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코 동조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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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격제도(近代社格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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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명칭 및 사격은 근대사격제도가 폐지된 1946년 2월 2일 직전 기준
* 신사의 지리적 위치 순서로 나열(동북 → 서남 → 외지)
사격외
(社格外)



관폐대사
(官幣大社)

갓산 신사

카시마 신궁

카토리 신궁

아와지 신사

히카와 신사

히에 신사

메이지 신궁

미시마 신사

센겐 신사

스와 신사

아츠타 신궁

게히 신궁

히에 신사

다케베 신사

다가 신사

오미 신궁

히노쿠마 신궁

구니카카스 신궁

가메야마 신사

구마누니마스 신사

구마노하야타마 신사

니우츠히메 신사

가모와케이카즈치 신사

가모미오야 신사

이와시미즈 하치만궁

마츠오 신사

히라노 신사

이나리 신사

헤이안 신궁

야사카 신사

시라미네 신궁

오미와 신사

오야마토 신사

이소노카미 신궁

가스가 신사

히로세 신사

다츠타 신사

니우카와카미 신사 (나카샤 · 가미샤 · 시모샤)

가시하라 신궁

요시노 신궁

히라오카 신사

오토리 신사

스미요시 신사

이쿠쿠니타마 신사

미나세 신궁

히로타 신사

이자나기 신사

이즈모타이샤

아카마 신궁

카시이궁

무나카 신사

하코자키궁

우사 신궁

아소 신사

미야자키 신궁

우도 신궁

기리시마 신궁

가고시마 신궁

가라후토 신사(폐사)

대만신궁(폐사)

조선신궁(폐사)

부여신궁(미진좌)

관동신궁(폐사)

남양신사(폐사)


국폐대사
(國幣大社)

난구 신사

다도 신사

구마노 신사

오야마즈미 신사

고라 신사


관폐중사
(官幣中社)

가마쿠라궁

이이노야궁

가네가사키궁

미카미 신사

이타키소 신사

구마노나치 신사

우메노미야 신사

기후네 신사

오하라노 신사

요시다 신사

기타노 신사

이카스리 신사

이쿠타 신사

와타츠미 신사

나가타 신사

기비츠 신사

이츠쿠시마 신사

스미요시 신사

다자이후 신사

히코산 신사

야츠시로궁

대남신사(폐사)


국폐중사
(國幣中社)

시오가마 신사

시와히코 신사

오모노이미 신사

츠츠코와케 신사

이사스미 신사

닛코 · 우츠노미야) 후타아라야마 신사

누키사키 신사

오아라이이소사키 신사

사카츠라이소사키 신사

다마사키 신사

사무카와 신사

츠루가오카 하치만궁

아사마 신사

이쿠시마타루시마 신사

야히코 신사

이미즈 신사

시라야마히메 신사

와카사히코 신사

마스미다 신사

아에쿠니 신사

이즈모 신사

고노 신사

이즈시 신사

이와 신사

나카야마 신사

아니 신사

하야타니 신사

우베 신사

미즈와카스 신사

미호 신사

다마노오야 신사

고토히라궁

다무라 신사

이소노 신사

인베 신사

오아사히코 신사

도사 신사

사사무타 신사

다시마 신사

스미요시 신사

가이진 신사

스와 신사

닛타 신사


관폐소사
(官幣小社)

가마도 신사

시카우미 신사

스미요시 신사

나미노우에궁


국폐소사
(國幣小社)

고시오 신사

고마가타 신사

이데하 신사

유도노산 신사

지치부 신사

하코네 신사

오쿠니 신사

아사마 신사

오토시미오야 신사

간베 신사

이즈산 신사

도가쿠시 신사

호타카 신사

와타츠 신사

다카세 신사

오야마 신사

스고이소베 신사

츠루기 신사

미나시 신사

이나바 신사

도가 신사

츠시마 신사

오와리오쿠니타마 신사

기비츠히코 신사

기비츠 신사

누나쿠마 신사

오가미야마 신사

시토리 신사

히노미사키 신사

모노노베 신사

스사 신사

사다 신사

이미노미야 신사

지리쿠 하치만궁

유스하라 하치만궁

후지사키 하치만궁

츠노 신사

히라키키 신사

경성신사(폐사)

