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할린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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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할린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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Южно-Сахалинская операция
樺太の戦い (からふとのたたかい)
남사할린 침공 (Invasion of South Sakhalin)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4. 전개
5. 결과
6. 전쟁범죄


1. 개요[편집]


태평양 전쟁 말기 소일전쟁의 일환으로 만주 전략 공세 작전과 동시에 진행된 소련일본령 남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 침공. 이 공세로 사할린 섬 남부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소련 해체 이후 오늘날까지 러시아령으로 남게 된다.


2. 배경[편집]


사할린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 사할린 섬은 본래 17세기에 러일 양국민들이 정착한 이래 1855년 시모다 조약을 통해 양국의 공동관리구역이 되었다가 1875년에 맺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일본명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으로 섬 전체가 러시아령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기습적인 선공으로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의 요구에 따라 맺어진 1905년의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섬을 북위 50도선 기준으로 반분해 그 이남 지역은 2차 대전 패전 직전까지 일본령으로 남았다. 일본은 이들 지역을 가라후토(樺太, 화태)라고 불렀는데 이는 으레 일본의 북방 지명이 그렇듯 아이누어에서 유래했다. 북위 50도선은 사할린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국경이 되었고, 이는 소련 성립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45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일전 참전을 결정했는데 이 지역은 소련에 있어 기필코 찾아야 하는 실지였기에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다른 전선과 비교했을 때 만주야 원래부터 의 땅이었고, 쿠릴 열도는 1855년과 1875년 일련의 조약으로 포기하고 일본에 넘긴 땅이었지만 남사할린은 명백히 러일전쟁으로 빼앗긴 구 러시아 제국의 고토였기에 소련인들 사이에서도 이번 기회에 되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아울러 일본 본토인 홋카이도혼슈도호쿠 침공까지 바라볼 경우, 남사할린은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지였다.


3. 양측의 전력[편집]


소련군의 경우, 제2극동전선군 산하 제16군이 북사할린에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이 남사할린 침공의 총괄책임을 맡았다. 16군은 예하 56군단(보병사단 1, 보병여단 3, 전차여단 1)과 255 항공사단을 보유했다. 여기에 해군 북태평양 함대 소속 다수의 함선과 해군육전대 365대대,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기 80여 기가 추가되었다.

일본군으로선 불행히도, 소련군의 공세에 맞설 병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거대한 남사할린 전체의 방위는 일본 육군 88사단이 전담했다. 이들은 미국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결호작전의 일환으로서 1945년 2월 28일 제1차 병비계획으로 신편된 사단 중 하나였는데 당연히 장비의 질이나 훈련도는 형편없었다.[1] 추가적으로 가라후토 전역의 민간인 중에 약 1만여 명이 예비군 징집대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전황의 급박함을 보면 예비군 동원도 제대로 이뤄졌을지는 의문이다.

해상이나 항공전력의 지원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막강한 연합함대는 모두 이미 미군에 당해서 완전히 수장된 상태였고, 항공전력은 본토를 초토화하는 미군 폭격기들을 막고 있었으며 또한 많은 파일럿들이 카미카제 공격에 동원되었기에 사할린에 배치될 여건이 없었다. 게다가 대전 말기에는 일본 본토와 남방 자원 지대 사이의 루트가 끊겨 연료조차 고갈된 상황이었다.


4. 전개[편집]


만주 전역이 8월 9일에 개시된 것과 달리, 소련의 남사할린 침공은 8월 11일을 기해서 이루어졌다. 88사단 수뇌부는 소련의 참전 소식을 듣고 급하게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88사단은 미군의 침공에 대비하느라 방어시설이나 주력부대의 배치를 섬 동해안에 집중했기 때문에 이틀동안 급하게 병력과 장비를 소련 국경으로 옮기느라 고생해야 했다.

