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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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노예의 말로
3. 21세기 KBO 각 구단의 대표적인 전직, 현직 노예들
4. 과거
5. 아마추어
5.1. 한국의 경우
5.1.1. 개선을 위한 노력
5.2. 일본의 경우
5.3.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야구에서 투구이닝, 출장 경기, 투구수 3가지가 많은 투수를 가리키는 속어. (계약 기간 내에서는) 소속이 구속된 채 혹사당하는 것을 노예에 빗대어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1.1. 중간계투[편집]


대개 중간계투 투수들이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중간계투의 경우 지고 있는 경기라 해도 스코어가 박빙일 경우 필승계투조를 투입해서 상대 타선을 최대한 틀어막고 역전을 노리는 경우가 많으며, 선발 투수가 난조를 보일 때 선발을 조기에 강판시키고 바로 믿을 만한 중간계투를 투입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현대 야구에서 대부분의 노예는 중간계투이다. 이는 제아무리 좋은 투수가 많이 있어도 마운드에 올릴 수 있는 투수는 단 1명뿐인 야구의 환경상, 연투 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어느팀 어느 감독이건 위기 때 애니콜해서 불끄는 노예는 매 시기 매 시즌 선수만 바꿔가면서 존재한다. 이는 감독의 멘탈 및 선수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선수의 동기부여 차원에서도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특히 프라이머리 셋업맨이나 스윙맨 포지션의 중간계투요원 중에서 노예가 많다. 대표적으로 선동열 감독은 삼성 감독 시절 5회까지 이기고 있으면 선발 투수를 5회까지만 던지게 하고 바로 내린 뒤 불펜투수들을 물량으로 퍼부어 이기는 벌떼야구를 선보였다. 불펜 중심의 경기 운용을 하다보니 권오준, 정현욱, 권혁 등의 셋업 노예가 생긴 것. 하지만 반대로 점수차가 크지 않음에도 지는 상황이면 그냥 게임을 포기하는 선수 운용을 보여서 엄청나게 까이기도 했다. 권혁은 이후 류중일 체제에서 안정적인 필승조, 원포인트 릴리프 등으로 뛰다 FA를 통해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한화로 이적하며 원없이 던져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고 결국...


1.2. 마무리 투수[편집]


마무리 투수는 귀족 중간계투 중 유일하게 보직이 고정되어 있고 선발 투수만큼 꾸준히 관리를 받기 때문에, 보통 1이닝을 초과해서 던지게 하는 경우가 드물고 지고 있는 경기가 8~9회까지 지속될 경우 대개 패전처리 투수(이른바 추격조)가 등판하지 마무리가 올라올 가능성은 낮다. 물론 한화는 예외 드물게 실전감각 유지를 위해 올라오는 경우가 있지만, 이런 때는 보통 팀이 연패를 하거나 압도적인 점수차로 연승을 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다. 물론 팀의 불펜 뎁스가 얇아서 마무리까지 가기 힘든 상황이 되거나, 플레이오프처럼 긴박한 상황에서는 마무리 투수를 8회에 출격시켜서 2이닝씩 굴리는 경우도 있다. 마리아노 리베라가 대표적.

하지만 이러한 관리받는 마무리는 현재의 이야기이고 1이닝 마무리 시스템이 정착하기 이전까지는 불펜에서 가장 잘 던지는 투수를 마무리로 만들어서 가장 많이 던지게 했었다. 두목 노예 6~7회 박빙 상황만 되면 올려서 경기 끝까지 가게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세이브 기록 중 3이닝 이상을 던져서 기록한 세이브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뛰어난 마무리라면 1년 투구 이닝이 100이닝 넘는 일도 흔했다. 이러한 마무리 선수나 그 운용법을 칭하는 단어가 중무리 투수이다. 지금도 뭔일이 일어날지 모르는게 야구니, 중간계투가 약하거나 죄다 연투해서 휴식이 필요한 팀이 후반 박빙 승부를 할때 마무리 투수를 빨리 올리거나, 연장전 승부때 마무리 투수에게 긴 이닝을 맡기는 경우는 자주 나온다. 2013년 포스트시즌의 손승락, 오승환이 대표적.


1.3. 선발 투수[편집]


프로시스템이 확고하지 않던 초창기부터 1990년대까지는 선발 투수가 휴식일 보장 없이 연투하러 나오곤 했으며 한 경기당 투입되는 투수의 숫자가 2명 남짓으로 선발투수가 완투하는 경기는 흔했으며 감독의 투수교체 지시에 투수가 불쾌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완투는 선발투수의 자존심과도 같았다.

1994년 이광환 감독의 스타시스템이 도입된 1990년대 후반부터는 선발 투수의 적정 투구수 및 휴식 일정[1]을 많이 지켜주는 편이다. 물론, 급한 경우 3일 정도의 짧은 휴식을 가진 후 바로 등판시키는 사례도 있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심심찮게 보이곤 한다. 아직도 선발 뎁스가 약한 강팀이 플레이오프에서 3인 로테이션을 돌리는 사례가 있을 정도.

가끔 선발 투수가 2~3일 정도 쉬고 구원등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선발 투수들이 휴식일 중간에 한 번 정도 갖는 불펜 피칭 대신에 이루어지는 경우일 때가 많다. 이 또한 선수마다 선호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2]. 애초에 팀이 웬만큼 막장가도를 달리고 있지 않으면 불펜 피칭 대신 등판시키지도 않는다. 현대 야구는 스케줄 강도는 물론 타자들의 상향평준화로 인해 이전까지 표준이라고 생각했던 4일 휴식조차 정말 특급 선수 아니면 맡기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전이라면 생각할 수 없었을 정도로 선발투수의 육체적 스트레스가 심각함을 알려주는 사례.

21세기 현재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선발 투수로 구분되는 선수들간의 실력 격차가 크고 이닝 이터로 인정받을 만한 특급 선발이 많이 부족해서 선발 노예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용병 선발 투수들조차 예외없이 선발 투수의 퀵후크가 유행하면서 불펜노예들이 늘어났을 뿐. 그 대신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 등의 특급 선수들에게 주문하는 100구 이상의 많은 투구수가 선발 노예의 상징이다. 특히 불펜 뎁스가 약한 팀은 선발 투수가 버틸 수 있으면 어떻게든 많이 투구수와 이닝을 쥐어 짜서 불펜의 등판을 줄여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특급 선발 투수의 경우 한계 투구수를 110, 120이 넘어 될 때까지 쥐어 짜는 잡는 감독은 여전히 남아 있다. 몇 년간 보이지 않다가, 2015년 에스밀 로저스가 등장하면서 오랜만에 선발 노예가 부활했다. 로저스 이후에는 메이저리그 진출 전까지 근 4년간 투구수, 투구 이닝이 제일 많은 양현종이 선발 노예로 굴려졌다.

일본은 6인 선발제가 보편화된 편이라 휴식일이 긴만큼 오래 가져가는 편이고 메이저리그의 경우 2013년 기준 현역 감독들인 신시내티 레즈더스티 베이커[3]LA 에인절스마이크 소시아등의 경우가 선발 투수를 많이 굴리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1.4. 야수의 경우[편집]


한국에서는 거의 관심밖이지만, 야수들도 노예 출장의 대상이다. 특히 선수층이 얇은 포수, 그 중 타격이 좀 되는 포수가 주로 희생양. 한국 야구는 특별한 이 없는 이상 더블헤더, 월요일 경기를 가지지 않는 편이고 경기중 대타빈도가 메이저리그에 비해 확연히 많아서 일반적인 야수는 전경기 출장해도 노예출장이라 할 수 없다. 허나 포수는 포지션 자체가 체력소모가 상당해서 혹사문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확실한 공격력과 내구력을 겸비한 포수가 조인성강민호, 그리고 양의지 정도뿐이라 잘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 나머지 팀들의 포수 돌려막기 수준은 그저….

특히 공격력이 강한 포수의 경우는 그 중요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쉬지 않고 출장해야 하기 때문에 무릎 등에 고질병이 많으며 이 때문에 나이가 들면 출장기회가 줄거나(이만수가 대표적) 유리몸이 되거나(박경완이 대표적), 공격력을 살리기 위해 자연스럽게 지명타자로 전업(홍성흔이 대표적)하는 편이다. 그게 안 될 경우 결국 DTD하게 되는데 2013년 강민호가 그걸 겪었다.

메이저리그처럼 180일동안 162경기를 하는 강행군리그의 경우는 포수, 유격수, 중견수 등 센터라인 플레이어들을 어느정도 관리해준다. 포수의 경우는 최소 1주일당 1경기 정도는 백업이 출장하는 경우가 많다.[4] 메이저리그에서 주전 선수들의 휴식일 제공에 대해 보스턴 레드삭스의 감독 알렉스 코라휴스턴 애스트로스 벤치코치 시절 호세 알투베와의 일화를 이야기 하면서 잘치고 있을수록 휴식의 중요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라 감독의 인터뷰 내용.

이외에도 비슷한 센터라인인 유격수 역시 백업 멤버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주전이 혹사당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시는 김하성.


2. 노예의 말로[편집]


대개의 경우 노예로 분류되는 투수들은 계속된 등판으로 혹사가 심해 구위가 떨어져서 난타를 당한다거나 부상이 발생하는 등 선수생명이 일찍 끝날 위험성이 크다. 단, 자주 나온다는 것은 감독이 어떤 상황에서든 믿고 낼 만한 투수라는 이야기도 되며, 이는 대개의 경우 노예로 분류되는 선수들은 시즌 내내 호투했으며 팀 기여도 또한 매우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로 분류되는 선수들은 보통 시즌이 끝난 뒤 연봉협상에서 노예로 굴렀던 보상을 두둑히 받는다. 노예의 대명사 정현욱의 경우 2008년에는 6천만 원이었던 연봉이 2009년에는 1억 3천만 원으로 오르면서 무려 117%의 연봉인상률을 기록했고, 마노예로 불렸던 마정길 또한 2008년 5천만 원에서 2009년에는 100% 인상되어 연봉 1억 원이 되었으며, 정노예 4인방 중 한 명이자 고무팔로 유명한 정우람 또한 2008년 8천만 원에서 2009년 1억 4천만 원으로 오르면서 75%의 연봉인상률을 기록했다. 그렇기 때문에 늦게 빛을 봐서 모아둔 돈이 적거나 나이 들어서 어차피 선수 생활 얼마 안남은 노장들은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벌어둬야 하는 직업 특성상 노예를 자청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듯하다.

물론 전년도의 무리한 투구로 인해 다음 해에는 폭삭 말아먹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2010년의 이재우, 2011년의 고창성, 2012년의 박정진, 2013년 유원상, 2014년 송창식 등이 대표적인 예.

미국은 얄짤없다. 마이너리그에서 찾아보면 대안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 만큼 불펜투수의 한 시즌 플루크 활약이 이어진 뒤, 마무리 혹은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3시즌 이상[5] 버티는데 실패하고 계속 노예생활이 이어질 경우 대부분 언젠가 탈이 나서 사라진 다음 잊혀진다.[6] 그렇다 하더라도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만으로도 야구 인생이 성공한 케이스니 한국과는 또 다른 문제.

일본프로야구의 경우라면 대부분의 팀이 6인 선발 로테이션을 주로 택하고 있기 때문에 선발 투수를 많이 던지게 하는 편인데다, 결정적으로 일본프로야구 중간계투 선수 이름까지 알 정도의 매니아들이 적어서 무차별적으로 등판하는 중간계투가 특별히 노예로 부각되거나 하는 경우는 한국에 비해 적은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없는 건 아니라서, 예를 들면 2009년에 67경기(7선발) 113⅓이닝을 소화하고 33홀드 6세이브를 기록한 뒤 3년 연속 80이닝 이상[7]을 소화하고 2011년에 MVP를 수상한 주니치 드래곤즈아사오 타쿠야나, 과거 다이에 호크스시절인 1999년에 60경기를 전부 구원 등판하여 79⅓이닝을 소화하고 무려 14승을 따낸 좌완 셋업맨 시노하라 다카유키같은 사례가 있다. 또한 2019년 80경기 출장과 82이닝 투구를 넘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히라이 카츠노리도 불펜 노예의 훌륭한 예시.[8] 서브컬처의 사례이나 그라제니의 주인공 본다 나츠노스케도 비슷하다.

선발 투수,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1980년대, 1990년대 초에는 선발, 계투, 마무리 따질 거 없이 노예들이 많았다.

아래 노예 투수들의 목록을 보면 특정 팀 편중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종류의 혹사가 그렇듯 감독의 야구 철학에 달린 문제이다.


