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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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盧泰愚 | Roh Tae-woo


파일:President_RTW.jpg

출생
1932년 12월 4일[1]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 용진마을[2]
(현 대구광역시 동구 용진길 172)[3]
사망
2021년 10월 26일 (향년 8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사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15안길 69[4]
묘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5]
재임기간
제13대 대통령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서명
파일:노태우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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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교하 노씨[1]
부모
아버지 노병수, 어머니 김태향
형제자매
남동생 노재우
배우자
김옥숙
자녀
노소영[2], 노재헌
학력
공산국민학교 (졸업)
대구공업중학교 (전학)
경북중학교 (졸업 / 32회)
육군사관학교 (11기)
종교
불교[3]천주교 (세례명: 사도 요한)[4][5]
신체
178cm[6], AB형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2
약칭
[7]

관성(冠星)

용당(庸堂)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1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5년 ~ 1981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9공수특전여단장
제9보병사단장
수도경비사령관
국군보안사령관
병과
보병
참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파일:노태우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5. 일화
5.1. 회의를 자주하는 대통령
5.2. 보통 사람 노태우
6. 전두환과의 비교
6.1. 공통점
6.2. 차이점
6.3. 애증의 관계
8. 여담
9. 대중매체에서
10. 선거 이력
11. 소속 정당
12. 어록
12.2. 제13대 대통령 취임사
13. 각종 타이틀
14. 저서
15. 둘러보기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취임 선서[6]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2. 약력[편집]


  • 1945.3. 대구공산국민학교 졸업
  • 1945.4. 대구공업중학교 입학
  • 1948.8. 경북중학교 4학년 편입
  • 1951.8. 경북중학교 졸업
  • 1951.10. 육군사관학교 11기 입교
  • 1955.2.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육군 소위 임관
  • 1956. 제5보병사단 소대장
  • 1958.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
  • 1959. 육군보병학교 수료
  • 1959.12.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 특수전학교 및 심리전학교 수료
  • 1960. 대위 진급, 군사정보대학 영어번역담당 장교
  • 1961.5.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ROTC 교관
  • 1966. 국군방첩부대 정보처 정보과장, 방첩과장
  • 1967. 중령 진급, 월남전 파병, 맹호사단 재구대대장
  • 1968. 육군대학 수료, 수도경비사단 대대장
  • 1970. 대령 진급,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장교
  • 1971. 보병 연대장
  • 1974.1. 준장 진급, 공수특전여단
  • 1976.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행정차장보
  • 1978.1. 소장 진급,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 1979.3. 제9보병사단장
  • 1980.5. 국가보위입법회의 비상대책위원
  • 1980.8. 중장 진급, 국군보안사령관 (1980.8.21. ~1981.7.14.)
  • 1981.7. 대장 진급 및 예비역 대장 전역,[7] 민주정의당 입당, 당무위원
  • 1981.7. 초대 정무제2장관,[8] 대통령 외교안보 담당 특보
  • 1981.9.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
  • 1981.11. 대통령 특사
  • 1982.2. 남북한고위회담 수석대표
  • 1982.3. 초대 체육부장관 (1982.3.20. ~ 1982.4.28.)
  • 1982.4. 제41대 내무부장관 (1982.4.28. ~ 1983.7.6.)
  • 1983.7. 19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
  • 1984.10. 대한체육회 회장
  • 1985.2.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 전국구 3번)
  • 1987.6. 제13대 대통령 선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 1987.7. 민주정의당 총재권한대행[9]
  • 1987.8. 민주정의당 총재
  • 1988.2.25.~1993.2.24.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88.2. 무궁화대훈장 서훈
  • 1990.2. 민주자유당 총재
  • 1993.2. 대한민국 대통령 퇴임 및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 1999.6.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


3.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4공화국 당시 전두환과 함께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였으며 전두환이 집권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6월 항쟁 직후 6.29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고, 신헌법에 따라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최초의 대선인 제13대 대통령 선거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되어 198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5공 청산론을 받아들여 군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정리하였고, 정치 활동이 금지된 재야인사들을 대거 복권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며 중도통합에 나섰다.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발맞추어 북방정책을 펼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여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였다. 또한 북한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등 제6공화국 모든 정부에서 추진할 대북정책의 기초를 수립하였고 19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대통령 각하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지 않은 대통령이며[10] 대통령이 국민 앞에 설 경우 처음으로 스스로를 '나'가 아닌 '저'로 표현하는 등 권위주의 시대의 끝을 알리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대통령 퇴임 후 12.12 군사반란5.17 내란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1997년 4월 17일 반란모의참여죄 등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아 확정되었다.[11] 이에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7년 12월 22일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 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생활을 했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었으며 기본적인 거동조차 하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쥐고 움직이는 불편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12] 2007년 6월 6·29 선언 20주년 만찬장 참석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과 매스컴에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13]

2021년 숙환으로 인하여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21년 10월 26일, 향년 88세로 병상에서 사망했다.[14] 이로써 대한민국 현대사를 주름잡은 1노 3김시대는 완전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15]


3.1. 노태우 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 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 정부/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일화[편집]



5.1. 회의를 자주하는 대통령[편집]


노태우 정부 시기에 회의를 굉장히 자주 했다고 한다.[16] 군사정부 이미지를 벗고 문민 이미지를 심기 위해서 회의를 강화했으며, 덩달아서 정부 부처에서도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취임하고 얼마 뒤, 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름부터 '큰(泰) 바보()'니 당신들이 많은 의견을 내 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보좌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서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약간 유사할 수도 있는 증언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윤여준환경부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두 가지 의견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사안이 있으면 참모들끼리 회의를 해서 결정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적지 않은 사안들을 참모나 장관들에게 위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삼민주자유당 대표와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에서 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당 대표와 매주 만나서 국정현안에 논의하고 대화를 했다.

6공의 특징 중 하나인 국민과의 대화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이후 하는 대통령도 있고 안 하는 대통령도 있었지만 대부분 6공 대통령들은 국민과의 대화를 진행하여 소통 능력을 평가받았다.


5.2. 보통 사람 노태우[편집]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 선거 유세에서의 발언

대통령 선거에 쓰였던 슬로건인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말이 유명하다. 박정희, 전두환처럼 완전 독재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노태우 역시 군부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로 그렇게 될 뻔하기도 했다. 대선 당시에도 민주화 열기 때문에 김영삼, 김대중에게 많은 부분에서 뒤쳐지고 있었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 둘이 서로 욕심이나 부려서 먼저 대통령 하겠다고 단일화 안 하고 뻗대고 있던 것과 대선 포스터에 걸렸던 이 문구 하나가 대선판을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노태우에게는 어찌 보면 고마운 수식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노태우 선거 캠프에서는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을 접하고 "아니, '보통 사람'이 무슨 대통령을 해? 이미지가 너무 약한 거 아니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노태우 본인은 "일반 국민들에게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구"라며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라는 슬로건이 특히 친근감 있게 다가간데는 해당 항목 5번에 나와있는 1980년대 초반 최고 인기 드라마 "보통 사람들"의 영향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드라마는 1982-1984년까지 무려 491화가 방영된 역대 최장기 일일극으로 황정순, 이순재, 김민자, 강석우, 유지인, 이영하, 금보라, 송재호, 한혜숙, 정한용, 한진희, 조용원, 태현실 등 초호화 출연진으로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노태우의 선거 전략가들은 1980년대 경제 발전상과 중산층 확대된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낸 이 드라마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의미를 놓지지 않았고, 큰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대선 이후에도 취임식이나 각종 연설이 있을 때마다 상당히 많이 썼으며, 노태우 집권 당시 대한뉴스에서 가끔씩 선행을 베푸는 일반인들을 취재해 '위대한 보통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쓰면서 보도한 적도 있다. 노태우 선거 운동 조직인 '보통 사람들의 모임'에는 드라마의 히로인 황정순이 참여했다. 그녀는 드라마 팔도강산-보통사람들로 이어지는 한국 경제 성장의 상징이자 힘든 시절을 인내한 현모양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군사정권의 부정적 유산을 누그러뜨리고 긍정적 유산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88 서울 올림픽 성화에 불을 붙인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손기정을 예상했으나 이를 깨고 보통 사람 셋이 점화를 했을 정도로 해당 수식어에 신경을 많이 썼다.[17] 그 때문에 개그맨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마다 이 말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며 본인도 "앞으로는 나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책적으로도 5공과의 고리를 끊고 상술된 문단에서처럼 회의를 장려한다든지 본인도 김영삼, 김종필 등 야당 인사들과 잦은 회동을 가지면서 이전에 있던 군사 정권, 권위주의 이미지를 타파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기에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은 노태우와 노태우 정부를 상징하는 단어로 남게 되었다.[18]

상기한 바와 같이 대통령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써도 된다고 공언했던 것처럼, 그의 슬로건이었던 '보통 사람들'은 당시 풍자 만화가 주완수의 '보통 고릴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주로 1980년대 말 사회의 일그러진 모순을 고릴라의 모습으로 풍자한 책이었으며, 대표적으로 중간에 다음과 같은 노래 개사가 실려 있다.

