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미야 마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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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미야 마사키
武宮正樹 / Takemiya Ma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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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바둑기사
생년월일
1951년 1월 1일 (73세)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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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소속
일본기원
출신지
도쿄도
입단
1965년
단급
九단
누적우승경력
24회
일본기원 다케미야 마사키 소개 페이지

1. 개요
2. 생애
2.1. 기풍
3. 여담
4. 언사
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1]
5.1. 한국 기사
6. 주요 우승 경력
6.1. 국제 기전
6.2. 국내 기전



1. 개요[편집]


일본프로 바둑 기사.


2. 생애[편집]


기타니 미노루 문하로 이시다 요시오, 가토 마사오와 함께 황금 트리오라고 불리며 기타니 황금시대의 일익을 담당했다. 장남은 프로 바둑 기사 다케미야 요코(武宮陽光) 六단.

혼인보전 5연패가 걸린 1989년 혼인보전 도전기에서 조치훈에게 종합 전적 0-4로 완패해 영세 혼인보 칭호 획득에 실패했다. 다케미야는 나중에 조치훈과 함께 출연한 혼인보전 TV 중계에서 당시 영세 혼인보 칭호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스윕당한 것은 분했다고 회고했다.[2]

조훈현에게 상대 전적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는 몇 안 되는 기사이다.[3] 조훈현도 다케미야는 수읽기가 아주 깊고 감각이 뛰어나다고 인정한 바 있다.

최근에는 해외 바둑 보급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파일:1988-1fu.jpg
파일:1fugi.jpg

1988년 1회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결승전과 우승 인터뷰 장면. 결승전 상대는 린하이펑 九단. 이 때까지만 해도 풍성충은 아니어도 탈모가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파일:1989-1fu.jpg

1989년 2회 후지쯔배에서 연속우승을 했을 때.[4]

취미는 골프, 백개먼, 노래, , 마작 등 다양하며 모두 수준급이라고 한다. 특히 백개먼은 일본 3대 타이틀 중 하나였던 반성전(盤聖戦)에서 2005년 우승했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다. 2015년 한-일 바둑 기사들의 친선 골프 대회에서는 일본 측 주장을 맡기도 했다. 참고로 해당 대회 한국 측 주장은 조훈현.


2.1. 기풍[편집]


'우주류'로 잘 알려져 있는 호방한 세력 바둑을 두는 기사이다.

다케미야의 등장으로 인해 세력 바둑 및 3연성, 4연성 등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고 그 또한 성적이 상당히 좋았다. 보통 프로 기사들은 실리, 즉 확실한 현찰을 챙기며 바둑을 두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는 불안감 때문이다. 세력 바둑의 경우 고도의 수읽기와 섬세함, 공격력, 그리고 아주 정밀한 형세 판단이 필요한데, 그 때문에 대부분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근처럼 속기 위주의 기전이 대부분일 경우 불확실성이 많기 때문에 세력 바둑의 승률은 더욱 떨어진다. 그럼에도 다케미야는 세력 바둑을 두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또한 팬서비스도 아주 잘 해서 팬들에게 인기가 높다.

다만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다케미야는 세력 바둑을 구사한 유일한 기사는 아니다. 한국의 강철민이나 신풍 3인[5] 중 한 명인 조대현도 아주 호방한 세력 바둑을 뒀고, 애초에 원조를 찾자면 우칭위엔기타니 미노루의 신포석이 원조다. 또한 한국의 하찬석 九단 역시 일본의 기타니 도장 수행 시절 귀와 변의 포석을 입체적으로 진행하여 세력을 유지하는 포석 형태를 연구, 발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다케미야의 우주류는 다케미야만의 독창적인 포석이 아닌 기타니 도장 내에서 있었던 일단의 연구 흐름을 다듬어 실전에서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다케미야가 세력 바둑의 원조 비슷하게 칭송을 받는 이유는, 오랜 시간 정상급 기사로 활동하면서 세계 대회 우승을 포함한 인상적인 성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의 세력 바둑과 달리 다케미야의 세력 바둑이 우주류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중앙을 중시하면서도 굉장히 두텁고 단단하게 잘 두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밤하늘에 별을 놓듯이 차근차근 흑/백으로 뒤덮여가는 중앙을 보고 여러 바둑 기사들이 나가떨어졌다.[6] 나중에 야마시타 게이고의 야마시타류가 나오면서 중앙 바둑에서도 포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다케미야는 '우주류'라는 단어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의 바둑을 '자연류'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두기 때문이라나... 그리고 최초의 바둑 세계 대회인 후지쯔배가 열리자 '최초의 세계 대회에서 내가 우승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대회 전부터 주장하며 참가해서 우승을 차지했다.(...)


