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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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특징
4. 쇠퇴
5. 이후의 여파
6. 주요 작품들
6.1. 1960년대
6.2. 1970년대
7. 주요 감독


New Hollywood
American New Wave

미국 현지에서는 뉴 할리우드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쓴다.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라고도 한다.


1. 개요[편집]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미국의 영화 사조로 1967년 개봉된 아서 펜이 감독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시작점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평론가 로빈 우드는 펜이 이전에 만든 <체이스>(The Chase)[1]를 꼽기도 하지만, 대중적인 파급력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강하다.


2. 설명[편집]


기존 영화들의 관습상 형태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힌 미국의 영화 운동. 당대의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닥친 이후이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강행이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리고 미국 문화가 히피들로 인해 엄청난 격변기를 겪던 시기이기도 했다. 젊은 영화감독들은 이전의 스튜디오에서 줄곧 만들어져 온 꿈과 희망을 담은 영화들보다는 미국 사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영화들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그러한 의식들이 영화에 반영되게 되었다. 이것은 당대에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인권운동, 히피다운 의식, 미국의 베트남 침략전 반대 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가 영화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된다.

젊은 영화 감독들은 존 카사베츠시드니 루멧, 로버트 올트먼, 샘 페킨파, 오슨 웰스 등 뉴웨이브 이전부터 대형 스튜디오와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활동하면서 미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영화감독들을 숭상했으며, 상기한 감독들이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기에 내놓은 영화들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심 스튜디오로는 영화감독 밥 레이펄슨과 제작자 버트 슈나이더가 설립한 제작사 BBS가 있다.

197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발전한 실험성을 띤 영화들을 통칭하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2]와는 다르지만 같은 시기이고,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뉴 할리우드의 영향을 받았기에 이 둘을 나누어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는 미국 현지나 한국이나 똑같다.

메소드 연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사조다.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들, 고전 할리우드에서 주로 다뤄졌던, 선과 악의 뚜렷한 대비와 대결은 등장하지 않는 전개, 그로 인해 결말 역시 해피 엔딩도 새드 엔딩도 아닌 모호한 결말 등등 이 시기의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한 영화들인 1967년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보니 앤 클라이드), <졸업>, 1969년작 <이지 라이더>, <내일을 향해 쏴라>, 1970년작 <잃어버린 전주곡>[3], 1972년작 <대부>, 1973년작 <허수아비>들의 주・조연 배우들이 모두 메소드 연기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3. 특징[편집]


사회 현실을 냉철하고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해피엔딩을 지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은 건조한 촬영 방식들이 영화에 도입되기도 했다. 반사회적이고 반영웅, 쾌락주의적인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경향이 잦았다. 그 캐릭터들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이 영화에 그대로 투영되어 인생을 어둡게만 보아 슬퍼하거나 절망으로 빠지는 결말로 이어지는 영화들이 다반사. 덤으로 상당히 폭력적이고 거친 감성의 영화들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은 영화감독의 권력이 가장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들이었다. 영화의 이러한 특징들은 이전의 스튜디오 중심 체제에서 제작된, 관객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던 미국 영화에 사실주의적 관점을 도입시켜, 미국 영화의 창작에서 스펙트럼을 넓힌 새로운 풍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로드 무비라는 장르를 발명하기도 했다. 당시 비트 문학과 히피로 방랑하는 젊은 사람이 많이 늘었는데 이게 존 포드 같은 전통적인 서부극과 네오 리얼리즘, 누벨바그와 결합하면서 하나의 장르로서 탄생했다.

전체에 걸쳐 동부 뉴욕유럽 영화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기로도 평가된다. 특히 장뤽 고다르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자크 드미아녜스 바르다 부부처럼 아예 잠시 할리우드에서 일하던 누벨바그 영화감독도 있었다.


4. 쇠퇴[편집]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면서 미국 각지에서 벌어졌던 반체제 운동이 저절로 시들해졌다. 또한 히피 운동 등 자유를 넘어 방종에 가까워진 청년문화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해지자 뉴웨이브 영화들은 대중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것과 동시에 <죠스>에서 시작된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공습도 뉴웨이브의 종언에 확실한 영향을 미친다.

뉴웨이브 영화들은 보통 개인이 사회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때마침 록키 시리즈처럼 개인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다룬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타워즈>, <슈퍼맨> 등이 대히트를 치면서 아메리칸 드림, 영웅주의를 다룬 영화들이 부흥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쟁으로 인한 허무감이 끝나고 밝고 희망을 주는 작품들이 인기를 다시 끌게 된다.

