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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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일본인들을 납북한 배경
4. 북한과 일본 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이유
5. 납북 수법
6. 납북자 명단
6.1. 일본 국내에서 납북된 사람
6.2. 일본 국외에서 납북된 사람
6.3. 일본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은 납북자
7. 후폭풍
8. 납북 피해자 구명을 위한 노력
9. 논란
10.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북한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인을 대상으로 벌인 납치의 피해자들.


2. 상세[편집]


일본 정부12건의 납북으로 17명이 납치된 것으로 파악했다. 북한은 13명의 납치는 인정하고 5명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나 8명은 사망했다고 밝히고 4명에 관해서는 북한에 입국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선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事件)"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일본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실종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공통점은 대부분이 젊은 20대 남녀였으며 모두 해안가 근처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이다.[1] 일본에서 납북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80년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의 보도였는데 북한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이 사안에 대해 일본 정부 측에 귀띔했지만 일본에선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웃어넘길 정도였고 누구도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작 제1세계보다 제2세계에서 도시전설로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들어 일본 경찰공안 당국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주범 북한 공작원 김현희의 증언을 시작으로 북한 출신의 탈북자와 망명한 북한 공작원, 북한으로 갔다가 돌아온 재일교포, 일본인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 정부가 일본인을 계획적으로 납치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991년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북한은 부정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가 '북한에 납치된 불쌍한 소녀 1명(=요코타 메구미)을 구하지도 못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고 북한이 일본인 150명을 납치했다고 주장할 정도로 입장을 강화했는데 조총련은 '악의에 가득찬 폭언'이라며 비난했다.

그리고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평양을 방문해서 열린 북일정상회담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의 특수기관들의 조총련계 공작원들이 공모하여 일본인 13명을 납치한 것을 인정과 동시에 사과하였다. 또 '(일본인을 납치한 것은) 영웅주의에 심취한 일부에 의한 행위', '내가 알고 나서부터 (납치를 주도한) 관계자들은 전부 처분되었다'며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변명하였다.

이 회담을 계기로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던 납북 일본인 5명이 일시귀국 형태로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일본에서 호외가 뿌려질 만큼 축제 분위기 속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머지 8명은 일관되게 이미 죽었다고 주장하면서 사망진단서만 보냈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었고 2004년에 열린 제2차 북일정상회담에서는 사망이 확인된 8명의 '사망확인서'가 전부 조작된 것임을 인정하였고 생사 여부가 불분명한 사람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를 재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회담에서는 북한에 남겨진 피해자 가족들을 추가로 데리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약속 위반이라며 강하게 비난했고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약속도 소용없이 이 후의 교섭마저 일정을 정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중단시켰다.


3. 일본인들을 납북한 배경[편집]


6.25 전쟁 발발 후 한국남북으로 갈라진 뒤 북한이 남한을 겨냥해 각종 도발과 교전을 벌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1960년대에 들어 1.21 사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적극적으로 간첩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북한의 행적이 드러나자 한국 당국은 삐라 찾기, 간첩선 신고 등 안보 교육과 경비 태세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북한한국인과 용모가 비슷하면서 세계 각국으로 입국하기 쉬운 여권을 갖고 있는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한국에 잠입하는 것이 꽤 획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고 공작원에게 일본어와 자연스러운 일본 문화를 가르칠 교육관이 필요하여 일본인을 납치한 것이 이유라고 2002년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직접 밝혔다.

1970년대북한으로 자진 망명한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의 주범들은 북한공작원 활동에 이용할 가치가 매우 높았으므로 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짝을 지어주기 위해 일본인 여성을 납치한 경우도 있었다. 1983년납북된 아리모토 게이코(有本恵子)가 이런 사례에 해당하며 공식 납북자는 아니지만 요도호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인 오카모토 타케시의 처 후쿠토메 키미코도 바로 이렇게 납북된 것으로 보인다.

납북된 일본인들은 평양룡성구역에 모여서 결혼한 이를 제외하고 남녀가 각자 마을을 이루며 사실상 감금된 형태로 외부로의 노출은 극도로 제한되어 감시 속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존재는 북한 사람에게는 철저히 비밀리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결혼도 북한 현지인과 시키지 않고 같은 일본인끼리, 또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제3국에서 납북한 타국의 납북자와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북한과 일본 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이유[편집]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총 17명이 강제납북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은 2002년부터 강제납북자는 총 13명이며 이 중 8명은 이미 사망하였고 5명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으니 이제 납북자 문제는 종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나머지 4명에 대해선 납치한 적이 없으며 자신들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특히 북한은 8명의 사망자들에 대해선 심장마비, 교통사고, 가스 중독 등으로 사망하였고 홍수 때 묘지가 유실돼서 시신은 찾을 수가 없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북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박했다. 모두 신체가 건강하고 20~30대의 젊은 나이인데 그렇게 다수의 사망자가 생겼다는 게 이상하며 하나같이 시신이 없다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이 내민 '사망확인서'가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으로 급하게 작성된 것으로 사망일자와 사인이 다름에도 모두 같은 병원에서 작성되었다는 게 너무나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2차 정상회담에선 이 사망확인서들이 조작됐다는 것을 북이 인정하고 재조사를 약속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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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입퇴원 대장'이 너무나 허술하게 '사망'으로 수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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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 메구미의 병원 차트 기록.

당시의 연령, 정보와 맞지 않는 부분이 다수 보였다.

