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골 자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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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자치구는 중국의 자치구다. 구도(수부[2] )는 후허하오터시로, 몽골어로는 후흐허트(Хөх хот), 전통적으로는 코크코타(ᠬᠥᠬᠡᠬᠣᠲᠠ)라 불렸다. 약칭(자동차 번호판, 车牌)은 멍(蒙 )이다.
만리장성과 고비 사막 사이에 위치한 중국의 5대 자치구 중 하나며 역사, 문화적으로 몽골과 관련이 깊다. 북쪽으로는 몽골(외몽골),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만리장성을 경계로 간쑤성, 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허베이성, 섬서성, 산서성, 닝샤후이족자치구 등 수많은 중국 내 성들과 접하고 있다.
중국 영토의 북쪽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몽골, 러시아와 인접해 있다. 면적은 1,183,000km²로 콜롬비아보다도 크다. 국경선이 무려 4,220㎞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몽골과의 접경선이 3,192㎞, 러시아와의 접경선은 약 1,000㎞이다.
다싱안링 산맥(大兴安岭山脉) 동쪽 지역은 넓은 의미의 만주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 일대를 동4맹(东四盟)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속하는 행정구역은 츠펑시(赤峰市, 구 자오우다맹 昭乌达盟), 퉁랴오시(通辽市, 구 저리무맹 哲里木盟), 후룬베이얼시(呼伦贝尔市, 구 후룬베이얼맹), 싱안맹(兴安盟)이다. 여기서 '맹(盟)'은 몽골과 내몽골자치구에만 있는, 한국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단위인 아이막(키릴문자: Аймаг, 몽골 문자: ᠠᠶᠢᠮᠠᠭ, 로마자: Aimag)을 한자로 음차한 것인데 현재 행정구역 개편이 되어 본래의 동4맹 중 3개가 시로 승격되었다. 현재도 이 네 곳을 묶을 땐 예전 행정구역을 따서 동4맹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바뀐 행정구역에 맞춰 3시 1맹(三市一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몽골 지역은 고비 사막을 기준으로 (막)남몽골과 (막)북몽골로 나뉜다. 이러한 구분법은 명나라 때에는 중국에서도 통했던 분류법이지만, 청나라의 몽골지배 시절 때부터 수도인 베이징을 기준으로 (중기까지 청나라 국경이던) 고비사막보다 바깥에 있는 몽골은 '와이(外)멍구'이고, 고비 사막보다 안쪽에 있는 몽골 지역은 '네이(内)멍구 자치구'라고 이름을 지었다.
현재 내몽골자치구 인구의 80%는 한족으로, 몽골어보다는 중국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 내몽골에 사는 몽골족은 중국 내 소수민족이므로 "몽골인"이 아닌 "몽골족"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문화적인 부분, 특히 음악 쪽에서 중국과 혼합된 형태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내몽골의 몽골 정체성이 상당히 희석된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키릴문자를 쓰는 몽골국의 몽골인과는 달리 내몽골에서는 여전히 몽골문자를 실생활에서 사용하며,[3] 몽골국 전체 인구수(300만)보다 내몽골의 몽골족 인구수(400만)가 훨씬 더 많다. 역사적으로도 내몽골의 차하르가 청나라에 가장 먼저 복속되긴 했지만, 복속된 이후에도 당대 그 누구도 막남몽골 차하르들을 '만주인'이라 하지 않았고 '몽골' 또는 '달단'이라 하여 만주인이나 한족과 엄격히 구분했다.
동북3성 못지 않은 혹한 지역이다. 영하 20°C인 날이 흔하며 영하 40°C 이하도 심심찮게 찍힌다. 역대 최저기온은 북부 투리허(Tulihe)에서 기록된 영하 58°C로, 이는 중국 내 최저기온이다.
한나라 때는 아시아 최초의 유목제국이었던 흉노의 땅이었으며, 흉노의 후예로 추정되는 튀르크계의 돌궐 역시 몽골, 남시베리아, 북중국, 신강에 걸친 영역을 확보했다. 당 왕조에 들어서 태종의 북방 원정으로 중국에 귀속되어 기미주가 되었었으나 돌궐 제2제국의 중흥으로 빼앗겼고, 다시 돌궐을 멸망시킨 튀르크계 위구르 제국이 차지했다.
원래 북만주에 살고 있었던 원시 몽골족인 몽올실위족이 초원으로 진출한 후, 그들 중 한 씨족인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에서 칭기즈 칸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와 몽골·튀르크계 제부족을 통일하면서 몽골족이 생겼다. 이 몽골족은 나중에 중국 북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금나라와 서하를 멸망시키고 몽골 제국을 세웠다.
한족의 북송 때는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서하, 몽골계 거란족의 요나라, 퉁구스계 여진족의 금나라가 공존했다. 특히 요나라는 내몽골 남부 전체를 지배했으나 서하와 금나라는 일부를 지배하는 데 그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나라는 동남부의 츠펑 시 일대부터 서남부의 오르도스 동쪽까지 통치했고, 그 이후 오르도스 일대는 서하가, 내몽골의 동부 흥안성 일대(만주로도 여김)는 금나라가 가졌으며, 내몽골 고원은 칭기즈 칸의 등장 이전까진 몽골·튀르크계의 각 부족이 길항하는 내전 상태였다.