새 나라의 대통령은 보통 사람입니다 / 잘난 사람 없는 나라[19]

우리나라 보통 나라

'보통 사람'이 프랑스어알랭 드 보통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이 두 사람을 엮으려는 사람도 있다.


6. 전두환과의 비교[편집]


"전 대통령의 성격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뛰다 보면 기회도 많지만 자칫 남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립될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1999년 9월 월간조선에 실린 노태우 육성 회고록 내용



6.1. 공통점[편집]


  • 영남 출신: 전두환은 경상남도 합천군 태생이고, 노태우는 대구광역시 태생이다. 물론 전두환은 태어나기만 합천에서 태어났고 실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은 대구이기에 둘 다 대구 출신으로 볼 수도 있다.




  • 화장으로 장례를 치름

  • 6.25 참전







  •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 전두환은 작전차장보, 노태우는 행정차장보. 이후 노태우도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 특전사 여단장 경험- 전두환은 1공수특전여단장, 노태우는 9공수특전여단장








  • 둘 다 젊은 시절 운동 능력이 좋았다. 전두환은 원래 운동 선수(축구 골키퍼) 출신이며, 노태우 역시 생도 시절 체력장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태릉 타잔'이라는 덕담을 들었다고. 전술한 대로 두 사람 다 특전사이므로 강골임을 알 수 있다.

많은 공통점들이 있는데, 특히 국군보안사령관과 민정당 총재, 대통령, 작전차장보는 노태우가 전두환의 후임이라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6.2. 차이점[편집]


  • 대통령이 된 이후의, 노태우의 정치 활동의 노선은 강경한 타입인 전두환의 방식과는 거의 반대로 온건한 성향을 띠었다. 대표적인 진보 인사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 토지 개혁이나 북방 외교정책 등 또한 전임자와의 대표적인 정책상의 차이점으로 꼽힌다. 특히 토지공개념에 중점을 둔 토지 개혁과 그를 바탕으로 한 경제 민주화는 당시 야당 일각에서도 너무 앞서나간다는 우려를 표할 정도로 진보적인 경제정책이었다. 또한 대통령 재임시절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을 국정동반자로 인정해 꾸준히 여야영수회담을 마련하고 조언을 구했으며, 3당 합당 후 민주자유당의 대표 김영삼과는 매주 회동하고 국정에 대해서 설명하고 또 김영삼 측의 요구를 경청하고 수용하였다. 원외 진보정당인 민중당과도 단독 영수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 전두환은 장관을 한 적이 없다. 반면 노태우는 전두환 정권 당시 정무제2장관[20],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 육사 시절 전두환은 공부를 못했으나[21] 노태우는 상당히 우수한 생도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특유의 리더십 덕분에 육사 11기의 리더로 노태우보다 앞서 갔다.

  • 전두환은 직접 선거로 대통령이 된 적이 없고 일명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간접 선거로 두 번 당선된 반면, 노태우는 6.29 선언 이후 도입된 직접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관련 부서 및 일부 측근들과 함께 비밀리에 북한과의 정상 회담을 추진하려다 여권 관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한 전두환 정부와 달리, 노태우 정부는 공개적으로 남북이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는 원칙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작성, 강영훈국무총리의 서명을 넣었으며, 한발 더 나아가 구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맺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에 14억 7천만 달러 규모의 차관[22] 무기한으로 제공해 당시 큰 파장이 일었지만, 1990년대 ~ 현재까지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우리나라의 남북 정책에 대해 직접적으로 강한 태클을 걸지 않았던 건, 이 14억 7천만불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작용한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 추징금 납입에 있어서도, 재산 규모를 축소 발표하고 재산 대부분을 둘째 며느리인 박상아의 명의로 이전했다는 의혹과 더불어 납입을 피한다는 의심을 받는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사돈인 신동방그룹과의 소송전까지 불사하며 완납하였다.

  • 전두환은 와이프부터 해서 동생에 아들에 자국 혐오 논란을 일으킨 손녀딸도 있는 등 가족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지만 노태우의 가족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자녀들이 전부 이혼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노소영의 이혼 소송은 남편이 워낙 유명인인 까닭에... 게다가 남편인 최태원 회장이 불륜을 저질렀으니 노소영은 오히려 피해자였다. 물론 노태우의 자녀들인 노소영과[23] 노재헌도 이혼을 하는 등 살아생전에 사생활적인 면에서는 물의를 일으킨 적은 있지만, 노소영의 경우는 이슈가 큰 부친의 구설수에 조용히 묻혔으며, 노재헌 역시 가정사 문제로 치부되어 잠시 화제가 된 것 외에 파장은 크지 않았다. 게다가 노재헌은 2019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기까지 했다.

  • 후손의 병역 문제도 대조된다.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은 병역의무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석사장교로 대충 땜빵했지만 노태우의 외손녀 최민정은 병역의무 대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해군 학사장교로 입대해서 3년 간 군복무를 하고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단, 노재헌의 경우는 석사장교 출신이라 이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노태우의 장손으로서 노재헌의 아들인 노장호가 현역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계속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해 훈련소에서 귀가 조치됐지만 한국어 학원에서 한국어 교육과정 수강 후 재입대 해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 했다.

  • 성격도 차이가 심한데, 전두환은 언제나 자기가 선봉으로 서서 가부장적인 웃어른같은 행동을 하며 자기가 직접 발로 뛰고 손으로 만져가며 사람들을 상대하는 스타일이지만 노태우는 그런 거 없이 차분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 좋아하며 약간 히키코모리 기질도 있다.

  • 전두환은 경제공부를 꽤나 즐겼고 대통령 재임기간 경제성적도 좋아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노태우는 경제공부에 영 흥미를 붙이지 못했으나 외교분야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고 한다.

  • 전두환은 80대가 된 2010년대에도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90세가 다 된 2020년에도 꽤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가 2021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다발성 골수종을 앓기 시작하여 2021년 11월 23일 사망하였다. 그에 비해 노태우는 칠순을 갓 넘긴 2002년전립선암 투병을 시작으로 이후 소뇌위축증을 앓으며 투병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겨우 의사 표현만이 가능한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20년 가까이 외부 활동을 하지 못했으며, 결국 2021년 10월 26일 사망하며 전두환보다 28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전두환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의 가해 책임자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성과 사죄를 표현하고 있다. 2020년 5월 18일에는 아들 노재헌이 현재 중환자라 직접 방문할 수 없는 노태우 대신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40년만에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 라는 리본이 달린 조화를 헌화하였다.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 중 한 명이 직접 제단에 헌화하고 사죄한 것은 이번이 유일이자 처음이다. 인터뷰에서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이제 됐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한다. # 사후 공개된 유서에서도 사과의 뜻을 다시한번 밝혔다. 이러한 점이 반영된 것인지, 노태우 전 대통령이 2021년 10월 26일 사망하였을 시,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씨가 직접 조문을 왔다. # 거기다 전직 대통령직 예우 박탈 이후 언제나 전두환 '씨'로 불리던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호칭될 때가 많다.

  • 사망 후 노태우는 국가장으로 장례식이 치뤄졌으나 전두환은 국가장을 하지 못했다. 즉, 노태우는 대통령 대우를 받았으나 전두환은 대통령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24]

  • 사망 당시 나이로 치면 둘 다 구순 이상[25]이지만 출생신고일 기준으로 노태우는 구순을 세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전두환은 천주교 신자(세례명 : 베드로)였다가 나중에 불교로 개종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의 장례절차 중 입관식은 불교식으로 진행되었다.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불교 신자였다가 나중에 천주교(세례명 : 사도 요한)로 개종했다. 이에 따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입관식은 천주교식으로 진행되었다.


