 남게되어 그가 지구당과 유격대 양쪽을 전부 이끌게 된다.

남도부는 참모장 격인 차진철[23]에게 9월경 그의 고향인 창녕으로 가서 도심 침투가 가능한지 타진해보라는 지시를 하였다. 차진철은 창녕에서 큰아버지 성윤경과 누이인 성혜분을 만나 근거지를 마련하고 남도부를 불러들인다. 이때 신문에서 5지구당 위원장이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사살되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편 53년 12월 1일, 동해 지구 경비사령부(박기병 준장)가 876부대를 모태로 창설되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이들은 875부대와 877부대를 예하부대로 두고 1500명을 투입하여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미 유격대는 해체되고 각자 탈출한 뒤였다.

남도부와 차진철은 석달가량 함께 창녕에서 숨어지내다가 남도부 먼저 대구로 떠나게 된다. 이때 자료가 갈리는데 먼저 1970년 초에 동양라디오(DBS)에서 방송된 <광복20년>중에 한달간 방송된 <남도부사건>에 이과정이 잘 나와 있다. 극작가인 김교식이 남도부를 체포한 수사담당자를 취재하여 그들의 공로 위주로 하여 훌륭한 '반공홍보프로'로 만들었다.

여기서는 차진철은 창녕에 있는 큰아버지 성윤경과 누이인 성혜분에게 대구로 가서 자신과 남도부를 맞이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전 확인차 53년 12월 31일 대구에서 큰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실은 이 모든 과정을 육군본부 특무부대(특별수사반장 최룡 대위)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최룡 대위는 사전에 큰아버지와 누이를 만나 이미 포섭하였고, 둘은 다시 찾아온 성일기를 설득시켜 자수하게 만든다. 그리고 남도부가 약속한데로 대구의 성기수의 집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특무부대와 차진철은 남도부가 팔공산 아지트에 있는지 알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루트로 대구시내로 내려와 동인동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통수의 통수 게다가 그 하숙집은 특무부대 인근이었다. 그야말로 등잔밑이 어두운 격. 남도부는 이곳 하숙집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부관이자 연락병인 홍만식, 팔로군 출신인 군의장 지춘란 소위 등을 성일기의 누이인 성기수의 집으로 보내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보여도 돌아가곤 했다. 특무부대는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

그러나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자 남도부는 54년 1월 21일 오후 6시 동인동의 성기수 집으로 이동하였다. 대구 팔달교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기는 했지만 '한맹은'이라는 가명의 도민증을 보여주면서 통과한다. 그리고 경찰의 미행을 따돌리며 성기수의 집으로 들어왔다. 성기수의 집 밖에는 이미 특무부대원들이 2중~3중으로 포위하고 있었고, 집안에는 무술 유단자인 심재홍 상사가 세들어 사는 사람으로 위장하여 살고 있었다. 결국 남도부는 별다른 저항없이 체포되었다...라고 나온다. 실록 <남도부>도 이에 따라 집필되어 있다.

그에 반해 차진철의 증언으로는 남도부가 떠난 후 특무대에 의해 12월 31일께 창녕의 큰아버지 집에서 체포된다. 귀순한 여빨치 손미라가 자신의 친구인 성혜분과 차진철이 오누이라는 것을 청도 경찰서에 말한 것이다. 청도 경찰서는 성혜분이 창녕에 살고, 그녀의 오빠가 성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성일기가 바로 남도부 부대의 참모장 차진철의 본명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공로를 창녕 경찰서에 넘기기 싫어 특무대에 정보를 흘린다. 체포후 특무대 염일춘이 차진철이 자수했다고 공표했다. 차진철이 남도부 부대 참모장이 어떻게 자수할 수가 있냐고 생포로 바꿔달라고 했지만 염일춘은 성일기를 구명해줄 목적으로 그냥 자수로 상신하였고 CIC 특무대장 김창룡의 전결로 자수가 되었다. 아마 동양방송에서는 이에 따라 자수로 극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차진철은 대구로 압송되어 특무대장 김창룡, 사상검사 오제도, 특무처장 이진용에게 심문당하였지만 끝까지 협조 안하고 버틴다. 며칠을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지금쯤이면 남도부가 대구를 떠났겠지, 하고 생각하여 대구의 친척집에 남도부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수사대는 이미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24] 남도부는 대구에서 고물상으로 위장하여 그의 친척집을 기웃 거리다가 잠복조에 의해 체포당한다.

