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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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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남아시아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내륙국가. 수도는 카트만두(काठमाडौँ, Kathmandu).
히말라야 산맥을 면한 남아시아의 내륙 국가들중에서 유일하게 인도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이다.[6] 다만 국민들은 인도계가 대략 70% 이상이고 나머지가 티베트계와 미안마계이다. 그 안에도 수많은 민족들이 혼재하고 인종도 다양해서 피부색이 까만 사람, 흰 사람, 동아시아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을 다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주류는 인도계라서 동아시아인의 눈으로는 인도인과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그 외에 동아시아인처럼 생긴 티베트계 역시 20%가 있지만 주류인 인도계 사람들과는 생활 영역이 다르다.
한국에선 네팔을 소국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난하긴해도 인구가 3천만 명이나 되고 국토 면적도 한반도의 3분의 2정도나 되니 결코 작은 나라는 아니다. 중국이나 인도 같은 진짜 큰 나라 사이에 끼었기에 작아 보일 뿐 유럽에 있었으면 중간 정도는 가는 규모이다.
2. 국가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네팔(नेपाल / Nepāl)이라는 국호는 산스크리트어 네팔라(नेपाल / nepāla)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2006년 이전까지는 네팔 왕국(नेपाल अधिराज्य / Nepāl Adhirājya)이었으나 2006년 민주혁명을 거치면서 네팔국(State of Nepal)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2007년 1월 15일 왕정 종식 이후에는 네팔 연방 민주 공화국(सङ्घीय लोकतान्त्रिक गणतन्त्र नेपाल / Sanghiya Loktāntrik Ganatantra Nepāl)을 공식 국호로 쓰고 있다.
2.2. 국기[편집]
국기의 모양이 상당히 특이한데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다. 네팔의 국기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의 정부기를 제외할 경우, 현용 국기 중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사각형이 아닌 국기이자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보다 더 긴 국기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네팔 헌법 제8조 부칙에는 정교하게 국기를 작도하는 법이 제시되어 있다. 종횡비가 무리수인 것 역시 특이한 점이다. 국기 비율.
2.3. 국가[편집]
2008년 공화정으로 전환한 이후부터 〈수백 송이의 꽃〉을 국가로 쓴다.
3. 종교[편집]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카필라 및 샤카 왕국의 왕자로 룸비니(लुम्बिनी)에서 태어났는데, 카필라 왕국의 옛 땅이 네팔 남부 지역에 위치한다. 그래서 네팔인들은 이를 근거로 석가모니가 인도인이 아니라 네팔인이라고 주장하며 항상 옆나라 인도하고 국적 논쟁으로 다툰다. 예전에 네팔에서 석가모니가 인도인이라는 설정을 한 인도 영화가 수입, 개봉된 적이 있었는데, 네팔 국민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고 다음날 바로 상영관을 내려버리고 비디오, DVD로 곧바로 출시했다고 한다.[7]
그러나 정작 전국민의 90% 가까이가 힌두교 신자이다. 불자가 8% 정도 되지만, 대부분의 불교 신자들은 티베트계 사람들이다. 네팔의 원주민인 인도 아리안계 백인들은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 셈. 이 밖에 이슬람과 시크교 신자도 소수 존재한다.
다만, 원래 힌두교는 다신교로 여러 신을 포괄하는 종교이다. 석가모니도 힌두교에서 모시는 신 중 하나이고[8] , 심지어 예수까지도 자신의 신으로 모시는 힌두교 사원도 있다. 사실 네팔은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 세속 국가이다.
살아 있는 신인 쿠마리가 유명하다. 일단 공산당이 집권하는 국가여서 그런지 사회 전체적으로는 종교 율법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고 세속적이다.하지만 힌두교에 기반하는 카스트 제도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
4. 역사[편집]
여러 작은 부족국가들이 나누어져 중국이나 인도나 티베트의 지배를 받으며 지내다가 1768년 12월 21일에 프리트비 나라얀의 주도 아래 통일 왕국이 되었다. 1814년 영국이 침략했지만, 구르카를 필두로 저항한 끝에 영국과 종전협정을 맺고 영토 일부를 영국에게 할양한 대신 독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인도와 밀접한 연관이 큰 라나(राणा, Rana) 가문이 1850년대부터 100여 년간 섭정직을 독차지하면서 카스트 제도를 들이는 통에 혼란만 더 일으켰다.
1950년대에서야 비로소 구르카계 샤(शाह, Shah) 왕조가 절대 왕정을 이루지만 그마저도 왕비 및 여러 기득권에 라나 집안 후손들이 자리를 차지해왔다. 그런 가운데 1972년에 즉위하여 1990년부터 입헌군주제를 시행한 비렌드라 국왕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다. 반대로 왕비인 아이슈와랴는 라나 집안 사람이었고, 절대왕정 보수파를 대변하여 사람들에게 인기는 아주 최악이었다. 1998년 왕과 왕비 내외가 거리 탐방을 나갈 때조차 사람들은 왕비에게만 돌을 집중으로 던져, 왕비가 큼직한 돌에 이마를 맞고 피멍까지 들기도 했다. 그 정도로 네팔 민중들이나 진보파, 좌익으로부터는 공공의 적 1호로 왕비가 모든 미움을 받아왔다.
무엇보다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해도, 150년 가까이 네팔 기득권을 누려온 라나 집안 및 귀족들이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기에 네팔 경제 다수 부는 소수층만 가져갔고, 결국 마오주의자를 비롯한 저항세력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인도가 절대적 영향을 누리는 네팔에서 중국이 마오주의를 받드는 마오주의자들을 이용해 배후조종한다고 비난하자, 중국은 이들을 견제하고 네팔군에 무기를 제공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인도군이나 부탄군까지도 마오주의자들을 견제하고 적으로 삼았기에 이들 세력은 극히 미미했다.
지금은 사라진 월간잡지 지오에서 90년대 후반, 네팔까지 가서 마오주의자들 기지를 취재한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몽둥이나 농기구와 화살까지 들고 훈련받으며, 실전에 쓰는 총기조차도 자기들이 만든 1발짜리 권총이 휴대무기일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런데, 겨우 몇 해 안 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취재하러 올때는 차원이 달라졌는데, AK-47로 무장한 군인들 투성이에 로켓포, 수류탄같이 네팔 정부군급으로 무장이 달라졌다. 때문에 네팔 왕실은 중국이 지원한 것이라고 여기며 중국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에 중국이 이를 달래고자 중국제 총기들을 네팔 정부군에게 지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1년 6월 1일 갑자기 비렌드라 국왕의 장남인 디펜드라 왕세자가 왕궁 파티석상에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 국왕과 왕비, 누이 등 왕족 9명을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혼수상태에서 사흘 뒤 숨졌다. 그래서 이 3일간은 디펜드라가 왕위를 자동 승계하여 재위한 기간으로 간주된다.
공식적으로 이 사건은 왕세자가 결혼에 반대하는 국왕 부부에게 불만을 품고 저지른 소행으로 발표되었다. 왕세자는 파스후파티 라나 전 외무,재무장관의 딸 데브야니 라나와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왕비가 라나는 인도계라고 반대했다는 것이다.[9] 일설에 따르면 왕비가 '왕세자께서 35세 이전에 결혼하면 요절할 것'이라는 점괘를 굳게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발표를 그대로 믿지 않고, 피살된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왕위 찬탈을 노리고 배후에 개입했으리라 의심했다. 갸넨드라는 현장에 없었으며, 갸넨드라의 아내와 아들은 현장에 있었으나 모두 살아남았다. 또한, 국왕과 왕세자 등 왕족 10명이 숨진 중대한 참사인데도 속전속결로 장례가 치러진 점도 의심스러웠다. 왕정 폐지 후 네팔 정부는 이를 재수사하기로 했다. 디펜드라가 정말로 자살을 기도했느냐는 의혹까지 있다.
갖가지 의혹 속에 국가평의회는 형식적으로 디펜드라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한 다음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 갸넨드라 샤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그래서 갸넨드라는 형식상으로는 임금이 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왕실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데다 이전부터 선왕과 다르게 갸넨드라는 상류 보수층들만 끼고 놀았기에 국민들의 지지를 전혀 못 받았고 거만해서 인기가 없었다.[10]
더욱이 뒤를 이을 게 뻔할 파라스 왕자도 네팔에서 인기가 최악이었다. 이 왕자는 술 먹고 깽판 부리기로 악명을 떨쳤다. 심지어 음주운전을 하다가 무고한 사람까지 치어 죽였는데, 피해자가 네팔에서 인기 많은 대중음악가였고, 이를 덮으려고 하다가 들통나면서 더더욱 욕 먹었다. 당연히 네팔 사람들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이 네팔 왕실에 등을 돌리면서 최악이던 마오주의자들은 졸지에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커졌다.
이후로 네팔 정부군 상당수까지도 왕실에 등을 돌리고 이들이 마오주의자들에 넘어오면서 열악한 게릴라전을 벌이던 이들이 전문적 군인들이 훈련시키고 무장 수준도 장난 아니게 달라져서 네팔 정부군이 고전했다. 그러자 미국까지도 네팔군을 지원하고 나섰지만 민심이 등을 돌린 정부군보다도 마오주의자 세력은 나날이 성장했다. 이러다 보니 내전은 이전과 너무나도 다를 정도로 장난이 아니게 달라졌고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을 정도가 되어 경제등급 악화에서부터 네팔 경제와 외교에 여러 모로 타격이 컸다.
