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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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6.25 전쟁 당시
3. 6.25 전쟁 이후
3.1. 1950년대
3.2. 1960년대
3.3. 1970년대
3.4. 1980년대
3.5. 1990년대
3.6. 2000년대
3.7. 2010년대
3.8. 기타
4. 이후의 상황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 마디로 북한납치되는 것을 말한다. 피해자는 주로 대한민국(남한) 국민과 일본 국민이었다. 한국에서 납북은 주로 전자를 말하며, 일본인 납북 문제에 대해서는 납북 일본인 문서를 참조. 반대로 남한 측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납남의 사례도 존재하긴 하지만 납북에 비해서는 그 수가 매우 적다.

6.25 전쟁 당시 수많은 납북자가 발생하면서 결국 귀환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특히 강원도 어부들의 경우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 우연히 휴전선을 넘거나, 휴전선을 넘은 북한 군선에 의해 납북[1]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 이후 이산가족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 납북되었다가 이산가족 방문으로 다시 만난 사례. 기사 본문에서 납북자가 북한에서의 삶도 괜찮다고 말하는데, 설득하는 이유가 땔감(...)을 무상으로 제공해서라고 한다.

위와 같이 납북자들은 북한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주장하거나, 북한 치하에서 공직에 올라 활동하기도 한다. 사실 납북자는 북한에 가고 싶어서 월북한 게 아니라 강제로 납치 당한 피해자고, 저런 상황에 무조건 북한을 좋게 말하는 건 북한 정권의 지독한 감시와 강요로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모두가 알기 때문에, 월북이 아닌 납북자들의 저런 활동은 적극적인 가담이 아니라 판단해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영화화로 유명박열은 납북당한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란 단체의 회장을 역임했는데, 납북되기 전 해방 정국 5년 동안 뚜렷하게 반공 우익 노선을 탔던 사람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했던 활동도 강제성이 있다고 인식되었고 1970년대 박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대한민국 언론에서도 짧게나마 이것을 보도했고 사회장 수준으로 추도식이 열리기도 했다. 즉 반공이 국시였던 그 시절에도 납북당한 사람은 사정을 감안해서 평가했던 것이다.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거리가 가까운 자유진영 국가인 일본도 피해를 많이 입었고 일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직접 평양을 가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서 결국 김정일이 직접 인정하고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 외에 미국, 중국,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싱가포르,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레바논, 러시아, 루마니아, 프랑스, 영국, 요르단, 토고, 호주 등 국적과 인종에 관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납북당했다.[2]

재불 피아니스트 백건우 - 배우 윤정희 부부도 1977년에 온 가족이 납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일이 있었다. 다행히 재빠르게 백건우가 눈치채서 모면.


2. 6.25 전쟁 당시[편집]


※ 고향이 북한 치하 북부 지방이었던 사람들은 ★ 표시를 한다.


3. 6.25 전쟁 이후[편집]



3.1. 1950년대[편집]


  • 1955년
    • 5월 28일: 어선 대성호 납북 사건



3.2. 1960년대[편집]


  • 1964년
    • 3월 1일: 어선 보승2호 납북 사건

  • 1965년
    • 11월 20일: 어선 명덕호 납북 사건

  • 1966년
    • 1월 22일: 어선 길용호 납북 사건

  • 1967년
    • 4월 12일: 어선 천대11호 납북 사건
    • 11월 3일: 어선 거성호, 금윤호, 어성호, 해양호 동시 납북 사건
    • 12월 20일: 어선 청진호 납북 사건
    • 12월 21일: 어선 남풍호 납북 사건

  • 1968년
    • 1월 11일: 어선 대한호 납북 사건
    • 1월 23일: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4월 17일: 어선 창영호 납북 사건
    • 6월 8일: 어선 풍년호 납북 사건
    • 7월 2일: 어선 금융호, 신양호, 창명호 동시 납북 사건
    • 7월 10일: 어선 가덕호, 만복호 동시 납북 사건



3.3. 1970년대[편집]


  • 1970년
    • 6월 5일: 대한민국 해군 방송선 I-2 피랍사건


  • 1972년
    • 12월 28일: 어선 오대양호 납북사건


  • 1977년
    • 홍도 고교생 피랍 사건: 1977년 8월 12일~1978년 8월 10일 전라남도 신안군 홍도에서 고교생 4명(1977년: 이민교, 최승민/1978년: 이명우, 홍진표)이 납북된 사건. 2011년 주간조선이 입수한 평양시민 신상 자료에 따르면, 이들은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다.
    • 11월 15일: 요코타 메구미 납북 사건.

