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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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인사
여당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정책 및 방향
범죄와의 전쟁 · 북방정책 · 제6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 1기 신도시 · 정부 제3청사 건립· 대학수학능력시험 · 토지공개념 3법 · 대전 엑스포 유치 · 서해안고속도로 · KTX-2 · KLH · 지역 할당제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타임라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 1988 서울 올림픽 · 1988 서울 패럴림픽 · 7.7 선언 ·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출범 · 2차 사법 파동 · 안산선 개통 ·오홍근 테러사건
1989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발족 · 우지 파동 · 임수경 방북 사건 · 문익환 방북 사건 · 황석영 방북 사건 · 서경원 방북 사건 · 전교조 출범 · 5.3 동의대 사태 · 이철규 의문사 사건 ·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 · 노무현 명패 사건 · 대한항공 175편 추락 사고 · 대전 직할시 승격
1990년
10.13 특별선언 (범죄와의 전쟁) · 경찰청/기상청/통계청 개청 · 3당 합당 · 이문옥 감사관 구속 사건 ·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 KBS 사태 ·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1991년
1991년 지방선거 · 남북기본합의 · 남북한 UN 동시 가입 ·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 연쇄 분신 파동 ·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 · 김부남 사건 ·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 ·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 거성관 방화 사건 ·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 · 새만금 착공 ·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 · 초원복집 사건 · 수요집회 개최 ·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 김보은 양 사건 · 대덕연구단지 준공 · 경부고속철도 착공 · 수도권 신공항 착공
1993년
과천선 개통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노태우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노태우 참고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盧泰愚政府 | Roh Tae-woo Government

1988년 2월 25일[3] ~ 1993년 2월 24일[4]
출범 이전
출범 이후
전두환 정부
문민정부
대통령
노태우 ,/ 제13대,
국무총리
이현재 ,/ 제20대 (1988.3.2.~1988.12.4.),
강영훈 ,/ 제21대 (1988.12.16.~1990.12.26.),
노재봉 ,/ 제22대 (1991.1.23.~1991.5.23.),
정원식 ,/ 제23대 (1991.7.8.~1992.10.7.),
현승종 ,/ 제24대 (1992.10.8.~1993.2.24.),
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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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2.25.~19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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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2.~199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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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취임 선서

1. 개요
2. 슬로건/국정지표
3. 외교/국방
4. 정치/사회
5. 경제
6. 평가
7. 논란
8. 국정지지율
9. 주요 사건
10. 인사
11. 관련 문헌
12.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노태우 정부1987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대에 치러진 마지막 대통령 선거이자 대한민국 제6공화국 첫번째 정부 출범을 앞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태우가 이끌었던 정부이다. 제6공화국의 초대 정부로 1988년 2월 25일 출범해 1993년 2월 24일까지 5년간 존속하였다. 이후 김영삼 정부 때 정부의 명칭을 문민정부로 지칭하였고 그 이후의 정부도 이런 방식으로 이름을 붙이게 됨으로서,[5] '대한민국 제6공화국(약칭 6공)'은 좁은 의미로는 노태우 정부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1980년대 자체였던 전두환의 제5공화국과 진정한 1990년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김영삼문민정부와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번째로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했던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사이에 끼어 별다른 언급이 없는 시기기도 하다. 전두환 정권과 비교해 딱히 눈에 띄는 시대상이 없기도 하고[6]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이어진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으로 구성한 정부이자 정부 구성 과정에서 부정선거, 임기연장, 쿠데타 등의 방법이 동원되지 않아 민주적, 합법적 절차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며 출범한 정부이긴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 12.12 쿠데타의 주역인데다가 전두환의 2인자였기 때문에 완벽한 문민정부라고 보기엔 어렵다.[7] 보수 우익으로부터는 '유약한 정부', 진보 좌익으로부터는 '군정의 잔재', 더 나아가 NL 운동권으로부터는 전임 정권처럼 '반통일 세력' 내지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공격을 받았다.

