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먀스콥스키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고대
메소포타미아 음악
후르리인의 닌갈 찬가
그리스 음악
세이킬로스의 노래
중세
노트르담 악파
레오냉 · 페로탱
아르스 노바
노바 · 비트리 · 마쇼
기타
란디니 · 던스터블 · 빙엔
르네상스 음악
부르고뉴 악파
뒤파이 · 뱅슈아
플랑드르 악파
오케겜 · 프레 · 이자크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 · 카치니 · 가브리엘리 · 라수스
영국
탈리스 · 버드 · 다울런드
독일
스벨링크 · 프레토리우스 · 하슬러
바로크 음악
프랑스
샹보니에르 · 륄리 · 마레 · 캉프라 · 샤르팡티에 · 라모 · 쿠프랭 · 드 라 게르 · 르클레르 · 루아예
이탈리아
몬테베르디 · 프레스코발디 · 카발리 · 스트로치 · 스트라델라 · A. 스카를라티 · 토렐리 · 스테파니 · 코렐리 · 로티 · 칼다라 · 보논치니 · 알비노니 · 비발디 · D. 스카를라티 · 포르포라 · 페오 · 타르티니 · 제미니아니 · 빈치 · 로카텔리 · 레오 · R. 브로스키 · C. 브로스키
중부유럽
비버 · 쉿츠 · 프로베르거 · 파헬벨 · 툰더 · 북스테후데 · 바흐 · 텔레만 · 파슈 · 마테존 · 젤렌카 · 피젠델
영국
퍼셀 · 헨델 · 애비슨
고전주의
전고전(로코코)
하세 · 마르티니 · 갈루피 · 페르골레지 · 루소 · W. F. 바흐 · 보이스 · C. P. E. 바흐 · J. 슈타미츠 · 글루크 · L. 모차르트 ·
초기 고전파
트라에타하이든고세크 · M. 하이든C. 슈타미츠 · J. C. 바흐 · 파이지엘로 · 보케리니 · 클레멘티
후기 고전파와 과도기
치마로사 · 살리에리 · 모차르트 · 케루비니베토벤 · 훔멜 · 카룰리 · 소르 · 줄리아니 · 쿨라우 · 리스 · 카르카시
낭만주의
전기 낭만주의
초기 낭만파
아구아도 · 베버 · 파가니니 · F. 모차르트 · 슈베르트 · 글린카 · 슈포어 · 메르츠
독일, 오스트리아
낭만주의

멘델스존 · 슈만 · C. 슈만
미국, 프랑스
낭만주의

메로 · 베를리오즈 · 구노 · 포스터 · 고트샬크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쇼팽 · 리스트 · 알캉 · 헨젤트 · 체르니
오페라
로시니 · 마이어베어 · 도니체티 · 벨리니
빈 왈츠
J. 슈트라우스 1세 · J. 슈트라우스 2세 · 페피 · E. 슈트라우스 · 주페 · 치러
후기 낭만주의
독일, 오스트리아
후기 낭만

브람스 · 바그너 · 브루크너 · 브루흐 · R. 슈트라우스 · 말러 · 레거 · 로트 · 코른골트 · 라프 · 라이네케 · 모슈코프스키 · 라인베르거 · 이바노비치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