6.3. 애증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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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대선 전당대회 당시의 노태우와 전두환

"역사는 그들의 우정에 돌이킬 수 없는 애증의 골을 심어 놓았다. 우리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들의 악연은 더욱 깊어져 갔던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 마지막 회 中

서술한 대로 전두환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였다. 군인 시절부터 줄곧 인생의 파트너[26] 이기도 했지만 대통령 재임 중 '5공 숙청'으로 전두환을 백담사[27]로 보내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본인이 직접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된 후 말을 듣지 않아 상당히 괘씸했다고 한다. 반면 노태우는 스스로 직선제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하였고[28] '체육관 대통령'인 전두환과 쌍으로 엮이는 것에 상당히 불쾌해 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자기도 같이 했으면서 이렇게 배신을 때리냐며 대통령이라도 귀 싸대기 맞는다며 분노했고[29][30] 노태우는 전두환이 퇴임했으면서도 자신을 조종하려 드는 것에 반발했다. 전두환은 퇴임 직전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정치 기구를 만들고 퇴임 이후 본인이 의장을 맡으려고 했다.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국가 정책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노태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31] 또 노태우에게 닥치는 정치적 위기 대다수가 5공과의 연결 고리에서부터 오는 거라 전두환을 그냥 둘 수가 없었고, 결국 둘 사이의 골은 깊어졌다. 전두환 퇴임 이후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전두환이 백담사로 유폐되고 노태우가 전두환을 멀리하면서 노태우의 집권 기간에 둘은 전혀 만나지 않았다.

YS가 집권하면서 5공 청산이라는 전 국민적 요구 속에서 역사 바로세우기 정책을 밀어붙이며 둘다 위기감이라는 공통 분모하에 1994년 전두환 퇴임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강남 음식점에서 화해의 만찬을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 다 구속되어 재판정에 서면서 재회하게 되었다.[32]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지척을 두고서도 통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적으로는 1999년 노태우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07~1999) 여사가 사망했을 때 전두환이 조문해 20여 분간 독대한 것, 공적으로는 2004년 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전직 대통령들이 오찬을 가질 때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13일 전두환이 노태우의 자택을 방문했다. 당시 노태우는 뇌 질환으로 휠체어로 거동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상당히 나빠져 자택에 갇히다시피 지내면서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전두환은 누워있는 노태우에게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겠는가"라고 물었고, 옆에 있던 부인 김옥숙이 "알아보면 눈을 깜박이라"고 말하자 노 전 대통령이 눈을 깜박였다고 한다. 제6공화국 출범 이후 근 30년여간 애증이 겹쳤던 묵은 정을 마지막이 되기 전에 미련 없이 풀어내려 했던 듯하다.[33]

그리고 2021년 10월 26일, 자신보다 1살 연상인 전두환보다 먼저 사망했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눈물만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전두환도 이후 1달이 안 되어 11월 23일 친구를 따라갔다.


7. 별명[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별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여담[편집]


  • 따로 서예가 스승을 두는 등 노력하면서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지만 경매에서는 거의 거래되지 않는다. 시장 가격은 80~100만 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전두환의 서예 작품 시장가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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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의 친위 세력이면서 12.12 반란까지 주동한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그는 전두환과 다르게 학창 시절에도 그렇고, 육사 시절, 박정희 시절에도 상당히 지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육사에서 영어교사까지 한 적이 있으니... 특히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1년 형이면서 친구이자 전우이기까지 한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 보내다시피 쫓아내고, 대표적인 정적 중 하나였던 김영삼, 김대중을 포섭하려 했으며, 김영삼과 연합해서 3당 합당을 한 것과, 대통령 시절에도 김영삼을 포함한 여러 인재들을 불러서 주요 현안에 대해서 자주 토론한 행보도 그렇고, 그가 남긴 업적도 은근히 많은 데다, 아들인 노재헌도 광주를 직접 여러 차례 방문하여 5.18에 대해 거듭 사과하고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는 상당히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등, 앞에서 서술한 상당히 흥미로운 행적으로 인해 재평가하자는 의견이 매우 많이 보이는 대통령이다. 현재는 노태우 자체도 상당히 좋은 대통령이었다고 재평가하는 경우도 많이 늘어났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죽을 때까지 매우 싫어하던 김영삼도 이런 행적 때문인지 노태우는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받은 시기인 1996년 방영된 SBS 코미디 프로그램 '코미디 펀치펀치'에는 '배워서 남주나' 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전두환 역으로 출연하던 박용식과 함께 역시 노태우 역으로 출연했던 김기섭이 캐스팅되었다. 여기서 김기섭의 '친구야~' 라는 유행어는 당시에 대 히트였다. 덕분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 흔히 '친구야'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둘 다 MBC드라마 출신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더 아이러니하게 SBS의 코리아게이트에서 전두환을 맡았던 정종준도 여기 출연했다.

  • 영어를 매우 잘했다. 그의 영어 실력 덕분에 한때 영어 교관을 했을 정도로 팔방미인이었다. 1989년 10월 미국 순방 당시에는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영어로 연설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1954년 미국 국회 연설 이래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두 번째 사례였다.#

  • 운동을 잘했다. 하지만 스포츠 자체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젊은 시절에 했던 럭비나 여가시간에 테니스 정도만 하는 수준이었다. 축구야구복싱에까지도 관심이 많았던 전두환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역시 정치인이자 체육계 인사였던 민관식이 생전 회고록에서 둘을 비교하면서 은근슬쩍 노태우를 폄하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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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년에는 암 투병 중이고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2015년 11월 22일 KBS 뉴스가 밝혔다. 같은 날 사망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직접 가지 못하고 아들 노재헌을 대신 보냈다. 빈소를 찾아간 노재헌은 고인의 아들인 김현철을 만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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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각자의 아버지와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

  • 노태우가 장교였던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이 노태우와 차지철에게 권유해서 박정희와 그 가족들, 차지철과 노태우가 휴가를 같이 갔었는데 차지철이 물에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자, 박정희가 '물이 무섭냐'고 묻자, 차지철이 '저희 어머님이 물에 들어가지 마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물에 들어가지 않았었다고 회고했다.(출처: 노태우 회고록)

  • 부모님 중 한 분이 대통령 취임 당시에 생존해 있던 대통령이기도 하다. 노태우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07~1999) 여사는 생전에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지켜본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다.[35] 나머지 사람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2019) 여사, 윤석열 현직 대통령의 부모 윤기중 교수와 최정자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이후 김태향 여사는 아들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6년 뒤인 1999년 4월 5일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는 선거운동을 했는데 어디서 섭외했는지 여자 어린이를 안고 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그 여자 어린이는 1980~1981년 생 정도로 추측된다.#

  •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미남인 인물로도 손꼽혔으며,[36][37] 실제 당시를 살던 어르신들 사이에서 부처님 상이라면서 노태우를 뽑은 사례도 존재한다는 얘기가 돌곤 한다.[38] 위의 전 대통령들과 차이라면 특이하게 젊었을 때보다도 중년에서 초로기의 인물이 더 좋다는 거다.[39] 때문에 자녀 노소영노재헌, 외손녀 최윤정최민정도 상당히 준수한 외모를 물려받았다.

  • 삼김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은 모두 전두환은 싫어하였지만, 노태우에게는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다. 자신들을 거칠게 탄압한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그들의 정치 규제들을 풀어주었고 웬만해선 건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정국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삼김을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여기고, 만남을 자주가지며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려고 노력했다. 결정적으로 삼김 중 김대중을 제외한 나머지 2명과 힘을 합쳤다.

  •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과 힘을 합치고 화해를 하려고 노력을 한 반면 전두환에 대해선 백담사에 보내는 선에서 끝났다. 사실 박정희 정권 말기 실세 역할을 했던 삼대장(전두환, 노태우, 차지철)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성격을 가진 노태우였으며 문민 정권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어느정도 노력은 했으나 문제는 노태우 본인이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일, 그것도 전두환에 이어 2인자라는 점, 사적으로도 전두환의 친구라는 점 때문에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군부독재정권을 본격적으로 척결하기 시작한 것은 문민정부에서의 일이다.

  • 2017년 현재, 구글에서 노태우를 검색해 보면 자동 완성으로 쌩뚱맞게도 노태우 수영복이 뜬다. 이는 그의 이름을 딴 별명으로 불리는 NTW-20 때문이다. 실제 사진이 있긴 하다.

  • 2019년 7월 현재 1987년의 대통령 선거에 부정선거를 모의했다는 의혹이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

  • 전임 전두환의 뒤를 이어 두번째로 2월 25일 취임해서 2월 24일 퇴임한 대통령이다. 민주화 이후 이 기록은 이명박까지 이어진다.

  •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와 기일이 같다. 42년 차이가 난다.

  • 2021년 10월 26일 사망하면서, 윤보선, 이승만에 이어 세상을 떠난 역대 대통령 중 세 번째로 장수했다. 이어 4주 뒤인 11월 23일 전두환이 사망함에 따라, 네 번째로 장수한 역대 대통령이 되었다. 여담으로 현재 생존 중인 역대 대통령은 6공화국 시기에 당선된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뿐이다.

  • 러시아에는 '로대우(Ро Дэ У)'라는 잘못 전사된 표기로 굳어졌다. 성씨인 '노(盧)'야 원음이 '로'이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지만[40], '태'는 유성음으로 바뀔 여지가 없는데도 잘못 옮겨졌다. 원칙대로 쓰자면 Но Тхэу가 맞는다.

