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령 동인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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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도래
3. 동인도 회사령의 확장
3.1. 회사령 동인도
3.2. 회사령 인도
3.3. 동인도 회사의 몰락
4. 프랑스와 영국의 통치
5. 네덜란드 직할 통치와 강제 재배 제도
5.1. 사회사: 노예제의 사례
6. 과도기: 자유주의 시대
7. 윤리정책 시대
7.1. 초기 민족주의
7.1.1. 부디우토모
7.1.2. 동인도당
7.1.3. 이슬람연합
7.2. 인민참사회 창설
7.3. 토착민 정파의 발달
7.4. 유럽계/혼혈 민족주의
7.5. 수타르조 청원
7.6. 태평양 전쟁과 총독의 항복
9. 네덜란드의 사죄와 관계 개선 노력




1. 개요[편집]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역사를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하는 문서. 본 문서의 참고 문헌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문서와 공유한다.


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도래[편집]


네덜란드는 16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 활동하였다. 1590년대 네덜란드에서 아시아 교역을 시도하려는 회사들[1]이 다수 설립되었다.

1602년 3월 20일 이들을 통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귀금속과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동인도 제도에 진출하였고 바타비아를 수도로 삼았다. 1605년 포르투갈로부터 암본을 탈취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후 동아시아의 향신료(후추, 정향, 육두구 등)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토대 마련에 주력하였는데, 이 중 특히 육두구 열매에서 얻는 육두구메이스의 경우, 18세기 중반까지 오직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에서만 재배되었다. 1616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반다 제도의 룬섬(Run island)을 점령한 이후, 세계시장에서 육두구는 근 150년 동안 네덜란드가 독점한 것이다.

얀 피터르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총독[2] 재임기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경영의 구체적 지침이 마련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본국에서 원조해주는 대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아시아 내의 교역으로 얻은 이윤을 바탕으로 식민지 경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론은 아시아에서 교역 확장을 노리고 있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진출하기 약 100년 전에 진출하여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경쟁국들 외에도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도 있었다. 쿤 총독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을 공격하였다. 1619년 쿤 총독과 네덜란드 군대는 영국 동인도 회사 및 이들과 연합해 일시적으로 네덜란드와 반목했던 지역의 반튼 술탄국 군대를 몰아내고 반튼의 유력한 무역항 자야카르타(Jayakarta)를 획득, '바타비아'(Batavia)로 개칭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1623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나친 경쟁으로 말미암아 암보이나 학살사건이 발발하였다.

토착 세력도 네덜란드의 위협 요인이었다. 17세기 초에 술탄 아궁[3]의 시대에 황금기를 맞고 있던 중부 자바의 마타람 술탄국수라바야를 점령하는 등 동부 자바를 평정하고, 자바섬을 통일할 기세로 서진하고 있었다. 술탄 아궁에게 수라바야를 지원했던 네덜란드 세력은 눈엣가시였고, 이윽고 마타람의 군대가 두 번에 걸쳐 바타비아를 포위 공격하게 된다(1628, 1629).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쿤 총독의 지휘 하에 완강하게 버텨낸다.

1641년, 네덜란드는 경쟁국이었던 포르투갈을 말라카에서, 스페인타이완섬 북부에서 축출하였다.[4] 이 무렵 네덜란드는 대략 20여 곳의 상관들을 차지하고 그곳들을 연결하는 교류망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외에도 북술라웨시의 마나도에 암스테르담 요새를 건설(1658)하였으며 솔로르섬의 포르투갈 요새를 점령(1636)하고[5] 17세기 동안 티모르섬에서도 포르투갈의 세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3. 동인도 회사령의 확장[편집]


이하에서 '회사령 인도'(네덜란드령 인도)는 동인도 지역과 겹치지 않지만, 인도에서 동인도에 걸쳐 있던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 세력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동인도에 국한되었는지를 서술하는 차원에서 함께 서술한다. 추후 네덜란드령 인도가 별도 문서로 분리될 경우 삭제할 필요가 있다.

3.1. 회사령 동인도[편집]


17세기 중반 동남아시아에서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 세력은 기존의 스페인, 포르투갈 세력을 말레이 반도, 술라웨시섬, 말루쿠 제도에서 축출했고 자바섬에도 바타비아라는 확실한 교두보를 얻었지만, 네덜란드 세력은 이베리아계 세력을 결국 완전히 동남아시아에서 몰아내지는 못했다.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초부터 여러 번 필리핀의 스페인 세력을 공격하였지만 육상전, 해상전 모두 패배하였다. 특히 1646년의 마닐라 해전에서는 스페인 함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함대 전력을 가지고도 네덜란드 함대가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포르투갈 세력도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플로레스섬 등 소순다 열도의 동부 도서를 보유하였고, 티모르섬에서도 네덜란드와 섬의 분할을 놓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었다. 토착 세력을 상대로 한 원정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는데, 가령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43–1644년간 진행된 캄보디아와의 소규모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영영 캄보디아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동인도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바섬에서는 신중하게 세력 확장의 기회를 잡았고, 연이어 군사적,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7세기 중반, 자바에서 가장 강성한 마타람 술탄국이 군주 아망쿠랏 1세의 실정으로 내분 상태에 빠졌고, 이를 주시하던 자바 서부의 반튼 술탄국이 마타람의 세력권을 잠식하던 와중 마타람에 치명적인 트루나자야 봉기(1674–1681)가 일어났다. 트루나자야 반란군에 패퇴하고 수도를 빼앗긴 아망쿠랏 1세는 그나마 자바에 이해 관계가 적은 외부 세력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구원 요청을 보냈으며, 동인도 회사는 이에 응하여 반란군에 승리를 거두고 마타람의 내정에 개입하며 1670년대 말 마타람으로부터 자바 서부 영토를 획득하였다. 비슷한 일이 1680년대에 이번에는 반튼 술탄국에 일어났는데, 술탄과 왕자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왕자의 편으로 개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승리하고 1687년까지 반튼 술탄국을 보호국화하였다. 강성한 마타람은 즉시 동인도 회사보호국이 되지는 않았으나, 18세기에 세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며 서서히 자바의 외곽 영토를 전쟁에 개입한 동인도 회사에 빼앗기다가 18세기 중반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49–1757)의 결과로 결국 남은 영토마저 네덜란드 산하 번왕국들로 분리되었고, 각각의 번왕국은 보호국화되었다.[6] 반튼 술탄국은 보호국 위치로 존속하다 1813년에 해산되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수마트라섬보르네오섬에서도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비록 이 시기에 대체로 내륙으로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해안 도시를 거점으로 한 지역의 여러 부유한 국가를 영향권 아래로 편입하고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자바의 반튼 술탄국을 굴복시킴으로써 반튼 산하에 있던 수마트라 남부 람풍의 후추에 대한 처분권을 얻었으며, 보르네오 남부의 후추 무역을 통제하던 반자르 술탄국도 18세기 중반과 후반을 거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간섭하여 보호국화하였다. 수마트라 북동부에서도 아체 술탄국과 경쟁하며 아체 산하에 있던 들리 술탄국 등을 영향권으로 편입하며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3.2. 회사령 인도[편집]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인도 아대륙에도 상관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7세기 초부터 인도에 진출하여 인도 남동해안인 코로만델 해안에 네덜란드령 코로만델을 확보한 네덜란드 세력은 17세기 중반 포르투갈 세력이 전체적으로 약화되어 가던 시기에 인도양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스리랑카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어, 1658년 포르투갈 지배 하에 있던 포르투갈령 실론의 수도 콜롬보를 점령하고 포르투갈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관리하는 네덜란드령 실론이 현대 스리랑카의 서부 절반 지역[7]에 성립되었다. 스리랑카 식민지를 확보한 기세를 몰아 네덜란드 세력은 인도 남서해안인 말라바르 해안에도 진출하여 1661년 포르투갈령이었던 콜람[8] 항구를, 1662년 코친[9] 항구를 빼앗아 네덜란드령 말라바르를 창설하였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네덜란드의 군사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았는데, 1638년 포르투갈령 고아에 대한 네덜란드 함대의 공격은 큰 피해를 입고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인도 식민지는 앞 문단에 열거한 네덜란드령 실론, 네덜란드령 말라바르, 네덜란드령 코로만델 외에 소규모로 유지된 북동부의 네덜란드령 벵골과 북서부의 네덜란드령 구자라트도 있었다. 스리랑카를 제외한 인도 본토의 회사령은 이주와 장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가 아니라 상업적 목적의 상관과 공장 지대였고, 항구 도시의 연결망을 기반으로 유지되어 인도양에서 회사령 케이프 식민지[10]와 회사령 동인도를 잇는 무역로의 중간 거점 역할을 하였다.

네덜란드령 말라바르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코친을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토착 왕국과 세력 경쟁을 벌이며 내륙으로 확장하려 시도하였던 적은 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18세기 중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말라바르 해안의 토착 세력 트라방코르 왕국에 대해 후추 무역 독점권에 대한 알력으로 트라방코르–네덜란드 전쟁(1739–1741)을 일으켰는데, 초기에는 네덜란드군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1741년 8월, 식민지 전쟁으로서는 매우 큰 동원 규모인 네덜란드군 6,000명(유럽인 2,400명) 병력이 트라방코르군 12,000명–15,000명가량과 벌인 콜라첼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쟁은 동인도 회사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이 패전으로 인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동인도 회사는 트라방코르군에 크빌론(콜람)을 빼앗기는 상황마저 우려하게 되었다. 이듬해 네덜란드가 말라바르 해안에서 아팅갈(Attingal) 인근의 작은 항구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네덜란드가 인도 본토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없었다.

