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향신료/실제 중세시대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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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작가가 직접 참고한 자료들
3. 모티브로 삼은 시기
4. 시대에 따른 배경
5. 언급되는 사건들
6. 중세 상업
7. 중세 생활상
7.1. 식생활
7.3. 문학
7.4. 물품
8. 중세 도시
8.2. 도시의 구조
8.3. 도시의 운영
9. 중세 가톨릭
10. 전설과 미신
11. 그 외
11.1. 중세 이외의 소재를 차용한 설정
12.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판타지 소설 『늑대와 향신료』에서 중세 유럽 시대상이 어떻게 반영 되었는지를 설명한 문서.

작가인 하세쿠라 이스나가 12권 후기에 40~50권에 달하는 관련 서적 및 논문들을 읽어봤다고 언급한 만큼 사전 조사를 치밀하게 준비했고[1][2], 그 때문에 가상의 판타지 세계관을 다루고 있지만 중세 유럽의 문화나 경제 등이 잘 반영되어 있다. 문서 하단에 있는 재현 오류 부분과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간 장면을 제외하면 실제 중세 유럽의 모습 그대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특히나 하세쿠라 이스나는 중세인들이 가진 관념, 개념등도 소설 속에 녹여냈다는 점이 대단 한데 몇가지 예시를 꼽자면
  • 시간에 대해 상인, 도시민과 농노들이 각자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을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슬쩍 이야기 하는 장면,[3]
  • 더러운 성격을 세리에 빗대서 표현하는 장면,[4]
  • 현대 시대에서는 비난 받을 행동인 노예무역(slave trade) 에 대해서 "그건 큰 돈을 벌 수 있는, 필요한 장사니까."라며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크래프트 로렌스의 모습,[5][6]
  • 세이렌의 전설을 인용해 크래프트 로렌스에이브 볼란의 제안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표현하는 장면,[7]
등이 있다.

이런 이유로 늑대와 향신료를 보면서 작가가 곳곳에 집어 넣은 중세 관련 소재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한 편이다. 본 문서에 수록되지 않은 중세 소재들도 있으니 직접 찾아보면 또다른 재미를 느낄수 있을 것이다.


2. 작가가 직접 참고한 자료들[편집]


작가는 16권 후기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이 읽은 자료 중 일부를 공개하기도 했다. 전부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wiki style="margin:10px"
『늑대와 향신료』는 프랑스의 중세경제사학가인 장 파비에가 쓴 『금과 향신료』를 차용했습니다. 1권의 소재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걸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 자료를 읽을 때에도 판타지 소설을 쓰는 사람을 대상으로 나온 책은 결코 읽지 않고, 거의 학술서에 집중했습니다. 중세경제사도 입문서는 읽지 않고, 이해하지 못할 것을 잘 알면서도 전문서만 읽었습니다. 신에 대한 이야기도 세계의 신들에 관한 사전 같은 것은 읽지 않고, 『성경』과 『황금가지』를 읽었습니다. (후략)}}}

늑대와 향신료 16권 작가 후기 中.(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6)』, 서울, 학산문화사, 2012, p.347-348.
[1] 늑대와 향신료 18권 작가 후기에 따르면 원래 '막달라에서 잠들라'를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중 '막달라에서 잠들라'보다는 늑대와 향신료 시리즈에 어울릴 거 같다고 생각해, 연재 종료된 지 4년 만에 늑대와 향신료 18권과 늑대와 양피지 시리즈를 발매했다고 하니, 역사를 얼마나 깐깐하게 검증했는지 알 수가 있다.[2] 작가 본인이 "라노벨을 쓸 때는 참신한 소재와 그에 맞는 사전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전격소설대상 온라인 인터뷰에서 라노벨 지망생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질문에 격려나 조언을 해주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라노벨만 보고 라노벨 쓰려고 하지마라."라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원문은 "유행에 편승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은 버립시다. 라노벨만 읽고 라노벨을 쓰려는 생각도 버립시다.(安易に流行に乗っかるのはやめましょう。 ラノベだけ読んでラノベを書くのはやめましょう。)"[3] 늑대와 향신료 1권 中[4] 늑대와 향신료 4권[5] 늑대와 향신료 6권[6] 심지어 로렌스는 2권에서 빚을 갚지 못해 노예로 팔려 나갈 뻔 했음에도 그런 생각을 이야기 한다.[7] 늑대와 향신료 8권

||{{{#!wiki style="margin:10px"
덧붙여 의도적으로 목록에서 제외한 책이 있습니다. 알려드리고 싶지 않은 책들이 있거든요! 모두가 모르는 정보가 실려있는 책을 발견했다!!라는 것은 작가에게 필요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쓰고 싶은 장르를 위해, 모두가 알지 못한 책을 읽고 조사한다면 누구나 생각하지 못한 그런 창의적인 것들을 써 내려 갈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8]}}}

하세쿠라 이스나. 참고한 도서 목록을 밝히며.
[8] なお、意図的に外している本とかあります。 教えたくない本とかありますので!皆が知らない情報が載っている本を見つけた!!、というのは作家を目指すうえで重要な要素だと思います。自分の書きたいジャンルのことを、皆が読まないような本を読んで調べれば、皆が思いつかないようなものが書けると思いますよ。


*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중세 역사에 반드시 언급되는 책인 《성경》.
* 일본의 중세 독일사 권위자인 아베 긴야[9] 교수의 저서 《독일 중세 후기의 세계[10]》와 《중세의 별 아래에서[11]》.
* 일본 최고의 서양 중세 법제사(法制史)[12] 연구가인 야마우치 스스무[13] 교수의 저서 《북의 십자군-유럽의 북방확대[14]》.
*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 장 파비에의 저서 《황금과 향신료: 중세 실업가의 탄생[15]》.[16]
* 신화학의 고전이라 불리는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저서 《황금가지》.
* 동양인 최초 독일에서 한자동맹 관련 박사 학위를 딴 인물인 다카무라 쇼헤이[17]의 저서 《한자동맹의 경제사 연구 - 서양 중세 도시 연구》[18]
*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1982년 알렌 슈버트 문학상을 수상한 오토 보르스트의 저서 《중세 유럽의 생활상[19]》.
*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바우만(Reinhard Baumann)의 저서 《독일 용병의 문화사[20]》.
* 벨기에 헨트 대학 중세학 교수 루도 J. R. 밀스(Ludo J.R. Milis)의 저서 《천사 같은 수도자와 세속인: 중세 사회에 대한 수도원주의와 그 의미》[21][22].
* 프랑스의 역사 학자 니콜 공티에의 저서 《도시에서의 증오와 화합의 외침, 13~16세기의 폭력》[23]
* 고베여학원대학 전임강사, 아카사카 슌이치(赤阪 俊一)의 저서 《신에게 묻다-중세의 질서, 정의, 시련》[24]
*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명예 교수인 장클로드 슈미트의 저서 《중세의 미신》[25]
* 히로시마대학 인문학 명예교수인 하라노 노보루의 저서 《중세 유럽의 이문화 접촉》[26]
* 여성학 전문가인 에리카 우이츠(Erika Uitz)의 저서 《전설로 남은 훌륭한 여성: 중세 마을과 도시의 여성》[27]
* 동독과학아카데미의 교수였던 한스프리드리히 로젠펠트의 저서 《중세 독일의 후기 문화, 1250년~1500년》[28][29]
* 교토대학법학과 교수였던 우에야마 야스토시 외 3인이 저술한 《마녀사냥과 악마학》[30][31]
* 독일의 중세의학 전문가인 클라우스 베르크돌트(Klaus Bergdolt)의 저서 《중세의 흑사병: 중대한 전염병과 중세의 끝.》[32]
* A. 맥콜의 《중세의 뒷세계-그 허상과 실상》
* 도쿄대학 인문대 명예 교수인 가와나고 요시카쓰의 저서 《시인 예수 그리스도 - 독일 문학에서 본 성경 시학 · 서설[33][34]
* 아오야마가쿠인대학신학과 교수였던 오다가키 마사야(小田垣 雅也)의 저서 《기독교의 역사》[35]

[9] 한국에 번역된 저서로는 "중세유럽산책",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다.[10] ドイツ中世後期 の世界.[11] 中世の星の下で.[12] 법의 발전 과정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13] 히토쓰바시대학 전 총장이자 명예교수.[14] 北の十字軍―「ヨーロッパ」の北方拡大.[15] De l'Or et des épice: naissance de l'homme d'affaires au Moyen âge.[16] 작품의 제목인 늑대와 향신료도 여기서 따왔다.[17] 제11대 게이오기주쿠대학 총장.[18] ハンザの経済史的研究―西欧中世都市の研究[19] Alltagsleben im Mittelalter.[20] Rantsukunehito no bunkashi : ChuÌ„sei makki no sabukaruchaÌ„ hi kokka soshiki no seitaishi.[21] Angelic Monks and Earthly Men: Monasticism and its Meaning to Medieval Society[22] 작가 왈, "중세 수도원과 관련해서는 최고의 책으로 3번 정도 읽었습니다. 중세 수도원과 관련된 다양한 논문이 있지만 그런 것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23] Cris de Haine et rites d'unité, la violence dans les villes.[24] 神に問う―中世における秩序・正義・神判.[25] Les superstitions.[26] 中世ヨーロッパに見る異文化接触.[27] Legend of Good Women: Medieval Women in Towns and Cities.[28] Deutsche Kultur im Spätmittelalter 1250–1500.[29] 작가는 "의식주와 관련된 자료는 이 책이 가장 훌륭했다"고 밝혔다.[30] 魔女狩りと悪魔学.[31] 작가 왈: "이 책을 통해 마녀사냥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32] Der Schwarze Tod in Europa. Die Große Pest und das Ende des Mittelalters.[33]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쓴 대강의 서론적인 해설.[34] 詩人イエス ドイツ文学から見た聖書詩学・序説[35] キリスト教の歴史.

그 외에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36]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신의 나라, 이교도와의 대결(De Civitate Dei contra Paganos)』[37]을 꼽았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자료 중 한국에 정발된 책은 성경, 황금가지이며, 나머지 책들도 출간된 지 오래된 책들이라 원서 구매도 힘들다. 특히 작가 본인이 읽어보고 싶다고 밝혔던 신학대전은 그 방대한 분량 탓에 일본에서조차 번역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판인데다가, 비기독교권 국가에서 본격적인 번역 시도가 이뤄진 것이 한국이 세계 최초일 정도다. 1994년, 번역 소식을 듣고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축전을 보낸 일도 있었을 정도. 자세한 내용은 토마스 아퀴나스 참조.


3. 모티브로 삼은 시기[편집]


작중 언급되는 사건들을 본다면 약 11세기부터 14세기의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 과거 국왕이 눈을 맞으며 교황에게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1077년)
  • 국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도시들이 존재한다.(11세기 이후)
  • 20여년 전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11세기~15세기)[38]
  • 작중 시점에서 북방 십자군이 진행 중이다.(12세기 말~15세기 초)
  • 대륙 전역에 적극적인 토지 개간사업이 발달하고 있다.(12세기 이후)
  • 천재지변이나 전쟁 패배 등으로 기적을 바라며 성유물에 기대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12세기 이후)
  • 상업의 발달로 도시가 활성화 되고, 영주들이 세금을 걷기 위해 설치한 관문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12세기 이후)
  • 교황의 권위가 절정기를 찍고 내려오고 있다.(13세기 이후)
  • 3포제가 남쪽 선진국에서 개발되었고, 2포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14세기)
  • 여러 상회가 연합한 경제동맹체1개 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적이 있다.(14세기)
  • 이탈리아도시국가에서 개발된 환어음이 점차 퍼지고 있다.(14세기 이후)
  • 대항해시대가 열리기 직전이다.(14세기 말~15세기 초)

그리고 작중에서 묘사되는 생활상의 경우에는 작가가 "14세기 독일 지역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위에 기준으로 제시된 사건들을 보면 카노사의 굴욕이나 자유도시의 탄생 등 11세기~12세기 중세 전성기의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작중 이런 사건들은 주로 '현재 진행중인 사건' 이라기보다는 '예전에 그런 일도 있었다'는 과거의 지식으로 다뤄지는 점을 감안할 때, 작중 배경은 상당히 명확하게 14~15세기, 중세 말-근세(르네상스) 정도의 유럽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단순히 구체적인 생활상의 묘사뿐 아니라, 사회적 면모 자체가 꽤 명확하게 14말15초 정도를 모사하고 있는 것. 예를 들어 정점으로 치달았던 교황권이 명확하게 퇴조를 보이기 시작하고, 로렌스같이 각 도시와 영지를 돌아다니는 행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대두하여 상업조합이 영향력을 확장한 것은 교역망 자체가 사실상 붕괴했던 중세 전기나 갓 부활하기 시작한 중세 전성기가 아니라 중세 후기~말기의 특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 망할 놈의 고추감자만 빼고.

그외 늑대와 향신료 1권의 역사 반영 분석 포스팅은 여기를 참고하고, 중세근대의 분기점으로 해석한 리뷰는 여기[39]를 참조. 이곳을 참조해 보는 것도 좋다.##


4. 시대에 따른 배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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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권에서 호로가 "난 약속대로 그 마을의 보리밭을 참으로 훌륭하게 만들었어.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보리가 여무는 것을 나쁘게 해야하만 하는 때가 있었어. 땅에 무리를 시키려면 대가가 필요하거든."이라고 말하자 로렌스가 "최근 남쪽 선진국[40]의 새로운 농법을 서서히 도입하여 생산고를 높히고 있다고 한다."라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2포제에서 3포제로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wiki style="margin:10px"
-1 전근대 유럽의 [[농업]]에서는 윤작, 즉 돌려짓기[* 같은 땅에 여러 가지 농작물을 해마다 바꾸어 심는 일.]가 일반적이었다. 농사를 한 번 짓고 난 뒤 고갈된 [[지력]]을 회복시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이 화학 비료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과거 동양에서 처럼 사람의 분뇨를 [[거름]]으로 이용할 줄도 몰랐다. {{{#!wiki style="margin:24px 0 0 16px;float:right;width:35%;max-width:600px;font-size:.9em;"
[[파일:중세_씨를 뿌리는 농부_삽화.jpg|width=100%]][br]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 中. [[1489년]] 作 }}}사실상 가축의 [[배설물|분뇨]]가 유일한 거름이었는데, 그나마 가축의 수요가 적었던 까닭에 거기서 나오는 거름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따라서 [[휴경지|토양이 스스로 지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경작지로 쓸 수밖에 없었는데, [[고대 로마]] 이래로 가장 일반적인 윤작 방식은 이포제였다. 경작지를 한 해 걸러 한 번씩 농사에 이용한 것이다.

이에 비해 (14세기 초에 개발된) [[삼포제]]는 전체 농경지를 삼등분한 후 두 부분은 각각 봄과 가을에 파종하여 작물을 재배하고 나머지 하나는 1년간 경작을 않고 내버려 두는 방식이었다. (중략) 이와 같이 농경지의 ⅔가 실제 농사에 투입됨으로써 절반만을 활용하던 [[농업 혁명|종전의 이포제에 비해 농작물을 거둘수 있는 토지가 1/6 더 생긴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을 지닌 [[삼포제]]가 [[유럽]] 전역에서 도입된 것은 아니었다. [[삼포제]]는 여름철 날씨가 비교적 습해서 봄 작물의 경작에 유리한 [[프랑스]] 북부와 [[북유럽]] 일대에 주로 보급되었다.
}}}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이영주 옮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알에이치코리아, 2015.
[36] 작가는 "이후 종교개혁을 소재로 한 늑대와 양피지를 준비하면서 찾아봤으나, 너무 난해하고 어려워 일부 파트만 읽어봤다"고 밝혔다.[37] 한국에서는 신국론(神國論)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38] 단, 십자군 원정은 11세기 말~13세기 말까지 약 200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일어났고, 북방 십자군이나 대 오스만 십자군 등 아류 십자군까지 감안하면 15세기 이후에도 십자군 전쟁이라 불릴만한 전쟁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20여년 전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는 서술만으로 '1095+20=1115. 12세기 초반이다' 라고 독해할 수는 없다. 애초에 작중 서술 자체가 '20여년 전 최초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20년 전 대규모 원정이 출격했다' 식으로 나오니 중후기 십자군 원정 기준일 가능성도 크다.[39] 카페 가입 필요.[40] 여담으로 실제 삼포제가 처음 개발된 곳은 카롤링거 제국으로 작중 배경이 중·북유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남쪽 선진국의 모티브는 카롤링거 제국이 확실하다.

  • "내가 북쪽에서 처음 왔을 땐[41] 교회가 빌빌거리는 정도였다"라는 호로의 발언이 등장하는데 이는 서로마 붕괴 이후 가톨릭교회의 지배력이 약했던 시점을 가리킨다.
||{{{#!wiki style="margin:10px"
-1 "교회는 옛날부터 대단했잖아?"
"아니, 아니지. __내가 북쪽에서 여기로 왔을 무렵엔 그렇지도 않았거든.__ 적어도 [[야훼|유일신]]이 12명의 천사와 함께 [[창세기|세상을 만들고]],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를 빌려 쓰고 있다는 그런 과장된 얘기는 안했어.[* 이렇게 보면 [[무신론]]자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무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랑 호로|자신]]이 이교의 신이기 때문.] 자연은 누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대체 언제부터 교회가 [[희극]]을 연출하게 됐나 싶을 정도야."
__가끔 전해 듣는 [[과학자|자연학자]]의 교회 비판과 비슷한 말__이긴 한데, 몇 백 년 동안 풍작을 관장한, 자칭 현명한 늑대가 하는 얘기라 흥미롭다.[* 이 문장만 보면 교회에 비판적인 작품으로 오해할수 있는데, 이 문구는 정교의 세상에 [[늑대와 향신료/정령|이질적인 존재]]인 호로가 말하는 대사일 뿐, 소설에서는 어느 종교가 좋고 나쁘다를 논하지 않는다. 가장 큰 예로 로렌스는 교회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인물이지만 교회에 맹목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이교도가 옳다는 신념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며 ~~사실 로렌스에겐 돈이 하느님이고 종교다.~~ 후속작인 [[늑대와 양피지]]에선 주인공인 [[토트 콜]]은 성직자가 꿈인 청년으로 등장한다.][* 다만 [[하세쿠라 이스나]]는 "하느님은 어째서 [[침묵]]하는가?" 하는 자신의 생각을 늑대와 향신료(5권)뿐 아니라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자신의 다른 작품]]속 캐릭터들의 입을 통해 언급하는 만큼 [[도그마|교조주의]]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하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90.
[41] 작중으로부터 약 수백 년 전.
또한 가끔 전해 듣는 자연학자의 교회비판이라는 대목은 자연철학자[42][43]이 교회의 사상과 충돌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로 호로가 여행을 떠나 정착하고 다시 요이츠로 돌아가는 것이 서로마의 붕괴와 이민족들의 번영, 그리고 기독교의 번성을 나타낸다는 분석도 있다. 엔딩 스포 주의

  • 작중 시점에서는 교회의 권위가 정점을 찍고 내려오고 있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wiki style="margin:10px"
게다가, 최근 교회는 이단심문(異端審問)이나 이교도 개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요사이에는 도시부 교회에서 신학자들과 자연학자들 간에 언쟁이 벌어지는 일도 드물지 않다. 옛날처럼 모든 민중들이 무조건적으로 교회 앞에 넙죽 엎드리는 일은 없어졌다. 절대적이었던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22.
[42] 현재의 과학자 정도로 보면 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등이 있다. 과학자와 다른 점은 자연 물리학을 관측하지만, 오로지 과학적 이론에 근거하는 현재의 과학자들과는 달리 철학적, 종교적인 개념도 활용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주장한 이유도 과학적 이유뿐 아니라 "천동설에 따르면 태양과 행성들의 움직임들이 쓸데없이 복잡한데 하느님께서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라는 철학개념에서 시작했다.[43] 또한 지금 관념에서는 과학자라고 취급되는 위인들도, 당시에는 스스로를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라고 자칭했다. 아이작 뉴턴이 대표적. 애당초 과학(Science)과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는 19세기에 윌리엄 휴얼이 자연철학이라는 말이 너무 뜻이 심원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지식의 탐구자(Scientist)라고 불려야 한다고 해서 제안된 단어다. 또한 이 19세기를 전후하여 철학적 색채가 많이 빠져나간 자연철학이 자연과학이라는 분야로 정착되며 지금의 과학/과학자라는 단어가 세상에 정착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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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무조건 세상의 중심이었던 시대는 지나려 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남쪽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4)』, 서울, 학산문화사.

||{{{#!wiki style="margin:10px"
요즘 세상에는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 그 저력은 쇠약해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어딘지 모르게 받았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0)』, 서울, 학산문화사.
이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44]와 세속 군주의 성장, 흑사병[45]으로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던 13세기 이후 교황의 권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교황이 세금이 생각보다 걷히지 않아서 대성당의 복구비를 국왕에게 떠넘겼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중세 교회가 돈을 뜯어내는(...) 방법을 묘사한 것이다.
||{{{#!wiki style="margin:10px"
교회에 대한 불평불만은 많았으나 뭐니 뭐니해도 가장 심한 불만이 쏠린 것은 교회의 재산이었다. 그럼에도 교회는 국왕들로부터 해마다 공납금을 거두고 있었다. 사교(司敎, 사제)[46]들도 취임할 때는 교회에 취임료를 바쳐야 했다. 교회당의 건립, 내부 장식, 걸인 구제, 전쟁, 그 밖의 무수한 일을 구실 삼아 교회는 갖가지 방법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다.[47]}}}

이영수, 「루터 종교개혁의 원동력」, 『독일학연구』, 제18권, 2002, pp.129-142, p.130.
[44] <늑대와 향신료>에서는 성지를 탈환하는 십자군은 이미 중단된 상태고, 이교를 정벌하기 위한 북방 대원정이 진행중이나 지지부진한 상황으로 묘사된다.[45] 작중 주인공들의 이야기에서는 등장하지 않으나 노라 아렌트 외전에서 "역병이 돌아 인구의 절반이 사라진 도시"가 언급된다. 또한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흑사병이 언급된다.[46] 일본 천주교회에서 주교를 가리키는 말. 한국 천주교, 정교회, 대한성공회에서는 주교라고 한다.[47] 물론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주교와 사제가 취임료를 바치는 일도 없고, 헌금 명목도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개신교다.

  • 작중에서 시대에 따른 계급의 변화도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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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젊었을 적에는 새로운 땅을 향해 진격하는 것은 영주와 그가 이끄는 기사인 귀족들의 역할이었지요. 그러던 것이 어느새 귀족은 기사가 아니게 되고, 왕은 성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48] 우리 용병들이 돈에 고용되는 빈도가 몇 배는 많아지고, 고용주는 각지의 왕에서부터 큰 도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부자 귀족들, 대상인들이 되었습니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5)』, 서울, 학산문화사.
[48] 물론 일반적이지 않은 설명으로 다는 아닐지라도 18세기까지 나폴레옹처럼 친정을 한 황제나 왕이 있었고, 귀족들도 대검 귀족 가문이라면 장교로 복무했다.
11세기말~13세기 중반에는 봉건제 영주를 따르는 기사들이 있었고, 기사는 가문이나 혈통에 주어지는 계승 직위가 되기 시작하면서, 기사라 것이 준귀족화 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기사는 기사로 태어나는 것, 또는 군주가 하사하는 것이 된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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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독립 성주의 시대에는 사회관계가 기사와 농민으로 재편되며, 노예와 명사라는 표현이 사라진다. 기사는 토지 영주권(Seigneurie Foncier(세뇌리 퐁시에), 공권 영주권(Sei-gneurie Banale(세뇌리 바날)을 행사하는 전사로 존재하며, 일종의 카스트가 이루어진다. 13세기 초에 이르면 신분 질서는 혼란되며, 부자들이 기사가 되기도 하고, 기사도가 출현하면서 귀족 혈통이 세습되고 폐쇄된다.[50]}}}

『사료로 읽는 서양사 2 중세편: 게르만족의 이동에서 르네상스 전야까지』.
[49] 국왕이 하사한다는 부분을 정확히 말하면 지위를 직접 내리는 것이 아니라 봉토를 주거나, 과거 미망인 등 봉토를 가진 여자와 결혼을 주선해주는 방식을 취했다.해당 포스팅을 참고.[50] 상기한 13세기 중반에 기사가 준귀족화했다는 서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둘 다 사실이라서 그렇다. 11세기 이래로 기사가 '고귀한 신분'과 결부되는 개념은 계속 이어졌으나, 어디까지나 법적인 신분 자체는 자유민이었기 때문이다. 고귀한 신분이란 개념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정해진 바는 12세기 말까지 없었다. 때문에 기사 계급이 세습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군주들의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서 '저급한 신분'인 부르주아들이 기사로 서임되는 일은 끊임없이 있었고, 그런 신분 질서의 혼란이 절정에 이른 13세기 초중반부터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되는 것을 볼 수 없던 귀족들에 의해 기사를 포함한 귀족 계급이 법적으로 세습되는 것으로 고정된다.
이렇게 되자 십자군 전쟁, 백년전쟁을 거치며 국왕이 땅을 가진 이들에게 기사가 되라고 강요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는데, 목숨을 바치는 것이 두려운 귀족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거부하며 반대 급부로 돈을 주고 사는 용병이 군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품에서 언급되듯이 상당히 높아지게 된다.중세: 왜 ‘용병’ 인가? #1

  • 1권에서 최근 파슬로에 인근 귀족들이 땅으로 돈을 불리는 것에 재미를 들렸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 또한 11세기 부터 중세 서유럽의 귀족들이 지주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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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서유럽 심장부의 기원은 프랑크족의 유산이었다. 그것은 남부에 비해 더 적은 수의 도시를 가지고 있었고 그 도시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파리 같은 정착지는, 이를테면 밀라노와 같은 곳 보다는 상업의 몰락이 덜 괴로웠던 곳이었다. 삶은 토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귀족은 지주로 변신한 성공적인 전사였다.}}}

J.M.로버츠, O.A.베스타 저. 노덕경 외 옮김, 『세계사(The History of the World)』, 2015년, p.530.