8월 11일, 전 국경선에서 일제 포격과 함께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만주 전역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은 일제포격 후 병과간의 유기적인 협조하에 일본군의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는데, 일본군은 명백한 전력의 열세에도 곳곳에서 성공적으로 방어전 및 지연전을 수행했다. 일본군 88사단은 상대적으로 가라후토에서 징집된 인원도 많아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사기가 높았고, 태평양 전쟁의 다른 전투와는 달리 조금이라도 밀리면 일본 민간인들이 휩쓸린다는 위기감과 여기서 패하면 본토가 위험하다는 절박감 등이 겹쳤기에 열악한 전력에 비해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했다. 여기에 러일전쟁 이후 북위 50도선을 따라 만들어 둔 방어시설의 덕도 보았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는 뒤집을 수 없어서 전선 곳곳에서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소련군도 초기에는 총력을 다해 공세를 가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일본이 항복한 뒤인 8월 19일, 소련군 해병대는 해군의 호위와 함께 사할린 섬 남서쪽에 위치한 마오카(러시아명 홀름스크)에 상륙작전을 펼쳐 순식간에 항구를 함락했다. 마오카를 점령한 소련군은 오도마리(러시아명 코르사코프)로 진격을 개시했다. 오도마리는 홋카이도의 왓카나이와 연결되는 항구로서, 이곳이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가라후토에 남게 된 일본군과 민간인들은 본토에서 완전히 격리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일본군도 격렬히 저항했지만 마오카에 상륙한 부대가 육로로, 그리고 또 다른 상륙부대가 해로로 각각 오도마리를 협격했다.

8월 25일, 결국 소련군에 의해 오도마리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소련군의 후방상륙으로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주공인 소련군 56군단 본대는 가라후토의 중심도시인 도요하라(러시아명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점령했다. 이 시점에 이르러 가라후토의 일본군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고 각지에서 고립된 채 절망적인 저항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인 8월 26일, 일본군 88사단이 소련군에 공식 항복함으로써 전투가 종결되었다.


5. 결과[편집]


소련은 포츠머스 조약 이래 잃어버린 영토인 남사할린을 40년만에 완전히 수복했다. 아울러 이를 토대로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본토 침공까지도 고려했으나 이미 일본이 항복했고,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의 남하 및 소련과의 지분 공유를 단호히 반대했으며, 소련 자력으로도 본토 상륙전을 전개할 장비가 부족했기에 홋카이도 침공 계획은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소련 스스로도 대독 전선에 비해 대일 전선에서 본인들의 성과가 영 미약하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며 또한 슘슈 섬 전투에서 드러났듯 소련군의 상륙 전개 능력이 생각 외로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은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쿠릴 열도의 북방 4도와 달리 남사할린에 대해서는 영유권 주장조차 포기했는데 이는 1875년 조약으로 이미 한번 남사할린을 포기한 전적이 있는데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사할린의 소련 반환을 명시했기에 국제법적으로 항의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2]

일본은 남사할린 및 쿠릴 열도에서의 전투에서 옥음방송 이후임에도 생각보다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결국 소련군의 압도적인 무장공세 및 항복으로 인한 일본군 내 전투 의지 상실이 겹쳐 패배하여 이 일대를 영영 잃게 되었다. 다만 일본 입장에서도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서의 분전은 의외의 수확을 안겨다 주었는데 바로 소련의 대일 전선 최종 목표였던 홋카이도 분할 점령을 좌절시켰다는 점이다.[3] 실제 소련은 일본군 기지와 거리가 있는 루모이에 상륙해 기습적으로 홋카이도를 동서로 횡단, 루모이-쿠시로 선으로 홋카이도를 반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본래 홋카이도 기습 침공을 위해 22일 전까지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오도마리항은 25일에야 점령했고 쿠릴 열도 방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슘슈 섬 전투에서 상당한 병력 손실을 겪고 전투 일정이 지연되었다. 이러한 작전의 지연은 미국의 격렬한 반대와 맞물려 소련은 홋카이도 상륙 작전을 포기해야 했다. 미주리 함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리는 9월 2일 이전까지 홋카이도를 분할 점령해야 했던 소련으로서는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서의 작전 지연은 홋카이도 침공 계획이 좌절된 주요 원인이었다.

