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샤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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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란 니샤푸르.jpg

현재의 신시가지. 동쪽 마슈하드 사이의 크바니 산지가 보인다.

파일:니샤푸르 이란.jpg

몽골에 의해 파괴된 옛 도시의 유적

نیشابور [1]
Nīshāpūr [2]

1. 개요
2. 고대의 번영
3. 중세의 대번영
4. 세계 5대 도시
5. 대도시에서 유적으로
6. 현재의 니샤푸르


1. 개요[편집]


이란 동부 호라산 주의 도시. 마슈하드 근처에 위치해 있다.

명칭은 창건자인 3세기 중반 사산 왕조의 샤한샤 샤푸르 1세에서 유래하였으며 페르시아어로는 '샤푸르의 신도시'라는 뜻이다. (니 = New)

2. 고대의 번영[편집]


사산 왕조 치세 초기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발흐가 조로아스터의 무덤이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성지이므로 사산 왕조가 호라산 지역으로 팽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귀를 기울인 샤푸르 1세는 동쪽으로 진출할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서쪽 변경에서 사로잡은 로마군 포로들을 동원하여 준디샤푸르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이곳이 니샤푸르의 기원이다. 사마르칸트 - 부하라 - 메르브 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로 번성하다가 이슬람 정복 이후에는 도시의 중요성이 메르프에 밀리게 되었다.

다만 압바시야 혁명의 선봉장 아부 무슬림이 니샤푸르를 호라산의 치소로 만들며 부흥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3. 중세의 대번영[편집]


파일:니샤푸르 샤디야크 궁전.jpg

타히르 왕조의 압둘라 이븐 타히르가 건설한 샤디야크 궁전의 발굴 현장. 이란의 국가 지정 문화재다.

리처드 W. 불리엣에 따르면 몽골 제국의 침략 이전 니샤푸르는 거의 12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고 대도시 중심부에 사는 주민의 수는 20~50만여 명에 달했다. 이 추정치는 위성도시의 주민이나 니샤푸르의 시장에서 품팔이하는 단기 체류자나 무역상들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였다. 중세 니샤푸르 인구는 중세에 쇠퇴한 로마시보다 네 배 많았고 같은 시대 바그다드시 인구의 2/3에 달했다.

9세기에 이란의 반 자치 왕조인 타히르 왕조의 후원으로 터키석 (코발트) 광산 개발이 진전되고 공예품 산업이 발전하여 다시 번영하였다. 이에 타히르 조는 수도를 메르브에서 니샤푸르로 옮겼으며 타히르 조를 전복시킨 사파르 왕조도 니샤푸르에 수도를 두고 궁전을 확장하였다.

하디스 편집본 중에서 높은 신뢰성으로 유명한 사힛 무슬림 하디스 모음집이 니샤푸르 출신 학자에 의해 편찬되었고 11세기 이슬람 황금기의 말미를 장식한 대학자 오마르 하이얌 역시 니샤푸르에서 태어났다.

10세기 사만 왕조의 치하에서 니샤푸르는 수도는 아니었지만 무역의 중심지 기능을 유지하였고 페르시아, 아랍, 소그드, 인도, 튀르크 상인과 심지어 러시아와 이집트에서도 상인이 오는 국제 도시가 되었다.

4. 세계 5대 도시[편집]


파일:이란 니샤푸르 상상화.jpg

발굴 조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11-12세기 무렵 니샤푸르 상상화.

994년부터 이어진 가즈니 왕조의 지배에서 서기 1000년 경에 니샤푸르바그다드, 카이로, 콘스탄티노플, 카이펑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1037년 니샤푸르는 셀주크 제국에게 점령당한 후 그의 수도가 되었고 토그릴은 그 곳에서 술탄을 선포하였다. 다만 제국이 서진하면서 1043년에 이란 중북부의 라이에게 수도 지위를 빼앗겼다.

셀주크 제국 와해 이후인 12세기 말 도시는 구르 왕조호라즘 왕조의 전쟁의 와중에 침체기를 겪었지만 도자기 산업의 발전으로 백만 이상의 인구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1153년 ~ 1187년간 니샤푸르는 호라산 서부를 지배한 무아이드 앗 딘 아이 아바, 토간 샤, 산자르 샤로 3대간 이어진 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다. 다만 오구즈 튀르크의 연이은 공격으로 니샤푸르 본도심은 큰 피해를 입었다.

5. 대도시에서 유적으로[편집]


파일:이란 니샤푸르 1.jpg

그리고 운명적인 1221년 몽골 제국군은 니샤푸르를 함락한 후 수십만에 달하는 시민을 학살해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해골 피라미드를 쌓았는데 이 학살에서 78세의 페르시아의 시인 아타르도 잔혹히 희생당하였다. 이후 대지진까지 겹치면서 도시는 완전히 쇠락했다.

6. 현재의 니샤푸르[편집]


파일:아타르 영묘 니샤푸르.jpg

1221년 학살 당시 희생된 아부 하미드 파리드 웃 딘 아타르 빈 아부 바크르 이브라힘의 영묘.

16세기에 사파비 왕조는 이전 도시의 북쪽에 도시를 일부 재건하였고 역시 니샤푸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때 시인 아타르의 영묘가 조성되었다. 1940년에는 카샨 출신의 예술가 카말 올 몰크가 니샤푸르에서 사망해 아타르 영묘 근처에 그의 영묘가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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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르시아어[2] 로마화됨. Nišâpur, Nişapur, Nīshābūr, Neyshābūr, Neeshapoor 등으로도 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