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슈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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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슈빌 전투
명칭
영어: Battle of Nashville
시기
1864년 12월 15일 ~ 12월 16일
장소



미국 테네시 주 데이비드슨 카운티 내슈빌
결과
북군의 승리
남군 서부전선 붕괴
남군 서부전선 주력부대 테네시군 궤멸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1863-1865).svg 아메리카합중국
파일:아메리카 연합국 국기(1863-1865).svg 아메리카연합국
지휘관
컴벌랜드군 사령관 소장 조지 H. 토머스
4군단장 소장 토머스 J. 우즈
23군단장 소장 존 M. 스코필드
테네시군 분견대장 소장 앤드류 J. 스미스
임시 분견대장(에토와 구역) 소장 제임스 B. 스티드먼
기병군단장 소장 제임스 H. 윌슨
테네시군 사령관 중장 존 벨 후드
"리 군단" 군단장 소장 스티븐 D. 리
"스튜어트 군단" 군단장 소장 알렉산더 P. 스튜어트
"치텀 군단" 군단장 소장 벤자민 F. 치텀
기병군단장 소장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1]
뵝력
55,000명
22,000~30,000명
피해
387명 전사
2,558명 부상
112명 포로 및 실종
총 3,061명 사상
1,500여 명 전사 및 부상
4,500여 명 포로 및 실종
총 6,000여 명 사상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전투 이전
3.2. 12월 15일
3.3. 12월 16일
4. 결과




1. 개요[편집]


미국 남북전쟁의 서부전선에서 남군 대규모 군세의 저항의 끝을 알린 전투. 서부전선에서의 남군은 이 전투로서 사실상 완전히 끝이 났다. 1864년 12월 15일부터 12월 16일까지 벌어졌다.


2. 배경[편집]


북군은 채터누가 전투에서의 승리로 채터누가를 통해 그동안 위협받지 않은 남부연방의 심장지대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채터누가 전역을 승리로 이끈 율리시스 S. 그랜트는 1864년 3월 2일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았고, 그랜트는 서부전선을 윌리엄 테쿰세 셔먼에게 맡겼다. 그랜트의 전략은 북군의 압도적 군세를 활용하여 남부연방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세로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랜트가 직접 조지 미드가 이끄는 포토맥군을 통제하며 버지니아에서 로버트 E. 리를 압박하는 동안, 북군 장군 나타니엘 뱅크스는 "레드 리버 전역"을 통해 루이지애나 서부 슈리브포트(Shreveport) 점령을 시도하고, 셔먼에게는 조세프 E. 존스턴 하 테네시군을 패퇴시키고 남부연방의 핵심 산업 허브도시였던 조지아 주 애틀랜타[2] 점령하며 조지아를 비롯한 남부 연방의 심장지대를 공격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수적 열세였던 남군은 유리한 지형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고 북군을 맞아 싸우려 시도하였지만, 셔먼은 만반의 태세를 갖춘 남군에게 군대를 들이박는 짓 따위는 해줄 생각이 없었고, 그렇게 존스턴이 셔먼을 가로막으면서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찾아 군세를 주둔시키면 셔먼은 우회해서 애틀랜타쪽으로 진군하는, 쫓고 쫓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존스턴은 테네시군의 온존을 최우선순위로 생각하여, 지는 싸움을 계속 피하면서 셔먼에게 자신보다 많은 출혈을 계속 강요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셔먼의 계속된 우회기동에 의해 존스턴은 1864년 5월부터 7월까지의 애틀랜타 전역에서 110 마일 이상에 달하는 산과 구릉이 많은, 수비하기 좋은 지형을 단 2달만에 내주었고 북군 군세는 애틀랜타에서 17마일 이내로 접근하게 되었다. 남부 연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비롯한 남부 연방 정부 인사들은 이러한 존스턴의 행각에 지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존스턴이 애틀랜타와 셔먼 사이의 마지막 자연적 방어선인 채터후치 강에서 후퇴하자 데이비스는 결국 인내심을 잃고 존스턴을 해임했으며,[3] 공격적인 성향의 존 벨 후드를[4] 임시로 대장으로[5] 승진시켜 테네시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6][7] 하지만 후드라고 해서 이미 상황이 이런 만큼 딱히 뾰족한 수가 있지는 않았고, 몇 번의 무위로 돌아간 공격 끝에 애틀랜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셔먼이 애틀랜타에서 재정비하는 동안, 후드는 제퍼슨 데이비스와 함께 셔먼을 공략할 전략을 세웠다. 그들의 계획은 채터누가에서 애틀랜타에 이르는 셔먼의 병참선을 습격하면서 앨러배마를 통해 중부 테네시로 북상하면, 셔먼은 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고, 유리한 지형을 잡아 셔먼을 박살낸 다음, 테네시와 켄터키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컴벌랜드 협곡을 통과해 피터스버그에 포위당해 있던 로버트 E. 리를 구원하러 가는 것이었다. 계획을 이행한 후드는 북군 병참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테네시로 북상했지만, 후드를 쫓는 것에 기가 질려버린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을 실행하면서 후드를 쫓는 것을 포기하자 후드는 테네시에 분산되어 있던 북군을 섬멸하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삼는다.