육군 특무부대는 곧 바로 팔공산 정상에 있는 남도부 부대의 아지트를 급습하여 군의장 지춘란 소위를 생포하고 제4지구당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섬멸한다.[25] 이때 소련총 4정, 카빈소총 2정을 압수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몇명 남아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이미 54년 1월 16일에는 팔공산부대(4지구당 제3지대)장이자, 남도부 부대 부사령관격인 유응재가 대구시내 노상에서 체포되었고, 19일에는 대구 모처에서 잠복중이던 부관 홍만식이 체포되었다.

남도부 체포후 조선일보 54년 10월 13일자에는 "(남도부 부대는) 사변 전부터 지난 1월 중순 육군특무부대에 체포되기까지 약 5년 동안의 기록에 나타난 사실만으로도 군경과 양민학살 2,800여 명, 각종 무기약탈 20만여발, 민간방화 700호, 군용열차전복 28회, 군경자동차 소각 670여 회라는 어마어마한 해독을 우리에게 끼친 괴뢰중장 남한유격대총사령관 남도부(34세, 본명 하준수)"라는 기사가 실렸다.

재판과정에서 남도부는 자신을 포로대우를 해주고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남도부는 54년 10월 14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때 같이 재판받은 유응재(부사령관, 본명 홍영식, 37세), 문일준(연락원, 본명 문덕준, 25세), 지춘란(간호장교, 24세)도 사형을 선고받았고 홍만식(본명 이원량, 23세)만 무기징역이었다.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대장, 2군사령관 강문봉 중장, 서울지구병사구사령관 허태영 대령, 특무부대 특무처장 이진용 대령이 남도부 구명 운동을 벌였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6]

당시 남도부에 대한 판결 의견서에 따르면 "괴뢰 노동당 중앙당부 직속 대남 유격대 제3병단 김달삼 부대 부사령관, 대남유격대 총사령관, 대남 유격대 제3지대장 등을 역임한 강원도, 경상남북도 일대의 유격대 총책임자로서... 국군사살 80여명, 미군 사살 16명, 경찰관 사살 70여명, 생포 10여명..."이라고 그의 신분과 전과를 밝혀 놓았다.

55년 8월 어느날 남도부는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에 의해 서울 수색의 육군사형집행장에서 눈가리개 없이 총살당한다. 입회하였던 군인들이 유가족에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남도부는 "인민공화국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 하는데 동양방송에서는 "대한민국만세!"로 둔갑하여 방송되었다.

다만 함께 총살된 부책인 유응재는 형장에서 울부짖으며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한다.

그외 빨치산 부하들은 감형을 거듭한 끝에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다. 지춘란 소위 역시 감형되어 20년만에 출소하였는데 서울의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면서 4지구당 사령부 출신들의 친목모임을 만들어 한달에 한번씩 만나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90년대 전반 한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외 다른 부하들도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모두 감형되어 20여년을 살고 풀려났다.

차진철(성일기)은 1954년 단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편입하여 59년도에 졸업하였다. 월북한 그의 여동생 성혜림뽀그리우스의 사실상 처가 되는 바람에 한때 매스컴을 타기도 하였다. 2006년에 그의 일대기인 <북위38도선>이 출판되었다.


3. 53년 10월 1일 생존자 명단[편집]


다른 빨치산 문학에서 계속 나오는 말인데, 당시 빨치산들은 각 군당에서 올라오는 자료들을 취합해서 어마어마한 문서를 만들어 놓고 수시로 땅속에 묻는 비장을 하였다고 나온다. 남도부 부대 역시 비장을 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2001년 10월 21일 역사문제연구소(소장 성대경)에 의해 경남 창녕의 차진철(북한 김정일의 처남 성일기의 가명)의 큰아버지 성기수의 집터 에서 발굴 되었다.