용두산신사(폐사)

대구신사(폐사)

평양신사(폐사)

광주신사(폐사)

강원신사(폐사)

전주신사(폐사)

함흥신사(폐사)

신죽신사(폐사)

대중신사(폐사)

가의신사(폐사)


별격관폐사
(別格官幣社)

료젠 신사

동조궁

가라사와야마 신사

도키와 신사

고미카도 신사

야스쿠니 신사

동조궁

오야마 신사

후쿠이 신사

후지시마 신사

유기 신사

기타바타케 신사

고오 신사

다케이사오 신사

도요쿠니 신사

나시노키 신사

단잔 신사

아베노 신사

시조나와테 신사

미나토가와 신사

나와 신사

도요사카 신사

노다 신사

야마우치 신사

사가 신사

키쿠치 신사

데루쿠니 신사


관폐국폐사등외별격
(官幣國幣社等外別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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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93년

호류지 지역의 불교 기념물
法隆寺地域の仏教建造物

1993년

히메지 성
姫路城

1994년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
古都京都の文化財(京都市、宇治市、大津市)

1995년

시라카와고고카야마
역사 마을
白川郷・五箇山の合掌造り集落

1996년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원폭 돔)

原爆ドーム

1996년

이쓰쿠시마 신사
厳島神社

1998년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古都奈良の文化財

1999년

닛코의 신사와 사찰
日光の社寺

2000년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

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

2004년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
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観

2011년

히라이즈미
: 불교 정토 사상을 대표하는 사찰, 정원, 고고 유적군

平泉 - 仏国土(浄土)を表す
建築 ・ 庭園及び考古学的遺跡群


2013년

후지 산
: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

富士山 - 信仰の対象と芸術の源泉

2014년

토미오카 제사 공장과 관련 유적지
富岡製糸場と絹産業遺産群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造船、石炭産業

2016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
- 近代建築運動への顕著な貢献


2017년

신이 사는 섬
무나카타 오키노시마와 관련 유산군

「神宿る島」宗像・沖ノ島と関連遺産群

2018년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산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2019년

모즈·후루이치 고분군
: 고대 일본의 무덤
百舌鳥・古市古墳群 - 古代日本の墳墓群

2021년

홋카이도 · 북도호쿠의 조몬 유적군
北海道・北東北の縄文遺跡群

자연유산

1993년

야쿠시마
屋久島

1993년

시라카미 산지
白神山地

2005년

시레토코
知床

2011년

오가사와라 제도
小笠原諸島

2021년

아마미 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나와섬 북부와 이리오모테
奄美大島、徳之島、沖縄島北部及び西表島





일본어
日光(にっこう東照宮(とうしょうぐう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닛코의 신사와 사찰
영어
Shrines and Temples of Nikko
일본어
日光の社寺
프랑스어
Sanctuaires et temples de Nikko
국가·위치
일본 도치기현 닛코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9년
등재기준
(i)[1], (iv)[2], (vi)[3]
지정번호
913

파일:9648034376_19bdbd0c64_o.jpg

1. 개요
2. 상세
2.1. 조선의 흔적
3. 동조궁의 내부 건물 및 장식물
3.1. 장식물
3.2. 내부 건축물
4. 찾아가는 길



1. 개요[편집]


일본 도치기현 닛코시에 위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신이 안장된 능. 린노지(輪王寺), 닛코 후타라산 신사(日光二荒山神社)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닛코의 신사와 사찰을 이루고 있다.

동조궁에 있는 8개의 건축물과 신사에 있는 2개의 검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외 수많은 중요 문화재가 있다.