  • 1978년
    • 도이나 붐베아(1950~1997): 1978년 이탈리아에서 납북된 루마니아의 여성 화가. 근데 당시 루마니아독재자김일성을 좋아했다는 게 함정[6] 납북된 뒤에는 미군드레스녹과 결혼해서 살았으며, 끝내 조국인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1997년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훗날 일본으로 탈북한 다른 월북미군인 찰스 로버트 젠킨스와 친하게 지냈는데, 세상을 떠나기 직전 젠킨스에게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꼭 바다에 뿌려 주세요. 그렇게라도 내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저주 받은 북한 땅에는 죽어서라도 머물고 싶지 않아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젠킨스는 그녀의 소원대로 해주기 위해 북한에서 출국할 때 그녀의 골분을 바다에 뿌려주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북한 당국에 빼앗겼다고 한다.
      • 이름 미상의 토고 여성: 도이나 붐베아와 마찬가지로 납북당했는데, 도이나 붐베아가 사망한 이후 북한 당국에 의해 드레스녹의 후처가 되었다. 하지만 납북자가 아니라 북한 주재 토고 외교관이 북한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북한 국적자라는 설도 있다.
    • 1월 14일: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 이들은 1986년에 구사일생으로 탈북에 성공했다. 참고로 최은희는 6.25 전쟁 당시 한 번 납북당했다가 탈출한 이력이 있다.
    • 아노차 판초이: 일자리를 구하러 마카오에 갔다가 1978년 5월 21일에 마카오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공작원 2명에 의해서 강제로 보트에 태워져 납북된 태국 여성.탈북한 월북미군인 찰스 로버트 젠킨스와 1978년에 니가타현에서 납북된 납북 일본인 소가 히토미씨가 증언하면서 2005년에 최종적으로 납북된 사실이 알려지고 확인되었다.납북된지 몇년 후 월북미군인 래리 앨런 앱셔랑 결혼하였고 그가 1983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전까지 초대소에서 같이 살았었다.
    • 김영남: 납북 일본인 요코타 메구미의 전 남편이자 1978년 고등학교 1학년 재학중 당시 친구들과 전북 군산 선유도로 놀러갔다가 해변가에서 납북당한 고교생. 요코타 메구미가 1993년에 북중 국경 근처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 한 후 나중에 박준화랑 재혼하여 아들을 얻었다.
    • 공령앵(공영앵,홍링잉,홍렝잉,한국식 한자음: 홍여인): 납북 태국인 아노차 판초이와 동일한시기에 마카오에 있는 리스보아호텔의 타이 풍 이라는 보석상에서 근무하다가 후쿠다 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 관광객으로 위장한 북한공작원에 의해서 같은 호텔에있는 보석상에서 근무하던 또 다른 납북중국인인 소모이춘(소묘춘)과 같이 1978년 7월 2일에 마카오에서 납북된 납북 중국인.(1958년생으로 납북당시 20세)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홍씨와 소씨는 호텔에 있는 보석상에서 일본인으로 보이던 한 남자를 알게되었다고 한다. 북한공작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관광객 남자는 두 여성들에게 너그러웠고,저녁식사나 다른 종류의 유희를 위해 함께 외출하였다. 이들은 북한공작원에 의해서 납치되자마자 실종신고되어서 3년동안 마카오경찰들이 수색을 했는데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고, 세 사람을 단순 실종으로 처리되었다. 이후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폭파범인 김현희의 증언에 의하면 1984년 6월부터 8월까지 동료 김숙희와 함께 평양 근교 용성 40호 초대소에서 홍씨랑 같이 동거하면서 밀봉수용상태로 중국어 교육과 중국인화 교육을 받았다고 하고, 북한 초대소에서 수용중에 달아나다가 붙잡혔다고 증언하면서 처음으로 사실이 드러났고, 1978년 1월 홍콩에서 납북되었던 영화배우 최은희의 증언에 의하면 홍씨와 여러번 연락하면서 홍씨와 같이 납북된 납북 중국인 소모이춘(소묘춘)과 같이 북한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으로 달려가 도움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나 인도네시아 대사관은 두 사람을 북한측으로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후 최은희씨는 가톨릭신도였던 홍씨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증언하였고 세례명은 마리아로 기억하고있다고 하였다. 세 여인이 단순 실종이 아닌 북한에 납북됐다는 사실은 2004년 일본으로 탈북한 월북미군이자 납북 일본인 소가 히토미의 남편인 찰스 로버트 젠킨스의 증언으로 최종 납북사실이 확인되었다.
    • 소모이춘(소묘춘): 납북 태국인 아노차 판초이와 공령앵(홍링잉)과 마찬가지로 1978년 7월 2일에 마카오에서 공령앵(홍링잉)과 같이 북한공작원에 의해서 납북된 납북 중국인.