게다가 이런 혼란을 수습해야 할 갸넨드라 왕은 집권 초기부터 어용내각을 앞세우고 공포 정치를 일삼았으며 되려 2005년 절대왕정을 부활시키면서 민심을 자극했고 이 혼란을 틈타 마오주의자들이 대도시 부근까지 진격해 전투를 벌였으며, 이런 혼란을 막겠다고 벌인 선거조차도 야당을 탄압하고, 왕당파들이 절대적 압승을 거두는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더더욱 불난 집에 기름을 뿌린 꼴이 되었다.
결국 마오주의 반군 세력들을 비롯해 야당 전 세력에서부터 진보, 좌익, 심지어 우익온건파, 극보수 성향의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조차도 이들과 손잡고 왕정 타파를 주장한다.[11] 결국 이런 절대왕정 부활 2년도 안가 왕은 모든 권력을 이양한다고 물러나야 했고(록탄트라 앤도란), 2007년 12월 25일 마오주의자와 국회 원내의 여야정당들이 왕정 폐지에 합의했으며, 2008년 5월 28일 첫 총선거에서 마오주의자 정당이 압승하면서 239년만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독립 국가로서 네팔의 정체성을 지켜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샤 왕조의 마지막 치고는 너무 허무했다.
하지만, 네팔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는 인도 측은 마오주의자 정권을 안 좋게 여겼다. 인도 동부 차티스가르 주 및 서벵골 주 등 여러 주에도 낙살라이트(Naxalite)라고 불리는 마오주의자 반군이 있는데 이들도 장난이 아니다. 2009년만 해도 이들 테러에 민간인과 경찰을 합쳐 인도에서 906명이 죽었다. 참고로 화약고인 잠무 카슈미르에서 그 해 사망자가 민간인, 군인 합쳐서 132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내전급이다. 이런 상황때문에 인도는 네팔에 여러 혼란이 계속되는 것도 두고보고 있다. 마오주의자 측은 중국에게 더 매달리지만, 이걸 환영하면서 중국도 정작 큰 도움이 못 되고 있다. 마오주의자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던 미국이나 인도 눈치 때문에, 왕정복고 어쩌고 하는 뻘소리도 나온다.
갸넨드라가 폐위된 뒤 갸넨드라 왕과 그의 일가족들은 수도 카트만두 근교 별장에서 산다고 한다. 뭐 권력으로 밀려나서 좌절할지 모르지만, 모아둔 돈과 인도 및 여러 상류층과의 협약으로 여전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한다고 한다. 이런데도 별다른 물의를 빚지 않고 내쫓기 무섭게 마오주의자 운운하며 왕정 복고 논란까지 나오는 판국이니 네팔 민심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현재 네팔 국회에서도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정당이 국회 원내 4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갸넨드라 복위를 강하게 지지하는 군주주의 성향 지지자들로 구성된 시민단체들이 존재하는 등,[12]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민들마저도 현 공화정권을 지지하는 계층과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는 계층들로 크게 분열되었고, 이들의 상호 적대감 또한 매우 심각하다고 한다.
2015년 4월 25일에는 네팔 동부에서 규모 7.9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관련기사. 이후 자세한 정보는 2015년 네팔 대지진 문서 참조.
4.1. 역대 국왕 (1768 ~ 2008)[편집]
4.2. 역대 의회 (1959 ~ 현재)[편집]
의회(1959~1960)
- 1959년 2월 18일에 네팔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를 실시하여 국회의원 109명을 뽑았다. 투표율은 42%였고 네팔 회의가 74석을 차지하였다.
무정당 판차야트 1기(1961~1980)
- 1960년 12월, 당시 국왕인 마헨드라는 민주주의를 네팔에 어울리지 않는 외래사상으로 간주하고 직접 통치를 선언,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와 내각을 해산했다.
- 네팔 회의와 공산당 등 모든 정당이 불법화되었고, 독재에 대한 불평과 비판을 범죄 행위로 간주하는 등 언론출판의 자유도 완전히 억압하였다.
- 마헨드라 국왕은 자신이 수상과 내각을 구성하고 의회의 기능을 대신하는 ‘무정당 판차야트[16] 체제’를 도입하였다.
- 판차야트를 소집하고 폐회할 권한이 국왕에 있고 국왕이 주재하는 국가회의 감독하에 있기 때문에 의회(판차야트)는 당지 명목상 기구로 전락해버렸다.
- 최초의 판차야트 선거조차도 마헨드라 국왕이 사망할 즈음인 1971년에야 실시되었고, 그나마도 보통선거가 아니었다. 국왕이 16명을 임명하였고, 각종 단체가 뽑은 대표 15명[17] 에, 지역 대표 90명, 그리고 대학 졸업자[18] 에게만 투표권을 줘서 4명을 뽑았다.[19]
무정당 판차야트 2기(1981~1990)
- 1979년 4월에서 5월에 걸친 네팔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20] 에 당시 국왕이던 비렌드라가 1980년 다당제와 무정당 판차야트 가운데 어디를 국민이 선택할 것인지 투표에 부의하였는데, 투표 참여자의 54%가 판차야트를 지지하였다.[21] 새 판차야트[22] 의 임기는 5년이었고 1981년과 1986년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후보가 무소속으로 등록해야 했던 이 선거에 네팔의 정당들은 참여를 거부했다.[23]
의회(1991~2002)
- 1990년 네팔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국왕 비렌드라는 정당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고, 국왕이 임명하는 의원을 폐지[24] 하였다. 1991년, 1994년, 1999년 세 차례의 총선에서 네팔 공산당이 번갈아 1당을 차지하며 양당 체제를 구축하였고, 국가민주당은 제3당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임시의회(2006~2007)
- 국왕 비렌드라가 아들에게 피살된 뒤 왕위를 계승한 갸넨드라가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독재 정치를 하고 이에 반발하는 마오주의자가 내전한 끝에, 2006년 민주화운동(Loktantra Andolan) 승리로 구성된 임시의회[25] 가 임시 헌법을 만들어 그 때까지 존재하며 상원 역할을 하던 국왕 주도의 국가 회의를 폐지하고 단원제 국회를 만들었다.
이 임시의회는 위의 한 문장으로 끝내기에는 중요한 결정을 하였는데, 통합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의 의원인 비디아 데비 반다리가 올린 의원의 3분의 1 이상을 여성으로 선출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이다.
제헌의회(2008~2017)
- 임시의회가 만든 임시헌법에 따라, 새 의회는 정원 601명으로 지역대표 240명[26] 과 비례대표 335명, 의회 임명 26명으로 구성되었다. 2008년 4월 10일 실시된 총선에서 마오주의자는 229명[27][28] 을 당선시키며 제1당이 되었고, 전통적인 양당이던 네팔 회의당이 115석, 네팔 공산당이 108석을 얻었다.
왕정을 지지하는 국가민주당은 지역구 당선자 없이 비례대표 단 4명 만이 당선되어 네팔의 왕정 폐지는 시간 문제가 되었다. 결국 2008년 5월 28일 개회한 새 의회는, 첫 의제로 왕정 폐지를 올리고 찬성 560, 반대 4로 왕정을 폐지했다. 헌법 제정이 늦어 2013년에 제헌의회를 다시 구성했다.
의회(2017~)
- 새 헌법에 따라 구성한 첫 의회이다. 제헌의회보다 의원 수가 줄었다.
4.3. 왕정 폐지 이후[편집]
마오주의 공산당이 집권 했지만,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데 항상 따르듯이 네팔 정세는 불안하다. 원래 네팔공산당은 1949년 설립되었으나,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주의의 분파들이 당내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다가 1962년 분당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합당과 분당을 반복했고, 마오주의자는 왕정 및 봉건제를 전복하기 위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국내 여행가인 임현담의 <가르왈 히말라야>라는 책에 아래와 같은 내용도 나온다.
"인도에서 네팔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마오이스트들의 약탈로 재산을 잃고 인도로 달아난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한 네팔인은 해외에서 10년 넘게 죽어라 일하면서 2천만 원이 넘는 돈을 벌어오자 절반을 내놓으라며 집으로 찾아와 기르던 소를 쏴죽이는 마오이스트들 때문에 고생하다가 한 마오주의자 병사에게 장작을 던져 화상을 입히고 죽어라 달아난 끝에 겨우 인도로 피했다는 사람이나 반대로 돈도 없음에도 마오주의자에게 징발로 아이들을 짐꾼으로 빼앗긴 이들 같은 사례가 많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네팔 현지에서 마오주의자에 대하여 질문하면 무척 분노하는 반응이 흔하다."
다만 네팔 노동자의 상당수들은 무장투쟁을 벌이던 마오이스트 공산당에 지지를 보내왔으며, 활동자금을 그들에게 송금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왕정 폐지이후 처음 치뤄진 제헌총선 (2008년) 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마오이스트 공산당이 집권했으며[29] , 이후 당내 분파투쟁과 대중의 비판 때문에 인기를 잃고 마르크스주의 공산당에 집권당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이후의 선거에서도 15% 정도의 지지(3당)는 계속 받고 있다.
