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국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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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tablewidth=100%><tablebgcolor=white,#191919><bgcolor=#ffffff,#191919> 학교법인 단국대학 산하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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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1편 단국대학 설립과 창학이념
2.1. 제1장 단국대학 설립의 역사적 뿌리: 범정 장형의 독립운동
2.1.1. 제1절 독립운동 참여 동기
2.1.2. 제2절 신흥무관학교와 임시정부
2.1.2.1. 신흥무관학교와의 연계 활동
2.1.2.2.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 활동
2.1.3. 제3절 계몽운동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
2.1.3.1. 국내에서 계몽강연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
2.1.3.2.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 위한 사업
2.2. 제2장 미군정 시절 범정의 교육 활동
2.2.1. 제1절 국민대학 설립에 동참
2.2.2. 제2절 백범 김구와 건국실천원양성소 운영
2.3. 제3장 단국대학 설립준비위원회의 발족과 개교
2.3.1. 제1절 단국대학 설립의 계기
2.3.2. 제2절 혜당 조희재와 대학설립준비위원회
2.3.3. 제3절 단국대학의 설립과 개교
2.4. 제4장 단국대학의 설립 정신
2.4.1. 제1절 독립정신의 구현
2.4.2. 제2절 국가와 민족의 재흥
2.4.3. 제3절 창학이념: 구국·자주·자립
2.5. 제5장 낙원동 교사와 전문부 설치
2.5.1. 제1절 낙원동 교사의 확보
2.5.2. 제2절 전문부의 병설
3. 제2편 역사적 고난과 단과대학 운영
3.1. 제1장 신당동 교사와 6·25전쟁
3.1.1. 제1절 신당동 교사 이전
3.1.2. 제2절 6·25전쟁과 피난지 임시교사
3.2. 제2장 한남동 교사 신축과 4·19혁명
3.2.1. 1절 한남동 교사 입주
3.2.1.1. 한남동 교사 신축
3.2.1.2. 한남동 교사 입주와 '단국대학 개교 10주년 기념식'
3.2.1.3. 대학원 설치와 연속강좌제 운영
3.2.2. 제2절 4·19혁명과 단국대학의 학생운동
3.3. 제3장 5·16 군사정부와 대학의 시련, 그리고 극복
3.3.1. 제1절 5·16 군사정부에 의한 1부 폐지
3.3.1.1. 군사정부의 '대학정비'와 1부(주간) 폐지
3.3.2. 제2절 대학의 자활 의지
3.3.2.1. 장충식 교수의 부학장 취임과 1부(주간)의 부활
4. 제3편 종합대학교 시대의 개막
4.1. 제1장 종합대학교 승격과 중재 장충식
4.1.1. 제1절 시위와 혼돈 속에서도 변화하는 대학
4.1.1.1. 범정 장형 선생의 영면
4.1.2. 제2절 중재의 종합대학교 승격 추진과 결실
4.1.2.1. '신념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4.1.2.2. 종합대학 승격인가 내용과 절차
4.2. 제2장 종합대학교 교육체제 및 시설 개편
4.2.1. 제1절 교육 및 연구 관련 건물의 신축
4.2.1.1. 교육 및 연구 관련 건물의 신축
4.2.1.2. 교육 관련 시설
5. 제4편 천안캠퍼스 설립과 성장의 내실화
5.1. 제1장 천안캠퍼스의 설립
5.1.1. 제1절 지역거점대학의 필요성
5.1.1.1. 장곡마을 개발사업과 새마을운동
5.1.1.2. 장충식 총장의 천안분교 구상
5.1.2. 제2절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의 탄생
5.1.2.1. '단국대학교 천안분교 산업대학'으로 출발
5.1.2.2. 수도권대학 기능 확보
6. 제5편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 설립과 신캠퍼스 추진
6.1. 제1장 최덕수 열사 5.18 진상 규명 요구 분신
6.2. 제2장 의과대학 신설과 부속병원 설립
7. 1990년대
7.1. 수지캠퍼스 건설
7.2. 단국대학교 법인 부도
8. 2000년대
9. 2010년대
9.1. 캠퍼스 통합
10. 관련 문헌


1. 개요[편집]


파일:범정장형선생과백범김구선생과단국대.jpg
범정 선생과 백범 선생 그리고 단국대학교 학생들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뤄지리라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진다면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 백범 김구

단국대학교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재학생의 경우 1학년 필수 교양인 '세계 속의 한국'과 그 심화 버전인 일반 교양 '백범 김구와 단국대학교' 수업을 수강하여 참고할 수 있다. 추가로 도서관에 있는 『단국대학교 70년사』 혹은 『단국대학교 n년사』를 참고할 수도 있다.

기본적인 서술은 『단국대학교 70년사』의 내용을 따른다. 부족한 부분은 이외의 자료에서 참고하여 작성했다.

단국대학교 역사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단국대학교 역사전시관VR

2. 제1편 단국대학 설립과 창학이념[편집]



2.1. 제1장 단국대학 설립의 역사적 뿌리: 범정 장형의 독립운동[편집]



2.1.1. 제1절 독립운동 참여 동기[편집]


파일: 범정장형.jpg
단국대학교 설립자 범정 장형 선생
장형 선생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1899년 1월 18일에 유명한 한의사인 장창익(長昌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본명이 장세담(長世淡)이었는데,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장형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호는 범정(梵亭)이다.

장세담이 태어난 용천은 압록강 하류에 있는 지역이다. 중국과 가까운 곳으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와 일본 군대의 격전지였는데 15세의 장세담도 이 전쟁을 겪었다. 러일전쟁으로 용천 지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용천 지역민들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외세의 침략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 유달리 용천 출신들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의병장으로 서간도에서 대한 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한 전덕원, 중국군에서 사단장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 한국광복군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한 김홍일 장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송병조, 기독교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함석헌 등이 모두 용천 출신이었다.

청년 장세담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도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향에서 동명중학교를 졸업한 장세담은 1908년 4월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고종황제의 측근이었던 이용익이 설립한 것으로, 배일적 색채가 강한 학교였다.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장도빈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와 함께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장도빈은 훗날 단국대학 초대학장이 되었다.

장세담이 보성전문학교를 다닐 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1907년에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어 1909년에는 소위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마저 장악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나라를 잃어가는 참단한 현실에 학생들은 대부분 구국의 길을 찾아야 한다며 학업을 그만두었다.

이에 장세담도 학업을 중단하고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안창호·양기탁·유동열·이동녕·전덕기·이회영·김구 등의 인사들이 설립한 구국운동 단체로, 비밀리에 조직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친구 장도빈은 대한매일신보사의 기자로 사장 양기탁을 도왔고, 장세담은 비밀회원으로 신민회의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은 부친이 한의사로 많은 돈을 벌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장세담의 부친 장창익은 유명한 한의사였다. 사상의학(四象醫學)에 뛰어났으며, 특히 진맥을 잘 보았다고 한다. 명성이 각지로 퍼져 나갔고, 장창익은 거처를 용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서울에서 진료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내수동에 집도 마련하였고, 충청북도 제천 등지에 산도 사두었다. 훗날 장세담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할 때 한의사로 행세한 것, 해방 후 서울에 자리를 잡은 것, 그리고 단국대학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 등은 이러한 부친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장세담은 손병희도 만났다. 설립자 이용익이 일본으로 끌려간 후 보성전문학교가 운영난에 빠지게 되자 학생들과 함께 천도교 대표인 손병희를 찾아갔다. 그에게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도록 요청하였다. 손병희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손병희와의 만남을 통해 크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과 자금조달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1910년 8월에 대한제국이 망하자, 장세담은 신민회와 함께 활동하였다. 신민회 간부들은 양기탁의 집에 모여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대상지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1910년 12월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가 전가족과 함께 먼저 떠났고, 이동녕·이상룡·김동삼 등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도 연이어 이주하였다. 1911년 2월 장세담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2.1.2. 제2절 신흥무관학교와 임시정부[편집]



2.1.2.1. 신흥무관학교와의 연계 활동[편집]

장세담(이후 장형 선생으로 통일)은 만주로 망명한 후에 신흥무관학교와 연계되어 활동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이동녕 등 신민회 인사들이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포에 정착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였다. 1911년 6월에 설립하였는데, 설립 당시의 이름은 신흥강습소였다. 이름을 강습소라고 한 것은 중국 당국의 경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무관학교라 하면, 중국 당국과 일본 측에서 경계가 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11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이후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고산자(孤山子) 등으로 자리르 옮겨가며 1920년 폐교될 때까지 9년여 동안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동안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로써 신흥무관학교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한 대표적인 무관학교로, 또 항일무장투쟁의 원천으로 평가받고 있다.