  • 16권에서 뮤리 용병단과 후고 용병단은 각각 데바우 상회의 전 주인과 현 주인에게 고용되어 짜고치는 싸움을 벌이는데 이때 묘사되는 전투 전황은 실제 14~15세기 용병단의 일방적인 용병의 싸움 방식과 동일 하다. 작중에서 뮤리 용병단과 후고 용병단이 전투를 벌이고 그걸 고용주들이 지켜보는 장면, 하루에 2차례 전투를 벌이는 장면, 일부러 싸우는 척하며 피해를 최소화 하는 장면 등이 바로 그것. 중세 시대에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는 뛰어난 충성심이 있던 것으로 유명한 스위스 용병이 당시에 가장 인기있던 용병이었던 것도 당시 용병들의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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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치적 사정이 프리랜서(용병단)가 활약할만한 환경을 조성했다. 15~16세기 유럽 대부분의 전쟁터는 프리랜서들의 무대였다. 하지만 애국심이나 승리에 대한 열정 따위는 10원어치도 없는 이 프리랜서들의 전쟁은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누가 빨리 기동해서 주요 전략적 요지를 점령하느냐에 달렸으며 시일만 질질 끌다가 퇴각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도 양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전면전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제한전(limited war)의 성격이 강했다.[51]}}}

프리랜서는 왜 '용병'이라고 부를까.
[51] 단 모든 용병이 이렇게 짜고 치는 식의 전투는 하지 않았다. 한 예로 크레시 전투에서의 제노바 쇠뇌병들은 고용국인 프랑스 측의 사격전을 경시하는 경향으로 인해 6일 동안 전투지로 이동한 후 보호장비인 파비스를 진영에 놔두고 곧바로 고지대에 위치한 잉글랜드의 장궁병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인해 후퇴해 다시 진영으로 돌아가 파비스를 갖고 오려고 하다가 이를 도주로 규정한 프랑스 기사대에 의해 도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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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세환]] : 우리가 보통 용병 하면 전투가 시작하면 거칠게 싸울꺼 처럼 생각하는데, 물론 그런 용병들도 많았습니다만 14~15세기 때 [[이탈리아]] 용병 같은 경우에는 욕을 많이 먹었어요.
[[허준(게임 캐스터)|허준]] : 대충 싸워서?
이세환 : 왜냐하면 용병은 승리해도 문제에요. (첫째로) 만약에 용병 부대가 승리해서 명성이 올라가면 그 순간 고용주의 가장 위험한 라이벌이 될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용병들이 언제 뒤집어 엎을 지도 모르잖아요. 2번째, 지면 돈을 못받잖아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적당한 선에서, [[전투]]가 마무리 짓는거 였어요.'''
[[허준]] : '''이긴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큰 피해는 서로 없고.'''
[[이세환]] : 이런 예가 있었어요.[*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저술한 『군주론』에서 [[용병]]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언급한 에피소드.] 이쪽도 용병도 저쪽도 용병이 있었단 말이에요. 싸워요. 싸움을 하루에 보통 오전 오후로 나눠서 싸웠거든요. 10시 반쯤? 저쪽에서 고용주가 보고 있으니까 야!! 하고 딱 가요. '''서로가 칼로 맞대는데 "야, 주변 어디가 맛있냐?" 이런 걸 이야기 해요. 그러니까 멀리서 보면 챙챙챙 소리가 나고 하니까 (고용주들이) 아 싸우나 보다, 라고 생각하죠.''' 1시간 반이 지나서 11시 반쯤 됐어요. 그럼 뭐할 거 같아요?
[[윤지연]] : 점심 먹으러 가야죠.
이세환 : 그렇죠. 일단 우리가 점심 먹고 싸우자. 그럼 고용주도 이해해요. 점심 먹고 싸우려나 보다. 한 두시간동안 점심을 먹습니다. 그리고 유럽사람들은 점심을 먹으면서 [[포도주]]가 빠질수가 없잖아요. 술을 마십니다. 그럼 그걸 본 고용주가 화들짝 놀랍니다. "야, 너네 싸워야 하는데 왜 술을 먹지?" 이때 용병 대장이 기가 막힌 대답을 해요.
윤지연 : 이미 승리를 예감했다?
이세환 : 그런 수준 높은 말 말고. "원래 오후 싸움은 술기운으로 하는 겁니다." (웃음) 그리고 오후 3시 반쯤에 (대충) 싸우다가 두어 시간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5시쯤 되면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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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멘터리 전쟁사 94회 전쟁의 패러다임에 변화를 준 용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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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__이번 싸움은 무의미한 전사자를 내지 않고, 적에게도 가능한 원한을 남기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서로의 고용주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묘기다.__ 어처구니없을지는 몰라도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물론 이런 일은 루워드가 혼자 새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다. 용병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수많은 암묵적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돈만 갖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공갈협박이나 회유로 될 일도 아니다.
이것은 용병이라는 삶의 방식에 찬동하는 대다수 인물들의 의지의 결정체다.
(중략)
언덕 저편에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보고 있는 덩치 큰 남자가 (고용주인) 레보넷이리라.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6)』, 서울, 학산문화사. p.164

  • 작중 로렌스가 트레니 은화를 이용한 교섭을 추진하는 메디오 상회의 꿍꿍이를 추리하면서 "국왕은 귀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에게는 특수한 권력이 부여되어 있다."라는 독백을 한다. 이는 중세의 봉건제도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봉건제도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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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국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해도 다른 귀족들보다 재산이나 영지가 많고, 그 위에 국왕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정당성을 주위가 인정하도록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귀족들의 선거를 통해 왕위계승이 이루어 졌다. 이는 프랑스의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아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도 귀족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니 국왕이 다른 제후들과 공동으로 관리하는 국가의 재산을 멋대로 처분할 수는 없다.
따라서 왕가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다른 귀족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국왕의 이름하에 관리하도록 되어 있는 특수한 권력들이다. 바로 광산채굴권, 조폐권, 관세설정권, 시장관리권, 왕국 도시의 시장 임명권 등 ─ 실체가 동반되지는 않으나 쓰기에 따라서는 돈 열리는 나무가 되는 것들이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229-230.

  • 10권에서 가짜 성유물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스토리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며, 12권에서도 성유물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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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성]]되어 [[성녀]]로 인정되면 그 인물과 관련된 물품들은 [[성유물]]이 되어 그 어떤 것이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비싼 값에 팔려 나간다. 거기에 기적을 일으킨다는 평판까지 나면 순례자들이 몰려들어, 교회뿐 아니라 주변 일대까지 윤택해진다. 그러니 자기 영토 내의 성직자를 성인으로 만들고 싶어 애를 쓰는 귀족들이 수두룩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한다.
귀족들 입장에서도 자신이 죽은 후의 행복과 살아 있는 동안의 이익이 걸린 일대 도박이다.
그러다 파산하는 자가 하나둘이 아니면서도 줄을 잇는 것은, 일단 성공만 하면 막대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2)』, 서울, 학산문화사. p.205
중세시대, 혼란했던 시기에서 사람들이 성인의 유물을 소지하거나, 집에 모셔다 두는 등의 행위로 안식을 찾고자 했고 그 때문에 성유물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사회 전체를 뒤덮었었다. 당시 성유물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였나면 지체 높은 관리들 사이에서 성유물을 수집하는 관행이 성행했으며, 종교 개혁을 추진했던 마르틴 루터를 바르트부르크성에 보호해 주어서 끝내 개혁을 완성시키는 데 일조한 작센의 선제 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조차 5,005점의 성유물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출처14] 그러나 당연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진짜 성인의 유물은 매우 한정적이기에, 가짜 성유물들의 제작 및 판매가 이루어지게 된다. 9권과 10권에 언급되는 늑대의 발바닥[52]을 둘러싼 교회, 국왕, 상인 간의 다툼은 바로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 "포도원 소유주는 대부분 귀족인데,"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14세기 쯤부터 교회가 운영하던 포도원 재배가 귀족으로 넘어가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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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이집트인, 그리스인, 로마인이 가장 능숙하게 포도주를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고대의 과학적 발견 중 상당수가 잊히고 말았지만 포도주 제조법만큼은 수도자들의 노력 및 종교와 포도주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에 살아남았다. 1500년대쯤에는 교회가 벌이는 사업의 일환이었던 포도원 재배가 개인이 운영하는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개인 중 상당수가 귀족이었다.}}}

에이미 스튜어트 지음, 구계원 옮김, 『술 취한 식물학자: 위대한 술을 탄생시킨 식물들의 이야기』, 문학동네, 2016년.
[출처14] 종교개혁, 성경 위에 예술을 꽃피우다.[52] 루피마을을 지켜주던 늑대의 발바닥으로 그 늑대는 호로와 마찬가지로 정령이다.

  • 이륜전차, 파성망치, 마창상시합 등 당시의 무기체계에 대한 언급도 잠깐 등장한다. 다만 이륜전차의 경우 중세시대에는 기병으로 대체되어 사실상 경기용으로나 사용되었다.

또한 작중에서 긴 자루 끝에 도끼가 달려있는 무기가 언급되는데 이는 13세기 무렵부터 전쟁터에 등장한 할버드로, 할버드라는 단어 자체가 손잡이도끼, 장대도끼라는 뜻의 중세 저지 독일어 helmbarde와 중세 고지 독일어의 halmbarte에서 따온 것이다.

  • 15권에서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레노스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바우 상회의 부회장인 힐데 슈나우[53]가 새로운 화폐를 만들기 위해 광산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광산 개발 기술이 담긴 금서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이는 중세 독일 지역의 주요 산업 중 하나가 광물을 기반으로 한 광산업이라는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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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독일의 경제는 급속한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독일은 광업과 금속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며 금융분야에서는 이탈리아를 능가했다.(중략) 독일 경제를 이끌었던 분야는 하르츠, 에르츠게비르게, 투링기아 숲, 알프스 등지에 매장되어 있는 광석을 기본으로 하는 광업이었다.}}}

『케임브리지 독일사』
[53] 대륙의 위치도 현재 유럽의 바이에른 지역일 뿐 아니라 힐데 슈나우도 독일식 인명이다.

  • 고대-중세시대 역사서의 일종인 연대기를 저술하는 작가들의 존재가 여러번 언급된다. 크멜슨연금술사이자 연대기 작가인 디아나 루벤스, 레노스의 연대기 작가이자 시참사회 서기인 리골로 데드리는 주요 조연급으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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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시 이 마을에 연대기 작가 있어?"
그 말에 마르크의 눈이 동그래진다.
"연대기… 작가? 마을의 일기를 주절주절 쓰는 놈들 말이야?"
교회나 귀족들에게 보수를 받고 마을이나 지역의 역사를 글로 기술하는 이들이 연대기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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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3)』, 서울, 학산문화사. p.64
실제 중세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연대기 작가들[54][55]이 있었으며 이들은 전설을 비롯한 당시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록해 남겼다. 호로전설속 고향인 요이츠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 로렌스가 연대기 작가들을 찾아 다니는 것도, 연대기 작가인 디아나 루벤스호로전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도 이를 근거로 한 설정이다.[56]

  • 호로가 파치오에 들어서기전 로렌스로부터 사람이 많은 도시라고 말하자, "내가 아는 도시는 이 정도로 크면 왕이 있었어."라는 발언을 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시절의 폴리스와 같은 도시국가들이 있던 시절을 의미한다.

  • 중세 유럽의 작위도 등장한다. 공국의 수장을 대공이라 부르는 점과, 영토를 가진 영주중 가장 높은 등급인 후작등의 설정이 바로 그것.[57]

  • 양치기를 두고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한다는 내용은 고대~중세에 양치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묘사한 것이다. 중세의 양치기들은 마을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고, 도시에 위치한 길드의 경우에는 특정 직업출신 및 그들의 자녀 기피했는데 이중 방앗간치기, 세리, 광대와 더불어 양치기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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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은 불가사의한 능력에 속했는데 이런 식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중세 문화사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로 중세 사회에서 마녀나 유태인처럼 차별을 받던 존재들은 공동체에 필수 불가결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보인 반면 그렇기 때문에 유사시에 통제 불가능할 것이라는 공포심을 심어주었고, 그 때문에 마치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처럼 언제든지 추방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런 직업군에는 사형 집행인이나 양치기, 또는 물레방아를 관리하는 방아꾼 같은 부류가 속했다. 양치기나 목동에 대한 중세인들이 품었던 신비주의는 상당히 흥미롭다. 중세인들에게 자신이 속한 마을이라는 곳은 소(小)우주였는데 이 소우주 바깥에 대(大)우주가 존재한다고 중세인들은 믿었다. 대우주는 소우주로 들어올 수 없는 괴물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양치기는 소우주를 지배하는 질서에 속하면서도 무서운 대우주로 나가서 양을 치거나 간혹 늑대에 맞서 싸움을 벌이는 존재였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하는 양치기 소년에 대한 우화는 바로 이를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다. 양치기는 유용하고 필요한 존재지만 때로는 신뢰하기 어려웠다.}}}

이택광 지음, 『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자음과모음, 2013년
[54] 대표적인 인물로 1137년에 아서 왕 전설의 초창기 버전을 포함한 연대기인 "영국 왕의 역사"를 저술한 몽마우스의 제퍼리, "프랑크 제국사"를 저술한 수도자 그레고리오, "성속(聖俗) 두 나라의 연대기"를 저술한 독일의 오토 폰 프라이징 등이 유명하다.[55] 여담으로 유명 연대기들 중에서 영화로 유명한 베오울프영국실록인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처럼 작자 미상인 연대기들도 있다.[56] 참고로 중세시대의 연대기(Chronology)적 서술방식은 현재의 연대기적 서술방식과 달랐는데 "기독교 역사가들은 성경 중심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속세의 연대기를 창출해냈다."라는 말처럼 인간 중심이 아닌 성경 중심의 저술방식이었기 때문이다.[57] 꽤 자주 등장한다. 한가지만 예를 들자면 밀로네 상회의 주인이 남쪽 상업국인 라온딜 공국 제33대 라온딜 대공이 공인한 대 밀로네 후작이 경영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남쪽 상업국이면서 공국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지지도자인 도제(Doge)와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만 도제는 귀족들의 투표로 뽑는 직책인 반면 대공은 교황이나 황제가 하사하는 직책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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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하는 도중에 양치기를 만나게 되면 나그네는 2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__하나는 [[양치기]]의 기분을 해치지 말 것. 또 하나는 로브 속에 있는 것이 악마가 아닌지 잘 확인할 것.__
그런 알 수 없는 주의사항을 떠올리게 하는 양치기는 행상인보다도 한층 더 외로운 직업이다.
이 휑뎅그렁한 초원에서 양치기견만 데리고 양떼와 함게 이동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저들은 일의 성격상 제대로 된 사람으로 여기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로지 홀로 몇날 며칠이고 초원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동물을 데리고 다니면서 한 손에 지팡이를 든 채 뿔피리를 불어 동물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모습을 보면 '''[[이교도]]의 주술사를 쉽사리 연상하게 된다.'''
__여행하는 도중에 양치기를 마주치게 되면 대지의 정령에게 가호를 받아 일주일 동안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대신, 악마가 변신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자칫하면 양치기가 거느리고 있는 양 속에 영혼이 봉인되는 수도 있다고 전해진다.__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p.90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로마제국기

  • 귀족들이 가문의 문장으로 독수리를 많이 쓴다는 언급을 하는데 이는 실제 13~14세기 독일 지역의 귀족들이 가문의 문양을 만들 때 독수리를 집어넣은 것을 의미한다. 고대 로마의 상징 동물이 독수리였고, 이후 이름은 로마이지만 고대 로마와는 전혀 상관 없는 신성 로마 제국이 독수리를 황실 가문의 상징으로 사용하면서 이후 귀족들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관련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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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여튼 저놈들은 간이 큰 건지 작은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귀족들의 문장에 독수리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일지도 모르지."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2)』, 서울, 학산문화사.
"(중세 최강의 국가의 상징인) 독수리를 베껴 쓰는 놈들은 간이 크다."는 로렌스의 발언은 이런 중세 시대의 분위기와 유행을 반영한 대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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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북방 지역은 북으로 가면 갈수록 양질의 보석을 채취하기가 어려워지고, 큰 건물이라도 목조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북방 지역의 교회에서는 색유리로 그린 성인이나, 기둥머리에 새겨진 조각상 같은 것은 보기가 힘든 대신, 교회의 가르침을 포교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림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이 크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2)』, 서울, 학산문화사. p.89

  • 로렌스가 독보리와 관련해 인간의 탐욕을 바라보며 "악마는 악한 짓을 해서 악마가 아니다, 악마는 나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라는 발언을 한다. 이는 고대로부터 인간의 삶과 종교에서 악마라는 악한 존재가 탄생하게 된 이유를 요약한 것이다.

<악마의 탄생>이라는 책을 저술한 19세기 과학철학자 폴 카루스는 "고대인들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각종 재해를 바라보며 악마라는 존재를 탄생시켰고, 이것이 이라는 개념과 종교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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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역시 신과 똑같이 인간 경험의 실재적인 부분을 상징하고, 양자 모두 제도화되고 인격화된 존재들이다. 신과 악마는 인간의 마음이 창조해 낸 것이지만, 악마가 단순히 악의 상징일 뿐이라고 해서 악이 덜 실재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폴 루카스 지음, 이지현 옮김, 『악마의 탄생 : 선에 대한 끝없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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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마가 독보리를 넣었건 누군가 악의를 품은 자가 넣었건, 재앙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원인을 캐고 싶어 한다.
악한 짓을 해서 악마인 것이 아니다. 나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악마인 것이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4)』, 서울, 학산문화사.

  • 각 국가별로 숫자 표기법이 다르다는 대목은 실제 중세 초까지 각지역별로 숫자를 표기하는 방법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것은 1202년 레오나르도 피보나치가 유럽에 이를 소개하면서 부터였고 이것이 일반화 된것은 수세기가 지난 후였다.


5. 언급되는 사건들[편집]


늑대와 향신료를 보면 실제 유럽사에서 벌어졌던 사건들도 약간 변형해서 등장한다.
  • 과거 성지를 손에 넣기 위해 제후들이 들고 일어난 전란의 시대가 있었다고 나오는데, 이는 십자군 전쟁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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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년도 더 전에 온 세계에 불어 닥친 대전(大戰)의 열기 속에서 용병 비스름한 일을 했었지. (중략)"
"그건…. 구두 짓는 직인부터 양치기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무공을 꿈꾸었다는 전란 시대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크래프트 로렌스|로렌스]]가 술을 홀짝이며 말하자 프리드는 "오."하는 표정이 되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어떤 불모의 대지조차 [[예루살렘|그곳]]을 손에 넣기 위해 [[십자군 전쟁|제후들이 무기를 손에 들고 고군분투를 했다는 시대]]의 이야기일세."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7)』, 서울, 학산문화사. p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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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튼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진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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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 호로의 고향인 요이츠와, 토트 콜의 고향인 피누가 위치한 북쪽 지역은 이교도의 영향 세가 강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십자군 침공 이전의 동프로이센 지방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리투아니아는 고대부터 발트 신화다신교를 섬긴 나라로, 신 중의 신인 페르쿠나스(Perkūnas)의 숭배는 리투아니아에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1389년까지 지속되였다. 이런 모습에 당시 유럽에서는 리투아니아를 이교도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고, 십자군 원정 이후 갈 곳이 없어진 독일계 기사단들이 폴란드 국왕의 요청으로 발트 해 해안선을 따라 원정을 감행해 이교도들을 정벌하였다. 대표적인 기사단이 바로 튜튼기사단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으로, 그들은 폴란드 북부 해안의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강력한 기사단 국가를 건설하여 러시아까지 쳐들어갔다.[58] 또한 튜튼 기사단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이교도들에 대해 패악질을 저질러 교황으로 부터 "님들 자제 좀;;"이라는 특사를 받기까지 하는데, 작중 토트 콜의 피누 지방에 대규모 정교인들이 찾아와 협박하고 본보기로 이교인들을 살해하는 등 잔혹한 행동하는 것의 모티브가 된다.

이들의 막강한 공격과, 무지비함 때문에 끝까지 다신교를 포기하지 않았던 리투아니아도 결국 폴란드 왕국과 연합하여 기독교로 개종[59]한다. 여담으로, 튜튼 기사단은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궤멸당한 후 폴란드의 신하가 되어 세속 국가로 국체를 바꾸는데, 그것이 훗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연합해 발전을 거듭하여 독일을 통일하게 되는 프로이센 공국이며, 그들을 따라 동쪽으로 이주했던 수많은 독일계 주민들은 먼 훗날 거대한 비극을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된다.[60]

  • 섬나라인 윈필 왕국의 주요 수출품이 양모이며, 동전을 적극적으로 수출·입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12세기 잉글랜드의 주요 수출품은 양모와 농산물이었으며, 주요 수입원은 화폐제조 등에 사용되는 이었다.[출처1] 영국 왕실은 이를 통해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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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럽 시장에서는 영국산 양모가 단연 최고로 여겨졌는데, 이유는 영국의 습하고 비가 많은 기후 덕분이었다. 최고급 영국산 양모, 즉 상등품 가운데에서도 최고급 품질의 양모는 얼굴에 기름기가 잘잘 흐르고 홍조를 띈 영국의 수도자들이 사는 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 -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58] 정교회를 믿던 러시아를 개종시키기 위해서였는데, 결국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이끄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군대에 패배했다.[59] 참고로 리투아니아그리스도교 문화가 스며들고, 발달하면서 생겨난 직업이 바로 딥디르비.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60] 결국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의 여러 정부에서는 독일인들을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으로 추방시키게 되어, 현재 동유럽에는 극소수의 독일인만이 남아 있다.[출처1] 『금융으로 본 세계사』

  • 또한, 윈필 왕국의 국왕이었던 스폰왕[61]이 브론델 대(大) 수도원이 관리하던 양모 무역권을 박탈해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 장면도 실제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삼았다.
    • 브론델 대(大) 수도원 양모사업을 벌인 것은, 중세 수도원들이 포도원 혹은 양모사업을 이용해 부를 축적했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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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켄들은 양모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또 중세시대에는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지역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수도원들도 주로 양모를 이용해 부를 쌓았다.}}}

『영국 양치기의 편지: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61] 윈필왕국의 건국자인 윈필 1세의 손자라는 설정이 붙어있다.
  • 잉글랜드존 왕은 나라의 양모 수입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양모를 보유한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패악질을 저질렀다.[62] 결국 영국의 주교들은 존 왕을 제명했고 이에 분노한 존 왕이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하기에 이른다.[출처1] 그리고 참다 못한 성직자들이 귀족과 손을 잡고 만든 게 바로 마그나 카르타

  • 10권 25P에는 '교회의 총본산에 앉아 있는 교황이 속세의 황제와 대립하고 있던 시절에는 황제를 눈이 펑펑 내리는 들판에 사흘간 내버려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상대가 상인이라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1077)'이다.

  • 에필로그 이후 9년 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18권 시점에서는 대항해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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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가는 도중에도 가끔 나무들 너머로 강이 보일 때마다, 떠내려가는 통나무가 눈에 띈다. 온천에 몸을 담그러 온 나무꾼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요 수년 동안 목재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저 나무들도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배의 재료로 쓰일 거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먼 바다까지 가게 될 것이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8)』, 서울, 학산문화사.
[62] 심지어 은접시나 은젓가락도 가져갔다.[출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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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한자동맹 참가 도시들과 주요 교역로
  • 작중에 당대 최강의 경제 연결체인 루윅 동맹이 등장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무역을 방해한 국왕의 군대를 탈탈 털은 적이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루윅 동맹의 모티브인 한자동맹1426년덴마크에리히한자동맹 소속 무역선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토인 준트를 지나갈 때 통행세를 요구하자 선전포고를 한 사건[출처11]이 모티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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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루윅 동맹이 자신들의 군선을 동원해, 무역을 방해해 온 국왕의 군대를 격파한 적이 있었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5)』, 서울, 학산문화사.
[출처11] 『이야기로 읽은 부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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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원정에 참가한 고명한 기사단이 이교도들의 군대에게 고전을 하고 있을 때였어. 하늘에 붉게 물든 해질녘이 가까워지자, 이젠 한계로구나 하며 지휘관이 퇴각 명령을 내리려는데 돌연 전장 일대에 그림자가 진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든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봤대. 새하얗고 [[십자가|거대한 교회의 문장]]이 온 하늘 가득 펄럭이고 있는 모습을."
(중략)
"맞아. 지나가던 새 떼였어. 하지만 기사단은 '기적을 보았으니 질 리가 없다'면서 사기충전했고,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의 몇 시간 사이에 상황을 뒤엎어 그 싸움에서 이기고야 만 거지. 그 이후로 그곳에 생겨난 나라의 깃발은 그때의 모습을 따서 붉은 천에 흰 교회의 문장을 넣게 되었고, 이로써 기적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메데타시 메데타시|경사로세, 경사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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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2)』, 서울, 학산문화사. p145~146

  • 카테리나 루치라는 수녀가 성전을 번역하던 중 어느 주교구의 주교가 빌려달라는 요청에 번역본을 건네주었는데 기한을 넘긴 후에도 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는 중세 인문학자이자 필사 장인이었던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hiolini)가 1417년에 발견해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의 필사본을 당대 유명 필사장인이자 부유한 귀족이었던 니콜로 데 니콜리(Niccolò de' Niccoli)에게 빌려주었는데 니콜로 데 니콜리가 시간을 끌며 돌려주지 않았다는 에피소드를 차용한 것이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작가의 다른 작품인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의 주요 스토리라인으로 차용된다.

6. 중세 상업[편집]



6.1. 무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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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여자 행상인을 그린 삽화

  • 크래프트 로렌스를 비롯한 다양한 행상인들이 등장한다. 로렌스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 혼자서 다니기도 하고, 무리를 지어 다니기도 했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여행상인(travelling merchant)과 대상(carovana)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로렌스의 최종 꿈이 자신만의 가게를 가지는 것인데 이는 중세 중기부터 행상인들이 정주상인으로 변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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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전형적인 이탈리아 상인은 상품을 가지고 지중해 전역을 돌아다니는 여행상인이었던 반면, 중세 말의 일반적인 이탈리아 상인은 본토에 머물면서 해외시장에 대리인을 보내 국제무역을 관장하는 정주상인으로 변모했다. 그런 점에서 중세 말 정주상인의 사업 패턴은 오늘날 무역상사의 그것과 여러 면에서 유사할수 있다고 말할수 있다.}}}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 14권에 용병단에 물자를 보급하는 상인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 전쟁터에서 물자를 담당했던 주보상인(酒保商人)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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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론은 __물자를 운반하는 등의 수송대 역할을 맡고 싶어 하는,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상인들__에게 용병들을 알선해 주고 있지요."
물자 보급 담당자는 용병들 입장에서는 심장과 같을 만큼 중요한 위치이니 제3자에게는 가능한 감추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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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4)』, 서울, 학산문화사.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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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병참은 전투력 유지의 근본이다. 병참은 군대에서 필요한 물자를 관리하고 보급하는 군사 행위다. 하지만 그 무렵 군대는 이러한 병참을 직접 챙기지 않고 외주를 주어 이를 하청업자들에게 맡기는 형태였다. 그리하여 빵과 고기, 술 등의 조달과 배분은 민간업자인 주보상인酒保商人들이 맡았다. 주보상인은 이러한 병참뿐만 아니라 무기, 탄약, 갑옷 등과 함께 생활에 필요한 잡화도 취급했다. 그리고 각종 약탈품을 싸게 매입하기도 했다. 전투가 끝나면 병사들에게 주점이나 도박장을 열어주고, 요리, 세탁, 제봉, 간호를 담당할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필요시에는 병사들에게 위안부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5: 중상주의를 꽃피운 유대인들 근대 유럽 경제사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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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세환]] : 용병들을 항상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무기에서 부터 여흥까지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허준(게임 캐스터)|허준]]: 유흥 [[에이전시]](agency) 같은..
(중략)
[[임용한]] : 용병들이 왜 자꾸 약탈을 하다보면, 원정을 하면 수레들이 따라오거든요. 제일 중요한게 식량이거든? 이게 보급을 해주면 괜찮은데 전쟁터라는 게 보급이 꼭 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럼 따라다니는 상인들에게 사야 해요. 
[[윤지연]]: 그럼 부르는 게 값이겠네요.
임용한 : 그렇죠. [[바가지(경제 용어)|50배가 기본이에요.]]
이세환 : 그런 상인들을 보통 주보상인이라 불렀는데 이 상인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있습니다. "원 스탑, 올 서비스(ONE STOP, ALL SERVICE). 무기, 식량, 잡화까지 모두 다 댄다."
}}}

토크멘터리 전쟁사 94회 전쟁의 패러다임에 변화를 준 용병1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547657.jpg

  • 작중 도시 간을 오가는 행상인들로 인해 무역이 이루어 지고 있음이 잘 드러나는데, 실제 12세기의 중세 유럽은 원격지 무역의 발달로 행상인들이 도시 간의 거래를 본격적으로 활성화하기 시작했으며, 이 덕에 생산지와 소비지가 구분되는 시기이기도 했다.[출처4] 또한 로렌스가 곡물이나 병구류, 청어, 가죽등을 자신의 전담 도시들을 오가며 거래하는 모습은 곡물과 소금, 포도주 같은 지역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상품들은 전담 상인들에 의해 도시 간 이동 및 거래가 이루어진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소금이 내륙에 점차 이동되던 시기도 바로 이때로, 1권 첫 부분에서 고급 담비[63] 과 교환한 것이 바로 소금이었다. [출처1] 소금은 당시에 매우 중요한 교역 물자였는데, 거의 1,000여 년간 경제도시로 군림했던 독일의 뤼네베르크(Luenburg)는 956년부터 소금이 도시의 주요 수입원이었는데 1276년경에는 소금무역으로 전성기를 이뤘을 정도다.[64][출처9]

  • 5권과 6권에 주요 거래품목으로 나오는 모피는 중유럽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다. 주요 거래는 북유럽플랑드르를 통해 이루어 졌으며[출처12] 이들 지방에서는 모피의 수요가 부족한 상황이 발생하면 난감한 경우도 발생하기도 했다. 이슬람의 성장과 스페인의 무역실패 등으로 인해 무역이 일시 정지되었던 11세기에는 고급 모피였던 담비 털을 구하지 못해 왕실에 까지 상대적으로 낮은 품질이었던 토끼털을 사용했다.[출처2]

  • 6권에서 동전을 실어 나를 때 정해진 규격의 상자를 사용한다고 언급되는데, 실제로 중세에 동전뿐 아니라 거래물품을 운반할 때는 정해진 규격의 나무통을 사용했다. 규격을 정한 나무통은 운반이 쉬운 데다, 세금을 측량하기에도 알맞았기 때문이다. 독일 뵈멘 지방에서는 동물이나 소금을 실어나를 때도 나무통을 썼을 정도.[65] 1500년대에 들어서는 해마다 28,000개의 큰 소금 나무통을 실어 날랐고, 1620년에는 연중 70,000개의 나무통이 실어나갔다.