53년말 남도부와 차진철이 도심 침투를 위해 성기수의 집에 머물렀을 때 묻어 둔 것이였다. 발견된 물건은 유인물 기관지 '붉은별' 3부로 53년 2월 8일자, 6월 25일자, 8월 15일자였다. 그외 남도부의 친필 노트, 놋숟가락, 공작원 증명서, 원호증(약탈한 양곡 접수 확인증), 격문이 있었다. 남도부의 친필 노트에는 제3지대 생존자 26명과 일월산 지구당 10명의 명단이 첨부 되어 있었다.

1. 지구당(일월산) 성원(10명)[27]

조직위원 부위원장 이구형

부위원장 대리 유격 지도부장 남도부(중복)

대구 시당 위원장 손대수

선전조직부 출판 기술과장 장혁

공작원 허경숙, 김영수, 백운봉

유격지도부 지도원 차진철(중복)

북부지도부 지도원 박호석, 남정숙

공작원 수명(성명 미상)


2. 제3지대 성원(26명)

(사령부) 4+2명

지대장 남도부

부지대장 유응제(파견)

참모장 김진구(파견)

참모 차진철

간호원 지춘란

성원 김문식


부산동래지구 11명

부대장 김진구(참모장 겸임)

정치위원 박종남

지도원 윤창하

조장 정길화

조원 길토목, 오경수, 설암, 성도, 리정복, 박종부, 김상선,


울산밀양지구 6명

조장 허철

조원 림장하, 림병욱, 차일조, 은동이, 김강숙


대구지구(청도지구) 5명

책임자 유응재(부지대장 겸임)

성원 홍만식(사령부), 정대홍, 심경부, 지춘란(중복), 손미라


북부지구(청도에서 도당으로 파견) 2명

서규칠, 권춘식


이후 청도지구는 전멸된 후 유응재가 사령부로 돌아왔고, 울산과 동래지구는 언제 전멸한지 모른다. 사령부에서 김문식은 백기들고 투항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나머지 사령부 인원은 비슷한 시기에 전부 특무대에 의해 체포된다.

이 명단이 발굴 됨으로 93년에 출판된 실록 <남도부>가 적지 아니한 부분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앞의 책과 달리 남도부 부대는 제5지대를 자칭한 적이 없고 계속 제3지대인 상태였으며, 또한 다양한 소부대로 분산 투쟁(9개 소지구당으로 재편)한 적이 없고 동래/밀양/청도 3개 부대만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4지구당과 이구형, 남도부의 관계도 나오는데, 실록 <남도부>와는 달리 남도부는 제4지구당 위원장이 아니라 부위원장 대리이자 유격지도부장이였다. 다른 빨치산 문학에는 이구형이 공석인 제4지구당 위원장에 취임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 역시 아님이 증명되는 문서이다.

여타 빨치산 문학에서 엄청난 문서를 땅속에 비장했다고 나오는데 이 문서들이 발견된다면 빨치산의 실태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해당 문학에서도 "비장할 때 비닐을 구할 수 없어 그냥 땅에 묻어 두었는데 과연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온다.

다만 생존자 명단은 <신불산>의 기록과는 꽤 차이가 난다. 위의 명단에는 없지만 제3소지구당 조직부장 구연철등 7명이 남아 있었고, 남도부가 체포된지 3개월후인 54년 4월 부산시당을 재건하기 위해 잠입했다가 4~5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부산시당 재건사건'이었는데 백설암 등 2명은 사형, 구연철과 장두천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미군이 철수하면 통일이 되어 석방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런거 없다. 다만 구연철은 후일 석방되어 속칭 군함도라 불리는 하시마 섬에 대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


4. 남도부의 전향 여부[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거 없다.