  • 김종인이 그의 최측근으로 보건사회부장관, 경제수석을 맡았다. 당시 재무부 장관, 경제기획원장 모두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을 지명해서 경제수석으로 들어갈 정도의 왕수석이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정치 전략가로 활약한 김종인이 킹메이커 역할을 한 첫 대선을 13대 대선으로 보기도 한다.

  • 여성가족부의 연혁을 되짚어 가면 초대 장관이자 유일한 남성 장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전두환 정권 시기 노태우가 맡은 정무제2장관이 훗날 여성가족부장관으로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당시 정무제2장관은 국가안보 관련 업무를 맡았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후에야 오늘날처럼 여성 청소년관련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노태우가 여성 청소년 업무를 맡은 것은 아니다.

  • 젊은 시절 머리를 크게 다친 적이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른게 아니고 기차에서 객기부리다 추락해서였다. 당시의 열차는 느린 증기기관차가 운행했고 선로 역시 오늘날처럼 직선화, 복선화가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 속도가 30~50km에 불과했다. 그로 인해 열차가 커브를 돌때 뛰어들거나 뛰어내리는 도비노리(飛び乗り)가 일제강점기때부터 성행했으며, 이런 행태들은 산업화 이후 디젤기관차가 도입되고 열차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라진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던 젊은 장교 노태우도 괜히 멋있어보이려고 부대까지 기차로 출퇴근하면서 열차가 정차하기 전 뛰어내려 플랫폼에 착지하는 짓을 자주 했는데, 그러다가 플렛폼 콘크리트 조형물에 머리를 크게 부딪힌 것이다. 당시 머리를 크게 다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나, 겨우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의지해 겨우 응급실까지 도착해 겨우 회복을 했다고 한다. 덤으로 이때 사관학교 동기(김복동)의 여동생이었던 김옥숙이 그를 간호해주면서 사이가 가까워져 결혼까지 골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에게 찾아온 지병 소뇌위축증에 어느정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 처남이자 민주자유당 의원인 김복동3당 합당상도동계의 마찰로 인해 탈당계를 제출하고 지역구로 낙향을 시도하자, 경찰과 안기부를 동원해 동대구IC에서 다시 서울로 끌고 온 전적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스마트폰은 커녕 핸드폰도 활성화되기 전이었으니 당연히 양대[41]당사는 김복동의 실종 소식에 뒤집어졌고, 김복동이 노태우와의 만찬에 합석한 모습이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겨우 일은 진정되었다. 노태우 입장에서는 절친한 동료이자 처남이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바꾸는것을 막기 위해 무리수를 둔 셈이다. 그러나 결국 김복동은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둘은 한동안 만나지 않다가 퇴임 후 1994년 1월 노태우가 김복동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재회하게 된다.


9.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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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는 제4공화국에서 이후락 역을 했던 임채무가 맡았다. 완전히 전두환의 꼬붕 같은 스타일.

  • 문화방송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서인석이 노태우 역을 맡았다. 외모는 그다지 닮지 않았지만[42] 전두환을 능가하는 책사를 잘 표현했으며, 특히 '즌 장군'으로 대표되는 특유의 말투와 목소리는 가히 도플갱어 수준이었다. 배우 서인석이 태조 왕건견훤, 무인시대이의방, 정도전최영 같은 호방하고 거친 무인 연기로 유명하지만, 5공화국의 노태우는 서인석이 그와 정반대의 딸랑딸랑거리는 역할의 연기도 잘 한다는 것을 보여준 배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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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라마 제5공화국에 따르면 정무제2장관 임명 당시 노신영의 권유로 부총리급으로(외교상 직책) 격상하여 임명하려 했으나 허화평의 반대로 무산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10.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7,040,477 (35.2%)
당선 (3번)
초선[43]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8,282,738 (36.64%)
당선 (1위)
[44]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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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1 - 1990
창당
정계 입문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2
합당[45]

[[무소속|
무소속
]]

1992 - 2021
대통령 임기 말 탈당[46]
정계 은퇴
사망


12. 어록[편집]


시대순으로 배열하며, 일부 맞춤법은 현행에 맞춰 고쳤다.

"공산화가 되더라도 민족통일만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감상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볼 때 공산침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온 수십만 형제들의 소망과 울부짖음을 절대로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87년 8월 18일 대학생과의 대화


"우리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난이었고 둘째는 무지였고 셋째는 외침으로 인한 핍박이었습니다. 지금 소득분배의 불균형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지만 빈곤과 무지와 외침으로 인해 맺힌 한은 어느 정도 풀었습니다. 이런 한을 푸는데 급급한 나머지 민주발전은 뒷전에 처지고 만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시급한 것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권리와 자유를 골고루 나누어 갖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1987년 8월 18일 대학생과의 대화


"한국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역량이란 다름아닌 극단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극우이든 극좌이든 극단주의는 민주정치 발전과정에 대한 최대의 적입니다."

1987년 9월 16일 미 내셔널 프레스클럽 연설


"남북문제의 원칙은 ①긴장완화 ②평화공존 ③평화통일입니다. 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남북한 간에 국력의 격차도 생기고 주변의 변화도 올 것입니다. 올림픽을 치르면 우리는 '큰형'의 입장에서 북한과의 대화를 활발하게 촉진시켜 나갈 것입니다."

1987년 9월 19일 일본 기자클럽 회견


"대기업 위주로 경제를 운영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봅니다. 방향전환이 필요해요. 사실 대기업들은 정부지원을 많이 받았어요. 이제는 기업의 도덕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정부지원을 많이 받은 만큼 이를 사회에 환원시킬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987년 10월 29일 매일경제신문 기자와의 인터뷰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경제정의가 확실히 실현돼야 하며 계층간 지역간 격차의 완화를 위한 차원높은 시책이 이제부터 다듬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11월 10일 기자회견


"6.29 선언에 대해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느냐 항복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에 대해 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에게 굴복했습니다. 항복했습니다. 국민들이 원한다면 한번이 아니라 수백번이라도 항복을 해야죠."

1987년 11월 12일 관훈토론회


"만약 제가 집권할 때는 그야말로 부조리를 나로부터 척결한다는 것을 내정 제1의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1987년 11월 12일 관훈토론회


"'보통사람'이란 잘난 것도 없지만 부끄러운 것도 없는 사람, 뽐낼 것도 없지만 꿀릴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것은 뽐내는 사람, 돈 있다고 해서 날뛰는 사람, 또 너무 많이 배웠다고 해서 독불장군인 사람입니다."

1987년 11월 12일 관훈토론회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 선거 유세에서의 발언


"민주 광주직할시민여러분! 진정합시다!
이 노태우는 이미 6.29 선언에서 국민의 뜻에 따라 항복할 것을 결심한 사람입니다. 국민의 뜻에 이 사람은 따랐고 항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여러분! 화염병과 돌이라는 폭력 앞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던지고 있는 화염병과 돌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화염병이며, 민족을 분열시키는 돌멩이입니다.
이 노태우, 한 사람의 희생으로 우리의 민주화와 우리의 화합이 이룩될 수만 있다면 이 한 몸 언제고 제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자제할 것을 호소합니다. 모든 모순된 감정을 누르고 우리 모두 화합합시다. 우리가 나아가는 화합의 길, 민주발전의 길은 아무도 가로막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다 같이 애국가를 부릅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1987년 11월 29일 광주광역시 유세 중 폭력시위대와 조우하자


"이 작은 땅덩어리에 남북이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지역 따라 쪼개지고, 종교 따라 갈라지고, 남자와 여자 다 차별하고,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쪼개지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먼저 사람을 쓸 때 지역출신을 묻지도 상관하지도 않고 능력 위주로만 기용할 것입니다.
이 노태우는 6.29 정신을 바탕으로 집권 후 최우선적으로 광주문제 해결에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대화합의 시대를 열어 나아갑시다."

1987년 11월 29일 광주광역시 유세 중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너무 잦아 성실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도 했습니다. 이 노태우가 당선되면 어느날 갑자기 식의 변동과 불안을 없애겠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안심하고 설계하고 또 설계한 대로 실현되는 '믿음사회'를 만들겠습니다."

1987년 12월 12일 서울 여의도 유세


"저는 새 공화국 새 정부민정당의 단독정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시켜나가는 전 국민의 화합정부라고 믿고 있습니다."

