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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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주논개
朱論介


파일:external/cfs7.blog.daum.net/47ad347086824&filename=%EA%B5%AD%EA%B0%80%ED%91%9C%EC%A4%80%EB%85%BC%EA%B0%9C%EC%98%81%EC%A0%95.jpg

논개 표준영정 (제79호/ 2008.02.04. 지정/ 윤여환)
출생
1574년(선조 7년)
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사망
1593년(선조 26년) (향년 19세)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사인
익사
본관
신안 주씨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 중 한 명이다.


2. 생애[편집]


전라북도 장수군 출신. 성은 주(朱)씨라고 하나(신안 주씨), 이는 양첩설과 함께 유포된 것으로 지방 전승이 출처라 근거가 희박하다. 이름인 논개를 '놓은(낳은)+'라고 해석하여 4갑술인 술년 술월 술일 술시(1574년 음력 9월 3일 밤)에 태어났다고 보기도 하고 논개라는 이름 자체가 본명이 아니라 일본군이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인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의기 주씨(義妓朱氏), 의암 주논개(義巖朱論介)라고도 불린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투신한 지역인 진주시의 대표 캐릭터로 사용된다. 그런데 논개가 태어난 곳인 장수군 또한 논개를 캐릭터로 사용해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까지 벌어져 국사편찬위원회에 논개가 어디 사람이냐는 민원까지 제기된 바 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최초로 등장하고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논개 관련 기록이 없다. 사실 《어우야담》의 언급이 최초의 기록이라서 주요 기록으로 전하기는 하지만, 《어우야담》은 야담집의 효시로 꼽히는 서적이므로 정식 사서로서는 물론이요 야사집으로도 많이 부족하다. 다만 어차피 사서 기록이 없고 이후 일화와 일치되는 점이 많기 때문에 이걸 주요 자료로 꼽을 뿐이다. 특히 《어우야담》은 선조 시기에 원본이 쓰이고 200년이 지나서 순조 시기에 활판본이 나왔으며 필사본만 30종이 넘어서 이 책에 대한 연구는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논개양첩설 같은 것의 신뢰도와는 별로 상관없다. 논개가 기생이었는지, 아니 애초에 이런 기생이 실존하기는 했는지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확인은 안 된다는 이야기다.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계사년(1593)에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연약한 몸을 잡자 논개는 왜장을 힘껏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두 사람은 모두 익사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1]

적장을 안고 뛰어내릴 때 손가락이 풀어지지 말라고 아는 사람들로부터 반지를 빌려 열 손가락에 끼운 후에 손을 엇갈려 끼우고 뛰어내렸다고도 한다. 남강을 가르는 진주교에 가보면 논개를 기리기 위해서 교각에 가락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고 아름다운 가락지다. 진주에 놀러가면 확인해 보자.

婦人之性輕死。然其下者,或不耐忿毒,幽鬱而死,其上者義不忍汚辱其身而死,及其死,槩謂之節烈。然皆自殺其軀而止。至若娼妓之屬,自幼導之以風流淫蕩之物,遷移轉變之情,故其性亦爲之流而不滯,其心以爲人盡夫也。於夫婦尙然,矧有能微知君臣之義者哉?故自古兵革之場,縱掠其美女者何限,而未嘗聞死節者。昔倭寇之陷晉州也,有妓義娘者,引倭酋對舞於江中之石,舞方合抱之,投淵而死,此其祠也。嗟乎,豈不烈烈賢婦人哉!今夫一酋之殲,不足以雪三士之恥。雖然,城之方陷也,鄰藩擁兵而不救,朝廷忌功而樂敗,使金湯之固,失之窮寇之手,忠臣志士之憤歎恚恨,未有甚於斯役者矣。而眇小一女子,乃能殲賊酋以報國,則君臣之義,皦然於天壤之間,而一城之敗,不足恤也。豈不快哉!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인 사람은 분독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이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는 자기 혼자 죽는데 그친다. 창기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서부터 풍류스럽고 음탕한 일과 정을 옮기고 바꾸는 일에 길들여졌으므로, 그네의 성품은 흘러다니고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네의 마음 또한 남자들은 모두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의 예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신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부터 전쟁터에서 멋대로 미녀를 약탈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죽어서 절개를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왜구가 진주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이는 왜장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왜장을 껴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이의 의절을 기리는 사이다. 아,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랴. 지금 생각해 볼 때, 왜장 한 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때 이웃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 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을 시기하여서 패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을 하였으니 군신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2]

