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가쿠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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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4·65대 내각총리대신
다나카 가쿠에이
田中角栄 | Tanaka Kakuei


파일:田中角栄.jpg

출생
1918년 5월 4일
니가타현 가리와군 후타다촌
(現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
사망
1993년 12월 16일 (향년 75세)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마치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
재임기간
제64대 내각총리대신
1972년 7월 7일 ~ 1972년 12월 22일
제65대 내각총리대신
1972년 12월 22일 ~ 1974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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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다나카 하나
가족
다나카 마사노리 (장남)
다나카 마키코 (장녀)
다나카 나오키 (사위)[1]
다나카 교 (차남)
다나카 히토시 (삼남)
야마시나 가오루 (조카)
학력
후카다 고등소학교 (졸업)
주오공학교 (토목과 / 졸업)
병역
일본제국 육군 상등병 전역[2]
정당
[3]
지역구
니가타 3구
의원 선수
16 (중)
의원 대수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약력
다나카 토건공업 사장
에치고 교통 대표이사 사장·회장
주오공학교장
중의원 의원
제12대 우정대신
제9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67-69대 대장대신
제9·11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33대 통상산업대신
제6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64·65대 내각총리대신

1. 개요
2. 일생
2.1. 자수성가한 정치인
2.2. 총리 재임과 록히드 사건
2.3. 총리 사임 이후 어둠의 쇼군 시절
2.4. 정치적 몰락과 사망
3. 평가
4. 어록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기타



1. 개요[편집]


"政治は数であり、数は力、力は金だ"

(정치는 수이고 수는 힘, 힘은 돈이다)[1]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 64·65대 일본 총리를 역임했다.

별명은 서민재상(庶民宰相), 현대판 태합(今太閤, 이마타이코), '20세기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어둠의 쇼군(闇将軍, 야미쇼군), 컴도저(コンピューター付きブルドーザー, 컴퓨터 달린 불도저[2]) 등.

파벌정치를 하는 일본에서 1970~1990년대까지 다나카 총리부터 타케시타 총리까지 일본 경제 부흥기를 이끌던 자민당을 지배한 주류 파벌은 다나카 가쿠에이로 대표되며, 다나카파[3]로 불릴 정도로 일본 정계에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전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본 궤도에 올려 놓으며 일본 경제 부흥기를 이끌었으나 그 과정에서 기업과의 정경유착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로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취임 5개월 만에 중의원 의석 감소로 "제2차 내각"을 출범했고,[4] 73년 11월에는 후쿠다 다케오를 대장대신으로 하는 "타나카 개조내각"을 출범시켰다.

또한 딸인 다나카 마키코는 병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일본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녀는 가쿠에이의 고향이자 '다나카 왕국'으로 불리던 니카타현에서 6선 중의원을 하며, 일본 최초의 여성 외무대신이 됐다. 문서 참조.

총리 재임 기간은 2년 5개월 남짓으로 강렬한 이미지에 비해 길지는 않다. 하지만 '어둠의 쇼군'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막후 실세로서 지낸 세월이 훨씬 길다. 일본의 1970~80년대 정치사에선 라이벌 후쿠다 다케오와 벌인 각복전쟁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2. 일생[편집]



2.1. 자수성가한 정치인[편집]


1918년 니가타현에서 태어났다. 다나카의 집안은 농사꾼 집안이긴 했지만 다나카의 아버지는 소와 말을 길러서 파는 일을 했고, 할아버지는 농가용 나무를 파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중소농은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다나카의 어린시절 아버지는 잉어 양식업에 실패하고 씨받이 소를 대량으로 수입했다가 소가 모두 죽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고, 대단히 어려운 가운데 성장해야 했다. 어린시절에 말더듬이였다고 하는데 일본의 (唱)을 연습해서 그것으로 말더듬이를 교정했다고 한다.

1933년, 고등소학교(오늘날의 중학교) 졸업 후 도쿄로 상경해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야간 공업학교 토목과에 다니면서 건축기사 자격을 취득해 건축사무소를 설립하면서 건축기사 일을 하게 된다. 한때 만주국에서 병사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폐렴 때문에 귀국한 뒤, 다나카 토건공업이라는 회사를 차렸고 일본의 전쟁무기를 연구하던 이화학 연구소 관련 사업을 따내면서 회사의 규모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도쿄가 공습을 당하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지만, 다나카는 이화학 연구소 관련 사무로 대전에 와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면했다.

사업가로서 그런대로 기반을 잡은 가운데,[5] 정치자금을 꼬박꼬박 갖다 바치던 오아사 다다오의 요청으로 300만엔의[6] 자금을 만들어 전달하게 되고 여기에 상당한 인상을 받은 오아사로 부터 "이참에 자네가 한번 출마해 보는 것이 어떠냐" 권유해서 진보당[7] 후보로 출마했지만 2위 득표로 낙선했다. 이후 이듬해인 1947년에 고향 니가타 3구에 민주당(역시 보수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8]

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가타야마 데쓰의 일본사회당과의 연립정권을 깨고 총리가 되었지만 불과 몇달만에 말아먹고, 이틈에 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가 민주당 출신 의원들이 모인 민주 클럽 의원들과 연합해 통합정당인 민주자유당을 설립하면서 다나카도 민주자유당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 요시다 시게루가 총리가 되면서 법무차관으로 관료 첫 경력을 시작했지만,[9] 불과 2달도 안돼서 터진 "탄광국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가타야마 데츠 총리가 탄광 국유화를 발표하자 탄광주들이 로비를 위해 자금을 살포한 사건이었지만 재판부는 이건 "뇌물이 아니라 정치헌금"이라면서 정치인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한다.

다나카는 자신은 무고하다면서 1949년 중의원 선거에 옥중출마를 선언했고 니가타 주민들은 열렬한 지지로 그를 재선시켰다. 국회의원이면서 나가오카 철도의 사장에 취임했고 건축법 개정안을 발의해 1급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이때 사토 에이사쿠 당시 자유당 부간사장을 알면서[10] 그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출세를 도모한다.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보수대연합 자유민주당이 탄생하고 1957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출범하면서 우정대신으로 취임했다. 현재의 일본 방송체제, 즉 신문사가 방송사도 운영하는 소위 신방겸영 체제는 다나카가 이 시기 우정대신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추진했던 정책으로 이를 통해 다나카는 매스컴을 틀어쥐는데 성공했다. 특히나 방송국의 설립과 면허 유지 권한을 틀어쥔 것은 후에 다나카가 총리가 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여러 대신직[11]과 당내 요직들을 거치면서 차기 총리 자리를 노리게 되지만, 문제는 기시 노부스케 라인의 후쿠다 다케오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 후쿠다는 명문가 태생,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고시 수석으로서 전형적인 엘리트에 귀공자 타입인데다 재계 또한 후쿠다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업학교 출신의 짧은 가방끈, 서민 집안에서 빽도 없이 자수성가한 다나카와는 완전히 상극이였다.

