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바나(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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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노보셀릭
커트 코베인
데이브 그롤

{{{#808080
[ 구 멤버 ]
아론 벅하드 · 데일 크로버 · 데이브 포스터 · 채드 채닝 · 제이슨 에버먼
}}}
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 Studio Albums ]

파일:blitch.jpg


파일:너바나2집.jpg


파일:너바나3집.jpg


1989년 6월 15일

1991년 9월 24일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3E8B0; font-size: .8em"
In Utero
1993년 9월 21일
}}}
[ Live Albums ]

파일:너바나언플럭드.jpg


파일: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jpg


파일:90-905923_nirvana-live-at-reading-wallpaper-nirvana-live-at.jpg

MTV Unplugged in New York
1994년 11월 1일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
1996년 10월 1일
Live at Reading
2009년 11월 3일
}}}
[ Compilations ]

파일:hormoaning.jpg


파일:너바나컴필1.jpg


파일:nirvana 2002.jpg


파일:WithTheLightsOut-photo.jpg


파일:sliver.jpg

Hormoaning
1992년 1월 27일
Incesticide
1992년 12월 14일
Nirvana
2002년 10월 29일
With the Lights Out
2004년 11월 23일
Sliver: The Best of the Box
2005년 11월 1일
}}}
[ Singles ]

파일:너바나러브버즈.jpg


파일:slivernir.jpg


파일:틴스피릿커버.jpg


파일:Come As You Are.jpg


파일:리튬ㅁ.jpg

Love Buzz
1988년 11월
Sliver
1990년 9월 1일
Smells Like Teen Spirit
1991년 9월 10일
Come as You Are
1992년 3월 2일
Lithium
1992년 7월 13일

파일:인블룸커버.jpg


파일:HSBB.jpg


파일:AARM.jpeg.jpg


파일:페니로얄티.jpg


파일:어바웃어걸.jpg

In Bloom
1992년 11월 30일
Heart-Shaped Box
1993년 8월 30일
All Apologies / Rape Me
1993년 12월 6일
Pennyroyal Tea
1994년 4월
About a Girl
1994년 10월 24일

파일:youknowyoureright.jpg


You Know You're Right
2002년 10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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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바나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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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로큰롤 명예의 전당 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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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너바나
Nirvana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커트 코베인,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
입성 연도
2014년
후보자격 연도
2014년
후보선정 연도
2014년


































너바나
Nirvana


파일:너바나 프로필.jpg

▲왼쪽부터 크리스 노보셀릭, 커트 코베인, 데이브 그롤

▼ 다른 사진 보기 《펼치기 • 접기》
파일:nirvana_nevermind.jpg

2집 Nevermind 때 사진 (1991년)
▲왼쪽부터 커트 코베인, 데이브 그롤, 크리스 노보셀릭

파일:nirvana_inutero.jpg

3집 In Utero 때 사진 (1993년)
▲왼쪽부터 커트 코베인,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결성
1987년,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
데뷔
싱글 데뷔: 1988년 11월 1일 Love Buzz[1]
정규 데뷔: 1989년 6월 15일
Bleach

해체
1994년 4월 8일[2]
재결성
2012년, 2014년, 2016년, 2018년, 2020년
멤버
크리스 노보셀릭 (베이스 기타)
커트 코베인 (리더, 보컬, 기타)
데이브 그롤 (드럼, 백킹 보컬)
장르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펑크 록
레이블
파일:sub_pop.png · 파일:dgc_logo.png
링크
파일:nirvana-logo.pn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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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멤버
5. 평가와 영향력
5.1. 상세
7.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파일:너바나 스테이지.jpg


너바나는 미국그런지·얼터너티브 록밴드이며, 1987년 데뷔하여 7년 동안 활동하고 1994년 해체되었다.


2. 상세[편집]


우린 메인스트림을 지양했어요.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너바나는 메인스트림을 따라하지 않았고, 메인스트림이 너바나를 따라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밴드에겐 큰 위험[3]

이었어요.