마오이스트 공산당은 인기를 잃고 결국 2010년 총리 자리가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으로 넘어갔으며, 2013년 총선에서 마오이스트당은 의석의 반 이상[30] 을 잃으며 대패했고 네팔국민의회당과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이 연립정부를 수립하여, 수실 코이랄라(सुशील कोइराला, Sushil Koirala) 네팔의회당 총재를 다음 총리로 선출했다.
공화제로 전환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공화국 신헌법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1990년의 왕국 헌법을 대신해 2007년에 제정된 임시헌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며, 2015년까지도 정식 헌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31] 가장 큰 쟁점은 연방구획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거라고 한다. 마오주의자와 지방(사실상 민족)에 기반을 둔 정당들은 인종과 민족을 기준으로 획정하길 요구하는 반면, 네팔 회의당과 네팔 공산당을 주축으로 한 여당은 지형과 자원을 기준으로 하자고 주장한다. 특히 테라이-마드헤시(Terai Madheshi) 지역이 가장 많이 반발하는 지역으로, 2015년 말에도 여전히 새 헌법을 반대하며 유혈사태를 벌였다.
헌법 제정 시한인 2015년 1월 22일에 헌법 초안이 의회에 상정되지 못 하게 난동을 부리는 마오주의자 의원 때문에 국회 공성전이 벌어지고, 결국 헌법 초안은 상정되지 못 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에도 결국 2015년 9월 20일 헌법이 공표되었다.#
2015년 10월 11일 통합마르크스레닌주의 네팔 공산당의 카드가 프라사드 올리 총재가 네팔 38대 총리로 취임했다.#
2015년 10월 28일 통합마르크스레닌주의 네팔 공산당의 비디아 데비 반다리 부총재가 네팔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네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1979년에 공산당 학생 운동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몸 담기 시작했고, 이미 2010년에 국방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새 헌법에 반대하는 테라이-마드헤시(Terai-Madheshi) 지역 의원들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2017년 12월 8일에 총선거가 있었는데, 새헌법아래 치뤄지는 첫 국회의원 선거였으며 다시 마르크스주의 공산당이 승리하여 집권했다(121석). 2018년에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마오주의자(53석)의 공산당이 합당하여 네팔 공산당이 되었다.
네팔 정부가 2020년 새학기부터 요가를 초등학교, 중학교 필수과목에 포함한다고 밝히자 현지의 무슬림 사회는 우려를 나타냈다.#
네팔에서 불가촉천민을 겨냥한 살인 등 중범죄가 연이어 발생해 논란이 일고 있다.#
네팔 중부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18명 이상이 사망하고 21명이 실종됐다.#
#네팔의 전직 총리였던 셰르 바하두르 데우바가 생애 5번째로 네팔 총리에 임명됐다. 데우바 총리는 1995∼1997년, 2001∼2002년, 2004∼2005년, 2017∼2018년에도 총리직을 역임한 이력이 있었으며, 차기 총선은 내년 하순에 열리기 때문에 총리 임기는 1년 반가량이 될 전망이다.
마오주의 공산당과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분열된 이후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센터)와 네팔 회의가 연립여당으로 집권 중이다.
5. 정치[편집]
5.1. 중앙[편집]
의회민주주의 국가들 중 세계에서 가장 공산당이 힘을 쓰고 있는 국가인데 이미 왕정시절부터 공산당이 짧은기간이지만 집권하기도 했고, 주요 4당 중 3개 정당이 공산주의 성향으로 여당이 공산당(마오주의)이고 야당도 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기막힌 일도 벌어졌다. 공산주의가 아닌 당도 사회주의 계열이다. 네팔 의회는 양원제 의회로 상원 정원은 59명, 하원 정원은 275명이다. 총선에 봉쇄조항이 없어 소수 정당이 의회에 많이 진출해있다.[32][33] 다만 실제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과 마오주의자 공산당,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네팔 회의당 등이 의석의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난립하지는 않는 편이다.
2015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2017년 총선을 시행했는데, 역시 봉쇄조항을 도입하지 않았다. 다만 총 의석 수를 275석으로 크게 제한하면서 비례대표에서 0.6% 정도는 받아야 국회에 진출이 가능하다.
대통령과 총리는 의회에서 뽑는다. 총리가 정부 수반으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대통령은 의전상 국가원수직을 수행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 중임이다.
2015년 제정된 헌법은 의회에 여성 의원을 1/3이상, 대통령과 부통령 중 한 명은 여성, 정부와 위원회에 여성을 반드시 포함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현재의 국회 의장과 대통령도 여성이다. 2015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비디아 데비 반다리는 적극적인 여권운동가로 새 헌법에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규정을 담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2006년에 임시의회에서 의회에 여성 의원을 1/3 이상 선출하도록 의무화한 법안을 제시한 바로 그 사람이다.
특이한 것은 네팔의 많은 정당 중 통일교 교리를 당 이념으로 삼는 ‘네팔 가정당’이 있는데 평화재건부 장관을 배출하였으며,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네팔 노동자농민당도 있다는 것이다. 네팔 노동자농민당은 자유 선거가 이루어진 1991년부터 당선자를 배출했다. 카트만두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박타푸르를 지역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선거 때마다 네팔 노동자농민당에 대한 투표율이 100%에 이른다고 한다. #
5.1.1. 대통령[편집]
자세한 내용은 네팔 대통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1.2. 총리[편집]
자세한 내용은 네팔 총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 지방 정치와 행정구역[편집]
네팔이 1991년 민주화되면서 지방의회가 조직되었고, 첫 선거는 1992년에 있었다. 1997년에도 지방선거가 치러졌고, 2002년에 다음 지방선거가 예정되었으나 당시 국왕이던 갸넨드라가 의회를 해산하면서 벌어진 내전으로 치러지지 못 했다. 2006년에는 갸넨드라가 민심을 달래려고 지방선거를 실시했으나, 정당들이 참여를 거부하면서 투표율이 낮았다. 2015년 9월 20일에 연방제를 규정한 헌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2017년에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34]
네팔의 행정구역은 2015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7개의 주(Pradeśharū)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주가 설치되었을 때는 이름이 없었으며, 임시로 번호를 붙여서 구분했다. 현재는 제1주를 제외하고 모두 명칭을 확정했다.
7개 주 밑에 카트만두를 포함하는 광역시 6개, 준광역시 11개, 지방자치체 241개, 시골 지방자치체 486개가 있다. 광역시, 준광역시, 지방자치체에서는 시장과 부시장을 선출하고 시골 지방자치체는 시장과 부시장 대신에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한다. 시장/의장과 부시장/부의장은 러닝메이트가 아니라서 시장과 부시장이 다른 정당에서 선출될 수도 있다.
각 지방자치체 밑에 기초자치단체가 있다. 각 기초자치단체는 구의장 1명과 구의원 4명을 선출한다. 네팔이 정치에서 양성평등을 보장하도록 헌법에 규정하는 나라인 만큼 구의원은 남자 2명, 여자 2명을 선출하게끔 되어있다. 해당 선거구에 여성 후보자를 제대로 공천하지 않은 정당에 여성 의석이 할당될 경우, 남성 후보를 당선자로 넣던가 당선자 없음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네팔 의회에서 네팔 회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 마오이스트 공산당이 대부분을 장악한 것처럼 각 지방 정부도 이들 세 정당이 거의 장악했다. 2017년 5월 실시된 지방선거[35] 에서 부시장/부의장까지의 당선자 합계를 보면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이 275명, 네팔 회의가 196명, 마오이스트 공산당이 97명이고, 그 다음 정당이 6명일 정도로 3대 정당에 당선자가 몰려있다.
5.3. 왕정복고 요구[편집]
2019년 왕정복고를 요구하는 데모 집회에 참여한 네팔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는 갸넨드라 전 네팔 국왕.