또한, 신칸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칸센을 최초로 건의한 사람은 아니지만, 현재 신칸센 계획의 대부분이 그의 정책이다. 철도 사업체 출신이었던 특징을 살려 도카이도 신칸센산요 신칸센의 영향력을 대도시권간이 아니라 중심으로 지역의 경제를 부흥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도카이도 신칸센과 산요 신칸센을 제외한 신칸센 노선은 다나카가 추진한 것이다.[12] 그래서 신칸센, 고속도로, 지방공항 등 사회자본의 정비를 다나카의 공적으로도 본다.

1962년, 일명 다나카 구상을 통해 신칸센 정비법의 기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고속선을 제외한 철도 건설비의 100년분에 해당하는 거액이라 무산된다. 하지만 이후 자민당 간사 선거를 앞두고 일본열도개조론(일본어 위키백과)를 출간하는 등 신칸센을 자신의 정책의 주 축으로 밀기 시작했고 특히, 그의 고향인 니가타현으로 향하는 조에츠 신칸센을 최우선 과제로 두었다. 일본열도개조론에 따라 총리가 된 후 경제개발을 진행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 경제에 붐이 일기도 했다.(버블 경제 이전)

1968년에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서 물러나려 하자 다나카는 화들짝 놀라면서 3선 도전 무드를 조성했다.[13] 그랬던 이유는 그 당시 사토 에이사쿠가 물러나버렸으면 기시 노부스케의 입김으로 인해 후쿠다 다케오에게 손쉽게 총리자리가 넘어갈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토 에이사쿠가 3번째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한숨을 돌리게 된 다나카는 사토파 의원 대부분을 자신의 파벌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해 결국 1972년, 사토 에이사쿠가 3번째 총리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때에는 사토파 의원 대부분이 다나카의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 해 7월 5일에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서는 다나카 가쿠에이,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가 출마하였는데, 처음에는 후쿠다가 유리했으나, 캐스팅보트를 가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다나카를 지지함으로써 다나카가 유리한 형세가 되었다. 결국, 다나카는 미키, 오히라를 제치고 후쿠다와의 결선투표에서 후쿠다를 이기고, 마침내 대망의 총리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하게 된다(제1차 각복전쟁).


2.2. 총리 재임과 록히드 사건[편집]


파일:souri64.jpg
64대 총리 취임 후

70%의 높은 지지율을 안고 시작한 다나카 내각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는 등 미중관계가 개선되자(데탕트) 이를 따라하기 위해 1972년 9월, 전격 방중했다.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정상회담을 하고 대만과 단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저우언라이는 다나카에게 메모지에 언필신 행필과(言必信行必果)란 글을 적어 건넸고 다나카는 속뜻을 모르는 채 메모지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믿음은 만사의 근본"이라 써서 저우언라이에게 보여줬는데,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이 신문에 실리자 쇼와 시대의 한 석학은 메모지에 적힌 말을 보고 "교양도 없는 놈"[14]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저우언라이가 건넨 메모지에 적힌 논어의 한구절인 "언필신행필과(言必信行必果)"의 그 뜻인즉 "말한 것은 반드시 신의가 있어야 하고,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것이 선비의 본분이다)"라는 뜻이었다.[15] 이렇게 보면 중국이 다나카를 못 미더워한 것 같지만 실제 당시 중국 정부의 요인들은 다나카의 소탈한 언동에 호의를 품었고 중일국교정상화에서 다나카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후일 다나카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덩샤오핑[16] , 후야오방, 자오쯔양, 장쩌민 등 일본을 방문한 중국 지도자들은 예외없이 다나카 저택을 방문하여 다나카를 위로하였다.

파일:external/himg2.huanqiu.com/20150702083735449.jpg
1972년 9월 27일 저우언라이마오쩌둥을 만나며

중일수교 자체는 높은 지지를 받았던지라 이 기회에 의회를 해산하여 총선이 치러졌지만 자민당이 288석을 얻은 1969년 총선에 비해 의석이 271석으로 감소하는 예상 외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일본 공산당이 약진하는 사태[17]가 발생했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다나카가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열도개조론(즉 토건정책)으로 경기가 과열되었고, 이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급속히 상승하여 물가상승률이 10%대로 오르기에 이를러 사회문제가 되었다. 다나카는 이 와중에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중복출마 제도를 시행하려고 했다가 야당의 강력한 반발에 무산되고 말았다.가쿠만타

오일 쇼크가 터지자 이스라엘 지지에서 아랍권 지지로 돌려서 석유를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열도개조론으로 10%대로 올라선 물가상승률은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1974년 23%로 올라가기에 이를렀고, 휴지같은 일부 생필품은 사재기로 품귀현상을 보였으며 일본은행에서 물가억제를 위해 모든 공공사업이 축소됨에 따라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떨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율은 20%대로 급속히 떨어졌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치러진 1974년 참의원 선거에선 헬기를 타고 일본 47개 도도부현 중에서 도치기현을 제외한 모든 현을 돌아다니며 선거유세를 하고 500억엔에서 1천억엔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동원하였지만 결과는 자민당의 의석이 크게 줄어들어 개선의석에서 자민당이 야당과 무소속에서 6석 뒤쳐지는 62석에 그쳤고, 전체 의석도 과반을 간신히 유지하는 패배였다. 1인구에서는 야당후보를 압살했지만 다인 선거구에서 말아먿은것이 패인이었다. 이것도 닉슨 닮았네 이 계기로 당시 혁신계 후보가 강세를 보이는 주요 지자체를 탈환하자는 TOKYO 작전[18]을 세우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에서 자민당과 야당이 백중세가 되었다[19]. 선거 패배로 인해 당내 내분이 일어나면서 내각에 참여했던 정적인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가 장관직을 사임했다.

이런 와중에 결정적으로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문예춘추[20]"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그 금맥과 인맥", "에쓰잔카이(越山會)의 여왕"[21]을 연재해 다나카의 금권정치와 록히드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연루 의혹을 제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돈을 뿌려서 정치하는 다나카의 정치행태에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결국 1974년 12월 9일, 다나카는 사임을 발표했다.


2.3. 총리 사임 이후 어둠의 쇼군 시절[편집]


물론 다나카는 권력을 내려놓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록히드 사건 의혹이 불거지면서 최대 정적인 후쿠다 다케오나 미키 다케오가 총리가 되면 자신이 밀려날 것을 우려한 다나카는 절친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원해서 총리로 세운뒤 뒤에서 실권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자민당 부총재 시이나 에쓰사부로"지금 국민들이 뿔나있는데 자꾸 그러면 뭔일 날지 아무도 모른다"라고 다나카를 거의 반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총재선거에서 미키 다케오가 당선되었다.