직선제 개헌 직후이자 제5공화국 말기인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정부는 여러 면에서 한마디로 격변기 정부이기도 하다. 상술했듯 1980년대에서 1990년대[8]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정부라 두 시대에 동시에 집권한 특별한 정부이기도 하고, 노태우 정부 5년 동안 세계는 냉전시대[9]에서 탈냉전[10]으로 바뀌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동안 미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조지 H. W. 부시 그리고 빌 클린턴 행정부까지 대통령이 2번이나 바뀌었으며[11] 일본은 히로히토의 사망으로 아키히토가 왕위를 계승하여 쇼와 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로 바뀌었다.[12] 그리고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분단 국가 독일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여 동서 통일을 이루었고, 냉전시대의 상징적인 나라 소련 역시 노태우 정부 시절에 붕괴하여 노태우 정부 시절 마지막 해인 1992년에는 러시아 연방 체제로 바뀌었다. 이처럼 여러 방면으로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노태우 정부는 기존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노태우 전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인 1993년 2월 24일자 《중앙일보》 사설에 따르면 이 시기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였다고 평가했다.


2. 슬로건/국정지표[편집]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
  • 민족자존
  • 민주화합
  • 균형발전
  • 통일번영


3. 외교/국방[편집]


외치 부문에서는 공이 과를 앞섰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냉전체제 설립 이후 최초로 서방국과 공산국가 모두 참여하여 외교적 의미가 컸다. 1990년부터 공산권 붕괴가 가시화되자 기민하게 동구권과 소련, 중국 등과 수교를 추진하여 국제적 입지를 크게 넓힌 소위 북방정책[13]은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991년 대선 공약이었던 전시작전통제권 회수를 추진하여 문민정부 때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였다.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한 조율로 남북한의 국제연합 동시 가입을 성취한 것 역시 큰 성과. 다만 한일관계 훼손은 옥의 티로 그 여파가 차기 정부까지 이어졌다.

4. 정치/사회[편집]


취임 초기부터 임기 두달째인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에서 집권여당 민정당이 원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헌정 사상 첫 여소야대 정국이자 4 체제가 형성되어 여/야 내부에서 5공 청산과 관련하여 압박을 받았다. 여기에 노태우 본인이 자신의 친구이자 5공의 실세인 전두환과 5공을 수립한 핵심 측근이었다는 전력이 일종의 원죄로 작용하여, 집권 내내 지지도가 부족했던 노태우 정부는 대통령 주도의 힘있는 정책 드라이브를 펼 수 없었고 대통령의 권한도 이전보다는 많이 약해졌으며 대신 치안에 공을 들여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내부적인 치안유지를 꾀하였다.

그러나 국내에 서서히 불어닥친 민주화에 대해 보수 기득권자들은 안 좋게 봤고, 집권 초엔 오홍근 테러사건 같은 백색테러가 주를 이뤘다. 1989년에 판세를 반전시킬 목적으로 공안 정국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세를 역전시키려 했고, 당시 재보궐선거에서의 참패로 궁지에 물려있던 민주당김영삼민정당과의 차별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공화당김종필3당 합당을 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개혁 정책이 크게 후퇴한 데다가 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당내 계파갈등과 연이은 날치기로 지지율은 낮았으며, 특히 1990년 5월 29일자 중앙일보에 '내각제 합의문서 작성'이 폭로되고 10월 25일 사본이 공개되면서 갈등이 더해졌다.

문화적으로도 집권초기에는 대통령과 정치인이 개그프로그램에서 소재로 쓰여지게 되었고, 문화와 가요검열이 완화되었고, 뉴스비전 동서남북 및 MBC 리포트처럼 이전에는 나올수 없는 수위의 TV프로그램이 나왔을 정도였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교복이 대세가 되고,[14]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이 벌어지는 등 보수휘귀 경향이 강해졌다.

1990년 12월 내각제 지지자인 노재봉 총리의 취임 뒤 1991년에 낙동강 페놀사건이 터지고 수서 비리 등 부정부패 사건도 속출하다가 높은 물가상승률이 여전히 문제가 되어 1991년 광역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이 대패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15]과 정원식 전 총리 계란 투척 사건으로 세를 역전시켰고, 투표율도 58%로 낮게 나오면서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의 내분이 벌어지고 각종 공작이 들통나며 1992년 총선에서 민주자유당은 149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며 급속히 레임덕에 빠졌고, 이때를 기점으로 민주계의 수장 김영삼에게 실권을 넘기게 되었다.