'논개는 기생이고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첩'이라는 주장은 조선 후기에 기록되었음을 볼 수 있다.

論介長水妓。爲崔慶會妾。癸巳慶會爲慶尙右兵使。入晉州。倭攻晉州急。天又大雨城潰。倭附上。慶會自投矗石之淵。論介聞慶會死而不慽。卽盛粧具佩之餙。就江上巖婆娑以眩倭。倭酋就。論介故要帛束腰而舞。因俱墜淵死。至今穪其巖曰義巖。

논개는 장수군의 기생으로 최경회의 첩이다. 계사년 경회가 경상우병사로 임명되고 진주에 들어왔다…(후략)

성해응의 《연경재전집[3]

논개양첩설의 요지는 논개는 원래 양첩인데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죽이기 위해서 '스스로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KBS에서 단막극으로 1980년대 방영했으며 이규태도 이 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최경회와 논개를 엮는 것은 1987년 최경회의 집안인 해주 최씨 가문에서 발간한 《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서 최경회의 부인이 왜장을 유인해서 자살했다는 식으로 묘사했는데 여기서는 기생 출신은커녕, 천첩이라는 묘사마저 없다. 현재 최경회와 같이 무덤이 있다.

논개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불분명하지만, 의암주논개정신선양회처럼 지방자치단체나 관련 사업하는 곳에서 괜히 아는 척 좀 한답시고 논개가 기생인지 아닌지를 단언하거나 "실존인물인지도 불분명함"이라고 하면 봉변을 당하니 주의를 요한다. 특히 논개와 관련이 깊은 고장인 진주나 장수 가서 저런 소리 하면 크게 곤욕을 치를 수 있다. 장수군과 논개 가지고 다투는 진주시는 논개양첩설을 채용해서 써먹었다가 최근에는 쓰지 않고 있다.

논개의 죽음에 알려진 일화는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진주가 함락되고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을 때 아름답게 치장하고 왜군의 승전 축하연으로 들어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적장을 해치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이때 죽었다는 기록은 한국 쪽의 주장이며,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료가 부족하고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는 일본 쪽의 기록과도 맞지 않아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아니 논개의 실체가 불분명하듯이 투신 일화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계월향에게 끔살당했다는 전설이 유포된 것과 같은 이치.[4]

아무튼 논개의 의거는 전후 진주 사족 및 주민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며 너무나 유명해져서 1722년 국가에게서 정식으로 '의기' 칭호를 받게 된다.[5] 진주기생들은 매년 6월 29일, 즉 진주성 함락일이자 논개의 기일에 모여 제사를 지냈으며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행사가 그대로 진행되었다. 현재까지도 매년 춘추제를 지내고 6월 중 길일을 잡아 사흘 동안 제전을 연다.