본래 미키는 다나카와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나카가 총리가 되는데에는 미키의 협력도 크게 작용하기도 했고. 그래서 다나카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키를 부총리로 임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청렴한 정치를 추구하던 미키와 돈을 뿌려서 정치하는 다나카의 성향차가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격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다나카가 미키 본인의 지역구에 신인 고토다 마사하루를 들이밀려다가 실패하면서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총리가 된 미키는 다나카의 예상대로 록히드 사건의 엄정수사를 다짐하면서 다나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 7월 27일, 다나카는 5억 엔의 뇌물수수와 외국환 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다. 다나카는 당내의 압박에 자민당을 탈당했지만 내가 죽어도 미키와 같이 죽겠다라는 생각에 따라 당내 파벌들을 모두 규합해 미키를 끌어내리는 공작을 시행했다. 심지어는 다나카의 최대 정적인 후쿠다와도 손을 잡을 정도였다.

이런 다나카의 공작은 성공을 거두어서 미키 내각은 말 그대로 소수여당 정권이 돼버리고 말았다.[22] 나카소네 파[23] 제외한[24] 자민당 내 모든 파벌이 다나카 편으로 돌아섰으며, 심지어 미키가 총리로 당선되는데 일조했던 부총재 시이나 에쓰사부로조차 미키가 건방지게 까분다면서 다나카 편으로 돌아섰다. 이에 맞서서 미키도 다나카 파벌에는 장관 한 자리만 주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자민당의 내분 가운데 치러진 중의원 총선에서 다나카는 전국 최다득표로 재선에 성공했지만(득표율 37%, 168,522 표[25] ) 자민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미키는 결국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다나카는 다시 오히라를 앞세우려고 했으나, 이때 후쿠다 다케오가 내가 총리 2년한 뒤에 너한테 넘겨줄게라면서 오히라와 동맹을 맺으면서(오후쿠 밀약) 후쿠다가 총리가 된다.

만약 후쿠다가 약속을 지켰다면 모르겠지만, 2년 뒤인 1978년, 약속대로 후쿠다가 오히라에게 총리자리를 넘겨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후쿠다와 오히라의 동맹은 깨졌다. 이틈을 노려 다나카는 다시 오히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수족인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비공개인 당원명부를 빼돌리게 해서 그걸 바탕으로 1:1 접촉과 끝에 예비선거에서 오히라가 후쿠다를 누르게 되었다. 결국 후쿠다는 총재선거 본선에 나서는것을 포기하고 오히라가 무투표로 총리가 되게 되었다(제2차 각복전쟁).

오히라가 총리가 되긴 했으나, 다나카의 공작으로 된것임을 잘 알던 후쿠다는 사사건건 오히라에게 딴지를 걸었고 오히라도 이에 지지 않고 맞서면서 자민당은 급격한 내홍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같은 시기 그가 구상한 TOKYO 작전이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보수후보가 승리하면서 결실을 맺었지만 1979년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이 의석이 줄어드는 패배를 당하자 후쿠다는 이를 빌미로 오히라에게 사퇴를 촉구했고, 오히라는 사퇴를 거부하면서 자민당은 분당직전까지 가는 급격한 내홍이 일어났다.(시토카 항쟁) 겉으로 보기에는 후쿠다와 오히라의 다툼이었으나 사실상 오히라의 뒤에는 다나카가 있었기 때문에 후쿠다와 다나카의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사회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이 가결되자, 오히라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선거 초반은 자민당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으로 사회당-공명당-민사당 야권 연대로의 정권교체가 예상되었지만, 선거운동 도중 오히라가 사망하면서 자민당은 그간의 내홍을 접고 일치된 체제로 선거운동에 임했고,[26] 결국 자민당은 284석의 압승을 거둔건 물론, 다나카는 역시 니가타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 (3차 각복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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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가족들과. 안경낀 사람은 아이치 카즈오 의원

이후 일본 정계는 사실상 다나카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었다. 후쿠다가 오히라의 사망으로 입지가 약해지자 다나카는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를 총리로 세웠고, 스즈키 내각이 마음에 들지 않자 2년 만에 다시 나카소네 야스히로로 갈아치우는 등 뒤에서 일본 정치판을 쥐고 흔들었다. 이리되니 총리가 되려면 다나카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래서 다나카에서 붙여진 별명이 어둠의 쇼군(闇将軍, 야미쇼군)이었다.

그러나 1983년 10월, 9년 만에 록히드 사건의 1심 재판의 판결이 내려졌다. 도쿄 지방법원은 다나카에게 징역 4년, 추징금 5억엔을 판결했는데 다나카는 여기에 불복해 항소했다. 야당들은 다나카의 뻔뻔함에 항의해 국회일정을 거부했고 결국 중의원-참의원 의장들이 나서서 중요법안을 처리해주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치르겠다라고 설득해 12월 선거가 치뤄졌다.

그리고 해당 83년 총선에서 뻔뻔한 다나카를 심판하겠다면서 전 참의원 의원이었던 노사카 아키유키가 다나카의 지역구인 니가타 3구에 출마해 도전장을 냈지만, 니가타 3구 주민들은 "신경 끄셈. 우리에겐 오직 다나카뿐임."[27]라면서 다나카에게 무려 22만표, 46,6%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주며 다나카는 당당히 재선에 성공했고, 노시카 아키유키는 결과적으로 사회당 후보와 표를 쪼개먹는데(5,8%의 득표율) 그쳐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일본에서 다나카에 대한 반감은 상당해 자민당은 250석으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다나카의 전횡에 반발하며 자민당을 탈당한 소장파 의원들이 창당한 군소보수정당 신자유클럽[28]과 연립정권을 수립해 간신히 과반수를 넘길수 있었다. 국민의 호된 여론을 체험한 나카소네 총리는 "이제부터 다나카의 정치적 영향을 모두 배제하겠다"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2.4. 정치적 몰락과 사망[편집]


그러나 다나카는 이런 정점의 순간에서 서서히 정치적 몰락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장기집권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다나카의 공작으로 총리자리를 내놓게 되어 원한이 깊었던 스즈키 젠코는 다나카의 최고 정적인 후쿠다를 끌어들여 다나카에게 역습을 가하게 된다.