크리스 노보셀릭, 201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4]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결성되었고, 1990년대를 풍미했던 그런지를 대표하며 또한 얼터너티브 록의 기폭제였던 밴드이다. 밴드 이름 너바나는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를 말하는 불교 용어 열반(니르바나)의 영어식 표현이다. 코베인에 따르면 여느 록 밴드들처럼 거친 이름 말고 예쁜 이름을 원했기 때문에 이 이름을 택했다고 한다.[5]

록 음악을 넘어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밴드라고 할 수 있다. 일개 그룹의 범주를 넘어 9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계를 강타했던 새로운 음악적 조류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 밴드이자 라디오헤드와 함께 1990년대 록의 흐름을 결정지은 록밴드로 평가받으며 얼터너티브 록이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음악시장을 장악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는 80년대의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상업성이 극대화된 당시 록 음악의 틀을 깨고 90년대부터 언더그라운드 씬, 감성 씬, 펑크 씬과 같은 마이너했던 록 음악들이 가진 가능성을 재평가하게 만들었다.[6] 너바나 덕에 2000년대 후반까지 록 음악·메탈 음악·밴드 음악들이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분화를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너바나는 그래미 어워드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수상을 하였다. 또한 데뷔 이후 미국에서만 4,000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으며 전 세계적으로는 7,5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3. 멤버[편집]


너바나의 구성 멤버

파일:kcp.jpg

커트 코베인 Kurt Cobain
생몰
1967년 2월 20일 - 1994년 4월 5일 (향년 27세)
출신지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활동
1987년 - 1994년
포지션
보컬, 기타

파일:knpro.jpg

크리스 노보셀릭 Krist Novoselic
출생
1965년 5월 16일 ~ (58세)
출신지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캘리포니아 주 콤프턴
활동
1987년 - 1994년
포지션
베이스

파일:Dave-Grohl.jpg

데이브 그롤 Dave Grohl
출생
1969년 1월 14일 ~ (55세)
출신지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오하이오 주 워런
활동
1990년 - 1994년
포지션
드럼, 백 보컬

구 멤버

아론 벅하드, 데일 크로버, 데이브 포스터, 채드 채닝, 댄 피터스, 제이슨 에버먼

투어 멤버

팻 스미어, 존 덩컨, 로리 골드스턴, 멜로라 크리거
파일:NIRVANA smile LOGO.png

커트 코베인과 크리스 노보셀릭은 애버딘 고등학교 동창으로, 1985년에 커트 코베인의 권유로 둘이서 밴드를 결성하였다.

드러머 데이브 그롤은 1990년, Bleach가 발매된 이후에 영입되었다. 데이브 이전에는 아론 벅하드(1987~1988), 데일 크로버(1988, 1990), 데이브 포스터(1988), 채드 채닝(1988~1990), 댄 피터스(1990)가 드럼을 맡았다.

잠시동안 사운드가든의 멤버이기도 했던 제이슨 에버먼은 1989년에 너바나의 음악에 매료되어 대게잡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커트에게 빌려주고 세컨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으나 금방 방출되었다. 공연 영상 이후 에버먼은 1994년에 미군에 입대했고 75 레인저 연대와 그린베레에 복무하고 2006년에 전역하게 된다.

세컨드 기타였던 팻 스미어를 세션 멤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팻 스미어는 너바나가 말기때 영입된 정식 멤버였다. 커트 코베인은 원래 너바나를 4인조 밴드로 구상하고 있었지만 여건이 안돼서 3인조 밴드로 계속 유지했던 것이다.[7] 너바나 초창기 때 영상을 보면 2기타리스트로 4인조 채제였던 것을 볼 수 있다.https://youtu.be/aeUEgvLHjMI 더군다나 팻 스미어는 다른 멤버들보다도 나이가 많은 편이고[8]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인 '점스(Germs)'[9]의 멤버이기도 했다.[10]

로리 골드스턴(1993~1994)과 멜로라 크리거(1994)첼리스트로, 후기 라이브 공연에서 The Man Who Sold the World, All Apologies 등을 연주하였다. 로리 골드스턴은 MTV Unplugged in New York에서의 연주로 유명하다.