트라방코르와 네덜란드 세력 간 긴장은 콜라첼 전투 후 일시적 휴전이 합의된 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이때 네덜란드 영향하 콜람의 군주가 독자적으로 트라방코르와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일시 이탈하기도 했다. 1740년대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 세력은 한때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고, 실제로 트라방코르군이 네덜란드 영향하의 콜람을 공격하였는데(1742년 6월), 네덜란드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은 지역 영주는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여 막아냈다. 트라방코르 군주는 나아가 네덜란드 지배하의 코친을 공격하는 계획까지 입안하였으나 착수에 이르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와 트라방코르 간에는 콜라첼 전투 수준의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저강도 분쟁이 계속 이어졌고, 꾸준히 평화 협정을 위한 협상이 있었으나 계속해서 궁극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말라바르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이에 착종된 네덜란드의 이권 때문이었다. 이 상황은 1740년대 내내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의 후추 무역을 방해해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11]

결국 1753년 8월 15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트라방코르 왕국의 군주 마르탄다와르마 간 마웰리카라(Mavelikkara) 조약이 체결되어 양 세력의 대립이 종식되었다. 이로 인해 말라바르 해안에서 네덜란드 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좁아졌고, 이후 네덜란드 식민 제국은 인도에서 정치적 내리막길만을 걷게 된다.

3.3. 동인도 회사의 몰락[편집]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경제적 영향력은 18세기 중반부터 정체되었다. 이는 특정한 단일 요인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여러 가지 원인을 종합해서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면 당시 인도양 해양 무역 자체가 전반적으로 하강세였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17세기의 성공에 안주하여 제도 개혁에 보수적이었으며, 아시아 전역의 동인도 회사 주재지에서 부패가 만연했고, 여러 교역품에 대한 동인도 회사의 독점이 내외 요인으로 깨졌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 인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세력 확장은 완전히 멈추었던 반면, 경쟁 세력인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고 그들의 노하우를 흡수하여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갔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경제적 이득의 주요 원천인 향료 제도의 정향, 육두구 독점만큼은 지키려고 끝까지 노력했으며, 경쟁국에서 종자를 탈취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통제했다. 1735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육두구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팔리지 않은 수 톤의 육두구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향료 독점은 결국 18세기 중반에 깨졌다. 1750년대 초에 프랑스의 피에르 푸아브르(Pierre Poivre)가 네덜란드의 감시를 뚫고 정향과 육두구 종자를 구해 모리셔스에서 재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몇 년 후 푸아브르의 제자 마티외 시몽 프로보스트(Mathieu Simon Provost)는 향료 제도에서 네덜란드의 통제 밖에 있던 섬을 중계지로 사용하여 정향과 육두구 종자를 구해서 도망치다가 네덜란드 감시선에 붙들렸는데, 운 좋게도 변명이 통해서 선박 수색을 피했다. 푸아브르와 프로보스트는 마침내 모리셔스(당시 지명은 일드프랑스Isle de France)에서 정향과 육두구의 재배에 성공했다. 특히 모리셔스에서의 육두구 재배는 18세기 후반 프랑스인들이 상당히 고된 노력을 투입한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12] 이어 정향과 육두구는 잔지바르, 마다가스카르, 카리브 제도 등지에서도 재배에 성공하여 18세기 말까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각지에 플랜테이션이 생겨났다.[13]

그래도 정치적으로 18세기 말까지 아시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식민제국의 세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으나, 동시에 다른 식민 세력인 영국 동인도 회사와의 경쟁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덜란드의 아시아 세력권은 영국과 충돌할 지점이 많았고,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4]과 겹치는 제4차 영란전쟁(1780–1784)에서 패배함으로써 영국 세력에 비해 네덜란드 세력이 상대적으로 열세라는 것은 명백해지게 되었다.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는 네덜란드령 실론의 트링코말리(Trincomalee)가 한때 영국군에 점령되기도 했다.

1770년대까지만 해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재정은 그럭저럭 체제 존속은 가능한 수준이었고, 여러 문제점에 대한 내부 개혁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패전으로 1780년대와 1790년대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극심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 혁명과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 본국이 프랑스의 침공을 받고 점령되어 1795년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프랑스 괴뢰국이 되었다. 내외의 압박으로 엄청난 경영난에 처한 동인도 회사는 1796년 3월 1일 새로 성립한 바타비아 공화국에 의해 국유화되었고, 이후에 회사 칙허(octrooi)가 몇 번 갱신되기는 하였지만 1799년 12월 31일 최종적으로 칙허가 만료되어 칙허 회사로서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기능을 종료하였다.

프랑스 점령에 따라 영국으로 도피한 네덜란드의 오라녀(오라녜) 공 빌럼 5세는 영국에 대프랑스 공동전선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큐 서한(Kew letters)으로 네덜란드령 인도 및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 행정관들에게 영국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인도와 동인도의 네덜란드령 식민지 상당 부분이 잠정적으로 영국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큐 서한에 따른 영국의 네덜란드 식민지 점령은 코친 등 일부 지역에서는 전투를 수반했으나 네덜란드령 인도에서는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말라카, 암본, 네덜란드령 수마트라[15] 지역에서도 비슷했다. 이외의 동인도 지역, 특히 자바와 마나도, 말루쿠 제도에서는 네덜란드 현지 식민 관료들이 영국의 통치를 즉시 받아들이지는 않았는데, 이런 지역은 네덜란드 본토의 바타비아 공화국을 종주국으로 하였다. 보르네오 남부(구 반자르 술탄국 속령)는 다소 특이한 경우로, 영국 세력은 큐 서한 이후 즉시 이곳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는 네덜란드 세력이 토착 세력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저자세를 유지하다 결국 세력권 유지를 포기하고 1809년 자발적으로 철수했고, 1811년 영국이 자바를 접수하자 함께 진입해 구 네덜란드령을 점령하였다.

4. 프랑스와 영국의 통치[편집]


나폴레옹 1세는 1806년 네덜란드 지역에 괴뢰국 홀란트 왕국(네덜란드어: Koninkrijk Holland, 프랑스어: Royaume de Hollande)을 세우고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홀란트 국왕 로데베이크 1세로 임명하였으며, 이에 따른 인사 조치로 1808년 장군 헤르만 빌럼 단덜스를 동인도 총독으로 임명하여 자바로 보낸다. 단덜스는 영국군의 위협에 대비해 동인도에서 방비를 강화하였다. 단덜스 시기에 병력과 물자의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홀란트 국왕 로데베이크 1세의 명으로 자바 서부의 아냐르(Anyar, Anjer)에서 자바 동부의 파나루칸(Panarukan, Panaroecan)까지 자바를 동서로 관통하면서 자바의 주요 대도시를 연결하는 약 1,000km 길이의 자바 우체부길(네덜란드어: De Grote Postweg, 인도네시아어: Jalan Raya Pos)[16]이 건설 및 개통되었다. 자바 우체부길은 오랜 기간 자바의 물류 대동맥 역할을 하였으며, 나중에 자바 북부해안도로(Jalur Pantai Utara)로 보수 및 확장되어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다. 그러나 단덜스는 우체부길 건설 과정에서 현지인 인부들을 강제로 징집하거나 토착 세력에 강압적으로 노동력 제공을 명령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토착 세력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강제력을 행사하여 목적을 관철하였다. 이렇게 동원된 현지인 인부의 노동 환경은 극히 열악하였고, 질병 등 여러 요인으로 결국 수천 명의 인부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17]

이 외에도 단덜스 재임기에는 바타비아에 새로운 군사학교가 세워졌고 안토니오 판디먼(Antonio van Diemen, 동인도 총독 재직 1636–1645) 시절에 완성되어 150년 이상 쓰였던 노후화된 바타비아 성채가 헐리고 바타비아에 새로운 성채가 지어졌으며, 바타비아의 행정 중심지도 17세기부터 쓰였던 구시가지(네덜란드어: Benedenstad, 인도네시아어: Kota Tua) 지역에서 벨테브레던(Weltevreden, 오늘날의 감비르Gambir 지역)으로 옮겨졌다. 수라바야스마랑에는 새로 무기 공장이 지어졌다. 1810–1811년, 자바 중부에서는 토착 귀족 라덴 롱가 프라위라디르자(Raden Rongga Prawiradirja)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네덜란드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라덴 롱가의 반란 와중 라덴 롱가와의 공모 혐의를 산 욕야카르타 술탄 하믕쿠부워노 2세(1750–1828, 재위 1792–1810, 1811–1812, 1826–1828)를 겨냥해 단덜스의 네덜란드군이 1810년 12월 욕야카르타를 침공, 점령함으로써 술탄을 퇴위시키고, 아들 하믕쿠부워노 3세(1769–1814, 재위 1810–1811, 1812–1814)를 새 술탄으로 옹립하였다.

