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록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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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1대 부통령
넬슨 올드리치 록펠러
Nelson Aldrich Rockefeller


파일:Nelson_Rockefeller.jpg

출생
1908년 7월 8일
미국 메인 주 바하버
사망
1979년 1월 26일 (향년 70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재임기간
제41대 부통령
1974년 12월 19일 ~ 1977년 1월 20일
제49대 뉴욕주지사
1959년 1월 1일 ~ 1973년 12월 18일
서명
파일:넬슨 록펠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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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어머니 애비 올드리치
형제자매
누나 애비 록펠러 모스
형 존 데이비슨 록펠러 3세
남동생 로렌스 록펠러, 윈스롭 록펠러, 데이비드 록펠러
배우자
메리 토드헌터 클라크 (1930년 결혼 / 1962년 이혼)
마가레타 피틀러 머피 (1963년 결혼)
자녀
장남 로드먼 클라크 록펠러[A]
장녀 앤 클라크 록펠러[A]
차남 스티븐 클라크 록펠러[A]
차녀 메리 클라크 록펠러[A]
삼남 마이클 클라크 록펠러[A]
사남 넬슨 록펠러 주니어[B]
오남 마크 피틀러 록펠러[B]
학력
다트머스 대학교 (경제학과 / 학사)
종교
개신교 (침례회)
정당


1. 개요
2. 약력
3. 생애
3.1. 복상사?
4. 선거 이력
5. 기타



1. 개요[편집]



파일:넬슨록펠러초상화.jpg

뉴욕 주지사 공식 초상화
미국의 제41대 부통령.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둘째 손자이며,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와 애비 올드리치 록펠러의 5남 1녀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데이비드 록펠러의 둘째 형이다.

두 번의 결혼으로 5남 2녀를 낳았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손자들 중에서 가장 자녀가 많았다. 막내 아들 마크 피틀러 록펠러는 1967년생으로 장남 로드먼 클라크 록펠러(1932년생)과는 34살이나 차이난다.


2. 약력[편집]


  • 뉴욕 근대미술관장
  • 국무부 남미담당 차관보
  • 보건교육후생부 차관
  • 1954.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특별보좌관 (1954. ~ 1956.)
  • 1959.1. 제49대 뉴욕 주지사 (1959.1.1. ~ 1973.12.18.)
  • 1974.12. 제41대 미국 부통령


3. 생애[편집]


1908년 미국 메인 주 바하버에서 태어났다. 다트머스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가문의 비즈니스와 자선사업을 도우며 뉴욕 근대미술관장 등을 지내다 FDR, 트루먼 민주당 행정부 시절 국무부 남미 담당 차관보, 보건교육후생부 차관 등을 지냈다. 이후 1954년 공화당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임명됐다.

그렇게 1956년까지 보좌관직을 수행하다 1958년 뉴욕 주의 주지사 선거에 당선되어 1959년부터 뉴욕 주지사로 지냈고, 재선, 3선, 4선에 성공해 1973년까지 뉴욕 주지사로 있었다. 이시기 그는 공화당에 큰 영향력을 끼쳐 이른바 록펠러 공화당이란 당내 리버럴 파벌이 생길 지경이었다.

파일:넬슨 록펠러와 키신저 2.jpg
1975년, 넬슨 록펠러와 헨리 키신저. 키신저는 록펠러 공화당 소속이였다. 키신저가 대외 정책에서 벌인 각종 내정 간섭이나 정치 공작 작업 때문에 극우로 오해할 수 있는데, 키신저는 내정 부분에선 중도 온건 성향이었다.

사상은 공화당내 리버럴 포지션으로 낙태, 동성애 등 각종 사회 이슈에 온건적이며, 시장만능주의, 감세지상주의를 경계하고 복지 정책 등에 있어 정부의 역할을 중시했다. 이런 그의 노선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내건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들이 실권을 잡기 전까지 공화당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록펠러는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선 경선에서 모두 떨어진다.[1]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이 되어 부통령직이 공석이 되자 포드에 의해 부통령에 지명되었다. 허나 1976년 미국 대선에서 포드를 누르고 지미 카터가 당선되자 부통령직을 퇴임했다.[2] 돈도 많겠다 퇴임 후에도 유유자적하게 산걸로 보이는데, 퇴임 2년 후인 1979년 1월 26일 본인의 보좌관인 메건 마섁(Megan Marshack)과 함께 있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3.1. 복상사?[편집]


그의 사망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었는데, 넬슨과 메건이 밤에 단 둘이 있다가 사망한 것을 두고 두 사람이 성관계를 하다가 넬슨이 복상사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기 때문이다. 메건은 1953년생으로 넬슨의 사망 당시 파릇파릇한 20대 중반의 나이였고 심근경색도 복상사 사인 중의 하나[3]이기 때문. 넬슨의 자녀들은 '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응급처치를 시도했으나 이미 손을 쓸 수 없었다.'라고 했을 뿐 이 복상사 문제에 대해선 주장을 꺼내지 않았다. 메건 역시 이에 대해선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하지만 넬슨 록펠러가 사망했을 때 록펠러 가문이 거짓말을 했다는 점[4], 메건이 골든타임을 넘겨 자신의 친구에게 911에 신고 전화를 하도록 전화를 걸어 유도했다는 점 등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현재는 넬슨 록펠러가 복상사한 것이 유력하다고 여겨진다.

이게 워낙 유명해지는 바람에 지금도 넬슨 록펠러=여비서와 떡치다가 복상사한 사람(...)으로 박제 알려지게 되었다.