3.4. 1980년대[편집]


  • 1987년
    • 이재환: 198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납북되었다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 2001년 사망. 그의 친구였던 생명운동가 이광필 씨는 그의 사망에 대한 진상 조사를 북한 당국에 촉구하고 있다.
    • 동진 27호 납북 사건: 1987년 1월 15일 백령도 인근에서 조업하던 동진 27호가 납북된 사건. 선원 중 하나인 임국재 씨는 3번의 탈북 시도 끝에 결국 함경북도 청진 제25호 관리소에 수감되어 목숨을 잃었으며, 선장인 김순근은 생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3.5. 1990년대[편집]


  • 1991년
    • 2월 5일: 한중 합작어선 남해 006호 납북사건
    • 2월 9일: 제2승영호 납북사건

  • 1995년
    • 안승운 목사 납북 사건: 1995년 7월 연변에 파송되어 선교 활동을 하던 여의도 순복음교회 소속 안승운 목사가 연길에서 북한공작원 리승춘 외 3명에 의해서 납북된 사건. 이후 2010년 즈음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

  • 1999년
    • 9월 7일: 무역업자 장세철 납북사건


3.6. 2000년대[편집]


  • 2000년
    • 김동식 목사 납북사건: 2000년 1월 16일 중국 연변의 한 식당에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되었다. 미국 영주권자였던 김동식 목사는 90년대 말부터 중국을 오가며 연변 지역에서 탈북자들을 돕고 선교 및 자원봉사를 해왔으며, 납북 후 2001년 2월 중순에 정치범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순교(사망), 유해는 평양 근교에 암매장되었다고 한다. 북한은 현재까지 김 목사의 유해를 송환하지 않고 있다.

  • 2004년
    • 데이비드 스네든(?): 2004년 8월 중국 윈난성에서 실종된 미국 대학생. 중국 당국은 스네든이 호도협 트레킹 도중 실족사했다고 주장하지만, 수색 작업을 거쳤는데도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스네든의 가족들은 그가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스네든이 납북되기 전 한국에서 몰몬교 선교사로 일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한국어에 상당히 능통해 북한이 그를 납치 표적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며, 납북되고 난 후에는 북한 여성과 결혼하면서 김정은, 김여정의 원어민 영어교사로서 영어를 가르쳤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다만 북한은 현재까지 스네든을 납북하지 않았다며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3.7. 2010년대[편집]


  • 2013년
    • 김국기 선교사 납치 사건: 2003년부터 중국에서 탈북민 피난처를 운영하다가 2014년 10월에 체포되어 북한에 억류되었고 노동형에 처해졌다. #
    • 김정욱 선교사 억류 사건: 중국에서 북한 주민들을 위한 지하교회를 운영하다가 2013년 10월 8일에 체포되어 북한에 억류되었다. 북한 측은 김정욱이 국가정보원의 지시에 따라 간첩 행위 및 전북 음모 행위를 저질렸다고 주장했다. #

