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의 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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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여담
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누란미녀(楼兰美女, Loulan Beauty) 혹은 '누란의 미녀'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신장 지역의 여성 미라이다.

초기에는 실크로드에 위치한 고대 왕국인 누란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연대를 분석해 보니 그보다 과거였다고 한다. 즉, '누란의 미녀'도 어찌 보면 별명이다.


2. 상세[편집]


파일:누란의 미녀 생전 복원 밀랍 인형.jpg

미라를 통해 그녀의 생전 모습을 추측해 재구성한 박물관의 밀랍인형. 일본에서 2005년에 미라를 토대로 생전 모습을 복원해서 제작한 다음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박물관에 기증했다.

누란의 미녀 미라(충격적일 수 있는 사진이므로 링크 처리함).

신장 우루무치 박물관 2층 고시실에 다른 미라들과 함께 있다.

1980년 4월 1일 중국 위구르 사회과학원 소속 무순잉(穆舜英) 등이 바인궈렁 몽골 자치주 동부지방이며 우루무치 시 남동쪽 러우란(누란) 고성의 북쪽에 있는 철판하변 철판하 묘지 / 태양묘[1]의 사막에서 발견된 여성 미라이다. 당연히 미라는 건조되어 변형되었으나, 외형을 재구성해 보았을 때 현대적인 관점으로 굉장한 미인이어서 누란의 미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깎아내린 절벽 중 인도에 가까운 지점에서 발견했다. 시신은 가죽과 포로 감싸진 상태이며 털모자에는 깃털이 꽂혀 있었고 발에는 가죽 신발을 신고 있었다.

40~45세 사이에 모래 먼지로 인한 폐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도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키는 151~152cm로 생전에는 155cm 정도로 추정되며 혈액형은 O형이다. 40~48세 사이에 사망했다. 부계 쪽으로는 시베리아 남쪽에 있던 사람들을 거쳐서 켈트족과 같은 계열이었다. 그러나 누란의 미녀 본인은 켈트인은 아니고 토하라인이다.[2] 머리 색은 적발로 추정되며 고대 로마대 플리니우스[3]가 토하라인이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이라는 기록을 남긴 점과, 당나라의 구법승인 현장타림 분지의 주민들이 적발에 벽안이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벽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 여담[편집]


태양묘와 다른 지역인 소하 묘지에서 발견된 소하공주와 혼동되기도 한다. 심지어 뉴스에서조차 사진을 두고 혼동하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른 미라다.

아래는 소하공주 문서에 있는 그림과 설명이다.

파일:소하공주 생전 복원.jpg

위의 그림은 그녀의 생전 모습을 추측해 재구성한 그림으로 알려진 그림이다. 중국 웹상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으로, 실제 해부학적 근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인지 불분명하며 발굴 당시의 모습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미라가 더 심한 곱슬머리인 데 비하면 곱슬기가 줄어 있다.

소하공주가 아닌 누란의 미녀 미이라의 복원 그림에 가깝다. "가깝다"고 한 이유는 모자는 누란의 미녀, 직모인 머릿결과 얼굴은 소하공주를 더 닮았기 때문이다. 심한 곱슬이란 표현도 누란 미녀의 특징. 즉 중국 웹에서도, 나무위키에서도 혼동되고 있다.

발굴 당시 한국 신문에도 컬러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살렸으며,[4] 크게 화제가 되었다. 당시 일간지 한국일보가 고우영 삼국지를 연재 중이었는데, 고우영 화백이 삼국지의 한 장면에 이 누란의 미녀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4. 매체에서[편집]



누란의 미녀를 주제로 한 《KIROREN GUZILI》란 노래도 있다.

일본의 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이 누란의 미녀와 로프누르 호를 주제로 《누란》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줄거리는 로프누르 호 가까이 흉노(漢) 사이에 끼어 있던 실크로드 왕국 누란이 겪은 비극에 대한 것으로, 누란 왕국의 왕이 죽은 뒤 흉노에 인질로 갔던 첫째 왕자가 누란의 왕이 되어 친 흉노 정책을 펴지만 이는 한의 심기를 거스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한은 자객 부개자를 보내 누란 왕을 죽여버리고 자신들이 인질로 데리고 있던 옛 누란 왕의 둘째 왕자(즉 살해 당한 누란 왕의 동생)를 새로운 누란의 왕으로 앉혔으며, 누란이 흉노 땅과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아예 선선이라는 땅으로 나라 자체를 전부 옮기라는 명령을 내린다. 누란 왕국이 선선 땅으로 옮겨가기 전날에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전 왕의 왕비는 자신을 누란의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고, 유언대로 호수가 보이는 언덕 위에 묻어준 뒤 누란 사람들은 모두 고향 땅을 떠났는데, 누란 사람들이 떠난 뒤에 차츰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옛 누란 땅이 잊혀지면서(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늙어 죽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은 애초에 기억이 없는) 호수는 차츰 말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누란 왕국의 옛 땅은 잊혀졌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난 뒤에 이곳을 답사한 탐험가 헤딘에 의해 누란 왕국의 옛 터와 함께 이 땅에 묻힌 왕비의 미라도 함께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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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판하 묘지인데 태양묘로 많이 알려져 있다.[2] 아르메니아 가설에 의하면 켈트족토하라인과 동계로 추정된다.[3] 베수비오 산의 분화로 인한 폼페이의 멸망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유명하다.[4] 당시의 신문은 기준이 지금과 달라서 시신이 그대로 나오는 일도 왕왕 있었다. 불에 타거나 열차 사고로 인해 차체에 끼어 있는 참혹한 시신 사진도 그냥 나오는 판이었는데, 죽은 지 오래된 이런 미이라는 당당히 그냥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