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트 힐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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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힐베르트
David Hil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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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2년 1월 23일
프로이센 왕국 쾨니히스베르크
사망
1943년 2월 14일 (향년 81세)
나치 독일 괴팅겐
직업
수학자
분야
수학, 물리학, 철학
모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박사)
수상
로바쳅스키 상 (1903)
야노시 상 (1910)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배우자
케테 제로슈 (1892년 결혼)
자녀
프란츠 (1893–1969)[1]
종교
개신교(칼뱅파) → 무종교(불가지론)

1. 개요
2. 생애
2.1. 유년
2.2. 성년
2.3. 말년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우리를 위해 칸토어가 만들어 준 이 낙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내쫓을 수는 없다.

Aus dem Paradies, das Cantor uns geschaffen, soll uns niemand vertreiben können.


독일수학자. 수학사의 마지막 거인이라고도 불리며,[2]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수많은 수학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기하학공리화하였으며, 힐베르트 공간을 정의하여 함수해석학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당대 수학계의 지도자였으며, 힐베르트의 23가지 문제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수학계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유년[편집]


1862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아버지 오토 힐베르트(독일어: Otto Hilbert)와 어머니 마리아 힐베르트(독일어: Maria Hilbert)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판사였다. 김나지움(독일의 고등학교)까지는 수학 이외의 과목에 흥미가 없어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지만, 좀 더 개방적인 학교로 옮긴 후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수학에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1880년 힐베르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힐베르트는 하인리히 베버에게서 수론과 함수론 강의를 듣고, 와중에 당시 유행하던 불변식론을 접하였다. 힐베르트의 2년 연하인 헤르만 민코프스키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의 청강을 마치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왔고, 베버의 후임으로 원주율의 초월성을 증명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오고, 그와 같이 아돌프 후르비츠가 사강사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만나게 된 힐베르트, 민코프스키, 후르비츠 세 사람은 평생 친구로 남았다. 힐베르트는 대수적 형식의 불변성에 대한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1884년 12월 구두시험을 통과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2. 성년[편집]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힐베르트는 1885년 여름 후르비츠의 권유로 펠릭스 클라인이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갔다. 1886년 펠릭스 클라인의 권유로 파리 유학을 떠나, 당시 최고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등과 교우하고, 귀국길에 레오폴트 크로네커도 만났다. 귀국 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불변식에 관한 논문과 《가장 일반적인 주기함수》라는 제목의 강의시험을 통과하여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였다.

1888년 초에 힐베르트는 파울 고르단(독일어: Paul Gordan)을 만나 소위 "고르단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후 라차루스 푹스, 헤르만 폰 헬름홀츠,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레오폴트 크로네커 등을 방문하고, 1888년 9월 귀향하여 고르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힐베르트는 1892년 30세의 나이로 Käthe Jerosch과 결혼하였고, 취리히로 간 후르비츠의 후임자로 부교수 자리에 오른다. 1893년에는 e와 원주율의 초월성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발표하였다. 곧 뮌헨으로 떠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의 뒤를 이어 정교수가 되었다.

1893년 독일 수학회에서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당시까지의 대수적 수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895년 괴팅겐 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수론 보고서》(독일어: Zahlbericht 찰베리히트)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본래 헤르만 민코프스키와의 공저로 계획되었는데, 민코프스키는 자신의 몫을 작성하지 못하였고, 1897년 4월 힐베르트는 자신이 작성한 부분만을 출판하였다. 이는 정수론에 대한 교재로서 수학계의 명성을 얻었다. 1898년–1899년 겨울 학기에는 기하학의 기초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그 강의록을 정리하여 《기하학의 기초》[3]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리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공리체계는 완비적이고, 서로 독립적이고,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성질을 제시하였다. 그 뒤 힐베르트는 기하학의 연구를 계속하였고, 또한 디리클레 원리의 결점을 보완하며, 변분법에 대한 연구도 계속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세계 수학자 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힐베르트는 20세기 수학의 가장 큰 과제들을 선별한 힐베르트의 23가지 문제를 발표하였다. 이 문제들은 20세기 수학의 주된 흐름을 예견하였고, 새로운 수학적 분야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1901년 힐베르트는 에리크 이바르 프레드홀름의 논문을 접하고, 적분방정식론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 내용은 1912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1902년 베를린으로부터 푹스의 후임자리를 제안받으나 거절하고, 그 대신 괴팅겐 대학교에 민코프스키의 자리를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1908년 오랜 미제였던 웨어링의 문제를 증명하였다. 1909년에는 오랜 친구였던 민코프스키가 맹장염으로 사망하였다.