3. 21세기 KBO 각 구단의 대표적인 전직, 현직 노예들[편집]



3.1. 두산 베어스[편집]


  • 이혜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두산 베어스로 복귀한 뒤에는 화염 방사기로 전락했지만, 1999년, 2000년, 2002년, 2003년, 2004년에는 출장 경기 수가 각각 2위, 1위, 1위, 1위, 3위였고 2001년에도 53경기 141⅔이닝이나 소화한 노예였다. 하지만 노예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노예로 활동했고 성적이 우수한 편이 아닌 데다가 결정적으로 혜르노빌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커서 묻힌다. 2013 시즌 후 2차 드래프트로 NC로 이적해 원포인트 릴리프로 간간히 등판하다 2015 시즌을 마치고 은퇴 선언했다.

  • 차명주: 1996년 연고 팀 롯데 자이언츠에 무려 계약금 5억 원[9]이라는 거액을 받고 입단했으나, 공을 오래 던지면 손에 습진이 생기는 질환으로 인해 결국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1999년 최기문을 상대로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두산 이적 후 좌완 불펜으로 자리 잡으며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년 연속 홀드왕을 차지하기도 했다.[10] 그러나 김인식 감독 아래서 1999년 84경기, 2001년 84경기에 등판하는 등 철저히 노예로 굴려졌고, 이 때의 혹사 여파로 선수 시절 말년에는 분식회계사라는 별명으로 까였다. 2004년 김경문 신임 감독과의 불화로 시즌 중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하며 2005년에는 77경기 등판으로 투수 등판 1위를 기록하였다.[11] 2006년 최연소 600경기 등판 신기록을 세웠고,[12] 시즌 후 FA를 신청했으나 한화와의 협상이 결렬되었고, 찾는 구단도 없어 선수생활을 더 이어갈 수 있는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4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이전 투수들의 승은 귀신같이 날리고 본인이 승리투수가 된 적이 많아 '양아 승의 달인', '0.1이닝의 신화'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 이재우: 두산 시절인 2004~2005년에 노예로 생활했고, 공익근무 후 복귀한 2008~2009년에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각각 65경기 87⅓이닝, 54경기 97⅓이닝을 소화하였는데 특히 2009년에는 두산의 KILL라인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노예 생활의 여파 때문인지 부상으로 2010년에는 2경기 밖에 못 나왔고 2011년에는 아예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가 2012년 9월 22일, 896일만에 등판하였다. 결국 신나게 굴려진 결과 퇴물로 전락했다고 봐도 무방한 성적을 낸 끝에, 2015시즌 후 구단에 요청하여[13] 방출된 뒤 한화로 팀을 옮겼다. 하지만 김성근도 최후의 양심은 있는지 16시즌 그렇게 많이 굴리지는 않았고, 17시즌 박종훈 단장 하의 프런트가 김승연을 뒤에 두고 리빌딩을 선언하며 자리가 줄어든 끝에 시즌 중 웨이버 공시로 은퇴했다.[14]

  • 정재훈: 두산 소속 시절인 2005년~2008년까지 마무리 투수로 뛰면서 제법 투구 이닝을 조절받고 던졌으나, 2009년에 선발 투수로 뛰다가 어깨 부상으로 2군에 다녀온 후로 중간 계투로 전업하여 2010년 63경기 78이닝을 소화하며 23홀드로 홀드 타이틀을 따내며 정노예의 한 축이 되었다. 그러나 정규시즌 혹사의 여파로 포스트시즌에 신춘문예를 보여주는데….
2011년 시즌 중 무너진 두산의 KILL 라인을 대신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노예로서의 저력을 보여주지만, 그 여파로 가을에는 또다시 작가로 등단하고 말았고, FA 첫 해인 2012년에는 4경기밖에 나오지 못하며 사실상 한 해를 통째로 쉬게 된다.
2013년에는 중간계투&마무리 투수로 2014년에는 중간계투로 뛰다가 2014시즌 후 장원준의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롯데로 팀을 옮겼다가 아무런 활약도 못하고 2015시즌 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2016시즌에는 팀에서 유일하게 노예로 굴려지며 홀드 1위 타이틀 수성이 유력했으나, 8월 3일에 오른팔에 타구를 맞는 부상을 당하며 시즌을 접고 말았고, 복귀를 서두르다 어깨 회전근 파열을 당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들지 못하면서 팀이 21년 만에 통합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정재훈은 콩라인을 탈출하지 못했다. 여기에 홀드 2위는 덤. 이후 재활에 집중하였으나 2017시즌 후 은퇴했다.

  • 김태영: 개명 전 이름 김상현. 두산 베어스 시절인 2007년에 선발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출격으로 28경기 72⅔이닝을 던진 데 이어 2008년에는 셋업맨으로 44경기에 출장하여 86⅓이닝을 소화했고 2009년에도 40경기 108⅔이닝을 소화하며 KAK라인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2009년 말부터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면서 예전의 구위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2013년 7월에 개명한 뒤 2013시즌 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김인식이나 김성근에 가려져서 그렇지 두산 감독 시절의 김경문의 불펜 혹사는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그의 재임기간 불펜으로 뛰면서 2012년까지 정상적으로 1군에 출장하고 있던 선수는 상대적으로 보호 받은 이용찬 하나뿐이었다. 오히려 망가진 선수 숫자로만 보면 앞의 두 감독보다 더 많을 지경이다.

  • 임태훈: 고졸 1년차 신분이었던 2007년에 64경기 101⅓이닝을 소화하며 노예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후 2008~2009년에는 각각 57경기 87이닝, 58경기 88⅓이닝을 소화하였고, 특히 2009년에는 KILL 라인의 일원이었다. 2010년에는 선발 투수로 뛰다가 후반에 다시 노예+홈런왕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신인 때부터 노예로 생활+2010년 플레이오프에서의 활약으로 동정표를 얻었으나 2011년에는 송지선 아나운서와의 스캔들로…[15]
2012년에는 선발 투수로 활동하여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는 듯했으나 2군 갔다온 후 6월~7월에는 중간계투로 출장했다가 8월에는 1군에 올라오지 못하다가 9월 22일에야 1군에 복귀하였다. 이후 허리 부상과 씨름하다가 2015시즌 도중 팀에 임의탈퇴를 신청했는데 팀이 이를 받아들여서 노예뿐 아니라 프로서 물러났다. 임의탈퇴된 바로 그 해에 일본 독립리그에 진출하여 필승조로 그럭저럭 했다고 한다.

  • 고창성: 2009년에 64경기 74이닝 평균자책점 1.95를 찍으면서 두산의 KILL 라인과 KAK라인의 일원이었으며 신인왕 후보이기도 했다. 2010년는 73경기 82이닝이나 소화하며 신흥 노예로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이 시즌 포스트시즌 10경기 연투라는 미친 노예짓을 당했다. 이 여파로 2011년에는 성적이 영 좋지 않은 바람에 경기 출장 수가 줄어들어서[16] 노예 생활을 청산했다. 그리고 몸을 회복한 2012년 4월에 다시 노예로 복귀하는 듯했으나 성적이 시망이라 5월에 단 두 경기 나오고 2군으로 갔다가 7월에 복귀했지만 8월 중순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2012 시즌 후 NC에 특별지명되어 팀을 옮겼지만 2013년은 28경기 20⅔이닝만을 소화하며 망했다. 2014년에 25경기 25이닝, 평균자책점 1.80을 기록하며 부활하나 했지만 7월 23일부터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15년에 6경기만을 소화했다. 2016시즌에는 1군에서 한 경기도 못 뛰었고 결국 시즌 후 NC의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후 호주 리그에서 재기를 노리다가 그를 주시하던 kt wiz의 영입 제의를 받아 2018시즌부터 다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1년뒤 구단에서 재계약 불가 통보를 내리면서 겨우 들어간 kt wiz에서의 선수 생활도 마무리되었다.

  • 김성배: 2003년에 두산에 입단하여 2005년에 72경기 82⅓이닝이나 소화했지만 존재감이 0에 수렴했고, 이후 별 활약이 없다가 2011년 시즌 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롯데로 이적했다. 그리고 2012년에 중간계투로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자 작은 점수차로 이길 때는 물론 작은 점수차로 지고 있을 때, 심지어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을 때에도 등판하며 69경기나 나왔고 2012 포스트시즌에서 8경기 중 7경기에서 10이닝이나 던지면서 다시 노예 인증을 하였다. 부상 경력이 있는지라 팬들은 노심초사하였다.
2013시즌도 노예로 살다가 정대현의 방화 때문에 마무리 투수로 전환하면서 노예 생활을 졸업하였으나, 결국 어깨에 탈이 나면서 2014년과 2015년에는 부진했다. 2016시즌에도 부진했다가 시즌 중에 친정팀으로 트레이드되어 쏠쏠히 활약해주었다. 그러나 2017시즌 FA를 신청하지 않아 의구심을 자아내던 중 신인 박치국의 영입, 변진수의 전역 등으로 자리가 없어진 건지 방출당했다.

  • 김승회: 2003년에 두산에 입단하여 2006년 61경기 79⅔이닝, 2007년 42경기 83⅓이닝을 소화한 것 빼고는 그다지 활약이 없었다가 2012년이 되어서야 30이 넘은 나이에 선발 투수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2012시즌 후 20명의 보호 선수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고 결국 홍성흔의 보상 선수로 롯데로 이적했고, 롯데 이적 후에는 선발로 뛸 줄 알았으나 선발 투수가 아닌 롱 릴리프로 시즌을 시작하였고, 결국에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도 스윙맨으로도 굴려지며, 다른 투수들 다 나름대로 관리받고 있던 와중에 혼자 불펜진을 땜빵하였다. 이후 SK를 거쳐 2017년부터 다시 친정팀 두산 베어스로 복귀해 또다시 노예로 굴려졌다. 궂은 일을 도맡으면서 2019년에 마침내 우승반지를 따는데 성공했다.

  • 오현택: 2013년 4월에 호투하여 5월에는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다, 5월 19일부터 유희관이 선발진에 합류하고 홍상삼이 6월부터 마무리 투수를 맡으면서 오현택은 6월부터 7월까지 중간계투 노예로 굴려졌고, 결국 67경기 73⅓이닝을 소화했다. 특히 6월에는 3~5월에 잘 던지던 이혜천, 2012년에 잘 던지던 모습은 다 어디가고 제구나 구위나 다 날아다닌 변진수, 김진욱 감독이 기대주로 점찍었지만 5월 21일 넥센전에서 빈볼 사태를 일으켜 징계 먹은 윤명준이 모조리 2군으로 간 데다가, 그나마 괜찮게 던진 김강률은 6월에 꼴랑 8경기만 등판하고, 역시 괜찮게 던진 정재훈조차 경기당 이닝수 1을 못 채우면서, 오현택은 출석체크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연투를 하며 팀이 6월에 치룬 21경기 중 14경기나 등판했다. 더욱이 6월뿐만 아니라 7월에도 1군으로 올라온 윤명준, 변진수가 모두 꼴랑 5경기만 소화하는 바람에 17경기 중 10경기에 등판하며 2013년 전반기 혹사 누적 순위에서 송창식을 제치고 1위를 먹었지만,참고 자료 김응용 감독 때문에 많은 동정을 받은 송창식에게 묻혀버렸다. 후반기엔 계투진들이 전반기에 비해 많이 좋아져서 오현택이 등판하는 횟수가 줄기는 했지만, 전반기 혹사의 여파 때문인지 풀 타임을 처음으로 치러 관리를 잘 못해서인지 구위가 많이 떨어져서 안타를 맞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포스트시즌과 2014년에는 필승조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2015년 여름에 다시 필승조에 진입하며 노예의 족쇄를 차게 되었으나, 이후 부진하며 함덕주에게 잠시 그 바통을 넘겨주었다. 이후 2016년 1달 반짝하고 부상으로 1군에서 밀려났고, 2017시즌 역시 1군에 못 올라오다가 2차 드래프트로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3.2. LG 트윈스[편집]


  • 정재복: 2007년에 44경기 126⅓이닝을 소화했고 2008년에 55경기 71⅔이닝을 소화하고 4승 10패 10홀드와 13세이브를 기록하여 삼성의 정현욱, SK의 정우람과 함께 정노예 중 한 명에 속할 정도였으나, 2009년부터 맛이 가기 시작하여 2010년에 수술을 받고 재활에 전념하는 바람에 2010년에 한 경기도 못 뛰어서 2011년에는 연봉이 3,800만 원까지 내려가는 굴욕을 맛보고 말았다. 그리고 재활 때문에 2011년에도 1군 경기를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2012년 4~6월[17]에는 선발 투수로 뛰었다가 2군으로 내려간 후 다시 1군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2013년에는 단 한 번도 1군에 올라오지 못하다 시즌 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2014년에 신고선수로 넥센에 입단했다. 하지만 2014년, 2015년 모두 1군으로 올라오지 못했고 결국 2015시즌 후 은퇴했다.