북한 공작원이자 18살 때부터 한국에서 간첩 활동을 벌이다가 1995년 부여에서 체포당했던 김동식(金東植)은 공작원 시절 대외연락부[2]에 있었을 때 카메이(亀井)나 다나카(田中)라는 이름을 쓰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다면서 공작원들의 얼굴과 이름 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 되돌려 보내면 북한의 어마어마한 국가 기밀이 노출될 염려가 크다는 이유로 '사망확인서'를 조작하여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요코타 메구미는 남편 김영남의 오락가락한 진술 덕에 더더욱 의문점이 많으며 다구치 야에코는 1984년에 사망했다는 북한의 주장과 다르게 1986년까지 같은 곳에서 지냈다는 납북 피해자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 측의 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5. 납북 수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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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된 인원과 납북된 곳.

공식 납북자 이외에도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수의 인원이 해안가에서 실종되었으며 장소는 주로 동해와 인접한 후쿠이현, 니가타현, 가고시마현이었다.

  • 1번째, 북한은 해안가에 선박을 정착시킨 뒤 타겟을 정하고 말을 걸어 납치.
  • 2번째, "일을 소개해 주겠다"는 방법으로 유인하여 납치.
  • 3번째, 타겟으로 정한 상대가 아니라도 공작원이 본인의 정체를 목격했다고 여겨지면 가리지 않고 납치.[3]

첫번째는 1977년 돗토리현의 해안가 인접한 자택 근처에서 납치된 마쓰모토 교코(松本京子, 당시 29세)로 수상한 남성 두 명과 대화하는 모습이 이웃 주민에게 목격되어 말을 걸었으나 그들에게 습격당해 얼굴이 찢어지는 타박상을 입었고 마쓰모토는 해안가 방향으로 끌려간 뒤 샌들 한 짝만을 남겨두고 납치되었다.

요도호 사건의 범인 중 한명인 오카모토 타케시의 아내 후쿠토메 키미코(福留貴美子)는 73년까지 '유니버스 트레이딩'이라는 간첩들의 비밀 공작 거점이었던 회사에서 일하다가 몽골에 체류한다며 실종되었는데 정확한 루트는 알 수 없지만 2번째 케이스로 추정된다.

3번째는 납북 피해자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요코타 메구미(横田めぐみ)의 경우로, 납치 당시 겨우 중학생 정도의 나이였지만 공작원이 되돌아가던 중 목격하여 자세히 보지 않고 납치하였다는 설이 있다.


6. 납북자 명단[편집]


'특정 실종자 문제 조사회'라는 민간 단체에서 추정하는 납북 일본인 리스트는 194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시대불문 400여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지만 정확한 사실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일본 경찰청은 '납북의 가능성이 인정되는 특정실종자' 리스트로 868명을 공개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 협력회(北朝鮮に拉致された日本人を救出するための全国協議会)', 약칭 '구출회(救う会)'는 공식 납북자 이외에 7명이 더 납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정부 측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피해자는 납북이라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인물은 제외하여 총 17명이다.


6.1. 일본 국내에서 납북된 사람[편집]


☆표시는 일본에 귀국한 사람이다.

  • 구메 유타카(久米裕, 1925-?, 당시 5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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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9월 19일 이시카와현 우시쓰 해안에서 납치되었다. 통칭 '우시쓰 사건(宇出津事件)'이라 칭한다. 도쿄도 미타카시 관공서 경비원이었으며, 공식 납북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45세에서 50세 사이의 결혼하지 않은 일본인 남성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받은 재일 조선인 공작원 이추길(李秋吉)이 해안가에 데려갔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김세호(金世鎬)에게 넘겨 공작선에 태워 납치했다. 주범인 김세호는 국제 지명수배되었으며 이추길은 기소유예 처리되었고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오야마 아키요시(大山秋吉)란 이름으로 도쿄에서 자영업을 하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이시카와현 경찰은 압수한 난수표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여 1979년 경찰청 장관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이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다는 사실은 이로부터 한참 후에나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에 이 당시엔 사건을 철저히 비밀리에 붙이고 단순하게 '불법적으로 한국에 출국한 일본인이 있다'는 얘기로만 작게 보도되었다. 북한에선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부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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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15일 니가타현에서 납치되었다. 통칭 '소녀납치사안(少女拉致事案)'으로 칭한다. 중학생이었던 요코타는 하굣길에 실종되었으며 당시엔 단순 유괴 사건으로 추정되었다. 북한 측의 주장에 따르면 1986년 한국인 김영남(金英男)[4]과 결혼하였고 1987년에 딸 김은경을 출산했으며 1994년에 병원에서 자살하여 1997년에 화장했다고 밝혔다. 2004년 그녀의 화장된 유골이 일본에 전달되었는데 DNA 감정 결과 다른 사람이란 결과가 나왔고 일본은 분노로 들끓었다. 1997년 조선로동당 서기가 당시 일본 총리였던 하시모토 류타로에게 비공식적으로 요코타 메구미의 생존을 알렸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부터 1997년 그녀를 화장했다는 오봉산 화장소도 1999년에야 건설되었다는 여러 탈북자들의 진술 등 다수의 증언이 더해져 생존설이 빈번하게 대두되었다. 요코타 메구미가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교육했다는 설도 있다.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그를 돌본 것이 요코타 메구미라는 설도 있는 등 현재까지도 다양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조.)