그러다 칭기즈 칸의 등장으로 카마그 몽골에 의해 각 부족이 통일되어 '몽골'이라는 문화적,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이 드디어 생겨나게 되었다. 칭기즈 칸 등장 이전의 '몽골'은 그저 수많은 부족 중 하나인 카마그 몽골의 이름에 불과했으나 칭기즈 칸은 최초로 초원의 모든 유목민에게 몽골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했고, 이것이 몽골 제국, 그리고 현대의 몽골로 이어졌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 사후 후손들에 의해 나뉘어 지게 되었고, 그 중 하나인 원나라는 몽골과 중국을 모두 아우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원나라 태조 쿠빌라이 칸은 양양 공방전과 애산 전투로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몽골의 전통을 벗어나 대원제국을 자처하면서 중국식 연호를 사용했고, 국자감 설립 및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유교적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여기에다 전통에 따라 전 왕조들의 역사서인 《송사》와 《금사》, 《요사》를 편찬하면서 중화 왕조임을 자처했다.
이후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등장하면서 원나라는 한족에게 밀려 중원을 빼앗기고 몽골 고원으로 물러났다. 이때의 원나라는 스스로 북원이라 칭했다. 한동안 내몽골 일대에는 북원과 여러 몽골 칸국들이 일어나 명나라와 대치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다시금 몽골 부족을 통일한 다얀 칸과 어느 정도 부흥기를 성립시킨 알탄 칸이 있다.
이후 내몽골 지역은 차하르 부족이 계속 다스리다가, 1635년 만주족이 세운 후금에 릭단 칸의 아들 에제이가 항복하고 이후 만주와 함께 청나라 아이신기오로 황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일로 청나라의 황제는 원나라의 옥새를 얻어 몽골제국 대칸의 권위를 이양받았고, 내몽골은 완전히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족의 연합제국의 형태를 유지하며 고종 건륭제 때는 할하부가 중심이 된 외몽골까지 병합했다. 청나라는 18세기 건륭제 시기에 외몽골과 신강, 티베트에 걸쳐있던 오이라트계 준가르 제국을 격전 끝에 없애버리고 이 지역들까지 정복해 버렸다.
한편 몽골 팔기가 주둔한 팔기군 군영 중심으로 군량을 보급할 목적으로 둔전이 설치되었는데, 원래는 팔기군들이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팔기군들이 힘든 농사일을 꺼려 둔전 경작을 한족 농민들에게 맡기는 일이 많았고, 팔기군 둔전을 중심으로 한족 정착민 인구가 늘어나면서 결과적으로 한족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근대 내몽골 지역은 비교적 척박한 토질에 부족한 강수량 때문에 농업으로는 충분한 소출을 얻기 힘들었으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입된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등이 도입된 것을 계기로 내몽골 지역의 인구 부양력도 증가하게 되었다. 청나라 치세 증가한 한족 인구 중 적지 않은 수가 바로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외몽골에서는 복드 칸이 독립을 선언했으나 내몽골은 독립에 호응하지 않고 중화민국에 잔류했다. 이에 외몽골 측이 내몽골을 복속하기 위해 침공을 감행했으나 원세개의 개입으로 패퇴했다. 북양정부는 내몽골의 왕공 제도를 인정하고 특수 행정구역을 두어 통치했다. 이후 들어선 국민당의 국민정부는 내몽골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1928년 러허성(熱河省)과 차하얼성(察哈爾省), 쑤이위안성(綏遠省) 등의 행정구역을 기존의 변강(소수민족 특별구)에서 성으로 승격해서 관리했다. 내몽골은 장제스의 중앙정부를 지지하면서 자치권 확대를 도모했으나, 일본제국의 세력이 만•몽에서 확장되면서 장제스보다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일본 측에 줄을 대기 시작했다. 1936년 데므치그돈로브를 옹립한 관동군이 수동사변을 일으켜 내몽골 병탄을 시도했으나 푸쭤이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제국군에게 내몽골은 병합당했고 괴뢰국인 몽강국이 세워졌다. 신해혁명 이후부터 2차대전 시대까지 내몽골 독립 운동 역사는 해당 기사를 참고.