스즈키가 노린 틈은 바로 다나카파의 분열이었다. 다나카는 어둠의 쇼군으로 불리면서 총리직도 쥐락펴락 할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정작 다나카파에서는 "나카소네도 총리 시켜주면서 왜 정작 우리에게는 총리를 안 시켜주냐!"라면서 불만이 팽배해있었기 때문이다.[29] 스즈키 젠코는 이틈을 파고들어서 다나카파의 2인자였던 니카이도 스스무 부총재를 총리로 옹립하는 구상을 시행한것이다.(니카이도 옹립구상 - 제4차 각복전쟁)

후쿠다파는 물론 자민당 외에 공명당까지 끌어들여서 시행하던 이 공작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나카소네가 재선에 성공하긴 했지만 스즈키의 역습은 다나카파에게 충분히 먹혀들었다. 다나카파 내에서 더이상 다나카를 못 믿겠다는 의원들이 다케시타 노보루를 중심으로 뭉쳐 "창정회"라는 새로운 파벌을 만든 것이다. 결국 1985년 2월, 창정회가 발족했고 다나카는 믿었던 다케시타가 배신하자 충격을 받아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실상 더 이상의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후쿠다파의 공격은 다나카 본인을 직접 흔들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의 파벌을 흔드는 데는 성공했고,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다나카를 끌어내리는 결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한편 후쿠다 역시 옹립구상에서 실패했기에 리타이어.. 이것이 70년대와 80년대 일본 정치를 들썩이게 한 각복전쟁(가쿠후쿠 전쟁)의 끝이었다.

그럼에도 1986년 열린 선거에 또 출마하였다. 본인은 병 때문에 선거운동조차 못했고 지지자들만 선거운동을 했음에도 또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미 다나카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으니 마침내 다케시타가 "경세회"를 만들면서 다나카파 대부분을 끌어가버렸다. 다나카는 이것에 매우 격분했고 다케시타가 다나카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만 당했다. 그리고 다나카는 비록 병으로 움직이지는 못하는 처지였어도 다케시타를 공격했으니 황민당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증거는 없었으나, 많은 이들은 황민당 사건의 배후에는 사실상 다나카가 깊게 개입했을 것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이후 다나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1990년, 정계은퇴를 선언해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1993년마키코에게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주고 당선시킨 뒤 12월 16일,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는 게이오기주쿠대학부속병원에서 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 이후에도 정계에 다나카파가 일부 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일본우정 민영화 추진을 이유로 중의원을 해산한 뒤 당 총재로 공천권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대거 숙청되고서야 완전히 끝을 맺었다.


3. 평가[편집]


다나카와 그의 최대 정적인 후쿠다를 비교해보면 두 사람의 차이가 극명해지는데 명문가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후쿠다와 달리, 다나카는 말 그대로 밑바닥 흙수저부터 올라온 자수성가한 정치인이었다. 심지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이마타이코(今太閤: 지금의 태합. 태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칭). 그런데 본인은 오다 노부나가를 좋아해서 히데요시에 비견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안 배경이 없던 다나카는 철저하게 인맥과 으로 정치를 했고, 좋든 나쁘든 일본 전후 정치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총리로 남게 되었다. 어찌보면 귀공자 스타일의 후쿠다가 다나카를 이기지 못한 건 당연한 귀결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런 다나카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다나카파의 한 초년 의원이 꽃뱀에게 걸려서 100만 엔을 토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거를 막 끝낸 참이라 빚만 졌을 뿐 돈이 없던 터라 고민하던 이 의원은 다나카에게 연락해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해서 다나카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 의원이 다나카의 사무실에 가보니 다나카는 없고 대신 비서가 두터운 서류 봉투를 건냈는데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300만 엔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이 들어 있는 메모에서 다나카는 "100만 엔은 사고난 거 해결하고, 나머지 200만 엔 중에서 100만 엔은 신세진 사람들에게 밥을 사거나 감사의 선물을 보내는데 쓰고, 남은 100만 엔은 나중에 있을 문제에 대비해 남겨두도록 하라. 이 돈은 안 갚아도 된다."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이 의원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다나카에게 충성을 다짐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맞수인 후쿠다파의 의원들도 이런 식으로 돈으로 구워 삶았으며, 다나카에게 돈을 먹은 의원들은 다나카 비판도 자제할 정도였다.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 와중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무려 3천여 명이 장례식에 몰렸고 화환도 600여 개나 들어왔는데 그나마도 너무 많아서 절반으로 끊은 게 그 정도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모친상에 가겠다고 국철이 파업중인데 6시간이나 차를 몰고 간 의원이 있었는가 하면, 니가타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의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 때문에 록히드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 국민들의 혈압을 상승시키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다. 다나카 자신은 정치적 영향력이 급상승하면서도 자민당은 내리막길을 걸었는데 그럼에도 다나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을 꾸렸고 그 파벌을 쉴드로 록히드 사건의 예봉을 결국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파벌을 챙겨주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아이러니한 일.

흔히 자민당-보수관료-게이단렌[30](대기업 단체)의 삼각동맹을 자민당 38년 일당지배의 비결로 꼽는데, 다나카 가쿠에이 전까지는 대체로 중앙정부 차원에 그쳤다. 그러나 다나카 가쿠에이는 이걸 규모만 축소해서 지역 행정 단위까지 노골화해서 자민당의 지방조직을 강화했다. 72년 집권하면서 일본열도개조론을 내걸고 전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이권을 미끼로 지역토호들을 모조리 자민당의 지역조직으로 만들어버렸다.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으로 대대적인 토목사업을 벌여서 지역토호들이 운영하는 건설업체에 이권을 안겨주고 반대급부로 정치자금을 받아서 자기 파벌의 사조직망을 강화하는 금권정치가 지역에서까지 대세가 되었다. 즉 지금까지 이어지는 토건국가 일본을 완성한 사람이 다나카 가쿠에이. 이 과정을 지원하는 관료는 퇴임후 자민당을 통해서 정계 입문하거나 혹은 산하 기관 및 유관 기업에 낙하산으로 들어가서 압력 단체가 된다. 이런 낙하산을 위한 산하 기관, 공기업이 엄청나게 비대해져서 빈약한 재정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이런 정치구조에서 국민의 삶의 질 개선에 들어가야할 예산이 의미없는 토목사업에 대거 투입되면서 결국 부동산 버블 붕괴와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지면서 잃어버린 10년의 원인이 되었다. 다나카에 의해 만들어진 건설업체-족의원 간의 정경유착은 자민당 부총재 가네마루 신에 의해 계승되면서 이어졌고 이러한 담합 시스템은 훗날 1993년 제네콘[31] 스캔들의 발단을 제공하게 됐다.

다나카가 정치 비리로 일본 국민들의 원성을 샀음에도 정작 고향 니가타현에서는 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는데 고향에 막대한 투자를 했기 때문이었다. 니가타는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이었는데 다나카는 자신의 정치력을 총동원해서 니가타에 칸에츠자동차도조에츠 신칸센을 들어오게 했으며, 이 많이 오는 니가타의 특성을 고려해 니가타 각 도시에 제설 장치를 설치하고, 심지어 불과 60가구밖에 안사는 마을이 눈이 오면 고립되는 걸 막겠다고 터널을 뚫어주는 일까지 있었다. 이 터널 공사에는 반발이 많았으나 다나카는 이를 다 묵살해버리고 공사를 강행해 결국 터널을 완성시켰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의 유치에도 힘을 쏟았다. 이렇게 공을 들였으니 니가타 주민들이 나오기만 하면 우르르 표를 찍을 수밖에. 이런 탓에 니가타에서는 아직도 다나카 하면 영웅으로 대접하며 심지어 니가타 현에 소재한 역 중 우라사역의 앞에는 다나카의 동상까지 세웠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리고 다나카의 장녀인 마키코가 출마하자 다시 마키코에게 우르르 표를 찍어주고 있다.