2. 상세[편집]


1616년에 사망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죽기 전에 혼다 마사즈미, 난코보 텐카이, 곤치인 스덴(金地院崇伝)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쿠노산(久能山)[4]에서 장사를 치르고 장례는 조죠지(増上寺)[5]에서, 위패는 다이쥬지(大樹寺)[6]에 봉안한 후 1주기에 닛코에 작은 사당을 지어 그곳으로 이장해 신으로 모시면 간토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실제로 1년 뒤 이에야스의 시신은 닛코에 지어진 작은 사당으로 이장되었다.[7]

이에야스의 사후 1년인 1617년, 천황으로부터 동조대권현(東照大権現)이라는 신호를 받고 이에야스가 신격화되자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동조사(東照社)가 500곳 이상 세워졌다.[8] 1634년에는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3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할아버지의 사당에 참배한 후 장인 1만 5천 명과 인력 450만 명을 동원해 대규모 증축을 개시, 1636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닛코 동조궁이 건립되었다. 1645년에는 궁호(宮号)가 내려져 동조사에서 동조궁(東照宮)으로 승격되었다. 원래는 지명을 붙이지 않고 그냥 동조궁이라 부르면 되지만 워낙 동조궁이 많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 총본산 격인 이곳의 동조궁을 닛코 동조궁이라 부른다.[9]

참고로 에도 성 내부에도 동조궁이 있었고 에도에서 닛코 가도를 따라 동조궁으로 이어지는 행렬 행사인 천인무자행렬(千人武者行列)을 진행하였으나, 막부 말기를 겪으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10] 보신전쟁 때는 전란에 휘말려서 파괴될 뻔한 적도 있었다. 신정부군이 동조궁에 포격을 가하려 했으나, 명령을 받은 도도 타카유키(도도 다카토라의 후손)가 "다카토라 공이 곤겐(이에야스)께 입은 은혜가 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고.[11]

메이지 시대에는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으로 동조궁에서 린노지(輪王寺), 닛코 후타라산 신사(日光二荒山神社)가 분리되어 나갔는데, 원래는 하나의 거대한 성역이었기에 세 시설의 건축물들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섞였다. 그래서 동조궁, 린노지, 닛코 후타라산 신사를 합쳐서 2사1사(二社一寺)라고 부른다.


2.1. 조선의 흔적[편집]


지금의 화려한 동조궁이 막 완성된 1636년(인조 14년)은 4대 조선 통신사에도에 방문했을 때이다. 본래 통신사들의 기본적인 임무는 에도에 도착해서 쇼군을 만나 조선이 보내는 외교 문서인 국서를 전달하고 일본 측의 답서를 받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답서를 받으면 에도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답서를 받았음에도 막부가 굳이 닛코의 동조궁에 방문해달라고 강권하여 방문하였다.

4대 조선 통신사가 에도에 방문함은 표면적으로는 양국의 태평을 축하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은 쓰시마다이묘소 요시토시와 그 가신인 야나가와 일가 사이에 분쟁이 생겨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막부에 국서 조작(기유약조 참조)을 고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막부는 쇼군이 직접 재판을 연 끝에 소 요시토시의 편을 들었으나, 통신사행을 실현하여 외교적인 능력을 보일 것을 요구했다. 한편 조선 측으로서는 청나라의 위협으로 불안했기에[12] 일본의 사정을 자세히 알면 알수록 좋았으며, 이에 따라 정사 임광 등을 파견하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귀국을 서둘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조궁 방문이 갑자기 결정되었으니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가, 결국 유람만 한다는 조건으로 방문했다.[13]