1945년 8월, 공산주의 몽골군과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8월의 폭풍 작전으로 인해 소련군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이 고비사막을 건너 쳐들어와 이미 미국에 의해 망해가던 일본제국이 세웠던 괴뢰국 몽강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당시 군비의 대부분을 해군력에만 쏟으며 미국과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던 일본은 손쉽게 무너졌다. 소련은 아예 내몽골을 외몽골에 병합시키고, 조만간 '몽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철회했다. 1945년 9월에는 내몽골 인민 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가 세워졌지만 몇 달 못가 중국 공산당으로 흡수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외몽골은 몽골 인민 공화국이 되어 소련에 의해 독립되었고, 내몽골은 1947년 5월 1일 중국 공산당의 행정개혁으로 내몽골 자치구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적은 몽골(1,566,000km²)보다 작은, 1,183,000km²로 중화인민공화국 국토면적의 약 12%를 차지한다. 행정구역은 시린궈러맹, 싱안맹, 아라산맹, 등 3개의 맹(盟)과 후허하오터를 비롯하여 바오터우, 우하이, 츠펑(赤峰; 몽골명 울란호트), 퉁랴오, 훌룬부이르(중국명 후룬베이얼), 오르도스, 울란차브, 부이르 노르(중국명 바옌나오얼) 등 9개 지급시(地級市), 11개 현급시(縣級市), 17개 현(縣), 49개 기(旗), 3개 자치기(自治旗)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기/맹은 청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족들이 무슨 성 사람인가 했다면 만주족과 몽골족은 무슨 기 사람인가라고 따지곤 했다. 이 중 3분의 1 정도가 대외적으로 개방되고 있으며, 엘렌허트[4] 와 만저우리 등에 각각 몽골과 러시아로 오가는 국경 출입국 사무소가 있다. 개혁개방 정책을 전개한 뒤로 전세계 60여개 국가 및 지역과 무역거래를 하고 자매결연을 맺었다.
인구 구성은 내몽골 자치구란 말이 무색하게 80%에 육박하는 주류 한족(漢族)을 비롯하여 그 다음 몽골족[5] , 다우르족[6] , 어웡키족, 오로촌족, 시버족, 후이족, 러시아계 중국인, 조선족 등 49개 민족이 있다. 서부에는 중앙아시아 계열 튀르크, 이란계 민족도 있다. 소수민족의 비중은 자치구 전체 인구의 약 20%이며, 몽골족은 약 400만 명에 이른다.
내몽골 인구가 약 2,400만명으로 중국치곤 워낙 적어서 대부분의 주민이 청나라 때와 그 이후 이주한 한족으로 채워졌다.[7] 인구의 약 80%가 한족이라는 현실 때문에 티베트, 위구르와 달리 분리독립 움직임이 매우 미약하다. 이는 같은 민족이 주류이자 독립국가인 몽골의 힘이 티베트의 지원국인 인도, 위구르의 지원국인 튀르키예와 천양지차인 점도 있다.[8]
현재 중국 땅인 내몽골의 인구는 몽골보다도 많다. 중국 전체의 몽골족 수는 약 500만 남짓인 반면, 몽골 전체 인구는 2021년 기준 334만명 정도이다. 경제적으로도 내몽골의 1인당 국민소득이 몽골의 3배 가까운 수준에 해당되기 때문에 몽골에서 노동자들이 일하러 오는 판이다.[9]
내몽골에서 몽골어는 몽골족들의 모어(母語)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내몽골 주민들의 모어는 아니다. 몽골족들도 중국어를 (제2언어로서) 무리없이 구사할 수 있는 반면에 몽골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족들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된다.
게르에 진짜로 살면서 유목하는 유목민이 아직도 꽤 남아있는 몽골과 달리[10] 내몽골의 게르는 대부분 관광지이다. 실제 대다수의 내몽골인들은 큰 도시에서 정착 생활을 한다. 게르가 있다고 해도 별장용이거나 돈이 없어서 게르에 사는 수준이다. 21세기 들어선 오히려 내몽골의 도시에서 나고 자란 방송국 PD가 게르 생활을 체험하는 내용의 "도시아들"이란 예능이 내몽골 TV의 인기 프로그램이 될 정도. 이는 내몽골의 기후변화와 중국-몽골-러시아의 확실한 국경선 설정 등으로 고비사막 이북의 초원지대가 대부분 몽골에 귀속되었고, 국경 때문에 자유로운 유목이 힘들어져 전통적인 유목이 거의 불가능 해졌기 때문도 있다. 한국인 관광객이 내몽골에 여행와서 접할 만한 게르 등 유목민 거주지는 한국으로 치면 민속촌이나 한옥마을 비슷한 곳이라 보면 된다. 다만 어디까지나 게르에 살면서 유목지를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는 식의 전통적인 유목이 불가능해졌다는 얘기지, 광활한 초원에 가축을 풀어놓고 양식하는 의미의 유목이라면 아직도 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몽골-내몽골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중국-내몽골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내몽골 자치구는 중국의 자치구다. 구도(수부[2] )는 후허하오터시로, 몽골어로는 후흐허트(Хөх хот), 전통적으로는 코크코타(ᠬᠥᠬᠡᠬᠣᠲᠠ)라 불렸다. 약칭(자동차 번호판, 车牌)은 멍(
만리장성과 고비 사막 사이에 위치한 중국의 5대 자치구 중 하나며 역사, 문화적으로 몽골과 관련이 깊다. 북쪽으로는 몽골(외몽골),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만리장성을 경계로 간쑤성, 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허베이성, 섬서성, 산서성, 닝샤후이족자치구 등 수많은 중국 내 성들과 접하고 있다.