실록 <남도부>에는 생존한 빨치산들 열에 일곱 여덟은 남도부가 체포후 전향했다고 믿는다고 나와있다. 그 이유를 아마도 동양라디오(DBS)의 <광복20년>에서 '반공홍보프로'라는 본연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남도부가 전향 공작 방송을 했다고 극화한 것을 서로 전해 듣는 과정에서 남도부가 투항하라는 전향 공작 방송을 했다고 와전되었다고 본다. 또한 DBS에서 죽을 때 '대한민국만세!'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역시 조작이었다.

다만 남도부는 체포후 육군참모총장 정일권과 나란히 앉아 술마시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삐라에 활용되기는 했으나 그의 의도와는 관계 없었다.

위의 일화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보자면 소설 <북위38도선>에 따르면 남도부는 체포후 54년도에 신천지라는 잡지에서 남조선 유격대에 관한 글을 실었다고 한다. "남조선은 지리학적으로 유격전이 성공할 수 없다. 유격 투쟁이 불가능한 곳에 유격대를 투입시킨 것은 작전상 오류였다"라는 논지인데, 여기에 대남 전략이 실패하자 남조선의 잔존 병력에게 책임을 전가시켜 기아처럼 버려서 전멸시킨 것을 비난하였다. 이에 북한에서는 남도부를 변절자로 낙인찍고 공개적으로 매도하였다.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이현상의 묘는 있지만, 남도부의 묘가 없다는 것은 이것의 연장선이라 할 것이다.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남도부가 병력 보충을 요청하러 평양에 보낸 사령부 요원 김기만은 남도부 사령관이 여색만 탐하는 변절자라고 비난하며 다녔다고 한다. 이때문에 남도부가 쌓은 전적과 신뢰감이 무너졌다. 김기만이 그러한 말을 하고 다닌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후 남로당 숙청을 위한 떡밥을 뿌리기 위함으로 보인다.

남도부는 실록 <남부군>에 나오는 "한 번 우익에게 맞으면 좌경화되고, 두 번 맞으면 빨갱이가 된다"라는 구절처럼 일제 시절부터 그를 쫒던 경찰들에 쫒기다가 입산까지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충성을 바치던 대상은 대한민국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또한 단순히 김일성에게 이용당했다고 치부하기에는 남한 빨치산내의 그의 서열이 너무 높다. 이러한 여러가지 면에서 남도부의 성향을 평가하여야 한다.


5. 관련 작품[편집]