단덜스는 1811년 새 총독 얀 빌럼 얀선스로 교체되었으나[18], 얀선스가 자바에 도착한 직후 프랑스 제국과 대립하는 영국이 결국 함대를 보내 자바를 점령하고야 만다. 영국은 1816년까지 자바를 통치하였고, 이 시기 영국령 자바(British Java)의 총독직은 1811년 점령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길버트 엘리엇머리키닌마운드(Gilbert Elliot-Murray-Kynynmound, 민토 백작)가 임명한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가 맡게 된다.[19]

새로이 자바에 들어온 영국 세력은 당시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하며 존속하던 자바의 토착 세력 욕야카르타 술탄국과 수라카르타 수난국의 반발을 샀는데, 영국을 이용해 1811년 12월에 아들 하믕쿠부워노 3세에게서 술탄위를 되찾은 노술탄 하믕쿠부워노 2세는 술탄위를 되찾자마자 영국에 공공연히 적대감을 드러냈고, 수라카르타 수난 파쿠부워노 4세(1768–1820, 재위 1788–1820)는 욕야카르타와 영국 간 분쟁을 일으켜 욕야카르타를 약화시키려고 했다. 이에 래플스는 우선 자바를 안정화해야겠다고 판단하고, 1812년 6월 영국령 인도군 1,200명을 파견해 욕야카르타의 궁성을 공격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대비가 되지 않았던 욕야카르타 궁정인들은 거의 무저항으로 포로가 되었고, 술탄의 근위 창병대만이 미약하게나마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욕야카르타를 점령한 영국군은 이곳저곳을 약탈하고 파괴하였는데, 특히 호화로웠던 타만 사리는 이때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20]

래플스는 반항적인 노술탄을 폐위하고 하믕쿠부워노 3세를 복위시킨 후, 군권(상징적인 근위병 제외)과 외교권을 빼앗아 욕야카르타를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고 욕야카르타에서 그로보간, 크두, 지팡 등을 빼앗아 영국 직할령으로 편입하였으며, 욕야카르타의 영토를 쪼개어 파쿠알라만 공국을 창설하고 래플스에게 협력한 나타쿠수마 공(하믕쿠부워노 1세의 아들)을 초대 파쿠알라만 공작 파쿠 알람 1세(재위 1813–1829)로 즉위시켰다. 이 조치들은 이후 네덜란드가 자바에 귀환한 후에도 철회되지 않았다. 래플스는 수라카르타 역시 공격하려고 했지만, 이 계획은 수라카르타가 영국에 대놓고 반발하지는 않아 무산되었다. 영국군은 두 왕국의 영역에서 도로와 시장 등을 점거하고 토착 세력이 영국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하였다. 안정화된 영국령 자바에서는 래플스 주도로 행정 개혁이 이루어진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식민지를 네덜란드에게 반환하는 희한한 선택을 했는데, 땅욕심이나 힘이 없어서는 아니고, 유럽 외교가에서 '나폴레옹 이전으로의 회귀' 열풍이 불었던 탓에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다.

5. 네덜란드 직할 통치와 강제 재배 제도[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한 전후 네덜란드는 다시 독립하였으며, 영국으로부터 동인도 및 인도 식민지를 돌려받고 경영에 열의를 보였다. 구체적으로, 큐 서한으로 영국에 잠정적으로 넘어갔던 네덜란드령 인도는 1814년의 영국–네덜란드 조약으로 일부(네덜란드령 실론과 네덜란드령 말라바르)를 제외하고 네덜란드로 반환되었고, 영국령 자바는 조금 뒤인 1816년에 네덜란드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전 영국과의 마찰 소지는 그대로인 채였으므로, 곧바로 영국과 아시아 식민지 세력권을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 영국령 자바가 반환된 후 잠시 본국으로 귀환했던 래플스는 1818년 영국령 벤쿨런(Bencoolen, 븡쿨루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수마트라 식민지로 1685년 설치)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동인도로 돌아왔다. 래플스는 지역의 정세를 읽고 조호르 술탄국의 내분을 틈타 조호르 술탄에게서 1819년 2월 6일 싱가포르를 받아 이곳에 새로이 무역항을 건설한 후, 싱가포르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여 븡쿨루와 싱가포르를 오가면서 지역에서 영국의 이권 확보에 주력한다.

래플스는 이 과정에서 아체 술탄국과 조호르 술탄국에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노력하였는데, 이것이 네덜란드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는 인근의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등지뿐 아니라 말레이 반도 지역에도 말라카(네덜란드령 1641–1795, 영국령 1795–1818, 네덜란드령 1818–1824)를 거점으로 하여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네덜란드–영국 대립은 새로운 전쟁으로 발전하지는 않고, 양국의 외교 교섭에 의해 절충안이 마련되어 182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이 체결된다. 이를 통해 인도 지역에 유지하던 네덜란드 식민지 네덜란드령 벵골, 네덜란드령 코로만델, 네덜란드령 구자라트가 영국으로 전부 양도되고, 믈라카를 비롯한 말레이 반도의 네덜란드 거점도 영국으로 양도된 반면, 븡쿨루 지역을 포함한 수마트라와 방카블리퉁 제도의 영국 식민지는 모두 네덜란드로 양도되었고, 리아우 제도와 수마트라섬(암묵적으로 아체 술탄국까지도 포함)에 대한 네덜란드의 세력 주장에 영국이 개입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양 식민제국의 세력권이 확정되고 영국–네덜란드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네덜란드는 이때 네덜란드령 인도를 완전히 상실함으로써 보유한 유일의 아시아 식민지인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관리 역량을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825년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왕자 디파나가라(인도네시아어: Pangeran Diponegoro)가 반란을 일으켜 디파나가라 전쟁(1825–1830)이 발발하였다. 영국령 인도세포이 항쟁과도 비견되는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수라카르타 수난 파쿠부워노 6세, 욕야카르타 술탄 하믕쿠부워노 2세 등이 비협조적인 가운데, 힘겹게 승리하고 디파나가라 왕자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시기 유럽에서는 급박한 정세 변화로 벨기에 혁명(1830년 8월)이 일어났고, 이에 따른 벨기에 독립 전쟁과 시기적으로 맞물린 동인도 자바 전쟁 양측의 전비와 후처리 비용을 충당하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어 네덜란드는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요하네스 판덴보스(Johannes van den Bosch, 1780–1844, 총독 재직 1830–1833, 네덜란드 헤르베이넌 출생)는 공식 명칭으로 '경작 체계'(네덜란드어: Cultuurstelsel, 인도네시아어: Sistem Kultivasi)로 불리는 강제 재배 제도(인도네시아어: Sistem Tanam Paksa)를 시행하였다. 강제 재배 제도는 식민지 농민들에게 강제적으로 국제 상품작물(차, 커피, 담배, 사탕수수, 쪽 등)을 당시 동인도 식민지의 핵심부인 자바섬에서 대대적으로 생산시켜 본국에 독점적으로 판매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를 위해 농민은 농토의 일정 면적(1/5 이상)을 상품작물의 재배에 할당해야 했고, 자기 소유의 농토가 없는 영세농의 경우에는 1년에 60일 이상 동인도 식민 정부가 운영하는 플랜테이션이나 정부 소유의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상품작물 재배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농민들은 행정적으로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아 허가 없이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지도 못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본국은 이렇게 경작한 작물을 헐값에 사들여 유럽에 판매함으로써 급속히 재정을 회복하였다.

반면 강제 재배 작물을 위해 자신들의 농토 일부를 할당하거나 1년 중 60일 이상을 식민 정부를 위해 노동해야 하는 식민지인들은 작물을 거의 수탈에 가까운 헐값에 팔거나 노동력을 착취당해야 했고, 강제 재배 작물로 인해 주식인 쌀 재배 면적이 급속히 줄어들어 식량난이 발생했으며 식민지 농민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위에 적힌 '농토의 1/5 이상'이나 '60일 이상의 노동력 제공'은 이론상의 최저 조건이었을 뿐, 제도가 실제 적용되자 이보다 훨씬 많은 비율의 농토가 상품작물 재배지로 전환되는 경우도 흔했고, 플랜테이션에서 1년에 60일을 훌쩍 넘기도록 일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21]

강제 재배 제도는 이러한 부작용 때문에 식민지 농민들의 강한 저항을 유발하였고, 본국의 지식인과 중산층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1860년 출판된, 물타툴리라는 필명을 사용한 에뒤아르트 다우어스 데커르(Eduard Douwes Dekker)의 《막스 하벨라르》 (Max Havelaar)라는 부패한 동인도 식민정책 하에서 고통받는 식민지인의 현실을 묘사한 고발문학이 있다.[22] 이에 따라 강제 재배 정책은 서서히 축소되다가 네덜란드 본국의 재정이 회복되고, 네덜란드 본국의 의회 정치에서 자유주의자들이 확실한 우세를 점한 시기인 1870년, 동년 제정된 농업법(Agrarische wet)과 설탕법(Suikerwet)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네덜란드는 회복된 재정을 산업혁명에 투자하면서 재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더불어 동인도의 행정, 군사 역량이 집중되었던 자바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재정이 회복되자 신제국주의 시대에 발맞추어 1846년의 발리 원정을 시작으로 약 60년에 걸쳐 다시 팽창 정책을 펼쳐, 아직 완전히 식민지화되지 않은 수마트라 서부와 북부, 보르네오 남부, 술라웨시 남부, 소순다 열도 등에서 토착 세력을 굴복시키고 포르투갈의 소순다 열도 식민지를 매입하는 등 동인도의 지배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네덜란드는 20세기 초까지 뉴기니섬 서부 마노콰리(Manokwari, 1898), 므라우케(Merauke, 1902) 등의 일부 항구에 처음으로[23] 항구적인 식민 정청을 설치하고 아체 전쟁(1873–1904)과 마지막 발리 원정(1908)을 종결지음으로써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일대를 아울러 거대한 식민지를 완성하였다.