  •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1955-1986?, 당시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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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6월 29일 납치되었다. 통칭 '이은혜 납치 사안(李恩恵拉致事案)'이라고 칭한다. 도쿄의 음식점 점원으로 1984년 오사카 중국 요리요리사였다가 납북된 하라 다다아키와 결혼하였고 1986년 남편이 병사하고 같은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홍수로 묘지가 유실되었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이은혜라는 여성에게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라는 증언을 하면서 몽타주를 그리게 하여 1988년 일본 각지에 '1980년 이전에 행방불명된 이 여성을 알고 계십니까?'라는 포스터를 붙이고 대대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1991년 들어 1978년에 실종된 다구치가 '이은혜'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했으며, 김현희와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교관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일본 조사단이 서울에 수감되있던 김현희와 직접 면회해 동년배 여성의 사진 10장을 뿌리고 이 중에서 교육관이었던 사람을 찾으라고 지시했을 때 김현희가 다구치 야에코의 사진을 보고 정확하게 '이 사람'이라고 얘기함으로써 다구치=이은혜가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북한은 다구치가 이은혜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78년 8월 12일에 납치되었다. 통칭 '모녀 납치 사안(母娘拉致事案)'으로 칭한다. 당시 간호사였던 소가 히토미는 어머니인 소가 미요시(曽我ミヨシ, 1931-?, 당시 46세)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다 니가타현에서 납북[5]된 뒤 1980년 북한에서 월북 주한미군찰스 로버트 젠킨스와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2002년 이루어진 북일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김정일과의 회담 시 납북자의 석방을 요구하여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후 협정에 따라 북한에 남겨진 남편과 아이들도 일본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북한의 세뇌교육을 받은 그들은 일본으로 가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여 소가 히토미 본인이 1시간에 걸쳐 설득했음에도 동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7월 찰스 로버트 젠킨스자카르타에서 부인과 재회하여 2004년 가족 모두가 일본에 입국했다. 일본 영주권을 취득하여 가족과 함께 작은 가게를 차려 살고 있다. 참고로 소가 히토미는 요코다 메구미를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어머니인 소가 미요시는 북한에서도 만나지 못했고 북한 당국도 납치를 부인해서 북한으로 가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소가 미요시의 납치 사실은 부정하지만 일본에선 공식 납북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녀는 각지로 강연과 집회를 다니며 납북 피해자들의 구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납치 당시를 증언하는 2014년 인터뷰[A]

  •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 1955-, 당시 23세), 하마모토 후키에(濱本富貴惠, 1955-, 당시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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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7월 7일 후쿠이현 오바마시에서 납치되었다. 통칭 '아베크[6] 납치사안(アベック拉致事案)'이라고 칭한다. 지무라는 목수 견습생이었고 후키에는 옷가게 점원이었는데, 납북 후 1979년 북한에서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함께 고향 방문 후 북한으로 돌려보낸다는 조건으로 북한에서 귀국을 허용했다. 일시 귀국했으나 일본 사회에서 그들을 돌려보내선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본인의 의사도 그러하였고, 수십년 만에 만난 가족들도 그들의 영구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여 결국 정부가 당초 합의를 깨고 그들을 잔류시켰다. 2004년엔 세 자녀도 일본으로 영구 귀국했다. 지무라 야스시의 아버지는 2020년 7월 10일에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 ☆하스이케 가오루(蓮池 薰, 1957-, 당시 20세), 오쿠도 유키코(奥土佑木子, 1956-, 당시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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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7월 31일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납치되었다. 위의 지무라 부부와 동일하게 '아베크 납치사안(アベック拉致事案)'이라고 불리지만 그 쪽은 후쿠이현, 이쪽은 니가타현이라는 괄호가 붙는다. 당시 주오대학에 재학 중이던 하스이케 카오루는 화장품 회사 직원이었던 여자친구 오쿠도 유키코와 "데이트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긴 채 실종되었다. 이들은 카시와자키시의 해변가에서 납치되었고 1980년 북한에서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요코타 메구미와 다구치 야에코와 같은 구역에 거주했다. 이후 2002년 고이즈미 정부와 김정일의 국교정상화 조건으로 납북 피해자들을 일시귀국시켰다. 이때 일본에 들어와 우여곡절 끝에 영구 귀국했다. 2004년에는 북한에 있던 자녀들도 일본에 귀국했다. 납북 일본인들 중에서도 일종의 리더 격이었다고 한다. 귀환 이후에는 한국어 번역 등에 종사하면서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7] 언론과 강의에 얼굴을 비추며 납북 피해자였던 만큼 외무성납북 문제에 대해 극비로 면담하는 등 납북 피해자 구출에 힘쓰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일본 만화 탈환은 24년간 억류되다 일시귀국으로 돌아왔을 때 납치라는 범죄를 당한 피해자임에도 완전히 세뇌[8][9]되어 가해자 북한을 두둔하며 친구들에게 북한 여행을 권유하는 등 이상행동을 보인 것도 모자라 북한에 돌아가겠다고 주장하는 카오루와 어떻게든 다시 일본인의 정체성을 되찾게 해서 일본에 귀국시키려고 온갖 수를 다 쓰고 결국 그의 친형의 끈질긴 설득과 카오루의 오래된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 끝에 영구귀국을 이뤄낸 그의 친형의 분투기가 담긴 만화다.