4. 역사[편집]



파일:NIRVANA members.jpg


파일:Phoenician Club Sydney 24 01 92 nirvana.jpg

데이브 그롤의 합류로 완성된 공식적인 최종 라인업
1992년 1월 24일 시드니 Phoenician Club 공연

파일:ROLLING STONE MAGAZINE APRIL 16 1992 NIRVANA cover.jpg


파일:mtvunpluged.jpg

1992년 롤링 스톤 4월호를 장식한 너바나[11]
1993년 11월 18일 MTV 언플러그드 공연 당시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너바나(밴드)/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평가와 영향력[편집]


대체적인 평가는 '마지막 록 스타(커트 코베인)를 가진 밴드'. 물론 그 이전에 R.E.M., 소닉 유스 등 얼터너티브 밴드는 있었지만, 돌풍을 일으킨건 너바나이다. 너바나는 상업성과 매너리즘에 찌든 당시 록 씬을 60년대의 순수성으로 초기화시킨 밴드이자 당시 모든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은인으로 꼽힌다.

때때로 '너바나는 실력에 비해 거품이다'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사람들도 소수 있다. 너바나가 메인스트림에 오르기 직전에 이미 80년대부터 이어진 메탈의 전성기가 점점 쇠퇴하고 있었고, 그 덕을 크게 본 게 바로 너바나라는 것이다. 이들은 잘생긴 외모의 커트 코베인 + 메탈의 쇠퇴 등의 버프를 받은 상태에서 '3장의 앨범만을 남긴 채 인기의 최절정의 순간 자살한 락스타'라는 이미지가 거의 신화화에 가까울 정도로 너바나를 급부상시켰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이 '만약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너바나가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 부정적으로 답한다. 그들의 음악성도 음악성이지만, 커트 코베인의 자살도 분명히 밴드의 인기에 영향을 미친 요소 중 하나라는 것. 실제로 당시 너바나와 비슷한 위상이던 펄 잼이나 스매싱 펌킨스의 현재를 생각해 보면, 커트 코베인이 죽지 않았다면 너바나 역시 이들과 같이 '한때 찬란했던 전성기를 가진 옛날 록밴드'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각에서의 비판을 제쳐두고서라도, 결과적으로 그들은 시대를 바꾸었다. 너바나는 쇠퇴해가던 메탈 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록의 역사를 얼터너티브 록과 모던 록의 시대로 바꿔놓았다. 이는 록이라는 장르 자체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록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게 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록을 넘어서 대중음악계에 얼터너티브라는 장르 개념을 자리잡게 하면서 크게 퍼트렸다고 평가받는다.


5.1. 상세[편집]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자면, 너바나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 매너리즘에 찌들어 위기에 봉착해 있던 록 씬을 개혁하고 록 음악의 수명을 훨씬 연장시킨 것이다. 일부는 "메탈리카본 조비가 음반을 천만 장씩 팔던 시대인데 무슨 록 음악의 위기냐?"라고 여길 수 있다.[12] 그러나 이는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음반 차트 위주로 당대 음악 시장을 바라보던 국내의 시각이 불러낸 착각으로, 너바나의 등장 이전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의 록 음악은 분명히 위기 상황에 있었다. 이는 각종 음악 매체에서 인정한 엄연한 사실이다. 당대 록 음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류 장르였던 헤비 메탈, 특히 글램 메탈 같은 장르가 제대로 음악적 변혁을 이루지 못한 채로 너무 오래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팝 메탈은 80년대 초반에 첫 등장한 이래 90년대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고, 중후기가 되어서는 음악적으로 두드러지는 명작 없이 고만고만한 작품들로만 채워졌다. 1987년의 건즈 앤 로지스를 끝으로 파급력 있는 신인의 등장도 거의 사라졌다.[13] 머틀리 크루, 데프 레파드 같은 고참 밴드들이 천만 판매고를 넘기는 수작들을 내며 저력을 과시했지만, 이들 역시 기존 메탈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거의 10년간 별다른 변화 없이 주류 장르가 유지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를 계속해오던 당시까지의 록의 역사에선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였다. 이는 자연스레 대중들의 반발과 외면을 유발했다. 디스코가 주류 장르로 오른 지 채 3~4년 만에 디스코 폭파의 밤을 맞으며 밀려났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장르의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메탈계라고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어서,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고 몇몇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르의 근본적인 매너리즘을 타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과도한 실험이나 지엽적인 태도로 오히려 청중들의 외면만 받은 사례도 있었다. 이 시기 메탈의 혁신 중 가장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가능성을 보여준 장르는 메탈리카라는 공룡 밴드를 배출한 스래시 메탈이겠지만, 이 역시 지나친 과격성과 폭력성으로 대중 전체에게 어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사실 메탈리카메가데스 등의 일부 대형 밴드를 빼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보기도 애매했다. 한편 메탈 외에 주류 록 음악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팝 록, 소프트 록은 80년대 중반 이후 신시사이저의 등장과 MTV의 대두 등으로 록의 특성을 거의 잃고 메인스트림 팝에 흡수되거나, 뉴 웨이브신스팝을 거치며 전자 음악으로 변화되었다. 이 와중에도 영국에서는 더 스미스더 큐어가 록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아일랜드U2가 전에 없던 신선한 음악으로 대형 밴드로 성장했으나, 전자는 바다 건너 얘기였던데다 인디 음악의 한계를 넘진 못했고, U2 역시 "록 음악의 별종"으로 취급받았을 뿐 새로운 흐름을 이끄는 데에는 실패했다.