3. 여담[편집]


  • 세계 최초의 바둑 메이저 세계 대회인 후지쯔배 1, 2기를 연패하였고, 속기 세계 대회인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를 1기부터 4기까지 4연패하는 등 초창기 세계 대회에서 맹활약하였다.

  • 1988, 1989년 후지쓰배를 연패하고 1989년에 초대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를 우승한 조훈현 九단에게 공개적으로 통합 타이틀전을 제안하였다. 이에 효성그룹에바라의 협찬으로 1990년 3월에 두 기사간의 효성・에바라배 3번기가 서울에서 열렸고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의 2:0 완승으로 끝났다. 이 승리로 바둑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지만 1달 후 열린 후지쓰배 16강전에서 이창호 四단(당시)이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에게 완승을 거두어 스승의 패배를 설욕하고 세계 최강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 1988년 혼인보전 도전기 제5국에서 동문 선배 오타케 히데오 九단을 상대할 때 한 수에 5시간 7분을 소모하여 세계 최장 기록을 세웠다. 결과는 불계승.

  • 이창호 九단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의 우주류를 포석의 제2혁명이라 부르고 그가 세계의 바둑을 혼자 바꾸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4. 언사[편집]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여러분들이 알고 싶은 것은 이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한다.

"자기가 두고 싶은 곳에 두어라.

그리고 인간다운 아름다운 마음으로 바둑판을 들여다보라."

바둑은 자유로운 게임이다.

여러분 자신은 두고 싶은 수를 두고 있는가?

"책에 이렇게 씌여 있으니까."라든지

"이런 수를 두면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하여

남의 눈을 의식하면 즐거운 게임이어야 할 바둑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격이다.

결과를 두려워해서는 좋은 바둑을 둘 수 없다.

바둑도 인생과 마찬가지여서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즐겁고 자유로워야 하겠다.

그리고 인간다운 아름다운 마음으로 바둑에 임하도록 권하고 싶다.



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7][편집]



5.1. 한국 기사[편집]


서봉수 九단 1:3
유창혁 九단 1:1
이창호 九단 1:7
조훈현 九단 8:2


6. 주요 우승 경력[편집]



6.1. 국제 기전[편집]




6.2. 국내 기전[편집]


  • 명인전 : 우승 1회 (1995년)
  • 혼인보전 : 우승 6회 (1976년, 1980년, 1985년~1988년) 3회 혼인보 탈취는 사상 유일
  • 십단전 : 우승 3회 (1990년~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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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3년 6월 기준.[2] 조치훈은 다케미야에게 강한 기사였는데 '폭파전문가'라는 별명답게 상대의 집을 잘 박살냈고 이는 다케미야의 거대한 중앙 세력도 마찬가지였다.[3] 공식전 기준으로 8승 2패. 비공식 대국을 포함하면 11승 4패.[4] 다케미야 九단의 좌측은 3위를 기록한 조훈현 九단, 우측은 준우승을 기록한 린하이펑 九단[5] 1980년대 후반 등장한 신예 기사 3인방 유창혁, 양재호, 조대현.[6] 중앙에 거대한 집을 보고 배가 아파서 공격을 하면 오히려 상대방의 대마가 통째로 죽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넓은 중원에 쳐 놓은 거미줄이라고 볼 수 있다.[7] 2023년 6월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