  • 이치카와 슈이치(市川修一, 1954-1981?, 당시 23세), 마스모토 루미코(増元るみ子, 1953-?, 당시 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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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8월 12일 가고시마현에서 납치되었다. 위의 두 부부와 동일하게 '아베크 납치사안(アベック拉致事案)'이라 불리며 이쪽은 가고시마현이라는 괄호가 붙는다. 두 사람은 후키아게하마(吹上浜) 캠프장에서 실종되었다. 북한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이들은 1979년 결혼하였고 같은 해 9월 남성이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여성 역시 198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 다 둘 다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라는 부자연스러운 사인과 시신이 모두 유실되었다는 점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전 북한 공작원 안명진은 90년대까지 그들을 몇 번이나 봤다고 증언하였다.

  • 마쓰모토 교코(松本京子, 1948-?, 당시 2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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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9월경 돗토리현 요나고시에서 납치되었다. 납치 당시 목격자가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마쓰모토는 오후 8시경 자택 근처 뜨개질 교실로 향하던 중 수상한 남성 두 명과 마주쳐 이야기를 하던 모습을 인근 이웃이 목격하였는데 한 명은 망을 보는 듯한 매우 수상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여기서 무엇을 하나?"라고 말을 걸자 남성 중 한 명이 이웃을 구타하였고 마쓰모토는 해변가로 끌려갔으며 그 이후 샌들 한 짝만이 발견되었다. 실종 직후 수상한 배 1척이 목격되었고 일본 경찰이 수상한 전파 교신을 감청했다. 이후 북한함경북도 청진시에 살며 일본의 한 회사 관계자가 북한의 무역회사 직원과 통화했을 때, 자신을 '교코'라고 칭했던 여성이라고 추정된다. 대한민국에도 납북자가 다수 있기 때문에 일본의 납북자 가족들과도 접촉이 잦은데 대한민국에서 조직한 납북자 가족회의 조사에 따르면 거주지가 2011년 청진에서 평양으로 옮겨졌으며 북한에서 결혼하였고 아이는 없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한국국가정보원도 같은 의견을 보였으나 일본 정부 측은 조사 중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의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2013년 라오스에서 탈북했다가 북한으로 강제송환된 9명 중 없다고 여겨진 마쓰모토의 아들이 속해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고 동아일보가 취재했다. 2016년 평양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이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의 주장을 인용해 보도했다.

  • 하라 다다아키(原 敕晁, 1936-1986?, 당시 4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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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경 미야자키현에서 납치되었다. 통칭 '신광수 사건(辛光洙事件)이라 칭한다. 당시 재일교포 오사카 상공회 이사장이었던 이삼준(李三俊)이 경영하던 중국집 보해루(宝海楼) 조리사였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공작 활동을 벌이던 신광수는 하라를 납치한 후 그로 위장하여 일본에 입국, 여권, 운전면허증, 국민건강보험증까지 취득하며 국내외에서 간첩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1985년 한국에서 체포되었고 하라가 납북당한 것이 세상에 드러났다. 한국명은 박철수이며 돈벌이와 지병치료를 위해 해외로 가길 희망하던 차 북한 공작원이 접촉하여 엔화 100만엔과 북한 입국을 허가하는 대신 하라 본인의 호적등본을 맞교환하는 조건으로 미야자키현 해안에서 북한으로 데려갔다는 것이 북한 측의 주장이다. 1984년 다구치 야에코와 결혼했으나 2년 뒤 황해북도 임산에서 간경변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다구치와 같은 묘에 묻혔지만 역시나 홍수로 시신이 유실되었다는 게 북한 측의 주장. 신광수는 1999년 석방되었고 당시 국민의 정부의 '비전향 장기수 송환' 정책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체포되어 옥살이까지 했기에 돌려보내지면 처형이 당연시되는 게 북한이지만 신광수의 공적이 크다고 여긴 김정일은 가문의 영광급이자 최고 등급인 국가 훈장 1급까지 부여하고 기념 우표에도 얼굴을 싣게 해 주는 등 영웅으로써 대접을 톡톡히 해주었으니 신광수는 잘 살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6.2. 일본 국외에서 납북된 사람[편집]


  • 마쓰키 가오루(松木薫, 1953-1996?, 당시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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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오른쪽. 해당 사건은 통칭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인 남성 납치 용의 사안(欧州における日本人男性拉致容疑事案)'으로 칭한다. 1980년대 활발했던 북한 공작원의 유럽에서의 납치 사건이라는 큰 틀에 놓여 있는 사건이다. 1980년 5월 스페인 유학마드리드에서 행방불명되었으나 북한에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북한은 '공작원에게 본인이 스스로 북한으로 가길 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요도호 사건 주범들의 부인이자 북한의 지령을 받고 공작원 활동을 펼치던 모리 요리코(森順子)와 와카바야시 사키코(若林佐喜子)[10] 두 여성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납치 목적은 공작원의 일본어 교육관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이며 한국명은 '임청수'이고 1996년 혁명사 유적지를 참관하러 가던 중 함경남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북한은 밝혔다. 2002년 북한에 파견된 일본 조사팀이 유골을 인도받았으나 DNA 감정 결과 요코타 메구미와 동일하게 가짜 유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또 다시 일본의 분노를 일으켰다.