한편 록 음악의 대항마들은 당시 록의 정체에 힘입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얌전했던 전통적 주류 팝 음악은 MTV의 성장와 함께 거대한 비즈니스 산업으로 변화, 수많은 음악 장르들을 집어삼키는 하이브리드 장르가 되어 마이클 잭슨, 마돈나, 프린스와 같은 전에 없던 솔로 단일 거대 슈퍼스타를 배출하며 대중음악 시장을 장악했고, 잠시 주춤했던 디스코다프트 펑크를 필두로 한 여러 언더그라운드 DJ들의 실험 속에서 펑크 록신시사이저와 결합하며 점차 일렉트로닉 뮤직으로 진화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 록 음악의 대항마로서 가장 급부상한 장르는 힙합으로, 이 신생 장르는 흑인들의 거리 음악으로 시작해 록 음악의 영역이었던 공격적인 사운드와 시대정신의 대변이라는 장점을 빼앗으며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여러 매체에서 슬슬 "록 음악은 한물 갔다"는 말들이 퍼지기 시작한다. "록 음악이 대중들의 관심으로부터 서서히 유리되고 있다"는 객관적인 관찰에서부터 "록 음악 역시 생명력을 잃고 클래식 음악재즈가 그랬듯 듣는 사람만 듣는, 과거의 유물로 전락할 것이다!"와 같은 과격한 예측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록 음악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점에선 모두 의견을 같이 했다. 위기감을 느낀 록 전문 음반사들은 이 위기를 타파할 수단으로 당대 미국 언더그라운드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에 시선을 돌렸다. 미국 얼터너티브의 터줏대감 R.E.M.이 처음으로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했고, 이어서 소닉 유스, 픽시즈,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 스매싱 펌킨스 등의 언더 밴드들이 연이어 메이저 계약을 맺었다. 이는 레코드사들의 일종의 도박이었다. 이런 인디 밴드들을 여럿 등용하면 그 중에 하나는 록의 위기를 타파할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측이었다. 이 무렵 인디 그룹의 메이저 레이블 계약 사례가 폭증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데뷔 앨범 Bleach로 좋은 평가를 받은 인디 레이블 서브 팝 소속 인디밴드 너바나가 있었고, 밴드는 이 흐름을 타고 게펜 레코드 산하의 DGC와 계약을 맺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록 음악의 위기론은 슬슬 정설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승승장구하던 기존의 글램 메탈 밴드들이 점차 힘을 못 쓰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개성이 없이 고만고만한 신예 메탈 밴드들은 더이상 대중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자신들 고유의 음악색을 유지하며 좋은 평가를 받던 메탈리카퀸스라이크 같은 메탈 밴드들이 기존작에 비해 훨신 단순하고 대중적으로 '타협한' 작품 "Metallica"와 "Empire"를 발매했다. 이는 밴드에게 전에 없던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 주었지만 메탈 팬들에게는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중고 신인 판테라가 "Cowboys from Hell"로 기존 메탈과 다른, 단순하고 넘실거리는 그루브 메탈로 성공을 거둔 것 역시 기존 팬들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점차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1991년 9월 24일, Nevermind가 발매되었다. 이는 처음에는 인디 음반다운 지극히 미미한 성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사태는 점차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빌보드 200에 144위로 첫 진입하고 총 판매량 25만 장이 예상되었던 이 앨범과 리드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신드롬을 크게 일으키기 시작했고, 약 4개월간의 역주행 끝에 1992년 1월 11일 마이클 잭슨Dangerous를 이어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한다. 앨범의 총 판매량은 약 3000만 장 이상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시대를 바꾸었다.