1987년 12월 17일 대통령 당선 인사


"이제 우리가 나갈 길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먼저 권위주의 체제의 껍질을 모두 철저히 깨뜨리는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구시대적인 권위주의로써는 우리 4천만 국민의 우수한 창의력과 탁월한 근면성을 발휘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헌신적인 봉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1988년 1월 15일 창당기념식


"우리 정부는 국민의 의견을 최대한으로 수렴하여 국민들의 국정 참여의 폭을 외교 측면에서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1988년 2월 4일 외교사절단 초청인사


"물가의 지속적인 안정이 모든 경제정책 목표 달성의 대전제라는 점을 명심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물가 안정의 기조를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주기 바랍니다. 선거기간 중 국민에게 공약한 조화된 사회·경제의 형평 이룩 등은 물가의 안정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88년 2월 4일 경제장관에 대한 지시 출처


"부의 부당한 축적이나 편재가 사라지고 누구든지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람과 결실을 거두면서 희망을 갖고 장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입니다.
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어느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198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나는 제24회 근대 올림픽 대회를 경축하면서, 서울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선언합니다.'

1988 서울 올림픽 개회 선언


"전쟁의 참화와 분단의 고통을 당해온 우리가 이제 화해와 평화의 횃불을 온 인류의 가슴속에 지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에 즈음해 국민께 드리는 감사 말씀’에서


"물, 그것은 마시면 들어가고 흘리면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물의 힘은 참 크지요. '물대통령'이란 별명 참 잘 지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989년 프랑스 교민 리셉션 중 별명 "물태우"를 가지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신사고에 의한 개혁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데 히말라야 산맥이 높아서인지 한반도에는 아직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럽만이 아니라 이 지역에도 개방과 개혁의 물결이 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990년 한ㆍ소 정상 간 대화


"북방정책이라는 것은 가까운 길이 막혀서 도저히 갈 수 없다면 우회를 해서라도 가려는 것입니다. 더 먼 길이라고 하더라도 도중에 가시밭길이 있어 다리에 피가 나더라도 그것이 통일로 이르는 길일 때에는 우리는 서슴지 않고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북방정책의 기본 구상이며, 철학이기도 합니다."

1990년 MBC 창사 기념 특별회견에서


"페어플레이를 벌여야 할 경기장에서 난동을 부린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납될수 없으며 특히 올림픽까지 치른 나라에서 이같은 행위는 더욱 용납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법과 질서를 바탕으로 해야 함에도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으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풍조는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관련자를 가려 법에 따라 엄정 처리하라."

1990년 잠실야구장 패싸움 사건 보고를 받고


"첫째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 둘째는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할 것입니다. 셋째는 과소비와 투기 또 퇴폐와 향락을 바로 잡아 일하는 사회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1990년 10월 13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우리가 유엔 가입을 신청한 지 42년 8개월, 오랜 기다림 끝에 회원국이 됩니다. 이제 남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던 어두운 타율의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1991년 시애틀 교민 오찬 연설에서


"국회는 어디까지나 여당이 이끌어 나가는 '여의도'가 되어야지, 야당에 끌려 다니는 '야의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지난날 여소야대의 국회가 주는 교훈입니다."

3당 합당 후인 1992년 제14대 총선 민주자유당 공천자 공천장 수여식 자리에서


"문화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 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 저거는 아무것도 아니야..."

1995년 10월 5일,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중(...)


"안 준다."

-1996년 내란혐의로 재판 과정에서 상봉한 전두환계란 후라이를 묻자(...)


"사람들은 이제 고물딱지로 쓰레기통에 버렸겠지만, 10년 전의 오늘 6·29는 나에겐 목숨보다 소중한 길이 물려줄 보물이었다."

1997년 6월 29일, 수감생활 중 쓴 일기에서


"전 대통령의 성격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뛰다 보면 기회도 많지만 자칫 남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립될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1999년 9월 월간조선에 실린 노태우 육성 회고록 중 전두환과의 관계에서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

2020년 아들 노재헌 변호사가 헌화한 조화 리본 문구.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자신의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유언



12.1. 6.29 선언 전문[편집]


동지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 우리나라의 장래의 문제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 쌓여진 뿌리 깊은 갈등과 반목이 국가적인 위기로 나타난 이 시대적 상황에서 정치인의 진정한 사명에 대해 깊은 사색과 숱한 번뇌를 하여 왔습니다.
또한 학계, 언론계, 경제계, 종교계, 근로자, 청년, 학생 등 각계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또 국민의 뜻을 확인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의 구상을 주저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구상은 대통령 각하께 건의를 드릴 작정이고 당원 동지 그리고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뒷받침을 받아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본인의 결심입니다.
첫째. 여야 합의 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실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각료의 대다수가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으로 구성이 되어 자율과 개방을 바탕으로 대화와 타협 속에 민주책임정치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제도라는 저의 생각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다수 국민이 당장 원하지 않는다면 필경 그 제도는 국민과 유리되고 이에 따라서 탄생되는 정부는 국민과 꿈과 아픔도 함께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 시점에서 저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는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둘째.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는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새로운 법에 따라서 선거운동 투, 개표과정 등에서 최대한의 공명정대한 선거관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만 직선제라 하더라도 근거 없는 인신공격과 대중선동으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되고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 결국 국가안정을 해치고 진정한 민주발전을 저해해서는 안 되며, 정책대결로 선의의 대결을 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가 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 과거가 어떠하였던 간에 김대중 씨도 사면, 복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들 자손의 존립기반인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를 부인한 반국가사범이나 살상, 방화, 파괴 등으로 국기를 흔들었던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시국관련 사범들도 석방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도 민주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분수령인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 크게 웃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된다면 차기 대통령 선거가 국민의 축제로 승화될 것이고 새로 출현하는 정부는 튼튼한 국민적 기반 위에 위대한 나라 건설에 더욱 매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합니다.
이번의 개헌에는 민정당이 주장한 구속적부심 전면 확대 등 기본권 강화 조항이 모두 포함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정부는 인권침해 사례가 없도록 특별히 유의하여야 하며 민정당은 변호사회 등 인권단체와의 정기적 회합을 통하여 인권 침해 사례의 즉각적 시정과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는 등 실질적 효과 거양에 주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언론 자유의 창달을 위해서 관련 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의도가 좋더라도 언론인 대부분의 비판의 표적이 되어온 언론기본법은 시급히 대폭 개정되거나 폐지되어 다른 법률로 대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방 취재기자를 부활시키고 프레스카드 제도를 폐지하며 지면의 증면 등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여야 합니다.
정부는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하여서도 아니됩니다.
국가 안녕보장을 저해하지 않는 한 언론은 제약받아서는 아니됩니다.
언론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독립된 사법부와 개개인의 국민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여섯째.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각 부문별로 자치와 자율의 확대는 다양하고 균형있는 사회발전을 이룩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개헌 절차에도 불구하고 지방의회구성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하고 시도단위 지방의회 구성도 곧이어 구체적으로 검토 추진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의 자율화와 교육자치도 조속히 실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대학의 인사, 예산, 행정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고 입시, 졸업제도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수한 많은 학생들이 학비 조달에 큰 어려움이 없도록 관련제도를 보완하고 예산에 반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 정당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정당은 국리민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고 결집하는 민주적 조직체여야 합니다.
정당이 이러한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건전한 활동을 하는 한, 국가는 이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당 역시 국법 질서를 준수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의 갈등을 조화와 화합으로 이끌고 국론을 통일해 나아가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폭력을 써서라도 일방적인 주장만을 관철시키려는 야당이 있는 한 여당 역시 항상 양보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여덟째.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하여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시민이 안심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폭력배를 소탕하고 강도, 절도사범을 철저히 단속하는 등 서민생활 침해사범을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잔존하는 고질적인 비리와 모순을 과감히 시정해 나아가야 합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추방되고 지역감정이나 흑백논리와 같은 단어들이 영원히 사라져 서로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국민이 안정된 사회환경 속에 안심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시급한 당면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지속적 발전을 바라는 여러분의 기대를 등에 업고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 저는 이 시간을 감히 갖는 바입니다.
저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이 구상이 대통령 각하와 민정당 전 당원은 물론이고 국민 모두의 성원으로 뽑힐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저의 이 기본 구상이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앞으로는 이에 따른 세부 추가사항들이 추진될 것입니다.
만에 일이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아니할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아울러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 단임제의 실천으로 이 나라 헌정사에 민주주의의 깊은 뿌리를 심기 시작했고 물가 안정과 국제경쟁력 강화로 흑자경제를 이룩하여 국가 안보역량을 대폭 강화하면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우리 제5공화국 정부의 빛나는 업적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와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평화적 정부이양의 화합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눈앞의 크나큰 과제입니다.
또한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아니한 현 시점에서 국론이 분열되어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당하는 국가적 수치를 방지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간직한 채, 청년은 이상을 향하여 실력을 배양하고, 근로자 농민은 안심하고 일하며, 기업가는 창의적 노력을 더하고, 정치인은 대화와 타협의 노력을 기울여 미래를 설계하는 사회를 이룩해 나갑시다.
법과 질서가 준수되면서 생동하고 발전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위하여 저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나라는 우리 모두의 나라입니다.
조상과 선열의 뜨거운 피로 세워지고 다져진 이 나라를 땀과 지혜로 훌륭히 가꾸어 우리 후대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시대적인 책무입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한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려주어 세계사에 공헌할 수 있도록 국민적 슬기를 한데 모아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당원 동지 여러분과 야당 정치인 여러분.
저의 충정이 받아들여져 오늘의 난국이 극복되고 모든 국민 개개인이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나라를 열어가는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2.2. 제13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친애하는 6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우리 헌정발전을 뒷받침해 주신 윤보선, 최규하 전직 대통령과 평화적 정부이양의 역사적 선례를 세우신 전두환 전직 대통령, 그리고 이 자리를 빛내 주신 세계 각국의 경축사절과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기 위해 성스러운 이 민의의 전당 앞에 모였습니다.