  • 오상민: 대졸 1년차 신분이었던 1997년부터 2001년까지의 쌍방울-SK 시절 동안 매년 60경기, 70이닝 이상을 소화한 노예였지만 삼성 시절인 2002~2007년에는 노예 생활을 청산했다. 2008년부터는 LG에서 활동했는데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서 2009~2011년 동안 노예 생활을 다시 하였다. 특히 2010년에는 시즌 도중에 수감되었다가 나온 다음부터는 일수라도 찍었는지 팀이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거의 매일 나오다시피 하였다. 2011년에도 노예 생활을 하다가 부득이한 사정[18]으로 방출되어서 노예 신분에서 강제탈출하였다.

  • 이동현: 노예라는 개념이 없던 2001년에 고졸 1년차 신분으로 33경기 105⅔이닝을 소화하더니 2002년에는 김성근 감독 아래서 무리하게 굴려지며 78경기 124⅔이닝을 소화하여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고 2003년에도 33경기 95⅔이닝을 소화했다. 그리고 이렇게 혹사당한 끝에 2004년 12월에 첫 번째 토미존 수술을 받았지만 모 감독이 무리하게 당겨쓰려고 한 덕분에 결국 1년 만에 수술 부위가 끊어지며 재접합 수술을 받았다. 2005년 ~ 2007년까지 한 경기도 못 뛰다가 2007년 11월에 두 번째 토미존 수술을 받은 뒤 드디어 2009년에 복귀했고 2010년에 68경기 74이닝이나 소화했는데, 특히 순위가 결정된 시즌 후반에 연투하면서 노예 신분으로 돌아왔다. 2010년에 굴려진 여파 때문인지 2011년에는 부진했다가, 2013년에는 2012년에 굴려진 유원상이 시즌 초부터 맛이 가고 FA를 통해 LG로 팀을 옮긴 정현욱이 6월부터 먹튀짓을 하면서 이동현은 LG의 유일한 믿을맨으로 굴려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64경기 72이닝을 소화했다. 2014년에도 우완 불펜주제에 61경기 23홀드를 뽑으며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또 굴렀고 2015년엔 봉중근이 무너지자 임시 마무리까지 맡아서 또 60경기를 던졌다. 다행히 FA에서 3년 30억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그뒤로는 복귀한 뒤로 또 5년간 당한 혹사+나이로 인한 기량하락으로 2016년에는 셋업맨을 김지용에게 주고 추격조로 뛰게 되었다..만 사실상 불펜 필승조 2팀 수장. 결국 그 뒤로도 2018년까진 레귤러 1군불펜으로 40경기씩 나갔고, 결국 완벽히 퍼지며 701경기째 되는 날 은퇴식을 치르고 말았다.

  • 임찬규: 2011년에 고졸 1년차의 신인 신분으로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혹독하게 노예 생활을 하다가 부상 때문에 8월 초에서 9월 초까지 결장하였는데, 한 달을 결장했음에도 58경기 74이닝을 던졌다. 2013년에는 1군과 2군을 오가며 29경기 33이닝을 소화하는데 그친 뒤, 시즌이 끝나고 경찰 야구단에 입단했으나 1년차를 다 치르지도 못하고 토미존 수술을 받았다.

  • 이상열: 현대 시절인 2002~2004년 동안 64경기, 72경기 + 홀드 1위, 81경기 홀드 2위를 기록한바 있던 노예였으나 그때는 노예라는 개념이 없었던 때여서 묻혔다. 그런데 히어로즈에서 방출된 후 LG로 와서 2010년에 같은 좌완 불펜인 오상민과 함께 처절하게 노예 생활을 했는데, 2011년에는 오상민이 방출되는 바람에 더욱 무섭게 노예 생활을 하였다. 결국 2010년 76경기, 2011년 77경기 등판으로 2년 연속 투수 등판 경기수 1위를 차지하더니 2012년에도 73경기나 등판하면서 투수 등판 경기수 2위를 차지했다.
2013년에는 0.323이나 되는 피안타율과 1.67에 육박한 WHIP 덕분에 64경기 33이닝만을 소화하며 노예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부진으로 꼴랑 12경기만 등판한 뒤 2015년에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하다가 시즌 중에 웨이버 공시된 후 SK로 이적했으나 시즌이 끝난 후 보류 선수 제외로 방출되었다.

  • 우규민: 경찰청에서 퓨처스 리그를 휩쓴 후 2012년에 LG로 복귀하여 58경기에서 92⅔이닝이나 던지며[19] 노예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2013년에는 선발 투수로 변신하여 개인 첫 완봉승[20]과 두 자리 승수(10승)를 달성하며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고 2014년에도 선발 투수로 뛰면서 11승을 거두며 완전히 노예 신분에서 탈출했다.

  • 윤지웅: 히어로즈에 입단하여 대졸 1년차 때 바로 1군에서 53경기를 소화한 뒤 군복무를 택했지만, LG가 이택근의 보상선수로 윤지웅을 택하는 바람에 이적되자마자 경찰 야구단에서 군복무를 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치른 첫 시즌인 2014년에는 팀에 신재웅이라는 걸출한 좌완불펜이 있었기에 윤지웅은 주로 추격조로 등판하여 53경기 36이닝만을 소화했다. 하지만 2015년에는 신재웅이 맛이 가는 바람에 윤지웅은 사실상의 LG에서 유일한 좌완불펜으로 굴려질 수밖에 없었고, 신재웅이 SK로 가고 진해수가 LG로 와서는 사정이 나아지기는커녕 진해수와 함께 노예로 굴려지면서 78경기 62이닝을 소화했다. 2016년에도 평균자책점 6.55로 부진했으나 59경기 44이닝을 소화하였고, 2017년에는 선발 투수로도 등판하며 준 필승조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다 음주운전 사건으로 인해 시즌 아웃되었다... 그 후 2018년 구속저하로 인해 팀에서 방출 되었고, 이적한 NC에서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택했다.

  • 진해수: KIA를 거쳐 이적한 SK 시절부터 노예로 활동 했으며, 2015년 시즌 중반에 LG로 이적한 후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시즌 연속 60경기 이상 출장[21]하였다. 2017년에는 홀드왕을 수상하고, FA 계약까지 하며 LG에서 커리어 하이를 보내고 있다. 2018년 윤지웅이 방출 당하고 최성훈이 아직은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노예 신분 탈출은 아직까지 미지수이다


3.3. KIA 타이거즈[편집]


  • 임창용:데뷔 초기부터 중무리 투수로 엄청나게 굴려졌으며 입단 2년차이던 1996년 선동열이 일본 주니치로 이적하자 해태의 마무리로 낙점되어, 49경기 114⅔이닝을 소화한 걸 시작으로 1997년 64경기 135이닝, 1998년 59경기 133⅔이닝으로 그것도 마무리 투수가 2년 연속 규정이닝을 채울 정도로 엄청나게 굴려졌다.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1999년이 그의 혹사 최절정기였는데, 이 때는 무려 71경기 138⅔이닝을 소화했고 13승 38세이브 평균자책점 2.14를 찍어주며 마무리 투수로 평균자책점 1위에까지 올랐었다. 하지만 그해 엄청나게 굴려졌던 탓인지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구위가 심하게 떨어져 1차전에서 동점 허용, 5차전에서 끝내기 역전 홈런, 7차전에서까지 역전을 허용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22] 이후 2000년에는 전년도와는 다르게 관리를 받았다고 하나, 그 관리를 받았다는 시즌마저 52경기 88⅔이닝을 소화, 여전히 굴려졌다. 2001년부터는 선발 투수로 전향했는데, 이 때도 2년 동안 184⅔이닝, 204⅓이닝을 소화해 내며 이닝 이터로써의 모습도 보였었다. 이후 엄청나게 던진 탓인지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고 퇴물이 되는가 싶다가, 일본에 진출해서도 탑급 마무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메이저리그까지 찍은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단기간에 엄청나게 굴려진 탓에 부상이 찾아오며 그 뒤로는 예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거나[23] 조기 은퇴를 한 선수들이[24] 꽤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젊었을 때 그렇게 굴려지고도 일본과 미국까지 찍은 뒤 나이 40이 넘은 지금까지 선수로 뛰는 걸 보면 자기 관리를 상당히 잘 하거나 어찌보면 타고난 신체 능력일듯. 임창용 본인의 말로는 오로지 몸의 유연성을 이용해 던지기 때문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전혀 하지 않고 러닝과 스트레칭 및 캐치볼 등 기초적인 훈련만 한다고 하긴 하지만 대단한 유연성과 내구성의 보유자이다.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이후 2016년부터 친정팀 KIA 타이거즈로 돌아와서도 팀의 맏형이자 불펜의 중심 역할을 해줬으며 2017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1997년 한국시리즈 이후 20년만에 타이거즈 소속으로 우승반지를 끼는 영광까지 안았다. 하지만 2018년 어느 정신나간 매드사이언티스트에 찍혀 선발로 굴려졌다. 그리고 구단은 2018년 신나게 굴려먹고 시즌 끝난 후 방출.

  • 한기주: 2006년 초고교급의 재능을 가진 신인 유망주로 KIA에서 사상 최대 계약금인 10억으로 입단했지만 고교 시절부터 이미 혹사로 어깨가 망가져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서정환 감독이 신인 선발 한기주를 믿음직한 필승조가 없다는 이유로 KIA에서 신용운과 함께 신한카드라 불리는 필승조로 돌리면서 단기간에 엄청난 혹사를 시켰다. 팀은 비록 2006년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한기주의 구속과 구위는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결국 2008년부터 혹사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전에서 아웃카운트 하나 못 잡고 실점해서 평균자책점 99.99, 작가, 속꽉남 등의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25] 단장이 08시즌 이후 수술을 시키려 했으나 조범현 감독이 갑자기 마무리가 빠지면 안 된다며 반대를 했고 결국 데뷔 3년간은 잘 던졌지만 결국 2009년부터 몸이 못 버티면서 성적이 하락했다. 수술을 받은 뒤 2013년, 2014년은 1군에 올라오지도 못했다. 그리고 2015년 7월 12일에 드디어 1군에 등록된 후, 7월 16일에 1,064일만의 등판경기를 치렀다. 최고구속이 150을 넘기지 못하지만, 완전히 기교파로 변신하는데 성공...하나 싶었으나 16시즌 땜빵 선발 시 몇번의 호투 후 다시 작가로 전업했고 17시즌은 아예 1군에도 못올라왔다. 이후 김호령의 입대로 비어버린 외야 백업 자리를 채우려는 구단의 목표와 본인의 트레이드 요구가 맞아떨어져 17시즌 종료후 삼성 라이온즈의 이영욱과 트레이드되어 팀을 옮겼으나 18시즌 전반기에 짧은 활약 이후 결국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 유동훈: 1999년 KIA의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 2003년까지는 간간히 패전조로만 나오다가, 2004년 김성한 감독 아래서 순수 불펜으로만 무려 120⅔이닝을 던지며 노예로 굴려졌다.[26] 그나마 이것도 시즌 막판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며 구속된 탓에 시즌을 조기 마감하고 기록한 이닝이다. 이후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2008년 제대한 뒤 KIA의 마무리를 맡으며 2009년 우주의 기운을 받아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타이거즈의 V10을 이끌었으나 2010년부터 다시 부진하였고, 결국 말년에 무릎 부상으로 은퇴하였다.

  • 손영민: 2007년부터 노예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불 지른다고 많이 까이기는 했어도, 2009년에는 임태훈보다 많이 던지며 역대급 타고투저에서도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 팀의 핵심 필승조로 자리잡았으며 위의 유동훈, 곽정철과 함께 SKY라인으로 팀의 10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2010년과 2011년에는 KIA에서 유일하게 필승조라 할 수 있는 불펜 투수였기 때문에 팀에서 고독하게 노예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2012년에는 불미스런 사건으로 임의탈퇴되면서 저절로 노예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 앤서니 르루: 2012년에 KIA 타이거즈에서 선발 투수로 뛰며 두 자리 수 승수도 올렸음에도 2013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전환됐는데, 마무리 투수임에도 외국인 차별을 당하는 것마냥 노예로 굴려진 특이한 케이스. 2013년 6월 11일까지 기록한 17세이브 중 1이닝 미만 세이브는 단 한 차례도 없고 1이닝 세이브는 단 6차례에 불과할 정도였고,[27] 6월 8일부터 6월 13일까지 5경기 연속 등판하였다. 하지만 노예나 진배없이 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6월 2일이나 6월 13일의 5점차 블론세이브[28] 같이 작가 기질을 발휘한 경기가 많아서 노예라고 동정받지는 못했으며, 결국은 시즌 중에 퇴출되고 말았다.