셔먼은 바다로의 진군 직전 후방의 방어를 위해 조지 H. 토머스 및 일부 병력을 테네시로 파견했다. 전역의 시작 당시 후드의 총 병력은 토머스에 비해 1.5배 이상 열세였다. 하지만 테네시의 북군은 테네시 남부에 자리잡은 존 M. 스코필드[8] 휘하 부대와 내슈빌에 주둔한 토머스 휘하로 양분되어 있었고, 만약 두 북군 부대의 합류를 저지하고 각개격파할 수 있다면 최후의 역전을 노려볼 수 있었다. 토머스가 군대를 생각 없이 분산시킨 것은 아니었고, 각지에서 출발한 북군 지원군이 철도 요충지 내슈빌로 집결할 때까지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코필드에게는 최대한 후드의 진격을 견제하며 시간을 끌면서도 병력은 최대한 온존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1864년 11월 29일 후드는 스프링 힐에서 존 스코필드 하의 북군 4군단과 23군단의 퇴로를 끊을 뻔 했으나, 명령이 전달되지 않아 남군은 퇴로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고(...), 밤사이 남군이 자는 사이에 북군 군단은 남군 코앞에서 남군이 비워놓은 퇴로로 빠져나가버렸다(...). 격노한 후드는 군사회의를 열어 휘하 군단장들에게 화를 내고선, 하페스 강을 건너 스코필드가 내슈빌에서 토머스와 합류하기 전에 스코필드를 섬멸하려 시도한다.[9] 하지만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기다리고 있는 스코필드 휘하 북군에게 돌격했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11월 30일 프랭클린 전투에서 대패하고, 스코필드는 강을 건너 내슈빌에서 토머스와 합류해버린다.

후드는 후퇴하면 탈영으로 군대가 와해될 것을 두려워하여,[10] 지원병을 요청하는 한편[11] 내슈빌로 진군하여 약 55,000여명에 달하는 토머스의 군을 상대하기로 하였다.


3. 전개[편집]



3.1. 전투 이전[편집]


내슈빌은 1862년 2월 북군에게 점령당한 이래 계속해서 요새화되어 왔다. 1864년에는 도시의 남부와 서부측에 무려 7마일에 달하는 반원형 북군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군데군데에 요새까지 건설되어 있었다.[12] 한편 북부와 동부는 컴벌랜드 강이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해주었고, 강은 북군 해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북군은 동에서 서로 순서대로 스티드먼의 임시 분견대, 23군단, 4군단, 그리고 테네시군 분견대가 방어선을 이루며 포진해 있었다. 신입으로 구성된 스티드먼의 임시 분견대를 제외한 토머스의 병력은 애틀랜타 전역과 빅스버그 포위전 등을 겪은 베테랑들이었다. 단, 신체적으로 뛰어난 최고의 정예 병력은 셔먼이 바다로의 행진을 위해 차출했기 때문에 내슈빌에서는 거의 부재했다.