파일:external/www.alte-salzstrasse.de/57f5ee2a0f.jpg
중세 유럽의 소금길
  • 당시 행상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2가지로, 하나는 정비가 되지 않아 지나치게 울퉁불퉁한 도로, 그리고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도적 떼와 늑대의 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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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빗기]]를 다룬 그림) 《토비아와 천사》가 불티나게 팔린 배경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비지니스 환경을 알 수 있다. 여행을 거듭해야 하는 상인들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여행길의 안전'이었다. 언제 어떻게 무뢰한이나 도적들이 출몰할 줄 몰랐다. 심지어 친척이 배신하여 돈이나 물품을 훔쳐 달아나는 일도 있었다.
당시에 여행은 금품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며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인들은 《토비아와 천사》를 집에 걸어두고 여행길의 무사 안전을 기원했던 것이다.
}}}

다나카 야스히로 지음,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출처4] 『세계사 속 경제학』[63] 참고로 중세 귀족들에게 인기있던 모피중 하나가 담비였다. 밀로네 상회와 같은 거대 상회에 로렌스가 거래를 청하는 것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출처1] [64] 이후 뤼네베르크의 명성은 항구도시 뤼베크(Luebeck)로 이동했다.[출처9]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출처12] 『하룻밤에 읽는 유럽사』[출처2] 『권력과 부』[65] 참고로 동물을 실어 나를 때는 107파운드(약 48kg)인데 반해, 소금을 실어 나르던 상자의 무게는 144파운드(약 65kg)까지 무게가 나왔다고 하며 만약 12개의 소금 통이라면 약 780kg에 달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소금장수들에는 과 수레가 필요했고 따라서 소금장수들은 기본적으로 돈이 어느 정도 있는 이들이 할수 있는 직업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주들은 세금을 거둘 명목으로 소금길(Salzstraße)을 건설해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신 돈을 받았다. 독일 북부 소금길들은 12세기~16세기 독일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했으며 현재는 중요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출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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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방의 권력자가 만드는 경우도 있다. 길이 나도록 풀을 깎아내는데, 돈이 많은 곳에서는 돌을 깐 위에 목판을 올려놓아 마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물론 그런 길은 공짜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통행세를 내야 하는데, 그런 길에는 도적에 대한 대응도 철저하기 때문에 시간과 안전을 고려하면 오히려 싸게 먹힐 수도 있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p.81

6.2. 금융[편집]


  • 공증인 제도가 언급된다. 이는 실제 중세시대의 공증인(notarii) 제도가 있음을 소개함과 동시에 실제 처벌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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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증인 제도는 글자 그대로 공공기관이 계약의 증인을 서는 제도를 말한다. 하지만 공증인 앞에서 계약을 했다고 해서, 그 계약이 백지화됐을 때 도시의 치안을 지키는 병사들이 그 상대를 잡아가는 것은 아니다. 크게 융성한 도시국가에서도 그런 일은 해주지 않는다. 그 대신 백지화를 당한 쪽은 그 사정을 공증인의 이름하에 소문낼 수 있다. 상인에게 그것은 치명적이다. 특히 큰 거래를 할 마음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타지에서 온 장사꾼이라고 해도, 적어도 그 마을에서는 그 이후로 거래가 불가능해지게 된다. 따라서 장사를 때려치울 작정인 상대에게는 별 효과가 없더라도, 계속해서 장사를 할 생각인 상대라면 매우 효과적이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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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약속이든 구두로 한 약속은 분쟁의 씨앗이 된다. 모든 약속이나 계약은 문서로 기록하여 구체적인 형태로 남겨 놓아 분쟁을 방지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이를 쉽게 손에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증서, 계약서, 장부 등 온갖 기록을 남기는 데 필요한 '종이'는 상당히 비쌌으며 그러한 종이는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비싼 종이 말고 사람들의 '부족한 능력'도 한몫했다. 복잡한 계산은 차치하고 간단한 사칙연산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등으로 사람들은 공증인을 의지했다. 그 당시 공증인은 돈과 관련한 내용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해주었고 필요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주는 역할을 한, 말하자면 오늘날 [[회계사]]와 [[변호사]]의 업무 중 일부를 이행한 존재였다. 그들의 사회적인 신분은 상당히 높았고, 아이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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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야스히로 지음,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 위즈덤 하우스,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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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증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대단히 품위 있는 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지만, 계약에 의해서 굴러가고 특히 소송이 잦았던 (중세 이탈리아의) 문화였던 만큼 그 수는 대단히 많았다. 피렌체에서 공증인으로 일했던 라포 마체이는 팔에 서류 뭉치를 하나씩 끼워든 채 시청으로 몰려가는 600~700명에 달하는 공증인들의 모습을 전한다. "서류 뭉치 하나가 족히 『성서』 두께의 절반은 되었다." 공증인은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해당 지역의 규제 내용을 정하고 마을 선거를 시행하며 각종 항의서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 도시의 정의를 지켜야 할 관료들은 종종 맡은 바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공증인들이 나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하며 어떤 문서가 필요한지를 속삭여 주고 필요한 문서도 작성하곤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주위에 두면 요긴한 존재였다.}}}

스티븐 그린블랫 저, 이혜원 옮김,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까치, 2013년, p.141

  • 1권에서 환어음을 소개하며 "100년도 더 전에 남쪽의 상업국가에서 발명되었다."라고 나오는데 실제로 중세유럽에선 12세기 무렵부터 이탈리아에 위치한 도시국가들에서 처음 탄생한 이래 활성화 된 제도다.[66][출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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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탈리아인들은 근대 회계업무의 중요 부분뿐만 아니라 국제무역의 금융을 위해서 새로운 신용수단을 고안했다. 환어음은 13세기에 등장했고, 환어음과 최초의 진정한 은행가들을 통해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의 근처에 와있다. 유한책임(有限責任)이라는 관념도 1408년 피렌체에서 처음 탄생했다.}}}

J.M. 로버츠, O.A.베스타 공동 저, 노경덕 외 옮김, 『세계사(The History of the World)』, 까치, 2013년, p.661
[66] 동양에서는 이전부터 어음과 비슷한 개념을 이미 활용 중이었다. 9세기 초 당나라에서는 상인과 세금 징수원이 비전(飛錢)이라는, 현재의 어음과 비슷한 개념의 지급 수단을 활용했다. 또한 중세 이슬람 제국에서는 환어음과 수표등의 어음이 화폐 역할을 사용했고, 고려 말에도 저화라는 어음이 활용되고 있엇다.[출처15] 경영학,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경영학 신화에 질문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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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품 거래가 늘면 화폐의 사용과 운반도 자연스레 증가하게 된다. 상파뉴에 온 이탈리아 상인들에게도 화폐로 사용하는 금과 은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본국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수레에 금은을 실어서 운반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현지에서 조달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환換어음'이다.
환어음은 발행지가 아닌 제2의 장소에서 환어음을 소지한 사람에게 환어음에 적힌 액수만큼을 현금으로 지불하게 되는 일종의 명령서이다. 일반적인 어음 거래의 경우 발행자가 지급 의무를 지지만, 환어음 거래에서는 발행인이 지정하는 제3자, 흔히 발행인의 대리인이 지급 책임을 진다. 또한 중세에는 지역마다 다른 화폐를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환거래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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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국 저,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엘피, 2015년.
대표적인 예로 피렌체의 상인들은 프로뱅에서 모직물을 구입하고, 물건 값을 화폐가 아닌 환어음으로 지불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피렌체 상인이 환어음을 발행하면, 프로뱅의 현지 상인이 지정하는 제3자가 수취인이 되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물건값에 해당되는 돈을 제3자가 피렌체 상인의 대리인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 3권에서 페르미 아마티에게 크래프트 로렌스는 신용거래를 제안하는데 이는 중세 중기부터 신용거래가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작중에선 이제 막 퍼지기 시작한 거래방식으로 보인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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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의 거래는 구체적인 '현금거래'였다. 그런데 현금을 노리는 강도들이 많이 출몰하자 유대인들이 이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신용과 유가증권이 그것이다. 신용거래나 어음의 교환은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 가능할수 있었다.}}}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3: 동방무역과 금융업 중세 경제사 上』
[67] 페르미 아마티는 어린 나이부터 시장바닥에서 활동한 유능한 상인으로 나오는데, 로렌스의 제안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

  • 작중에서 고리대금업과 관련된 부정적 인식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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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프도 사다리도 없는 지금, 두 사람이 그 구멍을 올라가는 것은 일단 불가능했다.
마치 '''고리대금업자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득히 먼 것에 절망'''하는 것처럼, 호로와 로렌스는 침묵했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2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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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는 설교 중에 이런 구문이 있어. 그 행위, 밭에 돈을 뿌리는 것과 같나니."
(중략)
"돈은 싹을 틔우지도 꽃을 피우지도 못하지. 돈은 쇠붙이니까 밭을 망쳐서 온갖 작물을 말라죽게 하거든. 요는, 이자를 부정하면서 돈의 악덕을 이야기 한 것이지."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3)』,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92.
이는 실제 중세시대의 인식이었고 제5회 라테란 공의회[68]에서 "그 사용으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아무런 노력이나 비용 혹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얻는 이익"을 고리대(usury)로 정의해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출처15] 이유는 크게 3가지인데,
  • 첫째, 당시 시간과 공간은 하느님의 영역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둘째, 돈을 빌리려던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불행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 셋째, 하느님이 허락한 돈은 인간이 정직하게 일해서 번 돈뿐이었고, 일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돈인 이자는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은 돈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 아테네부터 살인, 강간, 폭력 등의 범죄는 가해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 신물나게 되면 더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고리대금업자의 고리대금은 그렇지 않다고 여긴 풍습이 남아있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그래서 1권에서 "마치 고리대금업자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득히 먼 것에"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처럼 이자를 받는 이들은 천국에 가지 못할 것 이라는 인식이 강했다.[69][70]
당연하지만 자본이 존재하는 곳에 고리대금은 생기기 마련이었고 결국 고리대금을 담당하는 업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 맡았다. 중세시대에는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가톨릭에서 지옥으로 가도 되는 이교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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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가톨릭은 고리대금을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금융이 안 돌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유대인한테 "너네 이거 해."라고 했어요. "니네는 나쁜 놈들이니까 해. 어차피 기독교인이 아니니까."(라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75부 1차 중동전쟁1 中
[68] 1512년~1517년에 개최. 교회 개혁 시도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 끝내 종교개혁이라는 거센 바람을 막지 못했다.[출처15] [69] 중세시대는 기독교 사상이 지배한 시대이기에, 천국을 가지 못한다는 건 엄청난 비난과 같다.[70] 단테신곡(La Divina Commedia)을 보면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당시 중세인들의 인식이 등장한다. 신곡에는 사후 세계로 지옥(inferno), 연옥(Purgatorio), 천국(Paradiso)을 묘사하고 있는데 7번째 지옥을 묘사하는 지옥편 17절을 보면 제일 바깥쪽에는 남과 남의 재산에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중간에는 자살한 자들이, 제일 안쪽에는 하느님과 자연에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있다. 여기서 "하느님과 자연에 폭력을 행사한 자"는 신성 모독자, 동성애자, 그리고 고리대금업자들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불덩이에 고통에 몸부림 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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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시대에 기독교는 상인이 '이자'를 취하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중세 기독교가 이자를 금지했던 까닭은 '시간은 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신의 소우뮬이었기에 거기에서 생긴 '이자' 또한 신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자를 신이 아닌 인간이, 상인이 취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상인들은 '돈을 빌려야' 했다. (중략)
당시에 이자를 '우수라 {{{-2 usura}}}'라고 불렀다. 어느 시대이든 상인들은 돈이 부족한 것이 최대의 고민 거리다. 도적이든 침몰이든 돈이 있어야 걱정할 수 있는 문제다. 상인과 반코에게 이자, 곧 우수라의 금지는 다리에 족쇄를 채운 격이었다. 돈을 빌리고 싶은 상인, 그리고 빌려주고 싶은 반코. 그 사이에 가로놓인 기독교의 규율. 현실에 타협할 것이냐, 원칙을 지킬 것이냐. 그들은 머리를 쥐어 뜯을 수 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융자 거래는 '이자와 관계가 없다.'는 논리를 쥐어짜냈다. 융자의 대가로 받은 돈은 '다른 곳에 사용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한 보상이라고 설명했다.(우리가 '기회손실'이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이 '잃어버린 기회에 대한 보상'은 우수라와 구별해서 '인터레세 {{{-2 interesse}}}'라고 불렀다. 이 인터레세가 '인터레스트 {{{-2 interest(금리)}}}'의 어원이다. 참 놀랍게도 '인터레스트'는 이자를 위장하기 위한 억지소리에서 비롯되었다.
반코는 환전과 환어음 서비스에 융자 서비스를 조합한 뒤 '이것은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얼버무렸다. 당당하게 이자를 받지 못하다 보니 선소리나 속임수가 횡행했던 것이다. 이자, 곧 '우수라'의 금지는 빌려주는 쪽 뿐 아니라 빌리는 쪽에게도 상업 활동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었다.(중략)
기독교는 대외적으로 '이자'를 취하는 행위를 금지하면서도 그것을 '천한 유대인이 해야 할 일'이라며 억지로 유대인에게 떠넘겼다. 유대인은 직인 길드에 들어갈수도 없었고, 교역을 할수도 없었다. 국가는 돈을 빌려 주는 일을 유대인에게 떠넘기는 등 교묳게 그들을 이용했고 때로는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 다만 16권에서 "교회는 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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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들은 이 은화가 자라, 새로운 은화를 낳는다고 했다!"
로렌스는 창틀에 매달리는 것을 포기하고 바닥에 내려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허나, '''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은화는 은화이니까. 만약 은화가 무언가를 낳는다면, 그것은...."
로렌스가 중얼 거리는 것에 맞춰 호로가 목청 높이 외친다.
그것은 마치, 일하는 가게에서 호객을 하는 간판 아가씨 같았다.
"낳는 게 있다면, 그것은 이자다! '''교회는 이자 같은 건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의 이름을 사칭하는 도적놈들! 당신들의 목적이 무어냐?! 교회의 분노를 일부러 사서, 죄 없는 이 땅에 공격해 들어와 모조리 멸망하게 할 작정이냐?!"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6)』,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318~319.
고리대금과 이자의 개념은 별개의 것으로 중세시대에는 이자는 허용하되 고리대금은 허용하지 않았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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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교환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돈을 빌려 주고 이자(usury)를 받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파는 것이며, 이는 정의에 반한다. 포도주를 돈을 받고 팔았는데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마시는 것)에 대해서 또 돈을 받는다면, 이는 두 번 돈을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팔고 돈을 받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돈을 빌리는 것은 돈을 사용하기 위한 것인데, 이자를 요구하는 것은 사용에 대해 또 다시 돈을 받는 것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 문장만 보면 중세에서 이자는 원천적으로 금지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문제는 돈을 빌려주고 위험에 대한 담보로 적절한 금액를 받는 등 '정당한 대가'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 경우 토마스 아퀴나스는 '죄가 아니다'고 봤다. 이를테면 어떤 부자가 선원에게 돈을 빌려줬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선원이 돈을 들고 야반도주하거나, 혹은 바다에서 난파할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원금 그대로 돌려 받는 것은 부자에게 손해가 된다. 그런데 이 위험을 매꿀 수 있는 정당한 대가가 X라고 가정해본다면, 부자는 X를 선원에게 요구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게 된다. 다만 부자가 나쁜 마음을 먹고 X를 넘어서는 돈을 요구한다면 그건 죄악이 된다. 다시 말해, 이자를 받는 게 죄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이자가 '정당한 액수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번역의 문제가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중세에서 이자는 죄악시된다'라고 말해질 때의 '이자'는 영단어 usury다. 그런데 usury는 고리대금업을 뜻하는 영단어이면서도 다소 고풍스러운 어투에선 '이자'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꼬인다. 위의 사례로 설명하자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X+알파를 요구하는 것은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usury이지만, X만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대가'만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usury가 아니다. interest다. interest의 어원인 중세 라틴어 "인테레세"도 법률용어로 현재의 "이자" 개념이 아닌 "손해의 보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었다. 21세기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interest나 usury나 둘 다 이자로 해석되지만, 중세인들은 '탐욕스러운 개인'이 받는 이자(usury)와 '정당한 대가'인 이자(interest)를 구분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리하자면, 중세인들은 usury를 금했지만 interest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interest가 적법하다고 봤다는 것이며, 늑대와 향신료 16권에서 호로가 말한 "교회는 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발언에서 이자는 usury를 의미하는 것이다.

  • 1권에서 "계약을 교환한 상인들끼리 돈을 갹출해서 배를 빌리는 거야. 모아진 금액으로 실을 수 있는 짐의 양이 정해지는데,(중략)" 라는 말이 나오는데 실제 중세시대 있었던 코멘다 계약(Commenda)을 말한다. 코멘다 계약이란 상품 또는 금전을 투자하는 인물, 즉 자본가(commendator)[71]와 노동을 제공하는 상인(tractator)[72]간의 계약으로 이를 통한 이익금을 서로 나누는 계약이다. 보통 자본자가 이익의 ¾을, 노동을 제공한 상인이 이익의 ¼을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사업은 돈은 있지만 위험을 감수할수가 없는 자본가와, 노동을 감수할 수 있지만 자본이 떨어지는 상인간의 단점을 줄여주는 계약이었다. 이 계약이 발달해서 오늘날의 합자회사익명조합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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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의 공증인 문서가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제노바 상인들이 사업 자금을 조달하는 데 '소키에타스(societas)'[73]와 '아코멘다티오(acoomendatio)'[74]라 불리는 투자계약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이 두계약 모두 코멘다(Commenda) 계약에 속한다.}}}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71] 독일어 Kapitalgeber[72] 독일어 Unte- rnehmer[73] 투자자가 자본의 ⅔를 제공하고 여행상인이 ⅓을 부담하는 것으로, 수익금은 투자가와 여행상인이 5:5로 분배되었다.[74] 투자자가 100% 투자를 하는 대신, 수익금은 투자가가 ¾, 여행상인이 ¼를 가져갔다.

  • 작중에서 다양한 증명서류의 존재가 등장한다. 토지권리증명서, 외환통지서, 신용어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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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명서도 진짜인 듯 하군요."
마을 상인의 손을 거쳐나가는 외환통지서며 신용어음, 그리고 계약서의 종류는 막대하다. 이국땅에 본점을 차린 대상회는 물론이고, 먼 나라의 작은 상회가 발행한 것이라도 필적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또한 권리증명서의 존재가 언급되는데 실제로 중세에는 이런 권리증명서가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차용한 설정이다. 대표적인 권리증명서가 바로 중세 최고의 금융업자중 한명이었던 푸거가 발행한 푸거서류(Fuggerbrie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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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년, 신성로마제국 황실의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푸거는 예전에 로마에서 레오 10세 교황의 빚을 받았던 방식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빌려준 돈을 받을 궁리를 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빚을 시장에 내다팔기로 한 것이다. 만약 푸거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1천 원을 꿔주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이 10년 후에 2천 원으로 갚기로 했다고 치자. 푸거는 10년 후에 100원의 돈을 받을수 있는 권리 증명서를 20장 발행해 시장에 60원씩에 파는 방식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러면 푸거는 황제에게 1천 원을 꿔 주고, 1천 200원을 되받을 수 있다. 200원의 수익이 남는 것이다. 60원을 주고 황제에게 빚 받을 권리를 산 사람은 10년 후에 100원을 받을 수 있어, 40%의 이자를 받는 셈이다. '푸거서류(Fuggerbriefe)'라고 불리는 이 증명서는 오늘날의 채권이나 서브프라임 채권의 전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증서는 1540년대부터 벨기에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75]}}}

『비지니스의 탄생』
[75] 참고로 푸거가문은 이 때문에 폭망하게 된다. 이유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빚이 너무 큰 나머지 "아 몰라 배째!"를 선언하며 푸거 가문에게 고스란히 떠넘겼기 때문. 결국 1560년대를 끝으로 푸거가문은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진다. 다만 이는 상인 가문으로서 한정이며, 이후 빛을 어찌해서 청산은 했지만 다시는 상업 및 금융업에는 예전만 못하게 되나 그 이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과 에스파냐 왕국의 귀족 작위를 수여 받았기에 귀족 가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 작중에서 로렌스의 친구인 와이즈를 비롯해서 환전상들이 자그마한 탁자를 올려놓고 업무를 보는 장면들이 꾸준히 등장한다. 이는 11세기 이탈리아도시국가들을 시작으로 원거리 무역상을 상대하는 사람들인 반카(banka)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이들은 작은 탁자(banko)를 두고 원거리 무역상들을 상대로 환전, 신용장 업무등을 진행했는데 이것이 현재 은행(bank)의 어원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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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따라서 어느 정도의 부를 쌓아올렸으면서도,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유태인들이 자연스럽게 대부업(금융업)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은행을 의미하는 단어인 'Bank'는 [[유대인]]들이 길가에 탁자를 놓고 벤치(bench)에 앉아 업무를 했던 것에서 유래가 됐습니다. (bank와 bench의 어원이 같다고 하네요^^)
※ Bank의 어원이 [[이탈리아어]]로 '탁자'를 뜻하는 반코(banko) 또는 반카(banka)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

IBK기업은행 공식 블러그, 은행의 탄생과 진화
[76] 아직은 추론이며 정확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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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이르러 지중해 연안에서 상업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환전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뱅크(bank)라 불리는 환전대 위에서 당시에 유통되는 품질이 제각각인 잡다한 종류의 화폐교환해주면서 상업적 교역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 은행이 뱅크라고 불리는 연유다.}}}

한국경제,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45) 이자의 역사와 은행의 등장
또한 다리 위의 상점이 위치했다는 대목도 등장하는데,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의 풍경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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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도시 특유의 모습을 한 폐쇄적이고 어두운 도시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의 중심지역은 높은 탑과 요새화 된 석재 건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복잡하게 꼬인 좁은 길과 골목은 앞으로 삐죽 나와있는 건물 위층과 지붕 덮힌 발코니 때문에 한층 더 어두컴컴했다. 심지어 아지르 강 위에 놓인 오래된 다리ㅡ폰토 베키오(Ponto Vecchio : 단어 자체가 이탈리아어로 '오래된, 혹은 낡은 다리'라는 뜻이다/역주)ㅡ위에는 상점들이 서로 너무나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아무리 둘러봐도 도무지 빈공간을 찾을수 없을 정도였다.}}}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139p~140p

  • 현랑 호로의 성격을 두고 "그 어떤 세리보다 성질이 더럽다."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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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로는 거짓말을 가려낼 수 있는 귀를 갖고 있기 때문에 __그 어떤 세리보다도 성질이 더럽다.__
섣불리 저항해 봐야 아픈 상처만 벌어질 뿐이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4)』, 서울, 학산문화사.
크래프트 로렌스가 성질머리를 더러운 것을 세리에 빗대어 말한 것은 중세시대의 세리(稅吏), 즉 징세청부업자의 악명 때문이다. 당시 징세청부업자는 국가에게 세금 징수 권한을 구매한 후, 민중들에게 세금을 갈취 거두는 직업이었는데 국가에게 세금징수권한을 사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게 되고, 당연히 이때 들어간 금액을 만회하고 수익을 내기 위해서 백성들을 쥐어 짜내서 중세 세리들은 악명이 높았다.

6.3. 길드[편집]


파일:external/pbs.twimg.com/CeAavXfUYAAyNnw.jpg
중세시대 직인들의 모습

  •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길드와 관련된 설정들이나 소개는 실제 중세시대 상인길드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원래 길드는 게르만족의 사교 모임을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중세시대에 접어들며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자 뜻이 바뀐 케이스. 도시 내 거주하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자신의 경제 활동을 보호받기를 원했다. 또한 그들의 이익 창출에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공통적인 직업을 가진 인적 집단 길드(조합)인 것이다. 특허장[A]에 따르면 누구든 도시안에서 사업하려면 길드에 소속되어 있어야 했다.[출처12] 미셸라이브의 런던 이야기-중세기때 꼭 속해야만 했던 클럽, 『길드 (Gu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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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몇 지역의 잡다한 상인들이 손을 잡고 만든 경제동맹도 있는가 하면, 모직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인들이 지역에 관계없이 만든 직업조합의 건물도 있다.
장사를 할 때의 위험이나 사고에 대해 아무도 몸을 보호해주지 않는 세계다. 기사들이 갑옷과 투구로 몸을 무장하듯이, 상인들은 자기네들끼리 연계하여 신변의 안전을 도모한다.
최대급규모의 경제동맹 같은 경우에는 상인들에게는 가장 큰 적이자 권력을 남용하는 국가와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것이다. [[한자동맹|18개 지역과 23개 직종의 상업조합이 손을 잡아 세계 최강이라 칭해지는 경제동맹]]이, 1만 4천 명의 병사를 거느린 국가와 정면에서 전쟁을 벌여 눈 깜빡할 사이에 대승을 거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A] 중세도시들은 영주로부터 도시의 법적 존립 근거인 특허장을 받아서 운영했다. 이 특허장에는 도시민의 3대 특권( ① 도시 설립 당시의 시민과 도시에서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은 누구나 자유민으로 인정 된다. ② 개별 도시민은 화폐지대 외에 봉건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 ③ 도시민의 재산권은 영주의 자의적 침해를 받지 않는다.)을 비롯한 도시 규정들이 들어있는 일종의 헌법과 같은 역할을 했다. 두산 백과 - 도시특허장.[출처12]
상인들이 모인 상인조합(商人組合)과 수공업자들이 모인 동직조합(同職組合)이 있으며[77] 작중에서 로렌스가 몸을 담고 있는 로엔 상회는 바로 상인 길드.

파일:middle_age_clothwoker.png
중세시대 clothwoker(옷감 다루는 사람)의 장인과 도제를 그린 그림
[77] 원래는 함께 운영되었으나 12세기 후반들어 수공업자들이 떨어져나가 독자적인 길드를 형성했다.

  • 작품 속에서 도제(apprentica)의 존재도 등장하는데, 이도 실제 길드의 모습을 담고 있다. 길드는 소속 도시에 작업장을 둔 장인(master)만이 가입할 수 있었는데, 이들 장인들은 한두 명의 직인(journeyman)과 도제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중 도제는 여러 해에 걸친 수련기간을 걸쳐, 수련과전 종료후에는 자신의 작품(Marsterpiece)를 제출해야 했다. 이 작품이 심사를 통과하면 장인으로 인정받을수 있었고 길드에 가입할 자격이 주어졌다.[출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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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인이 되려면 엄격한 도제기간을 거쳐 스승의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 가루의 양을 재는 법을 비롯해, 돌돌 만 빵처럼 까다로운 제빵 기술도 익혀야 한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3)』, 서울, 학산문화사.