그렇게 동조궁에 간 통신사 일행은 이에야스의 사당에까지 들어가면 참배를 해야할 수도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눈이 많이 온다는 이유로 그냥 내려와버렸다. 임광은 이 과정을 사행록 병자일본일기에 남겼는데 동조궁 방문은 사전 논의 없이 갑자기 이뤄진 일이었으므로 나중에 문책받을까 두려워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묘사했다[14][15]. 임광 뿐 아니라 부사 김세렴, 종사관 황호도 마찬가지이며, 연구자들 중에는 세 사람의 사행록 내용이 서로 비슷비슷하므로 동조궁을 열심히 까자고 사전에 논의라도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그 후 1642년(인조 20년),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5대 조선 통신사의 방문에 앞서 막부는 사신을 보내 동조궁의 사당에 걸어 둘 어필과 시문(詩文), 범종과 서명(序銘)을 청했다. 인조는 이를 들어주기로 하였는데 조정에서 어필만큼은 보낼 수는 없다고 하여 대신 의창군 이광이 대필하여 일광정계창효도량(日光淨界彰孝道場)이라는 편액을 보낸다.[16] 한편 동종을 주조하게 하고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이 서(序)[17]를, 예조참판 이식(李植)이 명(銘)[18]을 지은 후 행사직 오준(吳竣)[19]이 동종에 글씨를 새겼다.

동종에는 재밌는 점이 있는데 이식은 숭정 임오 10월에 이 글을 썼다고 해두었다. 그런데 숭정은 명나라 숭정제가 반포한 연호로 1628년부터 1644년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1636년에 청나라에 항복한 상태였다. 당시 청나라에 대한 반감으로 여전히 명나라의 연호 숭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제작해 타국으로 보내는 선물에까지 숭정을 사용했다는 것은 조선의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엿볼 수 있는 부분.[日光山鍾銘幷書]

이렇게 해서 동조궁에 처음 방문한 4대 조선 통신사(1636), 처음 참배한 5대 조선 통신사(1643)와 6대 조선 통신사(1655)까지 3번의 조선통신사가 동조궁에 방문 및 참배했다. 특히 5대 조선 통신사 때 동조궁에서 제대로 참배를 하게 되면서 다음에도 갈 때를 대비해 의주(儀註)[20]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 통신사의 참배가 몇차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동조궁에는 조선 통신사의 방문 흔적이 남았다. 현재도 양명문(陽明門) 앞에는 인조가 보낸 동종이 걸려 있으며, 이에야스의 시신이 안장된 청동탑 앞 삼구족(三具足)[21]도 인조가 보낸 것이다.

5대 조선 통신사가 동조궁에서 참배를 하는 과정은 작자 미상의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에 잘 나왔다.

또 문 하나를 들어가니 동쪽과 서쪽에 누각이 있다. 동쪽에 있는 누각에는 악기(樂器)를 진열해 놓고 서쪽에는 금수레(金輿) 두 채를 놓아두었다. 이것은 이에야스(家康)가 살아있을 때 타던 수레이다.

또 한 문을 들어서니 이곳은 소위 권현묘(權現廟)다. 도주가 일반 관원은 제외하고 다만 사신만 안내해서 들어갔다. 뜰을 올라갈 때에 좌우에서 옷을 걷어주는 자는 모두 왜인 관리로서 공복(公服)을 입은 자였다. 정당(正堂) 밖에는 탁자를 놓고 물건을 벌여 놓았고, 또 평상(平床)을 놓아 사신이 예를 행하는 곳으로 했다.

뜰 가운데에는 좌우에 악당(樂堂)이 있고 여기에 봉두금반(鳳頭金蟠)을 차려 놓았으며, 악공(樂工) 50명이 모두 금관(金冠)에 수복(繡服)을 입었다. 승도(僧徒)들이 벌여 앉은 것도 역시 백 명이나 되는데, 모두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었다. 중 두 사람이 사당 문을 열자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는데, 생황과 퉁소ㆍ종고(鍾鼓)의 소리가 자못 절조가 있었다.