지배자인 네덜란드 입장에서 주민 다수가 믿는 종교인 이슬람교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 종교 자체를 그냥 억눌러 통치한다면 대부분의 주민들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주민들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것이고, 무관심한 채 내버려두면 종교가 정치 세력화되어 네덜란드에 독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측은 이슬람을 보편적인 신앙으로 인정하고, 무슬림 지배자 및 행정관의 지역 통치와 현지 이슬람 관습의 수행에 심각한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으며[24], 이슬람에 정통한 네덜란드의 동양학자를 식민지 고문으로 등용하여 문화적으로 이슬람 이해를 도모하고 때로 동인도에 이슬람 성원을 지어 주는 등 이슬람에 호의적인 유화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세력은 이슬람의 정치화는 식민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보아 경계하거나 탄압했고, 서구식 교육을 점차 도입하여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걸쳐 토착민 엘리트를 이에 적응시켰고, 식민 정부는 이들에게 전통 이슬람 교육을 받은 토착민들보다 훨씬 폭넓은 출세 기회를 제공하였다.

5.1. 사회사: 노예제의 사례[편집]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비롯한 동인도 회사령 아시아 식민지는 17세기와 18세기에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주요한 노예 공급원이자 고용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연구하는 네덜란드 역사학자 마티아스 판로쉼(Matthias van Rossum)에 따르면, 17세기와 18세기에 배편으로 아시아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령에서 유출되거나 회사령으로 유입된 노예의 수는 적어도 66만에서 최대 113만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25] 전통 시대에 인도네시아 군도의 다양한 토착민 사회에서도 노예제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전쟁에서 패배한 세력의 포로가 승리한 세력의 노예가 되는 경우는 흔했다. 가령 남술라웨시 토라자인의 노예제 풍습은 널리 연구되어 있는데, 전통 시대에 토라자 사회에서 노예는 엄격하게 자유인과 구별되었으며, 토라자 노예는 자바나 시암으로 노예선을 타고 팔려 나갔다.

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에 만연한 해적들 역시 납치와 인신매매를 벌이며 노예 거래의 주요 중개자로서 활동하였다. 동남아시아에서 17–18세기에 해적에 의한 노예 납치 및 거래는 주로 말라카 해협 및 현대 필리핀 지역에 속하는 술루 제도민다나오섬 인근에서 벌어진 것이 유명하고 널리 연구되어 있지만,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에 속하는 보르네오–술라웨시 사이 마카사르 해협에서도 해적이 왕성하게 인신매매 활동을 수행하였다. 술루계나 민다나오계 해적이 보르네오 등지로 노예를 공급하기도 했다.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해적 활동과 인신매매는 19세기 중반에서 후반,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등 유럽 세력이 증기선 기술을 도입한 전투함으로 적극적인 단속을 벌일 때까지 해당 지역의 인신매매를 금하는 법률과 무관하게 왕성히 지속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노예제는 점차 인도주의에 따른 사회적 배척과 경제적 이유 등에 의해 사장되어 갔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에서 노예 무역은 1814년에 폐지되었지만, 노예 무역이 폐지된 후에도 노예를 불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인신매매 활동은 법망을 피해 유지되었다. 노예제는 바로 폐지되지 않고 한동안 유지되다가 1860년까지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26] 그러나 여러 사료에 따르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노예제 또는 노예에 준하는 인신매매는 공식적인 노예제 폐지 후인 19세기 말까지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27]

6. 과도기: 자유주의 시대[편집]


강제 재배 제도가 폐지된 1870년부터 1900년까지, 30년간의 시기를 동인도의 '자유주의 시대'로 분류하기도 한다. 19세기 후반에 네덜란드 본국 정치에서 우세했던 네덜란드 자유주의자들은 점차 식민지를 단순히 국가 이익을 위한 자원 수탈의 대상으로 보는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업과 개발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으로 보기 시작하였으며 동인도의 개발이 궁극적으로는 토착 동인도인에게도 이득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 시기의 동인도 식민지의 경제 정책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동인도에 이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인도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시대부터 자바섬을 중심으로 동인도에 철도망, 전신선, 은행, 신문 등 근대적인 기반시설을 도입하는 정책이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1873년 총연장 240km에 불과하던 동인도의 철도망은 1900년이 되면 1,900km에 달하게 되었다. 1869년 개통된 수에즈 운하는 상품의 유럽 운송에 걸리는 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였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여러 상품 작물 플랜테이션의 개발을 가속화해 이전에는 수지가 맞지 않아 보였던 변방의 섬들에까지 플랜테이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28]

그러나 운 나쁘게도 19세기 후반은 서구 각국이 보호주의적 정책을 강화하던 국제적인 장기불황(Long Depression, 1873–1896)의 시기였다. 특히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국제적 경기후퇴로 인해 국제 시장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주력으로 하는 여러 상품작물의 가격이 폭락하여 동인도에 빈곤이 만연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시대의 경제 정책은 본국의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이 의도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식민 정부의 정책에 편승한 네덜란드인 관리와 네덜란드인 및 화인 사업가, 동인도인 지주, 고리대금업자 등 자본 또는 대토지를 가진 상위 계층은 부를 누리고, 식민 정부의 정책에서 소외된 중·하층 농민들은 나아지지 않는 생활을 견디는 구조가 거의 바뀌지 않고 지속되었다.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동인도 토착민을 위한 근대 학교가 확충되었다. 이러한 토착민 대상의 '인민학교'(Sekolah Rakjat)에서는 토착어, 즉 주로 말레이어[29] 근대적 교육 과목들이 교수되었으며, 동인도 전체에서 교육 과정을 통일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아직 네덜란드어로 진행되는 상급 교육 제도가 토착민들에게 널리 개방되지는 않았지만, 토착민 상류층은 원한다면 자제를 어느 정도 네덜란드어로 교육받게 할 수 있었다. 또한 토착어 인민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19세기 중반부터 초등교육을 마친 토착민 대상으로 개설된 토착어 교원학교도 대폭 늘어났다. 원래 교원학교의 교육어는 말레이어 또는 자바어였지만, 1865년부터 네덜란드어 과목도 교수되기 시작했다. 1870년대부터 교원학교에서 네덜란드어는 필수 과목이 되었다.

1875년에는 바타비아의 자바 의학교(인도네시아 대학교의 전신)가 정식 의사 교육기관으로 승격되어 의무박사 학위를 수여하게 되었으며, 1876년에는 보고르에 농업 전문가를 양성하는 보고르 농학교(보고르 농과대학교의 전신)가 세워지는 등, 자바에서는 토착 동인도인에게 약간의 전문 직종이 개방되기도 하였다. 자유주의 시대에는 행정 제도 개편도 이루어져, 종전에 과도하게 식민 본국과 바타비아의 총독부에 집중되어 있던 행정권이 여러 지방 행정단위로 적절히 분산되어 동인도의 지방자치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다.

7. 윤리정책 시대[편집]


동인도 식민지와 네덜란드 본토 양자의 식민지 처우 개선 압력에 직면한 식민 정부는 20세기 초 '윤리정책'(Ethische Politiek, Politik Etis, 1901–1942)이라는 이름[30]을 내걸고 유화책을 펼쳐, 동인도에서 관개, 보건, 교통, 물류, 행정 방면의 인프라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총연장 7,500km의 기차 노선[31]과 140만 헥타르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 관개 수로 체계, 바타비아와 수라바야 등 여러 항구에서의 근대적 항만 체계, 140개의 공공 식수공급시설, 수만 킬로미터의 도로 체계가 갖추어졌다.[32] 식민 정부의 공중 보건 예산은 1910년에서 1930년 사이 10배 가까이 증액되었고, 말라리아 퇴치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으며, 해충 확산 방지를 위해 야자잎 초가지붕을 기와로 대체하는 캠페인도 지속되어 동인도의 농촌 경관이 혁신되었다. 자바와 마두라의 과잉 인구가 인근 도서(수마트라, 칼리만탄)의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유도하는 '트란스미그라시'(네덜란드어: Transmigratie, 인도네시아어: Transmigrasi) 정책도 이때 처음 시작되었는데, 식민지 시대에는 식민 정부의 예산 부족으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윤리정책이 본격화된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동인도의 대도시 바타비아, 반둥, 수라바야 등의 유럽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네덜란드의 근대 문화가 완전히 정착하여, 이주 네덜란드인(및 소수의 비네덜란드계 유럽인)이 상위 계층으로, 일부 화인, 혼혈 동인도인 부유층 및 극소수의 토착민 상류층이 중간 계층으로 참여한 식민지적 근대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시기에는 동인도의 대도시 바타비아, 수라바야, 반둥 등에서 유럽식 호텔카페가 성업하였으며, 영화가 제작 및 상연되고[33][34] 유럽의 유행 의류를 취급하는 의상실이 성행하였다. 이따금 재즈 밴드가 순회 공연을 다녔고, 신문[35] 배달부와 우체부도 거리를 분주하게 오갔다. 바타비아에는 1899년부터 영업하기 시작한 노면전차[36]가 지나다니고 있었으며, 자바 주요 도시들은 이미 1920년대 무렵 기차 노선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식민 정부는 유럽계 이민을 장려하여 도시의 유럽계 인구가 급증하였는데, 1930년 기준 자바 해안 도시의 유럽계 인구 비율은 7%에 달하여 영국이나 프랑스 지배 하의 아시아 식민지 도시보다는 훨씬 유럽화된 도시 공간이 형성되었다. 비교하자면, 인도 제국의 도시에서 유럽인의 비율이 2%를 넘은 적은 없었다.[37]

그러나 유화 정책으로 혜택을 받은 식민지인은 극소수의 상류층뿐이었다. 대부분의 동인도인은 여전히 극심한 빈곤과 문맹의 굴레에 갇혀 있었고, 확충된 인프라는 거대한 동인도를 아우르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특히 교육 인프라의 부족은 동인도인 입장에서 절망적인 수준이었는데, 네덜란드가 동인도에서 물러난 1942년까지도 학령인구의 20% 정도만이 초등교육을 받는 등 보통교육 수준에 심각하게 미달하였으며 동인도에 근대적 학술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종합대학은 설립조차 되지 않았다. 식민 모국의 언어인 네덜란드어는 사실상 상류층에게만 보급되었는데, 1942년 동인도에서 네덜란드어 구사가 가능한 토착 동인도인 인구는 100만 명을 약간 초과하는 정도로, 당시 동인도 총인구 7,200만 명의 약 2% 수준이었다.[38]

이런 상황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기 시작한 동인도인 가운데 개혁적인 일부가 식민체제하에서 소수만이 혜택받고 다수의 민중이 소외받는 현실에 눈을 뜨고, 동인도인의 힘으로 동인도를 이끌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동인도의 민족주의와 자치 운동을 발달시키게 된다. 20세기 초에 처음 동인도 민족주의와 자치 운동을 주도한 것은 에르너스트 다우어스 데커르(Ernest Douwes Dekker, 1879–1950) 등의 혼혈 동인도인과 2세대 이상 정착하여 동인도에 뿌리내린 유럽계 동인도인 들이었지만, 곧이어 근대적 교육을 받은 동인도 토착민 엘리트들이 동인도의 정치 활동에 대거 참여하여 기존의 자치 운동과 협력하거나 대립하게 된다.