베르디 · 폰키엘리 · 푸치니 · 레온카발로 · 마스카니
프랑스
후기 낭만

비외탕 · 생상스 · 비제 · 오펜바흐 · 발퇴펠 · 뒤카 · 포레 · 프랑크 · 랄로 · 이자이
러시아
후기 낭만

차이콥스키 · 라흐마니노프 · 스크랴빈 · 메트네르 · 아렌스키 · 글라주노프 · 칼리니코프보르트키에비치
영국
낭만주의

엘가 · 홀스트 · 브리지 · 본 윌리엄스 · 블리스 · 핀치
국민악파
러시아
무소륵스키 · 보로딘 · 림스키코르사코프 · 발라키레프 · 큐이 · 글리에르
중부유럽
스메타나 파일:체코 국기.svg · 드보르자크 파일:체코 국기.svg · 야나체크 파일:체코 국기.svg · 에네스쿠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 도흐나니 파일:헝가리 국기.svg · 블라디게로프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 비에니아프스키 파일:폴란드 국기.svg
북유럽
닐센 파일:덴마크 국기.svg · 그리그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 시벨리우스 파일:핀란드 국기.svg · 알벤 파일:스웨덴 국기.svg
스페인
사라사테 · 타레가 · 알베니스 · 라라 · 그라나도스 · 파야 · 요베트 · 투리나 · 로드리고
프랑스, 이탈리아
쇼송 · 당디 · 레스피기
20세기 음악
인상주의
드뷔시 · 라벨 · 고베르이베르
신고전주의
스트라빈스키 · 힌데미트
제2빈악파
쇤베르크 · 베베른 · 베르크
프랑스
근현대음악
사티 · 풀랑크 · 불랑제 · 미요 · 테유페르 · 오네게르 · 메시앙 · 뒤티외 · 불레즈 · 졸리베 · 페송
영국
근현대음악
브리튼 · 월튼 · 티펫
미대륙
근현대음악
코플런드 · 피아졸라 · 히나스테라 · 폰세 · 빌라-로부스 · 캐시디조플린 · 거슈윈 · 번스타인 · 바버 · 아이브스 · 바레즈 · 케이지 · 크럼 · 펠드먼 · 볼컴 · 글래스 · 라이히 · 애덤스 · 리버만 · 로사스
소련-러시아
근현대음악
프로코피예프 · 쇼스타코비치 · 하차투리안 · 시닛케 · 카발레프스키 · 먀스콥스키 · 구바이둘리나 · 셰드린카푸스틴스코릭
헝가리
근현대음악
버르토크 · 코다이 · 리게티
폴란드
현대음악
루토스와프스키 · 펜데레츠키구레츠키
독일-오스트리아
현대음악
슈토크하우젠 · 치머만 · 라헨만 · 헨체
이탈리아
현대음악
노노 · 달라피콜라 · 베리오 · 샤리노 · 페델레
한국
현대음악
백병동 · 강석희 · 나인용 · 나운영 · 이만방
기타
크세나키스 · 김순남
윤이상 · 라우타바라 · · 타케미츠 · 진은숙 · 박-파안 영희 · 요시마츠 · · 도이처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Николай Мясковский | Nikolai Myaskovsky


파일:IMG_38382.jpg

본명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먀스콥스키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ясковский
Nikolai Yakovlevich Myaskovsky
출생
1881년 4월 20일
러시아 제국 노보기에오르기에프스크
사망
1950년 8월 8일 (향년 69세)
소련 러시아SFSR 모스크바
국적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display: none; display: 러시아 제국"
행정구
]]
→ [[소련|

소련
display: none; display: 소련"
행정구
]]

직업
작곡가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사조
후기 낭만주의, 국민악파

1. 개요
2. 생애
3. 주요 작품들
3.1. 교향곡
3.2. 관현악곡
3.3. 협주곡
3.4. 취주악
3.5. 실내악
3.6. 독주곡
3.7. 피아노곡
4. 수상 경력
5. 창작 성향
6. 사생활



1. 개요[편집]


러시아/소련의 작곡가로 소비에트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2. 생애[편집]


당시 러시아령이었고, 지금은 폴란드 땅인 노보기에오르기에프스크[1]에서 러시아 제국군 공병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뜬 뒤에는 주로 고모인 옐리콘다의 집에서 자랐고, 옐리콘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오페라단의 전속 가수가 되자 같이 따라갔다.

