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독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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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내용
4. 여담


Nixon Doctrine

1. 개요[편집]


제 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1969년 7월 25일 에서 발표한 (대아시아 관련) 외교정책. 괌에서 발표했기에 괌 독트린(Guam Doctrine)이라고도 한다.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닉슨 독트린을 세계에 선포하였다.


2. 배경[편집]


1969년 1월에 등장한 닉슨 행정부는 전임 린든 존슨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반전 여론 등으로 인해, 기존 대외 정책에 대한 국내적 합의 기반을 다시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합의를 형성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새로운 대외 정책의 기조는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후퇴와 국제 체제에서의 미국의 적절한 조화가 가능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함으로써 도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닉슨 독트린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내용[편집]


1.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2.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1].
3.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 군사적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각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4. 아시아의 각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여러 나라 상호 원조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5. 아시아의 각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보면 알겠지만, 닉슨 독트린은 냉전 시기 세계경찰론을 내세우며 전세계의 분쟁에 개입하던 미국이, 자신들이 직면한 대내외적인 환경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인식의 변화란 쉽게 말해 냉전 전략을 수행함에 있어서 미국의 능력을 종래에 비하여 적절한 수준으로 낮춘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국의 인식 전환은 냉전 수행의 두 축인 유럽과 아시아 동부에 대하여 미국이 이전과 같은 적극적 역할을 맡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역할의 후퇴 모색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미국의 위협인식의 상대적 하락도 수반하였다. 따라서 닉슨 행정부의 대아시아 정책은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와 보조적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괌 독트린을 통하여 미국은 이렇게 변화된 대아시아 정책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1971년 4월의 핑퐁 외교를 거쳐 1971년 7월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 1972년 2월 닉슨-마오쩌둥 회담을 통해 미중 외교관계가 복원되는 기초가 되었다.[2]주한미군 감축[3],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병합 등의 사건도 영향을 받게 된다. 물론 리처드 닉슨 본인은 자신이 사임하짤리지만 않았어도 베트남 문제엔 개입했을 거라고 말했지만 애초에 본인 재임 시기 베트남전은 사실상 마무리되었으니 실없는 소리긴 하다. 게다가 당시 여론을 고려해보면 말처럼 쉽지도 않았을듯.

4. 여담[편집]


닉슨 독트린은 당시 한반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만 해도 남북한은 서로 공작원 투입 등을 자행하며 치열한 첩보 전쟁을 수행하던 때라, 서로에게 최우방격인 미국과 중국이 닉슨 독트린 이후 정상회담을 하고 수교까지 맺는 상황을 보며 남북한 모두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데탕트로 불리는 냉전이 다소 수그러드는 상황으로 바뀌어 남북한도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한 계기가 되었으며, 미군의 영향력 축소와 더불어 대한민국 국군의 군 장비 현대화 프로젝트인 율곡사업도 전개된다. 한편 남북한에 각각 유신헌법, 사회주의 헌법이 통과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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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게 상당히 중요한 내용으로 박정희를 멘붕시킨 것 역시 이 점이었다. 즉 또다시 6.25 전쟁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미국의 도움은 기대하지 마라란 의미이기에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같았다.[2] 물론 이는 중국-소련간의 이간질 목적도 있었다.[3] 실제로도 미국은 괌 독트린 이후 대한민국 서해안 지역 방어를 맡고있던 미 육군 7사단을 미 본토로 철수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