7.1. 초기 민족주의[편집]



7.1.1. 부디우토모[편집]


1908년 5월 20일 부디우토모(Boedi Oetomo)가 동인도 최초의 토착민 민족주의 단체로서 출범하였으며, 이후 여러 민족주의 운동 단체가 생겨나고 민족주의를 주제로 한 신문, 문학 작품 등이 발간되었다. 부디우토모가 주도한 초기의 토착민 민족주의 활동은 자바 중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며 온건한 것으로서, 식민 정부에 협조하면서 자바인(하위 파트너로서 순다인, 마두라인 포함) 상류층의 교육 기회 신장과 문화적 발전을 도모하는 정도였으며, 초기의 부디우토모는 정치적 색채가 옅었다. 부디우토모의 초대 지도자 와히딘 수디로후소도(Wahidin Soedirohoesodo, 1852–1917)는 욕야카르타에서 유럽식 교육을 받고 자바 의학교로 진학, 졸업하여 의사가 된 자바인 엘리트였다. 그러나 부디우토모가 주로 토착민 상류층의 단체이기는 했지만, 자바 하급 귀족의 아들로 자바 의학교에서 유럽식 교육을 받아 계층 상승에 성공한 칩토 망운쿠수모(Tjipto Mangoenkoesoemo, 1886–1943) 등의 진보파는 종족으로는 자바인뿐 아니라 동인도 토착민 전체, 계급으로는 중간층, 심지어 노동계급까지 포괄하는 민족주의를 구상하였다.

7.1.2. 동인도당[편집]


1912년 12월 25일에는 에르너스트 다우어스 데커르와 자바인 칩토 망운쿠수모[39], 수와르디 수랴닝랏(Soewardi Soerjaningrat, 1889–1959)[40]이 동인도 최초의 정당으로 평가받는 동인도당(Indische Partij)을 결성하였다. 동인도당은 "동인도인을 위한 동인도"(Indie voor Indiers)라는 슬로건 하에 유럽계 혼혈 동인도인과 토착 동인도인이 차별 없이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였으며, 1913년까지 7천 명가량의 당원이 모였고 그 가운데 5천 명 이상이 혼혈 또는 동인도에 뿌리내린 유럽계 동인도인이었다. 식민 정부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동인도당의 활동을 금지하여 1913년 동인도당이 해산되고 세 명의 창립자는 네덜란드 본토로 망명을 갔지만, 데커르를 비롯한 정치가들은 활동을 지속하였고 곧 여러 후속 정당이 생겨났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며 토착 동인도인의 정치적 목소리가 더욱 커져, 점차로 혼혈이나 유럽계 동인도인은 동인도 민족주의와 독립 운동에서 부차적인 위치로 밀려나게 된다. 이는 혼혈 및 크리오요 인구의 비중이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보다 훨씬 높아 이들이 독립 운동을 계속 주도했던 필리핀이나 중남미와는 확연히 대조적이었으며, 처음부터 토착민이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인도 제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일본 제국령 조선 등과도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41]

7.1.3. 이슬람연합[편집]


부디우토모 결성 직후 바타비아와 바위텐조르흐(오늘날의 보고르)의 자바인, 순다인 상인들 사이에서도 각각 1909년, 1910년 자바 의학교 중퇴생 출신의 자바인 귀족이자 저널리스트인 티르토 아디 수료(Tirto Adhi Soerjo, 1880–1918)가 주도하여 동업조합 이슬람상인연합(Sarekat Dagang Islam)이 결성되었다. 이에 자극받아 자바 중부의 수라카르타에서도 바틱 상인 하지 사만후디(Hadji Samanhoedi, 1868–1956)가 1911년 이슬람연합(Sarekat Islam, 사레캇이슬람)을 결성하였다. 당초에 이 단체들의 결성 목적은 당시 자바의 상업과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던 화인 상인들에 대항해 이슬람의 기치 하에 자바인, 순다인, 아랍인 상인들이 공동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이슬람연합은 이슬람을 구심점으로 삼아 급속도로 조직원을 늘리고 자바 각지에 지부를 설치했는데, 1914년 4월이 되면 회원 수가 무려 37만 명에 달했으며 이슬람상인연합도 흡수해 자바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자바 기층으로 저변이 넓어지는 과정에서 이슬람연합은 토착민 중간층의 이익 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해져 점차 비토착민을 배제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수라카르타 대회에서 이슬람연합은 유럽인, 중국인은 물론, 이슬람을 받아들인 아랍인이나 인도인 등을 포함한 비토착민 전체를 회원으로서 배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슬람연합이 확대되며 단체의 주도권은 기존의 상인들로부터 근대 교육을 받은 토착민 엘리트로 점차 옮겨가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이슬람 단체, 정치 단체로서의 성격도 강해져, 이슬람연합은 1910년대 자바에서 근대적 이슬람 사상을 수용하는 창구이자 토착민 자치 운동의 중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가운데 1912년 토착민 관료학교(OSVIA) 출신인 수라바야 지부의 초크로아미노토(H.O.S. Tjokroaminoto, 1882–1934)가 사만후디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는데, 초크로아미노토는 이후 오랫동안 이슬람연합 지도부로 활동하게 된다.

이슬람연합 스마랑 지부를 이끌었던 자바인 노조 활동가 스마운(Semaun, 1899–1971)은 정치적으로 급진화하여 동인도사회민주주의연합(Indische Sociaal-Democratische Vereniging, ISDV)[42]에도 가입하여 동인도의 공산주의 활동에 깊게 관여하였다. 1917년의 이슬람연합 대회에서는 이러한 급진파의 의견이 일부 반영되어 반식민주의와 자치권 획득이 강령으로 채택되었지만, 구 지도부는 급진파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를 원하였다. 1910년대 말, 이슬람연합 내에서는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의 당내 주도권 다툼이 격화되었다.

이슬람연합의 급진화에 식민 정부는 점차 경계심을 갖게 되었는데, 1919년 6–7월 자바, 술라웨시에서 무장 봉기가 발발하자 이를 이슬람연합과 연관지어 본격적인 이슬람연합의 탄압을 시작하고 초크로아미노토를 포함한 온건파 구 지도부마저도 단기간 체포, 구금하였다. 이는 결정적으로 이슬람연합의 내부 분열을 불러왔고, 식민 정부의 경계에 따라 이슬람연합 회원 수는 격감하였다. 분열은 아구스 살림(Agoes Salim, 1884–1954) 등의 이슬람 온건파가 제안한 이중 당적 금지안이 1921년 채택됨에 따라 이슬람연합에서 스마운 등의 급진파가 대거 탈퇴하고 이슬람연합이 온건화하여 가까스로 일단락되었다. 이후의 이슬람연합은 이슬람 진보파 정당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이슬람 운동의 발전에 따라 이슬람 보수파/전통주의자는 나들라툴울라마(Nahdlatul 'Ulama, 1926년 결성), 이슬람 혁신파/근대주의자는 무하마디야(Muhammadiyah, 1912년 결성)로 결집하게 되었고, 이슬람연합은 한동안 무하마디야와 협력하였으나 1928년 결별한 후에는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였다.[43]

7.2. 인민참사회 창설[편집]


네덜란드는 동인도의 입법에 동인도인이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민족주의 세력을 어느 정도 다스리기 위해, 1916년 12월 법령으로 '인민참사회'(Volksraad, 폴크스라트)라는 선거제 입법 협의 기구를 창설하였다. 1917년 10월 16일, 처음으로 19명의 의원단이 선출되었으며, 임명직 의원 19명이 추가되어 다음해 38명으로 구성(유럽계/혼혈 임명직 11명, 선출직 9명, 토착민 임명직 5명, 선출직 10명, 화인 임명직 3명)된 인민참사회가 처음으로 소집되었다. 정원은 48명(1921, 1924), 60명(1927년부터)으로 확대되었으며, 임명직의 비중은 점점 줄고 토착계 의원 비중은 약간 늘어 1927년부터 의원 60명 가운데 21–22명 정도만 임명직이 되었고 1931년부터는 토착민 30명(선출 20:임명 10), 유럽계/혼혈 25명(선출 15:임명 10), 화인 5명(선출 3:임명 2)의 비율이 정착되었다. 선거는 약 2천 명의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였다. 인민참사회에서는 전반적으로 온건 우파 세력이 우세를 보였으며, 네덜란드 본토의 가톨릭당, 반혁명당 등의 자매 정당도 의원을 배출하긴 했지만 동인도 민족주의 정당, 화인 민족주의 정당, 지역 대표자, 아랍 공동체 대표자 등도 인민참사회에 진출하여 각자 이념과 이권에 따른 주장을 전개하였다.