선거민을 향한 연설 중에 "미쿠니 고개(三国峠)를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겠습니다! 그러면 동해의 계절풍은 태평양으로 불어서 빠져나가 에치고에 눈이 내리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나온 토사는 동해안으로 옮겨 매립에 쓰면 사도와는 연륙될 겁니다!"라는 드립을 친 적이 있다. 한국에 비유하자면 강릉시 유권자들한테 대관령을 다이나마이트로 날려버리고, 토사로 울릉도독도 사이를 매립해서 연륙시키겠다는 드립을 친 거다.

오늘날 일본 넷우익들 사이에서는 다나카가 대중(對中)으로는 중공과 수교를 했고, 대한(對韓)으로는 역사 문제가 다분한 발언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리 고평가는 못받는 듯 하다.[32]


4. 어록[편집]


"政治は数であり、数は力、力は金だ"

(정치는 수이고 수는 힘, 힘은 돈이다)[33]


"衆議院の半分を得ると政権を獲得する。 再び与党で1/2を得れば総裁選挙で勝つ。 そこでまた、再び1/2の勢力を持って自派罰でガバナー候補を立てないなら、候補を立てる派閥に協力することでガバナー選挙の動向を決めることができる"

(중의원의 1/2을 얻으면 정권을 획득한다. 다시 여당에서 1/2을 얻으면 총재선거에서 이긴다. 거기서 또 다시 1/2의 세력을 가지고 자파벌에서 총재 후보를 세우지 않는다면 후보를 세우는 파벌에 협력하는 것으로 총재선거의 동향을 결정지을 수 있다.)[34]

[35]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46 - 1947
정계입문
입당



1947 - 1948
합당

[[무소속|
무소속
]]

(동지클럽, 민주클럽)
1948 - 1948
탈당


1948 - 1950
창당


1950 - 1955
합당


1955 - 1976
합당

[[무소속|
무소속
]]

1976 - 1993
탈당
사망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7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니가타 3구



39,043 (14.17%)
당선 (3위)
초선
1949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42,536 (14.30%)
당선 (2위)
재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7,071 (16.31%)
당선 (1위)
3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1,949 (17.88%)
4선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5,242 (14.96%)
당선 (2위)
5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6,131 (22.74%)
당선 (1위)
6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9,892 (23.70%)
7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3,392 (28.67%)
8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2,756 (31.31%)
9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3,042 (32.96%)
10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82,681 (42.08%)
11선[36][37]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무소속|
무소속
]]

168,522 (36.99%)
12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1,285 (31.06%)
13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8,598 (30.24%)
14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20,761 (46.65%)
15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79,062 (40.03%)
16선

대단한 선거이력을 가졌다. 출마한 모든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중선거구 시절에 흔치않은 40%이상의 표를 얻은 정치인이다.[38]


7. 기타[편집]



다나카 총리의 생전 연설집 (노이즈가 있으니 볼륨을 줄이고 볼 것)
위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다나카는 생전에 서민 출신답게 말투도 서민적이고 유머를 겸비하여 유권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스타일이었다. 다나카 이전 총리들이 죄다 도쿄제국대학 일색[39]의 명문가, 엘리트들이 즐비하여 천룡인으로 여겨진 것에 비하면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40]

1981년 출간된 다나카가쿠에이복권대망론(田中角栄復権待望論)이란 책에 따르면 전성기 다나카의 재산은 2천억에서 3천억엔에 달하였고 더불어 매년 200억엔에 달하는 자금을 조성, 주요 선거때마다 수백억엔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다나카가 1947년부터 90년까지 16번에 걸쳐 무려 43년을 니가타 지역구 중의원으로 재임했고, 장녀 다나카 마키코는 93년부터 현재 2012년까지 19년을 내리 재임했으니 두 부녀의 의원 재임기간을 합치면 무려 62년이 된다. 한마디로 1947년부터 다나카씨가 아닌 사람이 니가타 중의원을 한 적은 1990년에 딱 한번을 빼고는 62년간 계속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우습게도 다나카 마키코는 비서 급여를 횡령한 혐의로 자민당에서 탈당 된 뒤에 무소속으로 다시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서 민주당 정권을 말아먹는데 한몫했다.

2대에 걸친 다나카 부녀의 니가타 지역구 장기집권은 결국 2012년 12월 16일 중의원 총선에서 마키코가 낙선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무리 다나카가 니가타에서 영웅이래도 마키코가 하도 전국적으로 쪽팔리는 짓을 많이 한 탓에 니가타 주민들도 결국 포기한듯 싶다. 그나마 득표수에 따라서 비례대표 구제를 받을수도 있는것도 못해서 완전히 낙선확정. 하필이면 선거날이 다나카 가쿠에이의 기일이었다는건 보너스.

이 사람을 풍자한 게임도 있는데, 바로 코어랜드/세가아임 쏘리. 다만 게임 내에서는 음독/훈독 차이를 이용한 변형으로 'ごんべえ(곤베에)'라고 히라가나로 나온다. 과거 국내에서는 일명 '이주일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통하기도 했다.

차지맨 켄!으로 유명한 나크의 1970년대 괴작 투명소년탐정 아키라에 실명 그대로 등장한다. 가쿠에이 총리로 변장한 Z단의 단장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있던 모나리자를 훔쳐 달아나고, 이후 총리 본인이 뉴스에 등장해 모나리자를 회수하겠다고 발표한다.

경마를 좋아해 정치활동 중에도 마주였으며, 재무대신이었던 1965년에는 도쿄마주협회의 회장을 역임했었다. 소유마들도 중앙 통산 36승이라는 나름 뛰어난 성적을 냈는데, 이 중 1965년 우준 빈마일본단파상을 우승한 베로나, 1970년 올커머와 1971년 일본 경제상을 우승한 마키노 호프가 대표적이다.