동아시아의 변방국가에서 세계의 중심국가로 뛰어오를 민족웅비의 희망찬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 나라에 민주정부를 세운 지 40년,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를 요청하는 역사의 조류 속에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아득한 옛날 이 땅에 민족의 터전을 일구어 오신 모든 선조들에게 깊이 머리 숙입니다.

저는 먼저 반만 년 동안 숱한 외세의 침략과 시련을 이겨내며 빛나는 문화전통을 창조하여 민족의 자존을 면면히 이어온 그 불굴의 민주독립정신을 가슴에 새깁니다.

가까이로는 손 마디마디에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형제자매 동포 여러분에게 새삼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들의 손은 가난과 전쟁에 시달려 아무것도 없는 맨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잘 살아 보겠다는 뜨거운 가슴으로 땀흘려 일한 우리들의 맨손에서 이 나라는 세계가 높이 보는 신흥공업국가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을 이룩한 민주국가로 커졌습니다. 참으로 우리 국민은 위대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국민적 저력은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격려를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민족사의 출발점에 서서 저는 오늘이 있기까지 땀흘린 모든 분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역사는 그동안 우리 민족을 여러 차례 시험해 왔습니다. 인내와 슬기, 국민의 뭉친 힘으로 모든 시험을 이겨낸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가 부과되고 있습니다.

민족 전체가 한 차원 높게 뛰어오르라는 명령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민족자존의 새 시대]를 꽃피우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바로 그 [민족자존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국민 여러분 앞에 엄숙히 선언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야 합니다.

능동적인 자기개혁으로 새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해야 합니다.

새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저 창공으로 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개척자의 창조적 정열로 낡은 틀을 깨뜨리고 온 국민이 민주와 번영을 누리게 하여 자유와 자존의 통일대국으로 비약할 때입니다.

새 시대는 분명히 변화하여 발전하고 쇄신하며 도약하는, 활력에 가득찬 진보의 시대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의 지나친 다툼을 이제는 멈출 때입니다. 과거는 분명히 우리 모두의 자산이면서 반성의 거울이지만, 그것이 밝은 미래의 세계로 전진해 나가려는 우리의 발걸음에 끝없는 족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해 위대한 국민의 민주적 선택으로 40년 헌정사를 통해 쌓여 온 갈등의 찌꺼기는 모두 씻겨졌습니다.

이제는 지역감정, 당파적 이기심, 개인적 섭섭함을 이 새로운 출발의 광장에 모두 묻읍시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한 발짝씩 물러서는 호양의 정신아래 우리가 오늘 묻어 버리는 미움의 앙금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거두어들일 민주와 복지의 풍요로운 열매를 낳는 값진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 순간부터 온누리에 자유와 행복이 가득한 ´희망의 나라´를 바라보며 넓은 바다를 힘차게 헤쳐 나갑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도와 나침반이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저를 대통령으로 직접 뽑아 주셨을 때 다 함께 확인했고 합의했던 민주주의라는 지도이며 국민화합이라는 나침반입니다.

이제 새 공화정의 출범을 알리는 저 우렁찬 고동소리와 함께, 우리는 민주주의의 항로로 확실하게 전진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오늘의 유행어이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민주주의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정당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만이 모두가 자유롭게 살며 자유롭게 참여하는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 우리를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량성장과 안보를 앞세워 자율과 인권을 소홀히 여길 수 있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힘으로 억압하거나 밀실의 고문이 통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율과 참여를 빙자하여 무책임하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시대도 끝나야 합니다.

침해되지 않는 인권과 책임이 따르는 자율이 확보될 때 경제도 발전하고 안보도 다져지는 성숙한 민주주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성실히 사는 국민이 아무 두려움없이 어디서나 떳떳하고 활기있게 사는 사회, 국민 각자가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 되어 국가발전에 창조적으로 참여하는 민주국가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국민의 뜻을 담은 새 헌법의 발효와 함께 바로 이 시각에 탄생하는 새 정부는 바로 국민이 주인이 된 국민의 정부임을 선언합니다. 제가 이끄는 정부는 민주주의의 시대를 활짝 열어 모든 국민의 잠재력을 꽃피게 할 것입니다.

새 정부는 다원화된 사회 각 부분이 생동감에 넘친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의 권능을 다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국민은 정직한 정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국민의 비원을 반드시 성취시켜 도덕성이 높으며 그 도덕성으로 말미암아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곧바로 서 있는 물체의 그림자가 밝은 대지 위에서 굽어질 리는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지도층이 스스로 정직과 진실의 수범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지난 선거에서 저를 지지한 환성은 힘이 되었고 비판은 약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표를 주지 않았던 국민들의 마음도 깊이 헤아려 꼭 국정에 반영할 것입니다. 그분들의 비판을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야당과 반대세력에 대해서도 간곡히 호소합니다.

우리 서로 나라를 위해 함께 고뇌하면서 대화하고 대화하면서 협력합시다. 민주주의 개화와 겨레의 통일번영을 위해 협력의 동반자로 일해 나갑시다.

국민여러분.

우리는 또한 국민화합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저 푸른 바다를 헤쳐 나갈 것입니다. 70년대 이후의 발전사는 경제성장이 아무리 높고 지속적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이상으로 삼는 조화와 균형있는 행복한 사회에 도달할 수 없다는 냉엄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물론 고도성장은 우리의 물질생활을 보다 넉넉하게 만들었고 1차산업 중심의 우리 사회를 다원적인 산업사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나가는 길 도처에 암초를 만들어 놓은 것도 사실입니다. 계층간·지역간의 격차는 갈등과 분열을 낳아 국민적 통합에 큰 문제점을 던져 주고 있습니 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고는 민주복지국가를 향한 우리의 항해는 좌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갈등과 분열을 녹여 줄 훈훈한 화합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이룩한 고도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미치는 정직하고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와 모든 계층의 국민이 합심할 때입니다. 출신지역이나 성별이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부당한 특혜를 누리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국가 전체의 발전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유보되어 온 개개인의 몫이 더 이상 부당하게 희생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병든 사람은 치료받게 해주고, 어렵고 힘없는 사람은 부축을 받도록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기업인의 창의와 자유를 더욱 북돋는 한편, 근로자와 농어민과 중소상공인의 권익을 저는 최대한 신장시킬 것입니다.

나라의 내일을 짊어질 후세들이 수준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이상과 꿈을 수용하여 항상 개혁하고 새로워지는 진취적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하는 이 시대는 멀지 않은 미래에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넘겨져, 이들이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들의 꿈과 열정은 진보의 값진 영양소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학술과 문화예술의 진흥을 통하여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우리 국민이 찬란한 문예부흥의 시대를 창조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이 질높은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며 이웃을 이해하는 넉넉한 마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도록 힘 쓸 것입니다.