수학뿐만 아니라, 힐베르트는 물리학의 공리화를 꿈꾸었다. 물리학의 공리화는 힐베르트의 6번 문제였고, 이 문제의 일환으로 힐베르트는 중력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15년 11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물리학의 기초》(독일어: Die Grundlagen der Physik 디 그룬트라겐 데르 퓌지크)라는 논문으로 같은 결론을 출판하였다.[4]

제1차 세계 대전 뒤 라위트전 브라우어르 등은 직관주의를 주장하였고, 고전적 수학의 귀류법 등 여러 증명법들을 배척하였다. 힐베르트는 직관주의에 대응하여 수학은 공리계를 통한 수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형식주의를 주장하였다. 1925년 악성빈혈증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미국에 있던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음 해 쾌유하였다. 192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된 세계 수학자 대회에 독일의 수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의 수학자들을 이끌고 참석하였다.

2.3. 말년[편집]


힐베르트는 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고, 같은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1931년에 쿠르트 괴델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여, 힐베르트가 꿈꾸었던, 모순 없이 명제의 옳고 그름을 완벽히 판별해낼 수 있는 공리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힐베르트는 불완전성 정리를 피하기 위하여,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80세 때 길에서 넘어져 다친 후 병발증이 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2월 14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ilbertGrab.jpg
(독일 괴팅겐에 있는 힐베르트의 묘비)

힐베르트의 묘비에 적혀있는 말은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로, 이는 그가 1930년 정년퇴임 기념으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했던 고별 연설의 마무리 부분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내용을 말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독일어권 지식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던 이그노라비무스 논쟁[5]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다. 이그노라비무스 논쟁은 1872년 독일의 생리학자였던 에밀 뒤 보아레이몬드(Emil du Bois-Reymond)가 『자연지식의 한계에 대하여』라는 강연에서 "과학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있으며 이는 인류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결국 영원히 해결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생겨난 논쟁이었다. 힐베르트는 "앞으로도 모를 것"이라는 태도가 지식인이 가질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에 그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비꼬고자 자신의 고별 연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Wir dürfen nicht denen glauben, die heute mit philosophischer Miene und überlegenem Tone den Kulturuntergang prophezeien und sich in dem Ignorabimus gefallen. Für uns gibt es kein Ignorabimus, und meiner Meinung nach auch für die Naturwissenschaft überhaupt nicht. Statt des törichten Ignorabimus heiße im Gegenteil unsere Losung: 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철학자 같은 태도나 깨달은 듯한 논조로 문명의 몰락에 대해 예언하거나, "우리는 모를 것이다" 라는 사상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수학자들은 그들의 말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 수학자들에게 "우리는 모를 것이다" 라는 논법은 통하지 않으며, 자연과학에도 역시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어리석은 "우리는 모를 것이다" 사상에 대항해, 우리들의 구호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3. 여담[편집]