2. 인문[편집]
중국 영토의 북쪽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몽골, 러시아와 인접해 있다. 면적은 1,183,000km²로 콜롬비아보다도 크다. 국경선이 무려 4,220㎞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몽골과의 접경선이 3,192㎞, 러시아와의 접경선은 약 1,000㎞이다.
다싱안링 산맥(大兴安岭山脉) 동쪽 지역은 넓은 의미의 만주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 일대를 동4맹(东四盟)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속하는 행정구역은 츠펑시(赤峰市, 구 자오우다맹 昭乌达盟), 퉁랴오시(通辽市, 구 저리무맹 哲里木盟), 후룬베이얼시(呼伦贝尔市, 구 후룬베이얼맹), 싱안맹(兴安盟)이다. 여기서 '맹(盟)'은 몽골과 내몽골자치구에만 있는, 한국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단위인 아이막(키릴문자: Аймаг, 몽골 문자: ᠠᠶᠢᠮᠠᠭ, 로마자: Aimag)을 한자로 음차한 것인데 현재 행정구역 개편이 되어 본래의 동4맹 중 3개가 시로 승격되었다. 현재도 이 네 곳을 묶을 땐 예전 행정구역을 따서 동4맹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바뀐 행정구역에 맞춰 3시 1맹(三市一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몽골 지역은 고비 사막을 기준으로 (막)남몽골과 (막)북몽골로 나뉜다. 이러한 구분법은 명나라 때에는 중국에서도 통했던 분류법이지만, 청나라의 몽골지배 시절 때부터 수도인 베이징을 기준으로 (중기까지 청나라 국경이던) 고비사막보다 바깥에 있는 몽골은 '와이(外)멍구'이고, 고비 사막보다 안쪽에 있는 몽골 지역은 '네이(内)멍구 자치구'라고 이름을 지었다.
현재 내몽골자치구 인구의 80%는 한족으로, 몽골어보다는 중국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 내몽골에 사는 몽골족은 중국 내 소수민족이므로 "몽골인"이 아닌 "몽골족"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문화적인 부분, 특히 음악 쪽에서 중국과 혼합된 형태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내몽골의 몽골 정체성이 상당히 희석된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키릴문자를 쓰는 몽골국의 몽골인과는 달리 내몽골에서는 여전히 몽골문자를 실생활에서 사용하며,[3] 몽골국 전체 인구수(300만)보다 내몽골의 몽골족 인구수(400만)가 훨씬 더 많다. 역사적으로도 내몽골의 차하르가 청나라에 가장 먼저 복속되긴 했지만, 복속된 이후에도 당대 그 누구도 막남몽골 차하르들을 '만주인'이라 하지 않았고 '몽골' 또는 '달단'이라 하여 만주인이나 한족과 엄격히 구분했다.
동북3성 못지 않은 혹한 지역이다. 영하 20°C인 날이 흔하며 영하 40°C 이하도 심심찮게 찍힌다. 역대 최저기온은 북부 투리허(Tulihe)에서 기록된 영하 58°C로, 이는 중국 내 최저기온이다.
3. 역사[편집]
한나라 때는 아시아 최초의 유목제국이었던 흉노의 땅이었으며, 흉노의 후예로 추정되는 튀르크계의 돌궐 역시 몽골, 남시베리아, 북중국, 신강에 걸친 영역을 확보했다. 당 왕조에 들어서 태종의 북방 원정으로 중국에 귀속되어 기미주가 되었었으나 돌궐 제2제국의 중흥으로 빼앗겼고, 다시 돌궐을 멸망시킨 튀르크계 위구르 제국이 차지했다.
원래 북만주에 살고 있었던 원시 몽골족인 몽올실위족이 초원으로 진출한 후, 그들 중 한 씨족인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에서 칭기즈 칸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와 몽골·튀르크계 제부족을 통일하면서 몽골족이 생겼다. 이 몽골족은 나중에 중국 북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금나라와 서하를 멸망시키고 몽골 제국을 세웠다.
한족의 북송 때는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서하, 몽골계 거란족의 요나라, 퉁구스계 여진족의 금나라가 공존했다. 특히 요나라는 내몽골 남부 전체를 지배했으나 서하와 금나라는 일부를 지배하는 데 그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나라는 동남부의 츠펑 시 일대부터 서남부의 오르도스 동쪽까지 통치했고, 그 이후 오르도스 일대는 서하가, 내몽골의 동부 흥안성 일대(만주로도 여김)는 금나라가 가졌으며, 내몽골 고원은 칭기즈 칸의 등장 이전까진 몽골·튀르크계의 각 부족이 길항하는 내전 상태였다.
