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철도주식회사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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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철도주식회사
南満州鉄道株式会社 | South Manchuria Railway Company

파일:1024px-The_mark_of_South_Manchuria_Railway.svg.png
국가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의 괴뢰국)
설립
1906년 11월 26일
해체
1945년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업종명
철도 운송업 · 중공업[1] · 호텔업 · 건설업[2]
기업 분류
주식회사
운영 구간
안포선, 북선선 등등 여러 만주 지역철도
본사 소재지
만주국 신징

파일:300px-Super_Express_Asia.jpg
남만주철도의 상징 '특급 아시아호'

파일:Pashina_SL7-757_@_Shenyang_Railway_Museum.jpg
남만주철도의 파시 7형[3][4] 스트림라이너

1. 개요
2. 만철 조사부
4. 같이 보기



1. 개요


줄여서 만철(滿鐵, 만테쓰).[5] 만주국에 있던 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이나 동인도회사처럼 사실상의 수탈기업이자 일본 제국공기업이었다.

1906년 러일전쟁 직후 러시아 제국에게서 할양받은 철도와 부속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초대 총재는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으로 대만 식민정책을 총 지휘했던 문관출신 고토 신페이였다. 철도 사업을 경영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여, 군수업, 광업, 유통업, 제조업, 출판업 등 만주국의 산업 전반을 지배하였다. 만철의 성립 자체가 러일전쟁 중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가 고토 신페이의 영향을 받아 헌책한 계획에 따라 설립되었다. 그 요지는 러일전쟁 이후 만주 경영의 유일한 요결은 철도 경영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립 취지에 따라서 만철은 철도는 기본으로 광산, 항만, 유통업, 제조업, 출판업, 정유업, 학교, 병원 등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서 실질적으로 만주국의 경제를 지배하였다.[6]

한편 1910년 한일병탄이 기정사실화된 배경에는 만주 철도의 중립화를 둘러싼 미일러 간의 암투가 촉매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러일전쟁 끝나고 미국이 만주철도에 개입하려는걸 눈치챈 일본이 바로 전쟁끝낸 러시아와 협상하고 미국에 앞서서 만주철도 관련 이권을 선수친 것. 그런 관계로 만주-중국으로 향하는 이권의 교두보를 위해서 한일합방을 공고화했다는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보상 역시 좋은 편이었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은 2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중국인 하인을 고용하는 등 귀족과 같은 삶을 만주에서 누릴 수 있었다.

그 거대한 스케일에 비해 직접 운영한 철도 노선은 의외로 짧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굵직한 노선을 운영했다. 장춘(신징) ~ 다롄 구간의 701km이 주 간선이었고, 그 다음으로 굵직한 노선이 쑤자툰 ~ 신의주 노선이었다. 함북선 남양 ~ 나진 구간의 전신이 되는 북조선선도 단독 선구로서 운영했다. 그 외 장춘 ~ 하얼빈 구간을 포함한 광대한 만주 철도망은 만주국 국유철도가 직접 운영했다. 다롄에서 장춘을 넘어 만주국 국유철도가 운영하는 하얼빈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아시아 최고속으로 유명한 특급열차 '아시아'가 운영되기도 했다(1932~1943).

1920년대에는 일본 정부의 1년 세입의 4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연간 수익을 기록하였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화되었다. 실제로 만철은 1923년 부터 일본제국이 패망하는 1945년 사이에 일본제국 내 모든 법인 중 자본금 규모 1위 법인이다. 민간기업과 직접 비교는 무리겠지만 당시 일본의 3대 재벌이었던 미쓰비시그룹, 미쓰이 그룹, 스미토모 못지않게 당시 일본제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던 회사다.

1917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에서 한반도 내 철도를 위탁경영하기도 하였고[7],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동업으로 만주 이민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다나카 상주문에서도 중요한 역할로 언급되고 있다.

만철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까지도 대한민국 철도청에서 만철이 생산한 화차를 사용하였다고 하니 의외로 그 흔적은 끈질겼다. 심지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오지에선 1980년에도 만철제 화차가 현역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더 뜨악할 사실로, 북한에서는 만철에서 쓰던 푸레사(プレサ) 형 증기 기관차[8]2015년에도 현역으로 구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가 패망한 뒤에는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남만주철도를 모두 차지했으며, 중국이 공산화된 후 스탈린이 공산화 축하 선물로 1952년 반환했다.


2. 만철 조사부


중국이나 러시아와 인접한 만주에서 사업을 벌이는 만큼 산업이나 경제, 시장, 자원탐사 등의 분야는 물론 국제정세와 안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많은 신경을 썼고, 이를 위해 '조사부'를 설치해서 우수한 인력들을 대거 고용하여 연간 6천 건이 넘는 보고서를 생산해내었다. 이 만철 조사부는 1930년대 이후로는 사실상 일본 제국의 정보기관싱크탱크의 역할을 하였다. 그만큼 처우와 환경이 좋았기 때문에 당대의 엘리트들이 만철 조사부에 모여들었다.