  •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가 지은 이름 탓에 유대인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아[6] 피해를 본 일이 적지 않았다. 나치에 의해 유대인 교수들이 쫓겨난 다음 어떤 나치 장관이 힐베르트와의 대담에서 최근 유대인 축출 때문에 괴팅겐 대학 수학과도 피해를 보았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마 그 당원은 유대인이 없는 학계는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인데, 힐베르트는 "피해라고요? 괴팅겐에서 수학이라는 학문은 사라졌습니다!"라고 답해 그 장관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러한 나치의 핍박은 유럽의 과학과 수학 명문으로 불리던 괴팅겐 대학을 쇠퇴시키고, 나치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과학자나 수학자들이 미국으로 넘어가서 학문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 뇌터 정리로 유명한 여성 수학자인 에미 뇌터를 무척 아꼈다. 아버지인 막스 뇌터(Max Noether, 1844–1921)가 유명한 수학자였는데 그녀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수학을 교육받으며 수학자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괴팅겐 대학 측은 그녀를 교수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힐베르트가 분노하여 그의 이름으로 된 강의를 뇌터가 맡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고, 그런 강의들을 선전해 주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힐베르트는 그녀를 대학 교수로 강력 추천했지만 역시 반대를 많이 듣자 "교수 후보자의 성별이 그녀의 교수 자격을 허가하는데 뭔 관계가 있냐? 대학 평의원회는 대중 목욕탕이 아니다!"라며 반발하여 그녀를 계속 추천했다. 결국 1919년 뇌터는 괴팅겐 대학 교수가 된다. 이러다 보니 뇌터와 힐베르트는 무척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유태인인 뇌터는 나치가 집권하자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미국으로 가서 브린마르 대학 교수가 되지만 몇해 안 가 병으로 죽었다. 친척도 없이 미국에서 죽어 쓸쓸히 브린마르 대학 측 캠퍼스 홀에 묻혀야 했고 힐베르트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침통해했다. 여담인데 에미 뇌터의 남동생인 프리츠 뇌터(Fitz Noether, 1884–1941)도 수학자로서 이름을 날렸으나 그도 유태인이라 축출되었고 소련으로 가서 활동했으나 1941년 반소련 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총살당하였다.

  • 힐베르트에게는 아들 1명이 유일한 자식이었는데,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다. 아들은 지능장애가 너무 심해 공공시설로 보내졌고, 힐베르트는 아들을 시설로 보낸 이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단종법에 따라 아들은 거세되었고, 이렇게 이 가문은 힐베르트 사후 대가 끊겼다.

  • 힐베르트는 건망증이 심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어느 날 힐베르트는 집에 초대한 손님들과 오랜 시간 얘기를 하던 중 그곳이 자신의 집인 것을 깜빡 잊고 자기가 방문한 것으로 착각하여 옆에 있던 부인에게 "이거 너무 오랫동안 실례했군. 이제 그만 집에 갈 시간이 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7]

4. 관련 문서[편집]


[1] 평생을 명칭 불명의 정신병에 시달렸으며, 낮은 지능을 지니고 있었다.[2] 힐베르트 이후 현대수학은 너무나도 다양한 분야들로 세분화되었기 때문에 한 명의 수학자가 수학의 전 방면을 연구하며 업적을 남긴 것은 힐베르트가 마지막이었다. 괜히 현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3] 독일어: Grundlagen der Geometrie 그룬트라겐 데르 게오메트리[4] 해당 논문을 출판하기 직전, 힐베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이 결론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하여 방문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그때 아인슈타인은 몸이 안 좋아서 방문을 거절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얼마 후 각자의 결과를 논문으로 내놓게 되었고, 덕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구조에 대한 결과물은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 두 사람이 독립적으로 이루어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액션을 가리켜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액션'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들 수 있다.[5] Ignorabimus: 그것이 사실 인지 아닌지 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 이러한 의미를 라틴어 경구가 "Ignoramus et ignorabimus (우리는 모르고, 모를 것이다.)"인데, 여기서 Ignorabimus 단어를 꺼내온 것이다.[6] '다비드'는 당연히 구약의 다윗 왕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본명은 매우 길다.[7] 출처: 쎈 중등 수학 3(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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