사신이 평상 위에서 향을 피우고 축을 읽고서 전후 재배의 예를 행하니 도주와 집정들은 평상 밑에 서서 숨을 죽이고 엄숙한 얼굴로 감히 소리 내지 못했다. 예식이 끝나자 사당 뒤에서 수의(繡衣)를 입은 두 어린이가 봉두금절(鳳頭金節)을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고 나갔다. 그러자 주승(主僧)이 금관(金冠)과 금으로 수놓은 옷차림으로 동쪽 뜰로 내려가더니 사신들을 향해서 읍을 하므로 사신도 여기에 응답했다.

주승은 나이 젊고 넉넉하고 명석하게 생겼다. 호를 비사문당(毗沙門堂)이라고 하는데, 지금 왜황(倭皇)의 사촌이요 죽은 왜황의 아들이다. 정당(正堂)의 제도를 보니 모두 기둥이 다섯이요, 집의 용마루와 기둥과 벽에는 모두 용과 봉이 날고 뛰는 모양을 금으로 칠해서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사당 안에는 이에야스의 목상(木像)을 봉안해 놓았고, 사당 뒤 산기슭에는 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되었다. 이 탑은 머리에서 허리까지 황금을 칠했는데 이에야스가 묻혀 있는 곳이라 했다.출처


쇼군은 참배를 마친 통신사에게 하사품을 내렸는데 5대 때는 정은(丁銀) 100냥, 무명 300장을 주었고 6대 때는 정은 500냥, 무명 900장을 주었다.

1655년(효종 6년),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6대 조선 통신사 때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사당인 다이유인(大猷院)에 걸어둘 어필을 요청했는데 효종은 글씨에 자신이 없었으나, 딱히 안 써줄 이유도 없어 조정과 상의하였다. 인조 시절에 대필을 해 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어필을 보내주는 걸로 결론이 나 채유후(蔡裕後)가 지은 영산법계숭효정원(靈山法界崇孝淨院)이라는 글을 효종이 직접 써 선물하였다.# 이 어필은 현재 린노지에서 보관 중이다.

이어 1682년(숙종 8년)의 7대 조선 통신사 때에는 막부에서 먼저 새로 취임한 쇼군(도쿠가와 츠나요시)도 아직 동조궁에 가보질 못했는데 외국의 사신들이 먼저 가는 것은 좀 그러니 이번에는 동조궁 참배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여 이때부터 조선 통신사의 동조궁 참배 및 방문은 없어졌다. 다만 에도에 지은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사당인 겐유인(厳有院)에는 참배를 하기로 하여 처음에는 여기에 걸어둘 어필을 요청했는데 나중에 이 참배도 안 하기로 하여 어필도 보내지 않았다.

이외에도 5, 6대 조선 통신사때 동조궁에 참배할 목적으로 등롱, 화병, 악기 등 선물을 꽤나 챙겨갔고 현재도 남아있다.


3. 동조궁의 내부 건물 및 장식물[편집]



파일:동조궁내부도.jpg

동조궁 내부 건물
동조궁 둘러보기

3.1. 장식물[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NikkoNoEvil4902.jpg
닛코 동조궁의 들 중 여러 미디어에 모티브로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문서 참조.

  • 잠자는 고양이(眠り猫)
파일:1024px-Toshogu-Sleeping-Cat-Dsc3972.jpg
동쪽 회랑에 있는 히다리 진고로(左甚五郎)의 작품으로, 닛코를 대표하는 상이기도 하다. 진고로는 고양이를 닛코와 이에야스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였으며, 해당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22]

  • 상신고(上神庫) 코끼리 조각
파일:800px-Nikko_Toshogu_Lion_Elephant_M3079.jpg
에도 막부의 전성기에 재건된 만큼 각 건물의 처마, 기둥 등에 화려하고 정교하게 조각된 장식들이 많이 있으며 그중에서 코끼리 조각은 조각가가 실제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들은 얘기와 기록만 가지고 조각했다고 한다.