확인된 자료는 없지만, 장형 선생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 가까이 운영되었으나 관련된 자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졸업생 명단이 확인된 것은 5백 명도 채 안될 정도이다. 장형 선생은 초기에 졸업한 것으로 보이고, 졸업 후 신흥무관학교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장형 선생이 신흥무관학교와 연계하여 활동한 자료가 새롭게 발굴되었다. 1914년 10월 평양헌병대장이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불령선인의 행동 등에 관한 건」이란 자료가 그것이다.

이 자료는 평양에 들어왔던 청년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알고, 평양헌병대에서 이들의 행정을 추적 조사하여 보고한 것인데, 여기에 장형 선생의 활동내용이 구체적으로 들어 있다. 평양헌병대에서 추적한 것은 김연우와 고정식이었다. 보성전문학교 학생인 이들은 서울에서 평양으로 와서 설암리에 있는 윤봉천의 여관에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너 단둥으로 갔다. 단둥에 도착하여 신덕준이 경영하는 대동운송회사에서 장형 선생을 만났다. 장형 선생은 이들을 심양으로 데리고 가서 소북문 안에 있는 동순창사 신재정의 집에서 이흘에게 인계하였고, 이흘은 이들을 데리고 길림으로 향하였다.

이는 국내에서 청년들을 모집하여 신흥무관학교로 입교시키는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졸업생이 3,500여 명인데, 당시 서간도 일대에는 한인청년들이 없었다. 신흥무관학교 입교생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자원하거나 모집되었다.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유하현 삼원포는 국내에서 약 6백리 정도 되는 거리였다. 국내에서 모집한 청년들은 무사히 신흥무관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 장형 선생이었다.

당시 장형 선생이 활동한 거점은 단둥이었다. 단둥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곳으로, 압록강 철교로 연결되어 있다. 장형 선생은 단둥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생활근거지도 마련해 놓았다. 단둥에서 북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오룡배라는 곳에 동생 장세원의 가족을 이주시켰고, 이곳을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그의 부인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와서 전달한 것이 오룡배였고, 아들 장충식도 오룡배에 있는 오룡배소학교에 다녔다.

장형 선생은 단둥을 거점으로 국내와 만주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그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고, 이를 길림에서 활동하고 있던 양기탁·전덕원 등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국내에서 청년들을 모집하여, 이들을 심양을 거쳐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이었다. 이러한 활동이 평양헌병대에 포작되었고, 평양헌병대장은 이를 추적 조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보고하였다.

평양헌병대장은 이를 조사 보고하면서 장형 선생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였다. "장세담은 불령선인(不逞鮮人) 청년들 사이에서 유력한 자로서 항상 경동·단둥·봉천 등지를 왕복하면서 불평동지(不平同志)를 규합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내용이다. '불령선인'이란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일컫는 용어이고, '불평동지'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인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제의 평양헌병대에서 장형 선생을 '불령선인 청년들 사이에서 유력한 자'라고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장형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는 청년층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1.2.2.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 활동[편집]

장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로 약칭)는 1919년 4월 11월 중국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이후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민족의 대표기구로, 또 독립운동의 최고기관 역할을 하며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장형 선생은 직접 임시정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와 일정한 연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장형 선생이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로 확인된다. 첫째는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지만, 이것이 자료로 확인된 예는 많지 않다. 극히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활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장형 선생의 독립운동자금 제공에 대해서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승학(金承學)이 『의열사(義烈士) 및 독립운동자약전(獨立運動者略傳)』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해 놓았다.

일명(一名) 세담(世淡)이며, 호는 범정(梵亭), 용천인(龍川人)으로 1909년부터 양기탁·유동설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고, 1919년에는 이극·안창하·이신산·전덕명 등의 동지에게 군자금을 조달하였고, 전덕원·오동진·오광선 등에게도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수차 투옥되었으며, 현금과 패물 등을 수집하여 송병조 목사를 통하여 임시정부 이시영에게 전달하였다.

- 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67, 712쪽.


위의 자료에서 장형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지원하는 활동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기탁·유동열·이진산·전덕원·오동진·오광선 등은 서간도지역에서 의성단·대한통의부·대한광복군총영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지도자들이었다. 장형 선생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은 서간도 지역에만 그치지 않았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임시정부에도 자금을 제공하였다. 그 방법은 송병조를 통해 이시영에게 전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병조는 같은 고향인 용천 출신이다. 그리고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주역의 한 사람이고, 임시정부에서는 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한 사례가 또 하나 있다. 1921년 9월 임시정부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제출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에 국내 단체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한 것이다. 이 회의는 미국 주도하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이 참가하여 해군군비축소와 아울러 태평양 및 극동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되었다.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질 것이라 전망하고, 이를 한국의 독립을 요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을 간사장으로 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태평양회의에 대해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외교후원회는 태평양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한다는 것과 이를 위한 자금모집, 그리고 각국에 한국독립을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외교후원회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승만서재필을 대표로 선정하는 한편, 국내의 인사들에게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청원서를 작성하도록 요청하였다. 요청을 받은 국내의 인사들은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란 이름의 청원서를 작성하고, 1921년 9월 각 사회단체와 지역 대표자 372명의 서명을 받아 임시정부에 보냈다. 이 청원서는 대표인 이승만과 서재필에게 전달되었고, 이들은 태평양회의 의장인 미국무장관 휴스를 방문하여 이를 제출하였다.

장형 선생은 태평양회의에 제출한 청원서에 '반도고학회(半島苦學會)' 대표로 서명하였다. 서명자는 각 단체대표 101명과 각 지역대표 271명 등 모두 372명이었다. 지역대표는 전국의 각 도·부·군 단위로 이루어졌고, 단체는 기독교·불교·대종교 등 종교단체와 대동단·청년외교단·애국부인회 등이 참여하였다. 단체 대표로 참여한 인사들은 고종의 아들 의친왕(황족대표)과 김윤식(귀족대표)을 비로하여 박영효(유민회), 이상재(국민공회), 허헌(변호사) 등이었다.

2.1.3. 제3절 계몽운동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편집]



2.1.3.1. 국내에서 계몽강연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편집]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한 것과 더불어, 장형 선생이 추진한 또 다른 활동이 있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그 실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거의 없다. 극히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장형 선생의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장형 선생도 국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가 남아있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장형 선생이 전국 각지로 순회강연을 다녔던 사실과 이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장형 선생은 1921년 12월부터 1922년 5월까지 전국 각지로 순회강연을 다녔다. 순회강연은 반도고학생친목회 명의로 이루어졌다. 반도고학생친목회는 1921년 8월 장형 선생이 주도하여 조직한 단체로, 장형 선생이 총재를 맡고 있었다.

당형 선생이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조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 단체 및 인사들에게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자, 이에 호응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 반도고학생친목회였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장형 선생은 임시정부가 1921년 9월 워싱턴회의에 제출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에 반도고학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장형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요청한 청원서에 서명한 이후, 반도고학생친목회 명의로 전국 순회강연에 나섰다. 장형 선생의 순회강연은 1921년 12월 22일 인천을 시작으로, 1922년 5월 21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실시되었다. 5개월 동안 장형 선생이 강연한 곳은 모두 53곳이었다.[1] 이러한 장형 선생의 강연활동을 『동아일보』는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53회에 걸친 강연 중 시기·장소·강연주제·모금액 등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한 것은 18회였다. 나머지는 강연이 개최된다는 예고 기사로 내보냈다.

장형 선생의 강연활동은 두 가지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국민에 대한 계몽운동이었다. 장형 선생이 강연한 주제는 「우리의 급무(急務)」, 「단합능력」, 「깨어라 조선인아」, 「우리의 생로(生路)가 어덴가」, 「희망과 실행」, 「세계와 조선」, 「희망은 생로」, 「오인(吾人)의 현재와 미래」, 「오인의 최선급무(最先急務)」 등이었다. 강연 내용까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 주제가 우리 민족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당면한 문제, 그리고 단합과 희망을 강조하는 계몽적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강연은 표면적인 것이었고, 실제로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이는 장형 선생과 함께 연사로 활동한 여운홍[2]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여운홍은 몽양 여운형의 친동생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인사였다. 미국에서 유학한 여운홍은 3·1 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항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이에 참여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여운홍이 국내로 돌아온 것은 임시정부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여운홍은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서무간사를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3] 외교후원회에서는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청원서에 국내 인사들의 서명을 받고자 하였고, 더불어 태평양회의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부여하여 파견한 인물이 여운홍이었다.

장형 선생이 여운홍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형 선생은 여운홍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장형 선생이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청원서에 서명자로 참여한 것은 여운홍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장형 선생이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할 때 여운홍도 연사로 참여하였다. 여운홍은 연사로 활동할 때 반도고학생친목회의 고문이란 직함을 사용하고 있었다.[4] 반도고학생친목회는 장형 선생이 주도하여 조직한 것이었고, 장형 선생이 총재로서 실질적인 대표자였다.