3. 여담[편집]


  • 논개 본인과는 상관없는 흑역사가 많은데 황당하게 친일 쪽 인물들과 많이 엮여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모윤숙이 대하서사시 <논개>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서는 최경회가 아닌 김시민을 사랑한 관기로 묘사되고 있으며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이 전사하자.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나간다.[6] 모윤숙은 해방 전후에 스캔들에 연루된 바 있다.[7] 있고 UN군 고급 장교 접대용으로 낙랑클럽이라는 사교 단체를 조직한 후 자신을 논개에 비유한 걸 본다면 이런 시를 지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1970년대에 논개 위패를 일본에 기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99년에 한 주간지가 이를 보도했는데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는 이 위패가 '왜장을 사랑한 조선 여인'이라는 왜곡으로 신사에 모셔져 있다고 비난했으며 기증한 당시 진주시 시장을 친일반민족행위자 급으로 비난했다. 이에 그 전직 시장은 한일 친선이라고 변명했다. 1970년대에 우에츠카 히로우라는 일본인이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조선의 기생(논개)한테 살해당한 것을 알고 승려로 위장해 한국에 들어와 한일 친선을 핑계로 논개의 영정과 비석을 취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가묘와 논개의 가묘를 나란히 두고 이들을 부부로 조작한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 논개는 부부 금슬의 상징이 되어 일명 '섹스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는 것.[8]

  • 가수 이동기는 1982년 논개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아 가수에서 은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어느 날 TV로 고교야구 중계를 보던 중 논개가 응원가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이동기가 전 소속 음반사에 전화를 걸었는데 대뜸 한다는 말이 "동기야 지금 논개 대박났어! 당장 서울로 올라와!!" 알고 보니 이동기가 낙향한 사이 논개가 몇 번 방송을 타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정작 가수는 행방이 묘연한지라 음반사는 물론 방송국에서도 그를 애타게 찾던 중이었다. 그렇게 다시 가요계로 복귀한 이동기는 당대 인기가수로 발돋움하여 가요톱10에서 1위를 수상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cjnews_229891_1%5B319916%5D.jpg

  • 3가지 그림은 모두 동일 인물의 작품으로 좌측부터 논개, 성춘향, 아랑이다. 우선 척 봐도 얼굴, 자세, 의상 등이 하나의 그림을 원형으로 하고 있고 고증은 엿바꿔 먹었다. 애초에 영정으로 그린 것도 아니고 미인도로 그린 것을 돌려막기한 것인데 영정으로 쓰고 있으니 이것도 문제. 이 화가가 제자인 운보 김기창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화가로 꼽히는 이당 김은호이다. 친일 화가가 그린 논개 영정이야말로 블랙코미디다. 이 논개 영정은 불행 중 다행으로 표준 영정으로 제정되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진주성에 있는 촉석루 의기사에 오랫동안 봉안되어 있었다. 결국 2005년 이 그림의 철거를 주장하면서 진주시 측과 대립하고 있던 진주시민단체연합이 들고 일어나서[9] 이 그림을 강제 철거해 버렸다. 이후 이 그림은 당국에 반환되었으며 표준 영정 제작방침이 나온 뒤에 일단 사과 성명이 나왔다.[10] 결국 장수군 의암사의 논개 영정과 촉석루 의기사의 논개 영정은 모두 철거되었고 이후 장수군과 진주시의 합의 하에 윤여환의 표준 영정이 제작되었다. 신안 주씨 문중의 외모를 분석하고 16세기 말 의상을 고증하여 제작되었다고 한다.