  • 김윤동: 2016년부터 1군에서 조금씩 던지다가 본격적으로 2017년부터 셋업맨, 마무리를 왔다갔다하며 이름을 알리고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2017년에도 감독 조무사가 혹사시키는 감이 있었고 그 결과는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에서 폭망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망의 2018년에는 대놓고 부려먹기 시작해 노예 2호기와 함께 시즌 말에는 거의 매일 등판하다시피 해 결국에 혹사 랭킹 1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2019년 그동안 무리하게 혹사당한 대가로 어깨 회전근 통증을 안고도 경기에 출전했다가 마운드 위에서 어깨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결국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팀에게 풀어달라고 하며 KIA 타이거즈를 떠났다.

  • 양현종: 팀의 에이스인 투수로 2009년, 2010년 대활약을 하다 2011~12년 무리가 왔는지 내리막을 걸었고 2013년부터 부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풀타임으로 부활한 2014년부터 2020년까지 7년 연속 매년 170이닝 이상 던지고 이는 KBO 좌완 최초기록이 되었다. 결국에 2018년 후반기 특히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야구 이후에는 완전 탈이나기 시작해 16년도부터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아시안게임 투구 이닝을 모두 더하면 16년도 206.1이닝(정규시즌 200.1 이닝 + 포스트시즌 6이닝), 17년 203.1이닝(정규시즌 193.1이닝 + 포스트시즌 10이닝), 18년 200.2이닝(정규시즌 184.1이닝 + 아시안게임 12이닝 + 포스트시즌 4.1이닝) 3년 연속 실질투구 200이닝을 돌파한 선수가 되어버렸다. 이는 동시대 활약한 선발투수들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 장원준 등도 기록하지 못한 기록이다. 결국 2019년부터 뭔가 조짐이 있더니, MLB 진출을 위해 힘써야 할 2020년에 방전되고 만다. 그런데 방전된 시즌이라는 게 172.1이닝을 던져 11승 10패, 149K를 기록한 시즌이다.
  • 임기영:2022년까지 선발로 활약하다가 2023년 7월 현재 순수 불펜으로 100이닝 페이스,리그 최다 등판 1위를 기록하고 있다.그리고 결국 64경기 등판해 순수 불펜으로 82이닝을 던졌다(...)

3.4. 삼성 라이온즈[편집]


  • 김진웅: 1999~2000시즌은 10승을 거두며 미래의 선발 자원으로 주목받았으나, 삼성이 2001년에 벤 리베라를 부상으로 퇴출시키고서 뜬금없이 선발요원인 발비노 갈베스를 데려오면서 선발에서 마무리로 내려갔다. 결국 김진웅은 43경기 141이닝을 소화하며 신나게 굴려졌고, 그 해 한국시리즈는 탈탈 털렸다. 2001년 이후로 선발 투수가 되었지만 전성기 때의 성적은 회복하지 못하고[29] 사이버 투수로 전락했으며 2010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 김현욱: 원조 불펜 노예이자 살려조의 대조상급 투수. 1993년 삼성에 입단한 뒤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었으며, 1997년 김성근 감독 아래서 선발을 5회 이전에 내려오면 이어서 등판하는 방식으로 전무후무한 불펜 20승을 거둔다.[30] 1997년 70경기 157⅓이닝을 소화하며 그렇게 굴려져 시즌 후 무릎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인 1998년에도 129⅓이닝으로 다시 굴려지며 여전히 노예 신분을 면치 못했다. 1999년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으로 돌아온 뒤에도 서정환, 김용희, 김응용 감독 아래서 전천후 노예로 철저히 굴려졌고,[31] 특히 2002년에는 10승 무패 2세이브 9홀드 승률 1.000(10할)로 승률왕에 오르는 등 철저히 굴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혹사의 결과로 2004년 초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FA를 앞두고 꼴랑 28경기 26이닝만을 소화하고서 시즌 아웃되었고,[32] 결국 재활에 실패하며 2005년 35세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말았다.

  • 노장진: 1999년 트레이드를 통해 한화에서 삼성으로 이적하며 이적 첫 해 15승을 찍으며 만년 유망주에서 시속 150km대 강속구를 던지는 삼성의 에이스로 포텐이 터졌고, 이후 삼성의 주축 투수로 활약하다가 2002년에 마무리로 전향하여 63경기에 출장해 127⅓이닝 11승 4패 23세이브 평균자책점 2.54와 불펜투수로 한 시즌 2000구 투구를[33] 하며 풀타임 중무리로 철저하게 굴려졌다.[34] 2003년에도 중무리로 굴려지다가 지난 시즌의 혹사 후유증 탓인지 4점대의 평균자책점과 구원 투수로 시즌 10패를 찍는 등 퍼졌고, 2004년에 다시 선발로 복귀했으나 2시즌 간 너무 굴려졌던 탓인지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무단이탈 파문까지 일으켰고, 김응용 감독 눈밖에 나서 롯데로 트레이드 되었다.

  • 권오준: 1999년에 입단하였고 첫 번째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 뒤 2000년 말 해병대에 입대, 2003년 제대 후 1군에 데뷔하였고, 2004년에 스윙맨으로 활동하며 47경기 153⅓이닝이나 소화하였고, 선동열 감독이 부임하고 2005년부터 마무리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마무리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대졸 신인 오승환이 마무리 투수로 뛰면서 결국 권오준은 마무리에서 밀려나 노예로 강등됐다. 2006년 67경기 80이닝이나 소화하며 32홀드를 기록했으나 그 동안의 혹사로 인해 150km/h을 넘나드는 구속이 떨어지면서 2008년은 부상으로 시달리고, 시즌 후 2번째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2009년 2경기밖에 못 나와서 다른 권총과 더불어 선멍게시절 최대 혹사 피해자가 되었다. 2010년에는 42경기만 나왔고 2011년~2012년에는 필승조로 활약했지만, 다음해에 또 팔꿈치 부상이탈, 결국 국내선수 최초로 3번째 토미 존 서저리를 받으며[35] 2013년~2014년 합쳐서 단 한 경기만 나오며 노예서 탈출했다. 2015년에는 노쇠화의 기미가 보였으나 이듬해 반등에 성공, 필승조에 재진입했다.

  • 신용운: 2002년 KIA에서 데뷔하여 믿음직한 불펜투수가 없던 2003~2007년까지 선발, 불펜을 오가며 활약했다. 유남호 감독 시절 2005년 4월 삼성전에서 팔꿈치 부상을 당하여 수술을 받았다. 2006년에는 시즌 중반에 복귀하여 한기주와 함께 KIA의 필승조 불펜(일명 신한카드)으로 활동하며 혹사당하며 가을야구의 일등공신이 됐지만 필승조들이 이미 지친지라 광탈했고, 2007년에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선발로 보직이 변경됨에 따라 팀도 자신도 폭망하여 2008 베이징 올림픽 출전에도 실패했다. 이후 군 복무를 하였고 2차 드래프트로 삼성으로 떠나면서 재활도 잘 되었고 2013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우승반지도 획득했다. 하지만 2014년은 부상이 도져 한 경기도 못 나왔고 2015년은 7.01의 평균자책점을 찍으며 시망했다. 이후 부진과 수술, 재활을 거듭하다 2017년 방출되었다.

  • 정현욱: 삼성 시절인 2008년에 53경기 127이닝, 2009년 62경기 79이닝이나 소화하여 정노예로 불렸고 국가대표로도 뽑혀 정국노[36]로 별명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2011년에는 오승환, 권오준이 불펜진에 가세하여 정현욱은 59경기 72⅓이닝만 소화하며 노예 생활을 청산했지만, 2012년에는 그동안 노예로 굴려진 탓도 있었고 삼성 불펜진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진하여 주로 추격조로 등판하여 54이닝 62⅔이닝을 소화했다. 2013년 FA를 통해 LG로 팀을 옮기고 4월 ~ 6월 초까지는 노예로 굴려졌으나 6월 7일 이후부터 점점 성적이 나빠지더니 2014년에 나오기만 하면 털렸다. 부상으로 시즌 종료후 2015년에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시즌을 통째로 날리며 팬들은 먹튀라고 까댔는데 알고 보니 위암 투병 때문에 2015년을 통째로 날린 것으로 밝혀졌다.[37] 사실을 안 팬들은 뭣도 모르고 드러누웠다며 까댄 거 정말 미안하다며 반성했고 다행히 시범경기 때 복귀에 성공했다. 하지만 2016시즌에 17경기 등판하고 은퇴했다.

  • 차우찬: 2006년에 입단하여 2009년부터 2013년 페넌트레이스까지 선발 투수와 스윙맨을 오갔다. 그런데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노예로 굴려지더니 2014년에는 본격적인 중간계투로 전향되어 개막 2연전 등판 후 휴식일 후 2연전도 등판하며 화려하게 노예 생활을 시작했다. 전반기에 꾸준히 굴려지다 후반기를 이틀 연속 등판 후 하루 휴식 → 사흘 연속 등판 후 휴식일 → 이틀 연속 등판 후 하루 휴식 → 등판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서 병역특례를 받게 되었는데도 계속해서 굴려지다 갈수록 망했고, 결국 2014년 페넌트레이스에 69경기(3위) 82이닝을 소화했다. 2015년에 선발로 복귀하면서 노예를 탈출했다.[38]

  • 김상수: 삼성산 야수노예 1. 2011년부터 유격수로 뛰면서 2015년 현재까지 대부분의 경기를 거의 풀이닝으로 출장했다. 그거만 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수비뿐만 아니라 도루도 많이 하지, 뒤를 받쳐줄 야수는 툭하면 부상이거나 부진해서 쉴 수도 없지, 거기다 홈은 내야수들 무릎을 갈아먹다시피 한 인조잔디 대구 구장이지... 이것들 덕에 체력은 떨어지고 부상도 오고 수비율까지 떨어졌다. 2015시즌에 김상수의 실력이 떨어져 보이는 것도 체력저하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고 야마이코 나바로를 유격수 보내자니, 류중일 감독의 전문 유격수 철학 위배는 둘째치고 2루에 백상원 같은 1.5군급 선수를 넣어야 할 판이었다. 그 결과 2015시즌부터 김상수는 이전의 퍼포먼스나 내구력 어느것도 되찾지 못했다. 류중일의 양아들 짓의 정점과 류중일이 삼성에 있어서 해가 된 가장 큰 것.

  • 박해민: 삼성산 야수노예 2. 2015년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하면서 2016년(141경기) 빼고 전경기 출장이다. 게다가 수비범위도 엄청나게 넓다보니 코너 외야수들이 잡기 애매하다 싶으면 박해민만 바라보고, 이러다보니 박해민이 몇십미터를 헐레벌떡 뛰어와 잡는게 일상이다. 게다가 팀의 제4, 제5외야수가 매우 부실한 탓에 쉬지도 못하고 나오는데다가[39], 공격 이닝 때도 내야 안타 만드랴, 도루하랴, 힛앳런 작전 수행하랴 바쁘게 뛰어다녔다. 이러다보니 아무리 금강불괴에 가까운 몸이라도 결국 한계가 오고, 그 결과가 바로 2019시즌 방전이다. 그 방전 시즌도 전경기 출장이다(…).. 결국 2020시즌 초반 2군에 다녀와서야 다시 타격감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 심창민, 백정현, 장필준: 2016년 성적으로 심창민은 62경기 72⅔이닝, 백정현은 70경기 68이닝, 장필준은 56경기 72이닝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살려조 트리오이다. 한화 이글스에서의 권혁(심창민), 박정진(백정현), 송창식(장필준) 트리오 마이너 버전과 같다. 백정현은 이후 선발 전환로 노예에서 탈출한 후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스프링캠프 때만 잘하고 말아먹는다는 뜻의 오키나와 커쇼라는 멸칭을 떼어내는데 성공했으나, 심창민, 장필준은 2017시즌에도 굴려졌다. 결국 장필준은 2020년대 들어와 패전의 아이콘이 되었다.


3.5. 롯데 자이언츠[편집]


  • 임경완: 롯데에서, 특히 2003년, 2004년, 2007년에 혹독하게 노예 생활을 하던 선수였는데 2008~2010년은 노예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2011년에 72경기나 나오면서 다시 노예의 신분으로 돌아왔지만 2012년, 2013년, 2014년에는 FA 먹튀로 전락했고 결국 2014시즌 후 전력 외 통보를 받은 뒤,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테스트를 받아 한화에 입단했다. 하지만 마일영, 오윤 등과 함께 거의 활약하지 못한채 2015 시즌 중에 웨이버 공시되었으며 구대성이 있는 시드니 블루삭스로 이적했다.