장형 선생이 여운홍과 함께 전국 각지로 강연을 다닌 것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서였다. 강연 활동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에 자금을 낸 단체와 인사들의 이름 및 액수가 보인다. 강연회가 끝나면 참석하였던 지역의 단체와 인사들이 의연금(義捐金)·동정금(同情金)이란 명목으로 자금을 낸 것이다. 이것은 강연회를 통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한편에서는 비밀리에 자금모집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강연단을 이끌면서 장형 선생이 사용한 직함은 반도고학생친목회 총재였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사용한 공식 직함이었다. 이외에 장형 선생은 상공진흥회 회장이라는 별도의 직함을 사용하고 있었다.[5] 장형 선생이 상공진흥회 회장이란 직함을 사용한 데는 의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강연회는 일종의 빌미였다. 강연을 빌미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상공진흥회 회장이란 직함으로 각 지역에 있는 경제인들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경제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장형 선생은 1938년 충청남도 당진에 거주하는 홍봉유에게 2,600원의 자금을 차입하였다가 고소를 당한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재판을 받았고, '사기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하였다. 이는 국내 재산가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가 발각된 사건이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우 독립공채를 발행하여 판매하였지만, 이는 극히 한정적이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재산가들을 찾아가 자금을 요구하거나 차입하는 것이었다. 이때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권총을 들이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면 '강도죄'·'강도미수죄' 등이 적용되었고, 장형 선생의 활동과 같은 경우 '사기죄'가 적용되었다.

2.1.3.2.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 위한 사업[편집]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한 것과 더불어, 장형 선생은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만주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단둥에서 미곡상을 경영한 것, 길림에서 선만토지개간주식회사(鮮滿土地開墾株式會社)를 설립한 것과 정미소를 운영한 것이 바로 그러한 활동이었다.

장형 선생은 단둥에서 미곡상을 차렸다. 단둥은 장형 선생이 만주로 망명한 이래 활동하던 거점이었다. 단둥에서 20여 리 떨어진 오룡배에는 동생 장세원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형 선생이 단둥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였다는 사실은 1938년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재판을 받은 재판기록에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단둥시내에 8,500원의 자금을 가지고 미곡상을 차렸다는 것과 미곡상은 조카 김제현이 맡고 있었다고 한다.

장형 선생 자신이 미곡상과 관련하여 남긴 이야기도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해방 후 지인들에게 자신의 활동을 언급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내가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 할 때 창고에 쌀을 가득히 쌓아 놓고, 그 쌀을 중국인들에게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소만(蘇滿)국경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는 일을 전담하던 때가 있었는데

- 범정·혜당기념사업회, 『범정언행록』, 단국인회, 1996, 136쪽.


위의 언급에서 두 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인들에게 쌀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련한 자금을 가지고 소만 국경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였다는 사실이다. "차옥에 가득히 쌓아놓고, 중국인들에게 쌀을 팔았다"는 것은 미곡상을 경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곡상을 통해 자금을 마련한 것뿐만 아니라, 장형 선생은 무기를 구입하는 일도 담당하고 있었다. 만주지역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독립군들이 무기를 직접 생산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독립군들은 대부분 무기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무기 구입은 러시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에 징발당하였던 체코의 군인들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옷트리아의 식민지로 고통 받았던 관계로 한국에 대해 동정적이었으며, 독립군의 요청에 의해 비교적 헐값으로 다량의 무기를 넘겨주었다. 장형 선생도 이때 소만 국경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형 선생이 길림에서 선만토지개간주식회사를 설립한 것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자신이 필사해 놓은 이력서에 의하면, 장형 선생은 1927년 8월부터 1933년 2월까지 선만토지개간주식회사 사정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고 한다. 당시 길림은 정의부(正義府)의 관할지역이었고, 정의부에서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토지를 조차하여 수전을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업을 위해 설립한 것이 선만토지개간주식회사였고, 장형 선생이 그 사장을 맡았던 것이다.

장형 선생은 길림에서 정미소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정미소는 길림성 반석현 연통산진이란 곳에 차렸다. 연통산진은 길림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 정도 거리에 있는 곳으로, 낮은 구릉지대의 넓은 벌판에 펼쳐져 있어 수전에 적합한 곳이다. 만주로 이주한 많은 한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벼농사를 지었고, 독립운동의 주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후 한국인 이홍광이 일명 '개잡이부대'로 알려진 타구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중국인 양정우 등과 함께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였던 곳이다.[6]

장형 선생이 연통산진에 정미소를 설립 운영한 것은 최근의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장충식 이사장의 "아버지가 길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정미소를 운영하였는데, 이 사실을 알고 일본군 수비대가 와서 정미소를 불태웠다"는 증언을 토대로, 2011년 6월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연통산진에 있는 정미소 터와 일본군수비대 건물을 확인한 것이다. 정미소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정미소는 부인 한씨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일본군 수비대는 정미소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고, 현재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2.2. 제2장 미군정 시절 범정의 교육 활동[편집]



2.2.1. 제1절 국민대학 설립에 동참[편집]


1945년 8월 1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은 36년에 걸친 일제의 식민지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장형 선생은 만주 길림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장형 선생은 심양을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국내로 돌아온 장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 설립에 참여하였다.

장형 선생(이하 범정으로 약칭)이 국내로 들어오는 데에는 김홍일의 도움이 컸다. 김홍일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귀주강무당을 졸업한 후 중국군에서 활동하며 소장까지 진급하였던 인물이었고, 해방 당시에는 한국광복군 참모장을 맡고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임시정부는 만주지역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김홍일을 심양에 파견하였는데 이 와중에 범정 선생과 만난 것이다. 심양에서 범정을 만난 김홍일은 "임시정부가 국내로 환국하였으니 얼른 들어가 김구 주석을 도우라"며, 국내로 들어갈 수 있는 통행증을 발급해 주었다.]

범정이 환국하였을 때, 임시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대학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41년에 광복 후 국내에 들어가 건설할 독립국가의 총체적인 계획을 「대한민국건국강령」이란 이름으로 발표하였는데, 이 가운데 교육정책에 관한 것이 들어 있었다. 그 핵심은 국비의무교육을 실시한다는 것과 민족정기를 발양하고 국민도덕·생활기능·자치능력을 배양하여 완전한 국민을 양성한다는 교육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인구·교통 등의 형편에 따라 소학교·중학교·전문학교·대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환국 후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였고, 그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 대학 설립이었다.

대학을 설립하는 문제는 내무부 산하의 행정연구위원회에서 맡았다. 그 책임자는 내무부장관 신익희였다. 신익희는 행정연구위원회에서 일하는 윤백남·옥선진에게 대학 설립을 준비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그 방향을 논의하였다.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모아졌다. 3·1 운동과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국민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것, 대학은 법문 계통의 야간대학으로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대학 설립을 추진하는 기구로 '국민대학설립기성회'를 발족한다는 것이었다.

범정은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서 이사로 활동하였다. 기성회는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를 고문과 회장단으로 하고, 각계 인사들을 이사와 상임이사로 선임하여 1946년 3월 3일에 발족되었다.

고 문 : 김구, 김규식

명예회장 : 조소앙

회 장 : 신익희

부 회 장 : 윤백남, 옥선진

이 사 : 백낙준, 이종희, 윤일선, 박순천, 설의식, 이태규, 김정실, 조윤재, 정구충, 이창수, 장 형, 이봉구, 이갑수, 강명옥, 윤길중, 유호준, 최영재, 최순철, 유각경, 김의희, 김희운, 박철재, 김옥기, 최하영, 이덕흥, 김선태, 황신덕, 최병운, 강석린, 이문세, 정군근, 한통숙, 김용근, 윤형중, 안동혁, 고병국, 김동일, 김동욱, 윤위부

상임이사 : 박철재, 조윤재, 최영재, 김인선, 유각경, 김선태, 윤길중, 유호준, 김정실

- 국민대학교, 『국민대학교 60년사』, 통사편, 2007, 32쪽.


기성회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각계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가 국내의 인사들과 함께 대학을 설립한다는 취지였다. 고문·명예회장·회장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리고 이사는 교육계·여성계·법조계·언론계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범정은 독립운동계 인사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도부로 하여 기성회를 발족하였지만, 이는 곧바로 발표되지 못하였다. 미군정의 견제와 감시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31일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신익희 명의로 "이제는 임시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의 국자포고(國字布告)를 발표한 일이 있었다. 미군정은 이를 임시정부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로 여겼고,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강화하였다.