  • 이시오카 도루(石岡 亨, 1957-1988?, 당시 22세)
위 사진에서 왼쪽. 1980년 스페인에서 납치되었다. 마쓰키 가오루와 함께 납치되었으며 1985년 납북 피해 여성인 아리모토 게이코와 북한에서 결혼하였고 다음해 장녀를 출산했지만 1988년 가스 중독으로 일가 모두 사망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주장이다. 역시 시신은 홍수로 유실되었다는 이유로 확인되지 않았다. 1988년 마쓰키와 아리모토가 함께 북한에 있다고 적힌 그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시오카의 직필 편지였으며 'Please send this letter to Japan'이라 쓰여진 자그맣게 접힌 편지의 글귀로 보아 어떠한 루트로 비밀리에 보내진 것으로 추정.[11] 편지에 그들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는데 이시오카와 아리모토 사이의 딸로 추정되는 아기의 사진이 있었다. 그의 여권은 북한에서 위조여권의 기본 샘플로 사용되어 북한 공작원들과 요도호 사건 그룹에게 유효기간은 같고 여권 번호만 다른 위조 여권으로 뿌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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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오카 도루가 보낸 편지. ||

  • 아리모토 게이코(有本恵子, 1960-, 당시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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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일어난 일본인 여성 납치 용의 사안(欧州における日本人女性拉致容疑事案)'의 피해자다. 1983년 영국 런던 유학 중이던 그녀는 6월 본가로 '8월 9일에 싱가폴을 거쳐 오사카에 17시 15분 비행기로 도착한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일본으로 귀국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당일 '일을 찾았다. 귀국이 늦어진다. 게이코(仕事が見つかる 帰国遅れる 恵子)'는 전보가 본가에 도착했다. 그 후 코펜하겐에서 보낸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그녀의 부모는 외무성과 경찰에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어느 곳도 대응해 주는 곳이 없었다. 북한에 있다고 확인된 것은 5년 뒤인 1988년 이시오카 도루가 보낸 편지에 의해서였다. 한국명은 김현숙이며 1984년부터 1988년까지 평양 근교의 여관에서 일본어를 가르쳤으나 1988년 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공개한 사망신고서에 기재된 생년이 달랐으며 1991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요도호 사건 범인들의 부인 중 한 명인 야오 메구미(八尾恵)가 체포 후 본인이 그녀를 납치했다고 밝혔기에 납북이 공공연한 상황이지만 북한은 그녀의 납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다나카 미노루(田中 実, 1949-, 당시 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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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6월 납치되었다. 통칭 '전 음식점 점원 납치 용의 사안(元飲食店店員拉致容疑事案)'으로 칭한다. 라멘 가게의 종업원이었으나 점주이자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작원에게 오스트리아 빈을 경유하여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북한 측은 그의 납북을 부정하고 있었으나 2014년 입장을 바꾸어 납북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북한 측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계속 북한에 남아 있기를 원하며, 귀국 의사는 없다고 한다. 납북 시인 사실은 4년 뒤인 2018년 일본 정부 관계자가 언론에 이야기를 흘리면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기사 원문(일본어),번역 기사(연합)

6.3. 일본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은 납북자[편집]


  • 데라코시 다케시(寺越武志, 1950-, 당시 16세)
1963년 5월 11일 노토 반도에서 작은아버지인 데라코시 쇼지(寺越昭二, 당시 36세), 데라코시 소토오(寺越外雄, 당시 24세)와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어선만이 표류된 채 실종되었다.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호적상 사망 처리되었으나 25년이 지난 1987년 데라모토 소토오의 편지로 북한에서 사는 것으로 드러났다. 단 북한의 세뇌교육 탓인지 몰라도 자신들은 납치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어선이 구출해준 것이라고 얘기했기 때문에 납북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전 공작원 안명진의 증언은 상이하여 '공작선이 일본 어선에 목격되어 가장 어린 아이를 감싸던 연장자를 총으로 살해하고 나머지는 북한에 끌고 갔다'고 얘기하였고 이 쪽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들은 납북자 중에서도 굉장한 특이 케이스로, 데라코시 다케시의 부모인 다자에몬(太左エ門)[12]과 도모에가 방북하여 이들과 재회한 이후 도모에는 2014년까지 62회 가량 북한에 드나들며 아들을 만났고[13] 다자에몬은 2001년 방북하여 아예 눌러 살았다. 아마 북한에 제일 많이 간 일본인일 듯. 부모는 북한에 외화를 갖다 바친다는 등 주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데라코시 다케시의 한국명은 김영호이며 조선로동당원으로 평양 직업 총동맹위원장이란 고위직에 속해 있다. 2002년 북한 조선로동당 대표로까지 일본에 방문했을 정도이니 말 다한 듯하다. 더불어 방일 시 본인의 고향 본가에 묵었으며 "넌 일본인이니 일본의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는 모친의 말에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입니다. 김정일 수령님의 배려 덕분에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스스로 일본 국적을 거부했다. 북한에선 일본의 경제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대일 문제의 카드로써 이용되고 있다. 함께 실종된 데라코시 쇼지는 '배 위에서 총격당해 살해되었다'는 설과 '침대에 떨어져 사망했다'는 2가지 설이 있으나 안명진의 발언대로 첫 번째 설이 유력하다. 소토오는 1994년 구성에서 간암으로 사망했고 함께 살고 있던 부친 다자에몬은 2008년 평양에서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가토 구미코(加藤久美子, 당시 22세)
1970년 8월 8일 후쿠오카시에서 납치(추정).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김정일 정치 군사 대학에서 요코타 메구미와 함께 있었던 여성으로 추정된다. 현재로써의 증거는 안명진이 그녀와 닮은 여성을 봤다는 증언밖에 없기 때문에 공식 납북자로 인정되지 않고있다.