이전에는 군주국이었으나 2008년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정복고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에 왕정 폐지로 폐위된 구 왕가를 구심점으로 삼아 구 왕가를 지지하는 군주주의 성향의 시민단체 지지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고,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 당 등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는 군주주의 성향의 야당이 국회 원내 제4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폐위당했던 갸넨드라 전 국왕이 왕정복고와 왕궁 등 공화정 수립 후 몰수당한 왕가 재산에 대한 소유권 반환을 주장하고 있다.[36] 현재 네팔내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고 있는 세력들은 주로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등 상위 카스트 신분 출신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개중에는 현재의 네팔 연방 민주 공화국 정부가 하위 카스트 출신들과 마오주의 공산당 세력들이 일방적으로 왕정을 폐하고 강제적으로 성립시킨 비합법 불법 정부라고 주장하거나 미국, 캐나다, 유럽 등 서방국가들과 국제사회가 현 네팔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취소/철회하고, 왕정폐지로 사라진 구 네팔 왕국의 재건국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다만 갸넨드라 전 국왕과 그 일가족들이 갸넨드라의 제위기간 동안에 저지른 민간인 학살과 폭정, 부정부패, 기행 등 악명들이 워낙 높다보니 일부 군주주의 지지파 세력들 빼고는 별로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갸넨드라 제위 시기였던 2000년대 초,중반 당시 구 네팔 왕국 정부군에게 살해당하거나 고문을 당했던 당시 피해자들[37] 은 갸넨드라 전 왕과 네팔 왕실 일가들을 적대하다 못해 원수 취급을 한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이들 사이에서는 왕정이 다시 복원되어 갸넨드라가 다시 국왕이 되거나 또는 파라스 전 왕세자가 국왕이 된다면,[38] 네팔 국적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든지, 총을 들고 히말라야 산지로 들어가서 반정부 투쟁을 일으키겠다며 말하거나 왕정을 폐지하고 들어선 현 공화국 정부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네팔 내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고 있는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당은 갸넨드라 전 국왕이 복위를 하거나 또는 파라스 전 왕세자가 국왕의 자리에 오르되 이들이 네팔 정치/사회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고려하여 실권이 없는 상징적 군주로 두고, 총리와 의회의 권력이 강력한 일본이나 캄보디아, 영국, 노르웨이 등 아시아 및 유럽의 여타 국가들과 같이 군주의 권력이 제한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거나,[39] 왕정복고라도 안된다면 왕실이 폐지된 이후에도 구 왕족 인사들이 옛 왕궁과 별궁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는 몬테네그로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 일부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처럼 폐위된 구 왕실 일가 사람들에게 나라얀히티 궁전[40] 등 옛 왕궁에서라도 거주할 거주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있으나, 현재 네팔공산당과 네팔회의당 등 정치권의 주요 여야 정당들[41] 과 왕정 폐지 이후 정치권력에 진입한 옛 마오주의 반군 출신의 네팔 정치가들 상당수, 그리고 네팔 내전 당시 이전 네팔 왕국 정부군이 자행한 정치 폭력과 전쟁 범죄에 피해를 입었던 자국민 피해자들은 갸넨드라와 그의 아들인 파라스 전 왕세자가 군주제 시절에 저질렀던 악행과 전횡들을 문제 삼아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하지마라', '피땀 흘려 세운 민주 공화정부의 문을 닫고 다시 왕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나라는 그 나라의 옛 왕실 가문들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부모,형제를 죽이고, 우리들을 고문/탄압한 원수의 집안들에게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며 이러한 제안들마져도 반대하거나 부정적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하튼 갸넨드라가 제위기간에 벌인 실정의 악영향 때문인지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제를 지지하는 현 집권 세력들의 위세와 공화정 수호의지가 워낙 강력한 데다 갸넨드라의 폭정으로 인해 가족이 정부군에게 타살당해 죽거나 불구자가 된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의 거센 반발 여론에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 당이 군주제의 복고와 왕궁 등 구 왕가 재산에 대한 환원 주장을 군주주의 세력들의 인기에 영합하려고 우익 포퓰리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며, 일부 국제정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네팔에서 다시 왕정이 복고될 경우 권력을 잃고 밀려나간 자국내 공화주의 세력들의 반발에 의해 다시 내전이 발발하거나, 최악의 경우 공화국과 왕국으로 네팔이 분단될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2021년 1월에는 폐지된 군주제의 복원을 요구하는 군주제 지지 시위가 수도 카트만두에서 일어나 경찰과 시위대간의 충돌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부상자도 발생했다.#
6. 경제[편집]
자세한 내용은 네팔/경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시간대[편집]
네팔은 표준시간으로 희한하게도 UTC+05:45를 사용한다. 사용하는 자오선은 86°15' E. 인접국인 부탄이 UTC+06, 인도가 UTC+05:30을 사용하는 것을 감안하면, 정수차 시간대를 추천하는 국제규약상으로는 UTC+06, 교역 등 이유를 생각하면 인도와 마찬가지로 UTC+05:30를 사용하는 편이 이치에 맞지만, 네팔은 그 어느 쪽을 채택하기도 거부하였다. 특히 인도가 사용하는 82°30' E 자오선은 네팔의 서쪽 상공을 통과하는데도 이를 거부하였다.
이는 네팔이 인도와 자존심 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1956년에 네팔이 표준시를 채택하면서, 의도적으로 인도가 사용하던 시간대를 피하려고 조치한 것이다. 덤으로 네팔이 사용하는 86°15' E 자오선이 국토의 정중앙에 가깝다.
8. 자연과 환경[편집]
제2 도시 포카라 전경
히말라야 산맥의 만년설
그 유명한 에베레스트 산이 이 나라에 있다. 평균 고도가 1,350m일 정도로 높은 산이 많다 보니, 한국의 산을 산이라고 소개했다가는 "저런 지형은 우리나라에선 산이 아니라 언덕이라고 한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42] 네팔인이 강원도로 여행을 와서 암벽지대까지 있는 버젓한 '산'을 가리키며 '한국어로는 Hill(언덕)을 뭐라고 해?'라고 물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43]
허영만이나 서나래의 만화에 따르면, 대충 7,000m 이하의 산들은 이름도 안 붙여 준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4,000m 이하 산은 정말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데, 딱히 산이 낮아서 우습게 본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냥 그 높이에 사람 사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즉 4,000m 이하 언덕은 산 이름 대신 마을 이름이 붙어 있는 것. 가령 해발 1,600m인 사랑곳(Sarangkot)이라는 마을은 네팔에선 아이들이 평지 번화가[44] 스쿨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통학하는, 흔하디 흔한 마을 중 하나일 뿐이지만 1,700m 설악산을 험하다고 하는 한국 기준에서 명백한 산이다. 이 정도 높이를 평지 취급할 수 밖에 없는 척박한 환경이라 고산병 걸리기 직전 고도에도 마을이 드물지 않다보니 자연스레 생기는 일.
산지를 안내하는 셰르파들도 굉장히 번창했다.
지구상에 8,000m가 넘는 봉우리가 14개가 있는데 이 중에서 8개가 네팔에 있다. 1위 에베레스트(8,848m), 3위 칸첸중가(8,586m), 4위 로체(8,516m), 5위 마칼루(8,463m), 6위 초오유(8,201m), 7위 다울라기리 1(8,167m), 8위 마나슬루(8,156m), 10위 안나푸르나(8,091m) 가 네팔에 있으며 2위 K2(8,611m), 9위 낭가파르바트(8,126m), 11위 가셔브룸 1(8,080m), 12위 브로드피크(8,047m), 13위 가셔브룸 2(8,035m)는 파키스탄에 있고 14위 시샤팡마(8,027m)는 중국에 있다. 하지만 14좌 모두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봉우리다.[45] 순수 네팔 영역 안에 있는 산은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3개.
국토 면적 대부분이 산악 지형이고 고산 기후로 인해 항공 교통은 정말 열악하다. 관광을 위해 지역 도시로 이동하려면 중소형 중고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안전한 교통 수단이 아니기에 비행기 추락 사고 등 항공 교통 사고가 빈번하다. 대안으로 협궤 철도가 있기는 하지만 건설 및 관리 비용 외에도 환경 파괴 가능성이 있어 실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수도 카트만두를 제외하면 개발이 잘 되지 않아 자연 그대로 깨끗한 편이다. 국립공원 근처로 가면 공기가 너무 맑아서 다양한 생물들과 맑은 공기를 먹고 자란 한국에서보다 크기가 더 큰 생물들(바퀴벌레, 나방, 거미)을 볼 수 있다.
해마다 눈이 많이 녹는다고 환경 문제가 계속 거론되고 있으며 물이 어디에나 풍부한게 아니라 아주 황무지같은 곳도 많다. 그래서 마을마다 공동 수도(우물) 혹은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펌프가 있고 개인수도는 흔하지 않다. 절대로 목이 마르다고 이걸 마시면 안된다. 해외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현지인이 아니기에 설사할 확률이 높다.
치트완 국립공원의 밀림에서 촬영한 인도코뿔소.
동물로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와 평원저지대를 모두 접한 국가다보니 히말라야 산맥을 맞댄 북부 고지대에서는 눈표범과 산양, 사향노루, 늑대, 우는토끼, 아시아흑곰, 히말라야불곰, 히말라야비단꿩, 히말라야독수리, 수염독수리, 검독수리, 쇠재두루미 등 고산지형에 적응/특화한 동물들이 서식하며, 밀림과 초원지대가 많은 남부 저지대에서는 악어, 뱀,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 승냥이, 사슴, 공작, 닭, 느림보곰, 몽구스, 수달, 원숭이, 들소, 물소, 큰두루미 등이 서식한다. 실제로 네팔 여행사 대표가 한국에서 네팔 관광을 홍보하면서 "네팔에는 에베레스트와 산만 있는 게 아니"라며 밀림과 코끼리, 코뿔소, 호랑이, 늪지도 있다는 열변을 토한 바 있었다(게임 파크라이 4에서 이것이 매우 잘 표현되어 있다) 현재 네팔의 야생동물 서식지의 대부분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특히 중남부 밀림지대에 위치한 치트완 국립공원(Chitwan National Park)은 네팔 내 국립공원들중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는 정글에 철조망을 넘어(혹은 기어서) 들어가면 이들을 볼 수 있는데 (물론 불법이고 목숨을 건 행위다) 랍티 강 같은 큰 강에서는 악어(수영하다가 봉변당한 사람들도 있다), 목욕하는 코뿔소들을 흔하지는 않지만 볼 수 있고 더 깊이 정글 속으로 들어가면 야생코끼리와 표범 등 여러 동물들을 볼 수 있다. 잠시 이 철조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위에서도 언급했던 전기 문제로 인해 낮에는 전원이 안들어오고 높이도 2m 정도밖에 되지 않기에 3m를 점프하는 야행성 호랑이들이 가뿐히 넘을 높이다. 가끔씩 국립공원에서 사는 호랑이와 표범, 코뿔소가 국립공원 근처 마을로 나와 사건사고를 저지르거나 스마트폰 사진촬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참고로 치트완 국립공원 쪽에서 코끼리를 타고 정글에 들어가는 체험과 배를 타고 악어를 볼 수 있는 네팔의 자연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비용은 약 500네팔루피[46] 라고 한다.