언론자유화를 통하여 보다 자유로운 언론 보도가 허용되었다. 1987년 11월 28일 언론기본법을 폐지해 보도지침을 내리던 문공부 홍보조정실을 없애는 한편 프레스카드제와 1도 1지제를 폐지하고 언론사 설립요건을 완화시켜 언론사 수가 늘었으며, 각 언론사에 노조가 설립된 것도 노태우 정부 때였다. 언론 자유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이에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 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3당 합당 직후에 서영훈 전 사장에게 압력을 가해 퇴진시키고 서기원 전 사장을 임명시킴으로써 KBS를 다시 친정부적인 성향의 언론으로 만든 일이나 우리가 남이가 사건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등에서 보이듯 공작 정치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으며 메이저 언론의 '자발적'(...) 편향성도 존재했다.[16] 또한 조중동 같은 일부 메이저 언론들의 권력화도 심해져 1992년 14대 대선 때 '정주영 때리기' 보도 등으로 정권교체의 방향을 점칠 정도까지 진화했다.

정치공학 측면에서는 3당 합당이 이뤄지며 민주자유당이 거대 여당으로 재탄생하여 민주당계 정당들과의 양당 경합 체제가 자리잡았다.


5. 경제[편집]


노태우 정권하에서 연평균 8.5%의 고속성장을 누렸고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경제호황과 노조설립, 최저임금제 신설, 노사분규 등의 영향까지 겹쳐 매년 임금수준이 급속히 향상되며 웬만큼 산다하는 중산층 정도면 자가용 1대 정도는 보유하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자동차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17] 그로 인해서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의 주차난 문제나[18], 귀향길 고속도로 정체문제가 본격화되었을 때이기도 하며, 해외여행도 이 시기부터 자유화되었다.[19] 다만 경제성장률이 높았던 것과는 별개로 경제성장 폭이 일정하지는 않아으며 1989년에 3저호황이 종료되면서 성장률이 6.9%로 떨어지기도 했고, 1992년도에 성장률이 6%대로 떨어지는 악재도 있었다.그렇지만 문제점이 없던 건 아니라서, 주택 값 폭등문제와 급속한 물가 상승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특히 부동산 상승은 3저 호황이 1987년도부터 시작되었고, 200만 호 택지 공급사업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인데 당시 3저호황에 따라 시중에 유동자금이 크게 증가하면서 부동산으로 많은 자금이 쏠렸으며 더군다나 서울뿐만 아니라 서울 인근지역의 부동산 가격도 신도시 건설에 따라 투기 자금들이 대거 투자처를 찾아 농어촌에 가까웠던[20] 이들 지역으로까지 몰려들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버렸다. 정부의 주택사업이 1기 신도시 분양 이전까지 크게 힘을 못썼다. 1991년 중반기를 기점으로 1기 신도시 아파트가 대량으로 공급되며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에 접어들기 이전까지 연 20%대의 상승률을 기록했으며 물가상승률 또한 시중에 자금이 넘쳤던데다가 부동산값 폭등의 영향과 맞물려서 연 평균 7%대 수준을 기록했으며 특히 1990년과 1991년에는 물가상승률이 9%, 체감물가는 그 이상 올라서 집없는 서민들의 고통은 가중되기도 했다.

연 평균 18.7%의 임금상승률에 비하면 물가상승률이 낮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동산 가격 상승과 그에 따른 전월세비 인상으로 인해서 체감 물가 상승폭은 높았던 것이 문제였고(1987년부터 1990년까지 3저 호황과 임대차법 개정 등의 영향으로 전세비가 연 20%씩 폭등했으며 지역에 따라 전세값 상승률이 연 60%까지 달한 경우도 있었을 지경이다.)[21] 이러한 전월세비 상승으로 체감 경제성장률은 생각만큼 높지는 않아서 노태우 정부의 인기가 낮은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다만 이때의 부동산 값을 잡을려고 이런저런 대책들을 내놓다보니 그 가운데서 토지 공개념 등 진보적인 정책들이 부동산 정책에 적용되었고, 그것이 효과를 보면서 김영삼 재임기까지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다소 아이러니함을 느낄수 있다.