  • 대도시마다 존재하는 상회 지점들 등장하고 로렌스가 몸담은 로엔 상회 또한 무역도시들마다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는 실제 중세시대 대형 무역상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당시 대형 상회들은 각 무역망에 자신들의 지점을 세우고 그곳을 통해 금융, 무역업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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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가 헌트는 이들[78]을 중세의 "초대형 상사(super-companies)"로 명명했다. 헌트가 정의한 초대형 상사는 유럽 주요 시장에 세운 사업 지부를 통해 대규모 상품 거래와 국제적 규모의 상업 활동, 국제 수준의 은행업과 제조업 등 다양한 사업 활동을 대규모로 전개한 회사이다.}}}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78] 바르디 상사, 페루치 상사. 이 두 상회는 14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상회로 프랑스 필리프 6세의 재산이 78만 6,000 피오리노였는데, 바르디 상사는 약 87만 4,061 피오리노, 페루치 상사는 약 51만 2,150 피오리노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여담으로 1피오리노는 환율 1,200원을 기준으로 약 45~50만원 정도 되었다. 중세 물가는 현재보다 더 저렴했기 때문에 실제 체감은 현재의 100만 원을 넘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당 상회 소속 상인들은 동료들에게 서신을 자주 보내야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시장 상황을 같은 상회 동료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최선의 상업적 판단을 내릴수 있게끔 한 것이다. 3권을 비롯해 중간중간에 로렌스가 로엔 상회나 동료 상인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 편지로 시장 상황을 전달받는 등의 모습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을 반영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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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앞으로 몇몇 마을에서 보내온 편지를 건네주었다. 1년 내내 여행을 다니며 사는 행상인일지라도 계절에 따라 들르는 곳은 정해져 있으므로 편지를 받게되는 기회가 의외로 많다. 어느 어느 마을을 경유해서 올 것 같으면, 내년에는 아무개 상품을 사 와라, 그러면 높은 값을 쳐 주겠다느니, 지금 이 상품의 값이 비싼데 저쪽 지방은 어떠하냐 등등 여러 가지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3)』,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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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쓰기는 상인, 특히 상사의 주재원이나 고용 상인에게는 매우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피할 수 없는 기본 의무였다. 페골로티의 《상업 안내서》에 따르면, "모든 것, 즉 모든 계약, 모든 상품의 출입과 출납 등을 기록해야 하며, 항상 펜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상인의 손은 항상 잉크 자국으로 물들어 있어야 바람직하다." (중략) 복식부기를 도입하면서 상품과 자본, 인력의 운영과 배치를 조절하고 관리 할 수 있게 되면서, 이탈리아 상인의 사업 활동이 체계적으로 조직화 된 것이다. 이제 상인들은 여러 지역을 순회하지 않았고, 해외 시장에 주재원을 상주시키고 자신은 본토에서 사업을 총괄 지휘했다. 이에 따라 본국과 해외 시장 사이의 정보 교환 필요성이 커져 편지 쓰기의 필요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그리고 편지 첫 문구가 <친애하는 로렌스 님께>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신의 이름으로, 라는 문구로 시작되지 않는 것이 그야말로 북쪽에서 온 편지다웠다."라는 로렌스의 독백은 당시 중세 상인들 사이의 편지의 첫 문구였던 "하느님과 이윤의 이름으로"를 묘사한 것이다.

  • 로엔 상회의 구호가 "로엔 상업조합은 성(聖) 란바르도스의 수호 아래 있다. 행운이 있기를."인데, 실제 중세 길드수호성인이 존재해서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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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서구 문화 속으로 침투한 신앙 이미지를 한 번 살펴보자. 교회가 황제를 임명하고, 작위를 받은 기사단 역시 모두 그리스도인이다. 모든 길드는 자신만의 수호성인과 수호축제가 있고, 약국과 약사는 모두 종교적 이름과 관계가 있다}}}

『젊은 복음주의자를 말하다』

  • 2권에서 야콥이 "틀림없이 조합이 떠안게 될 네 빚은 너는 네 힘으로 갚아야만 한다. 사기를 당했거나 강도를 만났거나, 병이 들었거나 다쳐서 빚을 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조합과 상관의 명예를 걸고 너를 구하겠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중세 조합원 간의 규율에 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길드는 조합원들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며, 위험에 빠진 조합원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빚을 지고 도망가거나, 조합에 대한 배신행위를 했을 경우엔 가차없이 배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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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덴마크 규약을 보면 길드 전체에 같은 형제라는 감정이 퍼져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처음에 나온다. 길드는 신의와 형제애에 기초하여 행동할 것을 서약한다. 모든 사람들이 길드에서는 평등했다. 이들은 공동으로 약간의 재산을 소유했다. 길드는 모든 상황마다 ‘행동과 충고’를 통해 서로 도와주는 단체였고,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었다.(중략) 무엇보다도 모든 조합원들은 과거의 불화를 모두 잊어버리기로 서약한다. 어떤 조합원이 신의를 저버렸을 경우에만 하찮은 인간으로 불리며 조합에서 배제되었다.}}}

『만물은 서로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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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업조합은 상호부조의 단체다. 운영은 조합원의 기부금으로 이루어지며, 야콥이 말한 것 같은 재난을 당하여 장사를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하고, 이국 땅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에는 집단적으로 항의를 하기 위해 세워졌다.
욕심을 부리다 실패한 인간의 빚을 대신 떠맡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 일시적으로 대납을 해주기는 해도 호된 추심에 나서게 된다. 다른 조합원들이 납득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이하게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 길드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선 안된다는 규정이 정해져 있다고 언급되는데 이는 중세 길드 간의 규제를 언급한 것이다. 수공업자 길드는 가격과 임금을 획일화 하고, 시간 외 작업을 금지했으며, 생산 방법과 제품의 품질에 대해 세부적인 규제를 가했으며, 타 업종의 업무를 침해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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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시 [[밀]]은 [[밀가루]]보다는 빵으로 만들어 팔아야 가장 잘 팔리겠지요."
먹어 보면 질이 좋은지 나쁜지 즉시 알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밀가루 질이 좋다고 열변을 토하느니 한번 빵을 먹여 보면 되는 것이다.
"하하하. 우리네 장사꾼들이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래서 빵가게 주인장들과 싸우는 불씨가 되긴 합니다만."
"이곳 빵가게 주인들도 셉니까?"
"세다마다요. __빵가게가 아닌 곳에서 빵을 구워 팔았다가는 돌로 된 밀방망이를 들고 달려올 겁니다."__
__상인은 장사를, 빵가게 주인은 빵을 만드는 식으로 직업에 따라 영역을 구분하는 것__은 어느 곳에나 있고, 그것을 둘러싼 농담도 많다.
그러나 상인이 곡물의 입수에서 빵 제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거쳐 장사를 하면 큰 돈벌이가 될 거란 것도 사실이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4)』, 서울, 학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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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내에서는 신발 가게는 신발을, 옷 가게는 옷을 파는 것 처럼, 기본적으로는 조합 별로 저마다의 영역을 정해 그것만 팔게 되어 있다. 그러니 옷 가게에서는 재봉을 해서는 안 되고, 신발 가게에서는 신발의 수선을 해선 안된다. 기름 가게는 빵을 팔아선 안 되고, 생선 가게는 육류를 팔아선 안된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3)』, 서울, 학산문화사.

6.4. 화폐[편집]


중세 화폐와 관련해서 중세 유럽 화폐 체계에 대해서 : 베네치아의 사례로 보기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본문 내용에 늑향을 언급하고 있기도하고.

  • 1권에서 호로가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동화폐 대신 가죽으로 만든 화폐가 활용되었다는 발언을 하는데, 고대 북유럽에서 가죽을 통화로 사용했던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듯 물품을 화폐처럼 사용하는 것을 일컬어 물품화폐(物品貨幣) 혹은 실물화폐(實物貨幣)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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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폐는 몇 백 종류나 되고, 은이나 금의 절하, 절상이 종종 일어나거든. 화폐는 신용으로 결정 나는 거야."
"흐응. 내가 아는 화폐는 몇 종류밖에 없었는데. __거래는 대부분 짐승가죽으로 이뤄졌었어__."
어느 시대 얘기냐, 하고 로렌스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138-139.

  • 13권에서 로렌스가 슈미 동화(銅貨)를 바라보며 "작고 도톰하여 화폐의 가장자리를 깎아 구리를 모으기엔 딱 좋은 화폐이면서도 다른 화폐처럼 문양이 망가질 만큼 깎여 있지 않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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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렌스가 책상 위의 물건 중 맨 마지막으로 펼쳐든 지갑 속의 내용물 가운데에는 [[늑대]] 퇴치용 [[부적]]으로 쓰이는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몇 개나 들어있다.
오늘 시내 이곳저곳에서 값을 치를 때마다 거스름돈으로 모아 온 슈미 동화라 불리는 화폐.
작고 도톰하여 가장자리를 깎아 구리를 모으기에는 딱 좋은 화폐이면서도 다른 화폐처럼 문양이 망가질 만큼 깍여 있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이 깨끗한 상태로 보존 되어 있었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3)』, 서울, 학산문화사.
이는 중세시대에 대표적인 화폐훼손 행위였던 테두리 깎기(Clipping)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Clip은 종이 뭉치등을 찝는데 쓰는 클립이 아니라 손톱깎이(nail clipper)의 그 클립이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clipped+Roman+coins.jpg
테두리 깎기로 인한 동전 형태의 변화. 해당 동전은 동로마 제국의 은화였던 실리쿠아(Siliqua).
테두리 깎기란, 발행되는 금화은화의 테두리를 살살 깎아 내어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을 모으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모은 부스러기들을 통해 또 다른 화폐를 생산할 수 있었다. 테두리 깎기 뿐 아니라 가죽가방 안에 동전들을 집어넣고 흔들어서 떨어지는 가루들을 모으는 땀내기(Sweating) 방법도 있었는데 이런 행위들로 인해 화폐의 신뢰도를 믿을 수 없게 되어 환전을 할 때 동전의 무게를 재는 방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행위들은 범법행위였지만 돈이 되기 때문에 처벌이 강화됨에도[79]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그 후 1663년 당시 영국 조폐국장이었던 아이작 뉴턴의 지시로 화폐 주변에 홈을 파내는[80], 화폐 훼손을 방지하는 장치를 동전에 적용하게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81][출처4] 참고로 이 홈은 20세기까지 사용되다 현재는 화폐 제조 기술의 발달등으로 인해 많은 국가들에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유로를 비롯해 엔화, 그리고 한국의 십원 주화에서도 이 홈이 빠진 것을 볼수가 있다.

  • 화폐의 순도를 이용해 화폐가치를 조정하는 장면, 즉 주조차익이 1권과 15권에서 등장하는데 실제로 이런 점을 이용한 나라들이 많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중세 당시 유럽대륙엔 금과 은의 수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귀금속의 부족은 풍부한 은광산을 가지고 있던 아즈텍잉카를 정벌한 이후에 숨통이 트이며[82], 명나라은자가 대거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시기(16세기 이후)부터 해소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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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중세 내내 유럽은 적절한 교환 및 지불 수단의 결여 때문에 교역과, 특히 '''국제 무역에 방해받는 심각한 귀금속 부족사태를 겪고 있었다.}}}

『스페인 은의 세계사 - 아메리카의 은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79] 당시 잉글랜드만 해도 이런 행위가 발각되면 사형을 선고 받았다.[80] 돌기를 새기는 행위를 밀링(milling) 또는 리딩(reeding)이라고 부른다.[81] 단 땀내기는 동전을 구리로 제작할때까지 이어졌다.[출처4] [82] 문명 5에서도 나오는 포토시 언덕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은광.또한 이 시기에 들어온 수많은 귀금속 때문에 귀금속의 가치가 휘청거릴 수준이었다고 한다.
주조차익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기원전 6세기 아테네를 이끌던 솔론이 1달란트 = 6,000드라크마의 가치를 1달란트 = 6,300드라크마로 만든 것이 기록상 남아 있는 최초의 주조차익이다. 그 후 3세기 이후 점령지가 부족해진 로마 제국은 지출은 그대로인데 수입이 줄어들자 재원 확보를 위해 은화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을 줄여 주조차익을 감행했다. 함량을 줄이게 되면 같은 무게의 은으로 만들 수 있는 동전의 수가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네로는 은도금(...)을 한 은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결국, 시민들은 은 함량이 높은 은화를 사용하지 않고 집에 감춰두었으며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이 벌어지며 296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순도 100%짜리 은화를 발행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출처4]
그 후로도 동로마 제국명군이었던 알렉시오스 1세도 돈이 모자라자 "돈이 없어? 돈을 만들면 되지! 돈을 만들 금이 부족해? 구리를 섞으면 되지!"라는 막가파식(...) 주장으로 주조차익을 실현시킨 바 있다.[83] 중세로 넘어서면서 다양한 곳에서 화폐를 제조하게 되고 이후 각종 이권의 개입으로 인해 화폐의 순도가 오락가락 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신용도가 높은 화폐들이 바로 현재의 미국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의 역할을 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화폐의 순도가 아니라, 그 화폐의 신용도(=국가의 경제력)가 화폐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84]

파일:external/i1.wp.com/elcambistaysumujerobrad.jpg
환전상과 그의 아내. 마리누스 반 레이메르스바엘 作 1539년
[출처4] [83] 이런 막가파식 정책을 펼쳤는데도 알렉시오스 1세가 명군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일단 이 주조차익 실현이 사리사욕 추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폭증하는 군사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었고, 이런 악화 주조 정책 자체가 알렉시오스 1세가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전전대 미하일 7세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런 막가파식 악화 발행으로 단기간에 제국의 국고를 다시 채워 군사력을 재건하고 의미있는 군사적 승리를 일궈내었으며, 외교적으로도 동맹세력을 확보하여 이슬람 세력에 대한 역습을 성공시키고 상실한 영토의 상당부분(특히 풍요로운 소아시아의 해안지대)를 탈환했을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상공업을 육성하여 세수를 증진시키는 데 성공한 뒤 다시 양화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즉, 결과적으로 보자면 막가파식 주조차익 실현을 비상사태 극복을 위한 일종의 비상수단이었다고 해명할 수 있게 된 것.[84]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전세계가 지폐를 주로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폐는 그 만든 재료 자체는 가치가 그렇게 크지 않기에 위에 나왔던 방법들을 써봐야 큰 이득은 없고 때문에 현대의 위조지폐는 진짜 지폐와 비슷하도록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지 지폐의 재질을 속이거나 지폐의 면적을 줄이는 등의 방법이 아니다.

  • 작중에서 화폐가 지역마다 달라 다양한 종류의 화폐가 등장[85]하고, 또한 환전의 중요성이 언급된다. 실제 중세시대에는 국왕으로 부터 특허장을 받은 도시들에서 개별적으로 화폐제조가 이루어 지는 바람에 유통되는 동전의 종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1340년경에는 피렌체에는 피오리노 금화가 제조되었으며, 이 금화는 유럽 전역의 나라에서 모방되었다. 또한, 베네치아에서 제조된 두카트 금화는 무게와 순도가 정확해 국제통화의 역할도 담당했다.[86] 화폐 주조권을 다양한 인물들이 보유하게 되자, 결국 화폐의 사용보다는 환어음을 통한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화폐는 귀족들의 장식품으로만 사용되는 지경에 이른다.[출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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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다양한 화폐가 쓰였다. 우선 크게 3가지 종류의 귀금속 화폐, 즉 금화, 은화, 동화가 통용되었다. 그러나 왕과 제후들 뿐 아니라 자치 도시와 공화국들도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했기 때문에 다양한 순도와 무게를 지닌 화폐들이 통용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다양한 지역 출신의 상인들이 서로 다른 화폐를 사용했기 때문에 상품 대금을 귀금속 화폐로 지불하기 보다는 가급적이면 환어음을 발행해 각자의 채무와 채권을 장부상에서 처리하는 것이 편리했다.}}}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85] 작중에서 언급되는 화폐만해도 23종류. 2권에서 로렌스호로에게 각종 화폐를 가르쳐주다가 도저히 못 외우겠다며 포기하는 호로의 모습도 등장한다.[86] 늑대와 향신료의 작품 속에서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화폐가 등장하는데 바로 뤼미오네 금화.[출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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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왜 이렇게 화폐가 많은 거야? 복잡한 것도 정도가 있지."
"새로운 나라가 생겼다가 몰락하고 또 생겨나고, 게다가 지방 권력자들이나 교회 권력도 화폐를 발행하는 데다 그 위에 화폐 위조가 끊이지 않거든. 류트 은화만 해도 원래는 가짜 트레니 은화라고 불렸는데 유통되는 숫자가 너무 많아지니까 결국은 독자적인 화폐가 됐지."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p.85
참고로 작중에 등장하는 가짜 주화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은 여기를 참고하자. 여기의 동로마 주화도 참조해보자. 이슬람 주화를 카피해서 썼다. 십자군 왕국이!

  • 환전상이 저울주판을 이용해 환전을 하는데 이는 중세시대 환전상들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1권에서 호로가 금화끼리 부딪혀 소리를 듣고 순도를 판단하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 모습도 실제 중세 환전상들이 순도를 확인하는 방법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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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의 환전상은 시장 거리 한구석에 저울, 주판, 시금석[87]으로 주화의 가치를 평가했다. 그는 수백 종류의 금화와 은화의 가치가 그 주화를 만든 도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당시 군주들은 연례행사처럼 주화의 순도를 낮추었다. 일종의 세금이었다. 수많은 종류의 돈이 국제무역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유대인 이야기』
[87] 試金石. 귀금속의 순도(純度)를 판정하는 데 쓰이는, 검은빛의 현무암이나 규질(硅質)의 암석. 조흔색(條痕色)을 표본의 것과 비교하여 금·은의 순도를 시험함.
다만 여기서 사용한 주판은 아바쿠스(abacus)라 불리는 로마식 주판으로 현대의 주판과는 거리가 멀다.

  • 16권에서 태양의 화폐를 제조할때 태양 무늬가 찍힌 망치를 이용해 제조한다는 묘사는 실제 중세시대 타각망치를 통해 화폐를 제작하는 것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EBS 세계테마기행 - 체코문화기행 4부(5분 15초 부터) 또한 화폐에 권력자의 얼굴이 찍히는 경우가 많다,라는 대목 또한 화폐 제조시 영주나 지도자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것을 반영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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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이블 위에 나타난 것은 망치다.
그러나 단순한 망치가 아니다. '''그것은 화폐의 생명이라 할 문양을 새기기 위한 타각망치였다.''' 아무 데나 있는 타각망치일 리가 없다. 틀림없이 데바우 상회가 발행하는 '''신규 통화를 제작하기 위한 망치'''다.
(중략)
타각망치는 화폐를 내리칠 때마다 깎여 나가기 때문에 망치 하나로 이천 냥 정도밖에 만들 수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데바우 상회에는 저것과 같은 것이 수십 개나 있을 테니, 저것 하나를 훔쳐냈다고 해서 지금의 데바우 상회가 신규로 화폐를 제작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리는 없다. 트레니 은화 같은 것을 녹여 순도를 높이는 작업을 끝내자마자 저것과 같은 망치를 써서 화폐를 일제히 제작하리라.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6)』, 서울, 학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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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전 제조 과정은 기본적으로 세단계로 분류되었다. 첫째, 2개의 화폐 각인봉(刻印棒)을 준비한다. 그런 다음 페돈(Fedoni)라고도 부르는 동전 모양의 둥근 판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둥근 판을 각인봉 사이에 넣고 두들겨, 액면 가격을 지닌 동전을 찍어 낸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 -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

  • 1권에서 호로가 은화가 담긴 자루를 흔들고 그 소리를 듣고 순도를 파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Ping Test를 말한다. 아래 동영상에서 보듯이 은화의 순도에 따라서 부딛혔을때 나는 소리가 조금씩 다르다. 다만 호로처럼 자루 뭉탱이를 흔들어서 듣는 건 청력의 한계로 인해 불가능하고 호로는 귀가 무척이나 밝다는 설정이 있어 가능한 것으로 나온다.



7. 중세 생활상[편집]


  • '늑대가 달린다'라든가 '독보리' 등 하인리히 야콥 저 『의 역사』에 나오는 내용이 몇 가지 언급된다. 작가가 참고했는지는 확인불가. 단 4권에서 언급되는 독보리는 실제로 있는 독보리라는 식물과는 다른, 맥각병에 걸린 보리를 말한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증세와 맥각병에 걸린 보리를 섭취한 후에 나타나는 실제 맥각 중독의 증세와 같으며 작중 이 병을 '리델리우스의 업화'라고 부르는데, 중세 시대에 맥각 중독증을 '성 안토니오의 불'이라고 불렀던 것을 살짝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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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가정집.
  • 14권에서 시골 가정집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는 중세 농촌에서 흔히 볼수 있는 가정집을 묘사한 것이다.[88]다만, 위의 사진과 달리 후대의 지어진 유럽의 농가 주택은 사람과 가축이 여전히 한공간에서 살되 집주인들의 생활 공간과 축사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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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은 나무를 깐 것도 돌을 깐 것도 아닌, 그저 흙을 다져 놓기만 한 간소한 바닥으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 구덩이를 파서 만든 화로를 둘러싸듯이 나무 탁자와 의자를 겸한 긴 궤가 놓여 있고, 높다랗게 매단 선반 위의 우윳빛 물건은 빵을 부풀리는 효모일 것이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4)』, 서울, 학산문화사. p.29
[88] 우리나라에서도 함경도 일대와 강원·경상도 산간 지방에 여진족이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집의 구조가 중세 유럽처럼 사람과 가축이 한공간에서 같이 사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려 올라간다,
관련 내용은 링크를 참조 하는 것도 좋다.

  • 작중에서 짚단을 엮은 침대가 등장하는데, 실제로 11세기부터 짚단 위에서 자기 시작했으며, 12세기부터 일정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짚단을 쌓아 잠을 자는 생활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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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판자로 된 칸막이 사이에 놓인 짚더미 위에서 잠을 잤다. 아마도 12세기 이후 직물 생산이 증가하면서 짚으로 채운 담요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민요는 사람들이 귀리 짚을 가장 선호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당시 사람들도 작은 벌레들 때문에 고생을 했다. 선뜻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도 벼룩과 이 때문에 시달렸을 정도이니 당시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페르디난트 자입트 저, 차용구 역,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서울, 현실문화, 2013, p.148.

  • 1권에서 로렌스가 "시간은 돈이야. 시간이 있으면 그만큼 돈을 벌 수 있다"라며 "네가 몇백 년씩 지켜봐 온 농부들도 시간에는 정확하잖아?"라는 말을 하자, 호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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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 당신은 대체 뭘 본거야? 그네들은 시간에 정확한 게 아냐. 공기에 정확한 거지."
"⋯뭔 소린지."
"알아? __그네들은 새벽 공기에 잠에서 깨어나, 아침 공기에 밭을 갈고, 낮 공기에 김을 매지. 비 오는 공기에 새끼를 꼬고, 바람 부는 공기에 작물 걱정을 한다구. 봄 공기에 싹이 나는 것을 반기고, 여름 공기에 잘 자라는 것을 기대하고, 가을 공기에 수확을 기뻐하며, 겨울 공기에 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거야.__ 오로지 공기에만 신경쓴다구. 나도 그렇지만."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94-95.
이 개념은 중세 계급별로 각자 다른 시간대를 가진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당시 중세 농민들의 경우 시간을 알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농민들은 시, 분, 초단위의 개념은 의미가 없었는데, 그들에게는 씨를 뿌리는 계절, 그것을 가꾸는 계절, 농작물을 수확하는 계절, 씨 뿌릴 날을 기다리는 계절만 알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도시민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달랐다. 그들의 거래 물품의 가격, 환율 등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었으므로, 시간을 맞추는 것이 돈벌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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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서양의 중세에는 수도원의 시간, 농민들의 시간 그리고 상인들이나 도시의 시간 등으로 분절되어 있었다.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던 중세의 상인들이 가진 시간의 개념은 교회의 신성한 시간이나 농민들의 자연적인 시간과는 별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함한희 전북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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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는) 오늘날처럼 정확한 시간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고, 날짜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정치와 법률 분야의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시간 개념의 필요성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이야기 독일사.
이외에 상세한 내용은 문화일보)중세의 시간과 근대의 시간, 『시간, 노동규율, 산업자본주의』 관련 포스팅을 참조해 보는 것도 좋다. 다만 작중에서는 시계가 따로 등장하지 않는데,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발명된 것은 13세기 후반이었고 교회나 도시의 공공장소에서 시계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약 14세기 무렵이었기에[출처10][89] 작가가 따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작중에서 숲에 대한 두려움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장면들이 묘사되는데, 12세기 이전까지 숲은 인간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늑대와 같은 야수들의 거주지이기도 했고, 한번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버리며, 거대한 숲은 사람들이 경외감을 가지게 만드는 등 인간의 공포심을 유발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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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숲은 아직 개간되지 않았고 위험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정이나 용 같은 괴물이 산다는 소문도 돌았다. 실제 사냥을 갔다가 들짐승의 공격을 받거나, 숲에서 길을 놓쳐 목숨을 잃는 기사도 꽤 있었다. 숲은 두려움의 대상이자 남성성을 발현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기사도 정신'은 어디에서 시작됐나.
[출처10] 『시계와 문명』[89] 참고로 가정용 시계가 보급된 것은 17세기 무렵이었다.
이런 숲에 대한 공포는 12세기 들어서 교역을 위해[90] 대규모 개간 사업과 도시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숲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마을을 건설하고 도로를 연결하면서 차츰 옅어졌다.