예외적으로 뉴웨이브 흐름의 끝자락에 등장한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코세이지, 우디 앨런 같은 영화감독들은 현재까지도 왕성히 활동할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4]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는 '뉴 할리우드'라는 영화 사조를 쇠퇴시키고 "블록버스터라는 상업영화냐? 오스카상이 걸맞은 예술영화냐?"라는 양극화를 할리우드에 가져온 작품들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스필버그는 그 빼어난 연출력에도 불구하고 미운 털이 박혀 오랫동안 아카데미상의 외면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배리 레빈슨 감독의 <레인 맨>은 원래 스필버그에게 처음 제안된 작품인데, 스필버그는 모든 장면을 100% 그대로 똑같이 찍어도 엔딩 크레딧에 감독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면 아카데미상을 못 탔을 거란 푸념을 남기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 관련 매체, 논문, 사이트 등지에서 '뉴 할리우드' 감독으로 분류되는 곳도 있고, 이 사조를 끝내고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든 게임 체인저들로 분류되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이런 엇갈리는 평가들과는 별개로 이 둘의 커리어 초기작인 <청춘낙서>와 <슈가랜드 특급>은 뉴 할리우드를 상징하는 걸작으로 반드시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근데 사회 풍조의 변화 말고도 메이저 스튜디오의 사기에 가까운 행각으로 단물만 쪽쪽 빨아먹히고 버려진 케이스도 많았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데니스 호퍼피터 폰다였는데, 둘 다 <이지 라이더> 붐으로 제작비 지원을 받았음에도 푸대접과 무자비한 편집으로 버림받았다고 한다. 존 카사베츠도 <이지 라이더> 같은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별난 인연>을 만들었다가 다 잘려나갔다고 한다.


5. 이후의 여파[편집]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그라지기는 했지만,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는 이후의 미국 인디 영화 조류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로도 블록버스터 영화와 대척점을 이루는 할리우드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1960년대까지 남아있던 헤이즈 오피스검열 시스템을 벗어나 현재의 미국 영화의 원형이 완성된 시기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한창이던 시절에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하길종[5] 한국으로 귀국 후 <화분>, <수절>, <바보들의 행진> 등 이 흐름에 영향을 받은 영화들을 제작했다. 나아가 이장호, 홍파 등과 함께 영상시대라는 동인을 만들어 한국식 뉴시네마 운동을 전개하려는 노력을 했다.


6. 주요 작품들[편집]



6.1. 1960년대[편집]




  • 1969년
    • 데니스 호퍼 - 이지 라이더 - 이 사조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전형적 작품. 잭 니콜슨이 조연으로 나오며 헨리 폰다의 아들 피터 폰다와 감독-배우 겸업으로 유명한 '히피의 상징' 데니스 호퍼 두 명이 주인공이다.
    • 존 슐레진저 - 미드나잇 카우보이 - 1969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졸업에 나왔던 더스틴 호프만이 여기서도 명연기를 한다. 오늘날엔 안젤리나 졸리의 아빠로 더 잘 알려진 존 보이트와 공동 주연. 카우보이 복장을 한 남창과 그의 포주가 주인공인 작품으로 이들의 슬픔과 비참함을 담담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 샘 페킨파 - 와일드 번치#영화
    • 하스켈 웩슬러 - 미디엄 쿨
    • 시드니 폴락 - 그들은 말을 쏘았다
    • 조지 로이 힐 - 내일을 향해 쏴라 - 이 사조의 경향이 잘 드러난 서부극.


6.2. 1970년대[편집]






  • 1974년
    •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 컨버세이션
    •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 대부 2 - 위의 대부의 후속작. 전작도 위대하지만, 2편은 전작을 넘는 속편이라는 평을 듣는다.
    • 로버트 올트먼 - 우리를 닮은 도둑
    • 로만 폴란스키 - 차이나타운
    • 존 카펜터 - 다크 스타
    • 스티븐 스필버그 - 슈가랜드 특급 - 스필버그의 초기작으로 이 사조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 앨런 J. 퍼쿨라 - 암살단(패럴럭스 뷰)
    • 존 카사베츠 - 영향 아래 있는 여자



7. 주요 감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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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6년작으로 아서 펜 감독, 조슬린과 말론 브란도 남매, 로버트 레드포드, 제인 폰다 주연작. 아서 펜은 이 작품 바로 다음 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찍었다.[2] 대표적으로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알렌 등의 감독.[3] 국내에는 파이브 이지 피시즈란 제목으로 더 유명하다.[4]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는 초기작들에서나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영향이 드러나지 〈죠스〉, 〈스타워즈〉 이후로는 아예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됐다.[5]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UCLA 동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