아울러 사회정의의 실현을 가로막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어떠한 형태의 특권이나 부정부패도 단호히 배격하겠습니다. 폭력과 투기와 물가오름세를 반드시 막고자 합니다. 부의 부당한 축적이나 편재가 사라지고 누구든지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람과 결실을 거두면서 희망을 갖고 장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입니다. 민주개혁과 국민화합으로 이제 우리는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화합은 정부의 정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피는 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온 국민의 화합을 정부차원의 해결과제로만 미루지 맙시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너그럽게 풀어 나가야 할 문제로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이런 뜻에서, 앞서가는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을 끌어 주면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가진 사람은 덜 가진 사람에게 자제와 아량을 보여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겨레의 큰 경사인 서울올림픽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50억 인류의 평화대축제가 바로 이 땅에서 열리게 됩니다. 세계 속의 한국을 새롭게 드러내는 민족 재탄생의 자리에, 너와 내가 따로 드러나지 않습니 다. 우리 모두 합심 협력하여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에 길이 기억될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승화시킵시다. 서울올림픽은 민족사적 의미에서, 이를 계기로 우리가 민족통일의 항로로 진입한다는 데 더 큰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의 물줄기를 타고, 12년 만에 처음으로 동과 서, 남과 북의 세계 모든 나라가 참가하는 이 화합의 거대한 합창은 한반도에 마침내 통일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렁찬 합창소리에 화답하여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모든 나라와 국제평화와 협력의 외교적 노력을 더욱더 하고자 합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과의 유대를 더한층 강화하는 한편 제 3 세계와의 우의를 더욱 굳게 하겠습니다. 우리와 교류가 없던 저 대륙국가에도 국제협력의 통로를 넓게 하여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할 것입니다. 이념과 체제가 다른 이들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북방에의 이 외교적 통로는 또한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분단의 조속한 해소를 열망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민족통일의 길은 낙관할 수 있는 길도 아니요, 비관 할 길은 더욱 아닙니다. 오로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길일뿐입니다.

때마침 우리 내부에서도 민족의 자존을 높이려는 분위기가 크게 자랐습니다. 이 기운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통일과 세계적 진출을 북돋을 힘찬 원동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자존의 바탕 위에서 민주역량을 다지고 안보태세를 강화하면서 통일의 길을 열어 나가야 합니다.

기회는 그저 기다리는 자에게보다 착실히 준비하는 자에게 먼저 온다는 교훈을 항상 기억합시다.

저로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재결합을 위한 길이 보인다면 세계 어느 곳이든 개의하지 않고 방문해 어느 누구와도 진지하게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 당국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공산국가들조차 거부하고 있는 교리적 이념을 민주의식이 체질화된 이 땅의 자유시민들이 수용하리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폭력이 아니라 대화가 분단을 해소하고 민족의 재결합을 가져오는 정직한 지름길임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대화의 문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 열려 있음을 확인합니다. 민족자존의 새 시대에 부응하여, 대화하며 공존하고 공존하며 협력함으로써 휴전선에도 이해의 봄을 가져옵시다. 그리하여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 함께 통일의 열매를 거둡시다.

관련 국가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한반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북한 당사자들이 민주적 방식을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 나갈 것 입니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의 전령사가 그 어느 곳으로부터든 서울을 방문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특별대우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에게 고통과 좌절을 안겨 주는 것으로 시작했던 20세기는 그 극복의 토대를 마련해 준 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수평선 너머에 활짝 핀 통일조국의 미래상이 우리를 손짓하고 있습니다.

이미 치솟고 있는 우리 국민의 저력과 민족적 자존을 국가적 도약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활활 태울 때 우리 조국은 분명히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끄는 세계의 젊은 거인으로 뛰어오를 것입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손에 넣게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선열과 국민이 희생을 했고 땀을 흘렸던 것입니까.

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어느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재주보다 평범한 상식을 지닌 여러 사람들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상식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또한 나라의 발전이 곧 국민 개개인의 자유·풍요·행복으로 이어지는 ´복지의 시대´ 입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 이 거룩한 단상에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자리는 국민 여러분이 만든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제가 서 있는 것은 국민 여러분의 명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와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는 국민 여러분들로부터 별개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저는 오로지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 국민과 함께 생각하는 대통령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저는 국민을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끌려 다니는 대통령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꿈과 아픔을 같이 하는 국민의 동행자, 이것이 제가 진실로 추구하는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함께 걷는 민주주의´의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오늘 영광스러운 이 단상의 주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씩씩하게 그리고 단란하게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디딥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언제나 즐겨 부르는 민족의 노래, ´희망의 나라로···´ 가 그리는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이 가득한 나라´를 향하여 함께 나아갑시다.

국민 여러분.

저와 함께 전진해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1988년 2월 25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



13. 각종 타이틀[편집]


  •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임기말 집권당 탈당 대통령[47]


  • 헌정 사상 처음으로 검찰조사를 받은 대통령[48]

  • 헌정 이후 직선제에서 가장 적은 득표율로 당선된 대통령[49]

  • 대한민국 대통령 중 임기 후에 모친상을 당한 대통령[50]

  • 제6공화국 최연소 대통령[51]


  •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친 첫 비독재자 대통령

  • 한국갤럽 기준 취임[52], 그리고 재임 당시 평균 지지율[53]이 가장 낮은 대통령

  • 박정희 전 대통령같은 날사망대통령[54]

  • 역대 대통령의 시신이 2번째로 화장된 대통령[55]

  • 최초로 주민등록상 거주지에서의 화장 비용만 지원 받은 대통령[56]

  • 역대 대통령 사상 2번째로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룬 대통령[57]

  • 국립묘지 이외 장소에 안장된 대통령 중 국가보존묘지 3호로 지정된 대통령[58]


14. 저서[편집]


  •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 을유문화사, 1987년 11월 1일 #
  • <노태우 회고록 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조선뉴스프레스, 2011년 8월 8일 #
  • <노태우 회고록 하: 전환기의 대전략>, 조선뉴스프레스, 2011년 8월 8일 #