  • 작중에서 도시 개간 사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는 10세기 이후 활발해진 토지 개간사업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작가가 상당부분 차용한 중세 독일에서 일어났던 동방식민운동이 있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발달로 14세기까지 유럽 내에서 인구가 거주하지 않던 공지(空地)가 사라지며 국경선의 확립에 일조했고 이렇게 성장한 농업 경제를 바탕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부활하면서 장원제는 쇠퇴하는 반면 왕권은 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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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농업이 발전하자 중세 유럽의 경제가 오랜 침체 끝에 10세기 부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광범위한 개간사업이 이루어지며 농업생산이 꾸준히 증가하여 잉여 산출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중세 경제사의 터닝 포인트였다.}}}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3: 동방무역과 금융업 중세 경제사 上』.
[90] 중세시대 들어서면서 고대 로마 시대의 도로는 폐허가 되었고, 국가 단위의 거래가 도시 간의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등 내수에 치중하는 등 오히려 과거보다 후퇴한 모습을 보여준다. 상거래가 점점 발달하고 도시의 규모가 커지자 각 국가는 교역 루트 확보에 나서게 되는데 이 때가 12세기였다.
또한 13권 복숭아 꿀절임에서 개간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 루와이 마을에 찾아가게 되는데 루와이 마을의 물레방아 건설작업 현장에 양치기, 농부, 광대, 직인, 수도자 등이 몰렸다고 언급된다. 이는 실제로 12세기~13세기에 이루어진 독일의 개간 사업에서 거주 중인 농부나 양치기 등을 동원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 13권 복숭아 꿀절임에서도 날쌘 마차를 타고 달려나가자 진동이 심해졌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실제로 당시의 도로 사정은 무척이나 열악했다. 영주가 세금을 걷기 위해 건설한 도로는 안전이 보장되고 도로도 평탄했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 길은 자갈과 돌이 가득하고 곳곳에 돌부리가 박혀 있었고 비가 오면 엉망이 되면서 진흙탕 길이 되어버리게 십상이었다. [출처6] 현재도 이런 길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러시아라스푸티차.[91]

중세시대 도로 사정이 이처럼 열악했던 것은, 고대 로마 시대보다 마차의 물량이 더 많았기 때문에 도로의 윗부분이 깨지고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했지만, 도로 보존과 관련된 기술이 실전되어 이를 보수하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울퉁불퉁한 도로들을 마차를 타고 지나갈 때 상당히 진동이 심했다고 하며, 어느 정도냐면 마차나 달구지를 오래 타면 몸에 멍이 들 정도였다. [출처7]
또한 2권에서 용병단이 도로를 점거하자 난감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중세시대에는 전쟁이 발발하거나 도적떼가 도로를 점거하면 사실상 도로가 그 기능을 상실했다. 열악한 도로 사정과 기타 변수들로 인해, 당시 행상인들은 하루평균 약 25km 정도를 갈 수 있었다고 한다.[92][93]

  • "상인들이 출항하기 전 기도한다"는 로렌스의 말이 나오는데, 상인들뿐 아니라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기 전 자신들의 안전을 하느님께 부탁하며 기도를 했다.[94] 중세시대에는 우스개 소리로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는 1번 기도하고, 출항하기 전에는 2번 기도하고, 결혼하기 전에 3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배의 진수식 때도 볼 수 있었는데, 배의 안녕을 기원하며 바다의 신에게 처녀를 바치기도 했다. 현재 배의 진수식 때 여성이 샴페인을 뱃머리에다 깨트리는 것도 여기서 기원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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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그려진, 물레방아를 묘사한 삽화.
  • 4권과 18권에서 곡물 가공에 방앗간을 사용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실제 11세기부터 방앗간을 이용한 곡물 가공 방식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출처3] 또한 4권에 등장하는 에반과의 대화에서 방앗간이 세금 징수를 담당한다고 언급되는데 실제로 중세 영주들은 방앗간을 소유했고, 방앗간 소유주에게 세금 징수의 역할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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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이 수확한 식량은 식탁에 오르기 전에 수공업자가 다시 가공해야만 했다. 본래 이런 종류의 수공업은 여성들에게 음식 준비를 맡겼던 예전의 노동 분업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분업자는 물레방아로 연자질의 부담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켰다. 물레방아는 처음에는 사치품이었지만 기원전 3~4세기부터는 널리 보급되었다. 간단하기는 하지만 효율성이 떨어졌던 풍차는 12세기 직후에 보급되었다. 1080년경에 잉글랜드에는 이미 수천 개의 물레방아가 있었고, 지주들은 종종 방앗간 건설에 관심을 보였다. 농부들은 제분 시에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래서 제분업자는 농촌에서 공적인 직무를 담당했다. }}}

페르디난트 자입트 저, 차용구 역,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서울, 현실문화, 2013, p.241.
[출처6] SK 에너지 블로그.[91] 18권에서 로렌스의 마차가 진흙 길에 빠져 고생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모티브가 바로 라스푸티차다[출처7] 『테스』[92] 여담으로 당시 길이 좁다 보니 지나가는 상인들이 마주하는 경우가 있는데, 독일에서는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결투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13세기 독일에서는 "짐을 적게 실은 자가 먼저 비켜주라"는 법이 제정되면서 차차 변화되기 시작했다.[93] 이런 도로 사정이 나아진 건 존 매키덤(John Loudon McAdam)이라는 사람이 아스팔트와 자갈을 이용한 매키덤 공법으로 도로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면서부터였다. 이 때가 바로 1815년.[94] 이는 현재에도 일부 관습처럼 남아있다.[출처3]

  • 르 로와가 금서와 관련된 거래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서적상들 중 금서를 취급하는 이들이 있었다. 중세시대 말기인 17세기 초, 파리에는 금서를 전문적으로 파는 상인이 약 50여 명이 되었고 200여 년이 흐른 후에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연히 시에서는 이들에게 책을 팔거나 사지 않도록 시에서 조처를 했으나 근절되지 않았고 심한 경우 사형까지도 당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1792년이 되어서 모습을 감추었다. [출처9]

  • 7권에서 아픈 호로에게 로렌스가 묽은 사과주를 주면서 인간은 4가지 종류의 상태가 있다며 "사람의 몸은 차고, 뜨겁고, 건조하고, 습한 상태가 있고 이는 음식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는 고대 아테네로부터 전해져 중세의 의사들이 실제로 치료의 근거로 삼았던 4체액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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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양초 직인들이 양초를 만드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 4권에서 엘사 슈팅하임이 "초는 꺼주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까요."라는 발언을 하는데 중세시대 밀랍으로 만든 양초는 몹시 귀했다. 이를 대신해 보통 양고기 기름에 쇠기름을 섞은[95] 기름 양초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 기름 양초는 불순물 때문에 냄새가 지독했으며 빛의 질도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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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초]]는 영어 사용권과 [[북유럽]] 여러 곳에서 특히 부유한 사람들이 널리 사용했다.(중략) 귀족 집에서도 단순한 용도에는 기름 양초에 의존했다. [[아일랜드]] 최고 갑부 토머스 코널리의 고향인 캐슬타운에 있는 대 적택에서는 1787년 한 해 2,127파운드의 기름 양초를 썼던 반면, 거실과 식당과 같은 공적인 장소에서 쓴 밀랍 양초는 250파운드에 불과했다. [[부르주아]] 가정에서는 특별한 행사 때만 밀랍 양초를 사용했다. 노퍽의 목사였던 제임스 우드퍼드는 친구가 베푼 만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멜리시 씨 댁에서 정말로 근사한 대접을 받았다. 밤에 밀랍 양초를 켰으니."
}}}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우리가 외면한 또 하나의 문화사』
[출처9] [95] 건국 초기 미국에서는 곰과 사슴의 기름을 사용한 기록도 남아있다.
여담으로 종이 대신 밀랍에 나뭇가지를 긁어서 쓴다는 묘사가 18권에서 딱 한 차례 등장하는데 바로 두 주인공의 외동딸의 필기 노트로 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로렌스가 외동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는 대목중 하나다.

  • 15권과 18권에서 "교회문자를 알고 있다면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라는 발언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실이다. 당시 교회문자인 라틴어를 알고 있는 자들이 드물었으며, 성경 또한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를 알고 있다면 중세 지식인 층에 포함될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틴어뿐 아니라 모국어라도,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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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성직자들은 미사를 집전하고 성경을 읽기 위해서 반드시 라틴어를 배워야 했다.[96] 중세에 성직자들이 지식인 계층을 대표한 이유는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야기 프랑스사』
[96] 오늘날도 가톨릭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에서는 라틴어를 필수로 가르친다.

  • 1권에서 늑대의 귀와 늑대의 꼬리를 가진 호로를 처음 본 로렌스가 "저런 이상한 모습의 아이는 악마가 들렸다고 해서 산에 버려지거나 숨겨진채 자란다"라는 발언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장애아나 기형아를 대하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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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가 어린이 마녀재판이다. 독일 뷔르츠부르크 문서실의 기록에 따르면 1627년~1629년에 10세 이하의 어린이 27명이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고, 1647년~1655년에는 어린이 5명이 마녀로 몰려서 죽었다. “당시 거리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넘쳐났고 이 불쌍한 아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아이들에게도 적용한 것입니다. 특히 장애아나 기형아는 마녀나 악마의 자식으로 간주돼 더 배척됐습니다.쌍둥이는 여자가 여러 명의 남자와 잠을 잤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해 가문의 수치로 여겨 버림받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는 이처럼 미신을 숭상하는 사고가 머리에 깊이 박혀 있는 미혹의 시대였습니다.”}}}

마녀재판·공창·페스트… 중세 유럽 뒷골목 비주류의 삶을 파헤치다

  • 17권에서 로렌스와 프리드의 결투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시대 마상창시합을 묘사한 것이다.[97] 또한 성 안뜰에서 결투를 펼치는 장면은 독일의 툐스트(tjost)라는 결투장에서 펼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데 독일에서는 성 앞에 있는 툐스트에서 마상창시합을 가졌다.[출처14]

  • 17권에서 "지하에는 돌로 짠 수로가 지나가 온천물을 통해 난방이 이루어지게 했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독일 북부 지역 및 북유럽에서 목욕탕에서 따듯한 물을 흘러 보내는 변형된 형태의 온돌이 존재했는데 이를 반영한 것이다.[98]

  • 14권에서 "이 마을의 관습상 여행객은 촌장이 혼자 대접하는 것이 예의인지,"라는 대목이 등장하는 데 이는 접대의 관습을 말한다.

  • 호로의 머리를 마끈으로 묶는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마는 마(식물)가 아니라 아마다. 마(식물)는 동북아시아가 원산지이며, 아마는 이집트소아시아가 원산지인 식물이다.

  • 3권에서 도박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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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렇다면 계약을 완수하기 위해 아마티가 쓸 수 있는 방법으로는, 빚을 지거나 도박 등으로 단기간에 거금을 확보하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곳의 도박은?"
"까탈을 떠는 교회가 없다고 해서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인 건 아냐. [[카드]], [[주사위]], 토끼몰이 정도 밖에 없어. 판돈의 상한선도 정해져 있고, 도박으로는 그런 돈 못따."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3)』, 서울, 학산문화사. p145
[97] 다만 작중에서 프리드는 자신의 애양(愛羊)을 타고 달려왔고 로렌스는 선채로 프리드가 달려오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에 마상창시합은 아니다. 마상창시합이 가진 기사간의 결투라는 의미를 차용한 것에 가깝다.[출처14] 아내를 닮은 도시: 걸어본다 04 류블랴나[98] 유럽에도 온돌과 비슷한 형태의 난방 기구가 존재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로마식 온돌인 하이포코스트(Hypocaust)가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세시대로 넘어오면서 사라졌으며 일부 지역에만 흡사한 형태의 난방기구가 남게 되었다.
카드와 주사위는 고대부터 이어져온 역사와 전통이 있는 기초적인 도박이다. 또한 까탈은 떠는 교회가 없다는 대목은 중세시대 교회가 도박문제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중세 교회는 수도원들에게는 도박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했으며, 민간인들의 도박 또한 규제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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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년 트리어의 종교회의에 남은 문서이다.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거나 여가로 하는 주사위 놀이는 허용하지만, 도박으로 흐르는 것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훨씬 후, 개혁을 추구했던 추기경 니콜라우스(Nikolaus von Cues)는 1455년의 종교회의에서 "정신건강이나 여가를 선용하기 위한 것 일지라도 주사위 놀이는 해서는 안 된다"고 일체 금지시켰다.}}}

[양태자 박사의 5분 중세사] 중세인들의 도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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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로 넘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걸고 게임을 하곤 했다는데요. “모든 탁자 위에 주사위가 굴러다닌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박을 즐겼다고 합니다. 특히 동전이 퍼져나간 9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도박으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는 하층민들이 늘어나자 중세 교회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도박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무수한 도박 금지령을 선포했다고 하네요. 반면 특권계층인 귀족들은 도박을 즐기는 것이 귀족사회 구성원이 갖춰야할 일종의 에티켓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도박 행위를 즐겼다고 합니다.}}}

스포츠토토 공식 블로그.
우리가 흔히 아는 도박장, 즉 카지노[99]의 시초가 바로 중세시대 도시국가 및 도시공동체에서 도박장소를 통제함과 동시에 자체 수입을 늘리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특히 축제나 시장과 같이 사람들이 몰리는 경우에 시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을 만들어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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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 허가받은 도박장은 13-14세기부터 벌써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독일어권에서는 14세기말 뷔르츠부르크나 프랑크푸르트에 특정시기에 도박장이 개설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도박장의 관리는 궁정 출신의 인물이나 도시의 문벌가 출신이 맡았습니다. 승인받지 않는 도박이나 도박장 설치, 즉 시장 등 백주대로에서 도박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이를 어길 경우 벌금형이나 자유형, 태형 등을 부과했습니다.}}}

주사위 도박판에 빠져 있던 중세 유럽사회.
[99] 카지노(Casino)는 이탈리아어로 집을 뜻하는 "까사(Casa)"와 작다, 귀엽다를 뜻하는 "이노(Ino)"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 진 단어로 중세 귀족들이 소유한 사교 오락용 별관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후 현대의 도박장을 뜻하는 카지노라는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함께 언급된 토끼몰이의 경우에는 고대로부터 중세 귀족들이 즐겨했던 몰이사냥[100]을 말하는 것이며, 이런 몰이사냥을 위해 탄생한 견종이 바로 포인터래브라도 리트리버다.

  • 작중 로렌스가 "빚을 갚지 못하면 원거리용 선박에서 노 젓는 일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독백을 하면서, "어차피 죽는 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쓸모 없어진다는 문장은 손발이 잘려서 더 이상 노잡이로써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해적과 싸우는 선박에 실린다는 내용은 전쟁터로 내몰렸던 고대·중세 노잡이들의 일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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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원거리용 선박에서는 노 젓는 일꾼들은 2할이 2년 내에 쓸모없어지고, 나머지 1할은 다음 2년 내에 쓸모를 다하며, 살아남는 1할이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들은 해적과 싸우는 선박에 실려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된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100] 현재 영국 귀족들이 즐기는 스포츠여우사냥도 몰이사냥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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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노잡이들이 얼마나 가혹한 취급을 받았냐면, 한번 노잡이가 되잖아요? 대부분 1년을 못버티고 죽었다고 합니다. 항상 쇠로 된 족쇄를 차고 있었는데 이게 한 2,3개월만 지나면 쇠독이 오르고 허물이 벗겨지며 손 발을 잘랐다고 합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57부 - 로도스 공방전 中 ##.

  • "처마 밑에 약재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약재를 가는 데 쓰는 막자 모양을 본뜬 간판이 매달려 있다."라는 대목은 중세 가게들이 문맹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그림 간판을 매달았던 것을 묘사한 것이다. 현재도 독일 로텐부르크 거리, 오스트리아 게트라이데 거리등 중세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곳에 위치한 가게들은 그때의 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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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모양의 간판들은 중세 시대에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가게에서 파는 물건을 알리기 위해 제작되었던 것들이다. 가게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그림 위주의 간판만 보고도 그 가게가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 거리(Getreide Gasse) 기행.


7.1. 식생활[편집]


  • 작중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인들이 음식을 먹을 때 칼로 찍어 먹거나, 아니면 손으로 집어 먹는 모습만 나올 뿐 포크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으며, 15권에서 루워드 등 뮤리 용병단과의 식사에서 딱 한번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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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이블 위의 식기는 언감생심 은식기다.
게다가 소문으로만 들어 본 [[포크|작은 삼지창 같은 도구]]까지 있었다.
남쪽의 귀족들은 저것으로 고기며 야채를 찔러 먹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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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5)』, 서울, 학산문화사.
이는 당시 중세의 서유럽에서는 포크가 일반화 되지 않았음과 더불어, 최상위계급에서나 장식용으로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사용된 포크는 성경에도 등장하고 8세기 말 앵글로 색슨 계 사람들도 사용했다는 것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중세로 넘어오며 포크는 식탁 위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교회의 인식 때문이었다. 성직자들은 하느님이 만든 인간의 손가락만이 하느님이 주신 음식을 만질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는 '음식들에 손가락을 대지 않는 것은 신의 섭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또한 악마의 형상을 그릴 때 포크(삼지창)를 함께 그렸던 것도 사람들의 거부반응을 주기엔 충분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11세기 베네치아 총독의 후계자인 도메니코 실비오(Domenico Silvio)가 동로마 제국의 공주인 테오도라와 결혼했을 때 테오도라가 포크를 가져 왔는데, 이를 보고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 주교가 강력하게 비판하며 사회적 논란이 될 정도였으니 포크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중세 서유럽 지역에 포크가 존재하긴 했지만, 자신의 부를 상징하는 장식용에 불과했다. [출처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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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63년에서 1380년 까지 재위한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남긴 재산 목록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포크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식사용이라기보다는 과시용에 가까웠다.
1533년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카트린느(Caterina de' Medici : Catherine de' Medici)]]가 프랑스의 [[앙리 2세]]에 시집가면서 자신의 요리사들과 모든 식탁 도구들을 함께 가져간 것을 계기로 프랑스에 소개된 바 있지만 대중적으로 확산되기까지는 약 1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 17세기경 이탈리아 일부 사람들이 포크를 쓰기 시작했지만 항간의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특히 남자가 포크를 사용하면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사람 또는 여자 같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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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숙, 이미혜, 「동서양 취식(取食)도구 문화에 대한 고찰 ― 포크와 나이프, 스푼식문화권(食文化圈)과 저식문화권(箸食文化圈)」, 『한국조리학회지』, 제9권, 제1호, 2003, pp.101-120, p.109-110.
[출처16] 박영수, 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
이후 1608년에 영국인 토머스 코리어트가 유럽을 돌아다닌 여행기를 편찬했는데[101] 유럽 곳곳에서 포크를 사용하면 퍼시퍼(furcifer), 즉 포크잡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102] 중세 유럽 전역에서 포크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17세기 무렵으로 늑대와 향신료의 모티브가 된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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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농민들이 먹던 빵의 모습. 보기만 해도 딱딱하다.
  • 밀빵이 귀해서 호로가 밀빵을 먹고 싶어 하지만 결국 호밀빵만 먹게 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밀빵은 상당한 고급 빵으로 부유한 소작농이나 도시 공민 등 상위 중산계급 이상만 매일 먹을 수 있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하층민은 대부분 보리빵이나 호밀빵을 먹었다.

작중에서 호밀빵은 밀가루와 섞어서 만든다는 대목이 언급되는데, 실제로 호밀에는 글루텐이 부족해 빵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아 밀가루를 섞어 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호밀 문서 참조.

  • 로렌스의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나서, 음식을 먹을 때 딱딱하기 그지 없는 빵그릇에 담아 먹는다고 투덜대는 호로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중세 당시 농민들이 사용했던 트랑쇼와르(tranchoir)[103]를 말한다. 겨울에는 딱딱해진 호밀빵을 그냥 씹거나 그것을 물에 갠 죽을 마신다는 이야기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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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었다. 나이프와 스푼은 존재하였으나, 포크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접시는 도마(tranchoir)라고 불리는 둥글고 판판한 원형의 흑빵을 사용했다. 농민들은 식사 후에 빵 접시를 통째로 다 먹어치웠으나, 영주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를 적선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주와 농민의 식생활의 비교 (프랑스사, 2005. 8. 1., 미래엔).
[101] Coryat's Crudities. 1611년.[102] 이탈리아 있을 때만 아니라 독일에서, 영국에서도 종종, 집으로 돌아와서부터 내 포크를 사용하는데, 언제 한번 잘 아는 내 친구인 어느 정도 배운 귀족인 로렌스 위태커 경에 의해서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유머스럽게 식탁에서 나를 푸시퍼(Furcifer)라고 불렀는데, 다른 이유가 아니라 먹을 때 포크를 쓴다고 그렇게 부른 것이다.”출처.[103] 영어로는 Tren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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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된 빵 가운데 넙적한 것은 접시로 썼다.이런 빵은 고깃국물에 적셔 먹었으나 적시고도 먹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이나 개에게 줬다.
사람들은 자신의 숟가락과 칼이 있었지만 포크는 쓰지 않았다. 때로는 접시와 컵 하나를 둘이서 같이 쓰기도 했다.
}}}

『비주얼 박물관』 49권, 중세의 성 (주식회사 웅진미디어)

  • 로렌스가 과거 원양어업을 하던 시기,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만났다는 모험담을 들려주는데 이때 언급되는 빵은 마치 이집트에이쉬(Aish Baladi)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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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밖에도 냄비 바닥에 구워서 납작한 빵 같은 것도 있었지."
빵은 부풀어야 가치가 있다.
빵 굽는 가마에서 구워져 나온 빵에 익숙하다 보면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중략)

"발효시키지 않은 빵 같은 것을 먹기도 하지?"
빵의 요정의 축복을 받지 못한 채, 가루를 그냥 반죽해 바로 구운 빵. 먹어본 적이 없지는 않지만, 맛있다는 기억도 없는 것이리라.
"빈말이라도 귀리빵이 맛있다는 소리를 못하겠는데, 냄비 바닥에서 구운 빵은 정말 맛이 없었지. 거기다가 삶은 콩 같은 걸 얹어먹더군."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4)』, 서울, 학산문화사.p.157

  • 인물들이 포도주맥주를 마시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오히려 물을 마시는 장면보다 많은데, 이는 중세의 널널한 음주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과거에는 수질 때문에 이런 음주문화가 발달했다고 여겨졌으나 현재는 수질과 별 관련이 없다고 본다.

  • 고기먹는 장면들이 생각보다 많이 묘사되어 "뭐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중세 시대상을 봐야 한다. 중세시대에는 토지 면적보다 인간의 거주지역이 적었고, 그 때문에 넓은 농경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넓은 농경지를 개간하고 곡식을 수확하려면 인력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하게 되고 가축의 도움이 절실해지는데 이 때문에 중세시대에는 가축을 보유하는 것이 "필수"가 되었고 가축의 수가 많다 보니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 중세시대에는 하루 소비 열량의 절반을 육류에서 얻었을 정도로 육류 소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출처8][104] 그래서 고기를 먹는 장면들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새끼돼지 통구이 같은 요리가 싸다는 건 아니지만.
유럽에 관해서 말하자면 유럽은 전체적으로 육식을 하였다. 정육점 주인들이 1000년 넘게 유럽인들의 배에 고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중세기 수백 년간 유럽은 고기와 음료로 식탁들을 채웠으니, 이는 19세기 아르헨티나의 수준에 필적할 만하다.
오랫동안 유럽은 지중해의 해변들을 넘어가면 절반은 비어있는 공간으로 남았으므로 유럽의 농업은 목축에 광범한 가능성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사료로 읽는 서양사 2 중세편: 게르만족의 이동에서 르네상스 전야까지』

  • 로렌스는 육포를 들고 다니며 먹는데, 당시 육포는 흔했고, 또한 매우 짰다. 이유는 당시 유럽에서는 겨울에 저장해 먹을 보관방법이 극도로 부족했고, 이를 위해 소금에 절인 후 수분을 극도로 제거한 소시지, 베이컨과 같은 염장고기, 육포 등을 제조해 먹었기 때문이다. 이 음식들은 당연히 무척이나 딱딱했고, 염분이 엄청나 매우 짰다. 그걸 입에 달고 다니던 호로가 대단한 셈.
유럽 사람들이 왜 비싼 향신료를 그토록 선호했는지 살펴보자. 그 무렵은 냉장시설이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소금에 절인 저장육이 주식이었고 생선을 절여 건조시킨 것 정도가 전부였다. 소금에 절인 염장식품에 신물이 난 귀족과 세도가들은 후춧가루를 친 신선한 스테이크를 선호했다. 또 짜고 맛없는 음식에 정향이나 육두구 같은 향료를 넣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4: 스페인 제국의 영광과 몰락 중세경제사 下』

  • 6권에서 레노스에서 만든 구리 증류기가 언급되고 그곳에서 만든 술이 세계 제일이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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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구리 증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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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적동색의 신부라는 건...증류기 말입니까?
"응? 아아! 맞아요. 맞아. 과연 모르는 게 없으시군. 때때로 화물로 운발할 때가 있지. 손님이 마시고 있는 그 술도 레스코에서 만든 증류기로 증류한 것일지도 몰라요."
얇은 동판을 우아하게 구부려 몇 장씩 예술적으로 조합한 증류기는 확실히 붉게 빛나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매력을 띤다. 애초에 동판을 구부린 것은 [[코카콜라|여성을 의식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 하니 오호라 하는 생각도 든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6)』, 서울, 학산문화사.
[출처8] [104] 다만 점점 인구의 증가와 맞물리며 경작지의 수가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가축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 때문에 17세기 유럽의 경우 고기를 보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었다고 한다.
증류기 자체는 오래된 기술로 바빌로니아의 유적지에서도 발견되고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를 이용한 술이 대중들에게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한참 후인 중세시대 부터다. 8세기 이슬람 연금술사들에 의해 개량된 증류기는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13세기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으며 15세기 부터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진(술) 등의 생산이 적극적으로 이루어 지며 민간에 유통되었다. 역사속의 술 이야기, 증류주의 탄생

  • 늑대와 향신료 17권 종막에서 로렌스가 호로가 먹고 싶은 음식을 적을 때 '말젖으로 만든 술'이 나오는데, 이는 아이락이다. '동쪽 끝에 있는 초원과 황야의 나라'는 몽골 지방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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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라 어디에서 알았는지 말젖으로 만든 술까지 목록에 들어 있었다. 뇨히라에는 북방 지역을 거쳐 동쪽 끝에 있는 초원과 황야의 나라에서도 사람과 물자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들에게서 들은 것이리라.}}}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7)』, 서울, 학산문화사.

  • 17권에서 호로가 공작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로렌스가 기겁을 하며 일국의 왕도 먹어 보기 힘든데, 라는 독백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상류층의 만찬 때만 등장했던 공작 요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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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 런던에서 열린 헨리 6세의 대관식 만찬에는 공작새 고기가 역시 일품 요리로 나왔다. 다행히 여러 다른 요리도 함께 준비되었는데, 색이 화려한 공작새는 맛이 없기로 악명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상류층에서는 지속되었지만,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자 영리한 만찬 준비자들은 식단에서 화려한 공작을 빼버렸다.}}}

『치킨로드 : 문명에 힘을 실어준 닭의 영웅 서사시』

  • 향신료를 일컬어 "기본적으로 요리의 맛을 돋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맛없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들이다."라고 하는 로렌스의 말이 등장한다. 이는 중세 귀족들이 향신료를 썼던 이유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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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시대나 중세에 먹던 음식은 다량의 향신료를 넣어야 먹을만 했다는 이야기다. 후추를 비롯해 그와 비슷한 종류의 향신료는 소금을 보조하는 양념으로 여겼다.}}}

『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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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잡아먹을 때까지 짐승을 부엌 근처에 묶어 두었다.그러지 않으면 고기를 소금에 절여 보관했으며, 겨울에는 양념을 듬뿍 쳐서 조금 상한 고기 맛을 감추었다.}}}

『비주얼 박물관』 49권, 중세의 성 (주식회사 웅진미디어)

  • 14권에서 거세한 수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실제 거세한 수탉을 묘사한 이야기다. 거세한 수탉은 고대 로마 시절부터 있었으며 이런 방식이 탄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군인들에게 식량을 빠르게 조달해주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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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에는 말이지 수탉, 암탉 외에도 [[닭]]이 있거든."
(중략)
"수탉을, 거세를 해서 키우는 거야."
"호오...? 그건..."
"그렇게 하면 암탉보다 살이 더 맛있어지거든. 수탉처럼 살이 질기지 않으면서, 암탉처럼 알을 낳느라 영양을 빼앗길 일도 없으니....어,왜?"
"흐음..."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4)』, 서울, 학산문화사. p15

병아리들은 천성적으로 싸우기를 즐깁니다.그들을 잘 길들이려면 우리는 반드시 칼을 써야 합니다. 병아리들을 거세하려는것입니다. 거세란 즉 병아리의 고환을 제거해버립니다. 이렇게 수술한 후 수병아리들은 어떻게 변했을가요? 원래 높다랗던 계관이 거세한후 점차적으로 짧아지다가 위축되여 버립니다. 거세한 은 키가 더욱 커졌고 살도 더 쪘습니다. 수탉을 거세하면 체내의 남성호르몬이 크게 감소되여 성격이 매우 온순하게 변하며 다시는 싸움에서 이기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활동량이 적어졌기에 좋은점도 당연히 따라옵니다. 즉 살이 찌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슴팍의 고기도 특별히 풍만해지고 두꺼워졌습니다. 거세하지 않은 수탉은 많아야 3근 반인데 거세한 닭들은 5-6근 지어는 7근 짜리도 있습니다.

길림신문 - 수탉 거세하면 무게 배로

  • 작중 말벌유충을 벌꿀에 절인 음식이 등장하는데 이는 영국 서미싯(Somerset) 일대의 전통 음식이다. 1권 역자 후기에서도 언급되는 내용.

  • 작중 로렌스가 돈을 아끼기 위해 싼 와인을 마시면서 "포도 찌꺼기가 듬뿍 들어간 술"이라 부르는데 이는 중세 프랑스에서 와인을 양조할때 발생하는 찌꺼기들을 압착해서 만든 최하등급 와인인 뱅 드 프레스(Vin de Presse)를 말한다. 또한 17권에서 언급되는 훌륭한 포도주는 침전물이 보인다는 대목은 실제 숙성된 양질의 와인일수록 침전물이 생긴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침전물은 포도 찌꺼기가 아니라 주석(酒石)이라 불리는 물질로 주석산(Tartaric acid)과 칼륨이 결합해 생긴 물질이어서 주석산염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석산과 침전물은 좋은 빈티지나 잘 만든 와인일수록 양이 많다고 한다.

와인의 기쁨 <70>오래된 와인일수록 침전물 많다

  •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온천도시 뇨히라에 정착한 이후 벌꿀주가 자주 등장하고 그와 대비되어 포도주를 마시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는 북유럽 지방에서 포도의 재배가 여의치 않아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벌꿀로 술을 만들어 먹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

  • 19권에서 건포도를 일컬어 남쪽에서 올라온 것이라는 호로의 대사가 등장한다. 작중 뇨히라북유럽 일대를 묘사한 도시인데 실제 노르웨이등 북유럽에서 건포도가 들어온 것이 11세기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병사들이 들고온 것이 시초였다는 것을 호로의 이 대사를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 작중 이교도 마을인 크멜슨에서 "불타는 포도주"라 불리는 투명한 증류주가 등장한다. 이명으로는 "영혼을 뒤흔드는 술"이라 불리는 이 술은 포도주의 찌꺼기를 모아 만든 브랜디를 말한다. 브랜디 중 가장 유명한 브랜가 바로 코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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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눈에 띄었다가는 경을 칠 술이라 공공연하게 살 수 없는 증류주도 이 근방에는 버젓이 나와있다.
호로와 로렌스 앞에 있는 컵 속에 든 것은 '불타는 포도주'라 불리는 거의 투명한 술이었다.
"단맛 나는 술을 시킬까?"
"······."
호로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로브를 벗겼다가는 [[꼬리]]가 크게 부풀어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눈을 질끈 감고 있다.
그런 뒤 겨우 술을 넘기고는 한숨을 길게 토하면서 소맷부리로 눈가를 닦았다.
 영혼을 뒤흔드는 술'이라고도 불리는 독주를 마시고 있는 (후략)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3)』, 서울, 학산문화사.