한편 후드는 12월 2일 도시 남부에 도착해 북군과 마주보고 진을 쳤다. 후드는 자신이 수적 열세에 처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공세를 취할 생각은 없었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프랭클린에서 후드 자신이 그랬듯 토머스가 공격하면, 토머스를 격퇴한 후 역공해서 내쉬빌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남군의 전선은 약 4마일에 달했고, 스티드먼과 스코필드가 포진한 북군의 남쪽 부분을 마주보게 되어 있었다. 우에서 좌로 순서대로 치텀 군단, 리 군단, 스튜어트 군단이 포진해 있었다.

전투 시작 전, 후드는 치텀 군단 소속 세 개 여단을 내쉬빌과 머프리즈버러 사이의 내쉬빌 및 채터누가 철도를 공격하도록 보냈고, 3일 후에는 기병군단장 네이선 베드포드 포레스트 지휘 하에 2개 보병 여단과 2개 기병 여단을 증파하였다. 후드는 이것이 요새화된 내슈빌에서 토머스를 끌어내 분산된 토머스의 군대를 패퇴시킬 기회를 얻을 수 있거나, 토머스가 군 대부분을 끌고간다면 내슈빌 자체를 점령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철도가 몇 군데 끊기긴 했어도 머프리즈버러의 수비군은 12월 7일 남군을 격퇴해냈을 뿐만 아니라 토머스도 후드의 노림수에 속지 않고 진득하게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후 치텀 군단 소속의 3개 여단과 포레스트가 지휘하던 1개 보병 여단이 복귀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후드는 자신의 수적 열세를 더욱 가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군에서 가장 뛰어나고 기동성도 좋은 포레스트의 기병대를 자신의 군에서 떼어내는 전술적 실책을 저질렀을 뿐이었다.

한편, 토머스는 절대적 수적 우세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후드의 테네시군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제임스 윌슨 휘하의 북군 기병대는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토머스는 측면도 보호받지 않은 상태에서 결전을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그 상대가 그 악명높은 포레스트라면[13] 더더욱 그랬다. 정부와 군 수뇌부는 토머스의 지연에 답답함을 표했다.[14] 12월 8일 눈폭풍이 내슈빌에 닥치고, 12일까지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었지만, 12월 13일에도 토머스가 움직이지 않자 그랜트는 존 A. 로건 중장을 파견해서 토머스가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휘권을 넘겨받으라고 지시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그랜트 자신도 피터스버그 포위전을 실행중이었음에도 피터스버그를 떠나 직접 지휘권을 넘겨받으러 오다가 중간에 토머스가 드디어 공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갈 정도였다.


3.2. 12월 15일[편집]


토머스의 계획은 남군 우익에 견제성의 공격을 가해 그쪽으로 남군의 신경을 돌린 다음 좌익을 주공으로 공격한다는 비교적 단순한 계획이었다. 북군의 견제공격을 담당할 부대는 스티드먼의 임시 분견대가 맡기로 하였다. 신입으로 구성된 이들은 협곡 옆에 자리잡은 남군 방어선에 타격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리와 치텀의 군단은 좌익으로 증원군을 보내기까지 했다.

한편 남군 좌익의 주공은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토머스는 주공이 크게 돌아 남군의 노출된 좌익을 타격하는 구상을 짰다. 윌슨의 기병대가 측면을 보호하던 일부 남군 기병들을 쫓아내고, 뒤따르는 스미스가 이끄는 테네시군 분견대와 스코필드의 23군단은 남군 좌익을 크게 돌아 약 2시 30분 남군 좌익을 지키던 보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우즈 휘하 4군단은 남군 정면을 공격하는 임무를 받았고, 남군이 있어야 할 몽고메리 언덕에 도착하자 산병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잠시 재정비하고는 브라운 천(川; Brown Creek) 건너 새로 형성된 남군 전열에[15] 스미스의 분견대가 남군 측면을 공략할 때쯤에 맞추어 공격했다. 북쪽, 남쪽, 서쪽에서 동시에 협공을 받은 남군 좌익은 버틸 수 없었고 스튜어트의 군단은 남쪽으로 1~2마일 후퇴했으며, 리 군단으로부터의 증원군 덕에 완전히 패주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좌익이 후퇴하자, 치텀과 리의 군단은 같이 후퇴하여 새 전선을 형성하였다.