기성회는 발족 후 두 달이 지나 그 사실을 공표하였다. 1946년 5월 18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독립신보』 등이 일제히 기성회 결성을 보도한 것이다. 보도내용은 운현궁 안에 본부를 두고 있는 신민동지회가 중심이 되어 국민대학설립기성회를 결성하였다는 것, 그리고 우선 예과와 전문학부 학생들을 모집하여 야간부로 출발하여, 학제는 전문부·예과·법문학부·이공학부·이공학부·의학부로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민동지회'라는 단체는 없었다. 운현궁 안에 본부를 두고 있던 것은 임시정부와 한 몸이라 할 수 있는 한국독립당이었다. 임시정부 명의를 내세울 수가 없는 상황에서 임의로 사용한 것이 '신민동지회'였다. 신문보도에 주목할 것이 있다. 『동아일보』가 「국립대학설립준비」라는 제목을 달아, 국립대학을 설립하는 것으로 보도한 것이다.

범정은 이사로서 대학 설립 기금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기성회는 우선 창립 기금으로 5천만원을 모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기금 모집은 여의치 않았다. 임시정부가 미군정의 견제와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자금을 지원할 인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금을 모집하는 일이 어렵게 되자, 범정이 직접 나섰다. 범정은 독립운동 시절의 동지였던 박기홍의 부인 혜당 조희재로부터 5만평의 토지를 기증받았다.

그런데 기성회의 대학 설립 추진은 어려움을 겪었다. 기금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고, 교사도 마련할 수 없었다. 교사는 보인상업학교 건물을 빌려 쓰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보인상업학교 상무이사 이종국의 역할이 컸다. 이종국은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3·1절 기념대회 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임시정부를 위한 독립헌금실행단이 결성될 때 감사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이런 관계로 보인상업학교 고사를 빌려주고, 시설도 제공하였다.

마침내 기성회는 교사를 마련한 후 학생을 모집하여 대학을 설립하였다. 1946년 9월 1일 보인상업학교에서 모집한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교식이 거행한 것이다. 당초의 계획은 종합대학 규모로 설립한다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학교의 명칭은 '국민대학관'으로, 그리고 학부와 전문부를 두기로 하고, 법학과와 정경학과로 출발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가 추진한 대학 설립이 결실을 거두었다.

기성회의 실무를 맡아 대학 설립을 주도한 것은 해공 신익희와 범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범정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범정이 실무를 맡고 기금을 마련하여 대학을 설립할 수 있었다. '국민대학관'이란 명칭으로 출발하였지만, 이는 임시정부에서 '국민의 대학'을 설립한 것이었다. '국민대학관'의 학장은 신익희가 맡았고, 범정은 이사장으로 대학의 운영을 담당하였다.

2.2.2. 제2절 백범 김구와 건국실천원양성소 운영[편집]


파일:장형선생과단국대학의설립을축하하러온김구선생.jpg
대학설립을 격려하는 김구 선생과 장형 선생(앞줄)

범정은 임시정부가 추진한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을 설립한 것과 더불어 백범 김구와 함께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범 김구(이하 백범으로 약칭)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다. 백범이 환국한 후 개인적으로 추진한 일이 하나 있었다.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한 것이다. 백범이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 운영에 범정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는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임시 교육기관이었다. 교육기관은 1개월이었고, 매기마다 1백여 명의 입소생을 모집하여 교육시켰다. 입소생들은 20세부터 45세까지 중등교육을 받은 성인 남녀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한국독립당·대동청년당·대한청년당 등 애국단체에서 추천을 받아야 입소할 수 있었다. 1947년 5월 제1기생이 수료한 이래 1949년 12월 해체될 때까지 모두 9기생이 수료하였다.

범정은 이러한 건국실천원양성소 운영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이사장을 맡은 것이다. 건국실천원양성소와 관련된 자료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1948년 11월 1일부터 시작되어 12월 19일에 수료한 제5기 수업생 명부가 남아 있다.[7] 여기에 소장 김구, 그리고 범정이 이사장으로 되어 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운영에는 적지 않은 재정이 필요하였다. 입소생들은 합숙을 원칙으로 하였고, 100여 명에 달하는 입소생들의 숙식비를 감당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백범이 소장으로 있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인사도 없었다. 백범이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이사장직을 만들고, 범정에게 이사장을 맡도록 제의하였다. 당시 범정은 단국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던 때였다. 범정은 백범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건국실천원양성소 이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을 지원하였다.

범정은 해방 후 국내에 들어와 백범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문헌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증언이나 사진을 통해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장충식 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범정은 편지를 통해 백범과 수시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고 하며, 자신이 편지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1월 18일 백범이 내수동에 있는 범정의 집을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고, 이때 범정·장도빈·엄항섭·박정숙·김정실·양주동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범정은 해방 후 국내에 들어와 백범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문헌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증언이나 사진을 통해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장충식 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범정은 편지를 통해 백범과 수시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고 하며, 자신이 편지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1월 18일 백범이 내수동에 있는 범정의 집을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고, 이때 범정·장도빈·엄항섭·박정숙·김정실·양주동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2.3. 제3장 단국대학 설립준비위원회의 발족과 개교[편집]



2.3.1. 제1절 단국대학 설립의 계기[편집]


범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한 대학 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국민대학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학에서의 활동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학장을 맡고 있던 신익희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떠난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난 것을 계기로 범정은 국민대학과 결별하였다. 국민대학과의 결별이 단국대학을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7년 7월 학장 신익희가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은 독립운동 시기 임시정부 요인들이 결성한 것으로, 임시정부와는 표리일체의 관계였다. 해방 후 미국의 불승인과 압력에 의해 '개인자격'으로 들어온 임시정부는 '정부 명의'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독립당은 정당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신익희는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이면서, 한국독립당 서울시당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신익희가 "자유로운 입장에서 정치활동을 한다"며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것이다.[8]

신익희의 탈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익희는 내무부장으로 산하에 비밀조직인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의 책임을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공작대가 반탁운동 때 '국자포고'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그 실체가 드러났다. 미군정은 정치공작대를 해체하라는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정치공작대는 해체되었다.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세 이를 막아내지 못한 것에 격분하였고,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리고 이승만이 주도하고 있던 독립촉성국민회에 가담하였다.

이 무렵 백범과 이승만은 정부 수립 문제를 둘러싸고 노선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백범은 이는 민족을 분단시키는 일이라고 비판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범정은 신익희의 한국독립당 탈당, 그리 독립촉성국민회 가담을 임시정부와 백범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다. 그리고 국민대학과 결별하였다. 당시의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던 장충식 이사장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내수동 집에 해공(신익희) 선생이 오셨어요. 우리 집에서는 손님이 오면 여자가 안 들어가요. 저나 아버지, 비서들이 차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차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아, 범정 왜 이러십니까"하고 야단이 났어요. 우리 아버지(범정)가 "해공, 어찌 백범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이요”하면서, 해공 선생을 막 때리세요. 그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니까, 따라온 사람들이 들어가서 말렸죠. 그때 이제 결별하게 된 거에요.

- 장충식 이사장 증언(2007년 3월 17일, 자택에서 한시준·이성규 교수 청취, 출처: 『단국대학교 70년사』#)


'해공'은 신익희의 호이다. 범정은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나 이승만 측에 가담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익희의 행위를 '배신'이라고 여겼고, 국민대학은 더 이상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정신을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범정은 국민대학과 결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의 설립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범정은 국민대학과 결별하면서, 조희재 여사가 국민대학에 기증하기로 한 5만 평의 토지를 취소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대학교 60년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대학은 기성회 설립 당시 5만 평의 토지 기부를 약속하였던 박기홍의 미망인 혜당과 이사진으로 참여한 범정 등이 여러 가지 이유[9]

로 손을 떼면서 재단을 구성할 교사 하나 없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 국민대학교,『국민대학교 60년사』 통사편, 2007, 36쪽.