7.2. 미용[편집]


  • 작중에서 "귀족들이 아니면 머리를 기르는 것은 힘들다"는 로렌스의 발언은, 중세에서 머리카락 또한 계급에 따라 구별됨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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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 왕족과 귀족들의 패션 감각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향수와 화장품, 패션 등 아름다움을 위한 다양한 분야가 발달했는데요, 그 중에서도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헤어스타일입니다. 중세에는 모발의 길이, 스타일이 어떠한지에 따라 여성의 미가 판단되었습니다. 다양한 모양(새, 배 등)의 가발로 스타일을 꾸미기도 하고 독특한 무늬를 위해 땋거나 올리기도 했죠.}}}

봉주르! 이정아의 미술박물관 - 초상화로 보는 헤어스타일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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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여자들과는 다르게 평민 여자들은 결혼 후에 머리 모양을 바꾸었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모자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머리 모양을 한 여자는 결혼한 여자로 간주했다. 여자는 집안일을 하기 때문에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풍속이었다.}}}

『중세의 뒷골목 사랑』 ## p.153
또한 결혼 후 에피소드를 다룬 18권부터는 호로가 머리를 땋은 채로 등장하는데, 이는 바이에른 지방에서 결혼을 한 후엔 머리를 땋아 말아 올렸다는 것을 차용한 설정이다.

  • 작중에서 혼욕하는 장면이 등장하고[105] 사람들이 이를 거리낌 없어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중세 독일에서는 결혼식이나 연회가 있으면 혼욕을 하며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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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중세 말기인 14세기에 이르자 독일에서는 목욕문화가 더욱 점진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당시 독일의 대중목욕탕은 다른 유럽국가와는 달리 향연의 장소가 될 정도로 고대 로마 시대의 목욕문화를 답습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결혼식이나 특별한 연회가 있을 때면 일반 가정이 아닌, 대중목욕탕을 이용하였고 그곳에 초대된 모든 사람은 맨몸을 드러낸 채 환담을 하거나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기도 하였다.'}}}

출처
[105] 대표적으로 17권 호로와 로렌스의 임신사실을 모두에게 알린 이후 장면을 묘사한 특전 일러스트에는 남녀노소 할거없이 온천탕에 모두 들어가 웃고 떠들고 있는 모습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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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조는 독일 바덴(Baden)의 온천장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피렌체에 있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젊은 여자나 나이든 여자나 할 것 없이 남자들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물에 들어갑니다. 사적인 내밀한 부분이나 엉덩이도 다 드러내놓은 채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쓰는 욕탕 사이에는 일종의 격자 같은 것이 있어서 공간이 분리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 분리라는 것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수준이었다. 포조는 그곳을 이렇게 묘사한다. "곳곳에 야트막한 창문이 많아서 목욕하는 이들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함께 음료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그들은 양쪽 방향에서 서로를 만지기도 했는데, 마치 이 모두가 관습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더군요."}}}

「1417년, 근대의 탄생」 p.219~p.220

  • 현랑 호로가 흰 피부에, 손과 손톱이 가늘고 길며, 발목도 가늘며, 빈유의 몸매를 가진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실제 중세시대의 미의 기준이었다고 한다.##[출처9] 당연히 여주인공이니까 꼭 저런 설정이 아니더라도 예쁘게 나오겠지만.

  • 19권의 에피소드인 "늑대와 꽃향기"에서 호로에게 장미로 만든 기름을 선물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 화장품이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에는 장미잎을 증기로 쪄 원액으로 만든 장미 물이 인기였다. 중세에는 흰 얼굴과 창백한 외모가 인기였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장미 화장수를 팔러 다니는 아우스루퍼(Ausrufer)[106]들은 "장미 물을 사용하면 그대들의 흰 얼굴이 더욱 창백해집니다!"라는 홍보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출처9][107]

  • 작중 사프란이 언급되며 옷을 염색하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이는 실제 사프란의 용도 중에 염색이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북유럽처럼 묘사되는 로렌스가 위치한 장소로 부터 상당히 먼 곳에서 왔다는 언급은 실제 사프란이 소아시아실리시아에서 건너 온 것을 의미한다. 유럽에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961년 스페인을 점령중이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들에 의해서이며 이후 유럽의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십자군 전쟁을 통해 다시금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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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옷을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염색은 바다를 7개는 건넌 곳에 있다는, 지상의 낙원으로 이어지는 강에서 실려 온 ‘사프란’이라는 것으로 한다.
황색은 황금을 떠올리게 하는 고귀한 빛깔이다.
염료 자체가 고가이기도 하거니와, 좋은 옷의 존재 가치란 허영을 부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여 부자들이 모조리 사들이는 탓에 값이 점점 더 비싸진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9)』, 서울, 학산문화사
[출처9] A B [106] 길거리 장사꾼들을 말하는 독일어. 당시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은 물건 판매뿐 아니라, 정부에서 내려온 시행령 등을 거리에서 소리치는 등 언론의 역할도 일정부분 수행하기도 했다.[107] 참고로 장미물은 현재도 화장품의 주 재료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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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프란은) 아랍어의 Sahafaran으로서 노란색이란 뜻으로 황금염료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샤프란의 염료는 의류뿐 아니라 음식물의 착색제 및 향미료로 쓰며 과자, , 음료수 및 여러 가지 요리의 착색향미료로 쓰여서 유럽 음식문화에 없어서는 안 될 식물이다.}}}

##

  • 19권에 등장하는 보라빛 꽃은 기름을 짜 사용한다는 점등을 보았을때 라벤더로 추정된다.


7.3. 문학[편집]


  • 작중 종교용 희곡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마르하르트가 이야기한 이 교훈을 담은 종교용 희극은 실제 중세 말~근세 초에 유행했던 도덕극(morality play)을 말한다. 1375년 잉글랜드에서 처음 탄생한 도덕극은 과 인간이 영혼을 두고 싸우는 이야기로 대개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주로 종교적인 교훈을 담고 있으며 작자는 대부분 성직자였다. 이런 중세의 희극들은 상징은유, 그리고 연극 속 위트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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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년 이후로 줄곧 이어져온 근대 희곡은 앞서 언급했듯이 부수적인 이야기가 쌓여서 만들어진 간단한 라틴어 트로프(trope)[108]에서 출발해, 인물 묘사와 감정 자체만을 위한 감정을 발전시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같은 자국어로 (번안)된 동종의 작품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후로 차츰, 15세기 말의 기적극과 도덕극으로 발전했습니다. (중략) 도덕극이란 서양 중세 말기부터 근세 초에 걸쳐 성행한 연극의 한 종류. 교훈극이라고도 한다. 민중에게 계몽이나 도덕적 교훈을 주며, 인간 영혼 구제를 역설한 것이 대부분이나 성사·교리의 전달이 주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좁은 의미로는 종교극이라고는 할 수 없다. 특정 인물이 아닌 보편적 인간을 대표하는 주인공의 사실적인 표현과 진·선·미·신앙·악·허영·방탕 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 한 것이 특징이다.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 등지에서 설교에 다소 희극적인 각색을 함으로써 성행하였으며, 작자는 대부분 성직자였다.}}}

윌리엄 앨런 닐슨 지음, 김영범 옮김. 『열린 인문학 강의 : 전 세계 교양인이 100년간 읽어온 하버드 고전 수업』, 유유, 2012
[108] 전희(轉義), 또는 수사적 어구를 뜻하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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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중세 종교극은 사도들의 생애와 순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기적극'과 인간의 창조와 타락, 예수 탄생과 부활, 고난 등을 주제로 한 '신비극', 기독교 속성을 논의하는 '도덕극'으로 다양하게 변해갔다. 이들 중 '도덕극'은 '기적극'과 '신비극'보다 훨씬 늦은 1400년 경에 나온 것으로, 추상적인 개념들이 의인화해 인물로 등장한다. 이렇게 추상적인 성격에 등장인물에게 생명을 보여해 무대에 올린 이유는 극 상연의 궁극적인 목표를 즐기는 가운데 성서 내용과 교리를 깨닫도록 하는 데 두었기 때문이다. 이중 도덕극에서 가장 많이 다룬 소재는 죽음이다. 1495년경에 나온 작자 미상의 〈만인(Everyman)〉이 대표작으로, 죽음이라는 가장 엄숙한 진실 앞에서 인간의 향배를 관찰해 보게한다. 죽음의 부름을 받게 된 인간이 갖고 있는 자비나 지식, 힘이나 감각, 또는 우정이나 혈연, 재산에게 무덤까지만 동행해 줄 것을 청하지만 모두 거절한다. 단지 '선함'만이 응낙해 심판 때 인간을 변호해준다.}}}

안영옥 지음, 『스페인 중세극』, 지만지드라마.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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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얼마 전 남쪽에서 보내온 [[희곡]]을 읽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희곡이요?"
"예에. 큰 부자 상인의 앞에 [[악마]]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간을 데려와라. 그렇지 않으면 널 잡아 먹겠다고. [[상인]]은 목숨이 아까워서 젊디젊은 아름다운 [[하녀]], [[하인]]들 중에 가장 살찐 하인 등을 갖다 바칩니다만 악마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호오."
"그래서 결국은 집안뿐 아니라 온 도시에 돈을 풀어서 맛있어 보이는 인간을 찾는데, 마침내 벌꿀과 우유의 향내가 나는 수습 [[수도자]]인 어린 사내아이를 발견합니다. [[수도원]]을 통째로 돈으로 산 부자는 재빨리 악마에게 사내아이를 갖다 바칩니다. 그러자 사내아이가 악마에게 그러는 겁니다. 신을 거역하는 악마여,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간은 나 같은 게 아니다."
로렌스는 완전히 이야기에 빠져 자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간은 바로 당신의 눈 앞에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향신료]]를 짊어지고 다니며 돈을 벌어서, 그 살찐 영혼에 향신료의 [[감칠맛]]이 듬뿍 밴 남자가― 라고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마르하르트는 몸동작까지 취해 가며 마지막에는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상인의 흉내를 내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는지 겸연쩍게 웃었다.
교회가 상회를 향해 장사의 절도를 설교하는 종교극용 희곡인데, 말씀을 듣고 보니 생각이 났습니다. 확실히 앞으로 큰 돈을 벌 상인에게는 향신료가 딱이구나― 하고."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308

  • 2권에서 호로와 로렌스의 대사에서 "기사가 갇혀있는 공주를 안고 도망친 옛날 이야기들 처럼?"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중세 초기에 유행했던 기사문학을 말한다. 기사문학이란 기사의 용맹함, 사랑 등을 묘사한 문학 장르로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히 만들어 졌다. 그리고 이를 두고 옛날 이야기라고 언급한 이유는 작중 모티브가 된 세계관이 13세기 무렵의 북유럽이니 기사문학이 유행한 것은 작중 시점보다 최소 100년 전에 쇠퇴한 문학이기 때문이다.

7.4. 물품[편집]


  • 작중에서 종이로 막혀있는 창문들이 등장하는데, 실제 중세시대에는 유리로 된 창문은 중세 후기에 귀족들의 집에서나 볼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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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창이 있기는 해도, 큰 상회들처럼 유리가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창틀에 기름 먹인 마포를 달아 놓은 것 뿐이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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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 계급에서는 창문을 기름 수건이나 헝겊이나 종이로 막았지만, 중세 후기에 이르러 귀족들의 집은 채색한 유리창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우리가 외면한 또하나의 문화사』

  • 작중 전신 판금갑이 등장하고[109] 그 값어치가 비싸다는 대목이 나온다. 전신 판금갑의 경우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만큼 귀족만이 입을수 있을 정도로 비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민들이 사입기엔 가격이 적은 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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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시절 이 몸의 목숨을 지켜 준 철갑옷엔 얼마만 한 가격이 매겨지려나?"
[[맨앳암즈|무공을 꿈꾸며 집을 떠난 젊은이]]가 기사가 될지 산적이 될지는 철갑옷을 맞추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정도로 고가(高價)이고, 걸치기만 해도 신분이 갈리는 왕의 외투와 매한가지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7)』, 서울, 학산문화사.
[109] 작중 묘사로는 그냥 "철갑옷"이나 삽화는 영락없는 플레이트 아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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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갑옷, 방패, , 등을 비롯한 각종 무기들도 모두 자기 돈으로 구입해야 했어요. 철제로된 갑옷은 모두 수제품으로, 여기에 호버크라고 불리는 보호장비 등을 갖추려면 요즘돈으로 수천만원 이상이 들었어요. 칼, 창 같은 공격용 무기들은 이와 별개로 추가 구입해야 했죠. 물론 많은 경우엔, 기사 개인 뿐 아니라 가문에서 그 비용을 도와주긴 했지만 말이죠.}}}

이범진 기자의 잉글랜드 문화사 - 기사가 되는데 필요한 사교육비는 얼마?

  • 작중에서 호로에게는 새 옷을 선물해주면서 상당히 비싸다는 언급을 하고, 반면 자신은 북쪽 추위를 이기기 위해 허름한 헌 옷을 구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중세시대에는 새 옷은 귀족들이나 입는 물건이었다. 당시 도시민들의 경우 귀족들이 입다 버린 헌 옷을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 때문에 중세에는 왕이나 귀족이 입다 버린 헌옷을 수선해 판매하는 헌옷 장수가 있었다. 이들은 깨끗한 옷보다 찢어지거나 얼룩이 묻은 옷을 더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수선을 통해 자신만의 디자인을 새겨넣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디자인뿐 아니라 누가 입었는지가 인기의 척도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농민들은 도시민보다 더욱 열악해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바지는 반바지에 스타킹 같은 바지를 입었다.[출처9]

그렇기에 호로가 로렌스가 힘겹게 모아 산 옷을 날려 먹고 이후에 값비싼 옷을 입을 수 있던 것도 로렌스의 배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토트 콜의 경우 옷을 사주지 않고 기워 입으라고 실을 사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110]

파일:external/www.livescience.com/medieval-books.jpg
중세 시대 서적들
[출처9] [110] 다만 이때 로렌스는 실을 살 돈으로 콜에게 더 나은 외투를 사줄 수 있었으나, 콜이 마을을 떠날 때 가져온 추억의 물건이 수선용 실보다 싸다는 것에 마음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여 그냥 실을 사줬다

  • 작중에서 호로가 책을 빌려 볼 때 로렌스가 가죽으로 덮개를 만든 책은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말을 한다. 실제로 14세기까지는 책은 굉장히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종이뿐 아니라 양피지도 상당히 값비싼 물건들이었다.[111] 책은 그리스도교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이슬람 도시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출처1] 그 때문에 수입하기가 굉장히 힘들었기에 저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런 책들은 성직자들이나 귀족들 정도가 되어야 보유할 수 있었다.

서양화에서는 초상화를 그릴때 주인공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들이 가진 재산도 같이 그렸는데 책도 엄연히 재산 중 하나로서 그려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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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 책 1권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약 300두가 필요했다. (중략) 책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어서, 1047년 어떤 수도자는 책 1권을 잘 가꾼 포도밭과 바꾸었고, 15세기 독일에서는 설교집 1권이 양 200마리와 수십 가마의 호밀과 바뀌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구텐베르크의 귀환 : 출판문화의 re-르네상스를 위한 성찰』
[111] 종이가 본격적으로 민간에 보급된 시기는 15세기부터였다.[출처1]
  • 또한 모든 사람이 의무교육을 받고 대부분이 대학 공부를 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달리, 당시 교육은 정말이지 극소수 1%의 특권이었고, 오늘날과 같은 학교 교육도 보편화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니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없는 무지몽매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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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이라면 철학적인 책에는 투자해선 안 된다. 책들은 오직 현자와 학자만이 구매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컨스티블』, p.197
  • 종이와 양피지 값만 비싼 것이 아니라, 제본 과정도 무척이나 복잡하고 어려웠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개발하기 전까지는 손으로 직접 복사하는 필사본이 대부분이었고 이 때문에 제작이 제한적이며 수량 또한 대중화 되기엔 크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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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시대의 [[제본]]생산은 무척 비싼과정이었다. [[15세기]] 중엽 활자의 발명까지 중세 제본 생산은 필경으로 생산되었다. 반면 종이는 15세기에는 크게 일반화 되었는데 필사본은 그때까지 정성껏 준비된 동물가죽으로 알려진 양피지나 송아지 가죽이었다.
[[제본]]공장은 이 시대에 걸쳐 발달했다. 앵글로-섹슨 시대에는 [[수도원]]이 제본 생산과 보관의 중심지였다. 1530년대 수도원 해체까지 수도원과 기타 종교 건물은 계속해서 책을 생산했지만, 14세기 초반부터는 특히 런던에 있어서는 상업적인 제본 사업이 생겨났다. 이 생산조직은 엉성하여 양피지 생산자, [[필경사]], 달필가, 채색자, 제본가와 같은 다양한 예술인 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들은 도시의 한 마을에 주로 살고 있었다. 책장수나 거래업자들은 책 생산에 협업하여 돈 많은 후원 자의 주문에 응했고 때로는 동일한 책의 한 절(折)이나 제본을 책임지는 여러 사람의 필경사에게 일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 가게들은 왕정의 관료들의 직업적인 필경 서비스에 응할수 있었다.
(중략)
이 시대를 통하여 책 시장은 변화하였다. [[수도원]]과 기타 종교기관 그리고 왕정의 관료는 여전히 책 생산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앵글로-노르만 시대부터 책은 귀족이나 상류 사회를 위해서도 생산되고 있었다.
}}}

『영문학으로 본 중세시대』

  • 1권에서 로렌스가 호로에게 화폐 순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 "그러니까 사람들은 화폐의 변화에 지극히 민감해지지. 그야말로 저울과 안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한 변화도 큰 변화로 여길 만큼."이라는 말을 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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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라는 건 말이지, 거의 신용으로 성립되는 거야. 화폐 속에 들어 있는 을 같은 무게의 은과 금의 가치와 비교했을 때, 은화금화 쪽의 가치가 확실히 높지. 물론 가치는 아주 신중하게 정해지지만, 사실은 원래는 그 정도 값어치가 아닌 것에 가치를 매기는 거니까 그야말로 신용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뿐만 아니라, 실제로 화페의 순도 변화는 웬만큼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정확히 알 수는 없어. 환전상들도 분명하게는 몰라. 녹이지 않는 한은 알 도리가 없는 거야. 그런데 말이지. 화폐라는 게 그런 신용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거니까, 어떤 화폐가 인기를 모으게 되면 액면가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되는 일이 많이 생겨. 그 반대인 경우도 있고. 그리고 인기를 좌우하게 되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이 은과 금의 순도 변화야. 그러니까 사람들은 화폐의 변화에 지극히 민감해지지. 그야말로 저울과 안경으로는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한 변화도 큰 변화로 여길 만큼."}}}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144-145.
파일:external/historyofinformation.com/first_depiction_of_spectacles-tommaso_da_modena_1352.jpg
『위고 추기경의 초상』. 토마소 다 모데나 作. 1352년.
이때 언급되는 안경중세 중기에 처음 등장하는 물건으로 작중 모티브가 된 시대와 일치한다. 13세기경에 처음으로 제작된 이 안경은 14세기와 15세기를 거치며 유럽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현재까지 기록상으로 안경이 발명 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최초의 기록은 정확히 알수가 없다. 로저 베이컨이 1268년에 "누구든지 수정이나 유리를 통해 글자나 작은 물체를 관찰하면, 그리고 그 수정이나 유리가 둥근 것을 자른 단면이고 그 볼록면이 눈 쪽으로 향하고 있을 경우, 글자는 훨씬 더 잘보이고 더 크게 보일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겨 안경의 개발자로 여겨지기도 하나, 렌즈뿐 아니라 테두리까지 포함된 안경의 존재는 1305년 2월 23일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피사의 조르다노가 미사 도중 신자들에게 언급한 것이 <피렌체의 사순절(Quaresimale Fiorentiono)>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어 의견이 분분하다. 안경이 그려진 가장 오래된 그림인 <위고 추기경의 초상>은 이로부터 50여년이 지난 1352년에 제작되었다.
실제로 안경을 착용하고 돌아 다닌 것이 확인이 된 것은 베니스의 뮤라노(Murano) 섬에서 연질 유리를 볼록 렌즈로 깎아 안경테두리에 결합해 끼고 다닌 것이었다.출처 그러나 이 시기 물건은 품질이 좋지 않았던 데다 값비싼 물건이었기에 아무나 사용하지 못했다. 이런 안경의 주요 소비층은 성직자와 상인으로 공부 및 필사를 위해 독서용 안경을 낀 성직자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장부 기록을 위해 안경을 착용했다는 상인들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소수의 인원들이 착용했던 안경은 15세기 부터 렌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 지며 사용이 확산되었고, 15세기 후반에는 근시를 위한 안경이 발명 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wiki style="margin:10px"
-1 "그래서 뭐, [[토트 콜|콜]]처럼 [[야훼|신인지 뭔지]]에게 기도하려고? 눈이 좋아지도록?"
"아니지. 그래서 [[수도원]] 인거야."
[[크래프트 로렌스|반려]]는 그렇게 말하고는 집게손가락과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눈에 갖다 댔다.
"[[안경]] 말이야."
"안경?"[* 다만 호로가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이 반응하는 부분은 옥의 티에 가깝다. 앞서 언급했듯이 1권에서 이미 로렌스가 호로에게 화폐의 순도를 설명하면서 [[안경]]을 언급했기 때문.]
"여행하면서 어딘가에서 보여 준 적 없던가? 물 한 방울을 이파리 위에 떨어뜨리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모양으로 부풀잖아? 그런 모양의 유리를 가공해서 잘 갈아 낸 거야. 글자를 크게 확대해서 보이게 하거든. 부자 수도원에는 질 좋은 안경이 많이 있을 거야."
상상이 잘 가지 않지만, 반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 건가? 하고 맥 빠진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반려가 손가락으로 만든 동그라미를 내 눈에 갖다 댄다.
"듣자 하니 이렇게 [[안경|눈에 대는 것도 있대]]. 이러면 유리가 커지니까 가는 비용도 껑충 뛰어 오르지만, 대신 세상은 자세히 보이게 된대."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9)』, 서울, 학산문화사, p.26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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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시대 최초의 안경렌즈는 11세기경에 투명한 석영 또는 녹주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안경은 유럽 [[수도자]]들 사이에서 원고 읽는 것을 돕기 위해 처음 사용 되었습니다. 석영으로 만들어진 안경은 아라비아 천문과 수학자 Alhazen 이론에 근간을 두고 있지만 현재와 같이 눈에 직접 렌즈를 씌우는 생각을 하기까지는 두 세기가 더 걸렸습니다.

그 후 1260년대에 리베트라는 광물로 안경렌즈를 만들었는데, 나무로 된 2개의 원형틀과 볼록렌즈를 못으로 연결하여 안경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안경은 팔을 움직이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용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서 안경착용은 지식인의 상징과 같아서 유명인의 초상화에는 비록 그들이 안경발명 이전에 살았을 지라도 종종 안경을 착용한 모습을 그리곤 했습니다.
}}}

니콘 공식 홈페이지. 흥미 있는 안경렌즈의 역사 2편 - 중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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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경이 발명된 이후에 놀라운 기술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유리 생산과 생산 공정의 기술적 완벽함이 직접적인 관련을 가졌기 때문이다. 13세기 말부터 안경이 확산되면서 특히 책을 읽는 독자층이 큰 헤택을 받았다. 반면 근시 수정을 위한 렌즈는 15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중략)

인위적으로 시야를 확대하는 것은 놀라운 발명이었다. 렌즈 제작은 문화와 학계 인물들의 활동을 위한 가능성 향상에 중요한 여정이었다. 게다가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지적이고 전문적인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특히 15세기 후반부터 노안에 효과가 뛰어난 근시용 렌즈가 생산되었다. [[14세기]]에 접어들며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는 전 유럽을 대상으로 한 안경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

『중세 3 : 1200~1400: 성, 상인, 시인의 시대』

  • 19권에서 맷돌의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를 두고 "중세 유럽이 아니라 동양풍 아니냐?"고 반문 할수도 있다. 하지만 맷돌은 아시아권에서만 사용한 물건이 아니다. 곡물을 갈아서 섭취하는 문화는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존재했으며 이미 신석기 시대의 유물등을 보더라도 한국 전통적인 맷돌과 동일한 모양의 물건, 즉 Quern-stone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음을 알수가 있다. 이후 중세를 넘어 산업시대를 맞이하기 전까지 중세 유럽에서도 널리 사용된 물건으로 자세한 내용은 영문위키해당 포스팅을 참고하자.

  • 18권에서 류트를 연주하는 무희의 존재가 언급된다. 류트는 16세기 무렵부터 악보가 제작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고대 이집트페르시아에서 이미 존재했던 물건이었고 위키백과에 의하면 중세 말기 및 르네상스 초기였던 15세기까지는 즉흥 연주에 사용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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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도 [[중세 시대]] 류트의 주요 사용처는 [[반주]]였을 것이나, 1500년대 이전에 류트로 연주한 음악은 (현재까지) 온전히 남아서 전해진 것이 없다. 중세 및 초기 [[르네상스]]의 반주는 대부분 즉흥곡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러한 이유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Song accompaniment was probably the lute's primary function in the Middle Ages, but very little music securely attributable to the lute survives from the era before 1500. Medieval and early-Renaissance song accompaniments were probably mostly improvised, hence the lack of written records.
}}}

영문 위키피디아 류트 항목

  • 케르베에서 키건과 에이브 볼란 사이의 사건에 휘말린 로렌스가 로엔 상업 조합에서 온 편지를 받게 되는데 이때 편지에 새빨간 밀랍 인장이 찍혀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는 실링 왁스를 말한다. 특히 중세에 접어들어서 가문이나 길드의 문장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던 시기였기에 자신들이 보낸 공적인 문서들에 밀랍 혹은 셸락을 이용해 자신들의 문장을 새기는 일이 무척이나 흔했다.
||{{{#!wiki style="margin:10px"
-1 값비싼 양피지를 나이프로 재단하여 내용을 기입한 후 [[모래]]를 뿌려 잉크를 말린다. 그 사이에 [[말총]]으로 만든 끈과 붉게 염색한 밀랍을 준빟나다.
잉크가 마른 것을 확인하고 양피지를 둘둘 만다. 녹인 밀랍으로 봉인하여 말총을 꼬아 만든 끈으로 묶으면 친서가 완성된다.
(중략)
"당신, 이런 게 왔는데?"
그러면서 호로가 로렌스를 향해 치켜든 양피지에는 한 눈에도 알 수 있는 인장이 찍혀있다.
로엔 상업조합의 조합인.
[[실링 왁스|새빨간 밀랍]]으로 찍힌 그 인장이 악마의 서명으로 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8)』, 서울, 학산문화사.

  • 작중 로렌스가 지도를 보면서 "도움이 되진 않지만, 있는 게 낫다"고 말한다. 이는 중세 당시의 열악한 지도를 묘사한 것이다.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지도 형태는 마파 문디(Mappa mundi)라 불리는 지도들이 대표적으로 당시 측량술의 부재, 열악한 교통망 등으로 인해 지도의 정확도가 높은 편이 아니었다.주경철의 히스토리아(24) - 중세 지도, 중세의 지도들

  • 17권 행상인과 잿빛기사 에피소드에서 부싯돌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 불을 붙이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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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싯돌을 연신 맞부딪쳐 튄 불꽃으로 맨 처음 불을 지피는 것은 풀을 두드려 으깨 물에 빨았다가 다시 말린 뒤 헤쳐 놓은 것.[112] 그런 후 지푸라기, 장작 순으로 불을 옮겨 붙인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7)』, 서울, 학산문화사.
[112] 이렇게 불을 붙이기 용이하게 만든 촉매재를 "부시깃"이라고 부른다.