초기의 인민참사회는 조선총독부중추원 정도의 권한을 갖춘 입법에 참여하지 못하는 단순 자문 기관이었으나, 1927년부터는 동인도의 예산안과 역내 입법안 심사권 및 역내 입법안 발의권을 획득함으로써 어느 정도 실질적인 선거제 의회로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총독이 인민참사회의 의결에 대한 비토권을 가졌으므로 인민참사회는 근본적으로 동인도 총독의 권한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없었고, 총독을 해임하거나 불신임할 수도 없었으므로 인민참사회가 완전한 자치 의회가 되지는 못하였다. 또 60석의 의석이 인종별로 토착민 30석, 유럽계/혼혈 25석, 화인 5석으로 정해져 있던 것은 동인도의 대략적인 인구 비율이 토착민 97.38%, 화인 2.03%, 유럽계 및 혼혈 0.40%, 기타 비토착 아시아계 0.19%(1930년 센서스)로 토착민 절대 다수였던 것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민참사회 의원의 임기는 최초 설치 시에는 3년이었으나 1925년부터는 4년이 되었다. 인민참사회의 유명한 토착 동인도인 의원으로는 모하맛 후스니 탐린, 초크로아미노토, 아구스 살림[44], 수타르조 크르토하디쿠수모 외에도, 저명한 민족주의자이자 작가, 저널리스트 압둘 무이스(Abdoel Moeis, 1886–1959), 후세인 자야디닝랏의 형으로 바타비아 현령(1924–1929)이었던 아크맛 자야디닝랏(Achmad Djajadiningrat, 1877–1943), 독립 전쟁 시기에 초대 인도네시아 내무장관이었으며, 파순단 자치국 수반이었던 위라나타쿠수마 5세(Wiranatakoesoema V, 1888–1965)[45] 등이 있었다.

7.3. 토착민 정파의 발달[편집]


1927년 7월 4일에는 젊은 건축가 수카르노와 사르토노(Sartono, 1900–1968) 등 토착민 출신의 소장파 독립 운동가들이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결성하였는데, 인도네시아 국민당은 식민 정부의 정책에 비협조로 일관하며 인민참사회에도 참여하지 않고 장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이끈 수카르노는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인도네시아 민족의 통일과 독립을 천명해 수많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당시 상당한 세를 얻고 있던 동인도 내 이슬람 정파들과 사상적으로 갈등했다. 사회경제혁명을 우선시하는 세력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은 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을 추구하는 바는 같았더라도 수카르노 정파와 거리를 두고 독자 노선을 걸었으므로 독립 운동 세력은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다. 토착민 정파 가운데 적극적으로 독립을 추구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1928년 10월, 바타비아에서 열린 제2차 청년회의(Kongres Pemuda II)에서 청년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청년의 맹세(Sumpah Pemuda)라는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을 천명하는 상징적 사건이 있었으며, 현재의 인도네시아 국기인 메라 푸티도 이때 처음으로 게양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즉시 메라 푸티 게양을 금지하였다.

1935년 기존의 부디우토모와 인도네시아민족연합(Perserikatan Bangsa Indonesia)이 결합해 창당한 대인도네시아당(Partai Indonesia Raya, Parindra)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에서 인민참사회에 참여하여 장내에서 민족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인도네시아당을 이끈 것은 그 자신이 인민참사회 의원이었던 저명한 민족주의 사상가 모하맛 후스니 탐린(Mohammad Hoesni Thamrin, 1894–1941)이었다.

동인도는 공산주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기도 했는데, 처음에 유럽계/혼혈과 화인들이 주도했던 공산주의 정당 동인도사회민주주의연합(ISDV, 1914년 창설)은 1920년 동인도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식민 정부의 유화책에 의해 정식으로 인가받은 정당으로 활동하였다. 동인도 공산당으로 토착민 당원이 대폭 유입됨에 따라 순식간에 토착민의 발언권이 강해져, 1924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으로 당명이 바뀌고 토착민이 주도하는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1926–1927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확실한 계획 없이 섣부르게 무장 봉기를 사주하다가 봉기가 금세 진압당하자, 식민 정부의 탄압으로 지도부가 체포, 추방되거나 도주하여 당세가 약해지고 공산주의 활동은 지하화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이상과 같이 동인도 내 토착민 정파가 발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성숙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 동인도 토착민이 본토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유의미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때 모하맛 하타를 비롯한 많은 네덜란드 대학에서 공부한 토착민 유학생들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와 독립을 지지하는 학생 단체를 결성해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으며, 하타 등 일부는 옥살이를 겪었다.

본토 네덜란드인 모두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본토의 양심 있는 지식인들, 특히 본토의 많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지지하며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동인도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비교적 자유로운 네덜란드 본토로 망명한 토착민 작가(미낭카바우계) 루스탐 에펜디(Roestam Effendi, 1903~1979)는 동인도에서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불법화된 후에도 본토의 네덜란드 공산당에 가입해 공산주의와 인도네시아 독립 지지 활동을 이어갔으며, 심지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네덜란드 공산당 소속으로 네덜란드 하원의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7.4. 유럽계/혼혈 민족주의[편집]


혼혈 및 유럽계의 주류 민족주의는 토착민 민족주의와 별개로 계속 발달하여 이들은 네덜란드 본토의 간섭을 줄이고 자신들이 주도하는 자치 내지 독립을 희망하였다. 이들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정당으로 1919년 창당한 인도유럽연맹(Indo Europeesch Verbond, IEV)이 있었는데, 특히 인민참사회 의원이자 1930년대에 당 대표를 맡았던 딕 더호흐(Dick de Hoog, 1881–1939)가 탁월한 연설로 이름을 날렸다. IEV는 토착민에 대해 온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는 하였으나, IEV 주류는 유럽계/혼혈이 토착민과 진정 동등하다고 생각하거나 필요할 경우 토착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유럽계/혼혈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포기하는 것을 고려할 정도로 이상주의적이지는 않았다. 대개의 유럽계/혼혈은 토착민에 대한 식민 정부의 억압적 정책을 조용히 지지하거나 묵인하였다. 굳이 골라야 한다면 혼혈은 스스로를 토착민보다는 유럽인 쪽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1930년대 나치즘이 발호할 무렵, 네덜란드 본토의 나치계 정당 네덜란드국가사회주의운동의 동인도 지역당 당원 가운데 3/4는 혼혈이었다.[46]

에르너스트 다우어스 데커르[47]와 피터르 달러르(Pieter Frederich Dahler, 1883–1948) 등의 소수파만이 토착민 민족주의와 강하게 공명하여 혼혈/유럽계와 토착민 모두를 구별 없이 아우르는 전 동인도의 민족주의를 주장하였고, 1945년 네덜란드가 동인도로 귀환했을 때 토착민의 독립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같은 시기에 IEV 구 지도부는 돌아온 네덜란드 세력의 질서 유지가 가능할 것이라 믿고 다시 운영될 동인도 의회에 참여하려고 당의 재조직을 진행하였으나, 독립 전쟁 와중 인도네시아 공산당 산하 인민청년단(Pemuda Rakyat)에 의해 2만 명의 유럽계와 혼혈이 학살당하는 사건을 목도하게 된다. IEV는 점차 네덜란드 본국이 혼혈/유럽계 동인도인의 안전 보장과 권익 보호에 기대 이상으로 무관심하다는 것을 깨닫고 환멸을 느꼈으며, 1947년에는 독립파를 지지하고 독립 인도네시아에 합류하는 쪽으로 당의 노선이 결정된다.[48]

7.5. 수타르조 청원[편집]


토착민 민족주의 운동이 성숙한 1936년 7월, 인민참사회 의원이자 식민 정부 고위 관료인 자바인 수타르조 크르토하디쿠수모(Sutardjo Kertohadikusumo, 1892–1976)는 빌헬미나 여왕과 네덜란드 의회에 대한 유명한 청원('수타르조 청원')을 동인도 인민참사회에 제출한다. 청원의 내용은 네덜란드 헌법 제1조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네덜란드 왕국의 속령으로 규정한 것은 부당하며, 10년 안에 동인도와 네덜란드 본토 간의 관계는 영국과 캐나다, 호주 등의 관계와, 또는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와 유사하게 상호 간섭하지 않는 자치권을 가진 자치지역 간 연합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원은 동인도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동인도의 많은 네덜란드어 언론은 청원이 부적절하고 위험하며, 심지어 혁명적이라고 논평하였다. 인민참사회의 보수파 의원들은 청원의 법적 애매모호함을 지적했고, 일부 말레이어(인도네시아어) 언론은 청원을 공개 지지했다. 토착민 민족주의 세력 가운데 급진파는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의 완전 독립을 지지했으므로 청원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인민참사회는 동년 9월 17일부터 특별 회의를 소집해 2주간 격론을 벌인 끝에, 26 대 20의 표결로 청원을 승인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36년 10월 1일 인민참사회는 네덜란드 본국의 여왕과 의회에 같은 내용의 청원을 올린다. 본국에서의 심사는 2년을 끌었으며, 여러 추측과 다른 대안이 잇따라 제시되던 가운데 1938년 11월 14일 보수적인 반혁명당의 헨드리퀴스 콜레인(Hendrikus Colijn, 1869–1944)이 총리로 집권하던 네덜란드 정부는 청원을 최종 기각하였다. 기각의 여러 사유 가운데 하나는 "동인도인은 스스로를 통치할 책임을 지기에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7.6. 태평양 전쟁과 총독의 항복[편집]