1973년 같은 마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와 만났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가 모르는 일본인들이 영국의 뛰어난 종마들을 사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라고 질문하자, 다나카 총리는 "여왕님의 말이었다가 일본으로 간 '게이 타임'이 두 마리의 일본 더비마들[41]을 배출했습니다. 일본으로 오시면 기꺼이 도쿄 경마장으로 안내해 드리죠" 라고 화답하는 등, 같은 경마 애호가로서 흥겹게 대화했다. 경마에 대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대화했는지, 당시 주영대사는 "여왕과 경마 이야기를 한건 세계에서 다나카 총리 밖에 없을것이다" 라고 회고했고, 가쿠에이의 딸인 마키코는 "하는게 말 얘기 뿐이라 바보 같았다" 라고 안쓰러워 했다.[42]

2000년대 들어서는 비록 비리는 저질렀어도 추진력과 결단력은 존경할만하다라는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런 재평가의 배경은 삽질만 거듭하는 일본 자민당과 민주당에 질려버린 국민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동경대 명예교수 미쿠리야 다카시는 현재 일본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에 대한 붐은 일본 정계에 인물이 없는 인재난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비리로 일본 국민들의 혈압을 올리는데 공헌했던 그가 결단력있는 지도자로 재평가받는걸 보니 씁쓸해 하는 이들도 많다. 다나카 가쿠에이에 관한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시하라 신타로는 다나카의 금권정치를 비판하는 선봉에 섰으면서도 다만 자민당에서 금권정치는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왔던 체질이라며, 다나카 가쿠에이가 정치적 배경도 없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금권정치를 더욱 더 활용할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현대의 일본을 누가 만들었냐고 한다면 그건 다나카 가쿠에이라고도 했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전 비서는 다나카의 과오는 록히드 사건과 금권정치가 꼽히지만 최대 과오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놓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43]

다나카 가쿠에이 때가 일본에서 가장 취업이 잘 된 시기였다. 위에 언급하다시피 열도개조론을 펼치며 지방 토건사업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면서 건설직을 중심으로 일자리가 크게 늘어난 영향이다. 이 당시 유효구인배율이 1.7을 넘었는데[44] 1980년대 말-90년대 초반 버블경제기 때에도 그 기록을 깨지 못했고 2010년대 중반 이후로도 그 기록이 경신되지 않을 정도로 일자리가 넘쳐났다. 물론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일시적인 현상에 그쳤지만 말이다.

총리를 역임한 자가 사망하면 위계[45]와 훈장[46]이 수여되지만 다나카는 피고인 신분으로 사망하여[47]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다나카의 보스였던 요시다 시게루와 사토 에이사쿠는 위계는 종1위에 이르렀고 훈장도 일본의 최고등급 훈장인 대훈위국화장경식을 수여받았다.

일본에서 실시된 각종 역대 전후 총리 평가 여론조사에서 요시다 시게루,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와 같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도쿄 메지로(目白)에 있던 다나카 저택은 2,600평에 달하였으며 그 규모와 다나카의 위세 덕에 메지로 어전(目白御殿)이라고[48] 불렸다.#[49] 저택의 드넓은 정원 한켠의 커다란 연못에서 잉어들에게 밥을 주는 다나카의 모습은 다나카를 상징하는 장면중 하나이다.

다나카는 늘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자유민주당 총재가 되려한다면 어떠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것은 바로 재무성, 외무성, 경제산업성 대신 중 두 가지 이상, 당직은 간사장은 필수로 그 외에 총무회장이나 정조회장 중 하나 이상 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당무와 당 파벌의 규합을 중시한 다나카는 간사장의 자리를 중요시 여기며 몇번을 해도 좋고, 재밌는 직위라고 했다(내각총리대신 자리는 격무로 혈압과 혈당이 올라 건강하게 몸을 지탱하기 어려워 한 번만 하면 족하다고 하였다).

일본 정치인들이 정책을 제시할때 보통 큰 그림을 정치인이 기획하고 운영과 실무는 관료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여기는데 다나카는 다른 정치인보다도 더 관료들을 신뢰하고 맡겼다. 금권정치를 통해 관료사회를 하나로 잡는 카리스마를 보여준 사례가 대장대신 시절 새해 예산을 편성하느라 바쁜 대장성(현 재무성) 직원들을 위해 사비로 보너스를 주고 주계관(주계국 과장급)이상부터 대신실로 한 명 한 명 부른 뒤 너네들은 최고 엘리트다 수고한다고 당시 2,000만엔씩 돈봉투를 돌렸다. 다만 봉투를 받지 않는 관료는 결단코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부처의 대신이되면 기밀비를 받을수 있는데 대장, 통산, 우정대신 등을 역임할 때 이 것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사무차관에게 자율적으로 관료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한 것을 늘 자랑으로 여겨왔다.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고 하자 거부하였던 적이 있다.

나카무라 기시로 의원이 그의 비서였다.

총리 재임 시절인 1973년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동아시아사 18번 문제에 마오쩌둥과 악수하는 사진이 등장한다.

