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 킹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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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 킹 콜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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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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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냇 킹 콜
NAT KING COLE

헌액 부문
개척자 (Early Influences)
멤버
(개인 자격)
입성 연도
2000년














냇 킹 콜
Nat King Cole


파일:냇킹콜.jpg

본명
너새니얼 애덤스 콜스
Nathaniel Adams Coles

출생
1919년 3월 17일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사망
1965년 2월 15일 (향년 45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타모니카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싱어송라이터, 피아니스트, 배우
서명
파일:Nat_King_Cole_signature.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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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부모님
에드워드 콜스
페를리나 콜스
배우자
나딘 로빈슨 (1937 - 1948, 이혼)
마리아 콜 (1948 - 1965)
자녀
슬하 1남 4녀
캐럴 콜 (1944~2009)[1]
나탈리 콜 (1950~2015)
냇 켈리 콜 (1959-1995)[2]
케이시 콜 (1961-)
티몰린 콜 (1961-)
학력
뉴잉글랜드 음악원
호바트 앤드 윌리엄 스미스 콜리지스
Wendell Phillips Academy High School
DuSable High School Campus
신체
185cm, 84kg
종교
기독교(침례회)
활동
1934년 ~ 1965년
사용 악기
보컬, 피아노
장르
재즈, 트레디셔널 팝
레이블
Ammor, Excelsior, Decca, Capitol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대중문화 속에서
5.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재즈 보컬리스트.


2. 생애[편집]


냇 킹 콜은 미국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합법이었던 1919년에 태어났다. 냇의 어머니는 무려 13명의 자녀를 낳았고, 아버지가 목사였기에 11세 때부터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시작했다.[1] 재즈 클럽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던 그는 그와 그의 형제들이 같이 부른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이 1946년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며 성공을 거뒀다. 냇은 곧 솔로 가수로 변모하여, 1948년 "Nature Boy"라는 곡을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리며 공식적인 탑 가수의 지위에 올랐다.

우리가 흔히 스탠더드 팝과 락앤롤 전의 음악을 논할 때 거론되는 두 명이 빙 크로스비프랭크 시나트라 정도인데, 냇 킹 콜도 이에 더해야 한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유명세로는 그 시대의 아이콘이긴 했지만은, 차트 성적은 냇보다 부실했다. 사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50년대 초에는 전성기가 지나 하향세라는 평가가 많았다.

냇 킹 콜은 1950년 "Mona Lisa"를, 말 그대로 대히트한다. 이 곡은 빌보드 차트 1위와, 1950년 빌보드 연말 차트 2위에 올랐으며 이는 이 곡이 1950년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크게 히트한 곡이라는 말이다. 흑인 차별이 심한 시대였지만 냇은 루이 암스트롱 다음으로 음악계를 지배한 미국 흑인이 되었다.

다음 해인 1951년, 냇은 말 그대로 미국 최고의 흥행 가수 위치에 올랐다. Donny Osmond 같은 후배 가수들이 나중에 커버한 바 있는, 히트곡 "Too Young"을 발표하는데, 이 곡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하고, 1951년 빌보드 연말 차트 1위에 올랐다. 1951년 미국에서 제일 크게 히트한 곡이었던 것.

여기서 일부 사람들은 이런 말을 던질 수도 있다. "1950년대 초반이면, 상대적으로 음반 시장도 적고, 탑 가수가 되기 쉬웠지 않냐?" "그 시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연예계는 널널했지 않느냐?"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답변은 "틀렸다"이다. 미국의 음반 시장은 이때도 당연히 전 세계에서 제일 큰 것도 맞았지만, 미국은 전쟁의 타격을 적게 받았기에, 전쟁 중에도 음반 시장, 연예계는 활발했었다. 징병제라 해도 대체 복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 시대에도 미국엔 탑 가수들이 많았다. 원 히트 원더도 많았고. 그리고 이 시대에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법으로 인정되던 때라, 흑인들이 힘들게 살던 때다.[2] 이러한 때에 미국 음악계, 나아가 세계 음악계의 탑으로 올라섰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다.

빙 크로스비 때는 상대적으로 음반 시장이 널럴해서, 빙 크로스비는 내는 곡마다 차트 1위를 하긴 했지만, 스윙 재즈 시대가 도래하고 1940년대 스탠더드 팝의 시대가 도래하며, 음반계는 급속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데뷔해서 성공한 탑 가수로는 프랭크 시나트라, 냇 킹 콜, 페리 코모가 있는데, 프랭크는 일종의 문화적 아이콘 (엘비스, 비틀즈 같은.), 냇 킹 콜은 미국 음악계의 탑, 페리는 친근한 곡을 부르는, 국민들에게 친근한 가수 포지션이었다.

다시 냇의 커리어로 돌아가자면, 냇은 이 외에도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냈고, 솔직히 말하자면 다 열거하기 힘들다. 1950년대 동안 히트곡을 계속 내놓았으며, 락앤롤의 열풍도 냇을 꺾을 순 없었다. 락앤롤과 엘비스 열풍 이후 살아남은 스탠더드 팝 시대 가수들은 얼마 많지 않다. 페리 코모, 프랭크 시나트라, 딘 마틴[3], 그리고 냇 킹 콜 밖에 없었고, 특히 냇 킹 콜은 1965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전성기였기 때문에, 냇 킹 콜의 가수 커리어는 대단한 것이었다.

1965년 갑작스런 폐암 증세를 보여 아직 한창인 45세로 세상을 떠났다.[4] 엄청난 골초였기에 율 브리너처럼 죽기 전에는 금연광고에 나오기도 했다.