1940년, 네덜란드 본국이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고 네덜란드 정부가 런던으로 망명했을 때 인민참사회의 권한을 확대해달라는 청원이 네덜란드 망명 정부로 전달되었으나 네덜란드 망명 정부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인민참사회는 점증하는 일본의 위협에 대응해 동인도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1941년 7월 18,000명 규모의 토착민 민병대를 창설하는 법안을 43 대 4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시켰고[49], 나아가 일본과의 전쟁이 선포되자 그 시점까지 입대가 제한되었던[50] 10만 이상의 토착민이 나서서 입대를 자원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이 동인도를 침공하기 직전 동인도군은 약 천 명의 장교와 34,000명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8,000명이 동인도 토착민(주로 자바계, 순다계, 암본계)이었다. 일본이 동인도를 침공한 이후 동인도군은 3개월에 걸쳐 일본군의 침공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동인도 총독 알리디위스 판스타르켄보르흐스타하우어르(Alidius Tjarda van Starkenborgh Stachouwer, 총독 재직 1936–1942)가 1942년 3월 9일에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일본군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에게 항복함으로써 동인도의 일본 점령기가 시작된다. 네덜란드 망명 정부는 1942년 5월 동인도 인민참사회를 공식 해산하였다. 동인도에 잔류하던 네덜란드 관료들은 일본군에 붙잡혀 억류되거나 동맹국 호주 등으로 피신하였다.


8. 인도네시아 독립전쟁[편집]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패망한 이후 독립파 민족주의 지도자 수카르노를 주축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는 이에 반발했고, 인도네시아를 재점령해서 식민지 재건을 위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여러 국면을 거쳐 진행되며 4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특히 1947년 7월부터 8월까지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네덜란드군 16만 명이 자바와 수마트라에 투입되어 군사 활동을 벌였으며 이 작전에서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네덜란드군에게 학살되었다. 이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 독립파는 군사적으로는 줄곧 열세[51]에 있었지만 국제 사회에서 외교적, 도덕적 우위는 유지하였고, 결국 미국이 인도네시아 편에 서서 중재하기 시작하면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은 수카르노가 이끄는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승리로 끝난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1949년 구 종주국 네덜란드를 포함한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독립하였다. 독립 초기의 인도네시아는 서뉴기니 지역을 영토로 포함하지 않았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행정적으로 통합되어 있던 기존 네덜란드령 서뉴기니 지역은 '네덜란드령 뉴기니'라는 명칭의 네덜란드 해외속령(overzees gebiedsdeel) 상태로 존속하다가 1963년 뉴욕협정을 통해 인도네시아에 양도되었다. 이후 1969년 인도네시아는 주민투표를 서뉴기니를 자국 영토로 합병하였다.

9. 네덜란드의 사죄와 관계 개선 노력[편집]


In line with the previous statement by my government, I would like to express my regret and apologise here for the excessive violence on the part of the Dutch in those years.

저는 이 곳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네덜란드인이 인도네시아인에게 가한 폭력과 학살을 사죄하고자 합니다.

- 네덜란드 빌럼알렉산더르 국왕


한동안 네덜란드는 "비즈니스 관계였지 지배자-피지배자 관계가 아니었다"라고 주장하면서 인도네시아 대학살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았고, 네덜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도 '인도네시아 대학살'이란 말은 사실상 금기어 취급됐다. 1990~2000년대 들어 난다 판데르제이(Nanda van der Zee, 1951~2014) 등 몇몇 역사학자들에 의해 식민지 시절 학살행위 등이 파헤쳐지기 시작했고,[52] 2005년에 네덜란드 정부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벌어진 학살이 잘못되었다고 처음 인정했다. 뒤이어 2013년, 인도네시아 학살 피해자들이 네덜란드 법원에 정부를 고소하자 네덜란드 외교부는 다시 사죄의 뜻을 표했다. 2020년, 네덜란드 외교부는 다시 '2005년의 사과가 충분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당연히 다시 사과할 수 있다. 사과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