Nelson thought he was coming, but he was going.(넬슨은 자기가 간다고 생각했지만 가는 건 하늘나라였다.)

당시 뉴욕 매거진의 기사 제목[5]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58
미국 주지사 선거
뉴욕


3,126,929 (54.73%)
당선 (1위)
초선
1962
3,081,587 (53.08%)
재선
1966
2,690,626 (44.61%)
3선
1970
3,151,432 (52.41%)
4선[6]


5. 기타[편집]


여러차례 대통령직에 도전했는데, 가장 가까이 간 건 1964년 대선. 공화당의 유력주자였으나 여러 후보들이 난립한 끝에 배리 골드워터에게 패배한다. 골드워터는 온건파 성향인 록펠러와는 대비되는 강경한 인사였기 때문에 록펠러는 골드워터를 꺼렸다. 그 때문인진 몰라도 골드워터 역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지명했을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리처드 닉슨이 1960년 대선 후보가 됐을 때도 경선 경쟁자였던 록펠러에게 부통령 후보직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불과 얼마전인 1959년에 뉴욕 주지사가 됐는데 허수아비 소리듣던 미국 부통령이 되고 싶지는 않았을 듯. 그의 삶에 있어 최고 전성기는 인생 막판 포드 대통령 시절 2년 하고 그만이었던 부통령직보단 실권을 행사하면서 4선을 지낸 뉴욕 주지사 시절이었다고 보는게 더 맞을듯. 물론 부통령 출신이 이후 대통령이 되는 케이스도 꽤 생겨나고 있는걸 보면 이때 부통령직을 수행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와선 모든게 가정의 영역이긴 하다.

개인적으로는 아픔이 있었는데, 인류학도였던 막내아들 마이클 록펠러가 1961년 11월 뉴기니 원주민을 조사하러 떠났다가 실종되는 일을 겪었다. 마이클 록펠러 실종사건과 사망 정황을 다룬 '마이클 록펠러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도 등장했으며, 여러 정황상 뉴기니 원주민의 식인 행위에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실종 사건 8년 후 뉴기니 섬을 촬영한 다큐에서 원주민과 함께 카누를 젓는 마이클 록펠러로 추정되는 백인이 영상에 담겨 있어, 마이클이 살아서 뉴기니에 정착했다는 다른 의견도 있다. 이 다큐에 담긴 백인 모습은 수십년 동안 그 존재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후일 눈썰미 좋은 프레이저 헤스턴이라는 다큐 제작자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다큐를 찍은 시점으로부터 이미 50년이 지나있어 마이클의 실종과 그 이후를 확인할 수 없어 마이클 록펠러의 실종 사건은 말 그대로 아직도 미스터리다.

특이한 일화가 있는데, 그가 주지사 시절 높은 아파트에서 살 때 공공 고층건물[7]을 짓는 계획이 세워져 전망이 방해받게 되자 그 계획의 담당자인 미드 에스포시토 민주당 당수를 집으로 초청해 피카소 그림을 줄테니 계획을 취소하라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에스포시토가 그것을 받아들여 피카소 그림을 주게 되는데, 훗날 록펠러는 그 그림이 모조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권력을 잡을 기회가 한번 있었다. 왜냐하면 제럴드 포드가 임기 도중 두 번이나 암살 미수를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8]

부통령 재임 시기인 1974년에 미국 부통령을 위한 전용 관저인 '옵서버토리 서클 1번지'(Number One Observatory Circle)가 처음 배정되었다. 이전까지 미국 부통령은 별도 관저가 없이 임의로 거처를 마련하고 그 곳에서 출퇴근했다. 그러나 부통령에 대한 보안 및 경호 문제가 대두되면서 부통령 관저도 마련된 것. 그러나 정작 넬슨은 이 곳에 정식 입주하지 않고 손님 접대용으로만 사용했다. 그래서 옵서버토리 서클 1번지에 최초로 정식 입주한 부통령은 다음 부통령인 월터 먼데일이 되었다.

6.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록펠러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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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0년과 68년에는 닉슨이 강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64년에는 불륜 의혹 때문에 배리 골드워터에게 발목이 잡히고 만다.[2] 선거 전부터 이미 재선 출마를 포기한 상태였다. 1976년 대선에서 포드의 러닝메이트는 넬슨 록펠러가 아니라 이후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에게 패하는 밥 돌이었다.[3] 흥분해서 힘쓰다가 심근경색이 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해도 '거짓말(사인에 대한)은 하지 않았다. 진실(심근경색이 온이유가 힘쓰다가 온것 이라는것)을 덜말했을 뿐'가 되는것.[4] 록펠러가 록펠러 센터의 자기 집무실에서 사망했다고 거짓 공표했는데 경찰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숨기는 점이 있었던 것.[5] 참고로 '뉴욕 메거진'은 유명한 타블로이드 신문이다. 최대한 선정적으로 제목을 정하다 보니, 저런 언어유희적인 문장이 나왔던 것.[6] 1973.12.18 사임[7] 기록에 의하면 거대한 중지 손가락 모양이 될 예정이었다고 한다.[8] 만약에 암살 당했다면 한 임기에 대통령 3명이 나오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포드는 리처드 닉슨 사임으로 승계받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격당한뒤 포드가 죽었다고 가정하고 록펠러가 대통령직을 승계받고 부통령까지 정해지면 한 임기에 부통령이 무려 4명이라는 것까지 가게 된다. 포드는 부통령도 스피로 애그뉴 사임으로 닉슨이 지명해서 된 것이고, 미국 역사상 선거를 거치지 않은 최초의 부통령과 대통령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