  • 후루카와 노리코(古川了子, 1955-, 당시 18세)
1973년 7월 7일 치바현에서 납치(추정). 오전에 미용실을 다녀온 뒤 오후에 모친과 유카타를 사러 쇼핑을 나갈 예정이었으나 미용실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하고 어머니에게도 쇼핑에 못 갈것 같다고 전해달라"고 말한 뒤 소식이 끊겼다. 역시 안명진이 1991년 평양에서 병원에 있던 여성과 닮았다는 증언 이외엔 짚히는 점이 없다.

  • 고스미 겐조(小住健蔵, 1933-, 당시 46세)
1961년부터 행방불명되었으나 납북은 1980년으로 보인다. 1985년 (朴)씨로 알려진 공작원이 고스미인 것처럼 위장하던 것을 일본 경찰이 적발하고 지명수배했으나 잡지 못했으며 현재도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이 공작원이 소속된 회사 사장 미야모토 아키라(宮本明), 한국명 이경우(李京雨)라는 인물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주범이었던 공작원 김승일이 소지한 일본 위조 여권을 지인에게 만들게 했으며 다구치 야에코가 일하던 가게 손님이었던 등 납북자와 관련이 많은 거물 공작원이다. 고스미는 당시의 나이로 보아 현재는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 후쿠토메 키미코(福留貴美子, 1951-1988?, 당시 25세)
요도호 사건의 범인 오카모토 타케시의 아내로 1976년 여름 실종되었다.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홍콩, 북경을 경유하여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 당시 그녀는 요도호 사건 주범의 아내 야오 메구미에게 "동경하던 몽골로 가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오게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73년까지 북한의 비밀 공작 거점이었던 가짜 회사 '유니버스 트레이딩'의 파견직으로 근무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공작원에 눈에 들어 타겟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8월 후쿠토메의 본가로 '어느 공산국에 와있다, 외국에 좀 더 체제해야 되겠다'는 편지가 도착했는데 이후 북한에서 오카모토와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980년 3월 9일 일본에 모습을 드러냈고 요코하마의 친구 집에서 11일간 숙박한 뒤 '오사카에 다녀온 후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겼으나 몇 달 뒤 오사카 국제공항에서 출국한 기록만 남긴 채 또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 후 일련의 조사로 오카모토 타케시의 아내가 고치현 출신 후쿠토메임이 1996년 아사히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요도호 사건의 멤버이자 북한에 거주하는 코니시 타카히로가 그녀의 부친 앞으로 보낸 편지에선 1988년 토사 붕괴로 남편과 함께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야오 메구미에 의하면 "제가 아는 한, 오카모토씨와 그 부인은 망명 후 요도호 그룹이 주체사상을 따르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뇌 교정을 위해 격리되었고 결국 죽음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고 얘기한 것으로 보아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일본 정부 측은 2004년 후쿠토메를 방문이 제한되있던 북한에 필요한 서류도 없이 들어간 혐의로 체포장을 발부하며 사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히 그들의 두 자녀는 2002년2004년 차례대로 일본에 귀국했다.

이 외에 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북한 공작원과 일본인 여인 사이에 낳은 아이들이 북한으로 끌려간 사건이 있다. 매스컴 등지에서도 해당 사건은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일본 정부측은 여러가지 요건에 의해 미인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7. 후폭풍[편집]


2002년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납북 일본인 사안을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일본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으며 온 매스컴과 국민들이 입을 모아 북한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제껏 단순 실종자로 처리되었던 장기 실종자들의 꽤 상당수가 북한에 의한 납북인 것이 확실해지면서 그에 따른 구명 운동이나 피해자 가족들의 움직임도 바빠졌으며 '블루리본 운동회'라는 납북 피해자 구명 운동과 단체들도 속속들이 생겨났다. 1998년 대포동으로 대변되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 등으로 대북 여론이 극도로 험악했던 터에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며 납북 일본인 문제를 적극 부정하는 창구 역할을 하였던 조총련은 이 일로 극도로 이미지가 나빠졌으며 덩달아 혐(북)한 감정까지 심화되었다. 북한은 당시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김정일은 이와 관련 없다고 면피함으로 일본의 대북 감정을 호전시키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김정일의 기대와 달리, 일본에서는 5명의 일시 귀국보단 8명의 사망에 집중하여 국민을 제때 구하지 못해 '비정의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극도의 부정적인 반응이 대다수였으며 일본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를 맹비난하며 대북 대화를 추진해온 일본 외무성의 다나카 심의관을 테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고이즈미 내각에 호재로 작용하였는데 2차 북일정상회담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고이즈미를 유족회에서 맹렬하게 비난하자 고이즈미는 공개석상에서 이들을 마주한다는 모험수를 던졌고 아우성치는 유가족들의 비난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메이와쿠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일본 민심이 반전되어 '구해온 피해자들은 사람도 아닌가', '총리가 북한까지 다녀왔는데 고마운 마음은 없는 것인가' 등의 맹비난이 유족들에게 쏟아졌고 고이즈미 내각의 지지율은 급등하였다.

이 사안은 2004년 미국 의회가 '북한 인권법(North Korean Human Rights Act of 2004)'을 제정할 정도로 문제가 커져 2006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납북 피해자인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 요코타 시게루, 사키에 씨가 미국에서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정권이 바뀐 2013년일본 정부에서 '납치 문제 대책 본부'를 새로이 설치하여 납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일본북한의 국교정상화는 없다는 방침을 강화했고 아베 신조 총리는 "내 사명으로써 내가 최고책임자로 있을 때 확실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발언했다. 2014년 아베 총리는 납북 일본인 문제의 추가 조사를 요구하였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본은 경제제재를 일시적으로 풀었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북일관계가 호전되는 듯했으나 북에서는 질질 끌다가 '조사해보니까 더 없다' 고 발표하여 일본을 엿 먹이고 재조사 기간을 더 달라며 일을 질질 끌면서 조사 결과를 안 말하는 등 아베 신조를 단단하게 애태웠다. 아베 신조 내각이 납북 일본인 구출을 필생의 숙원으로 삼은 걸 김정은이 갖고 논 셈이다.