● 1950, 60년대 영화 <남도부의 최후>
● 1970년 초 동양라디오(DBS) <광복20년-남도부사건> 극작가 김교식
● 1985년 소설 <지리산> 이병주 지음
● 1993년 실록 <남도부> 노가원 지음[28]
● 2006년 장편소설 <북위38도선> 정원석 지음
● 2016년 안재성 지음 <신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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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에 따라 南道部, 南道富, 南釜 등으로 달리 표기하기도 한다.[2] 진주 하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하승현·하재연·하재익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본래 대봉산(大鳳山)이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괘관산(掛冠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후 2009년 3월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옛 이름인 대봉산으로 환원되었다.#[4] 보광당은 여운형의 건국동맹과 조직적 유대를 갖고 그 산하조직으로 포섭되어 활동했다. 하준수는 광복 이후 자신이 '건국동맹과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다녔다고 알려져 있는데, 관련 증언에 따르면 강동정치학원 입교시 자신의 자서전,이력서에 '건국동맹원'이었음을 기술할 정도였다고 한다.[5] 이후 경찰의 일제검거로 폭망하는데, 북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남로당에서 경찰에 찔렀다는 설이 있다. 여순사건 항목도 참조[6] 1,002명만 참가하고 78명은 교통 사정 혹은 월북중 체포로 불참[7] 그러나 전육군특무부대 특무처장 이진용은 그냥 처음부터 대의원으로 지명된 상태로 하준수가 북한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심지어 하준수가 체포된 이후 그의 재판에 관여했던 대법원 김모 과장은 "남도부를 월북시킨 것은 소련당국이었어요. 인민군 장성으로 임명하기 위해 북으로 소환한 거지요. 남도부는 김일성 보다 먼저 레닌훈장과 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8] 나중에 군단으로 명칭이 개칭되는 서부전선의 제1보조지휘소 6개사단, 동부전선의 제2보조지휘소 2개사단이 편제되었다. 즉 1,2군단과 달리 7군단은 이름만 군단이다.[9] 南到釜는 "남조선 부산을 점령하라"라는 뜻.[10] 국방 군사 연구소 <한국전쟁(상)>에서도 "한편, 적은 동해안 접근로에 대한 국군의 방어력이 취약한 상황을 몰라서인지 강릉에서 1개 연대를 산악으로 기동시키며 병력을 분산 운용함으로써 충격력의 약화를 가져왔다."라면서 스스로 취약함을 자학한다.[11] 이는 <북위38도선>의 기술에 따라 남도부 부대는 단일 부대가 아니라, 처음부터 남도부 부대(동해안 남쪽) 강정수 부대(동해안 북쪽)라는 별도의 2개 부대가 편성되어 있다는 것을 뒷바침 해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12] 11연대로 내륙으로 도주한 국군8사단을 쫒게 하고, 10연대와 12연대로 945해군육전대를 흡수하여 동해안을 따라 남진함[13] 그러나 3사단 23연대는 신속히 북상하여 인민군 5사단의 공격을 어느정도 몸으로 받아내면서 지연전을 수행하여 포항 조기 실함을 막아 냈다. 나무위키 8사단 항목에는 "8사단은 초기 동해안으로 진출한 북한군을 격퇴하여 그들의 진군속도를 늦추는데 기여하였고"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8사단은 이미 강원도 원주를 지나 제천까지 도망간 상태였고, 그 역할을 부산에서 올라온 3사단 23연대가 대체하였다.[14] 이때 안철의 연락병이였던 차진철이 남도부랑 같이 가기를 원했는데, 남도부는 차진철을 대려가는 대신 윤종구가 이끄는 동래 부대 28명을 박종근-안철 쪽으로 주기로 한다. 일제의 38식 소총으로 무장한 경북도당에 비해 남도부 부대는 전원 M1 개런드 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박종근에게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였다. 하지만 이는 성일기의 일방적 주장으로 진위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부대원 28명과 성일기 한 명의 가치가...또한 남도부 군의 임호는 박종근 쪽에 남고, 대신 팔로군 출신 간호 중위 지춘란이 남도부 부대로 가는등 어느정도 인사이동이 있었다.[15] 정확하게는 채명신이 생포한 길원팔에게 항복 후 전향할 것을 권유했으나 길원팔은 이를 거절하고 채명신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16] 여담으로 <신불산>의 주인공 구연철은 울산군당 조직부장이였다가, 조용구가 동부지구당 위원장이 되며 인사개편을 할 때 울산 군당 위원장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구연철이 군당 위원장이 된다. 그런데 4지구당 개편으로 인해 3소지구당 조직부장이 된다.