  • 강영식: 2008~2011년까지 롯데에서 좌완 불펜으로 쓸만한 선수가 강영식밖에 없어서 꾸준히 노예 생활을 하였다. 그래도 SK의 좌완 불펜들에 비하면 덜 혹독하게 노예생활을 했다.
2012년, 2013년에는 이명우와 원 포인트 릴리프 역할을 나눠 맡으며 강영식 자신은 노예 생활을 청산했다.

  • 강민호: 포수 노예. 강병철의 양아들 시절부터 많은 경기에 출장하더니, 백업 포수의 부실함과 자신의 좋은 타격이 이상한 시너지(…)를 일으키는 바람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 나와야 했다. 게다가 그가 한창 주전으로 출장한 때는 롯데가 비밀번호를 끊고 중흥기를 찍었던 시절이라 포스트시즌까지 계속 나와야 했고 그 결과가 바로 2013시즌과 2014시즌 방전 되시겠다.[40]

  • 브라이언 코리: 2011년에 롯데에서 뛰던 용병. 선발로 8경기, 구원으로 17경기를 출장하는 등 선발, 불펜으로 마구 굴려지다 퍼지는 바람에 결국 시즌 도중에 방출되었다.

  • 이명우: 2012년에 강영식을 대신하여 좌완 불펜 노예로 굴려지며 74경기에 등판, 2년 연속 투수 등판 경기수 1위를 차지했던 이상열을 밀어내고 2012년 투수 등판 경기수 1위를 차지했고, 2013년에도 74경기 등판하여 투수 등판 경기수 1위를 차지했다.

  • 최대성: 이왕기름넣을거 최대성능으로 가득염으로 있다가 2007년의 반짝 활약 후 수술과 공익 근무로 3년 동안 한 경기도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소집해제 후 2012년에 롯데로 복귀하여 강속구를 앞세워 71경기 67⅔이닝이나 소화하며 노예로 활약하였다.
2013년에는 6월 25일에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고 시즌 아웃됐다. 결국 2015년에는 kt 위즈로 이적했지만 또 팔꿈치 수술을 했고, 17시즌 2군 방어율 20점이라는 아름다운 스탯을 남긴 채 2차 드래프트에서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아 팀을 옮기게 되었다. 두산에서도 2018년 3월 31일에서 한만두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 홍성민: 2012년에 대졸 신인으로 KIA로 입단하여 데뷔 시즌부터 2014년까지는 그렇게 혹사당하지 않았고 도중에 선발도 몇 번 오가는 유망주였다. 하지만 2015년에는 완전히 불펜으로 정착하였는데, 자신을 제외한 다른 불펜 투수들이 완전히 맛탱이가 가버린 통에 팀이 이기든 지든 가리지 않고 등판해야 했다. 혹사의 후유증으로 부상을 당해 잠깐 동안 2군에 내려갔다가 복귀하여 총 67경기 82이닝을 소화했다. 결국 시즌 이후 어깨에 탈이 나서 재활에 들어갔다.


3.6. 한화 이글스[편집]


  • 구대성: 혹사를 위해 태어난 사나이로 불릴정도로 커리어 내내 굴렀다. 구대성 전성기 시절 한화의 투수 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선발이 5이닝을 막았다 → 구대성 등판, 선발이 조기에 무너졌다 → 구대성 등판, 선발 뛸 사람이 없다 → 구대성 선발 등판. 1996년에는 중무리로 뛰며 다승왕과 구원왕, 평균 자책점왕을 석권했고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7회부터 마무리로 나오며 전경기를 소화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국대로 차출되어서도 굴려지곤 했는데 담 증세로 팔을 못 펼정도로 고생하던 와중에도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선발로 나와 155구 완투승을 거둔 일은 그야말로 레전드. 이렇게 굴려지다가 NPB, MLB에 진출하며 노예생활을 청산하는듯 했으나, 한국으로 돌아오고서 나이에 맞지 않게 굴려졌었다. 결국 김인식 감독의 당겨쓰기 덕분에 무릎 부상을 얻어 2010년에 KBO에서 은퇴했다. 이후 호주 프로야구 리그로 건너가 마무리 투수 및 계투진으로서 51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등 엄청난 내구력을 과시했다(…). 거의 커리어 내내 굴려지면서도 항상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롱런까지 이뤄낸 이 분야 끝판왕. 심지어 2023년에도 등판하셨다.

  • 문동환: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제 2의 선동열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아마야구 투수 랭킹 1위였고, 대학 졸업 후 실업팀 현대 피닉스를 거쳐 연고 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고, 1998년 12승, 1999년 17승으로 롯데의 우완 에이스 역할을 했으나, 아마추어 시절부터 누적되온 혹사로 인해 2001년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이후 롯데에서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2004년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였다.[41] 2004년 15패로 다패왕에 오르며 재기가 불가능할것처럼 보였으나, 2005년 김인식 감독 부임 후 10승을 찍으며 부활에 성공, 2006년에는 16승을 거두며 당해 신인 류현진과 함께 리그 최강 원투펀치를 결성하며 한화를 한국시리즈까지 이끌고 갔다. 그러나 2006년 포스트시즌에서 선발과 계투를 가리지 않고 무리하게 등판하여 허리 부상을 당했고, 허리 통증을 참아가며 2007 시즌을 개막했으나 결국 2007년 6월 부상이 심해지며[42] 2군으로 내려갔고, 부상이 정확하게 완치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2군 경기에 등판하며 부상이 더욱 악화, 결국 2009년 시즌 중 웨이버 공시되어 은퇴하고 말았다.

  • 양훈: 킬인식 감독 시절에는 양훈뿐만 아니라 마정길, 안영명, 윤규진, 황재규, 허유강 등등 한화 이글스의 젊은 불펜 투수 사실상 전원이 노예 생활을 했는데,[43] 그 노예들 중 재기에 성공한 선수가 양훈뿐이었다. 양훈은 2011~2012년에는 선발 투수로 뛰면서, 그리고 2013년부터는 경찰청 야구단에 군복무하면서 노예 생활을 청산했고, 전역 후 2015시즌 중에 넥센으로 트레이드되어 토종 선발로 자리잡나 싶었으나, 16시즌 스캠 전후로 밸런스 붕괴와 BABIP 신의 불운이 겹쳐 완전히 망해버렸고, 17시즌 후 방출당했다.

  • 마정길: 한화 시절 때 이미 마노예로 불릴 정도로 굴려지다 2009년과 넥센으로 트레이드 된 2010년에는 어느 정도 노예 생활을 청산했으나 2011년에 다시 굴려졌다. 그런데 2011 시즌 중 경기나 훈련과는 상관 없는 어이 없는 부상을 당하여 2011년 8월 5일 이후부터 등판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오재영, 이정훈과 이보근이 혹독한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
2013 시즌에 복귀하여 2016 시즌까지 추격조로 등판하여 노예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 정우람: 2010년대를 대표하는 KBO 불펜 노예이자 김성근식 혹사를 받고도 퍼지지 않은 몇안되는 케이스다. SK 시절인 2006년에 82경기나 나온 후 2007년에는 47경기밖에 안 나오더니, 2008년부터 소위 정노예로 불릴 정도의 S급 노예로 생활했다. 2008년에 시즌 85경기 출장하며 투수 한 시즌 최다출장 타이기록을 세웠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는 경기 당 이닝이 1이 안 되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하며 이닝수라도 적었지만, 2010년에는 75경기 102이닝 불펜 투수 중 세계 최다 이닝이었다.[44] 2011년에는 68경기 94⅓이닝을 소화하면서 노예 지수(?)가 상승했음에도 탈이 나지 않아 '고무팔'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2010년에는 102이닝을 던지고도 평균자책점을 3점대, 2011년에는 94.1이닝을 던지고 평균자책점을 1점대로 유지할 정도로 미친 내구성을 자랑했다.
2012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뛰었음에도 시즌 초반에 노예로 굴려지다 퍼져서 박희수와 동시에 2군으로 내려갔다가 7월 초에 복귀했다. 부상이 있었는데도 평균자책점 2.20을 기록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훌륭하게 했음에도 끝내 국가대표로 뽑히지 못하다가, 2012 시즌 후 12월 26일에 상근예비역으로 입대하여 드디어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전역 후 치른 첫 시즌인 2015시즌을 중간계투와 마무리를 오가며 활약했다. 후반기에 타이트하게 굴려지자 부진했지만, 시즌 전체를 보면 불펜 탑클래스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 그리고 FA를 통해 한화로 이적하고 2016 시즌, 송창식이나 권혁보다는 덜했지만, 실로 어마무시한 혹사를 당했다. 정우람의 전 명성과 돈값에 따져서 실망한 팬들이 있지만, 정우람은 역대급 투저타고 시즌인 2016시즌에 61경기 81이닝을 소화할 정도로 김성근 혹사를 당하고도 평균자책점 3.33, 피안타율 0.222를 기록했다. 이 시기 KBO 리그가 극강의 타신투병임을 감안하면 리그 최정상급 성적이다. 17시즌엔 김성근도 양심은 있었는지 별로 안굴렸으나 짤렸고(…), 감독대행이 거의 양아들 수준으로 철저히 관리해주며 노예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평균자책점 2.75에 26세이브라는 좋은 성적으로 노예 탈출에 대해 보답했다. 이후에는 나이가 있는 마무리 투수라서 관리를 받고 있다. 그래도 17~20시즌 4년 연속 50경기+50이닝 이상을 출장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나이를 먹어 점점 폼이 떨어져 출장 횟수가 크게 떨어졌으나 간간히 출장하고 있고, 2023년 10월 기어이 1,000경기 출장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 권혁: 삼성 소속 시절인 2007년, 2009년, 2010년 모두 60경기 이상&70이닝 이상을 소화하면서 노예로 활동했다. 하지만 2011년에는 많이 얻어맞고 분식회계를 저질러 준수한 편이었던 평균자책점에 비해 믿음을 주지 못하면서 58경기밖에 안 나온 데다가 경기당 이닝이 1도 안 되는(48⅓이닝),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한 바람에 노예 생활을 청산했다.
2012년에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서 64경기에 등판하고 49⅓이닝을 던지면서 다시 노예로 돌아왔다. 하지만 2013년에는 필승조에서 밀려나 52경기 36⅓이닝만을 소화해서, 2014년에는 권혁이 아니라 차우찬이 좌완 노예로 혹사당한 덕에 노예 생활을 청산했다.
2014시즌 후 FA를 통해 한화로 이적한 뒤 2015시즌 시작하자마자 윤규진, 박정진과 함께 노예로 굴려졌는데, 마무리 투수 4월 중순에 윤규진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자 윤규진 대신 중무리를 맡으며 5월 1일 현재 KBO 불펜투수 중 유일하게 규정이닝을 채울 정도로 혹사당했다. 그런데 5월 2일 규정이닝 채운 투수들 중 평균자책점 5위라는 게 흠좀무(…). 결국 2015시즌에 살려조 1호기로 이름을 떨칠 정도로 시즌 내내 혹사를 당하여 기어이 8월 말에 100이닝을 돌파하고 심지어 9월에는 2002년 노장진 이후 한 시즌 2,000구를 돌파했다. 이 정도면 어지간히 혹사 당한다는 투수들이 애들 장난으로 보일 수준이었고, 결국 78경기 112이닝을 소화하고 2,098개의 공을 던진 것도 모자라 13패를 찍어 구원 최다패 기록마저 경신하고 말았다.

  • 데니 바티스타: 2011년 시즌 중반에 한화로 들어와서 중무리로 활약했다. 덕분에 2012년에는 흑판왕에서 흑작가로 전락하고 2012시즌 중반부터 선발 투수로 전향하여 나름대로 성공하였지만, 2013 시즌에서는 확실하게 선발에 안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결국 시즌 후 재계약이 되지 않아 팀을 떠났다. 물론 대나 이브랜드와 함께 당시 정말 답이 없던 수비의 탓이 크지만...

  • 박정진: 2011년에 만 35살의 늦은 나이에 포텐이 터져서, 그리고 필승조가 그와 흑판왕밖에 없어서 노예 생활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부상으로 2012년 4월을 날린 뒤 5월에 27경기 중 18경기나 나오면서 혹사당했고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가 6월 10일에 1군으로 올라와서 6월 25일까지 13경기 중 8경기나 나오는 혹사를 다시 당하였고 8월과 9월에도 거의 매일 등판하면서 63경기에 나와 49⅓이닝을 소화했다.
혹사의 여파 때문인지 2013년에는 계속 재활하다가 7월 9일부터 등판하여 30경기 21⅓이닝을 소화했다.
2015년에는 불혹의 나이에 처절하게 굴려지는 통에 살려조 2호기가 되고 말았는데, 부상 때분에 9월 11일부터는 등판하지도 못했음에도 76경기 96이닝이나 소화했다.