문서 상단부 각주에도 있지만 다나카 가쿠에이의 이미지를 한국에다 그대로 써먹은 사람이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인데, 역시 불도저 스타일로 유명했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수하에 있었고 현대건설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토건족 정치 이미지 가꾸기에 적극 활용했다. 단적인 예로 대통령 취임 첫날 한 것이 "공단 물류에 방해되는 전봇대를 모두 다 뽑아버리라"는 훈령이었고 이는 조선일보 등 친정부 언론에 의해 1면에 대서특필되었었다.[50] 자신의 배후 지역인 포항 및 경상북도 일원에 인프라 투자를 많이 한 것도 비슷한 행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창 때는 경상북도에 쏟아부은 토건 예산이 인구가 3배 더 많은 경기도보다도 더 많이 투입되었을 정도였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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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나카의 정치관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수의 논리(数の論理)'.[2] 이명박이 훗날 이 별명을 써먹었는데 원조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일반 유권자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일본에 관심있는 계층(특히 기업인들이나 샐러리맨 등)은 알고 있었지만.[3] 일본 자민당 즉 자유민주당은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유당 총재였던 요시다 시게루의 후계자 사토 에이사쿠의 목요연구회(木曜硏究會)를, 그의 정적인 후쿠다 다케오는 일본민주당 총재였던 하토야마 이치로의 후계자 기시 노부스케의 십일회(十日會)를 이어 받았다. 자민당 파벌들 중에서 이 두 파가 세력이 가장 강하며, 목요연구회 즉 사토파는 온건 보수파로 비둘기파, 십일회 즉 기시파는 강경 보수파로 매파이다. 자민당 내 파벌 싸움은 바로 이 비둘기파와 매파의 대결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시대 일본 경제가 화려하게 발전했고, 그만큼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목요연구회는 다나카파로도 불린다. 1985년 다나카파 소속 다케시타 노보루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들면서 분열이 시작됐고, 1993년 일본 정권교체로 다나카파는 완전히 분열됐으며, 매파인 십일회를 계승한 세이와 정책연구회(淸和政策硏究會) 즉 청화회(淸和會)가 자민당 내 최대 파벌로 부상하였다. 이후 자민당이 정권을 다시 되찾았으나 2000년대 이후부터 일본 총리는 강경 보수파인 청화회가 계속 배출하고 있으며, 아베 신조도 청화회 소속이다. 현재 자민당 내 온건 보수파로 다나카파를 계승한 헤이세이 연구회(平成硏究會)가 있으며 누카가 후쿠시로가 수장을 맡았고, 다케시타 노보루의 이복동생 다케시타 와타루도 잠시 수장을 맡았으나 그 위상은 과거와 같지 않다. 일본이 보수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것은 이런 자민당 내 파벌 간의 역학관계와도 관련있다.[4] 그러나 이 기록도 곧 깨질 것으로 보이는데, 제100대 내각총리대신인 기시다 후미오가 2021년 10월 4일에 총리로 취임하여 14일에 중의원을 해산시키고 31일에 선거를 실시함으로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단명 정권으로 남게 되고, 승리한다 하더라도 취임일로부터 1개월이 채 안되는 시점에 제2차 내각을 출범시키기 때문이다.[5] 이미 1940년대 초중반에 시공순위가 50위안에 들 정도였다고 한다.[6] 현재 가치로 15억~20억엔. 불과 20대 후반의 청년 사업가가 단시간내에 100억원이 넘는 현금을 마련한 것이다.[7] 진보당이라는 말을 썼지만 보수정당이었다. 당시 일본의 진보/좌파세력을 언론에선 혁신(革新)계란 표현을 사용했고, 진보는 발전의 의미였다. 한국도 그 흔적으로 1970년대까지는 혁신계, 혁신정당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이것이 민중정당 등을 거친 뒤 다시 미국식 표현인 진보정당으로 넘어가게 된 건 1990년대 초부터였다.[8] 이때 선거 유세 당시 공약으로 군마현니가타현 사이에 있는 미쿠니 산맥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 니가타 연안 해안을 매우는 개발 사업을 할 것을 제시했다.[9] 학력도 경력도 없는 새파란 초선의원이던 다나카를 요시다가 발탁하였고 이때부터 다나카는 요시다의 측근으로 활동한다. 요시다는 자수성가한 부류의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드물게도 다나카는 요시다의 총애를 받았다. (요시다 본인은 자수성가형 인물이 아니라 명문가 금수저 출신이었다.). 이때 다나카와 더불어 요시다가 중용했던 비관료, 비금수저 출신 정치인으로 호리 시게루가 있다. 호리는 후일 중의원 의장을 지냈으며 막후의 모략에 능하여 다나카의 라이벌 후쿠다 다케오를 수상으로 만들기 위해 획책하기도 하였다. [10] 당시 사토는 차가운 외모 탓에 같은 관료 출신들조차 기피하면서 당내에서 제대로 융화하지 못하고 붕 뜬 상태였는데, 정작 다나카는 사토가 거물이 된다고 생각하고 접근했다. 사토도 당내에서 튀는 분위기를 보이던 다나카의 내면에 숨은 능력을 짐작하고 그를 받아들여 키웠는데 덕분에 50년대 사토의 별명은 "귀밝은 사토"였다고. 총리 막판시절의 권위적이고 독재적이기까지 했던 행태와는 딴판이다.[11] 대장대신(한국의 기재부장관)에 있었을 때는 "다들 아시다시피 나는 무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천하의 준재들입니다. 마음껏 일해주십시오. 책임은 내가 집니다."라는 취임사로 대장성 관료들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기자들 앞에서 아직 편성도 시작하지 않은 예산안을 구체적인 수치를 나열해가며 예언하여 관료들과 기자들이 비웃었는데, 정작 통과된 예산안은 다나카의 예언과 거의 동일하게 맞아 떨어졌다고.[12] 그가 총리로 재직하며 신칸센을 추진하며, 최초 철도건설심의회와 협의된 노선은 홋카이도, 호쿠리쿠, 큐슈 동(東), 큐슈, 큐슈 서(西). 이 3가지(사실상 5가지) 였으며 이후, 홋카이도 남회, 츄오, 서부 종관, 일본해 종관, 오우, 코토(湖東) 신칸센, 산인. 이 6개를 추가로 추진하였다. 이후 서부 종관선은 시코쿠큐슈 횡단으로 나뉘어 총 12개.[13] 그나마도 후쿠다를 싫어한 당시 당 부총재인 가와시마 쇼지로가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꼼짝도 못했을 것이라고. 실제로도 사토 3선 무드의 조성은 가와시마가 다 했고, 다나카는 구경만 했다.[14] 실제로 다나카는 대학은커녕 정규 고등학교도 못 나오고 야간 공업학교 다닌 게 학력의 전부라 가방끈이 짧았던 탓에 이러한 멸시 풍조가 제법 만연했었다.[15] 저우언라이가 적은 이 말은 논어 제13장 자로편에서 나온 말로, 자공이 공자에게 선비라 할 수 있는 본분에 대해 묻자 공자가 최저선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저우언라이는 다나카에게 "당신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기겠다."란 뜻을 전한 것이다.[16] 덩샤오핑이 1978년 다나카 저택을 방문할 당시 다나카는 록히드 사건의 여파로 정치적으로 매우 불우할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최고실력자가 된 덩샤오핑이 방일단을 이끌고 자신의 집을 방문하겠다 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 측의 의리에 감격한 다나카는 다나카파의 정치인들을 총동원하여 덩샤오핑을 맞이하였다.[17] 그래서 1970년대의 일본정치를 자-공(自-共)시대라고도 한다. 사실 일본공산당의 약진할 조짐은 60년대 말부터 있었고(사실 그때도 자민당의 득표율이 줄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의석수 유지에 성공한 반면에 일본사회당이 의석수도 말아먹으면서 묻혀졌긴 했다.) 당시 자민당 부총재인 가와시마 쇼지로는 70년대는 자민당과 공산당이 일본정치를 주무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 총리인 사토와 간사장인 다나카를 포함한 당내 거물들은 노인네가 걱정이 많다!고 무시했는데, 정작 그 사태가 오자 패닉에 빠졌다고. 그래도 공산당의 약진으로 인해 본격적인 복지정책이 일본에도 도입되기 시작했으니 얼씨구 좋을시고.[18] 각각 Tokyo, Osaka, Kyoto, Yokohama, Okinawa를 뜻한다.[19] 이 선거에서 다나카는 1천억 엔을 뿌렸다고 한다.