한편 증언자였던 안명진은 통일부 공무원을 북한 공작원이라고 잘못 말한 걸 계기로 일본 방송에서 섭외가 끊겼고 그 뒤 메스암페타민 밀수를 하다가 구속되어서 일본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돈을 벌려고 마약 밀수도 한다면 그동안의 증언도 출연료를 위해 어떻게 윤색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8. 납북 피해자 구명을 위한 노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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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피해자 구명 운동의 상징인 블루리본.[14] 일본 정치인들이 많이 달고 다닌다.

일본 내 민간 단체인 '특정실종자문제조사회'는 구출 활동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2005년 납북 일본인을 주 청취자로 하는 대북방송 '시오카제'를 개국, 2007년에는 일본 정부대북방송 '일본의 바람'을 개국하여 방송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시오카제일본의 바람 참조.

2005년 일본 정부에서 요코타 메구미 사건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메구미(めぐみ)'를 제작하여 일본어판, 한국어판, 중국어판, 영어판, 러시아판을 더빙으로, 프랑스판, 스페인판, 독일판, 이탈리아판, 태국판을 자막으로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해당 애니메이션은 일본 전국의 초, 중, 고등학교와 국회의원, 방일한 외국의 정치인사와 대사관 등에 다방면으로 상영하고 있다. 일본판 성우는 요코타 메구미역에 타카야마 미나미, 메구미의 부모 역에 야마데라 코이치후카미 리카, 미키 신이치로등 내로라하는 유명 성우들이 노개런티로 참여하였다. 영상은 유투브일본 정부 공식 사이트에서 시청할 수 있다. 2006년에는 크리스 셰리던, 패티 김 감독이 요코타 가족의 활동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한 영화 '메구미'가 상영되기도 하였다. 2020년에도 영화로 나온다.#

일본 정부에서도 북한과 2014년 스톡홀름 합의를 본 적 있으며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인해 독자 대북제재로 인해 북한이 대북제재를 반발해 납치 문제 조사 중단과 조사위원회 해체를 선언했다. #

2019년에 극비리로 북한과 내각 정보관(내각조사실장)이 2018년 말 도쿄에서 조총련의 남승우 부의장을 극비리에 만난 사실이 확인됐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로 들어서고 납북 일본인 가족들과 면회를 가졌으며, 그 직후 북한이 해결된 문제라고 강조했다.#

9. 논란[편집]




납북 일본인 문제가 길어짐에 따라 일본에서도 점차 회의적 내지 비판적인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납북 문제가 실제보다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일본 정부가 이를 정치적인 문제로 이용하려 든다는 식.

우선 북한에 납치됐을 것으로 추정되었던 일본인들의 유골이 일본 국내에서 발견되거나 심지어 일본 국내에서 멀쩡히 살아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납북자 문제가 과장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2013년 8월 29일, 일본 교도통신이 일본 중부 치바현 산부(山武)시의 한 중고선박수출입회사 부지에 보관돼 있던 그물 안에서 백골 상태의 유해가 발견됐으며 이 유해는 납북 가능성이 있어 '특정실종자' 로 분류된 코야마 슈지(小山修司ㆍ실종 당시 43세)씨로 보인다고 1일 보도했다. 유해는 직경 1.5m의 드럼통에 얽혀 있는 길이 40m의 그물을 떼어내는 작업 과정에서 장갑, 작업복을 착용한 채로 발견됐다. 그물에서는 코야마 씨의 것으로 보이는 장화도 나왔다. 경찰은 코야마 씨가 조업 도중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물에 말려들어간 것으로 보았다. 코야마 씨는 2004년 6월 6일 새벽 홀로 출어에 나선 후 니가타시 앞바다에서 행방불명돼 경찰이 배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고 주변 해역을 수색했지만 행방을 찾지 못했다. 그 후 일본 시민단체 '특정실종자 문제조사회'는 항해기록이 없어진 점 등을 들어 2005년 12월 코야마씨를 북한에 납치됐을 가능성이 농후하거나 납치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700여명의 특정실종자에 포함시켰다.링크1 심지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연구하는 일본의 시민단체인 ‘특정실종자 문제 조사회’는 2005년 12월 홀로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된 코야마를 북한에 납치됐을 가능성이 큰 특정 실종자로 지정했다.링크2 그런데 코야마는 납북과는 전혀 상관없이 단순한 사고로 죽은 것에 불과했다. 링크3

또 1996년 바닷가에서 젊은 여성 2명이 실종되어 납북이 틀림없다고 추정되었던 츠보노 광천 실종사건의 사망자들도 2020년 자동차에 탄 채로 바다에 추락한 유골이 발견된 사례도 있다.