어린 시절에 피아노바이올린 교습을 받으면서 일찍부터 음악에 입문했지만, 음악가가 되는 것에 자신이 없었는지 아버지처럼 사관학교에 들어가 공병 장교가 되었다. 하지만 사관학교 재학 중이던 189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온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한 차이콥스키교향곡 6번을 듣고 작곡가가 되겠다고 뜻을 굳혔다.

다만 이미 등록한 사관학교 교육도 포기하기 아까웠는지, 일단 1902년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뒤 모스크바 근교의 부대에서 복무하면서 틈틈이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다. 글리에르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글라주노프가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소개서를 써주었고, 1906년에 입학해 아나톨리 랴도프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과 관현악법을 배웠다.

음악원 재학 중에는 자신보다 10년 가까이 어렸고 마찬가지로 글리에르에게 배웠던 프로코피예프와 친교를 쌓으면서 곡도 같이 쓰고 랴도프에 대한 뒷담화도 같이 까는 등 잘 어울렸고, 죽을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2] 이 수업 시대에는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나 차이콥스키 같은 선배들 외에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전위적인 음악을 써냈던 스크랴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3]

1911년에 음악원을 졸업한 뒤 모교의 강사와 음악비평가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스트라빈스키프로코피예프의 신작을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공병 장교로 다시 징집되었고, 오스트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전투신경증으로 인해 후방인 탈린으로 옮겨 해군 요새의 축성에 참가했다.

이 기간 동안 다른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와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시기의 혼란을 겪었는데, 아버지가 황제군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붉은 군대에게 살해당하고 고모의 죽음과 고모부의 자살을 접하는 등 정신적으로 수많은 시련을 당했다. 이후 소련이 성립되면서 소련군으로 개편된 붉은 군대로 옮겨가 1921년에 전역했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을 얻어 모스크바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비교적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축에 속하는 작법을 지향했으며 소련 작곡가들 중에서는 특히 교향곡 등 기악 음악의 작곡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시작된 대숙청 속에서도 보수적인 음악 성향 때문인지 별 화를 입지 않고 넘어갔지만,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집단농장 계획을 찬양하는 시를 소재로 하거나 최고 권력자에 대한 찬양을 담은 관현악곡과 노래를 작곡하며 소련 정권이 내세운 사회주의 사실주의 사조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먀스콥스키는 생애 내내 성실하게 작곡을 했으며, 특히 교향곡은 27곡을 남겨 소련-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의 교향곡을 작곡한 인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독소전쟁 개전 후에는 시베리아로 피난해 그 지방의 민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작곡했고, 1차대전 시기 때처럼 전쟁의 참화를 표현한 곡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종전 후인 1948년에는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주도한 소련 음악계의 숙청에 휘말렸고,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같은 여타 작곡가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비판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러한 공적인 공격 외에도 암으로 인해 건강도 쇠약 일로를 걷고 있었고, 1950년에 마지막 현악 4중주를 작곡한 뒤 투병하다가 69세로 세상을 떠났다.[4] 유해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들[편집]



3.1. 교향곡[편집]