  • 인터넷 상에서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악역급 인물과 동귀어진한 인물에게 붙여주는 칭호가 되었다. 홍석천에게 붙여진 홍논개, 임요환에게 붙여진 임논개, 2009년 한정으로 심수창에게 붙여졌던 심논개 등. 스타판에서는 주로 프로리그에서 주로 쓰는 용어인데, 일부러 상대팀 에이스가 나올 맵에 맞춰서 신예라든지 상대적으로 자신팀의 에이스가 아닌 선수를 내면 그 선수를 논개라고 지칭하고 이러한 작전을 논개작전으로 부른다.[11] 그리고 가끔 이런 논개가 에이스를 잡는 수훈갑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삼성전자 칸 vs CJ 엔투스 전에서 신동원을 잡은 유준희. 당시 승기를 잡았을 때 찍힌 김가을 감독의 피식하는 웃음이 찍히기도 했으며, 심지어 승자인터뷰에서도 유준희가 하는 말에서 김가을 감독이 유준희한테 너는 논개다.라고 그랬다고. 10-11 시즌 이영호, 송병구, 김구현 등 에이스들에게 줄줄이 패배하며 팀을 승리로 이끈 이재호는 당시 아이디도 NoN.ge로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에 투명하신 분인지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 진주성 촉석루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논개가 왜장을 안고 떨어졌다는 바위 의암(義巖)이 있다. 가 보면 <어우야담>에의 표현과 달리 만길 낭떠러지가 아니고 수면 위로는 사람 키 높이 정도다. 뭍에서 약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있어서 건너다닐 때는 약간 조심해야 한다. 표면이 평평하고 물이 가까워서 시원하기 때문에 위에 앉아서 놀기 좋다.[12] 봄이나 가을철 맑은 날 그 위에 앉아 멍 때리고 있으면 햇빛도 따끈하고 강물도 반짝거려서 쉬기 좋다고 한다.[13]실제로 익사 사고가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곳이다. 강 자체는 천천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전형적인 하류형 강인 반면 의암 주변은 물이 바위 사이로 흐르면서 아래로 빨려 내려가는 급류를 형성한다. 이 때문에 수영에 자신있는 사람이라도 위험한 곳이다. 의암은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 강변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사람이 건널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반대로 가까워져서 벼랑과 딱 붙으면 난이 터진다는 설화도 있으며 실제로 자료 사진을 보면 의암과 그 근처 벼랑의 거리는 줄곧 변하고 있는데 원인은 불명. 2000년대까지는 의암 위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남긴 다양한 내용의 낙서가 가득했는데 2010년대 들어서며 다 지워졌다.

파일:external/ph.idomin.com/349407_264346_4742.jpg

  • 2011년 제10회 '논개제' 때 했던 일명 '논개 체험' 행사. 의암 옆 수상 무대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의암에서 강으로 뛰어드는 '논개 순국 재현극'이 펼쳐졌는데 왜장으로 꾸민 인형을 끌어안고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이벤트였다. 물론 난간 아래에 푸른색 에어매트가 있었고 안전요원도 있었지만 많은 어린이들이 체험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으며 페이스북에 관련 사진들이 올라오면서 시끌벅적했다. 관련기사 결국 문제가 되었는지 2012년에 폐지되었다.


  • 북한에서는 논개와 유사한 위상으로 계월향이라는 기생을 기리고 있다.

  • 부산광역시이기대(二妓臺)에도 거의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른 점은 기생 2명이 왜장 1명을 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는 점이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는 배우 한애경이 연기했다. 최경회의 양첩 설을 채택했는데 논개는 사실 불운한 사주(개띠해, 개띠월, 개때일, 개띠시)를 타고 났기 때문에 친정이나 시가에서도 배척받은 양민인데 최경회가 거두어서 소실이 되었다.