주식시장은 정권초기에 활황세를 보였지만 1989년 3월 31일에 종합주가지수(현재 코스피 지수)가 1000선을 돌파한 이후에 하락세로 반전되자 여러가지 부양책을 내놓았지만 실패하고 1992년 8월에는 450선까지 내려갈 정도로 주가가 약세를 보였기 때문에 주식투자자들에게 평가는 별로 좋지는 못했다.

1986년 전두환 시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수입개방은 갈수록 강해졌고, 노태우 정부 역시 전임 정권처럼 저항 없이 무조건 시장을 개방시켰다. 이미 수입 농수산물부터 무차별적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국내 농민들을 벼랑까지 몰아넣었고, 뒤이어 지적소유권, 통신시장, 금융시장까지 문을 열어젖혔고 관세율까지 내렸다. 이에 따라 1981년 74.7% 및 24.9%였던 수입자유화율와 관세율이 1989년 6월 기준 94.7%와 12.7%로 바뀌어 선진국 수준과 비슷해졌다. 다른 한편 1988년 수입감시제도를 없애고 1989년 3월 특별법에 따라 수입규제를 완화시키기도 했다. 물론 정부도 수입자유화 및 시장개방 확대에 대해 국민여론을 고려해 일부 품목 개방을 저지하려 했으나 미국이 1989년 '슈퍼 301조'를 동원하며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해 지적소유권, 농산물, 서비스업 등 산업 전반을 개방하라고 했으나, 5월 정부는 농산물, 국산화 정책, 외국인 투자분야 등에 양보하며 '우선협상대상국'에서 제외됐다. 11월 GATT BOP원용조항[22] 졸업 후 GATT 11조[23] 이행국이 되어 농산물 88.5%, 공산품 99.9%로 각각 증가했다. 더 나아가 외환 및 금리자유화에 따라 금융시장에도 개방이 이루어져 1988년 외국계 보험회사 합작사 및 현지법인도 허용되었다. 1988년 12월 '자본시장 국제화 계획'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여 1992년 1월에는 외국인에게까지 주식시장을 개방했다. 영화산업 역시 1988년 미국의 요청에 따라 외국영화 직배제를 허용해 외국 영화사 현지법인 설립을 허용시켰다.

노태우 재임기의 분기별 실질경제성장률은 다음과 같다. 최고치는 16.5%, 최저치는 4.0%이다.
분기
실질경제성장률
1988년 1분기
16.5%
1988년 2분기
8.4%
1988년 3분기
10.6%
1988년 4분기
12.9%
1989년 1분기
5.0%
1989년 2분기
7.8%
1989년 3분기
6.9%
1989년 4분기
8.3%
1990년 1분기
10.0%
1990년 2분기
10.9%
1990년 3분기
10.5%
1990년 4분기
8.2%
1991년 1분기
11.4%
1991년 2분기
11.8%
1991년 3분기
9.8%
1991년 4분기
10.3%
1992년 1분기
8.6%
1992년 2분기
7.7%
1992년 3분기
4.9%
1992년 4분기
4.0%


6.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 정부/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논란[편집]




8. 국정지지율[편집]



8.1. 한국갤럽[편집]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한국갤럽
[ 1년차 ]
선거
전체 선거인 대비 득표율
제13대 대통령 선거

32.0%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88년 2월-1988년 5월

29%


46%

1988년 5월-1988년 8월

57%


16%

1988년 8월-1988년 11월

53%


25%

1988년 11월-1989년 2월

41%


27%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 2년차 ]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89년 2월-1989년 5월

45%


25%

1989년 5월-1989년 8월

28%


41%

1989년 8월-1989년 11월

26%


45%

1989년 11월-1990년 2월
미조사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 3년차 ]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0년 2월-1990년 5월

28%


40%

1990년 5월-1990년 8월

18%


62%

1990년 8월-1990년 11월

28%


55%

1990년 11월-1991년 2월

25%


54%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 4년차 ]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1년 2월-1991년 5월