3.2. 내부 건축물[편집]


  • 오중탑
파일:800px-Nikko_Tosho-gu_Pagoda.jpg
1648년 쇼나이(庄内)의 다이묘 사카이 타다가츠(酒井忠勝)가 봉납한 것으로 1812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8년에 다시 지었다. 각 층은 땅, 물, 불, 바람, 공기 순으로 각 요소를 나타내었다. 신바시라(檫, 중심 기둥)가 내부에 있어 지진으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능을 한다.

  • 양명문(陽明門)
파일:日光東照宮陽明門001.jpg
문 양쪽에 물결 모양의 합각 4개가 있는 화려한 카라몬인 카라요츠아시몬(唐四脚門)의 일종으로, 팔선칠복신을 장식한 611개의 장식이 달려있다.

  • 범종
파일:516px-InjoNikkoBell4999.jpg
인조가 선물한 청동 종. 양명문 앞에 있으며 맞은 편에 아래 등롱이 있다.

  • 오란다 도로(네덜란드 등롱)
파일:800px-NikkoRotatingLantern4994.jpg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43년 쇼군에게 헌납한 것으로 네덜란드식 등불이라는 뜻이다. 양명문 앞에 있으며 맞은 편에 위의 범종이 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능
파일:1024px-Bronze_urn_of_Tokugawa_Ieyasu.jpg
잠자는 고양이를 지나 720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장소로, 우측에 있는 청동 그릇에 유해가 남아있다. 이때 이에야스의 시신이 안장된 청동탑 앞에 있는 삼구족(三具足)[23]은 인조가 보낸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것은 아니며 1812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만든 것이다.


4. 찾아가는 길[편집]