  • 소설가 김성한은 소설 <임진왜란>에서 '본래 장수군의 관기였다가 장수를 방문한 최경회를 모시게 되었고 이후 최경회가 천첩으로 거둬들였다'라고 표현하였다. 물론 에필로그에서는 '논개는 기생이 분명하다.'고 단언하며 '기생이라는게 창피하다는 이유로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게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 소설가 김별아는 소설 <논개>에서 기생설을 부정하고 최경회의 부인이 사망하고 나서 최경회가 논개와 재혼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본래 논개는 몰락 양반의 딸인데 일찍 부친을 여의고 의탁하던 숙부에 의해 팔려 나갈 뻔한 것을 당시 현감으로 있던 최경회가 막아 주었다고 나온다. 더 나아가 최경회는 갈 곳이 없어진 논개를 거두어준다. 논개에게는 최경회가 여러모로 은인인 셈. 매사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고 부인인 김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주변에서 후사를 두어야 한다고 하는데도 첩을 두지 않고 김씨를 존중해주는 등 고결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최경회를 논개는 깊이 흠모하게 된다. 결국 논개의 마음을 김씨까지 알게 되고 김씨는 병사하기 전에 최경회에게 논개와 재혼하라고 권유한다. 김씨가 숨지고 최경회와 논개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나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최경회가 의병을 조직하자 논개는 물심양면으로 의병을 지원한다. 그러다 최경회가 이끄는 의병대가 거의 궤멸당하고 진주성이 함락하자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자살한다. 논개는 겨우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으나 왜군이 최경회의 시신을 건져 기어이 수급을 가져갔다는 소식을 듣자 복수를 결심한다. 이미 관기가 되어 있던 어릴 적 친구가 그 결심을 듣고 '죽을 거면 그냥 자결만 해도 최씨 집안에서 대접받을 거다'며 네가 굳이 그럴 것까진 없다고 말리는데도[14]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열 손가락 모두에 반지를 낀 채 왜군들이 진주성에서 벌이는 축하연에 들어간다. 그리고 최경회의 수급을 거둔 게아무라를 유혹해 끌어안은 채 최경회처럼 남강에 투신한다. 삶에 미련이 없는 듯 웃으면서 죽어갔다고 묘사된다.


  • 블리자드의 온라인 게임 <오버워치>의 영웅 라인하르트 빌헬름이 절벽을 향해 돌진해 적과 함께 떨어져 죽는 모습을 따 라인하르트를 논개하르트로 부르기도 한다. 자매품으로 논개호그도 있다. 이 쪽은 먼저 낙사 지점으로 다이브한 다음에 갈고리로 끌어오기 때문에 더 적절한 비유다.




[1] 어떤 판본에는 이름 없는 기생이라고 되어 있고 후일에 논개라는 이름이 덧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지로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에서는 이름 없는 기생이라고 했고 논개라는 이름은 없다.[2] 원문 출처[3] 원문 출처[4]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유몽인 같은 이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왜장 혹은 나름의 지휘관급의 장수를 안고 투신한 것은 실제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 단지 후대에 이야기가 윤색된 것으로 보인다.[5] 다만 이러한 기록은 국가의 정식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순조 대에 간행된 충렬실록에 수록되었다.[6] 김시민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7] 인도 대표 제논과의 관계가 대표적. 모윤숙도 인정했고 제논도 인정했다. 이걸 어느 계통출판사에서는 우정을 통한 민간 외교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당사자인 모윤숙과 제논도 인정한 미인계이다.[8] 2016년 4월 9일자 채널A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142회)[9] 김은호 그림 철거가 얼마나 시민단체들의 지지를 받았냐면 진주에서 논개 그림을 철거할 때 42개 시민단체가 연합했고 남원시의 YMCA와 불교계가 같이 합동으로 성춘향 그림 철거하라고 발표했다.[10] 복제본이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1] 사실 이런 방법의 원조는 손빈이다. 전차경주에서 이기는 방법(항목 참조)으로 "하급 전차를 상대의 상급 전차와, 중급 전차를 상대의 하급 전차와, 상급 전차를 상대의 중급 전차와 붙이는" 방법.[12] 참고[13] 실제로 가 보면 물에 발 담그기 좋아 보이는데 바위가 약간 높다. 따라서 발만 좀 담그려고 슬슬 내려가다 미끄덩 하면 훅 가게 되고 마니 물놀이할 때는 항상 안전사고 조심하자.[14] 당시 전쟁 중이긴 했으나 조선시대에는 열녀가 하나 나오면 그 집안은 물론 그 지역 자체에 특혜가 내려지는 게 당시 법도였다. 이 때문에 사실상 가문에 의해 살해당한 과부도 나오는 등 부작용도 상당했다. 그리고 작중 논개의 설정만 보면 최경회의 후처로 들어가며 신분을 상승한 상황인데 관기로 이름을 올리는 건 스스로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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