  • 호로가 쓰는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 진 빗이라고 나온다. 실제로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 진 빗은 세계 각국에서 오래 전 부터 사용된 고급 물품으로 중세시대에도 부유한 이들이 주로 들고 다녔던 물품이었다. 바다거북의 등껍질로 주로 만들어 졌는데, 1973년부터 푸른바다거북의 포획이 금지되면서 현재는 플라스틱으로 모양만 비슷하게 만든 가품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도 조선시대에 제작된 별갑(거북이 등껍질)으로 만들어진 빗이 전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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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맙습니다."
짤막하게 말한 뒤 곧바로 뛰어다.
상당한 금액의 청구서를 손에 쥐고, 로렌스는 있는 힘껏 달렸다.
손에 꽉 쥐어 구겨진 청구서에 적혀 있던 상품은 로렌스가 그렇게까지 할 만한 것들이었다.
날짜는 오늘, 청구한 곳은 파치오 시에 소재한 모직물상과 과일상.
그 내역은, 호화로운 여성용 [[로브]] 두 벌에 비단 허리띠, 여행용 [[신발]]과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빗. 그리고, 대량의 [[사과]].
은화로 쳐서 140냥을 웃도는 그것들은[* 작중 트레니 은화 1냥을 아껴쓰면 1주일을 먹고 잘 수 있다고 했으니 140냥 이상이면(...)], 특히 사과는 도저히 손에 들고 운반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311.

8. 중세 도시[편집]



8.1. 자유도시대학도시[편집]


  • 작중에서 '국왕과 싸워 자유를 쟁취한 도시'들이 언급되는데, 11세기부터 시작된 상업의 발달로 도시의 경제와 인구규모가 성장하자 국가(=국왕)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해낸 도시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베네치아, 아말피, 바리, 피사, 제노바 같은 지중해의 무역 해상도시들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 도시들은 자기 지배(self-governing)를 실현하고 있었으므로 왕실의 지배에 벗어나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도시를 자유롭게 운영했다.[출처2][113] 이들 도시에는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중앙 정부와는 별개로 운영했으며 시를 보호하는 군대도 별개로 운영했다. 화폐의 주조권도 도시에게 부여되었기에 중세시대 각종 화폐들이 난립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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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 활동의 성질상 봉건적 지배로부터의 해방, 즉 자유과 자치권을 원하였다. 이러한 자유와 자치권의 획득은 평화롭게, 즉 돈으로 사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힘으로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러기 위하여 도시민들은 서로 서약(conjuratio)으로 단결하고 코뮌(commune)을 형성하였다. ⋯⋯ 대부분의 도시가 12세기 중엽까지는 자유와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특허장(Charter : Privilegien)[A]으로 문서화되었다. 그 내용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신분의 자유와 경제활동에 필요한 여러 자유였다. 신분의 자유는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114](Stadtluft macht frei.)는 말과 같이 도시가 갖는 지역적인 특권으로서, 도시 내에 1년과 1일을 거주하면 그 이전의 신분과는 관계없이 누구든지 자유로운 신분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농촌의 농노제의 흔적은 도시의 성벽 내에서는 사라졌으며 시민과 자유민은 동의어가 되었다.}}}

민석홍 저, 『서양사개론』, 제2판, 제37쇄, 서울, 삼영사, 2016, p.212-213.
[출처2] [113] 물론 형식적으로는 이들 도시 국가의 주권은 동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교황령이 나눠 가졌다. 다만 실효가 없었다.[A] [114] "Stadtluft macht frei". 이 문구는 15권 92p에서 "모든 시민에게 자유 있으라."라는 말로 패러디되어 등장한다.
또 작중에서 한 몇몇 도시들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1,000년경에 베니스 등 일부 도시들은 그리스도교와 적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 세력과도 교역을 진행하는 등의 종교와 무관한 움직임을 보였다.[출처3] 또한 12세기 베네치아의 경우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 대해 관용을 베풀고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는 베네치아의 급격한 성장에 도움이 되었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16,000명이 넘는 직인들이 활동했다.[출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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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 볼로냐 대학교의 수업 장면. 135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 토트 콜이 아렌트라는 대학도시에서 공부한 것으로 등장한다. 실제 중세 대학도시는 11세기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의 서적들이 대거 유럽으로 흘러 들어왔고, 상업이 자리잡으며 이것이 생활의 풍요로 이루어지며 "배움"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 것에서 유래했다. 기존의 교육을 담당하던 성당학교(Cathedral school 또는 schola)들의 그늘에 벗어난 교육 환경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를 중심으로 한 대학도시였다.[115] 그리고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돈을 모아 박사에게 강의료를 지급하는 방식이 이루어 진다는 설명이 이어지는데 이는 중세 남부 유럽의 대학들에서 이루어지던 수업 방식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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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대학의 특징은 학생이 대학 운영 전반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각 동향단은 학생장(rector)을 선출하여 조합을 대표하게 했다. 각 학생 조합은 자체 학생장의 재판권에 복종했으며 초기에는 스스로 교수를 채용하여 교수들에게 수업시간 준수나 강의의 체계성 등 상세한 규칙 조항을 준수하도록 규정했으며 그러한 조항에 입각하여 교수들의 봉급을 지불했다. 교수들은 전적으로 학생들의 수업료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에 의한 집단 수업거부는 교수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위협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교수들은 학생장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볼로냐를 떠나려면 허락을 얻어야 했으며, 강의를 늦게 시작하거나 너무 오래 끌면 벌금을 내야 할 정도였다.}}}

박승찬, 「중세 대학의 설립과 발전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보루-」, 『가톨릭철학』, 제26권, 2016, pp.5-56, p.13.
[출처3] [출처2] [115] 우니베르시타스가 현재 영어에서 대학(University)를 뜻하는 단어로 발전했다. 다만 이때의 대학은 교사조합, 학생조합이 중심이 된 이익집단이었다.
그리고 나이 어린 토트 콜이 어떻게 대학도시에서 공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중세시대 대학들의 커트라인은 12세 이상이라면 계급에 상관없이 돈은 상관 있지만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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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대학의 학생들은 대개 14~15세 때 대학에 입학하였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전에 감독학교나 수도원에서 7, 8세 때부터 3학 4과, 즉 문법, 수학, 음학, 수사학, 논리학, 윤리학, 천문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대학원에는 법학(교회법과 민법), 의학, 신학의 세 분야가 있었고, 이 대학원 졸업생들은 중세 사회에서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최고의 대우와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

8.2. 도시의 구조[편집]


  • 작중 등장하는 상업도시들[116]은 모두 강을 끼고 있다는 것이나, 도로망의 부실함, 시벽, 시장, 성당의 위치, 도시내에서는 촛불 사용의 규제가 있다는 언급, 그리고 자치권과 길드의 발달등도 모두 중세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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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세계관을 그린 지도. 뤼빈하이겐을 제외한 상업도시들은 모두 강을 끼고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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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도시의 특색은 고대도시와는 달리 상공업, 특히 시장과 무역을 기반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첫째, '''입지상으로 보면 해항(海港)·하구(河口) 등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고, 또 방위에도 편리한 지형을 근거로 발달하였다.'''[* 대표적으로 [[다뉴브 강]] 강가에 위치한 [[빈(오스트리아)|빈]], [[브라티슬라바]],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다뉴브 강 지류에 위치한 [[뮌헨]], [[잘츠부르크]], [[자그레브]], [[부쿠레슈티]], [[라인 강]]가에 위치한 도시 [[뒤셀도르프]], [[쾰른]], [[마인츠]] 등이 있다.]
둘째, '''도로망은 불규칙적이며 폭도 좁았으나''' 나중에 건설된 도시는 계획적으로 건설함으로써 대다수가 직교형이었다.
셋째, '''중세도시를 결합하는 3대 요소는 성벽과 시장과 성당(聖堂)'''이었다. 즉, 도시 중심부에는 광장이 있어서 시장이 서고, 부근에 시청과 성당건물이 높이 솟아 있었다.
넷째, 일반 민가는 대개 목조 건물이어서 자주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뒤에 점차로 돌·벽돌 등 내화재(耐火材)로 건축하게 되었다.
다섯째, 도시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자치조직이 인정'''되었는데, 주위의 농촌과는 독립한 재판부와 법정을 가지고 국왕·영주로부터 자치권을 허락받았다.
여섯째, '''길드가 발달하여''', 교회를 제외한 가장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공동생활체를 이루고 있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서양의 중세도시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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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7년 중세시기의 베네치아
  • 12권에 등장하는 케르베는 북부, 남부, 삼각주로 구성되어 있고 거주지역, 상업지역 등으로 나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12세기 베니치아가 모티브가 되었다. 베네치아는 급격한 성장을 거치면서 지역에 따라 구역을 나누었는데 선박 건조와 군수품 제조, 유리 제조 등이 이루어지는 산업 공동체 구역, 숙소들이 위치한 특별거주구역 등으로 나누었다.[출처2] 또한 케르베에서는 귀족과 상회 간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데 실제로 도시국가들은 도시 지배권을 두고 길드, 상인, 귀족, 성직자들 사이의 알력 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출처3]

  • 1권에서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다 만든 수로의 존재가 등장하는데 중세시대의 인공수로를 묘사한 것이다. 중세에도 필요한 곳, 예를 들어 공공 시설이나 도심지역에 물이 필요하면 수로를 건설하고 그 수로들은 거대한 인공연못과 연결되어 물길을 저장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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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둘은 어느덧 좁다란 강에 맞닥뜨렸다. 파치오 옆을 흐르는 슬라우드 강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흙을 판 뒤 강에서 물을 끌어들여 만든 용수로다. 이 용수로를 이용해 슬라우드 강을 따라 이 도시로 운반되어 온 수 많은 화물들이 일일이 땅에 내리지 않고 효과적으로 시장으로 운반할 수가 있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 도시 지하에 거대한 묘지가 있고, 이를 교회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카타콤을 말한다. 현재 남아있는 카타콤으로는 로마와 파리에 남아있는 것이 유명하다. 또한 지하수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지하 수로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존재했던 건축물들이다. 로마의 경우에는 아그리파의 지시로 건설한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117]라는 길이 20km, 부피 100,000m³에 달하는 지하 수로가 존재했고, 로마 멸망 후 폐허가 되었다가 1453년에 복구된 이후 현재까지 운용되고 있다.[출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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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날 지하수로가 있던 곳으로, 시장까지 용수로가 들어온 뒤로는 쓰이지 않고 있는 곳이다. 로렌스가 알고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으나, 밀로네 상회는 이곳을 완벽하게 파악하여 마음대로 확장한 뒤 몇몇 건물을 지하에서 연결시켜 놓은 모양이었다.
이런 것은 교회도 특기다. 지하에 묘를 만들 것이라 하고는 도시 지하에 독자적인 통로를 구축해 놓는다고 한다. (후략)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241.
[117] 라틴어로 "처녀의 수로."[출처18]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 3권 크멜슨의 경우 차별받으며 살아가는 연금술사가 따로 사는 구역이 존재하는 데 중세 도시에선 계급에 따라 거주하는 구역이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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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도시민은 여러 계급으로 구분되어 차별 대우를 받았다. 계급에 따라 사는 지역도 달랐다. 도시민이기는 하나 시민권이 없는 경우에는 성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 계급에 따라 입는 옷, 심지어 착용하는 장신구까지 세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근대초인 1621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시는 도시민을 다섯 계급으로 나누는 법을 만들어 일상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②

  • 작중 뤼빈하이겐의 성문 위로 거대한 구멍이 있다고 언급되는데 이는 중세 성들의 방어시설인 살인 구멍(Murder Hole)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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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지은 성 문루의 둥근 천장에는 구멍이 여럿 있다. 위에서 이 구멍으로 물을 부어 불을 끄거나 공격군의 머리 위로 돌이나 끓는 물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비주얼 박물관』 43권, 중세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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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디엄 성에는 입구통로 천장에 이른바 살인구멍이 있다. 불이 나면 이 구멍으로 찬물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이 침입하면 끓는 물이나 달군모래, 그밖에 살상물질을 퍼부었을 것이다.}}}

『비주얼 박물관』 49권, 중세의 성

8.3. 도시의 운영[편집]


  • 작중에서 시참사회가 등장하고[118], 17권 시점에서는 에이브 볼란이 남쪽의 대 제국에서 큰 돈을 벌며 시참사회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시참사회는 중세 도시에 있었던 시 정부조직의 일원인 도시참사회(都市參事會)를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세도시는 특허장을 받아 이를 근거로 운영되었는데[A] 이들 특허장에는 시 정부를 조직함에 있어서 사법권을 가진 재판소와 1명의 시장 그리고 최대 40여명 이상의 참사회원(參事會員)으로 구성하게끔 되어 있었다.[출처12]
중세도시는 자유와 더불어 영주재판권이나 교회법으로부터 해방되어 독자적인 재판권과 사법권을 갖는 특수한 법적 구역이 되고, 시참사회(concilium: curia)라는 독자적인 행정기관과 시민군 등을 갖는 자치체가 되었다. 시민들은 도시 내에서의 질서유지를 위한 벌칙을 포함한 도시법을 제정하고, 선서에 의하여 이에 복종하고 도시를 수호하는 동시에, 상호 원조할 것을 서약하였다. 시민들은 저마다 예외없이 도시의 혜택을 향유하는 동시에, 수입에 따라 평등하게 시(市)의 여러 비용을 부담하였다.

-민석홍 저, 『서양사개론』, 제2판, 제37쇄, 서울, 삼영사, 2016, p.213.

도시에서는 보통 12인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도시 안의 여러 업무에 대해 최종 결정을 하고 그들이 대표로 선출하는 시장이 최고의 책임을 진다. 또 살인 같은 중범죄는 다룰 수 없으나 사기나 절도 같은 사소한 범죄들은 도시 재판소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그리고 18권 에피소드인 "진흙투성이 배웅하는 늑대"에서 "좁은 도시 안에서의 권력 투쟁. 심지어 말 그대로 한창 발전 중인 도시니 참사회의 자리는 황금의 옥좌나 다름없다."라는 말이 언급되고, 각종 길드간의 시정참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독자적인 행정조직과 군대를 보유한 시참사회의 권한이 강력했다는 점과 중세 독일의 일부 북부 도시들[119]에서 시참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길드들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다. 독일 북부의 괴팅엔의 경우엔 상업길드가 돈이 궁했던 귀족들을 후원해주는 대신 시참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상업길드 소속원들이 도시사회를 통제하기도 했다.
괴팅엔의 경우 도시의 건설시기에 상업활동에 참여한 자들 중에 귀족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었고, 영주가 상인들에게 경제활동에 대한 특권을 부여했으며, 상인들이 도시공동체의 주도세력으로서 시참사회를 중심으로 상인세력의 이해관계와 도시의 자치를 지켜내기 위해 전방위로 노력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중세말 괴팅엔 상인길드는 직물 위주의 상품으로 원거리교역을 수행하면서 도시경제의 주축을 형성했고, 소속 조합원들은 시참사회를 통해 경제정책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사회까지 통제했다.

중세 도시는 상인길드의 볼모였는가? 괴팅엔의 사례

  • 1권에서는 자경단의 존재가, 3권에서 야간 순찰을 하는 야경대가 조직되어 있다고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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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는 눈을 힘껏 감았다가 이내 확 뜨고 뛰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다시는 호로와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두운 골목을 내달리고, 수도 없이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달려 나갔다. 큰길을 일단 가로지르고, 다른 블록의 골목으로 뛰어든 뒤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아직도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저쪽도 그리 오래 소동을 피울 수는 없을 것이다. 도시의 자경단(自警團:지역 주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조직한 민간단체)에게 걸렸다간 골치 아파질 터이기 때문이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207.
[118] 5권에선 리콜로 데클리라는 인물이 "50인 회의"라는 시운영회의의 서기로 등장하고, 16권에서 등장하는 장 밀리케는 스베르넬의 영주이자 시참사회 의장이다.[A] [출처12] [119] 일반적으로는 도시국가들에서 상업길드가 시참사회에 이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실제로 자경단을 비롯한 야간 순찰대는 중세시대에 존재했었다. 1667년경 유럽 길거리에 처음 야간전등이 설치되기 전까지 중세의 길거리는 밤만 되면 암흑의 천지가 되었는데, 특히 독일의 경우 겨울철에는 4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지는데 이 때문에 베를린은 중세에 "어두운 도시"라는 이명을 가지기도 했다. 거기다 오블라텐(Oblaten)[120]장수나 불을 켜주는 상인 등 야간에 활동하는 상인들도 필요한 존재지만 사고의 위험이 있기 이 때문에 야간의 치안이 상당히 중요해졌고[121] 이로 인해 도시에는 야간 순찰대를 운영했다. 이들은 연장을 손에 들고 한 손에 종을 들고 다니며 자정이 되면 "12시가 되었습니다!"라고 외치며 불순자들을 감시하는 등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출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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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권에 등장하는 이교도의 도시 크멜슨에서는 대규모 축제가 펼쳐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14세기 피렌체의 축제였던 "노동절(May Day)"을 모티브로 삼았다. 피렌체에서 열렸던 노동절 축제는 도시의 모든 사람이 나와 축제를 즐겼으며, 짚단으로 만든 거대한 동물 인형을 동원했고, 젊은 남녀가 나와 함께 춤을 추었다. [출처3] 작품 속에서 검은 옷과 기이한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는 것도 해당 축제에 등장하는 모습 중 하나.
피렌체는 다양한 상업 길드의 덕택으로 1년에 노동하는 날이 275일 정도여서, 90일 정도는 여유를 즐기며 놀 수 있었다. 축제 가운데 노동절메이데이가 가장 인기가 있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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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의 영광』 p258}}}
또한 샹파뉴 정기시(-定期市)도 어느 정도 모티브가 된듯하다. 샹파뉴[122]에서는 북유럽남유럽의 상인들이 만나 여는 대규모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한번 열게 되면 6개월간 북유럽, 남유럽 등의 상인들이 모여 종교와 관계없이 장사를 진행하게 되었고 이 덕에 막대한 자금이 도시로 흘러들어와 도시가 자치권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 도시를 출입할 때 통행증을 요구한다는 설정은 중세시대 도시 및 항구에서 신분증명서를 요구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잉글랜드헨리 5세 때 국가가 이를 공식적으로 규정한다고 선포하게 되고, 이후 현대의 여권으로 변모하게 된다.

  • 작품 곳곳에서 도시 내 시장의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의 존재가 언급된다. 이는 실제 중세 도시들에서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치는 종소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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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어딘지 먼 곳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장 개방을 알리는 종소리다. 이것을 신호로 진입할 것이라 했으니, 지금쯤 위는 아수라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시장 개방을 알리는 종소리에서 작업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 사이에 구출해내지 못하면 상황이 어려워진다. 위쪽 잡화상에 거래를 하러 사람들이 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 서울, 학산문화사, 2007, p.242.
[120] 독일의 전통 과자로, 얇고 납작하게 구은 비스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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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중세시대 밤은 위험성이 컸었다. 현재 영어로 좋은 밤을 뜻하는 Good Night라는 단어가 중세시대 안녕을 기원하는 "God give you good night(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좋은 밤을 주시기를)"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만 보더라도 중세 야간 치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수가 있다. 출처 -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우리가 외면한 또 하나의 문화사』[출처9] [출처3] 『도시, 역사를 바꾸다』[122] 샴페인의 도시로 유명하다. 애초에 샴페인이라는 말이 이 도시의 영어 이름에서 따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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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한 가격에 대량의 병구류를 입수한 로렌스와 호로는 정오의 종소리가 울리기를 채 기다리지 않고 포로손 마을을 나섰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중세 도시에서 사람들은 닭이 홰치는 소리,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외곽 지대 수도원의 종소리, 하루의 시작을 알리거나 시장의 개장을 알리기 위해서 시장 광장에 새로 설치된 종각에서 울리는 차임벨 소리에 눈을 떳다.

『역사 속의 도시 2』

  • 늑대와 향신료 3권에서 페르미 아마티가 로렌스에게 결투를 신청함과 동시에 공증인을 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중세시대 선술집이 재판소이자,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장소였다는 점을 차용한 장면이다.
중·근세 유럽에서 선술집은 단순히 술 마시는 곳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중세 유럽의 농촌에선 선술집이 재판소로 활용됐으며 독일에서는 돈을 빌려주는 은행 역할을 했다. 18세기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곳도 선술집이었다. 혁명가들은 선술집에 모여 거사를 모의했고 민중의 동참을 호소했다.

"중세 유럽의 선술집은 은행이자 재판소였다"


9. 중세 가톨릭[편집]


  • 엘사 슈팅하임이 자신의 신념을 곧추 세우며 한 말에서 창조주가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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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저는 저의 신을 믿습니다. 모든 신들의 꼭대기에 계시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신으로서."}}}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4)』, 서울, 학산문화사.
작중 교회는 사실상 가톨릭 넓게 보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신은 야훼, 혹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 1권에서 "작은 마을에 으리으리한 수도원이 건설된 걸 보니 귀족의 자제라도 들인 걸까"라는 로렌스의 독백은 중세시대 귀족 자제들이 수도원에 들어가 생활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가문의 계승 원칙이 자리잡기 시작했고[123] 이에 밀려난 가문의 자제들이 수도원에 강제로 들어간 경우가 있었고, 또한 중세 초기에는 수도원이 교육 기관의 역할을 담당해 배움을 위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출처17]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는, 강제로 수도회에 입회시키는 일은 없다.[124] 수도회와 입회 희망자의 뜻이 서로 맞아야 입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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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는 대가족이 흔했다. 장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사가 되고, 딸들은 귀족 남자와 혼인하기 바랬을 것이다. 차남과 차녀들은 흔히 성직을 택했다.}}}

『비주얼 박물관』 43권, 중세의 기사
[123] 유럽에서 가문의 장자 우선 승계는 1050년 부터 자리잡기 시작했다.[출처17]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124] 현대 한국에서 이런 역할은 정신병원이 대신하고 있다(…) 가족끼리의 재산 다툼으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경우가 뉴스에서 종종 나오기도 한다.

  • 4권에서 수도원교회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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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네크를 주운 뒤로 양치기가 되었어요."
"그 전까지는?"
하고 얼결에 묻고 말았다.
"수도원 병설 빈민구제원에서 일을 거들며 살았어요."
과거를 캐묻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다. 그래도 노라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없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보기 드문 양치기 소녀이니 다른 사람이 신상을 캐묻는 것에 익숙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빈민구제원에 있었다는 것은 가족도 재산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지금은 훌륭하게 [[양치기]] 일을 하고 있으니, 하늘에 계신 신께서도 인간들에게 제대로 행복을 내려주시고 있는 것 같았다.
"구제원에 신세를 지고 있을 때에도 늘 스스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에네크를 만났을 때는 행복했어요."
"날마다 기도를 드린 데에 대한 보답이겠지요."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4)』, 서울, 학산문화사.

  • 노라 아렌트가 자신은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빈민구제원에서 일을 거들며 살았다는 말을 한다. 이는 중세 수도원이 사회안전망을 담당했던 것을 차용한 것으로 실제 중세 빈민구제 등의 사회복지는 교회나 수도원이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 오늘날도 가톨릭 교구수도회에서는 어린이, 청소년, 장애인, 미혼모, 노인, 가난한 사람들, 재소자, 이주노동자 등등을 위한 다양한 사회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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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넌 수도원과 교회의 차이가 뭔지 알아?"
아는 척을 할 만큼 호로의 그릇은 작지 않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도원은 신에게 기도하는 장소. 교회는 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장소. 목적이 전혀 달라. 수도원이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 또한 누군가를 올바른 가르침으로 이끌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고, 평생 수도원 안에서만 사는 것도 바깥으로 나갈 필요성이 없어서인 거야."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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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자선에 대한 개념 변화
'''중세의 빈민 구제는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의 자선 사업과 종교적 동기에 의한 개인의 자선 활동이 주류를 이뤘다.''' 이런 자선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누가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치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을 경외하는 기독교인의 빈민 구제는 시여의 귀결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게 하는 경향과 거짓 상태에서 구원 받은 것은 신으로부터 비난 받는다는 사상은 [[영국]]의 1834년 신빈민법에서 나타나듯이 구빈 대책에 구원 억제적인 특성을 가미케 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중세 교회와 민간에 행한 자선과 상호 부조는 결과적으로 당시 정태적 사회내에서 발생한 빈곤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대응책에 불과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사회복지의 발달과 사상』, 김성미 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2년,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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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자선은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이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체계 내에서 의무적인 것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강했던 것은 자선이 중세를 지배하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세 내내 기독교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선활동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한편 자선행위는 중세의 부자들에게도 이익이 되었다. 부자들은 자선을 통해 덕을 실천하고 죄를 씻었다. 상업이 발달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관념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된 것도 자선활동을 부자와 빈자의 거래 혹은 일종의 교환행위로 여기게 한 요인이 되었다. 즉 부조를 통해 부자는 저승에서의 구원을 약속 받았고 이승에서의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프레시안. 가난은 언제부터 죄가 되었나.
또한 5권에서 로렌스가 교회를 찾으러 갔다가 교회 근처에서 서성이는 걸인으로부터 "이 교회에서 , 을 우리에게 나눠준다."라는 말을 듣는데, 실제 중세시대 교회는 걸인들에게 빵 등을 나눠주는 역할을 담당했다.[출처9]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노숙자나 독거노인 등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한다.

  • 떠돌아 다니던 여행자들이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로렌스의 말은 당시 교통사정이 좋지 못했던 당시에는 여행자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고, 죽은 이들을 위한 장례 미사도 집전했던 수도원을 묘사하는 내용이다.[출처13]

  • 3권에서 "교회가 기부금을 받아 경제적으로 풍죽하다"는 발언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 교회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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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에서는 검을 빼든 기사가 가장 강하지만, 마을 안에서는 현금을 가진 자가 제일이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원인도 여기에 있다. 매주 기부금이라는 형식으로 현금이 수중에 들어오니 강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3)』, 서울, 학산문화사. 208년
[출처9] [출처13] 『이야기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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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세의 교회는 중세 유럽인들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였다. 중세 교회의 주된 수입은 군주나 귀족에 의한 기부금과 개인 수입의 10%를 거두어들이는 세가 있었다. 또한 높은 지위의 성직자들은 일반 귀족들과 같이 장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귀족처럼 농민에게 부과금을 받기도 했다.}}}

『1월의 모든 역사: 세계사 : 1월에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종하 저, 디오네,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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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거의 신앙심이 깊었고, 교회는 십일조를 세금으로 거둬들이며 번창했다.}}}

『비주얼 박물관』 43권, 중세의 기사
오늘날 한국 가톨릭에서는 교무금이라고 부른다. 반드시 수입의 10%를 내는 건 아니고, 형편에 따라 정할 수 있다. 또한 수입이 없는 경우에는 내지 않아도 된다.

  • 4권에서 교회의 도시 엔베르크가 테레오의 이권을 강탈하기 위해 엔베르크의 교회가 영주를 앞세워 디엔드란 수도원을 압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중세 초반 교회가 처한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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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중반에 이르러 많은 교구 교회가 방치되거나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교회는 몇몇 지방 유력 가문의 개인 소유물처럼 간주되었고, 그들은 교회 보호 임무를 빙자해 교회를 억압하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구 교회는 마치 영주 소유의 방앗간, 빵공장, 대장간ㅡ농민은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고 영주는 그로부터 수익을 얻는다ㅡ 처럼 장원의 종속물이 되기 일쑤였다.}}}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로버트 스테이시 & 주디스 코핀 저, 박상익 옮김, 출판사 소나무, 2014년

  • 13권에서 "늑대에게까지 설교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한 옛날 옛적의 성인"이라는 대목이나, 12권의 카테리나 루치가 들개들에게 설교했다는 대목은, 새들에게 설교를 한 것으로 유명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대기를 참고한 것이다.
파일:external/saintleonardchurchboston.org/Saint-Francis-Jpeg-Photo1.jpg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조토 디 본도네
여담으로 이 내용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에 다시 한번 사용된다.