그러다 칭기즈 칸의 등장으로 카마그 몽골에 의해 각 부족이 통일되어 '몽골'이라는 문화적,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이 드디어 생겨나게 되었다. 칭기즈 칸 등장 이전의 '몽골'은 그저 수많은 부족 중 하나인 카마그 몽골의 이름에 불과했으나 칭기즈 칸은 최초로 초원의 모든 유목민에게 몽골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했고, 이것이 몽골 제국, 그리고 현대의 몽골로 이어졌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 사후 후손들에 의해 나뉘어 지게 되었고, 그 중 하나인 원나라는 몽골과 중국을 모두 아우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원나라 태조 쿠빌라이 칸은 양양 공방전과 애산 전투로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몽골의 전통을 벗어나 대원제국을 자처하면서 중국식 연호를 사용했고, 국자감 설립 및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유교적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여기에다 전통에 따라 전 왕조들의 역사서인 《송사》와 《금사》, 《요사》를 편찬하면서 중화 왕조임을 자처했다.
이후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등장하면서 원나라는 한족에게 밀려 중원을 빼앗기고 몽골 고원으로 물러났다. 이때의 원나라는 스스로 북원이라 칭했다. 한동안 내몽골 일대에는 북원과 여러 몽골 칸국들이 일어나 명나라와 대치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다시금 몽골 부족을 통일한 다얀 칸과 어느 정도 부흥기를 성립시킨 알탄 칸이 있다.
이후 내몽골 지역은 차하르 부족이 계속 다스리다가, 1635년 만주족이 세운 후금에 릭단 칸의 아들 에제이가 항복하고 이후 만주와 함께 청나라 아이신기오로 황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일로 청나라의 황제는 원나라의 옥새를 얻어 몽골제국 대칸의 권위를 이양받았고, 내몽골은 완전히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족의 연합제국의 형태를 유지하며 고종 건륭제 때는 할하부가 중심이 된 외몽골까지 병합했다. 청나라는 18세기 건륭제 시기에 외몽골과 신강, 티베트에 걸쳐있던 오이라트계 준가르 제국을 격전 끝에 없애버리고 이 지역들까지 정복해 버렸다.
한편 몽골 팔기가 주둔한 팔기군 군영 중심으로 군량을 보급할 목적으로 둔전이 설치되었는데, 원래는 팔기군들이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팔기군들이 힘든 농사일을 꺼려 둔전 경작을 한족 농민들에게 맡기는 일이 많았고, 팔기군 둔전을 중심으로 한족 정착민 인구가 늘어나면서 결과적으로 한족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근대 내몽골 지역은 비교적 척박한 토질에 부족한 강수량 때문에 농업으로는 충분한 소출을 얻기 힘들었으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입된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등이 도입된 것을 계기로 내몽골 지역의 인구 부양력도 증가하게 되었다. 청나라 치세 증가한 한족 인구 중 적지 않은 수가 바로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외몽골에서는 복드 칸이 독립을 선언했으나 내몽골은 독립에 호응하지 않고 중화민국에 잔류했다. 이에 외몽골 측이 내몽골을 복속하기 위해 침공을 감행했으나 원세개의 개입으로 패퇴했다. 북양정부는 내몽골의 왕공 제도를 인정하고 특수 행정구역을 두어 통치했다. 이후 들어선 국민당의 국민정부는 내몽골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1928년 러허성(熱河省)과 차하얼성(察哈爾省), 쑤이위안성(綏遠省) 등의 행정구역을 기존의 변강(소수민족 특별구)에서 성으로 승격해서 관리했다. 내몽골은 장제스의 중앙정부를 지지하면서 자치권 확대를 도모했으나, 일본제국의 세력이 만•몽에서 확장되면서 장제스보다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일본 측에 줄을 대기 시작했다. 1936년 데므치그돈로브를 옹립한 관동군이 수동사변을 일으켜 내몽골 병탄을 시도했으나 푸쭤이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제국군에게 내몽골은 병합당했고 괴뢰국인 몽강국이 세워졌다. 신해혁명 이후부터 2차대전 시대까지 내몽골 독립 운동 역사는 해당 기사를 참고.
1945년 8월, 공산주의 몽골군과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8월의 폭풍 작전으로 인해 소련군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이 고비사막을 건너 쳐들어와 이미 미국에 의해 망해가던 일본제국이 세웠던 괴뢰국 몽강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당시 군비의 대부분을 해군력에만 쏟으며 미국과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던 일본은 손쉽게 무너졌다. 소련은 아예 내몽골을 외몽골에 병합시키고, 조만간 '몽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철회했다. 1945년 9월에는 내몽골 인민 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가 세워졌지만 몇 달 못가 중국 공산당으로 흡수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외몽골은 몽골 인민 공화국이 되어 소련에 의해 독립되었고, 내몽골은 1947년 5월 1일 중국 공산당의 행정개혁으로 내몽골 자치구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행정[편집]
면적은 몽골(1,566,000km²)보다 작은, 1,183,000km²로 중화인민공화국 국토면적의 약 12%를 차지한다. 행정구역은 시린궈러맹, 싱안맹, 아라산맹, 등 3개의 맹(盟)과 후허하오터를 비롯하여 바오터우, 우하이, 츠펑(赤峰; 몽골명 울란호트), 퉁랴오, 훌룬부이르(중국명 후룬베이얼), 오르도스, 울란차브, 부이르 노르(중국명 바옌나오얼) 등 9개 지급시(地級市), 11개 현급시(縣級市), 17개 현(縣), 49개 기(旗), 3개 자치기(自治旗)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기/맹은 청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족들이 무슨 성 사람인가 했다면 만주족과 몽골족은 무슨 기 사람인가라고 따지곤 했다. 이 중 3분의 1 정도가 대외적으로 개방되고 있으며, 엘렌허트[4] 와 만저우리 등에 각각 몽골과 러시아로 오가는 국경 출입국 사무소가 있다. 개혁개방 정책을 전개한 뒤로 전세계 60여개 국가 및 지역과 무역거래를 하고 자매결연을 맺었다.