이로 인해 국민대학은 재단을 구성하거나 교사 하나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범정이 국민대학에 기부하기로 한 토지를 취소한 것은 국민대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정신을 실현할 수 없다고 보고, 이를 계승·실현할 수 있는 대학을 별도로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2.3.2. 제2절 혜당 조희재와 대학설립준비위원회[편집]


파일: 혜당조희재.jpg
단국대학교 설립자 혜당 조희재 여사

범정은 국민대학과 결별한 후, 독자적으로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국민대학은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이지만,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배신'함으로써 그 정신을 이어가기가 어렵고, 또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범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10]

범정은 대학 설립 문제를 조희재 여사와 협의하였다. 조희재 여사는 범정의 독립운동 동지였던 박기홍의 미망인이었다. 박기홍은 대한제국의 관리로 삼화(三和)와 한성우체사 등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11],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되었던 장훈보통학교가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5년에 이를 인수하여 교주로서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범정과 박기홍은 사적으로 사돈 간이기도 하였다. 박기홍의 딸인 박정숙이 범정의 누이 아들인 이성섭과 결혼한 것이다. 동지이자 사돈간이었던 박기홍은 범정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범정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할 때, 그를 도운 것이 박기홍이었다. 박기홍은 국내의 거점 및 연락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많은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기홍은 애석하게도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10월 27일 별세하고 말았다.[12]

박기홍에게는 부인 조희재 여사[13]와 외동딸인 박정숙이 있었다. 박기홍은 별세할 때 부인 조희재 여사에게 장훈학교처럼 학교를 세우라고 부탁하며, 그 문제는 범정과 의논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범정이 대학 설립 문제를 제안하자, 조희재 여사는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리고 조희재 여사는 딸 박정숙과 함께 소유하고 있던 1억원에 해당하는 토지를 대학 설립 기금으로 내놓았다[15]. 이것이 범정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대학 설립을 추진하게 만든 근거가 되었다.

혜당 조희재 여사와 그의 딸 박정숙이 기부한 재산이 대학 설립에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범정에게도 적지 않은 재산이 있었다. 부친 장창익이 서울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며 모아 둔 재산이 적지 않았다. 범정도 충청북도 제천의 산판을 비롯하여 부친이 가지고 있던 재산들을 매각하여 보탰다. 이로써 대학 설립을 위한 기본자산이 마련되었다.

기본자산이 마련되자, 범정은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먼저 김정실과 이석하로 하여금 대학설립 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김정실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국민대학 교무처장으로 있으면서 범정을 적극 도왔던 인물이고, 이석하는 강원도의 거부였던 고중권의 재산관리인으로 범정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제자인 강재훈과 신주현으로 하여금 실무를 보조하게 하였다.

범정은 대학설립을 추진하면서 여러 인사들을 만났다. 백범을 비롯하여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친구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인 장도빈, 민족주의 사학자이면서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언론인 안재홍, 대종교의 안호상 등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었다. 범정은 이들에게 국민대학과 결별한 이유와 별도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취지를 설명하고, 대학 설립에 관한 이유를 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교 이름이 '단국'으로 결정되었다. 범정은 이들에게 교명에 대한 의견을 구하면서 "지금 임시정부와 백범이 나서서 남북통일과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는데, 학교의 이름은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에 대해 안호상, 안재홍, 장도빈 등은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냐. 남북을 막론하고 단군의 건국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남북통일과 통일정부수립을 위해서는 단국의 건국정신을 고취해야 한다는 뜻에서 교명을 '단국'으로 결정하였다.

2.3.3. 제3절 단국대학의 설립과 개교[편집]


설립준비위원회가 결정되면서, 대학 설립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설립준비위원회는 낙원동에 있는 조선정치학관[16] 2층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17]조선정치학관은 한말 서북학회 회관으로 세워졌던 건물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오성학교·보성전문학교·협성실업학교 등의 교사로 사용되다가 유석창[18]이 이를 인수하였고, 이곳에서 1946년 5월 조선정치학관을 설립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사무소를 마련한 설립준비위원회는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우선 대학 설립에 필요한 행정적인 절차를 밟았다. 설립준비위원회는 재단법인, 대학 설립, 이사장 승인 등 세 가지 서류를 작성하여 1947년 9월 15일 남조선과도정부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남조선과도정부는 미군정이 행정권을 한국인들에게 이양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적인 행정부로, 안재홍이 민정장관을 맡고 있었다.

남조선과도정부 문교부에 제출한 대학설립 신청은 한 달 보름만에 승인이 났다. 1947년 11월 1일 문교부장 유억겸의 명의로 「재단법인 단국대학 설립의 건 인가함」, 「단국대학 설립의 건 인가함」, 「이사장 이사 및 감사 취임의 건 인가함」 등 세 건의 인가서가 발급된 것이다. 이는 11월 3일 설립준비위원장 혜당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혜당은 와병 중에 병상에서 설립인가서를 직접 받아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홍익인간의 뜻을 따라 할 일을 다한 듯합니다. 이사장(범정)님께서 잘 맡으셔서 운영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혜당의 나이 56세였다. 혜당의 장례는 대학장으로 거행되었다. 범정은 소의(素意)대로, ‘학생독립운동의 날’에 맞춰 1947년 11월 3일에 「단국대학 설립취지서[19]」와 함께 단국대학 재단설립을 선포하였다.

파일: 독립신문단국대.jpg
임시정부가 발행하는 환국속간 '독립신문'에 실린, 단국대학교 개교 기사

설립준비위원회는 설립인가를 받은 후, 학생을 모집하고 개교를 준비하였다. 학제는 2개 학부(법정학부, 문리학부)에 5개 학과(법정학부: 정치학과·법학과, 문리학부: 사학과·수학과·물리학과)로 결정되었다. 결정된 학제에 의해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 선발이 이루어졌다. 1947년 11월 19일과 20일 양일에 걸쳐 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문교부 감독관이 입회한 가운데 입학시험을 치렀다. 이를 통해 960명의 학생을 선발하였다.[20]

정치·법률·사학·수학·물리 등 5개 학과를 설치한 데에는 범정의 역사의식이 반영되었다. 정치와 법률은 국제정세와 국제법에 어두워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었다는 자각에서, 수학과 물리는 기초과학이 국가발전의 토대가 된다는 현실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4개 학과와 더불어 인문과목으로 유일하게 설치한 학과는 사학과였다. 범정은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남북통일에 기여하여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실천하기 위해 사학과를 설치하였다. 장도빈을 초대 학장에 임명한 것도 그러한 의도였다. 장도빈은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친구이기도 하였지만,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였고, 『조선역사대전』, 『대한역사』 등을 저술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인물이다.

1947년 11월 30일 초대 학장에 장도빈이 취임하면서 학교의 기구도 갖추어졌다. 학교의 기구는 이사장 장형, 교주 박정숙, 학장 장도빈 등으로 구성되었다.

1947년 12월 3일 제 1회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입학식은 휘문중학 강당에서 오전 10시에 개최되었다. 입학식에는 교수와 학생, 그리고 문교부 차장 오천석과 미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 소장[21]을 비롯하여 1천여 명이 참가하였다.

단국대학은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은 정규 4년제 대학이었고, 설립 당시 남한의 20개 대학[22]의 하나였다. 1947년 12월 15일 남조선과도정부 문교부에서 20개 정규대학을 발표하였는데, 그 안에 단국대학이 포함되었다. 해방 후 어수선한 정국에서 학원모리배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학원모리배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학원과 인사들을 말한다. 문교부에서는 이러한 학원모리배들로 인해 교육건설에 많은 지장이 있다며, 유령학원의 학생모집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정규 20개 대학을 발표한 것이다.

따라서 단국대학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 의해 설립된, 광복 후 최초의 4년제 정규 대학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이 반영된 대학이란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2.4. 제4장 단국대학의 설립 정신[편집]



2.4.1. 제1절 독립정신의 구현[편집]


단국대학 설립의 배경은 독립운동에 있고, 설립정신은 독립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설립자인 범정이 독립운동가라는 점, 범정이 해방 후 국내에 돌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대학설립에 참여하여 국민대학을 설립하였다는 점, 그리고 국민대학이 임시정부와 독립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국민대학과 결별하고 별도로 단국대학을 설립하였다는 점 등이 그러한 근거다.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는 것이 일차적 목표이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 국내에 들어와 추진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국가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독립운동가였던 범정이 택한 길은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사업이었고, 이로 인해 설립된 것이 단국대학이었다.

독립정신은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도전과 창조'라고 할 수 있다.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에 도전한 것이 독립운동이었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 창조가 바로 독립정신이었다. 현재 국내에 수많은 대학들이 있지만, 단국대학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정신이 있다. 단국대학은 독립운동가에 의해 세워진 대학이고, 단국대학의 설립정신은 바로 독립정신에 있다는 점이다.

2.4.2. 제2절 국가와 민족의 재흥[편집]


단국대학을 설립한 또 다른 정신이 있다. '국가와 민족의 재흥'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 단국대학이다. 35년 여에 걸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우리민족이 추진할 과제가 있었다.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더불어, 국가와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단국대학은 바로 이러한 과제, 즉 '국가와 민족의 재흥'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범정은 설립 당시 단국대학을 설립한 이유에 대해 직접 언급한 일이 있다. 범정이 언급한 내용을 『단대학생신문』은 「단국대학을 세우고 나서 - 국가민족의 재흥에 기여」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나는 청년시대에 한국멸망의 비운을 당하여 분개가 극한 중에 조국독립 회복의 열망이 흉중에 불타서 내외각지로 독립운동에 분주한지 40년에 독립은 회복되지 못하였으나 오직 심신의 단련 사회정세의 통찰이 있었다.