3.3. 12월 16일[편집]


이튿날 남군의 새 전선은 첫날의 전선보다 더 공략하기 어렵고, 병력 또한 더 집중되어 있었다. 동쪽으로는 피치 오처드 언덕(Peach Orchard Hill)에 자리잡아 있었고, 중앙은 참호로 보강한 건식 석재 벽을 따라 있었으며, 서쪽 측면은 콤프턴 언덕(Compton's Hill; 이 전투 이후에는 위치를 사수하다가 전사한 남군 대령 윌리엄 M. 샤이의 이름을 따 Shy's Hill, 즉 샤이 언덕으로 칭해졌다)으로부터 남쪽으로 연이어 있는 언덕에 자리잡아 있었다. 후드는 거의 전투손실이 없던 리 군단을 우측면에 두고, 프랭클린 전투와 전날의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스튜어트 군단을 중앙에, 그리고 프랭클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치텀 군단을 좌측면, 즉 서쪽에 두었다. 에드문드 E. 러커 대령 하의 기병 여단이 치텀 군단 남쪽을 맡았다.

가파르게 우뚝 솟아 있는 샤이 언덕은 비록 좋은 방어적 지형이긴 했으나, 이를 활용한 남군의 방어선에는 세 가지 단점이 있었다. 언덕에 형성된 남군 방어선이 돌출부를 이루었고, 동남쪽을 제외한 전방에서 북군의 포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두번째로 밤새 지친 병사들에 의해 급조된 방어선이다 보니 참호만 있었고 머리를 보호하는 시설이나 녹채[16] 등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단점으로는, 언덕의 위에 지으면서 사격라인을 간과한 나머지 공격하는 북군 병사들이 언덕 정상에 거의 다다를 때까지 사격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토머스의 계획은 전날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남군 우익에 견제공격을 날려 주의를 돌린 다음, 스코필드 휘하 23군단이 좌익에 공세를 펼친다는 계획이었다. 피치 오처드 언덕에 있던 남군 우익에 대한 공격은 12월 15일의 그것보다는 훨씬 강화되었다. 우즈의 4군단으로부터 두 개 여단과 스티드먼의 분견대로부터 두 개 여단이 오후 3시쯤 공격을 시작했다. 비록 참호에 포진한 남군의 사격과 포격으로 공세가 좌절되긴 했지만, 첫날과는 달리 후드는 병력을 리를 지원하기 위해 치텀 군단 소속 2개 여단을 보내야 했다.

한편 남군 좌익에서는, 윌슨의 기병대가 남군 좌익과 후방을 들쑤시는 통에 치텀의 군단은 방어선을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토머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같이 있던 스코필드에게 샤이 언덕 서측면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으나, 자신이 수적 열세에 처해 있고 자신의 남쪽 측면이 노출되어 있다고 오인한 스코필드는 이를 거절하고 스미스로부터 지원군을 요청했다. 토머스의 지시 하에 스미스는 1개 사단을 파견했지만, 여전히 스코필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일몰이 다가오고 있었고, 일몰 전에 공격하지 않으면 후드는 방어선을 더욱 강화하거나 남쪽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존 맥아더 준장은 남군 방어선이 전방위에서의 포격에 두들겨맞고 있는 것을 보고 스미스와 토머스한테 다른 명령이 없으면 5분 내에 샤이 언덕에 포진한 남군 병력을 공격하겠다고 전언을 보낸 후, 자신이 지휘하는 세개 여단을 가지고 샤이 언덕을 공격했다. 전술한 남군의 참호의 위치 문제[17] 덕에 한 개 여단만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뿐 나머지 여단들은 남군 방어선에 큰 피해 없이 들이닥칠 수 있었다. 양측면이 공략당하자 남군 좌익은 완전히 붕괴해버렸고, 리의 군단 일부와 러커의 기병 여단이 방어전을 펼치는 동안 남군은 모두 후퇴했다.