네팔에서 호랑이의 수가 늘어나 인명피해도 늘어나고 있다.#
9. 외교[편집]
자세한 내용은 네팔/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군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네팔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크족과 싱할라족 다음으로 세계 최강의 용병으로 꼽히는 구르카 용병이 바로 네팔의 3대 수입원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구르카의 명성과 역사에 대해서는 문서 참고.
미국 의회 도서관 자료실 정보에 따르면 군사력 총합으로 세계 84위. 참고.
11. 언어[편집]
네팔어가 공용어이다. 그러나 네팔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은 네팔 전체인구의 44% 정도에 불과하며, 남아시아 국가들이 으레 그렇듯 실질적인 공용어는 당연히 영어. 한국보다 인구가 적은 나라임에도 나라에서 쓰이는 언어가 무려 123개나 된다고 한다. 화자가 가장 많은 언어는 단연 네팔어이고, 그 외에 마이틸어, 보지푸르어, 힌디어, 우르두어 등 여러 언어가 쓰이고 있다. 그리고 힌디어의 경우에는 네팔이 문화, 혈통으로도 인도와 관련이 있고 거기에다 인도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도 많다보니 힌디어도 배우는 경우도 많이 있는 편이다.
그 외에 티베트계 민족들도 거주하고 있어서[47] 셰르파어, 네와르어, 구룽어 등의 티베트어 계통의 언어들도 사용되지만, 문자는 네팔어와 마찬가지로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되고 있다. 거기에다 네와르어는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한 언어이지만, 네팔어 등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인도유럽어족의 특징이 나타나는 편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영어도 곧잘 한다. 네팔인들이 영어를 곧잘 하는 이유는 영국과의 전쟁 이후 네팔 왕조가 일종의 강화조약을 통해 영국의 작은지배를 수용한 뒤, 서구화를 지향했던 것이 큰 이유이다. 이후 1960년 대 서구에서 히피즘이 유행할 때 인도를 방문했다가 네팔까지 여행하면서 네팔에 머무르던 서구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나름의 아마추어 관광사업이 유행했을 때 '영어'는 네팔인들에게 중요한 언어로 새겨진다. 현재 네팔 도시의 초등학교들은 영어로 된 교과서로 교육을 한다. 이유는 역시 관광업과 해외 취업이 중요한 나라이므로 영어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며, 네팔에 잠시라도 머물러본 이들은 네팔의 영어가 많은 부분 영국식 영어라는 점, 교육 제도 또한 영국식 시스템이라는 것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동네 작은 식당 아저씨도 영어할 줄 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이들의 영어는 '할 줄 안다'고 하기엔 좀 민망한, 관광객 응대용 수준. 남대문이나 명동 상인들과 비슷한 정도라고 보면 될 듯. 그래서 비교적 유창한 영어가 필요한 상황이 오면 보통 아이들을 호출한다. 실제 아이들은 정규교과로 영어를 배우고, 실생활에서도 사용하기 때문에 어른들보다 오히려 영어 실력이 나은 편이다.
네팔은 중국과의 관계가 매우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2019년 6월에는 중국의 재정 지원 하에 필수외국어로 중국어를 지정하였다. #
12. 사회[편집]
금토를 주말 쉬는 날로 정한게 많은 이슬람권 나라가 아님에도 특이하게 토요일이 주말 공휴일이다. 네팔에서 일요일은 그냥 평일이다.
2100년에는 한국보다 인구 문제가 더 극심한 나라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2100년의 네팔 출산율은 1.7명대로 한국보다 높지만, 중위연령이 60세 이상에다가 노년층 비율도 알바니아에 이은 2위이다.[48]
12.1. 민족[편집]
자세한 내용은 네팔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2. 치안[편집]
이웃나라 인도와 달리 네팔의 치안은 자주 시위와 문제가 발생하는 카트만두를 빼면 좋은 편이다. 그리고 카트만두도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49] 사람들이 외지인에게 대체로 잘 해주는 편이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만큼 나쁜 사람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종교 활동에 있어서 특히 그런데, 물감 축제를 할 때 종교가 다른 사람이 오면 보통은 그냥 물감이나 물만 맞을 걸 돌로 맞을 수도 있다. 지방에서는 동네 공산주의자 깡패들만 조심하면 된다. 이들은 외국인에게 대체로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리고 1년 중 마약[50] 이 허용되는 날이 있는데, 이 날은 외출을 삼가는 편이 좋다. 이 외의 경우에는 로컬버스나 투어리스트 버스를 여행자 혼자 타도 큰 문제는 없는 편이다(카트만두에서도. 대신 바가지를 감수해야 한다).
산간지방에서 내려와 평야의 정글, 국립공원 쪽으로 갔을 경우에는 야생동물들을 조심하여야 한다. 농담이 아니고 허술한 펜스를 호랑이나 표범이 넘어오고, 강가에서 수영을 할 때는 악어나 뱀에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 이런 몇 가지 경우를 빼면 안전하다.
저렇게 여행자제, 철수인 것도 전부 지진 때문이다. 난리가 보통 난리가 아니다보니 사회가 뒤숭숭해져서 그런 것이다.
한편으로 외국인 등산객을 대상으로 한 강도납치 사건이 매우 흔하다. 대개 희생자들은 돈과 소지품을 빼앗긴 후 암매장당하는 경우가 보고되고 있다. 미나미노 사요코 실종 사건이 실제 그런 사건이다.
12.3. 위생[편집]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좋지 않은 편이다. 수도인 카트만두에서조차 그렇다. 물이 부족한 사정상 같은 옷을 며칠동안 입고 나서야 빨래를 하고 화장실의 경우 뒤처리를 할 때 손과 물을 사용한다. 그리고 변기 물 내리는 시스템이 레버로 되어있는 게 거의 없기에 물을 받아서 변기에 쏟아붓는 식으로 물을 내린다. 식당의 경우 완전 고급 식당이 아닌 경우에는 위생을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 조리 과정도 굉장히 오픈 되어있는 곳도 있는데 특히나 여름철에는 굉장히 안 좋다. 길거리의 오래된 타타 차의 매연, 엄청난 파리떼들 등이 조리 과정에 관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조목조목 따지게되면 네팔에서 맛난 거리 음식 혹은 서민 음식을 먹기 힘들게 되므로 그나마 깨끗해보이는 곳으로 가서 그냥 위의 소화 능력을 믿자. 정 못 먹겠으면 그냥 고급 식당에서 먹는 것도 좋다.
길거리 위생은 매우 지저분한 편이다. 금가고 이곳저곳 구멍이 파인 포장도로, 구정물, 버려진 자동차 프레임, 쓰레기들, 오래된 타타 차에서 나오는 검은 매연들이 즐비하다. 수도인 카트만두가 정말 심한데 이렇다보니 지하수에도 스며들었는지 타 지방 출신 현지인들도 카트만두 가서 수돗물이나 우물물 마시면 설사한다고 한다. 그나마 여행자들이 많이 왕래하는 터멜은 깨끗한 편이다.
2018년부터 카트만두부터 시작된 환경개선에 대한 노력으로 매연이 나오는 택시같은 차량은 거의 사라졌다. 매연이 나오는 차량은 벌금이 아주 많다. 또한 쓰레기에 대한 네팔인들의 사고 방식이 많이 바뀌어서 최근에는 길거리에 일부러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
특히 2010년대 들어서면서 매년 겨울마다 반복되었던 카트만두의 심한 매연은 2020년~2021년 겨울에는 거의 사라졌다. 단지 포장안된 도로에서 포장된 도로로 나오는 차량과 바이크에 의한 일반 흙먼지는 도로변 건물뿐만 아니라 도로와 멀리 떨어져 있는 건물도 창문을 열어 놓으면 몇시간 뒤에 바닥에 쌓이게 된다.
그리고 2017년부터 전기(electricity) 사정도 좋아졌기에[51] 2018년부터 카트만두의 일반 가정집과 사무실 등은 2010년대 중반에 비해 지하수를 어느 정도 필터링해서 음식 등을 조리하는 데 사용한다.
13. 스포츠[편집]
축구엔 마티어스 메모리얼 A 디비전 리그라는 1부 리그 및 2부 리그(메모리얼 B)까지 갖추고 있긴 하지만 약체급이라서 AFC프레지던트컵에 나가지만 여기서도 뭐 내세울 성적이 없다. 게다가 재정난 및 여러 사정으로 1990~94년, 2007~08년까지 아예 리그가 열리지 못하는 열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대회 성적도 초라하여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예선전에서는 한국에게 0-11로 졌다. 이 경기에서 황선홍에게 8골을 내 주며, 한국 국가대표 개인 1경기 최다 골 기록을 만들어 줬다. 이 기록은 9년이나 유지되다가, 2004년 아시안컵 지역예선(2003년에 치름)에서 한국에게 0-16으로 지며 한국축구 사상 최다골차 승리 기록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이건 네팔에게도 최다골차 패배 기록으로 남았다. 그래도 1986년 월드컵 예선전에선 한국과의 홈경기에서 0-2로 선전한 적도 있다. 그리고 1999년 남아시안게임 대회에서 부탄을 상대로 12:0으로 이기면서 몰디브와 더불어 90~2000년 사이에 10점차 대패를 당한 최약체가 10점차로 다른 나라를 이긴 기록을 거둔 바 있다. 그런 네팔 리그에서 한국 선수 모집을 한다고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일간스포츠 기사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한국 선수들이 인도네시아나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같은 동남아 리그에서 꽤 여럿 활약하고 있다. 다만 서남아시아 쪽으론 활약하는 한국 선수에 대한 정보가 없다. 자세한 건 네팔 축구 국가대표팀 참고할 것.