[20] 1974년 11월 호[21] 다나카의 비서이자 애인으로 정치자금을 관리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뽐내던 사토 아키코(佐藤昭子)를 지칭한다. 다나카와의 사이에 딸도 하나 낳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22] 이때 미키가 공명당이나 사회당을 끌여들였다면 소수여당이라는 핸디캡에서 벗어날수는 있었겠지만 1955년 자민당 창당 이래로 진영을 넘나드는 정당간 연대라는 개념자체가 익숙할 때가 아니었다. [23] 요시다 시게루-사토 에이사쿠-다나카 가쿠에이의 전횡에 질려버린 당시 자민당 중진들이 당개혁의 일환으로서 총리-총재파벌에서 당 간사장을 내는 관례를 포기하고 적당한 중간파벌에서 간사장을 내기로 합의하면서 미키 정권의 자민당 간사장으로 취임한 사람이 나카소네였다. 게다가 미키와 나카소네는 1950년대말까지 보수 주류파가 아닌 보수 방계의 정당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 잘 이해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나카소네는 미키 내각 퇴진운동을 적극 저지하고 나섰던 것.[24] 정작 나카소네는 72년 당시 다나카 총리 당선에 불출마로 일조했었는데..[25] 당시엔 중선거구제 였기에 득표율이 이렇게 나왔다.[26] 반대로 2000년 총선에선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사망으로 선거 초기에 자민당이 압승할거같았지만 후임인 모리 요시로 총리가 망언을 내뱉으면서 지지율이 떨어져 과반확보에 실패했다. 그러나 공명당이 31석을 확보했기에 자민당은 안정적인 의석확보는 할수있었긴 했었고, 예측치에 비하면 조금 더 나오긴 했다.[27] 사실 다나카가 문제가 많은 인물이기는 했지만 후술하듯 니가타에 온갖 투자를 하면서 니가타 성장에 큰 공헌을 했으니 주민들이 다나카를 밀어주지 않는게 더 이상하기는 했다.[28] 이곳의 리더가 한국인들에겐 고노 담화로 유명해진 고노 요헤이. 신자유클럽은 다음번 선거에선 쫄딱 망하면서 결국 자민당으로 전원복귀했다.[29] 다나카는 자기 파벌에서 총리를 배출하면, 현실권력인 총리때문에 파벌내에서 영향력을 잃을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파벌후계자를 키우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었다.[30] 일본판 전경련. 사실 전경련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 일본의 게이단렌을 모방해서 만든 조직이다.[31] General Constructor의 일본식 약어로 종합건설업체를 가리킨다. 건설업자를 Constructor로 표현하는데서 나온 단어.[32] 사실 요시다 시게루-사토 에이사쿠-다나카 가쿠에이로 이어지는 보수본류 계열이 자민당을 주도하던 1980년대 초반까지는 우익정치인들의 망언이 별로 없었다. 당시 자민당의 주요 리더급 인물들은 속마음은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공개적으로 침략역사를 부정하고, 여타 아시아 국가들을 폄하하는 망언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강경우익인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정권을 잡으면서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 보수방류 계열이 자민당을 완전장악하면서 일상화하게 된다.[33] 다나카의 정치관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수의 논리(数の論理)'.[34] 일명 8분의 1법칙. 국민에게 인기없고 미움받는 정치세력이 어떻게 정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어구이다.[35] 다양한 정치그룹이 경쟁하는 의회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소수파가 캐스팅보트를 쥐고 정국을 주도하는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과정이 철저하게 밀실에서 파벌보스들간의 뒷거래로만 이루어진다는게 일본정치의 치명적인 후진성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오가는 막대한 액수의 검은돈은 필연적으로 심각한 부정부패를 초래했다.[36] 72.7~72.12 1차 내각[37] 72.12~74.12 2차 내각[38] 당장 구마모토 2구(노다 다케시의 지역구), 군마 3구(나카소네 야스히로&후쿠다 다케오의 지역구), 야마구치 1구(아베 신타로&아베 신조의 지역구)등의 선거결과만 봐도, 각 지역구의 3명 내지 5명이 균등하게 득표하여 당선되는 것에 비해, 다나카는 후보 두명분의 득표를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다. 특히 총리시절과 탈당하면서 수사를 받는 중에도, 혼수상태가 되어 쓰러져 있는 동안에도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39] 다나카 이전의 전후 총리들 중 도쿄제대 출신이 아닌 사람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일본육사), 이시바시 단잔(와세다대학), 이케다 하야토(교토제국대학)밖에 없었고, 이들 중 교토제대는 도쿄제대에 버금가는 제국대학 그룹, 와세다대학도 예나 지금이나 소케이로서 양대 최상위 사립대학이며 제국 시절의 육사는 완전히 엘리트 집단에 히가시쿠니는 무려 황족 가문이다.[40]다나카 마키코도 대민 연설을 할 때 아버지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여 다나카에 대한 주민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에 써먹었다. 다나카와 오랫동안 반목했던 정적 후쿠다 다케오와 그의 아들 후쿠다 야스오가 귀족적이고 정제된 말씨를 쓰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유튜브에 남아 있는 후쿠다 부자의 영상과 다나카 부녀의 영상을 보면 차이를 느낄 수 있다.[41] '페어 윈' 과 메이즈이[42] 출처 : 하야사카 시게조 "다나카 가쿠에이 회상록" 「田中角栄回想録」 早坂茂三[43] 이런 점은 한국의 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쪽수와 금권정치를 신봉했고, 온건보수적 성향에 집권시 추진력으로 각종 을 빠르게 진행했다. 다만 차이라면 흙수저인 다나카와 달리 YS는 부친이 멸치 사업을 한 금수저 출신이였으며, 스스로도 이런 정계의 부정부패상을 싫어했기에 집권 이후엔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 부패 근절 드라이브를 걸게 된다.(그렇다고 김영삼이 금권정치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당장 1992년 대선때 김영삼이 쏟아부은 선거자금이 수천억에서 조단위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파다했고# 무엇보다 집권 후 그의 아들과 측근의 부패는 다나카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4] 구직자 1명당 일자리가 1.7개가 있다는 얘기다. 월별로 본다면 1973년 11월에 유효구인배율이 1.93을 기록했다. 1명당 일자리가 2개가 있다는 얘기.[45] 일반적으로 정 2위 또는 종2위[46] 일반적으로 대훈위국화대수장[47] 재판도중 사망하였으므로 유죄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48] 비슷하게 요시다 시게루의 저택은 오이소 어전(大磯御殿), 하토야마 이치로의 저택은 오토와 어전(音羽御殿)이라고 부른다.[49] 왼쪽의 건물이 다나카가 손님들을 만나던 건물이고 오른쪽이 모옥(母屋)이라 불리던 다나카가 생활하던 곳이다.[50] 정작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이명박에 대해 그닥 좋은 소리를 남긴 적이 없다. 정주영의 "이 땅에 태어나서" 자서전을 참조. 그리고 그보다 더 전(1992년 대선 당시)에 나온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서는 이명박은 딱 한 줄 등장할 정도로 현대건설 내 존재감이 의외로 없다. 이 때문에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출마할 당시 정주영은 자기 이미지를 멋대로 가져다 써먹는데다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다.[51] 하지만 이명박은 TK가 아닌 서울에서 국회의원과 시장직을 지내는 등 지지기반이 수도권에 있었기 때문에, 수도권 개발제한조치를 해체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주요 산업시설들이 수도권으로 쏠리게 만들어서 경북과 대구 공동화에 큰 영향을 끼친지라 막상 TK에서도 그리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2016년 총선에서 김문수가 김부겸에게 괜히 대패를 당한게 아닌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