만철의 조사부는 정보 획득을 위해 뉴욕이나 파리 등에도 지부를 설립하는 등, 당시로서는 첨단 지식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만철에는 일본의 신진 학자들이 많이 참여하였으며, 동아시아의 많은 젊은 학자들을 끌어들였다. 만철은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고 젊고 다양한 시각을 모두 수용하는 유일한 기업이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창시한 동주 이용희 교수도 만철 조사부에서 근무했던이력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들은 이제 산업 개발이 이루어지려 하는 만주에서 첨단 도시 계획이나 정책을 만들어내는 일을 맡았다.

물론 이 계획들이 죄다 제대로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들은 만주국으로 패망하고 일본으로 귀환한 후에 일본 경제정책에 관여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고[9] 한국과 대만, 중국의 경제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여담으로 철도 동호인으로 유명한 조사부장 이양반의 디씨시절 원래 닉네임이 만철조사부장 이었다.(...)


3. 만철도


쇼와 10년대부터 1945년 패전까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생산한 일본군도를 말한다. 만철도라는 단어는 속칭이고, 정식 명칭은 흥아일심. 철도회사에서 칼을 만든다는게 언뜻 이상하게 비추어질 수 있겠지만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의 6호 전차 티거를 생산한 헨쉘사는 중장비와 철도설비를 만드는 회사였고, 러시아의 전차 계보 중 중요한 1곳이 우랄열차공장임을 생각해본다면 군수품에 대한 철도계열 회사의 참여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10] 본디 철도회사란 강철에 대한 이해와 기술, 공작기계와 열처리와 같은 쇠의 근본에 통달하여야만 가능한 것으로, 도검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업종 파생이며 걸맞는 회사가 걸맞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철도회사가 칼을 만들게 된 것은 중일전쟁 이후 급속하게 불어난 일본군규모에 의해 장교용 군도의 수요가 폭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골동품 칼날이나 장인에게서 조달하고 만들던 기존의 방식대로는 도저히 장교용 군도의 수요에 다 맞출 수가 없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관동군의 요청에 따라 기계를 이용한 생산 체계를 갖춘다면 군도 부족 사태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쇼와 12년(1937년) 5월에 일본도제작부를 신설. 차후에 남만주철도공사 대련공장에 독립된 작업장을 가지게 된다.


4. 같이 보기


[1] 만주에 여러 중공업 공장을 지어 자회사를 통해 운영했다[2] 실제적으로는 거의 식민지경영회사처럼 운영되어 도시계획, 하수도 등 거의 모든 것을 통제했다[3] 일본 패망 이후에는 중국철도 승리 7형으로도 불렸다. 참고로 한국의 파시형 증기기관차와는 이름만 같지 해당 차량은 도입된 적이 없다.[4] "탄환열차 계획"으로 인해 만들어지고 나서, 훗날 1964년에 등장할 신칸센의 모태가 되었다.[5] 같은 작명법을 써서 조선총독부 철도는 선철(鮮鐵, 센테쓰)라 하였다.[6]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형태는 아니라도 철도 회사가 여러 분야에 손을 대는 경우는 많다. 일본의 수많은 사철 기업을 모태로 한 기업집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기업인 일본국유철도 또한 버스나 해운업, 통신과 병원 운영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정리된 편인데, 유럽에서도 철도 공기업들이 다른 분야의 산업에 관여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적지 않았다. 한국의 철도청도 저런 식으로 운영되던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한때 버스 사업, 요식업과 호텔 사업에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외국과 달리 철도에 전업할 것을 계속 요구받으며 타 사업분야는 계속 민간에 불하되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굳어졌다. 오히려 한국철도공사 출범 후의 코레일유통 등의 설립으로 여러 산업에 손을 대는 기업집단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7] 지금 우리가 보는 구 서울역의 역사가 만들어진 시기도 요 시기.[8]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푸레나 형(해방 후 푸러 7형)과 동일 기종이다. 다만 이 기종은 일본 본토의 철도차량 제조사와 경성공장에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에 만철제는 아니다.[9]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고도성장을 주도한 옛 통상산업성(약칭:MITI). 일본의 경제정책에 소련의 국가주도형 개발계획의 영향이 짙게 배인 것도 이들의 공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한국의 경제관료들이 모방해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한다.[10] 한국만 해도 대표적인 예로 현대로템이 있는데, 현대로템은 K-1 전차, K-2 흑표 전차를 생산하는 방위산업체지만 주력분야는 철도차량 생산이다. 애초에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차원에서 현대정공,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의 철도사업부를 통합한게 로템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