해방 이후 우리민족은 불행히 분열의 비경에 빠져서 국가의 독립이 회복되지 못함을 볼 때에 나는 다시 통탄비애를 느껴 이것이 비록 세계대세의 영향이었다 하나 실로 우리 민족의 실책이 다대한 것을 알았다.

나는 연내에 시세를 정관하다가 이번에 결심한 바 있어 곧 청년의 양성, 동지의 규합으로 국가민족의 재흥을 실현하기로 하였다. 마침 전일의 구우 고 박기홍씨의 부인 혜당과 그 딸 박정숙씨가 거대한 재산을 가지고 우리 국가건설의 과업을 일역이라도 맡아 보겠다는 거지(巨志)를 품고 있었다. 나는 조희재 여사와 누차 협의한 결과 단국대학을 설립하기로 하였으며, 그 후 조희재 여사의 열심과 동지들의 협력으로 기어코 단둑대학은 설립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단국대학이 설립되자마자 조희재 여사가 별세하고 지금은 박정숙씨와 더불어 내가 그 경영에 당하고 있다.

- 『단대학행신문』 제1호, 1948년 3월 1일자, 「단국대학을 세우고 나서 - 국가민족의 재흥에 기여」


이 글 속에는 단국대학을 설립한 이유와 정신이 배어 있다. 범정은 청년시절에 대한제국이 망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국독립에 대한 열망을 안고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아직 국가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 대해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거이다. 국가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났지만, 또 다시 미군정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범정과 혜당이 단국대학을 설립한 데는 뜻이 있었다. '국가와 민족의 재흥'에 기여하기 위해서였다. '국가와 민족의 재흥'을 도모하는 일, 범정은 이를 제2의 독립운동으로 여겼다.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이 청년인재의 양성이었다. 청년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와 민족의 재흥'을 도모하고자 설립한 것이 단국대학이었다.

2.4.3. 제3절 창학이념: 구국·자주·자립[편집]


단국대학의 창학이념은 '구국(救國)', '자주(自主)', '자립(自立)'이다. 구국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함'이란 뜻이고, 자주는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에 관한 일을 자기의 힘으로 행함'이란 뜻이며, 자립은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선다'는 뜻이다.

단국대학은 구국·자주·자립을 창학정신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구국·자주·자립은 설립자 범정이 추구한 삶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범정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라는 시기를 살아가면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가해였다.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아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독립운동의 목표였고, 독립운동의 핵심은 구국·자주·잘비이었다.

독립운동은 그 자체가 구국운동이다. 한말 일제가 일본군을 용산에 주둔시키고 을사늑약 등을 통해 대한제국을 침략할 때, 그리고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식민지 통치를 실시할 때, 우리 민족이 해결하여야 할 최대과제가 있었다.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것,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은 곧 나라를 구하는 구국운동이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게 되었을 때,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일, 그리고 미소 양군의 38선을 경계로 한 분할점령으로 인해 초래된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통일국가와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민족적 과제였다. 이러한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크게 대두된 것이 '자주'와 '자립'이었다. 미국이나 소련 등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독립국가와 통일국가를 수립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추진하는 대표적인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이었고, 범정은 이러한 노선을 따랐다. 범정은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였다.

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

- 범정 장형


범정이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서, 범정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독립기념관 안에 세워진 「범정 장형 선생 어록비」에도 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문구 속에 구국·자주·자립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범정의 이러한 정신과 의지가 바로 단국대학을 설립한 이념이었다.

2.5. 제5장 낙원동 교사와 전문부 설치[편집]



2.5.1. 제1절 낙원동 교사의 확보[편집]


단국대학은 독자적인 교사를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단국대학뿐만 아니라, 해방 후 신설된 사립대학들 대부분이 안고 있던 문제였다. 당시의 현실로 보면 독자적인 건물을 마련하여 대학을 설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대부분 남의 건물을 빌려 교사로 사용하였다. 단국대학도 설립 당시 조선정치학관을 빌려 교사로 사용하였다.

조선정치학관(건국대학교의 전신)은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282번지(현재는 280번지로 통합)에 있던 3층 건물로, 소유주는 유석창이었다. 유석창은 만주 장백현에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 유승균의 아들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였던 인물이다.[23] 국내에서 민중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던 유석창이 이 건물을 매입하였고, 해방 후 여기에 조선정치학관을 설립하였다.

조선정치학관은 원래 한말 서북학회 회관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서북학회는 1908년 안창호·이갑 등 평안도 지역인사들이 조직한 계몽운동 단체로, 낙원동에 회관을 건립하였다. 회관은 이갑이 민씨척족으로 평안 감사를 지낸 바 있는 민영휘의 지원을 받아 건축하였고, 건립 당시 33명의 공동 소유로 되어 있었다.

서북회관은 건립 이후 주로 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오성학교에서 사용하였다. 오성학교는 서북학회 인사들이 설립한 학교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오성학교가 폐교 조치를 당한 후에는 보성전문학교가 잠시 사용하기도 하였고, 이어 협성실업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협성실업학교가 운영난에 빠지게 되자 화신백화점 박흥식에게 넘어갔다가 1939년 민중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유석창이 건물을 인수하였다. 해방 후 유석창은 건국의숙을 설립하여 이 건물에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1946년 5월 조선정치학관을 설립하였다.

개교 당시 조선정치학관과 더불어 교사로 사용한 곳이 하나 더 있다. 이화동에 있는 배영학관도 교사로 사용하였다. 배영학관은 이담이 설립한 것으로, 이화장 근처에 있었다. 이담은 단국대학 설립이 추진될 때 이사로 참여하였고, 배영학관 건물을 단국대학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개교 당시 조선정치학관과 배영학관을 교사로 사용하였지만, 이는 임시적인 것이었다. 독자적인 교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배영학관은 2층의 목조건물이지만 비좁았고, 조선정치학관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당시 조선정치학관은 문교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같은 건물을 쓰고 있던 조선정치학관의 많은 학생들이 대학인가를 받은 단국대학으로 적을 옮기게 되었고[24], 이를 두고 조선정치학관 측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당시 조선정치학관은 건물에 내걸었던 '단국대학'의 간판을 제거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조선정치학관과 단국대학은 극단적인 국면으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에 분격한 학생들은 정치학관 교수에게 책임을 물어 추궁, 폭행하는 사태까지 번져나갔다. 정치학관에 속해 있던 대다수 학생들은 유석창에게 정치학관을 조속히 정규대학으로 발족시켜 주든지 아니면 기인가된 단국대학에 교사를 사용하게 하여 학업에 지장이 없게 해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유석창은 양단간에 분명한 태도 표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정치학관은 정규대학 인가를 받은 단국대학으로 말미암아 뜻하지 아니한 충격을 받아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고, 급기야 단국대학에 대한 대립, 갈등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그래서 단국대학은 독자적인 교사로 성동구 신당동에 있는 조선전업협화장 건물의 인수를 추진하게 되었다.

2.5.2. 제2절 전문부의 병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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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1회 졸업식에서 축사 중인 백범 선생

단국대학은 개교 당시 단과대학이었다. 1946년 2월 대학에 대한 규정으로 '대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대학의 수업연한은 4년 이상으로 하고, 학부수에 따라 단과대학(College)과 종합대학(University)으로 구분하였다. 단국대학은 개교 당시 법정학부(정치학과, 법학과)와 문리학부(사학과, 수학과, 물리학과)의 2개 학부에 5개 학과로 이루어진 단과대학이었다.

2개 학부와 5개 학과로 개교한 후, 별도로 전문부를 병설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교육제도에 대한 새로운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개편 이전에 학업을 이수한 학생들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개편된 교육제도에 의하면 교등교육기관은 전문학교, 대학예과, 대학이 있었다. 전문학교와 대학예과는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마련된 것으로, 중등학교 4년을 졸업한 학생이 전문학교와 대학예과를 거쳐 대학으로 진학하도록 만든 조처였다.

이러한 제도에 의해 2개 학부와 5개 학과 외에 병설한 것이 전문부였다. 전문부는 6개월 과정으로 설립되었다. 개교와 더불어 전문부를 병설하고, 학생을 모집하였다. 전문부에는 정치학과와 법률학과의 2개 학과를 두었다. 전문부는 2부로 나누어 수업하였다. 제1부는 낙원동 교사에서, 제2부는 이화동에 있는 배영학관에서 수업을 받았다.

1948년 6월 25일 제1회 전문부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전문부 제1회 졸업식에 백범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백범은 단국대학이 설립된 직후인 1948년 1월 내수동에 있는 범정의 집을 방문하여, 단국대학의 개교를 축하한 적이 있었다. 이때 백범은 범정의 집에 모여 있던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화하였다.