일각에서는 시대를 잘 타고난 밴드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기도 하는데, 기존 허점 투성이었던 빌보드의 집계 방식이 너바나의 등장과 함께 절묘하게도 개편되었다는게 주요 골자였다. 명색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뿌리깊은 차트 업계지만, 정작 차트 집계 방식은 주먹구구에다 통신 기술의 한계상 허점이 많았던 기조가 80년대까지 이어오곤 했다.[14] 판매 기록을 조사하여 집계한것이 아니라, 레코드점에 전화를 일일이 걸어서 판매고 답변을 취합하는 방식이었기에 진위 여부가 투명하질 못했던것이었다. 이렇게 허술한 시스템으로 하여금 음악성보단 빌보드에 등재될 편법과 마케팅이 우선시되는건 당연지사였고 조작 의심을 받는 사례도 몇 있었다.[15] 이는 90년대 등장한 음원 집계 업계 '닐슨 사운드스캔(현 루미네이트)'의 집계 방식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면서 점화되었던 논란.#[16] 80년대 신생이었던 얼터너티브 록은 이런 상업적 수혜를 받을리가 만무했고 젊은 대학가 라디오 방송국에서만 환영받는 장르였다. 헌데 닐슨 사운드스캔 집계 결과, 빌보드의 주먹구구 집계로는 잡히지 않았던 80년대 얼터록의 상당한 판매량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이미 리플레이스먼츠, R.E.M. 등의 선대가 일궈놓은 저변은 무시못할 수준이었고, 빌보드도 비판을 수용하며 집계 방식을 개편하던 찰나 절묘하게 너바나가 등장하며 저물어가던 메탈씬의 빈자리를 단숨에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기말의 변혁을 상징하기도 하는 셈이었다.

Nevermind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수많은 밴드들이 너바나를 이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펄 잼,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 등의 그런지 밴드들은 물론이고 스매싱 펌킨스 같은 수많은 얼터너티브 밴드들이 스타덤에 올랐다. 대중들은 이 새로운 록 밴드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고, "록 음악의 쇠퇴설"은 어느 순간에 자취를 감춰버린다. 영국에서는 훗날 너바나와 함께 90년대 최고의 록 밴드로 기록될 라디오헤드가 시애틀 그런지의 영향을 받아 데뷔 앨범 Pablo Honey를 발표했으며, NME 등 영국 인디씬은 그런지 열풍에 대항해 국가단위로 블러, 오아시스 등의 브릿팝을 육성해냈으며 펑크 록이 네오 펑크로 부활했고 그런지의 큰 인기는 포스트 그런지가 이어갔다. 순식간에 수많은 록 음악의 하위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메탈 역시 이에 반응해 시대에 밀려난 기존 메탈을 대신할 얼터너티브 메탈, 뉴 메탈과 같은 하위 장르들이 탄생했으며 이에 맞서는 기존 메탈 층에서는 데스 메탈, 블랙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이 부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들 기존 메탈 장르는 뛰어난 음악적 성과를 얻기는 했으나 대중적인 지지는 얻지 못하고 과거의 예측대로 듣는 사람만 듣는 매니악한 장르로 남았다.[17] 반면 얼터너티브 록은 '얼터너티브'라는 모호한 용어 아래에서 기존의 관습적인 록 장르를 거부하고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여 새로운 음악의 흐름을 창출해냈으며, 여기에 더해 대중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음악적, 상업적으로 다시금 록 음악을 도약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얼터너티브 록 혁명은 다른 장르에도 영향을 끼쳐, 주류 팝 시장은 잠깐 주춤하며 인디 음악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되었고, 일렉트로닉 음악은 이들의 실험을 받아들여 또다시 변화했으며, 힙합은 JAY-Z가 언급했듯이 얼터너티브 록의 부흥으로 인해 성장을 멈추고 '잠시' 기다려야 했다.