  • 송창식: 신인 시절이던 2004년 한화 감독이었던 유승안에 의해 투수진이 불안했던 한화에서 노예로 굴려졌고, 결국 1년만에 토미 존 수술을 받게 되었다. 유승안 감독 이후 부임한 김인식 감독은 송창식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군에 올려서 당겨 쓰기 시작했으며, 2008년 4월 버거씨병으로 인해 잠시 야구를 떠나 있었다. 2010년 복귀해서 한대화 감독과 2년을 보낸 뒤 2013 시즌을 중간계투로 시작한 송창식은, 2013년 4월에 한화 투수진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호투한 대가로 중무리 투수로 보직이 변경되어 5월 8일까지 팀이 치룬 29경기 중 17경기나 등판하며 김응용 감독의 노예로 거듭났다. 그렇게 굴려진 결과 57경기 71이닝을 소화했고, 한화 마무리 투수 중에는 5년 만에 20세이브를 달성했다.
2013년의 혹사 여파 때문인지 2014년에는 부진하여 마무리 투수에서 밀려났고, 나중에는 2군으로 가며 강제로 안식년을 보냈다. 2015년에는 새로운 감독을 만나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또다시 굴려지며 64경기 109이닝을 소화하며 살려조 3호기로 거듭났다. 게다가 하도 이리저리 굴려지는 통에 평균자책점이 6.44나 된다.

  • 안영명: 송창식이나 권혁, 박정진 등에 가려저서 그렇지, 이 사람도 만만치 않다. 이미 2007시즌 61경기 94이닝으로 미친 출전을 해대며 결국 군입대 전까지 구위하락으로 애매한 투수가 돼버린다. 군 입대 이후인 2014년에는 선발-불펜을 오가며 48경기 97⅔이닝을 소화하며 다시 노예가 되었고,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2015년에는 불펜-선발-불펜을 5일만에 주파하거나, 주 3회 선발 등판을 하는 등,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굴려지며 35경기 125⅓이닝을 소화했다. 그래도 2015년에는 10승을 거두며, 2011년의 류현진 이후로 4년만에 등장한 한화 토종 선발 10승 투수 기록을 세운 것을 위안삼을 수 있었다.

  • 에스밀 로저스: 시즌 중 대체 선수로 들어와 10경기 75.2이닝 4완투 3완봉을 기록했다. 하지만 등판시 평균 투구수 115구, 5경기 연속 123구 이상을 던지는 등 굴려졌고 결국...

  • 살려조: 2015년 김성근 감독의 등장과 함께 생겨난 신조어. 해당 항목 참조.


3.7. SSG 랜더스[편집]


  • 조웅천: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매 해 50경기 이상 60이닝을 소화[45]하면서 노예역할을 했다. 그나마 노예 중에서는 상당히 롱런했다는 점에서 이 선수의 내구도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채병용: 데뷔 2년차 시즌이던 2002년 시즌부터 강병철 감독 아래서 전천후로 굴려지며 141이닝에 7승 11세이브를 거뒀다. 이후 조범현-김성근 아래서도 전천후로 나왔고, 특히 2009년에는 팔꿈치에 복합 부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한국시리즈까지 부상에 허덕이던 팀의 투수진을 책임지기도 했다. 2009년 시즌 후 팔꿈치 수술을 받은 뒤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쳤고 제대 후에는 예전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2016년 어느 정도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다시 전천후로 투입되어 68경기 86이닝을 소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 이승호: 데뷔 시즌부터 SK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고졸 신분으로 신인왕을 수상한 검증된 노예.
데뷔 이후 2년간 강백정 감독의 미칠 듯한 혹사로 부상을 얻어 2005~2007년을 통째로 날려 먹은 후 2008년에 복귀에 성공한 후, 2009~2010년을 다시 노예로 생활하였다.
2011년에는 새로운 노예인 박희수의 등장으로 노예 생활을 청산했다가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다시 노예 모드로 돌아왔다. 2011 시즌 후 FA를 통해 롯데로 팀을 옮겼는데 2012년에는 부상과 부진으로 1군과 2군을 오락가락하여 다시 노예 생활을 청산했다.
2012 시즌 후 NC에 특별지명되어 팀을 다시 옮기면서 특별지명된 선수들 중에서는 가장 기대를 받았지만, 2013년~2015년에 망하는 바람에 정작 그 선수들 중 가장 쓸모가 없었다. 결국 2015시즌 후 방출된 뒤 SK로 이적했다. 2016년에 퓨처스 리그에서만 뛰고서 시즌이 끝난 후 은퇴했다.

  • 전병두: 노예 하나는 잘 만드는 감독 때문에 선수생활 자체를 망친 케이스. 두산KIA를 거쳐 2008년에 SK로 와서 포텐이 터져 2009년~2011년 동안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로 다양하게 부려졌다. 하지만 부상으로 2011년 9월을 통째로 날렸는데, 한 달을 날리고도 51경기 92⅓이닝이나 소화했다. 3년동안 거의 5000구 가까이 던졌다. (4948구)
그리고 결국은 수술과 재활로 2012년부터 1군 경기는커녕 2군 경기조차 나오지 못하고 재활만 하다 2016년 10월 8일 정규시즌 최종전 선발로 등판해 김상수를 상대하며 은퇴경기를 치렀다.

  • 고효준: 2002년에 롯데에 입단한 후부터 SK로 팀을 옮기고도 2008년까지 존재감이 0에 수렴했던 선수였다. 그런데 2009~2011년 동안 선발, 불펜 가리지 않고 3년 연속 30경기, 100이닝을 넘게 소화하였다. 다만 같은 팀에 워낙 뛰어난 노예들이 많기도 하고 본인이 워낙 롤코 기질이 심해서 노예라고 동정받지는 못했다. 2012년 4월 30일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여 노예 생활이 끝났다. 소집해제 후에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1군 경기를 치루기는 했으나 시원하게 망했고, 결국 2016년의 트레이드 마감일인 7월 31일에 KIA로 트레이드됐다. KIA-롯데-LG를 거치다가 2022년에 SSG로 돌아왔다.

  • 박희수: 2011년부터 새롭게 떠오른 좌완 노예로, 수술 경험이 있음에도 2012년 4~5월 동안 노예로 굴려지다 결국 퍼져서 6월 21일에 2군으로 내려갔다가 7월 초에 정우람과 같이 복귀했다. 이후로도 계속 구르다가 결국 9월 27일 33홀드를 기록하며 KBO 시즌 최다 홀드 기록을 갱신하였고, 결국 65경기 82이닝이나 소화하며 제대로 노예 인증했다. 2013년에는 부상 때문에 5월부터 등판했는데, 마무리 투수임에도 노예처럼 굴려졌다.
2014년에도 노예로 굴려지다 결국은 부상을 당하며 2군으로 내려가고 시즌 끝날 때까지 1군에 올라오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퓨처스리그에서도 꼴랑 2경기밖에 못 나왔다. 결국 2015시즌 8월에나 실전 경기에 등판했다. 복귀 후에는 1이닝 마무리로 관리받으며 노예 탈출에는 어찌어찌 성공.

  • 이재영: 노예라는 개념이 없던 두산 베어스 시절인 2002년 ~ 2004년[46]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LG 트윈스 시절과 SK 와이번스로 이적한 후 2010년, 2011년에는 별 활약이 없어서 이대로 묻히나 했지만, 2012년에 7월 11일부터 7월 17일까지 4일 연속&5경기 연속으로 등판을 하는 등 한시적으로 다시 노예로 돌아왔다. 2015 시즌 이후 팀동료 엄정욱과 함께 보류선수명단에서 제외되었다.

  • 전유수: 2005년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 후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활약이 거의 전무했다. 2013년에 추격조로 시작했으나 박희수가 부상으로 1군에 없었던 데다가 채병용, 이재영, 윤길현마저 맛이 가는 통에 필승조로 승격되더니, 4월에 SK가 치룬 19경기 중 10경기, 5월에는 일주일에 4경기나 등판하는 등 SK의 신흥 노예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우람이 군 복무를 하고 박희수가 부상으로 1군을 오락가락하다 결국 시즌 아웃된 2014년에는 팀이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등판하는 전천후 노예로 거듭나서 67경기(공동 4위) 84⅔이닝을 소화하며 2014년에 불펜 전문으로 뛴 투수들 중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하지만 팀이 아깝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데다가 노예로서의 존재감마저 차우찬한테 밀렸다.

  • 박정배: 2005년에 두산에 입단했지만 두산 소속이었을 때는 듣보잡에 불과했다. 그리고 2차 드래프트를 통해 SK로 와서 2012, 2013년에는 추격조로 나오다가, 2014년에는 전유수와 똑같은 이유로 노예가 되었고 역시 전유수와 똑같은 방식으로 굴려지며 전반기에 43경기(공동 3위)에 나왔다. 그리고 어깨 통증 때문에 후반기 시작하자마자 재활군으로 내려갔고 결국 후반기에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 김주한: 2016년 SK의 떠오르는 신성 노예. 대졸 신인으로 입단한 첫 해부터 불펜 요원으로 투입되어 39경기 59이닝을 소화했고 불펜진이 거덜난 2017년에도 8월밖에 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55경기에 나와 65이닝을 소화하는 중이다.



3.8. 키움 히어로즈[편집]


  • 신철인: 2000년 현대에 입단했으며, 2001년에는 마무리 위재영이 퍼져버리며 땜빵 마무리까지 뛰었다. 이 시기에 6연투가 나온 건 덤이며 57경기에서 96이닝을 던졌다. 결국 2006년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하락세를 탔고 결국 2010년에 은퇴했다.

  • 송신영: 현대 시절, 히어로즈 시절, LG 시절을 통틀어 2003년을 제외하고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매해 70이닝 이상을 던졌다.[47] 그럼에도 60경기 이상 나온 해가 2010년과 2011년 밖에 없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노예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 노예 생활을 한지라 묻혔다.
2011 시즌 후 한화로 이적하여 2012년에는 분식왕에 등극하며 노예생활을 청산함과 동시에 FA 먹튀로 전락하였고, 결국 2012 시즌 후 NC에 특별지명되어 팀을 옮겼지만 2013년 4월에 트레이드를 통해 친정 팀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2013년에 넥센의 대패조들 덕분에 이정훈과 함께 넥센 노인정불펜이라 불리며 열심히 선발 투수들의 장작을 치우며 물론 본인도 쌌지만 61경기 61⅓이닝을 소화했다.
2015 시즌에는 선발로 뛰다가 시즌 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다시 한화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무런 활약도 못하고 은퇴하였다.

  • 황두성: 2005년에 60경기 128이닝을 구원 투수로 뛰며 던졌고 10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현대는 DTD를 겪었던 데다가 비인기 팀이었던지라 황두성이 혹사를 당해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7~2009년에는 3년간 120경기 336이닝을 투구했다. 결국 혹사 후유증으로 2011시즌 끝나고 현역 은퇴했다.

  • 이보근: 2009년~2011년까지 매해 50경기, 70이닝 이상을 소화하였다. 불쌍한 것은 소속팀이 팀이다보니, 두 자릿 수 승, 두 자릿 수 홀드, 두 자릿 수 세이브 중 어느 하나도 기록한 적이 없었다. 송신영마저 타팀으로 넘어가버린 이상 이보근의 미래는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노예로 굴려진 여파 때문인지 2012년에는 망테크를 타고 말았다.
2013년에는 5월과 6월에 좋은 활약을 하였지만, 6월에 노예로 굴려진 여파 때문인지 7월부터 다시 망테크를 타고 말았고, 시즌 후 군입대했다. 2016년에 홀드왕을 달성했긴 했지만 다음 해 본래 모습으로 회귀하면서 플루크 의혹이 있다. 사실 16년에도 홀드 갯수만 제외하면 자책점도 높고 세부 스탯은 좀 처참하다.

  • 오재영: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서 2010~2011년 노예 생활을 하였다. 2012년에는 부진하다가 부상으로 시즌 중 이탈하면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고, 2013년 8월 11일에 복귀, 이후 2013년 페넌트레이스는 물론 포스트시즌에서도 선발 투수로 등판하면서 제대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다.15년은 고질병때문에 날려먹고 16년부터 다시 좌완불펜으로 나오고 있는데 특급은 아니지만 좌완이 부족한 팀 사정상 꾸준히 활약 중.