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그러하듯 크리켓도 좀 하는 편이다. 1975년에 세미 프로리그이긴 해도 크리켓 리그가 문을 열었다.하지만 인도나 파키스탄같은 크리켓 강호는 그렇다쳐도 이웃 방글라데시나 아프가니스탄보다 실력은 떨어진다.
1999년부터 야구보급이 시작되어 약 17년을 거쳐 경기 인구는 약 300명까지 늘었다. 2010년 네팔 야구 연맹 (NBF)이 정식으로 설립. 2020년 도쿄 올림픽의 예선 출전을 목표로 노력하고 있다.# 2016년 12월 16일부터 18일 이틀 동안 사상 처음으로 네팔에서 5개팀이 참가하는 국내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는데 이 대회를 통해 2017년 서 아시안 야구 컵 대회 출전을 위한 국가대표팀을 선발할 계획이라고 한다.# 2017년 네팔 야구대표팀은 이 대회에 나가 이라크를 13-1로 콜드게임으로 이겼지만 다음경기인 파키스탄 전은 0:16으로 대패하며 콜드게임패로 탈락했다.
개인 종목은 어느 정도 하는 듯 하다.아시안 게임에서는 1951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 처음 나왔으나 메달을 1개도 못 받고 47년 동안 불참하다가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오랫만에 나와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받은 게 최고성적이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태권도 종목에서 동메달 3개를 받았으며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권투에서 동메달 1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여자 가라테에서 동메달 1개를 받았다. 88 올림픽 태권도에서 동메달을 받았으나, 시범종목인 탓에 집계에서는 제외됐다.
14. 관광 팁[편집]
- 전반적으로, 외국인들은 자기들보다 훨씬 잘 살기 때문에 바가지 씌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건 그 사람의 인성이나 도덕관, 성격과는 무관한, 일종의 외국인에 대한 문화 같은 것이다. 애초에 자국민들 사이에서도 일단 높게 부른 후 깎는 게 일반적인 거래 모습인 판이니 확실히 붙임성 좋고 흥정 잘 하는 관광객이 유리하다.[52]
- 국가적 바가지도 있다. 인도, 부탄 등 무비자로 오갈 수 있는 국가와 여타 국가의 가격표가 대놓고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모습 역시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게 네팔에선 합법이다. 당연하겠지만 무비자 국가들의 경제수준 자체가 낮은 편이라 가격 역시 훨씬 저렴하다. 이런 품목에는 문화/관광 입장료, 일부 공산품, 레저/엑티비티 요금, 숙박비 등이 포함된다.[53]
- 공항(또는 버스 터미널)에 캐리어 끌고 내리면 택시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싼 숙소를 소개해 주겠다며 택시비도 깎아 준다고 하는데 절대 넘어가지 말자. 거의 100%로 기사가 손에 쥐고 흔들던 사진과 실물이 다르고, 시세에 비해 엄청난 바가지를 씌운다. 숙박업소는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알아본 후 직접 예약하지 말고 찍어둔 곳에 가서 역시나 흥정하는 게 가장 저렴하게 묵을 수 있는 방법이다. 대충 정했으면 택시에 타기 전에 단호히 목적지를 말한 다음 요금부터 합의하자. 네팔 택시의 미터기는 장식이다.[54] 요금 합의 없이 그냥 갔다간 도착 후 기사가 부르는 게 요금이 되고, 싸네 비싸네 실랑이를 벌이면 기사가 경찰을 부른다. 개발도상국 경찰이 다 그렇듯 기사 편을 드는 건 누구나 예상 가능한 귀결. 그렇게 해서 목적한 숙소 부근에 도착하면 관광객들이 가장 많은 가게에 가서 돈을 조금 지불하며 가방을 잠깐 맡아 달라고 하면 된다. 이제 유유자적하게 둘러보며 적당한 숙소를 찾아보자.[55]
- 장기 여행을 계획하며 비용을 줄이려고 아파트나 레지던스를 알아보는 경우도 있는데, 일장일단이 있다. 비슷한 수준의 호텔에 비해 값은 확실히 싸지만 네팔은 한국처럼 손쉽게 쇼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며, 수시로 끊기는 수도와 전기 상황에 스스로가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집주인이나 관리자에게 연락하면 조치를 취해준다고는 하지만 한국처럼 즉시 달려오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고, 단수나 단전 같은 상황은 그들이 와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56]
- 트레킹/레저/액티비티 프로그램을 알아보다 보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현지인이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안타깝지만 일단 경계부터 하는 게 좋다. 한국말로 안심시킨 뒤 엉망인 업체를 비싼 가격으로 연결해 주고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 브로커가 대부분이다. 본인이 직접 업체로 데려다 주는 게 아니라, 소개업소[57] 앞에서 차를 기다린 다음 차가 오면 자기들끼리 네팔어를 쑥덕쑥덕거린 후 고객을 태워보내거나, 심지어 여기서 기다리면 차 온다는 식으로 말하고선 자긴 그냥 가버리는 경우조차 있다. 브로커는 그 이후에 대해서는 당연히 책임지지 않는다. 안내 책자에 찍힌 사진은 근사해 보이겠지만 실제로 추가요금을 계속 요구하거나 하는 식으로 지출이 계속된다. 이렇게 되면 돈 날려서 아까운 것도 아까운 거지만 패러글라이딩이나 트레킹에 무허가 업체가 걸리기도 해서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조금 비싸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은 투숙 중인 숙박업소에 문의해 보는 거다. 물론 호텔 주인도 업체 측에서 소개 수수료를 받긴 하지만 흥정이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네팔리들도 한국인들처럼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기 때문에 호텔업을 할 정도로 돈을 번 사람들은 돈 몇 푼 노리고 자기 위신에 먹칠하는 짓을 매우 어리석다고 여기는 데다 여행사이트 리뷰를 신경쓰기 때문에 브로커들처럼 똥구덩이에 툭 던져놓고 나몰라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 외국인 상대로 대부분 친절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든다. 간혹 끔찍한 강력사건이 생기긴 하지만 사실 비율로 따지면 (한국을 포함한) 타 국가 외국인 상대 범죄에 비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좀도둑은 상당히 많은 편. 심지어 숙소 주인이 관광객이 묵는 방을 뒤져서 여행경비를 절도하는 사례조차 드물지 않을 정도다. 오죽하면 장기관광객들은 가장 안전한 금고가 자기 주머니 속의 지갑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 선불 유심을 사서 쓰면 국제전화, 인터넷 등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일일이 전신주를 세우고 선을 깔아 유선통신 인프라를 만들 여력이 없는 나라인 만큼 오히려 무선에 투자를 많이 했기 때문에 통신사정은 좋은 편이다. 인터넷이 느리고 자주 끊기긴 하지만[58] 전화 자체는 무리 없고 요금도 한국 기준 생각하면 비싸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국처럼 네팔도 다양한 선불 요금제가 있고 취급가게마다 가격이 다르니 장기여행을 하며 인터넷을 계속 쓸 거라면 발품을 조금 파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이다. 히말라야 산속은 위성 Wi-Fi를 쓰는데, 롯지 주인과 역시 가격 흥정을 해야 한다. 한국 물가를 생각하면 딱히 비싸지 않지만 현지 물가로는 아주 비싼 편. 사람이 사는게 신기한 동네이니만큼 그러려니 하자. 가끔 담벼락 옆 스팟 같은 것에서 무료 Wi-Fi가 잡히는 기가 막힌 산속 동네도 있다.
- 먹거리, 기념품, 옷 등 대부분은 흥정이 가능하지만 공산품[59] 은 흥정이 안 된다.[60] 부르는 게 값인 다른 제품들과 달리 공산품은 정찰제며 가격표가 붙어 있다. 달리 말하면 상인들도 바가지를 씌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단, 네팔의 산업구조 특성상 공산품 가격은 한국과 큰 차이가 없고 질은 훨씬 떨어지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여기보다 더 비싸다고 봐야 한다.[61]
- 공산품을 구입할 경우, A가게에서 100루피 가격표 붙은 물건을 그 돈 주고 샀는데, B가게에서 같은 제품에 같은 가격표가 붙었음에도 150루피를 달라고 할 경우 가격표로 클레임을 걸어 보자. 그때 주인이 할 수 없다는 듯 생색내며 정가를 받기도 하지만, 단호하게 못 깎아준다고 하면 그 제품은 흥정불가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 무작정 주인만 욕하기도 그런 게, 네팔은 유통수준 역시 열악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좀 큰 A가게에 들어온 공산품을 작은 B가게가 사다가 파는 경우가 많아서다. 사실 네팔 물가 생각하면 얼마 안 되는 돈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아득바득 단돈 1루피라도 아끼고 싶다면 안 된다는 걸로 실랑이 하느니 좀 더 걸어서 A가게 가는 게 낫다. 단 과자 같은 공장 생산 먹거리류나 주류는 일단 공산품 취급이라 가격표가 붙어 있긴 한데 한국 편의점 이벤트마냥 싸게 파는 경우가 많다.