즉, 일을 하다가 사고로 죽어서 그 시체가 사라진 경우조차 납북되었다며 납북자 의심 명단에 넣었다가 이렇게 일본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2019년 5월 20일 일본 교도통신은 1992년에 실종된 일본인 50대 남성이 일본 국내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밝혔다.링크 이 일본인 남성 역시 북한에 납치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류되었다가 뒤늦게 그렇지 않았다고 진실이 밝혀진 경우다. 8월에도 1974년 실종됐던 70대 남성이 2018년 11월 일본 국내에서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 9월 6일에도 1983년에 납치되었다는 사람이 발견되었다.## 2019년 11월에도 1986년 당시 32세의 나이로 실종되었던 사람이 북한에 납치된 게 아니라 일본에서 살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2020년 7월에도 마찬가지이다.# 2021년 9월에는 1980년 납북됐다고 알려진 여성이 일본에서 발견됐다. #

그렇다면 일본 경찰이 '북한이 납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실종자 872명'이라고 주장하는 실종자의 대부분은 일본 국내에서 다른 범죄나 사고로 죽었거나 주거지를 알 수 없으나 일본 국내에 엄연히 살아 있는데 단순히 그 시체나 본인을 찾지 못해서 무조건 북한이 납치했다고 우기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납북자 문제가 지나치게 과장되었고, 일본 정부가 이를 부당하게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 든다는 비판도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설사 진짜로 그랬다면 중국이나 소련 같은 다른 공산권 국가에게 조인트를 까여서 모든 지원이 박탈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 일본 정부조차 납치 피해자로 공식 인정하는 사람은 12건, 17명에 불과하고 그들 중 5명은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에 귀국해 살고 있다. 그런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이 무슨 수천 명(?)의 일본인들을 납치해서 감금하고 있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2002년 이후 성과가 없자 아베의 정치적 발판이었던 납치 문제가 약점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한편 2014년 당시 북한 당국에 의해 납북자의 일본 귀환 거부 의사가 전해지자 북한 당국을 불신한 일본 정부가 해당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북한이 2014년, 2015년에 일부 일본인 납북 피해자의 일시 귀국을 제안했지만 당시 아베 신조 정권이 거부했다고 한다.#


10.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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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서 당시 일본에서는 이런 특성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으면 심령스폿 행방불명 사건처럼 미제 실종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납북설을 한 번씩 짚고 넘어가기도 했다. 다만 이 사건은 2020년에 실종자들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단순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시신이 발견되지 못했을 뿐이지 납북 사건은 아님이 밝혀졌다.[2] 조선로동당 대외연락부. 북의 대남 공작기관으로 2009년 내각 산하의 225국으로 개편되었다.[3] 요코다 메구미도 이것 때문에 납치되었다는 설이 있다.[4] 최초엔 북한인 '김철준'으로 알려졌으나 1978년 전북 군산 선유도 해안가에서 납북된 고교생 김영남인 것으로 판명났다. 2006년 이산가족 상봉에서 부모와 극적으로 재회하였고 그에 대한 한국 송환 압박도 강해졌다.[5] 어머니와 귀가 중 얘기하며 걷던 중 남자 3명이 천천히 뒤를 따라오는 것을 느꼈고 "이상한 남자들이 쫓아와 기운이 안 좋으니 빨리 돌아가자"고 말하며 걷고 있었다. 그 때 남자들이 두 사람을 습격했고 각자 따로 끌고 가 자루에 넣어 공작선에 실었다. 이후 두 번 다시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하루가 지나 함경북도 청진항에 도착했다.[A] 원 영상 삭제로 인한 비슷한 유튜브 링크 첨부함[6] 프랑스어이며 일본에서는 '연인', '남녀 동반'이라는 뜻으로 쓰인다.[7] 첫 번역 작품이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다룬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였다. 납북 일본인이 하필 한일 양국에서 논쟁이 활발한 임진왜란, 그것도 이순신을 다룬 소설을 번역해서 화제가 됐다고 한다.[8] 이 또한 일본 정부의 무능과 철두철미하게 세뇌 단계를 통해 공작원으로 쓰려던 북한의 합작품인데 납치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정부측은 무시하거나 아무런 조치를 안 해서 카오루는 사실상 정부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반면 북한측은 카오루에게 같이 납치한 애인 유키코를 다시 만나게 해 주며 결혼 허락 등으로 환심을 사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의 신문기사를 북한말로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9] 또 하스이케 카오루의 경험담도 들어 있는 만큼 신빙성은 어느 정도 있는데 요코다 메구미가 사망하자 북한은 카오루에게 북한 정부측 인물로부터 일본에 돌아가 요코다 메구미측 일가족을 포섭해서 북한으로 데려오라는 지시와 겸사겸사 카오루의 일가족을 포섭해서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일시귀국하면 안 돌아올까봐 일명 충성도 시험으로 대화하는 도중에도 넌지시 시험을 했고 마지막으로 자식도 데려갈 수 있다는 북한 정부 인물의 돌발 충성심 테스트 질문에 데려가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부인과 자식이 인질로 잡힌 상태로 입국할 수 밖에 없어서 카오루측도 어떻게든 부모를 북한측에 넘어오라고 설득했다고 한다.[10] 결혼을 미끼로 유괴했다고 확인되었고 국제 지명수배되었다. 이들 외 요도호 사건 범인들의 부인들은 2001년 여권법 위반으로 일본 귀국 후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게 되었다.[11] 편지는 폴란드 소인으로 쓰여 있었지만 뒷면에 '이시오카가 평양에서'라고 적혀 있었다.[12] 1921년생이라 굉장한 옛날 이름이다.[13] 북한에 가는 만만치 않은 비용은 모두 청소부로 일해서 번 본인의 돈으로 충당했다.[14] 청색은 피해자의 조국 일본과 북한에 가로놓인 '동해의 파랑'과 피해자와 가족을 유일하게 연결하고 있는 '푸른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