단국대학은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대학이며, 학생들은 우리 국민 전체를 대표하여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라. 첫째도 나라사랑, 둘째도 나라사랑, 셋째도 나라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며, 범정 아우의 애국애족하는 기풍이 단국대 학생들에게 넘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 백범 김구, 『범정언행록』 단국인회, 1986, 156쪽.


1949년 7월 16일 제2회 졸업식이 열렸다. 이때 졸업생 10명이 1949년 7월에 실시된 고등고시에 응하여 2명이 합격하였다. 전국에 합격한 인원이 모두 11명이었는데, 단국대학에서 2명이 합격한 것이었다. 전문부는 제2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폐지되었다.

3. 제2편 역사적 고난과 단과대학 운영[편집]



3.1. 제1장 신당동 교사와 6·25전쟁[편집]



3.1.1. 제1절 신당동 교사 이전[편집]


해방 후 신설된 사립대학들이 창립 초기에 갖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대학 교사의 확보였다. 대부분의 신설 사립대학들은 초창기에 이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단국대학도 교사 문제로 진통을 겪었다. 창립 초기부터 임대하여 사용하던 낙원동 교사에서는 학사와 학생 문제로 조선정치학관과 미묘한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제2교사인 이화동의 배영학관은 운영자(이담)와 단국대학 재단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사용상에 문제가 없었으나, 목조 2층의 작은 건물로서 이 역시 대학 교사로는 턱없이 열악했다. 단국대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고 더 이상 조선정치학관과 비생산적인 갈등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새로운 교사 확보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신교사를 물색하던 중에 성동구 신당동에 위치한 조선전업협화장 건물을 인수하게 되었다.

조선전업협화장은 본래 일제강점기 조선전업주식회사(현재 한국전력공사)의 관사(연립형주택)로서 해방 후 20여 세대의 일반인이 입주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전업협화장 입주자의 한 사람이었던 맹욱재 동문이 발 벗고 나서 교섭한 결과 주민 이주비를 지급하고 우선 12세대분의 관사를 인수하여 이전할 수 있었다. 신교사로 이전하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남아있던 세대 중에 10여 세대가 퇴거하였으나 4세대만은 끝까지 불응하여 잔류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교사로 건축된 것이 아니었고 일반 가정집이 한쪽 편에 잔류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교육환경이 산만하여 교사 건물로 부적합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오랫동안 바라왔떤 2,314여㎡(700여 평)의 독자적인 교사건물을 확보하여 '집 없는 설움'을 해소한 것만으로도 너무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드디어 1949년 12월 26일 단국대학은 종로구 낙원동 282번지 소재 임대교사로부터 성동구 신당동 52번지 4호에 있는 새교사로 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단국대학의 신당동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당동 교사는 미처 안정을 찾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6·25전쟁의 발발로 이전 6개월 만에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3.1.2. 제2절 6·25전쟁과 피난지 임시교사[편집]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단국대학교 역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좌익학생들이 신당동 교사를 점령해 혼란을 조성하였으나 장형은 대학 관계서류를 땅에 매장하고 6월 27일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피난 후, 다시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6.25 이후 흩어졌던 대학 구성원들은 대구에 정착하였고, 1951년 9월 29일 대구에서 초대 졸업식이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이후 1957년 9월 부산시 동대신동 소재 소년원 구내에 대학을 개강하였다. 처음 모인 수강생은 겨우 6, 7명에 불과하였으나 11월 14일 부산시 서대신동 3가 소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가교사로 이전 후엔 150명이 모이게 됐다. 이후 부산시내를 전전하며 강의를 하다가 부산 대청동에 가교사를 신축해 정착하였다. 1952년 4월 2일에 제 2회 졸업식이 부산의 광복교회에서 치뤄졌다. 제3회 졸업식은 1953년 3월 23일 부산 남성여자고등학교에서 거행되었다. 이 가운데에 고등고시 합격자가 속출하였으며, 이때 합격한 법조인만 10여 명에 달하였다. 제3회 졸업생 중에는 「껍데기는 가라」란 시로 잘 알려진 시인 신동엽도 있었다. 휴전 이후, 단국대학교는 1953년 8월이 돼서야 서울특별시 신당동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3.2. 제2장 한남동 교사 신축과 4·19혁명[편집]



3.2.1. 1절 한남동 교사 입주[편집]



3.2.1.1. 한남동 교사 신축[편집]

단국대학 설립 이래의 최대 과제로서 오랜 동안 숙원이 되어 온 사업이 교사의 전면적인 신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1955년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낙원동 교사 시절에 '교사 없는 단국대학'에서 독자적인 건물을 확보하여 신당동 교사로 이전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신당동 교사는 교사라는 이름 뿐 실제로 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설비나 여건은 거의 도외시된 한낱 연립주택형의 건물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단국대학 운영관계자들은 큰 교사건물 구입의 꿈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자 신당동 교사 일대를 매수 확장하려는 계획까지도 갖고 있었다.

그러던 때에 1950년 3월 「농지개혁법시행령」이 실시되고, 이어서 뜻하지 않은 6·25전쟁의 발발로 부산으로 내려가서 피난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피난교 시절의 전후 3~4년 동안은 교사 확장문제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1953년 9월 서울 복귀 이후에도 잔쟁의 큰 피해를 입은 서울에서 우선 신당동 교사가 건재한 것만으로도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어서 그 교사를 수리하고 넓혀서 교무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시기적으로 교사문제는 현상유지 선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각 학부마다 증과가 되고, 2부가 정식으로 설치 인가됨에 따라, 제반시설의 확충 증설이 절실히 요구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또 교세가 날로 발전하여 장래에 종합대학교로서의 승격까지 전망하게 되면서 신당동 교사의 확충계획을 백지화하고 새로운 교사신축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55년 2월 20일에 「대학설치기준령요강」이 정부의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단국대학은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을 목표로 삼고 설립 당초부터 숙원사업인 교사신축 문제를 구체화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16만 5,289~19만 8,347㎡ (5~6만평)의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1955년 2월 단국대학 법인이사회에서는 '조속한 시일 내에 부지를 물색할 것'과 동시에 '교사신축에 착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2월 이후부터 즉시 부지 후보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으나 새로운 교사 부지를 찾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첫째 어려움에 부딪친 것은 교사를 세울 수 있는 넓은 대지의 확보였다. 교통과 지형 등 여러 가지 입지조건이 맞는 대지의 확보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955년 한 학기 동안 국공유지와 개인소유지 10여 개소를 현지 답사하였으나 교통과 입지조건 등 불편한 점이 많아 모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1955년 9월 한남동 소재의 토지를 찾아내고 교섭을 벌인 끝에 정식으로 대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1956년 2월 9일에 개최된 법인 이사회에서 용산구 한남동 산 8번지 13만 8,466㎡(4만 1,886평)의 국방부 소유 국유임야와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 죽평리[25] 소재 46만 3,537㎡(14만 220평)의 우리 대학 법인 소유 임야를 서로 교환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남동 일대는 배산임수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동남으로 교통로가 연결되고 버스길 또한 근거리에 있어 교통이 편한 지역이었으므로 학교부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이후에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단국대학 앞의 대로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가 되었다).

법인 이사회의 결의가 있기 전인 1956년 2월 3일 정오, 국유지인 한남동의 대지에서 신축교사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박정숙 교주, 장형 이사장, 윤택중 학장을 비롯하여 재단의 인사, 교직원, 학도호국단 대표, 안승렴 동창회장, 동문 등 약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아직은 황량한 산야인 한남동 교지에서 장익위 상무이사가 대표가 되어 정초하였다. '단국대학신축대지'라는 표문을 세운 다음 일행은 주변 일대를 시찰하였다. 1956년 3월 10일에 총 5,289㎡(1,600여 평) 부지 위에 대학본관·법정학관·이학관 등 신축교사가 착공되었다. 이 해 11월 15일에는 교수·직원·학생이 대학에서 내준 버스 2대로 한남동 신축교사를 시찰하였다. 정초식을 가진 다음 10여 개월이 지난 1956년 12월 29일에는 2층의 대학본관과 제1공학관(물리·화학관)의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이듬 해 6월 대학본관과 제1공학관을 준공하고(법정학관도 같은 해 8월에 준공되었음), 1,983㎡(600여 평)의 도서관 건물을 착공하였다. 철근콘크리트로 건조된 대학본관과 제1공학관은 모두 백색으로 단정하였다.