4. 결과[편집]


12월 16일 밤, 후드의 패잔병들은 프랭클린으로 남하하였다. 12월 18일 포레스트 휘하 2개 기병사단이 합류하면서 물자도 부족하던 윌슨의 북군 기병대는 추격을 멈추어야만 했다. 남군은 덕 강(Duck River)을 건너 후퇴하면서 다리를 불태웠고, 북군 보병은 토머스가 배다리를 남군의 퇴로인 프랭클린 쪽이 아니라 머프리즈버러 쪽으로 보내는 바람에 12월 23일에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포레스트가 남군을 계속해 추격하는 윌슨의 기병대를 가로악으면서 몇 번의 작은 교전이 발생했지만, 후드는 결국 12월 28일 테네시 강에 설치된 배다리를 건너 후퇴했다. 토머스는 해군이 테네시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후드를 차단해주기를 요청했지만, 낮은 수위와 남군의 포격 때문에 해군 역시 후드를 막지 못했고, 토머스가 파견한 스티드먼의 임시 분견대 역시 배다리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테네시군은 프랭클린-내슈빌 전역 초기 포레스트의 기병군단을 제외하고도 약 38,000명의 군세였지만, 프랭클린과 내슈빌에서의 참패, 그리고 연이은 탈영으로 15,000명 이하로 쪼그라들어 사실상 궤멸되었다. 후드는 전역의 실패를 부하들과 병사들의 탓으로 돌렸지만, 그는 1865년 1월 13일 테네시군 지휘권을 내려놓았고, 다시는 야전 지휘관을 맡지 못했다. 서부전선에서의 테네시군의 괴멸은 서부전선 남군의 사실상 종말을 의미했다.