닛코역이나 도부닛코역에서 이곳까지 운행하는 도부 버스 중 오쿠호소 - 닛코역 버스[24]가 있으며 15분 정도 소요된다. 역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어서 도보 여행도 가능한데 이 경우 50분 정도 소요된다.[25]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4] 현재 시즈오카시 스루가구에 있다.[5] 현재 도쿄도 미나토구에 있다. 1590년부터 도쿠가와 가문의 보리사(菩提寺)로 지정된 사찰이며 에도 막부의 쇼군 15명 중 6명이 이곳에 묻혔다.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장례도 이곳에서 치러졌다.[6] 현재 아이치현 오카자키시에 있다.[7] 도도 다카토라가 이에야스 사후 닛코 동조궁의 건축을 담당하였으며, 자신의 영지에도 동조궁을 건축했다.[8] 현재도 일본 각지에 130여 곳이 남아있다고 한다.[9] 최초의 사당이었던 쿠노산 동조궁(久能山東照宮)과 측근 도도 다카토라가 지은 도쿄도 다이토구의 우에노 공원에 있는 우에노 동조궁(上野東照宮)과 함께 3대 동조궁으로 불리기도 한다.[10] 대신 해당 행사는 봄/겨울에 계속 진행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11] 자신의 조상이 지은 건물을 파괴하는 것은 가문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기에 거부했을 것이다.[12] 실제로 통신사들이 일본에 있는 동안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귀국 후에야 전쟁이 났음을 알았다.[13] 원래 통신사가 파견될 때에는 조선과 일본이 미리 논의해 세부 사항들을 대부분 결정해 놓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통신사 파견 이전에는 전혀 말이 없다가 느닷없이 동조궁 이야기가 나오니 통신사들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일본 땅에 들어와 있으니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14] 통신사는 국왕을 대신하여 일본에 다녀오는 것이라 하여, 일본에 머무는 동안 부적절하거나 조선의 위신을 깎아먹는 것으로 보일 소지가 있는 일을 한 경우 크게 질책받음은 물론 관직이 삭탈당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막부 측에서 선물로 준 금은을 받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어 대마도주에게 주거나 길에 버리거나 하기도 했으며, 일본 측에게서 받아 온 답서에 조선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표현이 있다거나 조선 국왕의 휘가 쓰여 있다거나 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큰일나는 것이었다. 하물며 유람이건 참배건 며칠씩 시간을 들여서 이전까지 통신사들이 갔던 적이 없는 곳에 가 달라는 건 적대로 작은 일이 아니었다.[15] 다만 부정적인 묘사는 1636년 사행록에만 나타나고, 이후 사행록들은 대체로 동조궁의 풍경에 감탄하는 투가 많다. 각 사행별로 하나씩 뽑아서 비교해 보면 임광의 병자일본일기에는 "별로 볼 것도 없는 산 속에 할아버지의 시신을 버려 두고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사신들에게 자랑하려 하니 웃기지도 않는다" 라는 식인 반면 작자 미상의 계미동사일기에는 "건물들을 구리와 금으로 장식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라는 대목이 있고, 남용익의 부상록에는 별세계라거나 건물들이 빛나는 게 눈이 부시다거나 하는 등으로 평하며 도쿠가와 가문이 이 산에 사당을 지은 이유를 알겠다고 납득하는 모습까지 보인다.[16] 이 편액은 181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추정한다.[17] 산문. 생애에 대한 간략한 일대기.[18] 운문. 공덕을 노래하는 시.[19] 이 사람은 후에 삼전도비의 글씨도 새긴다.[日光山鍾銘幷書] / 日光道場爲 / 東照大權現設也 / 大權現有無量功德 合有無量崇奉結搆之雄世未曾有繼述之孝益彰先烈我 / 王聞而歡喜爲鑄法鍾以補靈山三寶之供仍 / 命臣植敍而銘之銘曰 / 丕顯英烈肇闡靈眞玄都式廓寶鍾斯陳參修勝緣資薦眞福鯨音獅吼昏覺魔伏非器之重唯孝之則龍天是護鴻祚偕極 / 崇禎壬午十月日朝鮮國禮曹參判李植撰 / 行司直吳竣書 - 일광산의 도량(道場)은 동조대권현(東照大權現)이 세웠다. 대권현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었고, 함께 끝없이 숭배함이 있어서 불사를 짓는 그 웅대함은 세상에 일찍이 없었다. 선대의 사업을 계승한 효(孝)가 더욱 선대의 공적을 드러나게 하였다. 우리 국왕께서 듣고 기뻐하시며 법종(法鍾)을 주조하여 신령한 산에 세 가지 보배를 바치는 것을 돕도록 하시며, 신하인 식(植)에게 명해 명을 짓도록 하시었다. 명에 이르기를, 영광스러운 선조(先祖)를 크게 드러내어 일찍이 신령스러운 모습을 드날렸지. 현도(玄都)의 큰 규모를 이루어 보배로운 종을 여기에 펼침에 찬수(撰修)에 참여한 좋은 인연으로 참된 복을 빈다오. 종소리 사자의 포효처럼 울리면 어둠 속에 마귀들 굴복함을 알리니 헤아릴 수 없는 중요함은 오직 효의 모범이 됨이로다. 용천(龍天)이 이를 보호하리니 큰 복이 영원토록 함께 하리라. 숭정(崇禎) 임오년(1642) 10월 일 조선국 예조참판 이식 짓고, 행사직 오준 쓰다. 출처: http://tongsinsa.net/press/207[20] 의례의 절차를 기록한 책[21] 향로, 화병, 촛대[22] "히다리 진고로는 고양이를 좋아했고 고양이에게 매료됐다. 진고로는 나무 조각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8개월 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다양한 모양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 고양이들을 연구하고, 조각하고, 또 조각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23] 향로, 화병, 촛대[24] 1번 또는 2번 정류장에서 83번 오모테산도 정류장 또는 85번 다이유진/후타라산 신사 앞 정류장에서 하차.[25] 도부닛코역앞 - 닛코소방서 - 닛코우체국 - 신교로 가면 되고, 큰길이기 때문에 걸어가기 쉽다. 이 길을 따라 계속 지나가면 닛코식물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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