[17] 그의 아내의 자사전인 <이여자 이숙의>에 의하면 52년 3월에 신문을 통해 박종근이 죽었다는 것을 보았고 이때 경찰에게 끌려가 아는걸 불라고 두둘겨 맞았다고 한다. 대충 2월경 전사한 것이 맞을 듯[18] 이에 실록 <남도부>에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하여 9개 소지구당 체계로 바꾸는데 제4지구당 본부는 신불산에 두고, 제1소지구당 동해경남지구, 제2소지구당 위원장 유응재 경북 청도•밀양•달성지구, 제5소지구당 박근해, 제6소지구당 한영철, 제9소지구당위원장 강신응 영주일대 등을 임명하고 조직부장에 손대수를 선임 되었다고 나온다. 즉 처음 남파될 때의 주요 간부들은 이미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이정도의 병력이 남아 있을까 의심스럽다. <북위38도선>에는 이시기에 다합쳐서 9명 남아있다고 한다. 1인 1지구당 시대인가?[19] 위에서 언급한데로 이지역을 담당한 것은 13명으로 구성된 동래부대였고 대장은 백두흠인데 그는 당시 부산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물론 국회에 공작금을 준 적도 없다. 당연한 소리이지만 김창룡의 말은 신뢰성이 부족하다.[20] 경남 하동 악양지서에 남부군이 경남도당, 충남도당의 지원받아서 대규모 레이드 뜨러 갔는데, 마침 그날이 국군의 1차대토벌작전 하루 전날이라 토벌군이 총집결해 있었다. 국군의 1차 대토벌작전때 빨치산이 큰 타격을 입은게 아니라 이미 하루 전날 괴멸적 타격.[21] 남도부가 이시기 조용했던 이유를 당시 경남도경국장 박병배는 남도부가 이시기에 월북 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박병배 국장은 남도부가 김일성에게 '대구 폭파 후 월북'이라는 최후의 작전명령을 받고 다시 월남하였다고 증언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22] <신불산>에서는 결정서 111호가 도착했을 시기 경북 등지에 파견된 대원을 제외하고 본부의 당 요원중 살아 남은 사람은 11명, 남도부의 부대에서는 20여명등 합계 30명이 남았다고 한다. 이쪽 자료에는 지구당 본부에는 간부중에서는 부위원장(위원장?) 이영섭 아래로 선전부장 안병화와 기요과장, 제3소지구당 조직부장 안병화등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유격대에서는 사령관 남도부 이하 참모2명, 부관, 간호장교 지춘란등이 있다고 하며 유응재는 경북지역에 있어 연락 두절 상태라고 한다. 어느 한쪽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북위38도선>에서 생존자 9명설은 지구당 본부 인원을 제외한 유격대 인원만 계산한 것이고, <신불산>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유격대원이 몇명 더 남아 있다고 잘못 추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유응재 부분은 어느 한쪽이 완전히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23] 본명 성일기. 소설 <북위38도선>의 주인공. 기존의 참모들이 일선부대장으로 갔다가 죄다 전사해버려, 정치위원 안철의 연락병인 차진철이 사령부의 참모장 격으로 남아 있었다. 성일기는 <북위 38도선>에서 53년 8월에 남도부가 휘하대원에게 항복을 타진해보라고 하산시켰다고 하는데, 이후에 남도부가 끝까지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나이는 겨우 19세에 부대 병력 자체가 워낙 적어 참모장이라고 부르기가 겸연쩍어 그냥 '지도원 동무'로 불렀다고 한다.[24] 이러한 과정은 어디까지나 차진철의 증언일 뿐이다. 붙잡히자마자 남도부의 위치를 폭로하며 살려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 수사대가 이미 남도부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말은 차진철이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지어냈을 가능성도 있다.[25] 당시 신문기사에서 인용한 자료이다. 신문에는 없지만 연락병 문일준, 여대원 김상선, 남대원 김병수도 이때 체포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들은 수사기관에서 차진철과 만나게 된다.[26] 당시 군은 정일권-강문봉-허태영 라인과 백선엽-김창룡 라인의 계파 싸움이 치열했다. 결국 김창룡 등에 밀려서 구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김창룡은 강문봉-허태영에게 암살당하고, 그 암살자들도 사형당하면서 양쪽은 동귀어진한다.[27] 제4지구당을 뜻한다. 산하에 경북도당과 남도부 부대를 두었다. 그러나 경북도당은 사실상 전멸된 상태라 북한에서 경북도당 재건을 위해 이구형을 파견한 것이다. 하지만 남도부는 몰랐으나 이글을 작성하는 10월 1일 기준으로는 이구형과 일월산의 지구당 사령부는 전멸한 상태였다.[28] 이책에서 남도부 이야기는 10년마다 반복되어서 나오고 있다고 작가 후기에 쓰여있는데 정말로 10여년 후 출판된 북위38도선-남도부의 마지막 참모장 차진철의 일대기에서 남도부가 주인공 격으로 다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