프랭크의 경우, 1970년대 접어들며 예전의 전성기는 못 누리게 되었고, 딘 마틴은 애초에 코미디언 출신이었으므로 아예 코미디계로 다시 돌아가 성공하고 있었으며[5], 페리 코모는 60년대 초 들어 가수로서의 인기가 쇠약해졌지만 1971년 "It's Impossible"이 빌보드 핫 100 10위를 기록하며, 1970년대 동안 가수로서의 제 2의 전성기를 누렸다.

냇의 딸인 내털리 콜(Natalie Cole) 역시 가수로 활동했다. "This Will Be (An Everlasting Love)", "Inseparable", "Sophisticated Lady (She's a Different Lady)", "I've Got Love on My Mind", "Our Love", "Pink Cadillac", "Miss You Like Crazy"와 같은 히트곡들로 잘 알려져 있다.

3. 평가[편집]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팝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자 재즈 발전에 있어 주요한 인물이다.

AllMusic#


20세기의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엔터테이너 중 한 명.

NPR#


195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인기 가수 중 한 명이 였으며 스윙 시대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6]이자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었다.


4. 대중문화 속에서[편집]


중후한 음색으로 재즈를 얼핏 들었어도 기억에 남을 유명곡들을 불렀다. 대표곡으로 Too Young, Mona Lisa, Unforgettable, Ramblin' Rose, Those Lazy-Hazy-Crazy Days of Summer, That Sunday, That Summer, L-O-V-E, Quizas, Quizas, Quizas, Smile, The Christmas Song (Merry Christmas To You) 등이 있다.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L-O-V-E.



'Quizas, Quizas, Quizas'
'Aquellos Ojos Verdes'
에스파냐어로 부른 'Quizas, Quizas, Quizas'와 'Aquellos Ojos Verdes'는 영화 화양연화에 삽입되어 큰 사랑을 받았다.


'Unforgettable'은 영화 왓치멘코미디언 사망 장면에 삽입되어 명장면을 연출했다.


1991년에 딸인 내털리 콜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면서 아버지 생전 노래에 자신이 부른 노래를 합쳐 불렀다. 이 노래로 그해, 그래미상을 휩쓸었다. 내털리 콜은 아버지가 죽은 지 딱 50년이 되는 2015년 12월 31일에 간질환으로 아버지 곁으로 갔다. 이듬해인 2016년, Sia의 커버 버전이 도리를 찾아서의 엔딩곡으로 수록되었다.


영화 조커의 트레일러에 커버 버전이 사용되어 강한 인상을 남긴 'Smile'


'Love Me As Though There Were No Tomorrow'은 폴아웃 뉴베가스 OST로도 유명하다.


폴아웃 4에서는 Orange Colored Sky가 삽입되었다.


5. 여담[편집]




사망하기 직전인 1964년에 내한 공연을 온 적이 있다. 내한 당시 서울 시민회관에서 한국어 아리랑을 부른 미발표 음원이 존재하며, 정식으로 녹음하여 앨범에 수록하려 하였으나 폐암 선고를 받아 활동을 중단한 까닭에 정식으로 공개되지는 않았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을 통해 최초로 공개되었다.

이름 사이 '킹'이라는 애칭은 무명 시절, 클럽에서 연주하던 어느 날 종이 왕관을 머리에 쓴 게 계기였다.[7]

백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긴 했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인종차별 피해를 당하기도 했고 심지어 테러를 당한 적도 있다.[8] 그래서 엘라 피츠제랄드, 루이 암스트롱처럼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 자주 참여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스탠드 너트 킹 콜은 냇 킹 콜이 모티브.





틱톡에서 무서운(creeoy)버전으로 유행한 Daisy Bell(실제 곡명은 On A bicycle Built for Two)을 부른것으로 유명하다.(1963) 최초로 부른사람은 1893년에 부른 Dan W. Quinn이지만 음원의 상태가 좋지않아 냇킹콜이 부른 버전이 더 잘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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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무성, "JAZZ IT UP!" (2018 · 서해문집), 170~171쪽[2] 냇 킹 콜 본인 역시 차별 때문에 상당히 고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 적극적이었다.[3] 이쪽은 코미디언 출신이고 또 코미디언이 본업이었지만 알다시피 가수로서도 크게 성공했었다. 이 시대의 엔터테이너들은 다재다능한 사람들이 많았다.[4] 참고로 냇 킹 콜의 자식들도 요새 추세랑 달리 그리 장수하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했다. 후술할 딸 내털리도 투병 도중 심부전으로 사망했고, 내털리의 아들도 심장마비로 요절. 냇이 입양한 아들딸도 각각 에이즈와 폐암으로 사망했다. 아들 손자는 전부 40대가 되기 전에 죽었고, 내털리와 입양딸만 60 중반을 넘기고 사망했을 정도로 가문 평균 수명이 짧다. 결국 2020년대 기준으로 직계 가족은 마지막으로 본 쌍둥이 딸과 입양딸 손주들 정도만 살아있는 상태다. 반대로 두번째 아내는 냇 사후에도 89세까지 장수했다.[5] 가수 활동도 했지만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사실상 본업은 쇼 호스트, 즉 코미디언이었다.[6] 피아노 실력이 뛰어났는데, 레드 갈랜드빌 에반스에게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7] 남무성, "JAZZ IT UP!" (2018 · 서해문집), 171쪽[8] 남무성, "JAZZ IT UP!" (2018 · 서해문집), 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