- 만약 루클라나 포카라 등, 카트만두를 벗어났다면 기념품은 귀국하며 카트만두로 돌아왔을 때 구입하는 편이 낫다. 카트만두에서도 그곳들에서 본 모든 걸 구할 수 있다. 비슷한 제품이라도 카트만두(특히 타멜)가 훨씬 저렴하다. 이 역시 네팔의 열악한 물류와 산업화에 기인하는데, 다른 지역이 카트만두보다 특별히 바가지를 씌우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동네의 생산력이 카트만두에 미치지 못해서 그런 거다. 물론 동종업계 경쟁이란 요인도 있다.
- 만약 당신의 철학 중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있다면 흥정은 적당히 하자. 먹거리는 물론 옷을 일일이 손으로 뜨고 짜서 만들고 심지어 기념품조차 한국처럼 공장에서 찍어내는 게 아니라 손으로 붙이고 조립하는 식으로 만드는 곳이다.[62] 작정하고 깎으려 들면 정말 1/10까지도 깎을 수 있겠지만 항간에 도는 소리와 달리 그렇게까지 해도 남는 장사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팔아야 하니 그런 거다. 제품을 살펴보고 한국이라면 이런 거 얼마쯤 줘야 할까 생각해 본 다음 가격을 물어 보면 상인이 바가지 씌운 가격조차 너무 싸서 놀랄지도 모른다.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만든 '공임'이라는 생각을 하면 비싸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을 것이다.
- 네팔에서 울(Wool)이나 캐시미어라고 하면 양털이 아니라 염소털이다. 그러나 이게 우리가 아는 뻣뻣한 염소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고품질인데 역시 핸드메이드.[63] 가격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하다. 참고로 염색도 수제라 그런지 디자인이 비슷한 제품은 많아도 정확히 똑같은 제품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는 다른 핸드메이드 제품 모두에 해당한다.
- 대마줄기로 만든 가방도 기념품으로 고려해볼 만하다. 일단 한국에선 구하기 어려울 뿐더러 이 역시 사람이 손으로 직접 짰단 유니크함이 있다. 대마줄기의 내구성은 합성섬유 뺨치기 때문에 품질 걱정은 접어도 좋다. 생가죽 제품[64] 도 아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데 대신 이쪽은 안감 처리 같은 게 안 돼 있어서 한국에 돌아와 수선집서 좀 보강해 줄 필요가 있다.
- '에베레스트'나 '구르카' 등 네팔 맥주가 한국 맥주보다 훨씬 맛있다. 구르카는 도수가 높고 에베레스트는 도수가 낮으니 참고. 단, 현지 담배는 거의 한국의 화랑, 청자 수준이라 선진국형 저타르 담배에 익숙해진 사람은 거의 뽕맞은 수준으로 뿌리부터 휘청이는 느낌이 두통과 함께 몰려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반나절 동안 올라오는 가래는 덤이다.[65]
- 추천하는 선물용 기념품은 차(茶)류, 가방, 캐시미어 제품. 네팔 차는 이미 유명하며, 직물 가방은 물론 가죽제 가방의 품질이 가격대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다. 물론 마감 디테일과 품질 등은 떨어지지만 귀국 후 수선집에서 보강하는 비용까지 감안해도 비슷한 제품을 한국에서 사려면 적게는 너댓 배, 많게는 열 배 이상 줘야 할 정도. 전술한 캐시미어 직물류도 강추다. 모두가 (적당한 수준의 흥정을 감안할 때조차) 품질에 비해 가격이 매우 저렴해서 캐리어에 꽉꽉 채워 귀국 후 지인들에게 마구 뿌려대도 아깝지 않다. 그 외 독고저나 오고저, 쿠크리 모형 같은 장식품도 좋다. 역설적으로, 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많은 기념품이 풀메탈[66] 을 주조, 연마한 것들이라 취향에 따라선 이것저것 탐나는 것들이 많을 수 있다.[67] 네팔 국기나 국명이 크게 박힌 나염티셔츠는 품질이 심각하게 들쑥날쑥해서 선물용 보다는 본인의 뽑기운을 시험해 보는 용도에 어울린다. 무엇보다도 석청은 절대로 사지 말자. 이 꿀은 그레이아노톡신(Grayanotoxin)이라는 신경독을 가지고 있는데, 예전에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석청을 먹고 중독되어 사망한 사례가 나왔다.[68] 석청의 경우 꿀벌이 꿀을 따다가 독성이 있는 철쭉의 성분이 들어가는 일이 많은데도 악덕 상인이 검증 없이 팔았고, 이를 모르는 관광객이 구입해서 먹고 사망한 것이다. 아무튼 검증되지 않은 것이 대다수이므로 사지 말자.[69]
[1] Sanghiya Loktāntrik Ganatantra Nepāl[2] Jananī janmabhūmiś ca svargād api garīyasī[3] 여러 색의 꽃들 중에 오직 빨간색 꽃만 네팔의 꽃이라고 불린다. 랄리구라스는 보통 봄철인 3월이나 4월에 피며, 1200m에서 최고 3600m의 고도에서 자생한다. 국장에 그려진 꽃이 바로 이 랄리구라스다.[4] 1814년부터 1816년까지의 영국과의 전쟁 끝에, 구르카를 필두로 항전한 네팔이 영국에 결국 패배하여, 영토 일부를 할양하고 영국 통감(resident, 조약 원문에서는 accredited ministers)을 두어 영국의 종주권(suzerainty)을 인정하며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에 의해 외교권을 제약받는 속국(vassal state)이 되었다. 형식적인 독립은 인정되었으나 인도 제국 행정구역에 대한 Imperial Gazetteer of India(1909) 책에 의하면 간혹 인도 번왕국 중의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5] 처음으로 영국이 네팔을 독립된 자주국으로 인정하고 네팔 정부의 독자적인 외교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조약이다. 그 전까지 직간접적으로 네팔을 좌지우지하던 영국이 마침내 네팔을 온전한 독립국으로 인정한 데에 의의가 있다.[6] 인도처럼 힌두교도가 가장 많다. 1814년 영국의 침공 시 구르카를 중심으로 저항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네팔 역시 영국령 인도 제국을 거쳐 인도 공화국의 일부가 되고 네팔 왕국은 흔한 인도의 역사상 소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7] 그러나 네팔의 주장이 맞다고 보기는 어렵다. 네팔이 석가모니가 네팔인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단지 출생지가 현재 네팔 영토에 있다는 것밖에 없는데 그 논리를 인정해버리면 동명성왕의 출생지가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해 있으니 중국에서 동명성왕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해도 한국 입장에서는 반박할 수가 없다. 석가모니가 태어난 카필라 왕국은 지금의 네팔뿐만 아니라 인도 북부에도 영토가 걸쳐 있었던 나라로 고대 인도의 영역으로 간주되며, 네팔이란 나라가 처음 생긴 시기는 석가모니가 죽은 지 2,000년도 넘은 1768년으로 출생지 외에 석가모니와 네팔인과의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근거는 없다.[8] 힌두교에서 붓다는 비슈누의 9번째 화신이다.[9] 이미 힌두교 결혼식을 비밀리에 올리기도 했다.[10] 일설에 의하면 갸넨드라가 형 비렌드라 전 왕의 정책에 반대했다고 한다.[11] 마치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이란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파와 사회주의 파, 자유주의 파 세력들이 왕정 폐지를 주장하며 팔라비 왕조를 전복시킨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만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된 이후에 호메이니와 하메네이를 위시한 이슬람 근본주의 파들이 혁명 시기에 손잡았던 사회주의, 자유주의 세력들과 권력을 잃고 몰락한 구 왕조 시대의 권력층들을 모두 축출, 제거하고 단독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독점하여 이슬람 신정 체제 정권을 수립한 이란과 달리, 네팔은 왕정이 폐지된 이후에도 정권을 장악한 마오주의 반군 세력들이 이전 왕정 시대에 존재했던 기타 야당 세력들과 나머지 구 왕조의 기존 정치 세력들을 모두 축출, 제거하지 않고 정치권력에 그대로 두어 다당제 민주정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12] 이들은 공화국이 된 현재 네팔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폐지된 네팔의 샤 왕조가 네팔 유일의 합법 정권이라고 주장하며 갸넨드라와 샤 왕조 일가들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카트만두 도심에서 왕정복귀와 공화정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정도다.[13] 역대 국왕 중 최장기 재위.[14] 1950년 11월 7일 망명했다가 1951년 1월 7일 복위했다. 그 사이 짧은 두 달 동안 국왕이었던 사람은 당시 네 살이던(...)[15] 역대 국왕 중 최단기 재위.[16] Rastriya Panchayat(국가 위원회), 줄여서 Panchaayat. 네팔어로 판차야트는 의회, 위원회라는 뜻이나, 보통 '판차야트'라고만 할 때에는 1961년부터 1990년까지의 무정당 판차야트를 가리킴.[17] 농민 단체 4명, 청년 단체 4명, 여성 단체 3명, 노동자 단체 2명, 퇴직 군인 단체 2명[18] 1971년 당시 네팔의 대학 졸업자 수는 1만 3천 명이었다.