  • 교향곡 제1번 C단조 (1908, 1921 개정)
  • 교향곡 제2번 C샤프단조 (1911)
  • 교향곡 제3번 A단조 (1914)
  • 교향곡 제4번 E단조(1918)
  • 교향곡 제5번 D장조 (1919)
  • 교향곡 제6번 E플랫단조(1923)
  • 교향곡 제7번 B단조 (1922)
  • 교향곡 제8번 A장조 (1925)
  • 교향곡 제9번 E단조 (1927)
  • 교향곡 제10번 F단조 (1927)
  • 교향곡 제11번 B플랫단조(1932)
  • 교향곡 제12번 G단조 '10월 교향곡' (1932)
  • 교향곡 제13번 B플랫단조 (1933)
  • 교향곡 제14번 C장조 (1933)
  • 교향곡 제15번 D단조 (1934)
  • 교향곡 제16번 F장조(1934)
  • 교향곡 제17번 G샤프단조 (1937)
  • 교향곡 제18번 C장조 (1937)
  • 교향곡 제19번 E플랫장조 (1939. 취주악단용 작품)
  • 교향곡 제20번 E장조 (1940)
  • 교향곡 제21번 F샤프단조 (1940)
  • 교향곡 제22번 B단조 '교향 담시' (1941)
  • 교향곡 제23번 A단조 (또는 카바르다니아 주제에 의한 교향 모음곡. 1941)
  • 교향곡 제24번 F단조 (1943)
  • 교향곡 제25번 D플랫장조 (1946, 1949 개정)
  • 교향곡 제26번 C장조 '러시아 주제들에 의한 교향곡' (1948)
  • 교향곡 제27번 C단조 (1949)
  • (소관현악을 위한) 소교향곡 제1번 A장조 (1911)
  • (현악 합주를 위한) 소교향곡 제2번 B단조 (1929)
  • (현악 합주를 위한) 소교향곡 제3번 A단조 (1946)


3.2. 관현악곡[편집]


  • 교향시 '침묵' (1910)
  • 교향시 '알라스토르' (1913)
  • 소관현악을 위한 세레나데 E플랫장조 (1929)
  • 경례 서곡 (1939)
  • 슬라브 광시곡 (1946)
  • 감상적 서곡 (1947)
  • 소관현악을 위한 디베르티스망 (1948)


3.3. 협주곡[편집]



  • 플루트, 클라리넷, 호른, 바순, 하프와 현악 합주를 위한 서정 소협주곡 G장조 (1929)
  •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1938)
  • 첼로 협주곡 C단조 (1944)


3.4. 취주악[편집]


  • 두 개의 행진곡 (1941)
  • 극적 서곡 (1942)


3.5. 실내악[편집]



  • 현악 4중주 제1번 A단조 (1929~30)
  • 현악 4중주 제2번 C단조 (1930)
  • 현악 4중주 제3번 D단조 (1930. 1910년의 습작을 개정한 작품)
  • 현악 4중주 제4번 F단조 (1930. 1911년의 습작을 개정한 작품)
  • 현악 4중주 제5번 E단조 (1938~39)
  • 현악 4중주 제6번 G단조 (1939~40)
  • 현악 4중주 제7번 F장조 (1941)
  • 현악 4중주 제8번 F샤프단조 (1942)
  • 현악 4중주 제9번 D단조 (1943)
  • 현악 4중주 제10번 F장조 (1945. 1907년의 습작을 개정한 작품)
  • 현악 4중주 제11번 E플랫장조 (1945)
  • 현악 4중주 제12번 G장조 (1947)
  • 현악 4중주 제13번 A단조 (1950)


3.6. 독주곡[편집]


  • 첼로 소나타 제1번 D장조 (1911, 1935 개정)
  • 바이올린 소나타 F장조 (1946~47)
  • 첼로 소나타 제2번 A단조 (1948)


3.7. 피아노곡[편집]



  • 피아노 소나타 제1번 D단조 (1907)
  • 모음곡 '추억' (1907~08, 1927 개정)
  • 피아노 소나타 제2번 F샤프단조 (1912)
  • 피아노 소나타 제3번 C단조 (1920, 1939 개정)
  • 피아노 소나타 제4번 C단조 (1924, 1945 개정)
  • 피아노 소나티나 E단조 (1941)
  • 피아노 소나타 제5번 B장조 (1944. 1907년의 습작을 개정한 작품)
  • 피아노 소나타 제6번 A플랫장조 (1944, 초기 습작을 개정한 작품)
  • 모음곡 '폴리포니 스케치' (1947)
  • 피아노 소나타 제7번 C장조 (1948)
  • 피아노 소나타 제8번 D단조 (1949)
  • 피아노 소나타 제9번 F장조 (1949)


4. 수상 경력[편집]