12%


40%

1991년 5월-1991년 8월
미조사
1991년 8월-1991년 11월
1991년 11월-1992년 2월

15%


41%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 5년차 ]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2년 2월-1992년 5월
미조사
1992년 5월-1992년 8월

12%


56%

1992년 8월-1992년 11월
미조사
1992년 11월-1993년 2월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노태우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각 분기 내 여러 조사 결과의 중위수를 토대로 하였음.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9. 주요 사건[편집]



9.1. 1988년[편집]




9.2. 1989년[편집]




9.3. 1990년[편집]




9.4. 1991년[편집]




9.5. 1992년[편집]




9.6. 1993년[편집]




10. 인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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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나웅배조순이승윤최각규
국토통일원장관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이홍구홍성철최호중최영철
외무부장관
최광수최호중이상옥
내무부장관
이상희이춘구이한동김태호안응모이상연이동호백광현
재무부장관
사공일이규성정영의이용만
법무부장관
정해창허형구이종남김기춘이정우
국방부장관
오자복이상훈이종구최세창
문교부장관 교육부장관
김영식정원식윤형섭조완규
문화공보부장관 문화부장관
정한모최병렬이어령이수정
체육부장관 체육청소년부장관
조상호김집정동성박철언이진삼
농림수산부장관
윤근환김식강보성조경식강현욱
상공부장관
안병화한승수박필수이봉서한봉수
동력자원부장관
이봉서이희일진념
건설부장관
최동섭박승권영각이상희이진설서영택
보건사회부장관
권이혁문태준김종인김정수안필준
노동부장관
최명헌장영철최영철최병렬이연택
교통부장관
이범준김창근김창식임인택노건일
체신부장관
오명최영철이우재송언종
정무제1장관
김윤환이종찬정종택박철언김윤환김동영최형우김용채김종호김동익
정무제2장관
조경희김영정이계순김갑현
총무처장관
김용갑김용래이연택이상배이문석
과학기술처장관
이관이상희정근모김진현권숙일
공보처장관
최병렬최창윤손주환유혁인
환경처장관
조경식허남훈권이혁이재창






11. 관련 문헌[편집]


  • 노태우 회고록(전 2권) - 노태우 저. 조선뉴스프레스. 2011.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3~4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 남산의 부장들 - 이도성 저.

  • 실록 민주화운동: 우리 강물이 되어 2권 - 유시춘 외 공저. 경향신문사. 2005.

  •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3권 - 박세길 저. 돌베개. 1992.

  • 진단 제6공화국 - 이한열기념사업회 편. 두리. 1991.

  • 6공화국 언론조작 - 김종찬 저. 아침. 1991.

  •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3권

  • 청와대 비서실 4권 - 오병상 저. 중앙일보사. 1995.