너바나의 성공으로 촉발된 얼터너티브 록은 향후 20년에 걸쳐 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다른 모든 장르들이 그랬듯 시간이 지나며 쇠퇴했다.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 다시금 록의 위기론이 부각되고, 각종 음악 매체와 음반사와 록 팬들은 여러 록 음악 장르 열풍 등을 일으키며 다시금 너바나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나름의 음악적 성과들을 올렸지만 모두 1991년의 "Nevermind" 신드롬을 재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흑인 음악과 일렉트로닉 음악의 양적, 질적 성장에 밀려 2020년대 이후 록 음악은 사실상 대중음악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었다. 80년대 후반의 비관적 예측은 결국 수십 년의 세월 뒤에 현실화된 것이다. 그러나 너바나는 이 결과를 적어도 수십 년은 미루는 데 성공했다. 너바나가 "인기의 절정기에 자살한 젊은 록스타"라는 사연으로 인해 거품이 끼었다고 주장하는 평론가도 있지만, 동시에 많은 평론가들이 "너바나가 없었다면 록 음악은 1980년대를 끝으로 수명을 마치고 과거의 유물로 남았을 것"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너바나가 이룬 얼터너티브 록 혁명은 록의 최후의 전성기 혁명이었으며, 당시와 이후에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킨 록 역사에 남을 황금기이기도 했다.

또한, 너바나의 파급력은 록 음악을 넘어 패션, 예술 전 분야에 자극을 주었다. 당대 모든 젊은 이들의 대변자와도 같은 커트 코베인 특유의 패배주의는 당시의 행동양식을 상징하던 것이었다. 과도한 레이어드 패션과 카고바지, 구겨진 핏 등이 너바나의 영향을 받은 패션으로 2017년 즈음 부터 유행한 홍대 힙스터들의 시그니쳐 패션인 딘드밀리룩도 그 중 하나다. 비록 록 음악은 현대 메인스트림에서 사라졌지만 요즘은 오히려 힙합 뮤지션들에게 너바나, 커트 코베인의 에디튜드가 우상시되고 있다.

새로운 음악적 조류 그 자체를 상징하며 대중음악사에 또 다른 한 획을 그은 밴드라는 것을 증명하듯 2020년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리스트의 개정이 있었는데, 록 씬의 쇠퇴를 반영하며 기존 록 앨범들의 순위가 대폭 하락한 반면 너바나의 앨범들은 오히려 순위가 상승했다. 특히 Nevermind는 17위에서 6위까지 순위가 상승했다.


6. 디스코그래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너바나(밴드)/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nirvana-logo.png
너바나의 스튜디오 앨범 목록

순서
이름
발매년도
프로듀서
레이블
1
Bleach
1989년
잭 엔디노
Sub Pop
2

1991년
부치 빅
DGC
3
In Utero
1993년
스티브 알비니
DGC


7. 이야깃거리[편집]


이 밴드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가의 문제에 의견이 갈리고 있다.

우선 'Nirvana'에 대해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라고 읽고, 힌두권에서는 '니얼바나', 미국에서 부를 때는 '니어버너' 와 '너배너' 두 방식으로 나뉜다. 참고로 영어 사전 발음은 이렇다. '니얼바나'를 빨리 발음하면 미국식 발음과 비슷해지긴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너바나'라는 표기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너바나 멤버들 역시 '너바나'(너봐나)로 발음한다.

한편 다른 의견으로는, 대표적으로 배철수가 'Nirvana'를 '니르바나'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며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Nirvana의 노래가 신청곡으로 들어오면 '니르바나'라고 발음한다.

한편 중국어로는 열반악대(涅槃樂隊/涅槃乐队)라고 표기한다.

