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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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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랴오닝성 랴오둥 반도 남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동쪽은 황해, 서쪽은 보하이해에 접해 있으며 인구는 2018년 말 기준 약 595만 명이며 하위 행정구역으로는 7개의 구[1] , 2개의 현급 시[2] , 1개의 현[3]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 한자 독음으로 대련으로 읽는 경우도 있다.[4]
지명은 만주어로 "연안"을 뜻하는 ᡩᠠᠯᡳᠨ(dalin)에서 유래했다,
2. 역사[편집]
역사적으로 랴오둥 반도의 중심지였다. 고구려, 발해 때는 비사성이 있었던 곳이고,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는 청니와(青泥窪)라는 이름의 작은 어촌으로 있었다. 청나라 때는 행정구역상 현재의 다롄시 남부 지역은 봉천부(奉天府) 영해현(宁海县), 북부 지역은 복주(復州)에 속해 있었고, 청나라 말에 이르러서는 남부 및 북부 지역은 봉천부 금주청(金州厅)[5] 과 복주(复州)[6] 에, 북동부 지역은 흥풍도(兴风道) 장하청(荘河厅)[7] 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1897년 러시아 제국이 삼국간섭을 통해 이 지역을 획득하고, 불완전한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를 대체하기 위해 황해에 접한 이 곳에 항구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발달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이 도시를 '달니이'(Дальний)라고 불렀고, 이후 인근의 다롄에 통합되어 구가 된 뤼순은 포르트 아르투르(Порт-Артур)[8] 로 불렸다. 이 시기에 다롄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러시아가 유럽식으로 건설한 시가지는 지금도 남아 관광지가 되어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조차지[9] 가 되었고 도시 이름도 다롄(大连, 당시에는 일본어 독음을 따라 다이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롄은 곧 일본령 관동주청의 중심지가 되었고[10] , 하얼빈으로 연결되는 남만주철도가 건설되었다.
일본령 관동주에 소속되지 않았던 지역들 중, 북부 지역은 펑톈성 둥볜도(东边道) 좡허현(荘河县)과 랴오선도(辽沈道) 푸현(复县), 남부 지역은 랴오선도 진현(金县)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북부 지역은 펑톈성 푸현과 안둥성(安东省) 좡허현에 각각 소속되었다. 그 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잠시 관리하였다. 1950년 뤼순(旅顺)과 합병하여 뤼다(旅大)라고 하였다. 1951년 중국에 반환되었고, 1981년 이전의 이름인 다롄으로 돌아갔다.
한때 보시라이가 다롄의 시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세워 입지를 강화했다.
3. 기후[편집]
4계절이 뚜렷하고 기온 편차가 크지 않아 중국 내에서는 비교적 쾌적한 기후를 자랑한다. 여름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베이징시, 충칭시 등지의 무더위가 나타나지 않고, 겨울은 동북 3성 중에서 가장 온화하고 눈이 적다. 그래도 1월 평균기온이 -3.3°C로 Dwa 기후이다.
4. 교통[편집]
시외 교통으로는 여객선과 항공기, 철도가 운영 중이다.
먼저 다롄 항에서는 산둥 반도, 인천광역시 등으로 갈 수 있으며, 다롄 저우수이쯔 국제공항에서는 국내선의 경우 베이징시, 상하이시 등으로 연결되는 항공편이 있고 국제선의 경우 서울특별시(인천국제공항), 도쿄(나리타 국제공항), 타이베이(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 등으로 연결되는 항공편이 있다. 과거에 남만주철도로 유명한 하다선(哈大线, 하얼빈시 - 다롄시) 철도의 시종착지이며, 열차는 다롄역(大连站)과 다롄베이역(大连北站)[11] 에서 이용 가능하나, 고속철도는 다롄베이 역에서 시종착하는 것이 많다.
시내 교통으로는 2016년 현재까지도 시내버스가 주를 이루며, 도시철도의 비중이 도시 규모에 비하면 부족한 수준이다. 2015년이 되어서야 다롄 지하철 1, 2호선이 개통되었으며 추후 연장 계획이 잡혀 있는 수준이다. 이는 항만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 상당 부분이 연약지반이어서 당국에서 지하철 공사를 할 때 꽤나 애를 먹었던 이유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서 몇 안 되는 201번, 202번 노면전차가 잘 남아 있어 성황리에 운영 중이고 그 외에는 경전철(3호선 다롄-진스탄,구리), 다롄-뤼순간 12호선 등이 운행 중이다. 2023년 3월 지하철 5호선이 개통하였다.
5. 산업[편집]
동북 3성답게 중화학 공업이 발전되어 있으며 그쪽에서는 나름대로 IT 관련 산업이 제법 흥하고 있다. 김정은이 시진핑을 만나러 다롄에 갔을 때 산업단지를 구경했을 정도다. 또한 플라스티네이션 기법을 통해 동물, 심지어 인간의 생체 표본을 만드는 공장이 이곳에 있다.[12]
6. 교육[편집]
다롄의대, 다롄민족대, 다롄대학, 다롄이공대학, 다롄교통대, 둥베이재경대, 다롄외국어대, 다롄해양대, 랴오닝사범대, 다롄해사대, 다롄공업대 등이 있다.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대련한국국제학교가 있다.
7. 스포츠[편집]
"다롄의 대표는 축구고, 축구는 곧 다롄의 자부심이자 다롄 그 자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만큼 이 도시에서는 축구가 인기를 독차지를 하고 있다. 중국 슈퍼 리그가 갑급리그라는 이름으로 탄생하고 초창기 다롄 완다는 그야말로 리그를 씹어먹은 명문팀이었고[13] 이는 완다를 인수한 스더가 이어받아 다롄 스더로 바뀌었고, 리그도 갑급리그에서 중국 슈퍼리그로 바뀌고나서도 우승한 걸 비롯해 무려 8번의 우승경력으로 중국 슈퍼리그 최다 우승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안정환도 이곳에서 뛰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보시라이의 몰락으로 보시라이 정치자금 물주 역할을 한 스더그룹도 같이 몰락. 결국 2012 시즌 끝나고 같은 다롄연고의 햇병아리 다롄 아얼빈[14] 에 합병된다. 단, 합병되고나서 다롄 서포터들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다롄 스더를 살리겠다고 서명, 모금운동을 이어가면서 1년 만에 다롄 차오웨란 이름으로 재창단하는데 성공했으며 2014년 을급 리그 참가 2년 만에 갑급 리그로 올라선다. 그리고 갑급 리그에는 과거 다롄 스더를 흡수했던 다롄 이팡이 존재한다. 2012년 이후 무려 4년 만에 다롄 더비의 부활인 셈이자 마치 한국의 FC 서울과 FC 안양 같은 관계의 치열한 더비다.
위에 다롄 스더 얘기만 잔뜩 써놔서 다롄 이팡에 대한 것은 별 내용은 없다. 사실 다롄의 축구역사는 다롄 스더가 만든거다. 단, 다롄 이팡도 다롄 아얼빈 시절, 그러니까 다롄 스더의 공백기간동안 그저 그런대로 다롄 시민들의 축구욕구를 채워준 공은 있다. 이 기간동안 팬층도 다져놔서 탄탄한 편이다. 2018년 기준 다롄 이팡은 다시 슈퍼 리그로 올라섰고 다롄 차오웨는 갑급 리그에서 강등권을 겨우 면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러다가 다롄 차오웨가 2018시즌이 끝나면서 강등은 강등대로 되고 임금체불 문제로 을급 라이센스 불허가 되면서 해단을 하고 말았다. 두 팀[15] 이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