  • 실록 청와대: 적과 동지 - 조명구 저. 한국문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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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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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일생 · 대통령 재임 시절 평가 · 개인적 평가
공약
범죄와의 전쟁 · 북방정책 · 한국예술종합학교
가족
아버지 노병수 · 아내 김옥숙 · 딸 노소영 · 아들 노재헌 · 사위 최태원(범 SK가)
관련 인물
전두환 · 김영삼
역대 선거
제13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12.12 군사반란 · 5.18 민주화운동 · 3당 합당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기타
별명 · 신군부 · 하나회 · 민정계 · 민주정의당 · 민주자유당 · 보통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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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10월 20일 또는 12월 20일 경에 대통령 탄핵, 사퇴 또는 임기 중 사망이 있지 않는 이상 12월 19일 날에 대선이 실시될 일과 2월 25일에 대통령 취임식과 임기를 시작할 일이 없을 예정이다.[2] 그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까지 2월 25일에 대통령 취임식을 하게 되었지만 박근혜가 탄핵을 당하면서 박근혜가 2월 25일에 대통령 취임식을 한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1][3] 노태우2월 25일대통령 취임식임기를 시작한 첫 대통령이 되었다.[2][4] 2월 24일에 임기를 마무리하고 퇴임한 첫 대통령이 되었다.[5] 김대중 정부 - 국민의 정부, 노무현 정부 - 참여정부.[6]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전두환에 비해 언급이 별로 없는 편이다.[7] 그래선지 '제5.5 공화국'이란 별칭도 있었다. 노태우 정부도 군사 정부의 연장이라 주장하는 측에 의한 거의 멸칭에 가까운 별칭.[8] 1990년대 초반까지 집권했으며 사실상 1980년대의 연장선으로 봐도 무방하다.[9] 제2차 세계대전부터 1991년 12월 소련 붕괴까지.[10] 일명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이며 기간은 좁게 잡으면 1991년 12월 소련 붕괴 직후부터 2008년 세계금융위기까지며 넓게는 2017년까지이다.[11] 노태우 정부 첫해인 1988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했으며 해당영상# 1989년부터는 조지 H. W. 부시와 4년 임기 전부를 함께했다.#[12]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1988년은 쇼와 63년이며 쇼와 덴노(히로히토)가 공식 활동을 했던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이후 히로히토가 사망하여 아키히토가 왕위를 계승한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헤이세이 시대에 해당한다.[13] 서독동방 정책에서 이름과 콘셉트를 따 왔다.[14] 다만 이 당시에는 교복이 대세가 되는것은 이 당시의 학부모들과 교사 사이에서 돈이 학생지도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교복을 부활시키자는 여론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여학교에서는 매일같이 옷을 고르는게 귀찮다는 이유로 차라리 교복을 입는게 낫다는 식의 여론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교복이 재도입된 이후로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는 식의 불편이 제기되거나 교복의 가격이 비싸져서 사복입는것보다 나을게 없다는 여론이 퍼졌음에도 정작 교복재도입을 주도한 교육게에서 교복의 개선 및 교복재자율화에 대해 계속해서 뭉개다보니 교복이 불평불만의 대상이 된것이었을뿐이었다. [15] 후에 조작으로 밝혀짐.[16] 실제로 명절 때만 되면 여당 정치인들과 정치부 기자들에게 명절선물로 용돈(...)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이를 토대로 메이저 언론에서 정부여당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게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궁핍한 야당 정치인들에게도 일정 수준의 용돈을 주기도 했다고(...) 더군다나 3당 합당 이후로 술값과 택시비를 잘 쏘기로 유명한 김영삼이 민자당에 합류하면서 효과는 배가 되었다. 당시 정계와 언론계 사이에서 얘기가 노돌았던 김영삼 장학생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여담이지만 당시 유력 대권주자였던 김대중을 비판하거나 마타도어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던 이유 중 하나가 기자들에게 한 턱 쏠 때 꼼꼼하게 계산하면서 술값과 차비를 내주는 습관때문이었다고 한다.(...) 뭐, 김대중의 측근 인사중 하나였던 박지원은 기자들에게 술값과 차비를 펑펑 싸주어서 대중적인 인기는 없어도 기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말이다.[17] 특히 1987년도에는 승용차 등록대수가 84만 대로 자가용 보유가 아직은 소수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데 반해서 1992년에는 346만 대까지 증가했다. 승합차나 버스, 트럭까지 합한 총 자동차 대수는 520만 대를 기록한다.[18] 물론 이때의 주차난에는 당시 전철망이 그리 잘 깔려있지 않고, 주차장 시설도 늘어나는 수요에 비해서 많이 부족하다 보니 수요분산이 덜 되었던 것도 있기는 했다. 1기 지하철 건설계획으로 서울에 4개 정도의 지하철망, 부산은 1개 정도의 지하철망이 깔려 있었기는 했지만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기 때문.[19] 그 이전에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경제적인 사정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해외로 출국하는 것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규제했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다니기가 힘들었다. 또한 1989년에 해외여행이 자유화가 되기는 하였지만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였다.[20] 당시 1기 신도시 건설지역이었던 분당, 일산 등은 농촌지역이나 소규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21] 덕택에 PD수첩 1회 주제도 집값과 전월세값 폭등으로 인한 자살행렬에 대해 다루웠다.[22] 만성 경상수지 적자로 수입제한토록 한 조항.[23] 수출입 수량제한 철폐.[24] 여당 참패로 여소야대.[25] '대우그룹노조협의회'의 준말.[26] 라디오는 1월, TV는 12월에 이뤄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