너바나는 오아시스, 라디오헤드 등 1990년대의 여느 얼터너티브 록밴드와 마찬가지로 선대 밴드의 영향을 크게 받은 밴드중 하나이다. 커트 코베인 역시 여러 록밴드의 팬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영국의 펑크 록 밴드인 섹스 피스톨즈를 좋아해서 Nevermind의 앨범 이름도 섹스 피스톨즈의 1집에서 따 왔다. 또한 영국의 록밴드인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았고[18], 데이브 그롤러시의 2112 앨범에서 영향을 받은 바 있다. 또한 그렇지 않은 록밴드가 어디있겠냐만은 너바나 역시 비틀즈의 광팬으로, Nevermind 제작 당시 화이트 앨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92년 1월 10일, 너바나는 SNL에 뮤지컬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노보셀릭과 그롤, 그리고 코베인은 공연이 끝나고 입을 맞추었다. 이는 주류 문화를 비판하며 동성애를 지지함을 표시하는 행동이었다. 또한 영국 BBC음악 방송 탑 오브 더 팝스에 나와서 대규모 깽판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당시 연주 및 보컬 모두 립싱크핸드싱크를 해달라는 방송사 요청을 거부하면서 출연조건을 조정하다 결국 연주는 MR로 대체, 노래는 라이브로 부르는 것으로 절충하여 공연했다. 방송사 측에서는 "그 정도 쯤이야..."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나, 너바나는 BBC 엿이나 먹어라라며 방송시 누가 봐도 MR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말도 안 되는 포지션을 취하며 연주했다. 손바닥으로 기타연주하기, 요가(?) 드럼, 아크로바틱하게 휘두르는 베이스에 묘기급 점프 등, 거기다 똘끼 폭발한 커트가 보컬톤을 극도로 낮춰 부른 것도 이러한 의도의 연장선이었다. 심지어 가사까지 정신나간 개사[19]를 하면서 슬슬 이상함을 알아차린 팬들이 무대에 난입하고 멤버들이 난입한 팬들과 신나게 뛰어놀며 쇼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의 록 매거진에서 가장 반항적인 락 퍼포먼스 베스트 10에 선정하기도 했다. 당시 커트 코베인 본인은 모리세이의 모창을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이 퍼포먼스는 커트 코베인 마이크 먹는 영상으로 유명세를 더욱 탔다.

마블의 영화 캡틴 마블 중간에 너바나의 Come as You Are이 나온다. 또한 노트에서 nirvana라고 적힌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너바나 뿐만 아니라 의 'celebrity skin' 등도 영화 중간중간에 나온다. 이유는 영화가 90년대 배경이기 때문이다. 유로비트로 가득찬 이니셜D의 오락실 게임버전 중 하나인 이니셜D 아케이드 스테이지 5에 있는 수록곡 중 'Sweet sixteen girl'에도 너바나가 언급[20]된다. DC의 영화 더 배트맨에서는 너바나의 'Something In The Way'가 메인 O.S.T. 이다.

디시인사이드 유저가 번역한 정규 앨범 2,3 집 가사.