1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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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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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임 기간 중 양력으로 8월 17일 혹은 그해 기준 음력 7월 16일##에 생일잔치를 열었으나, 퇴임 이후 구속영장에 찍힌 출생신고일인 12월 4일이 생일인 것으로 알려져 가족 측에서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 노태우의 영결식날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은 전해철행정안전부장관은 출생일을 1932년 12월 4일이라고 얘기했다.[2] 경상북도에서는 대부분의 시군이 1988년 이전까지 , 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가 아닌 을 썼다. 다만 상주시, 문경시, 경주시, 봉화군과 1963년 강원도에서 이관된 울진군은 1988년 이전에도 읍면의 하위 행정구역에 리를 썼다.[3] 신용동 596.[4] 제11·12대 대통령이었던 전두환과 이웃사촌이었다.[5] 윤보선,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3번째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은 대통령이기에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었다.[6] 8차 개헌으로 인해 12대부터 취임 선서의 시작 문구는 국헌을 준수하고에서 헌법을 준수하고로 변경되었다. 즉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이기 때문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바뀐 취임 선서는 전두환이 처음으로 읽었다.[7] 7월 11일 대장 진급신고 후 나흘 만인 15일 전역했다.[8] 재임기간: 1981년 7월 16일 ~ 1982년 3월 20일.[9]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서 대행.[10] 제6공화국 이전까진 대통령 취임식과 같은 국가 행사를 비롯해 언론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 각하, 최규하 전 대통령 각하, 전두환 전 대통령 각하와 같이 대통령 호칭 뒤에 각하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11] 대법원 1997.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12] 그나마도 칩거생활 초기에나 가능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있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사실상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 놓였다. 역대 대통령들의 영결식에도 다 불참했다.[13] 관련 기사. 노태우의 마지막 공식 석상 모습이다. 당시에도 말을 어눌하게 하고 지팡이 없이는 거동이 힘들 정도로 몸이 불편했었다.[14]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사망 날짜가 같다.[15]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일로부터 4주가 지난 2021년 11월 23일, 그의 오랜 친구였던 전두환도 노태우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16] 총리실에 근무했던 정두언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언급되었다.[17] 이 문제는 원래 손기정이 예정되어 있으나 손기정 선수가 너무 열성적으로 성화봉송을 연습한 나머지 그만 개막식 2일 전 밤에 기자들에게 들켜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순서를 바꿨다. 손기정 선수는 막판에 결정이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질 정도로 분노했다고 외손자가 증언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성화봉송 점화 직전 마지막 주자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했다.[18] 특히 김영삼은 3당합당 이후 국정운영 방향을 결정할 때 청와대에 불러서 자주 독대하곤 했었고, 임기 막판에는 민자당에서 탈당까지 했던 것도 김영삼의 6공색 탈색에 대한 불만이란 해석 못잖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란 해석도 만만찮다. 이외에도 참모격인 박철언, 김용갑, 최병렬 등도 청와대에 거의 상주시키면서 필요할 때마다 불러서 국정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19] 별난 사람 없는 나라 or 별딴 사람 없는 나라 버전도 존재. ''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군인 출신들이 정치를 하지 않는 나라'를 은유한 것으로도 보인다.[20] 이 당시의 정무제2장관은 현재 여성가족부장관과는 업무가 다르다.[21] 전두환은 실제로 육사 입시 도전 전에 갑종장교에 지원하여 떨어졌고, 육사도 추가합격으로 겨우 붙었다. 당시에 6.25 전쟁 중이라, 전쟁터에 끌려갈 것을 걱정하여 수많은 입학 포기자들이 있었다. 일본의 방위대학 역시 이라크 전쟁 당시 파병의 위험성 때문에 입결이 급락하였던 적이 있다.[22] 이 외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도 우리 돈 10억원에 달하는 정치자금을 제공, (예상 못한 자금제공에) 고르바초프가 당황해 하더라는 일화가 95년 비자금 파동 당시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23]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당시 한국 내외 여러 은행 구좌에 돈을 분산해놓은게 탄로나 구설수에 올랐다. 계좌 각각의 액수가 아닌, 총액한도를 문제삼는 규정에 걸려 탈이 난 것.[24] 노태우는 5.18에 대해 사과하고 추징금도 적극적으로 완납한 반면 전두환은 아무런 반성없이 살면서 결국 추징금도 다 안 내고 사망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노태우는 직접선거, 즉, 국민들이 원해서 뽑아준 합법적인 절차로 대통령이 된 인물이지만 전두환은 간접선거라는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25] 전두환은 구순을 세고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26] 노태우와 부인 김옥숙 여사의 결혼식 사회를 전두환이 보기도 했다.[27] 당시에는 수도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 그야말로 문명과 단절된 곳이었다.[28] 노태우는 이 직선제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29] 정치적으로 여태 있던 비리를 폭로하는 것만이 아니라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전두환의 참석을 막았다. 국민 감정을 고려한 선택이지만 본인의 노력과 지원으로 이룬 올림픽 개최에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니 불편했을 듯.[30] 노태우는 전두환에게는 친구였다. 그런 이유로 쿠데타도 노태우와 함께 주동했다. 그리고 친구라는 이유로 전두환 입장에선 자기 사람 챙긴답시고 핵심 요직인 내무부 장관 임명, 그리고 끝으로는 대통령 후보 공천까지 줬는데 자신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행동을 취하자 격분해버린 것.[31]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 40회에 나오는 두 사람의 연기로 잘 드러난다. 전두환이 득의양양하게 노태우에게 자신이 정치에 관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을 듣고 똥씹은 표정이 되는 것을 애써 참고 미소를 짓는 노태우의 모습을 이덕화, 서인석 두 배우가 기가 막히게 표현해냈다.[32] 2005년 MBC에서 방영된 제5공화국의 마지막 화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두 사람이 검사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전두환은 친구라도 너무 가깝게 두고 요직을 주면 언젠가 뒤통수를 칠 것이다.란 걸 강조했고 노태우는 정치적 위기 때 전임자 격하, 언론 장악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안되면 자리 물려주고 도망가라.라고 했다. 이 가상 일화는 노태우는 "청와대에 있었을 적 저걸 그대로 실천했으나 마지막을 실천하지 못해 지금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했을 수도 있다.[33] 비슷하게 김영삼 전 대통령도 2009년 여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여 애증을 풀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식을 찾지 못하던 상태여서 화해를 이루진 못했다. 대신 김대중의 국장이 끝난 이후 동교동계 출신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위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동교동계 의원들도 조문을 하는 등 양김의 복잡한 인연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34] 민관식이 사망하기 직전 중앙일보에 회고록을 연재했는데 전두환은 체육계 전반에 관심이 많아 집무 당시에도 자신을 종종 찾았고, 심지어 퇴임이 임박했을 때도 사람을 보내 몰래 본인 비자금을 풀어 체육시설이나 인프라 확충에 투자를 했다. 하지만 노태우는 아예 관심이 없고 투자도 미비했었다고 밝혔다.[35] 권한대행까지 범위를 넓히면 참여정부 시기 고건국무총리의 아버지 고형곤 전 전북대학교 총장도 포함.[36] 키가 178cm#로, 사실 1930년대 생 치고는 키가 훤칠한 편이고 너무 몸이 옆으로 벌어지거나 골격 전체가 큰 것도 아닌 날씬한 체형이라 외모적으로 어필한 측면도 상당히 있으며, 기본적인 표정이 웃는 상이라 이미지에서 호감을 준 측면도 크다. 대통령 이전과 이후 촬영된 사진들만 봐도 전두환, 김영삼보다 확실히 크며, 김종필보다도 약간 크다. 근데 사실 오히려 노태우는 유전자에 비해 못 큰 편이라고 하는데, 요절한 노태우의 아버지 노병수는 키가 189cm인 엄청난 장신이였다고 한다. 사실 젊은 시절 외모는 김대중, 김영삼이 더 낫다고도 할 수 있다. 김대중도 나이가 들어서도 무난한 외모였고, 김영삼은 민주화 운동으로 고생을 많이 했고 60대에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미남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사실 그도 젊었을 때는 외모가 준수했던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양김은 1987년 대선 즈음엔 이미 모두 60대 노인들이었으니...[37] 대통령 중 가장 잘생긴 축은 문재인이다.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미남이었으며, 정계에 몸담던 시절에도 미노년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다.[38] 흔히 노태우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등을 평가할 때 중요하게 다뤄지는 요소 중 하나가 '준수한 외모' 이다. 정치인을 신념이나 재능, 정책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한다는 것이 좀 웃기게 보이기는 하지만 현대와 같이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호감가는 외모가 정치인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였던 것이다. 긴단히 말해, 정치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창구 자체가 현재보다 훨씬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인 만큼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정치홍보물인 선거 포스터등에 멋있게 나와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호감이 상당했던 것이다.[39] 다만, 노동자 출신 시인으로 유명한 박노해 같은 이는 "화이트칼라들은 노태우의 외모가 호감형이라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저렇게 간사해보이고 기분나쁜 얼굴이 또 없다! 사람의 외모를 두고서도 계급적 입장이 이렇게나 다르다!"라고 맹렬하게 디스했다. 기본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을 혐오했던 박노해가 아무 말로 노태우를 디스한 것이기는 하지만... 육체 노동자의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던 당대에도 별로 고생 없이 산 것처럼 탱탱하고 부드러운 인상이 호감가는 외모로 받아들여지고 거친 환경과 고된 노동에 시달려 거칠고 까맣게 타고 주름도 많은 외모는 '초라하고 거칠어 보인다' 고 받아들여지던 세태에 대한 풍자로 보기도 하니, 참고하여 각자 알아서 판단하자.[40] 실제로 '이' 씨도 '리(Ли/Ри)'로 옮긴다. 대체로 북한 쪽 인명의 경우 Ри로 쓴다.[41] 민주자유당과 김복동에게 러브콜을 보내던 통일국민당.[42] 오히려 김영삼과 비슷한 분위기의 외모에 가깝다.[43] 1987.12.20. 사퇴. (제13대 대통령 당선)[44] 역대 대선 당선인 중 최저 득표율.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 합당)
[45]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46] 10월 5일 탈당.기사[47] 이는 후임 대통령들까지 쭉 이어지다 이명박 전 대통령 때서야 깨지게 된다. 다만, 후임 대통령들과 탈당 사유는 다르다. 당시 김대중을 비롯해서 범야권 진영에서 선거를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중립 내각 구성을 요구했는데, 노태우가 이를 받아들여서 현승종을 중립내각의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자신 역시도 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것이다. 다시 말해, 후임 대통령들 같은 경우 임기 말 레임덕으로 여당의 대권후보를 중심으로 탈당 요구를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48] 이후 전두환, 노무현, 박근혜, 이명박 순이다.[49] 당선 당시 득표율은 36.64%. 이후에 당선된 김영삼은 41.96%, 김대중이 40.27%로 40%는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적은 득표율이다. 이는 야권이 3김으로 분열되면서 표가 분산된 것에 따른 영향이 크다. 만약, 3김이 단일 후보를 내세웠으면, 노태우는 역대 대통령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운이 많이 따랐던 선거. 참고로 가장 많은 득표율은 박근혜의 51.55%이다.[50] 한편 재임중 모친상을 당한 대통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또 한편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51] 취임 당시 만 55세로 현재까지 6공화국 최연소 대통령이며, 이전 대통령들을 포함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 46세로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다.[52] 29%.[53] 25%.[54] 외국에선 이토 히로부미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도 같은 시기에 사살되었다.[55] 역대 한국 대통령 사상 화장 방식으로 장례를 치룬 최초의 대통령은 16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유지에 따라 수원 연화장에서 시신이 화장되었다. 노태우 본인도 국법에 따라서 검소하게 하고 화장해서 파주에 안장해 달라는 유지에 따라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고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 이로서 노씨 성을 가진 두 대통령 모두 화장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고 이후 전두환 11.12대 전 대통령도 역대 대통령 사상 3번째로 화장되었다.[56] 이는 공통면제대상 부분은 제외되었기 때문이다.[57] 첫번째는 김영삼 전 대통령.[58] 1호는 노무현 전 대통령, 2호는 윤보선 전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