이후 테네시군 잔여 병력은 캐롤라이나로 이동하여 조셉 E. 존스턴 휘하에서 셔먼을 막는 데 투입되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고, 로버트 E. 리의 항복 이후 존스턴과 함께 셔먼에게 항복했다. 한편, 테네시군까지 떠나면서 앨라배마와 미시시피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윌슨은 기병대만으로 테네시부터 앨라배마, 조지아까지 휩쓸며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앨라배마의 주요 항구도시 모빌 또한 북부 육해군 합동작전으로 함락되면서 딥 사우스 일대까지도 연방군의 통제 아래에 들어갔다. 윌슨 휘하 기병대는 이후 도주하던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사로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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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프리즈버러에 파견되어 내슈빌 전투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2] 산업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철도가 통과하는 도시여서 군수물자의 수송에도 굉장히 중요한 도시였다.[3] 이후 데이비스는 존스턴을 다시는 믿지 않았다. 1865년 1월 남부 연방 의회가 로버트 E. 리를 남군 총사령관으로 공식 임명하고 존스턴을 다시금 테네시군 사령관에 임명하는 안을 통과시키자, 데이비스는 리는 곧바로 임명했음에도 존스턴을 복귀시키는 것만큼은 한사코 거절한 나머지 부통령인 알렉산더 스티븐즈와 17명의 상원의원이 리에게 존스턴을 총사령관으로써의 권한을 이용해 테네시군 사령관직에 직접 임명하라고 제안했을 정도였다. 결국 리의 설득으로 존스턴을 임명하긴 했지만 데이비스는 "존스턴 장군이 지휘직을 가지는 것이 부적격하다는 내 의견은 (...) 강고한 확신으로 자리잡은 나머지, 야전 사령관으로써 그가 군을 지휘한다는 것에 다시는 자신을 가질 수 없을 정도이다." 라고 비망록에 적었다.[4] 후드는 리치먼드 정부로 계속해서 공식적인 방편이 아닌 사적인 편지를 통해 존스턴의 전략을 비판했다. 아마 치카무가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은 후 리치먼드에서 요양중에 제퍼슨 데이비스와 친교가 생긴 것이 이러한 상황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러 온 데이비스의 군사 고문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에게 후드는 자신은 계속해서 존스턴에게 계속해서 공격하기를 조언했지만, 존스턴은 그저 무모하다고만 여겼으며, 존스턴은 비효율적이고 싸울 의지도 없다며 깠다. 사실 후드 역시 존스턴 앞에서는 존스턴에게 후퇴를 조언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물론 실드를 치자면, 선임 군단장 윌리엄 하디조차 브래그에게 "현 상황이 계속된다면 한번도 제대로 전투를 치루지도 않은 채 애틀랜타까지 밀릴 것"이라며 불평했고, 다른 장군들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5] 하지만 이 승진은 남부 연방 의회가 동의해주질 않았고, 1865년 1월에는 다시 중장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6] 존스턴의 해임은 "남북 양측을 통틀어 남북전쟁 중 가장 큰 실수"라고 역사가 브루스 캐튼에게 까였다.[7] 당시 후드의 나이는 단 33세로, 양측을 통틀어 독립적으로 군대를 지휘한 장군 중 최연소였다.[8] 연방군 오하이오군(23군단) 사령관. 전후 전쟁장관과 연방군 총사령관을 지냈다.[9] 직접 하페스 강을 건너 스코필드가 내슈빌로 가는 길 자체를 막는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도강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주변이 평지여서 자신의 기동이 노출되면 스코필드가 그냥 후퇴해버릴 것을 염려했다.[10] 이 시점에서 이미 탈영으로 약 2천명을 잃은 상태였다. 비단 후드만이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전세가 기울고 특히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 이후에는 가족들을 걱정한 탈영병들 때문에 남군 전체가 겪던 문제였다. 그 이후에는 그동안 한 명도 탈영병이 없음을 자랑하던 리의 북버지니아군도 골머리를 앓기 시작해서, 롱스트리트가 적정을 탐색하고 기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진 정찰병보다 탈영을 막기 위한 후방 병력을 더 많이 두어야 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기도 했다.[11]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남군이 후드에게 보낼 수 있는 지원군은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12] 이 요새들은 내슈빌 전투에서는 쓰이지 않았고, 남북전쟁 종전 후 버려졌다가 굉장히 아이러니하게도 그 폐허가 KKK의 집합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13] 남군에서 가장 뛰어난 기병대장 중 하나로, 동부전선에 젭 스튜어트가 있었다면 서부에는 포레스트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은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얼마나 신출귀몰하면서 기병을 잘 이끌었는지 그랜트는 그를 일컬어 "그 악마같은 놈"이라고 욕했고, 셔먼 역시 "양측을 통틀어 이 전쟁이 배출한 가장 걸출한 인물 중 하나"로 보았다. 다만 인종관은 여지없어서 KKK의 초대 대표를 지냈다. 그래도 말년에는 클랜의 해체를 주장하는 등 당시 남부 백인 기준으로는 흑인에게 유화적인 태도로 전향하기는 했다.[14] 링컨은 토머스가 후드가 약탈하도록 내버려둔다며 답답해했다. 그랜트는 후드가 켄터키나 오하이오로 진군할 것을 두려워했다. 후일 그랜트는 만약 자신이 후드였다면 루이빌까지 진군한 후 시카고까지 북상했을 거라며 안도감을 표했다. 물론 실제로는 후드의 군대가 이미 프랭클린에서 치명타를 입어 더 이상의 장거리 공세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북군 수뇌부는 이를 알 방법이 없었다.[15] 남군은 원래 몽고메리 언덕 위에 진을 치긴 했으나, 내슈빌의 요새의 대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후퇴해서 다시 방어선을 형성한 것이었다.[16] 영어로는 abatis라 부르는 것으로, 날카롭게 깎은 말뚝과 철조망 등으로 적의 접근을 막는 방어시설이다.[17] 사격 라인이 땅에 가려 언덕을 오르는 북군 병사들을 견제할 수 없었다는 점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