남사할린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들은 시베리아 혹은 사할린 내부에 마련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1950년대에 귀국하였고, 억류된 민간인들은 순차적으로 일본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한인들은 당시 일본의 무책임한 철수, 조국의 혼란스런 정국과 뒤이어 발발한 한국전쟁, 신생 대한민국 정부와 소련 간의 외교관계 단절 등의 여파로 대부분이 사할린에 잔류, 사할린 한인 1세대를 형성했다.[4] 이들은 한소관계가 개선된 1990년 이후부터 일부가 귀환하기 시작하였고, 2018년 현재 약 3,500명의 사할린 한인이 한국으로 귀환했다.


6. 전쟁범죄[편집]


마오카가 함락된 8월 20일 오전, 마오카 우편전신국에서 교환원으로 근무하던 일본인 여성 9명이 청산가리로 집단 자살한 사건인데, 일본에서는 이를 스스로 선택한 자결이라며 전후에도 순직으로 인정하고 홋카이도 최북단 왓카나이에 이들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게다가 이들 9인은 전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 극우 영화 <빙설의 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은 스스로 자결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자결한 것이라는 의혹은 1950년대 이래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본 극우에서는 자발적으로 한 선택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청산가리가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의문이 남는다. 더군다나 사이판 전투 당시 만세 절벽 집단 자살이나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온갖 사례들을 보면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정황이 있다. 애당초 왓카나이의 추모비문에도 처음에는 일본군의 지시로 자결했다는 문구가 있었으나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반론으로 해당 문구가 지워졌다.

사실 이 자살극에서 4명의 여성이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생전 당시 정황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도, 이 사건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 사할린 한인 집단 학살
대한민국 정부 산하 강제동원위원회가 확인한 사할린 한인 학살은 카미시스카 학살(19명)과 미즈호 학살(27명) 뿐이지만 추가적으로 한인학살이 있었다는 의혹은 계속해서 제기된다. 이는 당시 소련 측이 기록한 인구 통계 문서에서 1년여만에 한인 인구 수가 절반으로 급감한 것에서 기인하는데, 당시 소련은 이러한 인구 급감이 피난 내지 조선으로의 귀환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전투과정에서 일본 측의 집단학살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언급했다. 일제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단순히 식민지인이 아니라 엄연히 재일 외국인, 법적으로 일본인이라고 볼 만한 사람들을 상대로 학살행위를 자행한 일본 제국의 만행이 여실히 드러난다. 다만 이러한 학살은 당시 소련군을 막느라 정신없던 일본군보다는 침공 직후 각 마을 단위별로 급히 소집된 자경단 등 준군사조직이 소련군의 침공에 대한 공포로 무자비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카미시스카, 미즈호 학살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또한 소련군은 점령지에서의 학살강간으로 악명 높았던 만큼 소련군의 전쟁범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듯 퇴각하는 일본군에 의해 조직적인 학살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점령군인 소련군의 학살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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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나마도 2월 28일 제1차 병비계획으로 신편된 사단들이 가장 정상적이었다. 연초에 그나마 있는 자원을 몰빵해 만든 사단들이기 때문이다. 같은 해 4월 2일의 제2차 병비계획, 5월 23일의 제3차 병비계획으로 신편된 사단들 상태는 더 안 좋았다.[2] 쿠릴 열도의 경우에도 일본의 입장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입각해 포기했다. 단지 일본 정부는 소위 '북방 영토'라 부르는 섬들을 쿠릴 열도가 아닌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이자 고유의 영토로 해석하는 것이다.[3] 소련은 홋카이도를 굉장히 탐냈는데 이는 우선 사할린과 쿠릴 열도보다 온화한 홋카이도를 통해 안정적인 부동항을 영유할 수 있었고 전후 일본과의 물리적인 접경을 통해 동아시아 내 공산주의 확장에 있어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나 면적이 좁은 쿠릴 열도 및 포츠머스 조약 이전 본래 러시아령이었던 남사할린과 달리 홋카이도 북부는 유럽 전선에서의 칼리닌그라드와 마찬가지로 소련 입장에서 확실하게 노획할 수 있었던 추축국의 본토이자 대국민 선전용 전리품이었다.[4] 북한의 경우 사할린 한인들이 다른 재일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절대 다수가 현 대한민국령인 삼남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연고가 없는 북한행을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