만화 블리치로 유명한 만화가 쿠보 타이토가 너바나의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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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인치 LP 싱글이며, B면에는 Big Cheese가 수록되어 있다.[2] 리더 커트 코베인의 사망으로 해체.[3] 이를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메인스트림을 노리지 않았던 인디 지향적 성향의 너바나가 정작 메인스트림의 커다란 환호와 지지를 얻은 것에 밴드 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커트 코베인은 큰 혼란을 겪었고, 이는 그의 자살 이유들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였다.[4] "We repelled the mainstream. And see, there’s one thing you have to remember about Nirvana, is Nirvana didn’t go to the mainstream, the mainstream came to Nirvana. And that was our big crisis." ㅡ Krist Novoselic at Nirvana‘s 2014 Rock and Roll Hall of Fame Induction[5] 다만 서구권에서 nirvana는 19세기 서구 철학자와 지성들의 오해 탓에 '완전 소멸' 내지는 '완전한 자살' 정도의 허무주의적 의미로 오용되는 일이 많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열반원칙(nirvana principle)도 이러한 오해의 한 사례다. 물론 우연이겠지만, 코베인의 최후와도 맞물리는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6] 당대의 록의 메인스트림은 LA 메탈을 필두로 하는 팝 메탈(혹은 글램 메탈)이었다. 다만 이들은 상업성이 짙어져 (국내에선 록발라드로 알려진) 파워발라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고 매너리즘에 빠져 비슷비슷한 밴드들이 양산되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너바나를 비롯한 시애틀그런지 록그린 데이, 오프스프링 등의 네오 펑크/팝 펑크가 등장하면서 헤비 메탈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80년대 메탈 팬 중에는 너바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80년대 메탈 역시 상업성에 찌들긴 했지만 반면에 이러한 상업성이 짙어가는 메탈 음악의 장르의 한계를 타파하고자 좀 더 연주와 작곡의 방식이 테크니컬 해진다던지, 클래식,민속음악,블루스,재즈등 타 장르의 음악적 요소와 기법을 흡수하는 등, 장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타파하려 노력했지만, 어디까지나 음악 장르의 틀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였기 때문에, 너바나처럼 시대의 아이콘이 될정도로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까지 끌어내지는 못했다. 혹자들은 너바나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현대의 록은 일반인이 듣기엔 복잡하고 진입장벽이 높아져 마치 클래식과 같은 장르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7] 실력파 기타리스트들은 널렸고 널렸지만 커트가 원하는 느낌을 내줄 수 있는 기타리스트를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8] 1959년생이다.[9] 이 밴드의 보컬인 '다비 크래시'는 1980년 12월 7일에 자살했는데, 그의 자살 소식은 락계에서 한동안 묻혀질 수 밖에 없는 불운을 맞아야 했다. 하필이면 자살한 다음날에 존 레논마크 채프먼이 쏜 총탄에 맞아 죽었기 때문.[10] 너바나가 팻 스미어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나이가 좀 있던 상태였는데, 이 때 너바나의 반응은 "와! 팻 스미어다! 아직 살아있네??"였다고 한다. 알다시피 그런지나 펑크 쪽 뮤지션들은 특유의 막장스런 삶 때문에 단명했던게 대부분.[11] 커트 코베인이 입은 티셔츠를 잘 보면 'corporate magazines still suck(돈만 밝히는 잡지들은 여전히 X같다)'라고 쓰여있다.[12] 일반적으로 대형 스타들의 음반 판매량이 꼭 당대의 음악적 조류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폴 매카트니밥 딜런의 신보가 차트 1위를 해도 현대 대중음악의 주류가 비틀즈팝 록이나 고전 포크 록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1990년대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앨범은 샤니아 트웨인의 "Come On Over"지만 그렇다고 90년대가 컨트리 팝의 시대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특히나 메탈리카, 본 조비와 같이 이미 정상에 오른 지 오래되었고 팬덤이 탄탄하게 형성된 뮤지션들은 설령 음악 시장이 급변해도 인기에는 별 영향이 없다. 실제로 이들은 너바나의 성공과 얼터너티브 혁명 이후에도 상업적으로는 여전히 대단한 판매량을 유지했다. 메탈리카는 심지어 그 St. Anger조차도 200만장을 넘게 판 밴드다[13] 그리고 건즈 앤 로지스는 글램 메탈 유행에 맞춰 데뷔했지만 음악적으로는 정석적인 글램 메탈과는 좀 차이가 있는 밴드였다.[14] 물론 오늘날이라고 이런 비판점이 완전히 해소된것만은 아니다. 어뷰징(음원) 문서 참고.[15] 대표적으로 폴라 압둘의 빌보드 1위곡 The Promise of a New Day가 실제 판매량에 비해서 순위가 지나치게 높게 잡혔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가수의 인기는 충분히 높긴 했지만, 닐슨 사운드스캔 집계 시스템으로 산정된 판매고는 크게 높은 곡은 아니었다는 이야기.[16] 이 업체는 후일 빌보드에 판매량 자료를 제공하는 협업으로 거듭나기도 한다.[17] 이 장르들이 얼마나 마니악한지 알려주는 사례가 있다. 데스 메탈의 레전드이자 장르의 창시자로 꼽히는 데스의 주축 멤버 척 슐디너는 뇌종양에 걸렸음에도 치료 받을 이 없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한 장르의 레전드라 꼽히는 아티스트였음에도 어지간한 인디 뮤지션보다 돈을 못 벌었다는 소리다.[18] 너바나의 첫 번째 라이브 공연에서는 아예 레드 제플린의 여러 곡들을 커버하였고, 멤버들도 레드 제플린의 곡들을 커버하면서 악기 연주 실력을 길렀다고 한다.[19] 첫 소절부터 "Load up on drugs and kills your friends" (약빨고 친구들을 죽여)로 바꿔서 부른다. 가사를 듣고 관객들이 what?을 외치며 당황한다.[20] 가사중 Radio plays Nirvana라는 부분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