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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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어릴 시절
2.2. 의사로서
3. 죽음
4. 평가
5. 미디어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30px-Norman_Bethune_graduation_1922.jpg
(1890년 3월 3일 ~ 1939년 11월 12일)


캐나다의 흉부외과 의사이자 의료 개혁가.

사회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로, 스페인 내전중국혁명에 투신하였다. 중국에서 수술 중 칼에 베어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전쟁에서 일명 '백구은' 으로 불렸으며 '백구은이 있다!' 라고만 해도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만든 수술 기구로는 늑골 절단기, 늑골 견인기가 있다.


2. 생애[편집]



2.1. 어릴 시절[편집]


1890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곳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 그레이븐 허스트에 있다. 생가가 있으며 기념관으로 쓰인다.

노먼 베순의 출신인 베순 가문은 동부 캐나다의 종교-의료 계에서 유명한 명문가이다. 베순 가문의 뿌리는 스코틀랜드의 의료가문인 Clann Meic-bethad(의료클랜 베타드)로서, 중세이후 유명한 의료가문이었다. 14세기와 15세기 스코틀랜드 국왕의 어의는 모두 이 가문 출신이다. 18세기에 스코틀랜드 국민교회(장로회) 목사 존 베순이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해오며 가문을 세웠다.

존 베순은 본디 오늘날 노스캐롤라이나에 해당하는 영국 식민지역에서 장로교 목사로 사역하고 있었지만, 미국 독립 반대파(왕당파)였기 때문에 미국 독립 전쟁 과정에서 영국령 캐나다로 이주하게 된다. 존 베순은 가톨릭 문화권이었던 몬트리올에 개신교회를 최초로 개척한 인물중 한명이며, 존 베순의 교회는 장로회 교단으로서는 퀘벡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 존 베순은 캐나다 장로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다.

노먼 베순 자신은 아버지 말콤 베순(Malcolm Nicolson Bethune), 어머니 엘리자베스 앤 굿윈(Elizabeth Ann Goodwin)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름도 노먼 베순인데 할아버지 또한 유명한 외과 의사로, 나중에 토론토 대학교 의대로 흡수되는 어퍼 캐나다 의학 학교를 세운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인데 아들인 노먼은 엄청난 장난꾸러기였다고 한다. 일부러 길을 잃어버려서 경찰에게 도움을 받는일도 있었고 또 강에 빠져 죽을뻔한 것도 여러번이다. 또 집안에 있는 물건들 위치를 막 바꾼 장난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PK 참조.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그리 엄하게 탓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빈민층을 많이 생각하고 부유층을 비난했으며 부유층 눈치를 보던 캐나다 장로교단을 비난하며 복지정책을 더 강력히 지원하길 요구하며 사회 개혁가로서 활동도 했다.[1] 아버지의 그런 측면을 닮았는지, 노먼 베순은 의료사회화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 따라 오늘날 캐나다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무상의료의 사상적 뿌리로 노먼 베순을 회고하곤 한다.


2.2. 의사로서[편집]


이런 아버지 영향을 노먼이 크게 받았다. 학비를 스스로 벌며 의과대학에 들어가 연구하던 그는 의학박사 학위를 1년 남은 1915년, 제 1차 세계대전에 캐나다군이 참전하며 그도 참전해 전쟁터에서 종군의사로 활약하다 다리에 부상을 입어서 캐나다로 돌아온다. 그때 많은 깨달음을 얻고 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다. 1916년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의사로 일하던 그는 1923년 프란시스 캠벨 페니 에딘버러와 결혼했다. 에딘버러 집안은 부유층이었기에 경제적으로 큰 지원을 해줬고 그는 이때, 돈없는 사람들에겐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과로한 끝에 폐결핵에 걸리고 만다.

1926년 36살에 의학 서적을 뒤지다가 인공 기흉술[2]을 하겠다고 한다. 주치의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수술을 받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였다. 이 일로 그는 일반 외과 의사가 아닌 흉부외과로 전공을 바꾸고 2년동안 새롭게 공부하여 흉부외과 전문의가 된다. 돈없는 사람들을 여전히 무상으로 치료해줬으며 부유층만을 위한 사회정책에 반발하여 공산당에 가입하며 사회주의 활동도 했다. 이로 인하여 한국에서는 빨갱이라고 하여 오랫동안 묻혀졌었다.

1936년에 내전 중이던 스페인으로 가서 이동 수혈대를 만들어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부상병들을 살리는 활동에 종사한다. 하지만 지속적인 의료활동을 위해서는 추가적인 재정지원이 필요해 캐나다로 돌아왔다가 초빙을 받고 1938년 1월, 중국에 가서 의료활동을 한다.

