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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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務軍閥(ないむぐんばつ)

1. 개요
2. 설명
3. 대표적인 인물
4. 여담


1. 개요[편집]


자위대 초창기 시절에 일본군 출신이 아닌 내무관료(일본제국 경찰 등) 출신으로 자위대의 수뇌부를 장악했던 인물들을 가리킨다. 특히 10년이나 통합막료회의의장으로 재직한 하야시 게이조가 영수로 유명하다.

내무군과는 무관하다.


2. 설명[편집]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 시절에 군색을 빼려고 시도했고 그 때문에 일본군 출신들을 배제했다. 대신 계급 등을 두고 군대와 가장 유사한 시스템인 경찰 출신들을 채용했다. 이들은 초기에 주요 요직을 차지했다.

1950년 7월부터 경찰예비대가 모병되었는데 전부 이등병으로 배치했다. 초급 간부들은 이등병 계급으로 대대장, 중대장 완장을 차고 지휘관교육을 받았다. 1950년 10월 9일내무성 추천으로 내무성 출신의 요시다 주이치(吉田忠一), 하야시 게이조, 쓰쓰이 다케오, 오모리 간, 다케우치 쇼헤이(武内征平)가 경찰감(중장)으로 특별임관되었다. 1952년 10월 15일보안대 개편이 되면서 새로이 내무성에서 추천된 나가노 도시오(中野敏夫), 가나야마 구니치(金山國治)와 육사 34기 출신의 기시모토 주이치(岸本重一)와 37기 출신 이모토 구마오(井本熊男)[1]도 보안감(중장)으로 특별임관되었다.

그러나 경찰이나 관료 출신들은 군의 시스템을 잘 이해하지 못 했고 자위대의 사병들은 일본군 사병 출신[2]들이 많았던 탓에 이런 미필 간부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전술적 지휘에서 우수한 기량을 보이자 미국은 마음을 바꿔 대좌 이하의 일부 장교 출신들에게 입대를 허용했다. 이들은 1960년대까지 내무군벌과 육상막료장 자리를 두고 힘싸움을 벌였고 내무군벌 출신 육막장이 사라지게 되면서 1980년대까지 막료장 자리를 차지하다가 늙어서 은퇴했다. 그 이후엔 방위대학교 출신들이 독점 중.

해상자위대의 경우 일본 해군 소해대가 그대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98% 이상이 일본 해군 출신이었다. 야마자키 고고로가 초기에 잠깐 반짝했을 뿐 해자대에는 내무군벌이란 개념이 거의 없었다 봐도 무방하다.


3. 대표적인 인물[편집]



초대 해상막료장을 지낸 야마자키 고고로 역시 관료 출신이지만 원래부터 해군과 친했던 인물로 내무군벌이 아니었다.


4. 여담[편집]


내무군벌은 군벌이란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자칭이 아니었고, 자위대의 설립 과정에서 배제됐던 구 일본군 출신이나 우익 인사들이 자위대의 설립 과정을 주도한 내무성 관료 출신들을 가리켜 쓴 말이었다. 자위대 설립 과정에서 미국의 입김과 요시다 시게루 등의 영향으로 일본군의 문화적 영향을 줄이려는 의도가 있었고[3] 헤게모니의 변화에서 일본군 출신들의 마음에 들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벌쇼와 시대 전반의 일본군 고위 장성급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점도 감안하면, 군 출신들도 군벌이 안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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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군 대좌 출신이었다.[2] 사병들은 징병으로 갔기 때문에 공직 추방령에서 빠졌다.[3] 다만 이에 대해선 지극히 일본적인 관점에서 그렇다고 보는 한국인들도 많다. 한국의 입장에선 자위대가 그리 일본군과 차이가 없다고 여기는 전반적인 인식도 크다. 아마 외국군대에 대해 많은 정보에 접근은 어렵고, 전반적인 상징이나 이미지로 인식하게 되는데 당장 욱일기깃발로 쓰고 있는 게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