  • 한현희: 고교야구때부터 혹사가 심한편이였다. 2012년에 고졸 1년차 신분으로 43경기 69⅓이닝을 소화하며 노예로서의 자질을 보이더니 2013년에 69경기 67⅓이닝을 소화했고, 결국 2014년에는 66경기 78⅔이닝을 소화하며 이닝이 경기당 이닝 수가 1이 넘어가는 진정한 노예로 거듭났다. 게다가 2014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엔트리에 이름은 올리고 한 경기도 등판하지 않는 투수가 이나 있었던 데 반해, 한현희는 4경기 모두 출장하며 플레이오프에서도 노예로 굴려졌다. 그 대가로 한국시리즈에서는 엄청 부진했다.
그래도 2013년, 2014년에 홀드 1위를 수상하고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병역특례를 받아서 노예로 활약한 대가를 제대로 받기는 했다. 2015시즌 선발 전향하며 노예 신분서 탈출하나 했으나, 혹사당하는 조상우의 짐을 덜고자 염경엽 감독이 시즌 중에 다시 한현희를 중간계투로 내보냈다. 결국 토미 존 수술로 2016시즌을 통째로 쉬게 되었다. 17시즌 야심차게 복귀했으나 선발과 불펜 모두 자리를 잡지 못했다. 과거의 구위를 잃었다고 보는게 중론. 18시즌 선발로 복귀.

  • 조상우: 2014시즌에 혜성 같이 등장해서 노예 모드로 굴려지는가 했더니 5월 13일에 부상을 입고 이탈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빨리 복귀하여 7월 8일부터 예상대로 노예로 굴려졌다. 그리고 한현희가 선발로 보직을 옮긴 2015년에는 팀의 유일한 불펜노예로 굴려졌고, 혹사로 한 번 구위가 떨어져서 10일간 푹 쉬고 올라와 구위를 회복해 부진한 손승락을 대신해 마무리로 전향했다. 하지만 마무리 투수임에도 혹사를 당하며 70경기 93⅓이닝을 소화했고, 포스트시즌에서도 5경기 중 4경기 6⅓이닝을 소화하다 결국 구위가 떨어져 목동구장 마지막 경기를 대역전패로 장식했다. 결국 2016시즌 팔꿈치 피로골절로 장기이탈이 확정되었다. 한현희와 같이 17시즌 복귀해 선발로 시작했으나 이닝을 먹으면 먹을수록 흔들린데다가 또 고통을 호소해 전력 마이너스가 됐다. 18년부터는 1이닝 제한 마무리로 고정. 2020 도쿄 올림픽에서 타이트해질 때마다 김경문 감독에게 굴려지기도 했다.


3.9. NC 다이노스[편집]


  • 김진성 : 2014~2019년 구원이닝 1위. 이걸로 김진성이 김경문-최일언에 의해 얼마나 굴려졌는지 알수있다. 이 둘이 NC 다이노스를 떠난 이후로는 혹사당하지 않고 있지만 전성기 시절의 구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2020시즌 후반기에 전성기 시절의 구위를 회복하며 NC의 정규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전경기 등판하며 NC의 통합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 원종현: LG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지만 부상 때문에 1군에서 한 경기도 못 뛰다가 2012년에 NC에 신고선수로 입단했음에도 2013년까지도 한 경기도 못 뛰었다. 그런데 2014년에 그 동안 못 뛴 경기 한 해에 다 치른 것 마냥 굴려지며 73경기 71이닝, 특히 특히 NC의 후반기 51경기 중 무려 33경기나 출장하며 제대로 노예로 굴려져서 2014년 투수 등판 경기수 2위를 기록하고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전 경기에 등판했다. 하지만 차우찬에 묻혀서 노예로서의 존재감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2015년 1월에 대장암 때문에 수술을 받아서 뜻하지 않게 노예 생활을 그만두게 되고 말았다.
2016시즌에는 거의 600일 만의 복귀 이후 김경문 감독이 원종현의 하루 투구 수를 20구가 넘지 않게 관리하였다. 하지만 2016 포스트시즌에서는 8경기 중 6경기나 등판하고 난타당하는 등 다시 노예로 돌아왔다. 17시즌 역시 굴려졌고, 포스트시즌 5연투를 당하는 등 위태위태한 가운데에도 준수한 필승조로 활약 중. 2020년에는 통합우승을 알리는 헹가레 투수가 되었다.

  • 최금강: 2012년 신고선수로 입단하여 3년 동안 꼴랑 34경기 38⅔이닝을 소화했지만, 2015년에는 원종현을 대신하여 노예로 굴려지며 78경기 89⅔이닝을 소화하며 살려조 1호기와 더불어 등판 경기수 공동 2위를 기록했다. 후반기에 추격조로 등판해 아웃카운트 하나 못 잡는 것을 보고 다들 구위가 확연히 떨어져 휴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올렸다고 최금강이 아닌 김경문을 깔 정도. 16시즌 중반 선발 전환으로 조금 나아지나 싶더니 17시즌은...

  • 임정호: 2013년에 입단하여 2년 동안 1군 경기에 등판한 적이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0인 선수였으나, 2015년에는 80경기 48이닝을 소화하며 최다 경기 등판 순위 1위를 기록했다. 다만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 뛰었기 때문에 같은 좌완 투수인 살려조 1호기나 살려조 2호기에 비해 소화 이닝 수는 현저히 적었다.


3.10. kt 위즈[편집]


  • 조무근: 이름을 뒤집어서 말하면 근무조가 되므로 노예라는 농담이 있다. 2015년에 조무근이 소화한 경기수나 이닝을 보면(각각 43경기 71⅔이닝) 혹사라고 보긴 어렵다.[48] 하지만 2군에서 보낸 이닝도 적지 않기에 노예조에 충분히 넣을 수 있다.

  • 장시환: 2015시즌 47경기 74⅔이닝을 소화했고, 이중에는 2이닝, 3이닝 던져가며 세이브나 구원승을 챙긴 경우도 있는지라 거의 2000년대 중무리급 등판을 했지만, 위의 조무근과 마찬가지로 팀이 워낙 약체라 이기는 경우가 없고 자연히 던질 기회도 별로 없어서 자동으로 휴식이 보장됐다.

  • 고영표: kt에서 2016시즌에 새롭게 떠오른 노예. 조무근이 맛탱이가 가버리는 바람에 시즌 초반에 구위가 좋았던 고영표는 4월에 타이트한 상황에서 자주 등판하였고, 팀이 4월에 치룬 25경기 중 16경기나 등판하며 혹사지수 3위를 찍었다. 거기에 5월에 들어서는 3경기 연속 2⅓이닝 이상을 던지다가 결국 구위가 떨어져 2군으로 내려갔다. 2017시즌부터는 선발로 전환해 대각성하며 노예직에서 탈출했다.

  • 심재민: 2016 시즌에 맛이 간 고영표를 대신해 5월 말부터 살려조 못지않게 미친듯이 굴렀다. 6월에는 3일 연속 등판을 3번이나 했을 지경. 2017 시즌 감독이 바뀌었으나 믿을 만한 좌완이 없는지라 역시 많이 나왔다.

  • 주권: 2019 시즌 팀의 셋업맨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미친듯이 혹사 당하여 77경기(전 투수 중 1위) 70이닝을 소화했다. 2020 시즌의 경우 더블 헤더 2경기에 모두 등판하는 등 여전히 많이 등판했다.


4. 과거[편집]


1980년대에 야구 전설을 써내려 간 투수들 중에 혹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수준이다. 다만 이 당시에는 선발 로테이션, 선발/중간계투/마무리의 투수진 세분화, 투구수 관리 같은 개념 자체가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장명부는 1983년 한 시즌 동안 60경기, 427⅓이닝, 36완투, 30승 16패라는 전무후무한 최악의 노예 혹사 기록[49]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고 장명부의 말로는 뭐...

최동원은 아마야구 시절부터 기록적인 혹사를 당해왔으며 1981년 코리안시리즈에서 6경기중 6경기 등판해 42⅓이닝 2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2.32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1984년 한 시즌 동안 51경기에 출장하여 27승 13패, 284⅔이닝을 기록하였다. 또한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5경기 등판 4승 1패 4완투 2완투승 1완봉승 1완투패 1구원승 40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1.80 WHIP 1.08.이라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다시 본인이 갈아치웠다. (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 완투패, 6차전 구원승, 7차전 완투승.) 총 40이닝 투구를 기록,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최동원의 빛에 가린 투수로 김일융이 있는데, 1984년 시즌 중에는 38경기 23선발 222이닝밖에(?) 소화하지 않았지만, 최동원과 맞붙은 한국시리즈에서 4경기 출전하여 3승 1패(2차전 선발승, 4차전 선발승, 5차전 구원승, 7차전 선발패)를 기록하였다.[50] 1985년 시즌 중에는 34경기 28선발 226이닝을 소화하여 25승(김시진과 공동 다승왕)을 기록하였다.

김시진도 1983년 37경기 229⅓ 이닝, 1984년 39경기 215이닝, 1985년 47경기 269⅔이닝 (25승) 을 소화했다. 그리고 1987년 193⅓이닝을 던지고 다시 한 번 23승을 기록하며 마지막 불꽃을 피운 뒤, 사실상 완전히 어깨가 망가져 버렸다.

선동열 역시 1986년 39경기 출전, 22경기 선발, 19완투 8완봉승, 262⅔이닝을 투구하고 24승을 기록하였다. 그 뒤로도 선발구원 안가리고 나왔으며 1992년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되기 전까지는 매년 노예로 굴려지며 팀에게 1986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 1988년 한국시리즈, 1989년 한국시리즈, 1991년 한국시리즈 총 5번의 우승을 안겨주었으며 세 번의 헹가래 투수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1993년에는 마무리로 전업하여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헹가래 투수가 되며 해태 타이거즈에게 7번째 우승을 안겨주었다.

5. 아마추어[편집]



5.1. 한국의 경우[편집]


선수층이 얇은 아마추어 팀일수록 에이스 투수의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투수의 혹사로 이어지는 일이 흔하다. 문제는 고교 시절에 좋은 기록을 내야만 프로 또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현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어릴 땐 많이 던지면서 어깨를 강화시켜야 한다라는 투구 이론[51] 때문에 쉽게 개선될 지는 미지수이다. 그래서 입단 초기만 해도 유망주로 큰 기대를 받았으나 고교 시절 혹사로 인해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지는 투수들이 많다. 또 이런 투수들은 즉전감이라는 명목하에 프로와서도 전천후로 엄청 굴려진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한기주로 고교 시절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으나 고교시절과 입단 초 거듭된 혹사를 견디지 못해 기나긴 재활의 시간을 보냈고, 겨우 복귀했으나 전만한 압도적인 구위나 구속은 잃은지 오래였다.

관련 기사에서 발췌

- 2006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13⅔이닝 242개 투구
- 2006년 청룡기 결승, 연장 16회 222개 투구

  • 김광현
- 2006년 청룡기 226개 투구

  • 장우람
- 2005년 봉황대기 18이닝 216개 투구(첫날 12이닝 무승부, 둘째날 6이닝)

- 2011년 황금사자기 5연속 완투승(45이닝 624개)

  • 이수민
- 2013년 황금사자기 1경기 9⅔이닝 178개 포함, 7경기 974개 관련기사

  • 성영훈: 200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서 팔꿈치 통증이 있었으나 예선(8⅓이닝)-8강(완투)-결승(완봉)을 주파했다. 거기에 결승전은 고열로 제 상태가 아님에도 뛰었다!


5.1.1. 개선을 위한 노력[편집]


  • 고교야구 주말리그로 변경 (2011년)
그나마 정영일과 그 동기들의 혹사 논란으로 고교야구가 고교야구 주말리그로 개편되었다. 선수들에게 학습권을 보장하고, 경기 후 충분한 휴식을 주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런데 주말리그로 바뀜에 따라, 더욱더 에이스 의존도가 높아지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충분히 휴식이 주어지는 것은 좋지만, 매주마다 에이스 투수 1명만을 계속 내보면서 여전히 혹사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프로 지명 대상에 오를 정도가 아닌 다수의 선수들은 이 문제에서도 관심밖에 놓여 있는 실정.

  • 130개 투구수 제한 규정 (2014년)
결국 논란 끝에 2014년 2월 26일에 투구수 제한 규정이 생겼다. 투수가 한 경기에서 최대 130개까지만 던질 수 있으며, 이를 넘어설 경우 3일간의 의무 휴식이 강제되는 규칙이다. 관련기사 그러나 실제 제도 시행 후에는 정확히 130개에서 끊고 있어서 의무 휴식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다.