  • 레닌훈장 (수훈 연도 불명)
  • 소련 인민예술가 (1946)
  • 국가 스탈린상 예술 부문 5회 (1941 1급, 1946 1급 2회, 1950 2급, 1951 1급)


5. 창작 성향[편집]


젊었을 적에는 나름대로 당대 음악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고, 그 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현대적인 음악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점차 보수화되어 교향곡이나 현악 4중주 같은 정통 기악곡을 위주로 다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페라발레도 안쓰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도만 하고 제대로 완성하지 않은 채 스케치나 단편만 남겼을 뿐이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작곡가가 된 것은 당시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소련 사회가 보수적/억압적인 분위기로 돌아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자신이 교직에 오랫동안 몸담으면서 학생들에게 고전적인 이론 교육을 오랜 시간 했기 때문에 교육자로서의 성향이 작곡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창작 성향이야 어쨌건 소련 시기 가장 부지런했던 작곡가라는 평에는 변함이 없고, 특히 27곡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교향곡 같은 경우에는 웬만한 용자 지휘자나 관현악단이 아니고서는 섣불리 전곡 연주한다는 소리를 못할 정도다.[5] 하지만 되려 이러한 양적인 면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보수적인 다작가라는 불명예를 아직도 짊어지고 있기도 하다.


6. 사생활[편집]


젊었을 적부터 전쟁과 혁명, 친족들의 잇따른 죽음 같은 수많은 우환을 당했기 때문인지,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에 수줍음을 많이 탔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도 평생 하지 않은 독신이었고, 말년에 가서도 평범한 노인의 모습 속에 자연스레 권위를 갖춘 인물로 비춰졌다.

하지만 스탈린 집권 후 전위적인 음악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수많은 되도 않는 전문 용어를 남발하는 정치꾼들에게는 확실히 혐오감을 느꼈는지, 지인들에게 편지 등을 통해 돌려까기도 했고 자신이 말년에 병든 몸으로 즈다노프 등에게 직접 먹잇감이 되었을 때도 은근히 그들의 관료주의적인 비판 행태를 비꼬기도 했다.

교육가로서 남긴 업적도 작곡가 못잖게 중요한데, 하차투리안과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로디온 쉐드린, 비사리온 셰발린, 보리스 차이콥스키, 안드레이 에슈파이 등 1930년대 이후 소련 음악계에서 이름난 많은 작곡가들이 먀스콥스키의 문하를 거쳐갔다. 이 젊은 세대의 가장 네임드라 할 수 있는 쇼스타코비치 역시 먀스콥스키의 지도를 받을 뻔했으나, 쇼스타코비치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불발되었다.[6]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0 20:21:03에 나무위키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바르샤바 근처로 주변에는 모들린 공항이 있다.[2] 다만 둘의 음악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는데, 프로코피예프같이 건방진 성격의 후배와 평생도록 우정을 나누었던 것을 보면 서로를 음악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했던 듯하다. 또한 먀스콥스키도 음악인생 초기에는 나름 진보적인 음악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프로코피예프와 친해질 당시 음악적인 견해 차이는 크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프로코피예프 입장에서도 먀스콥스키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3] 실제로 그의 피아노 작품에서는 스크랴빈의 특유의 화음연타가 자주 등장한다.[4] 죽기 하루 전에 쇼스타코비치가 문병을 왔을 때, 먀스콥스키는 "여기 이렇게 누워 이제껏 내가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이 인민에게 반하는 것일 수도 있을까 수없이 생각했다. 씁쓸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라고 회한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5] 이미 세기를 넘긴 2013년 현재까지도 먀스콥스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유일한 지휘자는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 뿐이다.[6]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의 슈테인베르크 문하에서 푸대접을 받던 쇼스타코비치는 몰래 모스크바 음악원에 지원서를 넣었고, 먀스콥스키는 단번에 이 무명 학생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쇼스타코비치의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여 모스크바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