  • 시성과 관련 에피소드가 등장하며, 시성이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성유물이 된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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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테리나 루치는 충분히 추앙받으며 성인의 반열에 오를 것으로 거론되었던 성녀입니다. [[레노스]]에서는 신분을 감추기는 했어도, 후원하는 귀족들도 많았어요. 그녀를 성인으로 인정하는 절차인 [[시성]](諡聖)을 위해 [[교황]]님께 보내는 진정서는 지금도 추기경들의 책상속에 들어 있을 겁니다. 어떠세요?"
(중략)
"수도녀([[수녀]]) 카테리나가 [[성녀]] 카테리나가 되면, 저 오두막에 남은 물건들은 주검을 포함하여 모두 성유물이 될 테니까요. 성유물은 엄청난 돈이 된다고 하면 영주도 물레방아를 포기하겠지요. 의심된다면 오두막으로 돌아가 일기를 한 번 보세요. 각 지역 제후들의 이름과 경위가 기록되어 있어요. 저 오두막에 방치되어 있는 바람에 시성 신청도 중단되어 있기는 하지만."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2)』, 서울, 학산문화사. 2010년, p.205

  • 수도자들이 지켜야할 복음삼덕(福音三德)[125]과 관련된 내용이 자주 언급된다. 한 예로 18권의 특별 에피소드에서 토트 콜이 "순종, 순결, 청빈은 신을 섬기기로 결의한 자들이 맹세하는 3가지의 덕."라고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며 후술할 시토 수도원 관련 에피소드에서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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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적 권고 (출처 : 천주교 용어사전) 한자 [福音的勸告]
이는 수도생활의 특성을 이루는 요소로 인정되어 온 '''가난(淸貧), 정결(貞潔), 순명(順命)'''을 말하며, 이 3가지를 복음삼덕(福音三德)이라고 한다. 이는 수도서원의 내용이기도 하다.

가난은 검소할 뿐만 아니라, 소유권의 포기와 재물 사용에 있어서 장상의 규제를 받음을 말한다. 다음에 정결은 [[야훼|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 서약을, 그리고 순명은 서로 종이 되어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복종함을 말한다. 이 3가지는 그리스도를 더욱 자유롭게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며, 그리스도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수도자]]가 발하는 서원이다.
}}}

천주교 용어사전
[125] 가난(淸貧), 정결(貞潔), 순명(順命)을 말하며 가톨릭성직자/수도자성품성사/수도서원 때 이 3가지를 서약한다. 다만 청빈 외에 정결과 순명은, 성직자와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가 지켜야 한다. 가톨릭 신자는 부부관계 외의 혼외 성관계, 자위행위, 포르노 시청 등의 성적 음행을 해서는 안 되고, 교도권에 순명해야지 본인이 제멋대로 교리를 해석하여 믿으면 안 된다.

  • 11권에서 "수도원은 시끄러운 속세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순명과 정결, 청빈의 규율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외진 마을에 건설한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시토 수도원의 규율을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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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추측이지만, 이 마을에 들어올 때 샘이 있는 쪽에 통나무랑 돌이 쌓여 있는 거 봤지? 그건 여기에 수도원을 지으려는 걸 거야."
"수도원…을?"
"그래. 수도원은 선택된 겸허한 정교도가 신께 한결같이 기도를 드리는 장소니까. 시끄러운 속세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순종과 순결, 청빈의 규율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끔. 그래서 이렇게 외진 곳을 택한 거지."
호로는 단 하루라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침묵의 요새.
단, 그것을 짓는 것은 긴 로브 자락을 걸치고 성전을 손에 든 성스러운 어린양들이 아니다.
이 마을사람들은 죄인을 친척으로 두었거나, 혹은 이교도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외진 곳에 수도원을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일뿐 아니라, 그곳에서 수도사들이 생활 할 수 있도록 마실 물과 밭을 확보하는 일 전반도 포함된다.
그것은 가혹한 작업이지만, 저들은 그렇게 하는 대신 자신들의 죄를 수도사에게 속죄하는 것이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1)』, 서울, 학산문화사.

1100년경 처음 창립된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토회 회칙을 가능한 한 가장 순수하고 엄격하게 준수하고자 했다. 세속적인 유혹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되도록 문명과 동떨어진 숲과 황무지에 새로운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들은 모든 불필요한 교회 장식과 화려한 집기들을 회피했고, 정교한 기도문을 강조한 클뤼니 수도원의 방식을 포기하고 명상과 개인적인 기도생활을 존중했으며, 고된 육체노동에 종사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

  • "귀족이 기부해 수도원을 세울 때는 기본적으로 귀족 자신 또는 가까운 사람의 임종이 임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는 로렌스의 독백은 실제 중세 귀족들이 수도원을 건설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세한 내용은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고증 문서의 수도원 문단 참고.
때로는 돈많은 영주가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은 조금이나마 자신의 죄를 씻으려는 것이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비주얼 박물관』 43권, 중세의 기사}}}

  • 프란 보넬리가 "키르야바이넨[126] 용병단"의 종군사제였다는 말과 함께 종군사제가 어떤 일을 하는 지 설명하고 있다. 이는 중세 유럽의 군 편제에서 종군사제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실제로 해야 했던 일을 묘사한 것이다.
||{{{#!wiki style="margin:10px"
종군사제는 전쟁터에서 말로 싸우는 자다. 공포로 다리가 풀린 이를 북돋워 일으키고, 임박한 죽음에 겁먹은 이에게는 마음의 평안을 주는 것이 임무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2)』, 서울, 학산문화사, p.243.
[126] "붉은 매"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다만 늑대와 향신료에선 주인공들과 관련 없는 부분의 설정은 거의 없다시피해 어느 지역의 언어인지, 알파벳이 어떻게 쓰는 건지 등은 알수가 없다.

이와 더불어 각 부대에는 (일반적으로 백인대) 의사, 종군사제, 기수, 포고꾼, 통역원[127] 등이 포함됐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중세 유럽의 군 편제와 병과}}}

  • 양치기인 노라 아렌트가 읊어주는 하느님의 가호를 빌어주는 기도문을 보며 로렌스가 "성경책에 실려 있는 고대 언어, 현재 각국에서 쓰이고 있는 그 어떤 언어와도 전혀 다른 양치기들의 독특한 언어는 몇 번을 들어도 신비롭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때 고대 언어는 라틴어 혹은 히브리어를 의미하고, 현재 각국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들은 당시 지역별로 나뉘어 있는 속어를 말한다.

  • 식욕은 칠죄종 중 하나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칠죄종을 보면 늑향에서 언급한 바와 달리 식욕을 의미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데, 탐욕을 뜻하는 Gula은 원래 라틴어로 식욕을 나타내는 단어로, 칠죄종에서는 음식뿐 아니라 재물 등에 대한 욕망도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wiki style="margin:10px"
-1 봄병이라는 게 있다.
겨울 동안 바다와 강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사람들의 식생활은 극단적인 편식을 보인다. 눈이 내리고 강이 얼어붙을 쯤 되면 날마다 소금에 절인고기와 딱딱한 빵만 먹으며 지내게 되는 것이다. 서리가 내리는 지역에서도 야채가 전혀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겨울철 야채는 먹기보다 내다 파는 것이 이득이다. 야채는 먹어도 따듯해지지 않으나 야채를 판 돈으로 장작을 넉넉히 사면 난롯불이 켜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기만 먹고 술만 마시다 보면 봄이 올 무렵이면 온몸에 [[발진]]이 돋는 병에 걸린다.[* 채소를 섭취하지 않으면 [[비타민]], [[아연]] 등이 부족해지는데, 이중 [[아연]]이 부족해지면 피부에 발진이 생긴다.[[https://disedata.wordpress.com/s1e03/|출처]]. 이를 신경성 피부염이라고도 한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c74ac15d558ac8c-c0bdc2dcb2e4/healthylife-06262015140639.html|한의사가 말하는 신경성 피부염]].]
그것이 바로 봄병이다. 말하자면 [[영양실조|영양 불균형]]의 증표 같은 것이다.
물론 가능한 고기의 유혹에 지지 않고, 기분 좋은 포도주에도 너무 빠져들지 않으면 이 병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안다. 매주 일요일 [[교회]]의 [[설교]]에서도 야채를 섭취하고 육류를 삼가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는다.
그러니 봄철에 이 병에 걸리는 사람은 교회 사제들에게 호된 야단을 맞게 된다.
'''지나친 [[식욕]]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칠죄종|7가지 죄악]] 중 하나인 것이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2)』, 서울, 학산문화사, 2008, p53~54.
[127] 대부분의 군대에는 외국용병이 포함돼 있었음.

||{{{#!wiki style="margin:10px"
-1 악습들은 그와 반대되는 덕에 따라 분류할 수 있고, 또 죄종(罪宗)과 연관시킬 수 있다. 죄종(peccata capitalia)은 요한 카시아누스 성인과 대 그레고리오 성인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식별되었다. 이 악습들을 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기 때문이다. 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다.
Vitia possunt statui secundum virtutes quibus adversantur, vel etiam ad peccata capitalia reduci quae experientia christiana, sanctum Ioannem Cassianum et sanctum Gregorium Magnum secuta, distinxit. Capitalia appellantur quia alia peccata, alia vitia generant. Sunt superbia, avaritia, invidia, ira, luxuria, gula, pigritia seu acedia.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66항

  • 작중 보좌사제가 언급된다. 여기서 말하는 보좌사제는 본당에 거주하며 주임신부를 보좌하는 보좌신부(補佐神父)를 말한다.
||{{{#!wiki style="margin:10px"
반 주교는 냉정하게 대응하며 이따금 자신의 곁에 선 연로한 보좌사제에게 의견을 묻는 정도였다.}}}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4)』, 서울, 학산문화사.

  • 현랑 호로의 지혜를 이용해 엔베르크 주교의 음모를 파혜친 엘사 슈팅하임이 주교를 압박하며 "이 모든 기적이 악마의 소행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달라며 품에서 꺼낸 성배축성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wiki style="margin:10px"
-1 "신께서는 올바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엘사의 말에 전원의 시선이 소리를 내며 한데 모인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반 주교님."
엘사는 싸늘히 냉정하게 말했다.
"이것이 악마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십시오."
"어, 어떻게?"
"이것을"
하며 엘사는 거무스름한 은빛 성배를 꺼내 반 주교에게 건넸다.
"이 성배에 축성을 해주십시오. 그러면 이 마을의 방앗간에서 일하는 에반이 신의 올바른 가르침을 몸으로 알려 드릴 것입니다."
반 [[주교]]는 시키는 대로 성배를 받아들었다가 이내 당황하여 말했다.
"이, 이런 것으로 대체 뭘 어쩌라는 건가?"
"성스러운 세례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베풀어질 것입니다. 이 잔을 반 주교님의 손으로 정결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4)』, 서울, 학산문화사.
여기서 말하는 성배는 예수가 사용한 성배가 아니라 평범한 포도주 잔, 미사에 사용되는 제구인 성작(聖爵, Chalice)을 말한다. 한국 천주교에서 전례에 이용되는 제구의 정식 명칭으로 성작이라고 하는데, 가톨릭 외부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예수가 사용한 포도주 잔과 제구에 사용되는 포도주 잔을 뭉뚱그려 성배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런 문장이 나왔다.
또한 엘사가 언급한 축성주교신부가 하느님께 바칠 목적으로 특정 물건을 봉헌하는 것을 말한다. 작중에서는 이를 통해 악마의 소행이 아니며 하느님이 보여주신 기적임을 엔베르크 주교구의 반 주교가 입증해 테레오 마을을 이단으로 몰고가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테레오 마을의 교회를 정통 교회로 인정 받게 하기 위한 엘사의 방책으로 언급된다.


  • 디오드란 수도원 한 곳에 성구(聖具)가 쌓인 창고방이 언급된다. 미사, 전례에 사용되는 제구(祭具), 제의, 예식서 등의 물품을 보관하는 제의실(sacristia)을 가리킨다.

  • 교회의 달력에 따라 행해지는 의식과 축제가 언급되는데 이는 전례력과 이를 바탕으로 열리는 각종 성인들의 축일을 의미한다. 현재도 유명한 주님 성탄 대축일이 바로 이 전례력의 중요 기념일 중 하나다.

||{{{#!wiki style="margin:10px"
-1 [[현랑 호로|호로]]는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 참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신은 천국을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영원히 행복한 세계로 만들었다고 한다.
호로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5)』, 서울, 학산문화사.
이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천국의 개념을 그대로 차용한 장면이다.
||{{{#!wiki style="margin:10px"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 완전한 삶, 곧 성삼위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 하는 생명과 사랑의 이 친교를 ‘천국’이라고 부른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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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의 천국은 물질적인 천체, 하느님의 거처, 천국에 사는 자의 상태를 나타낸다. 교리적으로는 완전한 초자연적 행복이 있는 곳, 혹은 그 상태를 말한다. 천국의 행복은 지복직관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어 있다. 세상의 종말과 육신의 부활이 있을 때까지는 그리스도와 성모님 이외에는 영혼만 들어갈 수 있다. 천국은 영원하기에 결국 천국이란 최후의 심판 뒤에는 부활한 영혼과 육신이 들어가는 영원한 행복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용어사전』

10. 전설과 미신[편집]



  • 작중 일각고래(외뿔고래)가 무척이나 귀한 존재이며, 이들의 뿔에는 신비한 마력이 존재한다는 미신이 전 세계에 퍼져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wiki style="margin:10px"
-1  "일각고래라면, 그 [[불로장생]]의?"
"그래. 뿔이 난 바다괴물이지. [[생고기]]를 먹으면 천년만년 장수할 수 있고, 뿔을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만병이 통치되는."{{{#!wiki style="margin: 24px 0 0 16px; float: right; width: 30%; max-width: 600px; font-size: .9em"
[[파일:attachment/일각고래/c0026408_4b7cf8506b004.jpg|width=100%]] [br]  [[북극해]]에서 촬영된 [[일각고래]] 무리}}}
로렌스는 미신이라고 믿고 있고 물론 에이브의 말투도 진심은 아니다.
"얼음과 같은 냉기가 없으면 죽는다고 들었는데, 이런 남쪽에까지 내려옵니까?"
"선원들의 말로는, 북쪽 바다의 날씨가 거칠어지면 그쪽의 물고기들이며 생물들이 이쪽으로 흘러들 때도 있다더군. 나도 일각고래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사고 팔리는 것도 대개는 일각고래의 뼈라고 속인 사슴의 뼈나 뿔이지."
불로장생과 만병치료의 신비한 약에 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게다가 이교도의 땅에서 나는 것일수록 정교도들은 더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은 후에 [[천국|늙거나 병드는 일 없이 평화와 행복만이 가득한 세계]]로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가르침이 있는 곳에는 적어도 불로장생은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8)』, 서울, 학산문화사.
실제 일각고래의 뿔은 중세시대 무척이나 귀하게 여겨졌다.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연구결과가 없을 정도로 희귀한 동물인 일각고래는 북극해 일대에 살고 있는 고래로 뿔처럼 생긴 엄니는 유니콘의 뿔과 닮아, 마력을 지닌 물건으로 여겨져 중세시대에 아주 값비싸게 거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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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동물 중 외형적으로 가장 독특한 동물은 바다의 유니콘으로 알려진 일각고래다. 일각고래는 북극해캐나다 북부, 그리고 그린란드 주변 해역에서만 서식하는 고래로 흰고래인 벨루가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나이가 들면 피부가 점점 하얗게 변해간다. 일각고래의 가장 큰 특징은 뿔처럼 보이는 뾰족한 엄니로 최대 3m 정도까지 자란다. 이 엄니는 중세 유럽에서 마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돼 부의 상징이었으며,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20배나 높은 30억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일각고래의 엄니는 독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독살을 두려워하던 귀족들은 비싼 돈을 주고 사 잔으로 만들어 썼다.}}}

‘바다의 유니콘’ 일각고래 엄니, 금값 20배 거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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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귀족들은 북극 고래의 긴 상아뿔을 탐냈다. 현대의 사냥꾼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고래 개체수에 타격을 주고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

  • 작중 로렌스가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 노력하는 에이브 볼란을 보며 다짐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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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렌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에이브는 아득한 시선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건, 이 상처를 낸 놈의 명령이야."
자신의 입가를 가리키는 에이브의 손가락은 호로와는 또 다른 여자의 손가락이다.
가늘고 길면서도 다부진 흰 손가락.
로렌스는 [[인어]]의 노랫소리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선원처럼 귓속에 납물을 흘러 넣을 각오를 했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8)』, 서울, 학산문화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lysses_and_the_Sirens_by_H.J._Draper.jpg
율리시스세이렌.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作(1909년)[128]
여기서 "인어의 노랫소리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선원"이야기는 세이렌의 전설을 인용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의 전설인 세이렌은 인어의 모습을 한 존재로 지나가는 선원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랫소리를 들은 선원들은 뭔가에 취한듯이 바다에 빠져 죽게 된다고 한다. 이 전설은 중세를 거쳐 대항해시대에까지 선원들 사이에서 믿음 처럼 존재했다. 따라서 로렌스는 저 상황에서 죽음과 싸우는 선원처럼 매우 굳은 의지를 보였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11. 그 외[편집]


파일:attachment/앙헬 폭포/pp.jpg
앙헬 폭포의 모습
[128] 눈을 부릅뜨고 서있는 인물은 오디세우스다.

  • 13권에서 얼어있던 얼음들이 폭포 아래로 떨어져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그 모습이 천사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거대한 폭포의 용소(폭포 아래에 생기는 연못)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천사로 착각할수 있다. 남미에 위치한 앙헬 폭포의 경우가 천사(Ángel)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17권 "행상인과 잿빛 기사"에피소드에서 단검을 옛 말로 자비라고 부른다,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이는 자비를 뜻하는 영단어 Mercy가, 단검을 뜻하는 라틴어 Misericordia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묘사한 것으로 17권 역자 후기에서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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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중에는 단검을 아예 옛날 말로 "자비"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더군."}}}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7)』, 서울, 학산문화사

  • 호로가 어느 격언을 인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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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날 옛적 수도사가 한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나이를 먹은 반려는 그 무렵보다 어른스러워진 얼굴로 말했다.
“물고기를 주면 하루의 굶주림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의 굶주림을 넘길 수 있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9)』, 서울, 학산문화사
이는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다.(You can lead a horse to water but you can’t make him drink.)라는 서양 격언을 차용한 대사다.

11.1. 중세 이외의 소재를 차용한 설정[편집]


  • 작중에서 이솝 우화, "여우와 포도"[129]의 유명한 대사가 언급된다. 실제 이솝우화는 고대 그리스 때 저술된 이야기로, 중세에서는 흔히 알려진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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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싸다고 샀다가 돈만 날릴 수도 있으니까. 우선은 마음을 정리하는 게 먼저야."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니, 호로는 후드 밑으로 귀를 쫑긋거리다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못 사고 놓친 분풀이로, '''그 포도는 분명히 신 포도였을 것'''이라는 소리나 하지 않기를 바라."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5)』, 서울, 학산문화사, p.102
[129] 여우가 높은 곳에 열린 포도를 찾아내서 그것을 먹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자, 결국 그 자리를 떠나면서 "저 포도는 분명히 시어서 먹을 수가 없는 포도야."라고 욕설을 퍼붓고 떠난다는 이야기.

  • 군대 편제와 관련된 내용중 십인대, 백인대, 천인부장(千人夫長)이 언급되는데 이는 고대 로마백부장을 패러디 한 것이다.[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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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기인 이 사람은 그 밑으로 특징 있는 필체로 간결하게 상황을 기록해 놓았다.
'라디온 전역, 십인대(十人隊)의 대장 마르틴 구르카스 전사.'
'라반 평원에서 뒤통수를 맞다. 리초 후작의 병사들에게 쫒기다. 그들에게 신의 저주를. 그날 밤, 주보 담당 리엔이 부상을 입고 사망. 자자듯 떠났고, 유언은 없었음.'
'밀고로 인해 백작에게 포위되어 있던 우리들 백인대의 대장, 하이만 롯소가 생포되었음. 감옥에서는 훌륭한 태도로 일관했고, 항상 당신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종이.
'나쿨리 주교구 내의 도시 밀리그아에서 성 라프엔느의 달, 교수형. 최후의 순간, 당신께 보내는 전언으로─ 먼저 천사를 보러....'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12)』, 서울, 학산문화사, p.214
[130] 백부장의 이명이 백인부장(百人夫長)이다.

  • 3권에서 페르미 아마티결투 신청을 받고 난 후 등장하는 로렌스의 독백에서 "사랑은 돈으로 살수 없다고 시인은 노래하지만"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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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의 하나 호로가 아마티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해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팍팍한 생활가 장사일 뿐이다.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시인은 노래하지만, 그 거꾸로 역시 진실이니까.}}}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 (3)』, 서울, 학산문화사
이는 19세기에 활동한 미국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 longfellow)[131]가 이야기한 "사랑은 자기 자신이 주는 것이다. 결코 돈으론 살수 없다.(Love gives itself; it is not bought)"를 차용한 대사다.[132]


11.2. 중세시대와 차이가 있는 부분[편집]


엄연히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작품이기 때문에 현실의 중세시대와는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다만 실제 유럽이 아닌 만큼 이는 어느 정도 의도한 설정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하단에 서술된 내용 외에 사소한 디테일 부분에선 오류가 좀 있는 편.

  • 1권에서 호로에게 감자에 양젖 치즈를 얹어서 주는데, 감자는 약 200여 년 후인 16세기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이후 남미에서 유럽에 전래한 작물로 11세기~14세기 중세 유럽 당시엔 존재하지 않은 작물이다. 또한 호로가 아주 오래전 부서진 난파선에서 고추를 먹은 것으로 등장하는데 고추는 1508년 콜럼버스가 유럽에 처음 소개하는 것으로 시대가 맞지 않는다.[133]

파일:external/s3-eu-west-1.amazonaws.com/B802122.jpg
[131] 생몰년 1807년 2월 27일 ~ 1882년 3월 24일. 『인생찬가』, 『에반젤린』을 선보였으며, 단테의 『신곡』을 미국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132] 여담이지만 비틀즈가 1964년 3월 16일에 발표한 곡중에도 이와 비슷한 ‘사랑은 돈으로 살수는 없어(Can't Buy Me Love)’가 있다.[133] 작중에 등장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지만, 호로가 언급한건 수백년 전 자신이 동료들과 함께 돌아다니던 시절(최소 600년 이전)이라고 했기 때문. 근데 이건 이 세계관에선 감자가 구대륙에도 자생한다고 설정하면 끝인 문제라 뭐...

  •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들이 대부분 무시하는 부분이고,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면 작품의 분위기를 망칠 수 있는 부분이긴 한데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서 등장하는 거리의 풍경에서 "오물과 악취, 소음"이 등장하지 않는다.
    • 중세시대 당시에는 악취 등으로 도시에 사는 이들이 상당히 고역을 치렀다. 사람들은 오물을 피하고자 굽이 높은 구두를 제작한 것이 하이힐의 유래라는 카더라가 나올 정도.[134] 이 오물과 악취는 바로 배설물이 주요 원인이었는데, 집에 화장실이 따로 없었기에 요강과 비슷한 물건에 볼일을 보고 건물 밖으로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풍습은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는 13세기에 절정을 이뤘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1483년,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 3세(Fredrich |||)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뢰팅겐(Röttingen)[135] 을 방문했을 때, 말을 타고 도시의 거리를 지나다가 말이 오물에 빠지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귀족이 이런 봉변을 당할 정도였으니 도시의 길거리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도시의 푸줏간 인근은 더 심해서, 이런 악취에 더해 고기를 잡을 때 나오는 피 냄새와 오물들 냄새까지 더해졌다.[136] 좁은 거리에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던 터라, 그곳에서 배출되는 오물의 양도 상당했으며, 여기서 배출된 오염된 공기 때문에 코를 막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결국, 중세 말미에는 "각 집에서 나온 오물은 각자가 적절한 장소에서 처리하라"는 법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도시를 그린 그림들의 분위기가 대부분 어두운 것도 오물과 악취가 가득한 도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귀족들이 지나간 자리에 내 버려진 짚더미와 각 마차에서 버려진 쓰레기들도 길거리를 더럽히는 오물 중 하나였는데, 높으신 분이 지나갈 때 마차의 덜컥거리는 소리를 줄이기 위해 지나가는 길바닥에 지푸라기 등을 깔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걸 지나가면서 치우질 않았다는 것.[출처9] 이런 열악한 위생 문제는 근세의 17~18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근대적 위생학의 태동과 함께 본격적으로 개선되었다.
  • 소음도 상당히 심해서 앞서 언급한 대로 마차가 지나갈 때 나는 소음과 행상인 등이 내지르는 소리 등이 어우러졌다고 한다. 다만 당시 중세 사람들은 이 소음 사이에서도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외치는 행상인의 목소리는 귀신같이 알아챘다고.[출처9]

  • 3권과 5권에서 여관의 계산대가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19세기나 되어서야 건물 안에 현재의 (Bar)라고 불리는 형태의 카운터가 생겨났다.

  •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이미 화약 무기가 등장했으나, 작중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137] 화약의 경우 13세기 초에 이미 개발이 되었던 상태였고 백년전쟁 당시엔 이미 프랑스 군대는 화포를 운용하고 있었다. 화포의 등장으로 인해 성벽이 낮고 두꺼워지기 시작했고 작중 등장하는 레노스처럼 성벽의 존재가 사라진 도시들도 등장하기 시작한 때도 중세 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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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은 전쟁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새로운 무기인 화포를 이용한 전술이 개발되었다. 이런 전술은 또한 통치 구조에 영향을 끼쳤다. 중세기 내내 기사와 성곽에 의존하던 봉건 군대의 전술은 새로운 전술 앞에서 효용성을 상실했다.}}}

김창성 지음, 『사료로 읽는 서양사 2 중세편: 게르만족의 이동에서 르네상스 전야까지』, 책과함께, 2014.
[134]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이힐은 귀족들의 전유물로 개발 의도는 키가 커 보이게 하려고 제작된 신발이다. 귀족들이 도시의 길거리를 지나간다면 마차를 타고 가지, 내려서 걸어가는 경우는 없었기에 위와 같은 이유로 굽 높은 신발을 신을 이유가 없었다.[135] 독일 바이에른 주 뷔르츠부르크 주에 위치한 소도시.[136] 참고로 후속작인 늑대와 양피지에서 이 부분을 언급한다.[출처9] A B [137] 여담으로 작가의 또 다른 세계관이자 중세를 모티브로 삼은 막달라에서 잠들라의 경우엔 7권에 화약의 존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다만 임용한이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직접 밝힌 바로는 이렇게 알려진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며 화약의 발달은 성벽의 강화로 이어졌다고 언급했다. 자세한 내용은 성형 요새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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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시간에 제일 잘못 배우는 게 그건데. 우리가 역사시간에 이렇게 배우잖아요. 화약이 나오니까 성이 쓸모 없게 되어서, 기사들이 몰락했다. 이렇게 배우는데 그건 정말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기술은 액션 리액션이거든요. 하나가 발달하면, 리액션이 나오거든요. 사실은 대포가 나오면서, 그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무너졌잖아요. (화약의 발명으로) 성이 없어진 게 아니라 건축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해요. 대포에 견딜수 있는 축성술. 이게 아마 20세기 콘크리트가 개발하기 전까지는 최고의 건축술일 거에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영상 14분 11초 부터

  • 작중에서 사막의 나라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중세시대 향신료 값이나, 책값이 비쌌던 것은 이슬람 세력이 교역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인데 사막의 나라쪽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면 향신료나 책값이 비쌀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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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받은 남자만이 거룩한 서품을 유효하게 받는다.}}}

《가톨릭교회법》 제102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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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에서 들은 적이 있어요."
"응?"
"이단을 심문하는 데는 북방 출신의 성직자가 걸맞다고."
콜의 말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인정사정없는 이단 심문관.
긴 수염에 독수리 같은 눈매의 냉혹 무자비한 하느님의 종복은 확실히 이런 곳에 어울린다.
}}}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늑대와 향신료(10)』 , 서울, 학산문화사, p97.

  • 2권에서 빚을 갚지 못하면 자신의 이를 뽑아서 의치로 사용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고대 로마 이전 시기까지 이빨과 금으로 만든 실을 이용해 의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중세시대에는 이빨을 치료하는 기술이 부족해 의치를 만드는 기술도 실전 되었다. 유럽 대륙 의치가 도입되는 것은 십자군 전쟁 이후 아랍세계의 의료기술이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르네상스 부터다.


12.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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