  • 투구 수 제한 강화(2018)
투구 수 제한이 더욱 강화되어 한 경기 최대 105개까지만 던질 수 있으며 31~45개 투구 시 1일, 46~60개 투구 시 2일, 61~75개 투구 시 3일, 76개 이상 투구 시 4일을 의무적으로 쉬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선수 보호라는 취지 면에서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선수 층이 두터운 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여기에 토너먼트 대회의 경우 일정을 먼저 시작해 상대적으로 휴식일이 넉넉한 팀이 유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5.2. 일본의 경우[편집]


일본 고교야구 선수인 안라쿠 토모히로는 2013년 3월 26일의 코시엔 경기에서 연장 13이닝까지 232개의 투구수를 기록하고, 4일 뒤에도 선발 출전하여 9이닝 159개의 투구수를 기록했다. 두 경기 합쳐서 391구를 던진 것이다. 언론에서는 '괴물 투수'로 포장했지만, 이것이 정말 괴물의 등장인지, 단지 투수 혹사일 뿐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관련 기사 이후 안라쿠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1라운드 지명[52]을 받고 프로에 진출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2~3시즌을 날리고 끝내 선발을 포기하였다. 포텐 자체는 꽤 높았기 때문에 입단 6년차인 2020년 후반기부터 불펜으로 자리잡으면서 살아남긴 했지만 불펜 투수는 기량이 조금만 떨어져도 파리목숨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롱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이보다 더한 원조노예 괴물은 바로 마쓰자카 다이스케인데, 당시 요코하마 고교 재학 중이던 1998년 코시엔에서 연장 17이닝까지 가는 접전을 포함해 3일 동안 무려 419개의 투구수를 기록하며 모교를 코시엔 우승으로 이끈 바 있다.

2014년 8월 일본 니칸 스포츠 신문에 고시엔의 투구수 문제에 대한 칼럼이 '내가 고시엔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키무라 코우이치'가 작성한 글이며, 번역된 내용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일본 야구의 현실적인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졸업 예정 선수 전원이 자동 지명 대상이 되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고교 선수 중 극히 일부만이 성인야구(대학, 사회인/독립리그, 프로)로 가며 나머지 선수들은 고시엔을 끝으로 야구 선수 커리어를 끝낸다. 이러한 점 때문에 혹사가 용인된다는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시엔 항목 참조. 근데 위에서 지적된 안라쿠는 고졸로 프로에 진출한 게 문제지


5.3. 기타[편집]


박동희 기자가 한국의 한기주와 일본의 '쓰지우치 다카노부'의 경우를 비교하며, 한일 야구계의 선수 혹사에 대한 비평 기사를 작성하였다. 기사보기

노예등판에 빗대어 야구 경기마다 가리지 않고 거의 매일 나오는 강행군을 하는 캐스터나 해설위원에게도 이 단어를 쓴다. 예를 들어 2013년의 한명재 캐스터가 있는데, 한명재 캐스터는 본래 맡는 한국야구는 기본에 중계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선발등판 캐스터로 꼭 나오며, 류현진 경기가 아니라도 메이저리그 중계 경기 캐스터로 종종 나왔다. 특히 9월 12일에는 아침에 류현진 선발경기 캐스터로 나온 경기를 중계한 뒤 오후에 방송할 프로야구 경기를 위해 삼성 홈구장인 대구로 바로 내려가기까지 하여 노예등판이라는 드립이 나왔다. 2015년에는 SPOTV최두영 캐스터가 우천 취소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의 중계를 맡으면서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보다 더한 노예는 사실 지방의 라디오 야구 캐스터들이라고 볼 수 있다. 라디오 특성상 중계상황을 TV에서보다 훨씬 더 설명해줘야 해서 TV 캐스터보다 더 설명을 많이 해야 한다. 근데 거기에다가 전 경기 중계를 해야 되다 보니...

공서영 역시 XTM으로 이적한 후에는 주 6일에서 월요일 경기 있는 때까지 포함하면 매일같이 등판했다.


6. 관련 문서[편집]



[1] 4일 내지 5일. 6선발 체제의 경우 1주일에 한번 등판하므로 6일.[2] 대체로 마인드의 차이. 불펜 피칭은 그냥 편하게 하고 싶어하는 투수가 있는 반면 타자를 상대하면서 어느 정도 긴장감을 갖는게 더 좋다는 투수가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도 실제 등판은 부상 염려도 크고, 투구수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보통은 그냥 불펜 피칭을 한다.[3] 마크 프라이어를 혹사로 보냈던 걸로 까인 그 빵감독.[4] 미국은 일요일 프라임타임 1경기 빼고 일요일 경기 = 낮경기 공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야구의 경우 토요일(밤경기)과 일요일(낮경기) 경기의 시간차가 12시간 정도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주말은 주전을 풀로 돌리기가 어렵다.[5] 3시즌 이상 버티면 연봉조정자격이 생기고 본인 동의 없이 마이너 강등이 되지 않는다. 아예 먹튀급으로 못 던지지 않는 한 방출 위험은 최저연봉시기보다는 낮은 편.[6] 이런식으로 탈이 나는 바람에 구위나 구속이 조금 하락한 선수들은 선발 경력이 꽤 있는 경우 한국과 일본을, 선발 경력이 드문 경우 일본과 대만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왜 선발 경력이 드문 선수가 한국은 포기하는데 더 수준이 높은 일본에는 도전할 수 있냐면 일본의 경우 불펜 용병도 많이 써먹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대만의 경우 AAA에서 불펜으로 뛰었다고 해도 대만에서는 선발로 꽤 써먹을 만큼 리그 수준이 낮기 때문에 선발 경험이 적어도 도전이 가능한 것.[7] 2010년 72경기 80⅓이닝 47홀드(1위)(2013년 기준, 일본프로야구 최다 홀드 기록) 1세이브, 2011년 79경기(1위) 87⅓이닝 45홀드(1위) 10세이브.[8] 히라이는 2018-2019년 2년 연속 필승조였지만 2019년부터는 공의 위력이 떨어지면서 선발과 추격조를 오가게 되었다. 2020년에는 41경기 60.1이닝을, 2021년에는 25경기 74.2이닝을 던졌는데, 두 시즌 모두 ERA 4점대로 좋지 못했다. 물론 팬들은 2019년에 그렇게 미친듯이 던져놓고 아직도 시즌 60~70이닝 씩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히라이의 내구성에 감탄하고 있다(...)[9] 당시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짠돌이 구단으로 유명했던 롯데가 5억이라는 거액을 베팅할 정도였으면 차명주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만하다. 게다가 무려 1996년에 5억을 받았는데, 20년 후인 2016년 현재의 물가를 생각해보면 자그마치 7~8억 원 정도 되는 돈이다.[10] 다만 2003년에는 현대 이상열과 공동 홀드왕에 올랐다.[11] 다만 올라올 때마다 한 타자만 잡고 들어가는 원 포인트 릴리프라 이닝 소화 횟수는 33⅔에 그쳤다.[12] 이 기록은 2013년 롯데 강영식에 의해 경신된다.[13] 두산 구단에서는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이재우는 현역 연장을 원했다.[14] 사실 17시즌 시작 후 2군에서 이미 플레잉 코치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충호 등 신예들에게 슬라이더 그립을 가르쳐줬다고.[15] 스캔들을 감안하더라도 야구팬들은 대체로 임태훈이 감독 멱살잡아도 할 말 없을 수준이라고 본다.[16] 그나마 줄어든 게 51경기 50⅔이닝이다.[17] 6월에는 한 경기.[18] 공식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생활 문제라는 설이 있다.[19] 2012년 우규민의 92⅔이닝은 2012년 43경기 이상 등판한 투수들 중 가장 많은 이닝이다.[20] 4월 14일 한화와의 대전 경기.[21] 2018년을 제외하면 모두 70경기 이상 출장[22] 특히 5차전에서 호세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허용한 뒤에는 울면서 마운드를 내려올 정도였다.[23] ex.권혁, 송창식, 이재우 등.[24] ex.주형광, 전병두 등.[25] 다만 대회 전체를 통틀어 한기주의 평균자책점이 99.99는 아니다.[26] 신용운보다도 1이닝을 더 던졌다.[27] 이는 동일한 날짜를 기준으로 손승락은 17세이브 중 1이닝 미만 세이브가 2회, 1이닝 세이브가 13회, 봉중근은 14세이브 중 1이닝 미만 세이브가 1회, 1이닝 세이브가 10회, 오승환은 13세이브 중 1이닝 세이브가 7회였던 것과 비교된다.[28] 2006년부터 계산하여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다 점수차 블론세이브 신기록.[29] 구단의 군경팀 입대 권유를 거절하고 공익요원으로 입대했다가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체중이 급격히 불었다. 이 때문에 투수는 공익(사회복무요원) 가서 어깨를 쉬게 해주며 몸관리를 하는 게 좋다는 말의 반례로 인용된다.[30] 이런 밀어주기식 등판 때문인지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했다.[31] 1999년 54경기 93이닝, 2000년 63경기 109이닝, 2001년 54경기 95⅔이닝, 2002년 64경기 76⅔이닝, 2003년 63경기 85⅔이닝.[32] 당시 김현욱의 무릎 상태는 잦은 등판과 피로 누적으로 인해 연골이 거의 닳아 없어져 던질 때마다 뼈끼리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33] 이후 13년 뒤인 2015년 한화의 권혁이 불펜투수로 1시즌 112이닝(…) 2000구 투구를 달성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2002년 노장진이 중무리로 굴려질 당시 권혁은 삼성 신인이었다.[34] 2002년의 노장진이 현재까지 풀시즌을 중무리로 굴린 사실상 마지막 사례라고 한다.[35] 사실 한 선수가 2번째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 것도 국내에서는 권오준이 최초이다. 이후 2016년 1월 롯데 자이언츠의 조정훈이 국내 선수로는 2번째로 3차례의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 되었다.[36] 현욱 가대표 예. 매국노가 아니다.[37] 사실 2015년 정현욱의 근황사진이 올라왔는데 전에 비해 상당히 살이 빠진 모습이 나오면서 팬들 사이에서 위암 수술을 했다는 카더라가 돌았는데 사실로 밝혀졌다.[38] 사실 삼성 시절에도 팔꿈치 부상으로 재활한 전력이 있다. LG때와 달리 비교적 간단한 재활로 극복한 터라 묻힌 면이 있다.[39] 실제로 타격이 부진할 때도 마땅한 대체외야수가 없으니 타순만 바뀌고 계속 나왔다.[40] 다만 2014년은 체력 저하도 있지만 그 전해에 당한 뇌진탕 후유증도 한 몫 했다.[41] 정확히는 2003년 말 FA로 영입된 정수근의 보상 선수로 두산 베어스로 넘어갔다가, 보상선수 지명 몇 시간만에 한화의 백업포수 채상병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42] 정확히는 장딴지에서 시작된 부상이 허리, 고관절까지 영향을 미쳤고, 이는 허리 디스크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인식은 문동환을 마구잡이로 등판시킨 것이다.[43] 심지어 구대성도 노예 대열에 합류해야 했다.[44] 선발 출장하지 않는 투수들 기준[45] 2000년 74경기 94⅓이닝, 2001년 59경기 76⅔이닝, 2002년 56경기 82⅔이닝, 2003년에는 마무리 투수임에도 65경기 77⅔이닝&30세이브, 2004년 55경기 79이닝, 2005년 52경기 60⅓이닝, 2006년 51경기 63⅓이닝, 2007년 64경기 74⅔이닝.[46]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2002년 67경기 97⅓이닝, 2003년 52경기 116이닝, 2004년 60경기 94이닝을 소화했다. 이중 2004년에는 시즌 막판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시즌을 조기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화한 이닝이다.[47] 2003년에도 68이닝이나 던졌다.[48] 경기당 평균 이닝이 2이닝 가까이 되긴 하지만, kt 위즈가 워낙 약체라 이기는 경기가 거의 없어서 등판할 기회가 많지 않은지라 저절로 휴식이 보장되었다.[49] 한국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다 선발 등판&단일 시즌 최다 이닝&단일 시즌 최다 완투 기록&단일 시즌 최다승을 동시에 달성했다.[50] 만약 7차전에서 김일융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1984년의 최고의 선수라는 명예는 김일융의 몫이었을 것이다.[51] 특히 김성근 감독처럼 일본에서 야구를 배운 감독들은 모두 이 이론을 믿고 있다. 그래서 2011시즌에 폼을 만들어야 된다며 김광현에게 8이닝 8실점 147구 투구를 시킬 정도였다. (경기는 완투패) 김광현은 이 이후로 김 故광현, 줄여서 고광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으며 11~13년 사이 3년여의 시간 동안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이 당시에는 김광현이 10시즌에 비해 크게 부진하여 '보통 투수'라 불릴 정도로 팬들도 실망하고 있었고, 김성근의 이미지가 거의 야구의 신 정도라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한화 시절 송창식을 4이닝 90구 12실점, 송은범을 3.1이닝 12실점할때까지 내버려두는 등 그의 실체가 부각되는 일들이 많아져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다행히 김광현은 14시즌부터 클래스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토미 존 이후 시즌인 2018시즌에는 구단 차원에서 철저히 투구수 관리를 해 주며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2019시즌에는 전성기 수준의 성적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고,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한다. [52] 한국의 1차지명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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