5. 인구[편집]
인구 구성은 내몽골 자치구란 말이 무색하게 80%에 육박하는 주류 한족(漢族)을 비롯하여 그 다음 몽골족[5] , 다우르족[6] , 어웡키족, 오로촌족, 시버족, 후이족, 러시아계 중국인, 조선족 등 49개 민족이 있다. 서부에는 중앙아시아 계열 튀르크, 이란계 민족도 있다. 소수민족의 비중은 자치구 전체 인구의 약 20%이며, 몽골족은 약 400만 명에 이른다.
내몽골 인구가 약 2,400만명으로 중국치곤 워낙 적어서 대부분의 주민이 청나라 때와 그 이후 이주한 한족으로 채워졌다.[7] 인구의 약 80%가 한족이라는 현실 때문에 티베트, 위구르와 달리 분리독립 움직임이 매우 미약하다. 이는 같은 민족이 주류이자 독립국가인 몽골의 힘이 티베트의 지원국인 인도, 위구르의 지원국인 튀르키예와 천양지차인 점도 있다.[8]
현재 중국 땅인 내몽골의 인구는 몽골보다도 많다. 중국 전체의 몽골족 수는 약 500만 남짓인 반면, 몽골 전체 인구는 2021년 기준 334만명 정도이다. 경제적으로도 내몽골의 1인당 국민소득이 몽골의 3배 가까운 수준에 해당되기 때문에 몽골에서 노동자들이 일하러 오는 판이다.[9]
내몽골에서 몽골어는 몽골족들의 모어(母語)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내몽골 주민들의 모어는 아니다. 몽골족들도 중국어를 (제2언어로서) 무리없이 구사할 수 있는 반면에 몽골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족들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된다.
게르에 진짜로 살면서 유목하는 유목민이 아직도 꽤 남아있는 몽골과 달리[10] 내몽골의 게르는 대부분 관광지이다. 실제 대다수의 내몽골인들은 큰 도시에서 정착 생활을 한다. 게르가 있다고 해도 별장용이거나 돈이 없어서 게르에 사는 수준이다. 21세기 들어선 오히려 내몽골의 도시에서 나고 자란 방송국 PD가 게르 생활을 체험하는 내용의 "도시아들"이란 예능이 내몽골 TV의 인기 프로그램이 될 정도. 이는 내몽골의 기후변화와 중국-몽골-러시아의 확실한 국경선 설정 등으로 고비사막 이북의 초원지대가 대부분 몽골에 귀속되었고, 국경 때문에 자유로운 유목이 힘들어져 전통적인 유목이 거의 불가능 해졌기 때문도 있다. 한국인 관광객이 내몽골에 여행와서 접할 만한 게르 등 유목민 거주지는 한국으로 치면 민속촌이나 한옥마을 비슷한 곳이라 보면 된다. 다만 어디까지나 게르에 살면서 유목지를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는 식의 전통적인 유목이 불가능해졌다는 얘기지, 광활한 초원에 가축을 풀어놓고 양식하는 의미의 유목이라면 아직도 하고 있다.