베순은 팔로군 장군이던 녜룽전(1899년 ~ 1992년)과 만나 의료물품 및 인력 지원을 부탁하지만 즉시 거절당했다. 녜룽전은 부하들을 병자들에게 보내 내 군대를 전염시켜 다 죽일 셈이냐며 거부했는데 분노한 베순은 그를 마구 비난했는데 고맙게도 통역자가 중국어로 녜룽전에게 순화하여 통역한 게 도움이 되었다. 베순은 비겁한 장군이라며 마구 모욕했지만 통역자는 "이 의사는 당신은 훌륭한 장군이라며 칭송하지만 모르는 게 많다고 하고 있습니다. 병이라는 게 전염되는 건 누구도 모르는 겁니다. 군대가 안 걸린다고 좋아라 할 게 아니라고 하네요. 그 군대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전염되어 다 같이 죽어갈지도 모르는 판국에 차라리 사전에 전염을 막는게 군대에게도 좋고 나아가 중국 인민들에게도 당신은 존경받고 군대가 전염을 막는데 이바지하면 군대에 대한 칭송도 받는데 왜 그걸 모르냐고 안타깝다고 하는군요." 녜룽전도 이 말에 생각을 고쳐 팔로군을 동원해 그를 돕게한다.이런 지원에 대하여 베순은 고마워하며 팔로군 부상병 치료에 열심히 나섰고 중국인 의무병들에게 의료기술 전파에도 힘썼다.[3]


3. 죽음[편집]


1939년, 수술 도중 환자의 부러진 뼈에 왼손 중지를 찔렸고, 사흘 뒤 경부에 단독봉소염이 생긴 부상자를 맨손으로 수술하다가 상처 부위가 감염되어 패혈증에 걸리고 만다[4]. 이 병으로 인하여 11월 12일 새벽 5시 20분에 사망했다.[5] 향년 49세였다.

이 당시에 패혈증은 의료여건만 괜찮았다면 얼마든지 치료할수있던 병이었지만 당시 중국의 열악한 의료여건때문에 의약품을 재빨리 공수하기가 힘들었기때문에 결국 세상을 떠난것이었다. 당시 중국 공산군도 의료품 부족에 시달리던 터에 결국 베쑨도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만 셈이다. 묘는 허베이성 스자좡시에 있다.


4.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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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있는 그의 흉상.

중국에서는 헌신적인 행보로 위인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며, 캐나다에서는 캐나다의 이름을 중국에 알린 캐나다인으로 평가된다. 중국에서 평가가 대단히 높다. 중국에 병원 20곳을 건설하여 많은 사람들 목숨을 살리고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하게 해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마오쩌둥만 해도 그를 칭송했고 아예 그 스스로가 《베순을 기념하며(紀念白求恩)》라는 수필을 써 그를 기렸고[6], 그의 유해는 허베이성 스자좡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지린성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의과대학이 세워졌고 스자좡에는 그의 이름을 딴 3개의 병원이 있다. 당연히 전신 동상에서부터 기념비와 여러 상도 세워져 그를 기리고 있다. 요크 대학교는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자 단과대학 중 하나에 그의 이름을 땄다.


5. 미디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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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에 중국, 캐나다, 프랑스 합작으로 영화《Bethune: The Making of a Hero》가 만들어졌다.《바늘구멍》에서 스파이를 인상깊게 연기한 배우 도널드 서덜랜드가 노먼 베쑨을 연기했다.

2000년대 후반에 중국에서 할리우드 배우들을 등용해 영화로도 만들어 국내에 개봉한 바 있다.

웹소설 《트로츠키와 우리 조선 빨갛게 빨갛게》에서도 꽤 비중있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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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서 베순 가문이 캐나다 장로교의 설립자 중 한 명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이때문에 말콤 베순이 원칙주의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2] 결핵이 발생한 한쪽 폐를 허탈시키기 위해서 흉부에 공기를 투입하는 수술[3] 베순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의학적 원칙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극히 격렬하게 화를 내며 상대를 모욕하는 거친 모습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잘못된 의학적 조치를 보고 화내는 것 자체는 의사로서의 양심일 수 있겠으나, 당시 중국의 열악한 사정으로 인한 한계를 감안하지 않고 상대에게 화를 내고 모욕하다가 나중에 후회한 일화도 있다. 녜룽전의 사례 외에도 제대로 된 위생병이 없는 부대에서 독학으로 의학을 배워 동료들을 치료하고 있는 병사의 처치가 의학적으로 정확하지 못하여 환자를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심하게 질책했다가 이후 그 병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을 전해듣고 사과하는 등의 일화가 있다.[4] 당시 잠에서 깨어나지 않자 사람들이 급하게 숙소로 갔고 침대에서 가뿐 숨을 몰아쉬는 베순을 발견했다.[5] 사망 전날인 11월 11일 오후 4시 20분, 베쑨은 마지막 힘을 다해 일어나 앉아 네룽전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6] 특히 기념백구은은 단순한 수필 한 편 정도가 아니라 위인민복무(为人民服务), 우공이산(愚公移山)과 함께 노삼편(老三編)이라 하여 마오쩌둥의 저작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손꼽힌다. 사실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여 참여한 서양인이 베순 하나뿐인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과 입지를 가진 인물이 바로 베순이라는 점은 명확한 것이다. 이는 베순의 업적뿐 아니라 평소 그의 발언이나 주장이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구미에 딱 맞았던 것과도 연관이 있는데, 간단히 말해 유물론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의 전형과는 달리 주의주의, 의지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개인의 노력과 선의, 봉사를 강조하는 마오쩌둥의 주장과 베순의 행적이 잘 어울렸다는 것. 반면 미국의 언론인 아그네스 스메들리 같은 인물은 베순 못지 않게 열렬한 중국 공산당 지지자였음에도 본인의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성향이 마오쩌둥 및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 맞지 않아 베순과 같은 신임을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