2020년 3월 10일, 네덜란드 빌럼알렉산더르 국왕이 처음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뒤이어 등장한 빌덤알렉산더르 국왕은 과거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과거 네덜란드 정부와 왕실이 저지른 학살과 폭력을 후회하며, 사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과거를 지울 수는 없지만, 과거에서 배울 수는 있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 보다 평등하고, 양 측 모두에게 도움에 되는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라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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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회사들을 뒤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구분지어 선구회사(voor-compagnien)라 한다.[2] 생몰년도 1587–1629년. 네덜란드 호른 출생, 1618–1623년, 1627–1629년 동안 총독을 역임.[3] 술탄 아궁 하냐크라쿠수마, Sultan Agung Hanyakrakusuma, 재위 1613–1645[4] 다만 타이완은 20여년 후 정성공과 동녕 왕국에 손을 잡은 반네덜란드파의 한족들과 다두 왕국대만 원주민들의 공격으로 인해 질란디아 요새가 함락당하며 인프라를 통째로 빼앗겼다. 이후 네덜란드군이 질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는 질란디아 요새 성벽이 네덜란드 공격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타이완은 동녕 왕국(명정)이 지배하게 된다.[5] 이때는 일시적 점령했다.[6] 단 분리된 번왕국 가운데 욕야카르타 술탄국은 사실상 독립국이었으며, 욕야카르타가 실질적인 보호국이 되는 것은 19세기 초다.[7] 동부는 토착 왕국인 칸디 왕국(1469–1815)의 영토였다. 칸디 왕국은 스리랑카에서 이베리아계 세력을 물리친 전쟁에서 네덜란드의 동맹이었다.[8] 오늘날의 명칭: Kollam[콜람\], 포르투갈어: Coulão[콜랑\], 네덜란드어: Quilon[크빌론\][9] Cochin[코친/코힌\], 오늘날의 Kochi[코치\][10]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령 1652–1795, 영국령 1795–1803, 1806–1910, 바타비아 공화국령 1803–1806[11] (Koshy 1989)[12] (Brixius 2018)[13] 한편, 프랑스 측 외에 영국도 1810년 말루쿠 지역을 점령하고 나자 육두구 종자를 페낭, 싱가포르, 벤쿨런(븡쿨루), 스리랑카 등지로 가져와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육두구는 곧 영국 관할 지역 각지로도 퍼졌다. 19세기 초 이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사라진 후의 이야기이므로 상술하지는 않는다. (Milton 1999, 380)[14] 네덜란드와 마이소르, 프랑스가 합세하여 영국과 싸움. 마이소르–영국 간의 대립이 주가 되는 전쟁 자체는 무승부였으나 네덜란드는 패배한다.[15] 이 시점에는 네덜란드의 통치가 수마트라 전역에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여러 지방 토착 왕국들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남서 해안 지역에는 원래 영국 식민지였던 곳도 있었다.[16] 동명의 서적이 출간된 바 있어 이 명칭을 사용한다. 원어는 '우편용 큰길' 내지 '우체부의 큰길' 정도의 뜻이며, 굳이 압축하면 '우정대로'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17] 1815년 출판된 윌리엄 솜(William Thorm)의 《자바의 정복》(The Conquest of Java)에 따르면 12,000명이 죽었다고 한다.[18] 여담이지만 단덜스는 이후 프랑스가 네덜란드에서 물러나고 빌럼 1세가 네덜란드 왕으로 집권하자 1816년 네덜란드령 황금해안(오늘날의 가나 해안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여기서도 동인도 총독 시절 경험을 살려 엘미나(Elmina)에서 쿠마시(Kumasi)에 이르는 도로를 포함해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를 계획하고 이에 바탕해 황금해안의 기반시설을 사유화하여 이곳의 이권을 독점하려고 했다. 1817년 영국 보고서에 따르면 단덜스 총독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공히 폐지한 노예 무역을 교사한 혐의도 있었다. 그러나 단덜스는 갑자기 말라리아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1818년 5월 2일에 황금해안 식민지 엘미나의 네덜란드 정청에서 죽었고, 그의 야망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19] 엄밀히 말해 래플스의 직함은 영국령 자바의 '부총독'(Lieutenant-Governor)이었다. 부총독이라는 직함은 인도 총독의 하급자라는 뜻으로, 자바에서는 래플스가 과거의 총독과 동등한 최고 행정 책임자였다.[20] 타만 사리는 나중의 디파나가라 전쟁 때 추가 피해를 입었고, 복구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다가 1867년의 지진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잔존 시설마저 거의 완전히 붕괴되었다. 한참 나중인 1970년대에 복원 사업이 조금씩 시작되었지만, 2019년 현재 복원 완료된 것은 전체의 극히 일부뿐이다.[21] 단순히 식량 재배량이 줄어든 것 이외에 노동력 착취와 체력 고갈이 무척 심각한 문제였는데, 1년 중 가용 노동 시간 가운데 1/5~2/5가량을 강제 상품작물 경작에 투입한다면, 농민들 자신이 먹을 작물 재배 등에 드는 기간을 합산할 경우, 거의 1년 내내 일하게 된다. 겨울이 없는 열대 지방의 특성상, 열대 농민들의 노동 강도는 온대 지방 농민에 비하여 현저히 적다. 이는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체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온대 지방 농민들의 경우, 겨울 등의 농한기와 혹서기 기간 등을 제외하면 연중 1/3 이상 일하지 않는다.[22] 이 책의 보급은 궁극적으로 네덜란드가 동인도에서 윤리정책(Ethische Politiek, 1901–1942)을 시행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였으며, 초기 인도네시아 문학도 강한 영향을 받았다.[23] 서뉴기니는 1824년의 영국–네덜란드 조약 시점부터 네덜란드령인 것으로 적어도 하나의 열강(영국)의 인정을 받았으나, 19세기 전반기 네덜란드의 서뉴기니 식민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 후 네덜란드가 1885년 영국, 1895년 독일 제국과 각각 조약을 맺어 뉴기니를 삼분하는 과정에서 서뉴기니의 네덜란드 영유가 재확인되었고, 19세기 말에 비로소 제대로 기능하는 네덜란드 식민 정청이 설치되기 시작했다.[24] 단, 경우에 따라 식민 정부는 이슬람 관습 일부를 일시적으로 제재하기도 했다. 특히 동인도 토착민 무슬림의 메카 순례가 종종 식민 정부에 의해 제한되었는데, 식민 정부는 순례를 다녀온 동인도인이 당대 중동의 이슬람 내지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고 정치적으로 급진화하는 것을 우려하였다.[25] (The Jakarta Post, acc. Dec 14, 2021)[26] 참고로 아메리카의 네덜란드 식민지에서는 이보다 조금 늦은 1863년에 노예제가 폐지되었다.[27] 네덜란드 국립 문서보관소 웹페이지 자료 참조: (Nationaal Archief, acc. Dec 14, 2021)[28]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142쪽.[29] 19세기 중반 처음 토착어 학교가 열릴 때 교육어는 말레이어 외에도 암본어, 미나하사어 등이 있었다. 이후 자바 지역에서는 자바어로도 토착어 근대 교육이 수행되었다.[30] 1901년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이 식민지 신민의 복지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네덜란드가 지겠다고 공표함으로써 이런 이름이 붙었다.[31] 총연장 기준으로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긴 것이었다.[32] (Ravesteijn 2007, 32)[33] 동인도에서 근대적인 흥행 문화의 기원은 윤리정책 이전인 1891년 수라바야에서 처음 상연된 '코메디 스탐불'(Komedie Stamboel)로, 천일야화, 유럽 민담, 오페라 등의 줄거리에 기반해 만들어진 일종의 가극이자 서커스였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자바, 말레이 유행가나 왈츠, 폴카, 크론총 등이 연주되었다. 코메디 스탐불 극단은 인기를 끌어 동인도 전역과 싱가포르로 순회 공연을 다녔다.[34] 윤리정책 시대 후기 동인도에서 영화는 대중적 오락으로 유행하여 1926년부터 1949년까지 112편에 달하는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이 시기의 영화 감독은 대개 동인도 화인(peranakan Tionghoa)이었으며 소수의 토착민, 유럽계 감독도 있었다.[35] 동인도에서 신문의 역사는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사보에서 시작되며, 18세기 중반의 네덜란드어 신문 《바타비아스허 누벨》(Bataviasche Nouvelles, 1744년부터 발행)이 동인도에서 최초로 근대적 인쇄 체계를 도입한 신문이었다. 동인도 최초의 토착어 신문은 1855년부터 수라카르타에서 발행된 자바어 신문 《브라마르타니》(Bramartani)였고, 최초의 말레이어 신문은 1860년부터 스마랑에서 발행된 《슬롬프렛 믈라유》(Selompret Melajoe)였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다양한 자바어 및 말레이어 신문이 자바와 수마트라의 여러 도시에서 발행되었다. 다른 지역어로 된 저널리즘의 발달은 상대적으로 늦었는데, 가령 최초의 순다어 신문은 1920년부터 반둥에서 발행된 《소라 마르디카》(Sora Mardika)였고, 최초의 바탁어 신문은 1905년부터 파당 등지에서 발행된 《빈사르 시논당 바탁》(Binsar Sinondang Batak)이었다.[36] 마력 트램은 1869년, 증기 동력 트램은 1883년부터 영업.[37] (Bosma and Raben 2008, 339)[38] 단, 도시 인구로 한정하면 다소 상황이 나아져서 1930년 기준으로 약 4% 정도의 토착 동인도인 도시민은 네덜란드어 구사가 가능했으며, 이 수치는 마나도에서는 10%, 암본에서는 13%에 달했다. 네덜란드어 구사자는 교육 기회의 확대, 특히 네덜란드어로 교육하는 사립학교의 증가와 더불어 일본 침략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급격하게 증가하기는 하였다. 1940년대 초 본토 네덜란드의 인구가 약 900만, 동인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네덜란드 식민지 네덜란드령 기아나(현 수리남)의 인구가 40만에 약간 미달하는 수준이었으므로, 이 정도의 네덜란드어 구사자라도 본토 네덜란드의 관점에서 결코 적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Bosma and Raben 2008, 340)[39] 나중에는 후대 민족주의 지도자 수카르노의 정치적 멘토가 된다.[40] 키 하자르 데완타라(Ki Hadjar Dewantara)라고도 불린다. 파쿠알라만 공가의 공족으로서 '라덴 마스'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고위 귀족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유럽식 예비교육을 받고 자바 의학교로 진학하였으나 병으로 중퇴하고 민족주의적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다. 1913년, 네덜란드가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도 토착민을 포함한 동인도인에게 모금을 진행하였는데, 이에 대해 식민 정부를 통렬하게 공격하는 칼럼 〈만일 내가 네덜란드인이었다면〉(Als ik eens Nederlander was)을 써서 네덜란드어 신문에 실은 것(동년 7월 13일)이 특히 유명하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시기에는 초대 인도네시아 교육부 장관직을 맡았다.[41] 후자의 차이가 단순히 비토착계 인구 비중의 차이에서만 비롯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여기에는 각 식민지의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고려한 다른 설명이 필요(가령 집단 간 교육 기회의 차이, 식민지 경험의 길이 및 지속성, 혼혈/크리올 인구와 식민지가 문화적으로 통합된 정도, 식민 정부의 강압성 등)하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처럼 비토착계 인구 비중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식민지는 인구에 기반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인도 제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통계상 유럽계 인구(유럽계로 간주된 혼혈 포함) 비율은 1930년대까지도 총인구의 0.4%에서 0.5% 정도로 유사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경우 이에 더불어 2.0% 정도의 인구가 화인(중국계)이었다. 조선의 경우 1942년 재조 일본인 인구는 75만 명 이상으로 당시 조선 인구의 약 2.8%에 달했다.[42] 1914년 5월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헨드리퀴스 스네이블릿(Hendricus Josephus Franciscus Marie Sneevliet, 1883–1942)이 설립한 정당이다. 1920년에는 동인도 공산당(Indische Communistische Partij)으로 당명을 변경하였고, 1924년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한다.[43] 이슬람연합은 소멸하지 않고 식민 정부 및 인민참사회(이하 서술)에 대한 온건 비협조 노선을 견지하며 존속하다가 독립 후에도 한동안 명맥을 이어 갔다. 수하르토 체제하에서 기성 정당이 통합됨에 따라 1973년 이슬람계의 개발통일당(Partai Persatuan Pembangunan)으로 흡수되었다.[44] 인도네시아 헌법의 작성과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시기의 외교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45] 1874–1893년간 반둥 현령이었던 유력 귀족 쿠수마딜라가(Kusumahdilaga)의 아들로서 네덜란드에서 농학을 공부하고 반둥 현령직을 장기 역임(1920–1931, 1935–1945)하였다.[46] (Inside Indonesia May 4, 2019)[47] 독립 전쟁 와중에는 아예 순다식 이름 다누디르자 스티아부디(Danoedirdja Setiaboedi)로 개명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확실한 연도 불명)하였다. 1950년 사망한 후에는 수카르노 정부에 의해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으로 지정되었다. 자카르타와 반둥에는 그의 개명 후 이름 '스티아부디'를 따온 지명이 있다.[48] 이처럼 많은 혼혈이나 토착화된 유럽계 동인도인은 인도네시아 독립 후 네덜란드로 떠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잔류하였지만, 수카르노 정부가 반서방, 반네덜란드 정책을 펼치며 이들을 차별하자 잔류자 가운데 상당수는 인도네시아를 떠나게 된다. 인도네시아에 잔류한 IEV의 후속 정당은 별다른 정치적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1962년 소멸하였다.[49] 대인도네시아당만이 공개적으로 반대표를 던졌다.[50] 이때까지 동인도에서 토착민은 징집 대상이 아니었으며, 왕립 네덜란드령 동인도 육군(KNIL)의 징집 대상은 오직 유럽인(및 통계에 이렇게 잡힌 상당수의 혼혈)뿐이었다. 이 이전에도 동인도군에 토착민 부대는 존재하였지만 반란의 위험 때문에 식민 정부는 주로 동화가 많이 진행되어 충성스럽다고 간주되던 남말루쿠계(특히 암본계. 동인도의 종족별 스테레오타입에 따르면 암본계 병사는 사나운 전사이자 믿음직한 군인으로, 무엇보다도 '검은 네덜란드인'\[말레이어: Belanda hitam\]이라 불릴 정도로 네덜란드에 충성스럽다고 평가되었다.)와 미나하사계(특히 마나도계)의 병사를 선호하였고,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자바계와 순다계의 입대는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1936년 시점에 동인도 육군의 토착민 병사 가운데 4천 명이 암본인, 1만 3천 명이 자바인이었다. 식민 정부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토착민도 징집 대상에 포함시켜 달라는 온건파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청원을 줄곧 거부하고 있던 차였다.[51] 당시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했었다.[52] 해당 내용은 이원복 교수가 2000년 주간조선에 발표한 <현대문명진단> '안네 프랑크를 밀고한 사람들'에서 다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