6. 대외관계[편집]
6.1. 몽골과의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몽골-내몽골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 중국과의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중국-내몽골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행정구역[편집]
중국어/몽골어
- 지급시
- 후허하오터/후흐허트시(呼和浩特/ᠬᠥᠬᠡᠬᠣᠲᠠ)
- 바오터우/부가트시(包头/ᠪᠤᠭᠤᠲᠤᠬᠣᠲᠠ)
- 우란차부/울란차브시(乌兰察布/ᠤᠯᠠᠭᠠᠨᠴᠠᠪ ᠬᠣᠲᠠ)
- 바옌나오얼/바얀누르시(巴彦淖尔/ᠪᠠᠶᠠᠨᠨᠠᠭᠤᠷ ᠬᠣᠲᠠ)
- 어얼둬쓰/오르도스시(鄂尔多斯/ᠣᠷᠳᠣᠰ ᠬᠣᠲᠠ)
- 츠펑/울란하드시(赤峰/ᠤᠯᠠᠭᠠᠨᠬᠠᠳᠠ ᠬᠣᠲᠠ)
- 퉁랴오/통리아오시(通辽/ᠲᠦᠩᠯᠢᠶᠣᠤ ᠬᠣᠲᠠ)
- 후룬베이얼/후룬부이르시(呼伦贝尔/ᠬᠥᠯᠥᠨ ᠪᠤᠶᠢᠷ ᠬᠣᠲᠠ)
- 우하이/위카이시(乌海/ᠦᠬᠠᠢ ᠬᠣᠲᠠ)
- 맹/아이막(盟/ᠠᠢᠢᠮᠠᠭ)
- 아라산맹/알샤아이막(阿拉善/ᠠᠯᠠᠱᠠ ᠠᠶᠢᠮᠠᠭ)
- 시린궈러맹/시린골아이막(锡林郭勒/ᠰᠢᠯᠢ ᠶᠢᠨ ᠭᠣᠣᠯ ᠠᠶᠢᠮᠠᠭ)
- 싱안맹/힝간아이막(兴安/ᠬᠢᠩᠭ᠋ᠠᠨ ᠠᠶᠢᠮᠠᠭ)
8. 경제[편집]
강 계곡에서는 밀과 같은 작물의 농사가 우선이다. 더 건조한 초원에서는 염소, 양 등의 목축이 전통적인 생계 수단이다.동쪽의 대흥안 산맥에서는 임업과 사냥이 다소 중요하다. 에벤크족 자치기에서는 에벤크족에 의해 순록의 목축이 행해진다. 최근에는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가 우하이 지역의 경제 요인이 되고 있다.
내몽골은 석탄, 캐시미어, 천연가스, 희토류 원소를 비롯한 자원이 풍부하고 자연발생 니오브, 지르코늄, 베릴륨의 매장량이 중국의 다른 어떤 성급 지역보다 많다. 그러나 과거에는 자원의 개발 및 활용이 다소 비효율적이어서 풍부한 자원의 수익률이 저조했다. 내몽골은 또한 중요한 석탄 생산 기지로서 세계 석탄 매장량의 4분의 1 이상이 이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2010년까지 연간 석탄 생산량을 2억 6,000만t에서 5억t으로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내몽골의 산업은 주로 석탄, 발전, 임업 관련 산업 및 관련 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내몽골은 현재 에너지, 화학, 야금, 장비 제조, 농산물(유업 포함) 가공, 첨단 기술 등 6개 경쟁 산업을 장려하고 있다. 잘 알려진 내몽골 기업으로는 ERDOS, Yili[11] , Mengniu[12] 등이 있다.
2015년 내몽골의 명목 GDP는 1조 8,000억 위안(2,721억 달러)이었고, 2010-2015년에 비해 연평균 10% 증가했다. 2015년 1인당 GDP는 11,500달러로 상하이, 베이징, 톈진에 이어 중국의 31개 성 중 4위에 올랐다.
중국의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제성장은 새로운 상업개발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포함한 건설 붐으로 이어졌다. 내몽골은 천연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초원지대에서 발달하는 강풍 덕분에 중국 내 최대 풍력발전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일부 민간기업들은 내몽골 일부에 바링묘오, 후퉁량, 저우쯔에 윈드파크를 설치했다.
9. 문화[편집]
몽골족 전통 복장인 델(Deel)을 입고 장화를 신으며 허리띠를 즐겨 찬다. 쇠고기와 양고기를 즐겨 먹으며, 분해와 조립이 간편한 천막 모양의 이동식 주택인 게르(Ger)에서 산다. 오늘날에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많으며 아파트나 현대식 가옥, 또는 게르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내몽골 지역의 게르촌은 사실상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대부분이며 실제 유목민들이 사는 곳은 많지 않은 편이다.
해마다 7월 중순에는 몽골인이 모여있는 곳에서 나담(Наадам) 축제를 열어 물품을 교환하고 기마·사격·씨름 경기 등을 거행한다. 몽골국에서는 국가적인 행사로 진행되며 타국에 거주하는 몽골인들도 이 축제를 즐긴다.
소련의 영화감독 니키타 미할코프의 1991년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작 <오르가(Close to Eden)>는 내몽골 유목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 내몽골 지역 유목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 《늑대 토템》이 있고, 이를 원작으로 한 2015년 영화 "울프 토템"이 있다. 감독은 에너미 앳 더 게이트로 유명한 장 자크 아노.
10. 관광[편집]
승마, 풀썰매 등이 인기가 높다.
11. 인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여포 - 후한 말 군벌
- 이숙 - 후한 말 인물
- 명안도 - 천문학자 겸 수학자
- 오원춘 - 수원 토막 살인 사건 범인
- 멍크 바터 - 농구선수[13]
- 아오르꺼러 - 종합격투기 선수
- 왕려곤 - 배우
- 서로 - 배우
- 형비 - 배우
- 왕뤄단 - 배우
- 주안만자 - 배우
- 엽청 - 배우
- 아윈가 - 뮤지컬 배우
- 등위 - 배우
- 뉴건셩 - Mengniu[14] 창립자
- 바이옌쑹 - CCTV 아나운서
12. 역대 영도인[편집]
13. 기타[편집]
이곳의 쇠고기, 양고기, 우유는 중국 안에서 최고급으로 평가받으며 생산량도 1위이다.