[19] 지역 대표조차 국민이 직접 선출한 것이 아니니, 결국 네팔 국민 중에 선거권을 가진 사람이 대학 졸업자 1만 3천 명뿐이었단 얘기다.[20] 정부가 발표한 인명 피해는 사망 11명에 부상 164명이다.[21] 국민투표는 노랑과 파랑이 인쇄된 투표용지를 썼고 판차야트를 지지하는 사람은 노란색, 다당제를 지지하는 사람은 파란색에 기표하도록 했다. 네팔 국민 대부분이 믿는 힌두교에서 노란색이 종교적인 의미(성인聖人을 가리킴)가 있다는 점에서 국민투표 당시에도 색깔을 의도적으로 선정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투표 결과가 색상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22] 지역 대표 112명과 국왕 임명 28명으로 구성되었다.[23] 1981년 선거는 1959년 이후 22년만의 보통선거였음에도 투표율이 52%에 불과했다. 다당제를 지지한 사람들이 판차야트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얘기.[24] 대신 왕당파인 '국가민주당'이 창당되어 총선에 참여하였다.[25] 갸넨드라가 해산했던 의회의 의원과 임명직 의원을 합쳐 330명으로 구성되었다.[26] 지역구 120개에서 2명 씩 선출[27] 지역대표 120명, 비례대표 100명, 의회 임명 9명[28] 1위이든 2위이든 120개 모든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단 얘기다.[29] 330석중에 220석 차지했다. #[30] 220석이 80석(!)으로 줄었다.[31] 이 때문에 2년 임기의 초대 대통령이 7년 째(!) 대통령을 하기도 했다. 2013년 총선도 제헌 의회를 다시 구성한 것이다. 제헌 의회 선거를 두 번 한 나라가 또 있나?[32] 산술적으로 득표율이 0.3%만 넘어도 의석 배분이 가능하다. 실제로는 0.22%를 득표한 정당에까지 의석이 배분되었다.[33] 2013년 총선 때 의회에 진출한 정당은 30개, 이 가운데 당선자 수가 10명을 넘지 않는 하위 22 정당의 의원 합계가 78명이다.[34] 위키피디아에는 5개 대구역 아래 14개 주가 있고, 그 밑에 75개현이 있다고 되어있다. 근데 구글 지도로 보면 5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35] 7개 주 가운데 북부 3개 주에서 실시되었다. 남부 4개 주는 6월 중 실시했다.[36] 게다가 갸넨드라 전 왕은 제위 말기에 시민과 야권 세력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입헌군주제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가 정치권의 인사들이 왕정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고 주장한다.[37] 그러나 마오주의 반군들도 네팔 정부군 못지않게 민간인을 학살하고 정부군 협력자들을 총살하는 등의 전쟁범죄들을 자행했다. 이렇다 보니 마오주의 반군의 전쟁피해를 겪었던 당시의 피해자들도 현재 네팔의 주요 고위층이 된 마오주의 출신 정치가들도 전쟁범죄자로 기소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마오주의 세력들에 대해 적대적이다. 정부군 피해자 VS 반군 피해자.[38] 현재 갸넨드라의 나이가 칠순이라 만약에 갸넨드라가 사망할 시 파라스가 샤 가문의 다음 당주 자리를 이을 가능성이 높다.[39] 갸넨드라 전 국왕과 파라스 전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사들은 네팔 왕실 참변때 전원 사망했거나 생존자도 여성들뿐이고, 갸넨드라의 일가족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직계가 아닌 방계들 밖에 없어 적통성이 부족한 방계 출신의 왕족을 국왕이나 왕위 계승자로 내세우기 더 어렵다. 더군다나 갸넨드라 전 왕의 직계자식들중 논란과 비판이 적은 프레라나 전 공주와 비렌드라 전 국왕의 여동생인 쇼브다 전 공주, 외손녀 기르바나 전 공주와 수랑가나 전 공주는 여자라서 남자 직계 왕족만이 승계할 수 있는 네팔 구 왕가의 계승법상 왕위 계승자나 여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40] 왕정 폐지 이후에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41] 본래 온건 사민주의 성향의 네팔 회의당은 왕정을 지지했지만 갸넨드라 국왕이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전제 정치를 펼치자 왕정폐지를 주장하며 공화주의로 노선을 변경하여 네팔 왕실과 대립했다.[42] 이는 고산지대가 많은 국가의 국민들이라면 모두 마찬가지다.[43] 한국의 산은 사실 산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것들이 많다. 한국의 산들은 구릉이라고 부를 만한 산이 많기 때문이다. 100~300m의 짜잘한 산이 많은 편이다.[44] 물론 이 '평지 번화가' 역시 한국 기준의 평지가 아니다. 사랑곳에 사는 학생이라면 아마도 할란촉에서 스쿨버스를 탈텐데, 이미 할란촉 자체의 해발도 꽤 높다.[45] K2, 가셔브룸 1/2, 브로드피크는 정확히는 카라코람 산맥에 위치해 있다. 두 산맥 모두 인도 판과 유라시아 판의 충돌로 인해 생겨났다.[46] 인도 화폐 1루피당 1.6네팔루피 고정환율을 따른다. 2016년 3월 기준 약 5,600원.[47] 대부분 중국과 국경을 맞댄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중국티베트어계통의 영향이 강한 편이다. 이에 반해 인도와 국경을 맞댄 남쪽은 인도유럽어계통 언어의 영향령이 압도적으로 강하다.[48] 알바니아 역시 한국보다 인구 문제가 심각해질 예정이다.[49] 카트만두도 경찰들이 많이 돌아다녀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일부 골목거리를 제외하곤 치안유지가 잘 돼있는 편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위험한 곳으로 가려고 하면 A.P.F란 명찰을 찬 방탄복 입고 소총이나 권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친절하게 가지 말라고 하니, 지시만 잘 따른다면 '위험한 어두운 동네'로 가게 될 일은 극히 드물다.[50] 양귀비꽃으로 만드는 아편.[51] 2022년 기준 카트만두 시내에 정상작동하는 신호등이 여럿 생긴것은 물론, 전기차와 전기버스도 돌아다닌다. 2022년 네팔의 수출액 5위가 인도로 수출하는 전력이었다.[52] 이런 흥정 문화는 도시화, 산업화가 덜 된 지역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한국 역시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정찰제를 장려하다 못해 어기다 걸리면 벌금까지 부과하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53] 사실 네팔 뿐아니라 관광자원 외에는 딱히 외화를 벌어들일 수단이 없는, 산업화가 미약하고 가난한 나라(예를 들어 이집트 등 중동의 저소득 국가)에서는 많이들 시행하는 정책이다.[54] 차라리 장식인 게 낫다. 혹여 기사가 미터기를 꺾는다면 무조건 당장 내리자. 100% 조작 미터기다. 10배까지 당했다는 경험담도 있다.[55] 물론 자물쇠는 채워 둘 것. 관광객의 가방을 찢어가면서까지 물건을 훔치지는 않지만, 열리는 가방을 몰래 턴 다음 시치미 떼는 경우는 많다.[56] 호텔은 대부분 자체 물탱크와 발전기, 하다못해 대용량 축전지라도 구비하고 있어서 적어도 전화나 노트북 충전 같은 건 가능하다.[57] 간판 자체는 레저/액티비티 소개소처럼 꾸며 놓았다.[58] 사실 20년 전 이미 고속인터넷에 젖은 한국 사람이나 복장터져하지 다른 나라 대부분 관광객들에게 물어보면 이 정도면 훌륭한 수준으로 평가한다.[59] 특히 라이터, 휴지, 비누 등의 소모성 생필품이나 약품 등.[60] 정확히는, 흥정할 수는 있지만 상대가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만약 응한대도 결과적으로 관광객이 현지상인을 등쳐먹는 결과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후술.[61] 대부분이 아주 열악한 중국제거나, 그보다 못한 네팔 생산품이다.[62] 그래서 같은 제품이라도 미묘하게 모양이 다른 종류가 수두룩하다.[63] '메이드 바이 XX팩토리'라고 써 있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공장이 아니라, 수제품 생산 공장이다. 네팔 여성들이 커다란 건물 한 지붕 아래에 모여 직접 베틀 같은 걸로 뜬 거라 결국 핸드메이드 맞다.[64] 주로 (물)소나 염소 가죽.[65] 애초 궐련임에도 필터가 없는 종류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말보로 등 일부 브랜드는 네팔에서 생산할지언정 20년 전 군팔 정도 수준은 된다. 그리고 던힐 등 아예 수입해 들어오는 브랜드는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66] 주로 주석이나 구리.[67] 단 칼은 모형이라도 금속제일 경우 중국검색대에서 걸리면 압수당한다. 돌아다니다 보면 칼집까지 같이 파는 것들이 있는데, 이런 건 X레이에서 걸려도 직원이 꺼내보고도 칼인 줄 모르거나, 알아채도 작으면 봐 준다.[68] 해당방송분에서 히말라야 석청에 들어있는 그레이아노톡신이 성인기준 3숟가락만 먹어도 10분만에 사망에 이를수있다고할정도로 맹독성물질이다. [69] 석청은 애초에 2005년에 수입이 금지되어있다. 가져간다 해도 대부분 검역에 걸려 폐기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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