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파출소 경관 피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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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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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8년 3월 24일 경상남도 삼천포시 송포동[1]에 위치한 남양파출소에서 당직근무를 서고 있던 남양파출소 부소장 장용업(張龍業, 당시 53세) 경장이 살해된 사건으로 뚜렷한 용의자를 찾지 못해 미제 사건으로 분류되었으나 1997년 9월 11일 범인 최창국이 자수를 하며 해결된 사건이다.

2. 상세[편집]


범행 당시 25세였던 최창국은 사천시 정동면 고읍리 사람으로 군대를 갓 전역한 상태였지만 군에 입대하기 전 이미 아내와의 사이에서 젖먹이 아들을 두고 있었다. 전역 직후 집으로 돌아가자 아내는 아들을 주인집에 내버려두고 집을 나간 상황이었고, 생활비는 없는 데다 월세까지 밀려 설상가상의 처지에 봉착한 최창국은 은행을 털기로 마음먹고 1988년 3월 24일 오후 9시 40분 경 송포동 남양파출소에서 홀로 당직근무를 서던 장용업 경장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45구경 권총을 탈취해 그대로 달아났다.

파출소에서 경찰관이 살해당하고 총기까지 탈취당했다는 소식에 경찰조직은 초비상이 걸렸고 범인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한밤중 시골 파출소에서 벌어진 일이라 목격자도 없고[2] 피해자인 장 경장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만한 행동도 하지 않아 용의자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분류되었다. 관련 기사

하지만 1997년 9월 11일 사건 발생 약 9년 6개월 만에 범인 최창국이 자수를 하면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최창국은 사건이 뉴스에 보도된 직후부터 큰 죄책감을 느껴 은행을 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고 하며, 탈취한 총은 인근 야산에 파묻었다고 한다. 9년간 공사장 인부와 경비원 등을 전전했으나 매일매일을 죄책감에 괴로워 하느라 제대로 된 일을 하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최창국은 자수한 점이 참작되어 유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 기타[편집]


  • 토요미스테리극장에서 <남양파출소에서 생긴 원혼> 이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로 재구성해 방송된 적이 있다. 물론 프로그램 특성상 살인사건 자체와 범인 검거 과정 등에 대한 재연은 아니고, 최창국이 범죄를 저지른 뒤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피해자의 원혼에 시달리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또한 자료조사가 미흡했는지 1988년에 일어난 사건을 1989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제목을 영상 초반에 내보냈다.
  • 공포라디오 쌈무이에서도 <죄 지은 자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방송된 적이 있다.#
  • 8년 뒤인 1996년 잠실파출소 경관 피살사건이 발생했는데 범인이 혼자 근무중이던 경관을 상대로 살인 범행을 저지른 뒤 총기를 탈취해 달아났다는 점, 범인이 자수하기 전까지는 둘다 미제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과 상당히 유사한 사건이다.[3] 잠실파출소 경관 피살사건이 발생한 뒤에야 전국 파출소에 CCTV가 설치됐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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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천시 송포동[2] 당시에는 지금처럼 CCTV가 다수 보급되었던 게 아니라 목격자가 없으면 범인을 잡기가 참으로 곤란했다.[3] 애석하게도 잠실 파출소 사건 쪽은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