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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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5년 1월 10일[1]
황해도 송화현 풍해면 성하동[2]
(현 황해남도 과일군 풍해리)
사망
1926년 1월 22일 (향년 51세)
중화민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양옥 단칸방
묘소
중국 상하이시 정안사 외국인 묘지 비석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9호
주요경력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
육군연성학교 교관
육군무관학교 교육국장
육군무관학교 교장
헌병대대장
육군연성학교 교장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재임기간
제3대 임시정부 국무총리
1922년 9월 ?일 ~ 1924년 4월 9일
말대 임시정부 국무총리
1925년 3월 24일 ~ 1925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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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풍천 노씨(豊川)[1]
부모
아버지 노병균
형제
형 2명
배우자
성명 미상
자녀
아들 노선경, 노태준
노숙경, 노순경
신장
약 161cm 이상[2]
학력
경응의숙 (졸업)
세이조학교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11기 / 학사)

계원(桂園), 진방(鎭邦), 진영(珍榮)
군사 경력
복무
일본제국 육군
1899년 ~ 1900년
대한제국 육군
1900년 ~ 1907년
최종계급
정령,(대한제국 육군),

1. 개요
2. 생애
3. 대중 매체에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시기의 군인이다. 대한제국군에서 대령까지 근무했다.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계원(桂園).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송화현 풍해면 성하동(현 황해남도 과일군 풍해리)에서 시골 유생이던 아버지 노병균(盧秉均)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얼굴도 컸다고 하며 마음이 침착하고 성격이 매우 호탕했다고 한다.# 이후 상경해 한성부 북서 광화방 원동계 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 거주했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경응의숙 보통과를 수료하고 세이조(成城)학교 예비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어담도 당시에 동기로 같이 공부했는데 두 사람의 생애는 매우 달랐다. 다른 동기로는 윤치성, 김관현 등이 있다. 1899년 11월에 일본군 견습사관이 되었고 1900년에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에는 한국의 교육시설이 변변찮아 엘리트를 일본의 사관학교에 보내 공부시켰는데 그 탓에 일본에서 일단 임관한 다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재임관했다.

1900년 대한제국군으로 복귀해 보병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에 육군무관학교, 육군연성학교[3]의 교관을 지냈다. 정위(대위)로 근무할 당시에 러일전쟁을 겪었고 관전사란 직책으로 일본군을 따라 종군하였다. 귀국 후에 정령(대령)까지 진급하여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학교장 등을 지냈다.

당시의 군인들은 일본에서 공부한 친일파가 많았지만 그는 을사조약과 군대 해산 등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진급에서 제외됐고 1907년에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1907년에 군이 해산되자 육군연성학교장에서 물러나고 국방부 역할이었던 군부의 교육국장으로 배속되었다. 당시 한국군에 남은 부대는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 정도가 고작이었고 이들은 실질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부대가 아닌 의장용 부대였다. 한일합방이 이뤄지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최종계급은 대한제국군 정령(대령)이었다.

퇴역 후에는 교육계몽 운동 등 독립운동을 펼쳤고 김구와 접촉하기도 했고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사업은 당시 돈으로 10만원을 잃는 등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1914년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했고 커티스 JN 제니 훈련기 3대를 매입하여 윌로우즈 항공학교를 세웠다. 그 후 하와이에서 국민군단 교관을 지냈다. 시대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항공 전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공군력의 확보, 육성을 강조했다. 이 점에서 노백린은 최용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의 창건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임시정부에 참여해 활동한 그는 군무총장 등을 지냈으나 당시 임정 활동은 극도로 어려웠다. 이후 1923년 1월 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강도, 공갈, 약품 및 약품 영업 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선고받은 기록이 있고, 1924년 3월 1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내란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된 기록도 있다.

1926년 1월 22일에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1993년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국내 운구가 결정되어 중국으로부터 유해가 봉환되었고, 8월 10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자녀인 노선경(盧善敬)[4], 노태준[5], 차녀 노순경(盧順敬)[6] 또한 독립유공자다.

딸 노숙경은 독립운동가인 이가순의 며느리이며 남편 이원재는 의사로 노백린의 차남 노태준이 어린시절 이원재의 집에서 자랐을 정도로 노백린의 자녀들을 돌봐주었다. 이원재의 막내동생인 이원숙 여사는 세계적인 음악가인 정트리오(정경화정명화정명훈)의 어머니이다.


3. 대중 매체에서[편집]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공군 전력 양성이라는 특이한 분야에 힘쓴 인물이기 때문에 개화기, 구한말, 일제강점기 및 그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체역사물에서 '공군참모총장=노백린'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강하다.[7]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최길호가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한근욱이 연기했다.
  • 2003년 출간된 오세영의 소설 창공의 투사에서 한인 비행사들과 함께 비행사 양성소 및 한인 비행대 설립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나온다. 엔딩 장면에서 그와 주인공 한주영이 비행사 양성소를 개소하면서 감격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1]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는 1874년 12월 2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3] 사관생도를 교육하던 무관학교와 달리 위관급 장교영관급 장교의 보수교육기관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육군대학.[4] 평양 숭실학교 재학 중 조선국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독립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임관하여 대령으로 예편하고 노후엔 치과의사로 활동하였다. 노백린의 유해가 국내로 운구되기 직전 사망하였다.[5] 한국광복군에서 복무했다.[6] 1919년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으로 있으면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가 체포당하여 옥고를 치렀다.[7] 노백린 외에도 중국에서 활동한 비행사 안창남도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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