성급행정구 중 제일 많은 공항을 보유했다.
내몽골 지란타이 동쪽에는 인민해방군 로켓군(PLARF)이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 지원차량, 사일로 기반 탄도미사일의 미사일 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탄도미사일 훈련장이 있다.
황사나 미세먼지 근원을 이야기할 때 중국의 지명으로서 언급되기도 한다.
어얼둬쓰시(오르도스)는 한때 미분양 부동산이 지나치게 많아서 유령도시처럼 되어버린 곳이였다.
뉴멕시코와 마찬가지로 이름이 현재 소속국가와 다르다. 뉴멕시코는 지명은 멕시코인데 소속 국가는 미국이며 내몽골 자치구는 이름은 몽골인데 소속국가는 중국이다. 둘 다 건조기후 지역인점도 비슷하다.
북아일랜드와도 공통점이 있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내몽골자치구는 청나라의 식민지배로 인해 본토와 분리되었다는 점과, 본토와의 인구학적 차이로 외세의 영토로 남을 것을 선택했다는 점이다.[15]
14. 사건 사고[편집]
- 2019년 8월 경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 2019년 11월 경 시린궈러 맹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 2020년 7월에 내몽골자치구에서 흑사병이 발생했다.#
- 2020년 8월 9일에 내몽골자치구에서 회오리바람이 불어 33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 2020년 8월 31일에 2011년 이후 9년만에 반중시위가 열렸다. 몽골어가 아닌 중국어만 가르치겠다는 중국 정부의 정책에 반발한 행동이었다. 이미 중국어와 몽골어를 함께 사용하도록 강요받은 그동안의 불만이 터진 사건이다.#
- 2023년에도 몽골어 말살 정책과 관련한 논란이 터졌다. #
1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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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은 전 지역(홍콩, 마카오, 대만 포함)이 중국 표준시를 사용한다.[2] 자치구의 지방정부 및 중국공산당 지구당 소재지를 기준으로 한다.[3] 2022년 현재는 몽골국의 중, 고등학교에서도 내몽골처럼 몽골 전통 문자를 의무교육하므로 읽기 자체는 가능하다. 또한 2025년까지 몽골 정부 차원에서 키릴 문자와 전통 문자를 함께 쓰는 정책을 추진중이다.[4] 중국명 옐렌하오터[5] 여기서 몽골족은 독립국 몽골의 국민이 아니라 자치구내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인 몽골족을 의미한다.[6] 거란의 후예 민족으로 자기들 조상을 요나라 태조로 본다.[7] 상술한 것처럼 몽골 팔기군들이 힘든 농사일을 꺼려 둔전 경작을 한족 농민들에게 맡기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8] 인도는 제3세계의 수장국으로서 국제 세계에서 갖는 입지가 굉장히 큰 나라이며, 튀르키예는 인도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동유럽, 남유럽 및 중근동 지역의 확실한 패권국이다. 그러나 몽골은 2010년대 기준 내몽골보다도 인구가 적고 사실 내몽골 사람들하고도 역사적으로 갈등이 좀 있기 때문에, 오죽하면 일각에선 내몽골이 중국에서 독립해도 몽골과 내전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관측마저 할 정도다. 물론 그와 별개로 몽골(외몽골)과 내몽골, 부랴티야 공화국의 몽골족 개개인간 교류는 활발한 편이다.[9] 다만 몽골에서는 내몽골보다는 한국으로 일하러 가는것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이유는 별거없고 한국이 중국보다 급여수준이 2배 이상 더 높기 때문이다.[10] 물론 울란바토르처럼 대도시로 몰려들면서 유목 생활을 포기하는 비율이 늘고 있다.[11] 중국 유제품 1위, 아시아 유제품 1위[12] 중국 유제품 2위[13] 내몽골 출신 최초의 NBA 선수로 비록 NBA에 있었던 시간은 3시즌 뿐이고, 그 기간동안 팀에 큰 역할을 한 것도 아니지만, 2002-03 시즌 샌안토니오 스퍼스 소속으로 무려 NBA 우승을 했다. 견자단 주연의 영화 "8인 : 최후의 결사단"에도 출연한 것으로 유명하다.[14] 중국 유제품 2위 기업.[15] 북아일랜드의 경우 천주교도 아일랜드인이 주류인 본토와는 달리 개신교도가 흔하며 비교적 최근에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넘어온 이들의 후손도 많다. 내몽골의 차하르족 역시 외몽골의 할하족과는 예전부터 사이가 썩 좋지 못했고, 인구의 과반수가 애초에 한족이다. 그래서 둘 다 각각 영국과 중국에 잔류할 것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