  • 2017년
    • 전혜성 재입북 사건: 7월에 북한 대남전선방송 우리민족끼리에 출연하여 재입북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북한 당국은 자진월북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다른 탈북민들에 의해 사실은 납북당한 것이라는 주장이 여러번 제기되었으며 진위 여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10월 21일: 391흥진호 나포사건


3.8. 기타[편집]




4. 이후의 상황[편집]


대한민국 통일부에 따르면 전쟁 중 납북된 사람이 11만여 명에 이르고, 전쟁 후에도 3,800여 명이 납북되었다가 3,300여 명이 송환되거나 스스로 탈북하였으며, 지금까지 516명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YS-11기 납치 사건을 비롯한 북한의 한국인 납치 행위에 대해 대한민국 통일부와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KAL기 납치 피해자 송환을 위한 대책협의회 등이 유엔인권이사회 인권최고대표사무소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UN WGEID)에 북한에 의한 납치 사건을 진정하여 유엔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은 "납북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자발적 의사에 의해서 북한에 남아 살고 있다."며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한편 일부 납북자들은 남한 정부에서 반공 체제 유지를 위해 자진 월북자로 날조하는 바람에, 남겨진 가족들도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월북 문서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으로 참전했다가 북한으로 끌려가 1953년부터 33개월 동안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가 2001년 탈북해 한국으로 돌아온 국군 포로 2명이 2016년 10월 서울중앙지법에 북한 정부와 김정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2020년 6월 7일 서울중앙지법은 2100만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7] 배상금은 국내 방송사나 출판사 등이 북한 조선중앙TV의 영상 및 출판물을 사용하고 지불한 저작권료 등이 대상이다.[8] 변호인단은 이 저작권료에 대하여 법원에 압류 및 추심 명령을 신청하여 지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은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이에 국군 포로 출신 2명이 소송을 내었지만 2022년 1월 14일 서울동부지법은 북한을 비법인 사단으로 보기 어렵고 경문협에 공탁된 저작권료는 북한 정부가 아닌 북한 내 저작권자의 것이라며 원고 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에 국군포로송환위원회는 항소할 뜻을 밝혔다.


5.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9 00:15:47에 나무위키 납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납북되었다가 탈북한 울산 출신 어부 이재근의 말에 따르면,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만났다 한다. 이 중에는 정부의 공식 납북자 명단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심지어는 제주도 앞바다에서 조업하던 중에 납북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은 이들을 대남 간첩으로 이용했다.[2] 최은희의 증언에 의하면, 외국의 여성들을 납치하기 위해 미남계까지 쓴다고. 제법 얼굴이 잘생긴 공작원이 자신의 국적을 숨기고 여성을 유혹하여 결혼하자고 꼬신 뒤, 북한으로 유인하여 납치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납북되어 온 외국인들은 대부분 공작원들에게 외국어를 교육시키는 일을 하게 만든다고 한다.[3] 다만 그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이였는데 6.25전쟁 이전에는 연백군이 38선 이남에 있었던 고로 대한민국 땅이였다.[4] 시인이며 김소월의 스승이다. 허나 후에 친일파로 전향하였다.[5] 심영황철에 의해 납북당했다.(야인시대의 그 국민고자 심영과 황철 맞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청천강까지 끌려가서 탈북하는 데에 성공했다.[6] 이 당시 도이나 붐베아는 이미 루마니아를 떠나서 이탈리아에 정착해 살았으니,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누굴 좋아했느냐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게다가 국민들이 헐벗고 굶주리거나 말거나 가렴주구를 일삼은 놈이라서, 자기 나라 사람이 납북되었다고 해도 신경이나 썼을 리는 만무하다.[7] 원래 국제법상 주권면제 이론으로 인하여 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재판에서도 역시 북한을 비법인사단으로 규정하여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8] 이 저작권료는 2004년 설립한 국내 법인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이 북한 저작권 사무국과 계약하여 2004년부터 저작권료를 북한에 송금했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송금이 중단되어 2020년 현재 법원에 20여억 원이 공탁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