한남동 시절 단국대의 정확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산 8번지였다.[26][27]

3.2.1.2. 한남동 교사 입주와 '단국대학 개교 10주년 기념식'[편집]

파일:한남동 교사 전경 1957.jpg
한남동 교사 전경(1957)

1957년 6월 17일 드디어 한남동 신교사 입교식을 기점으로 한남동 시대의 장이 열렸다. 대학 설립 이래 10년의 긴 고난의 역사를 마치고 배산임수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한 신캠퍼스로의 이전은 가슴벅찬 일이었다. 1957년 6월 17일 오전 11시 법정학관 앞 교정에서 열린 입교식은 박정숙 교주, 장형 이사장, 윤택중 학장을 비롯한 전체 교수·직원과 장경근 내무부장관, 황성수 의원 등 40여 명의 내빈과 4천 명의 남녀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멀리 관악산을 바라보며 뒤로는 나만의 푸른 녹음을 등진 서울캠퍼스는 드높은 6월의 하늘 아래 대학의 밝은 장래를 약속하듯 이날따라 화창한 햇빛으로 빛났다.

이날 기념사에서 박정숙 교주는 “나의 선친 의 유지를 받들어 장 이사장의 주야불휴로 성 심분투하신 보람이 오늘 이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였고, 장형 이사장은 “단군의 개국정신을 본받아 우리 자력으로 훌 륭한 학교를 이륙하자”고 하였다. 윤택중 학장 은 “건물을 하얗게 칠한 뜻은 첫째 백두산의 굳건한 의미요, 둘째 백의민족의 상징이요, 셋째 우리의 마음을 청렴 결백히 하자는 뜻이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단국대학으로 비약적 발전의 터전이 마련되었고, 명실공히 학문연구와 진리탐구의 아카데미가 그 주춧돌을 한남동 숲속에 다지게 된 것이었다. 한남동 교사 이전 완료 5개월 후인 1957년 11월 3일 ‘단국대학 개교 1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한남동 교사 대학본부 앞 광장에서 대학 관계자와 내빈, 전체 교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0시부터 김익진 사무처장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은 단국대학 부속 백남고등학교 취주악대 주악으로 시작되었다. 안승렴 교무처장의 연혁과 현황보고가 있었고, 윤택중 학장의 기념사, 장형 이사장의 회고사, 최규남 문교부장관, 조동식 동덕여자대학장, 이희승 서울대학 교 문리과대학장, 배상명 상명여고교장, 주기용 오산학교장 및 김익준 등의 축사가 있었다. 학생대표 정종문 학생위원장의 축사, 박정숙 교주 및 장형 이사장에의 감사장 및 기념품 증정에 이어 10년 근속자 및 공로자, 1년 개근 표창장 수여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어서 기념식장에서는 고 조희재 여사 10주 기 추모식도 함께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개교 10주년은 파란에 가득 찬 역사였다. 뚜렷한 지표를 세우고 어려운 길을 헤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성장의 이정표를 밟아 온 짧고도 긴 세월이었다. 개교 10주년을 맞으며『단대학보』(1957년 11월 3일자)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저 영국의 옥스퍼드나 캠브리지가 그 권위와 전통을 세계에 자랑하는 역사를 이룩하기까지는 수세기의 장시일을 소요하였다. 우리 대학의 역사도 과거보다 내일에 있거니와 벌써 현재에도 교시의 반영으로 학생 간에 남다른 ‘자주’·‘자립정신’과 ‘성실’·‘근면’의 기풍이 양성되어 감을 감득할 수 있다. 앞으로 진일보하여 이 기풍이 확고부동한 전통으로서의 발전과 아울러 새 세대 의 야심적 진취의 기상이 가미 조화되어 타의 추종을 허치 않는 경지에 이른다면 이는 확실히 하나의 손색없는 학풍으로서 전승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단대학보』 1957년 11월 3일자


파일:단국대로고w.jpg
죽전캠퍼스 이전까지 쓰였던 옛 교표


3.2.1.3. 대학원 설치와 연속강좌제 운영[편집]

1957년 6월 신당동에서 한남동으로 교사를 이전하면서, 장형 이사장을 중심으로 한 운영진은 창학이념의 발전적인 구현을 위하여 대학원 설치에 노력을 기울였다. 대학교육은 대학원 중심이 될 것임을 예지하고, 대학원을 설치하여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 겠다는 운영진의 노력과 시대관이 반영된 것이 었다.

1957년 12월 11일자로 문교부에「대학원인 가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이듬해 재차 인가신 청서를 제출하여 1958년 8월 29일에 문교부 로부터 「단국대학에 대학원 설치의 건」을 인가 받아 대학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대학원 석사 과정 3개 학과(법률학과, 정치학과, 국문학과)에 총 정원 30명 인가를 받았다.

대학원 설립인가 직후에 대학 당국에서는 학생 모집, 교수 초빙 등 개원 준비를 서둘렀다. 1958년 10월 14일에 초대 대학원장으로 장기영 교수(전 체신부장관,한국일보 사주)가 임명되고, 같은 달 25일에 강당에서 대학원 개원식 겸 제1회 대학원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1960년 8월 10일 제2대 김기석 대학원장이 취임하였다. 1961년 4월 3일부터 각계에서 저명한 강사를 초빙하여 연속강좌제를 실시하였 다. 한 강좌를 계속 강의한 다음 시험을 보아 학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한 학기 동안에 실시할 강의를 단시일 내에 끝낼 수 있게 한 제도였다. 1961학년도 1학기에 실시한 강좌명과 강사는 형법에 유기천 교수, 국제법에 박종성 교수, 철학에 박종홍 교수, 서양사에 조의설 교수, 불교학에 이종익 교수 등이었다. 그러나 대학원은 불행하게도 1961년 9월부터 1966년 2월까지 군사정부에 의하여 주간부가 폐지되는 비운을 겪었다. 타의에 의한 대학원의 폐지는 설립자 범정의 건학정신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 후 운영진 의 부단한 노력으로 대학원의 재설치를 서둘러 1966년 2월 25일자로 다시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석사과 정 7개 학과에 총 정원 35명으로 다시 출범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학원은 1958년 첫 걸음을 시작하여 일시 폐지된 시기도 있었지만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양적·질적으로 성장 발전을 지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2.2. 제2절 4·19혁명과 단국대학의 학생운동[편집]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것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석림(石林) 신동엽(申東曄).


1960년 4월 4.19 혁명이 발생하자 단국대 학생들도 4.19혁명에 적극 참여하여 부정부패와 싸웠다. 그 중에는 총탄을 맞고 사망하거나 부상한 학생도 있었다. 영문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성수는 중앙청 앞에서 맨주먹으로 앞장 서 싸우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입원하였으나 1960년 5월 31일 정오 2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김성수의 장례는 개교 후 처음으로 단국대학 학생장으로 엄수되었다. 영문과 3학년 정창종, 상과 3학년 이대종, 정치외교학과 1학년 김용인 등 중상을 입은 학생 들도 있었다. 그 뒤 학원이 다시 안정을 찾기까지 한동안 혼미한 상태가 거듭되었다. 4·19 이후 학생과 국민의 무절제한 시위사태가 국가와 사회의 건전한 분위기를 해치고, 일부에서는 이른바 하극상이 정당화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1960년 5월 31일 단국대학의 학생 600명이 일으킨 국회 앞에서의 연좌시위는 동국대 학생과의 유혈사태를 빚어 사회의 빈축을 받은 바도 있다.

파일: 4.19혁명당시 가두시위 중인 단국대 학생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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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당시 가두시위 중인 단국대 학생들


3.3. 제3장 5·16 군사정부와 대학의 시련, 그리고 극복[편집]



3.3.1. 제1절 5·16 군사정부에 의한 1부 폐지[편집]



3.3.1.1. 군사정부의 '대학정비'와 1부(주간) 폐지[편집]

우리 대학은 5·16 군사정부의 일방적이며 강압적인 교육정책으로 대학 설립 이래 가장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군사정부에 의한 1부의 폐지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취임한 제10대 문희석 문교부장관은 같은 해 6월 21일 기자회견을 갖고 대학정비방침을 표명하였다. 이어 문교부는 7월 22일 제1차 대학정비안을 발표하고,8월 16일 제2차 대학정비안을 내놓았다. 1961년 9월 7일 문교부는 각 대학의 실태상황을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공문에는 “추신: 본건 보고서는 종전에 문교부에 보고 한 것과는 관계없이 사실대로 보고하여 주심을 바람”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문교 제4916호). 이에 대하여 각 대학은 실태상황을 보고하였다. 이것은 문교부가 대학정비를 위한 기본 자료로써 수집한 것이 었다.

드디어 1961년 11월 18일 문교부는 사립대학 정비기준을 발표하며 대학정비를 본격적으로 결행하였다. 대학정비는 전국의 대학생 총수를 7만 명으로 책정하고 실시된 것이었다. 7만 명이라는 총수는 4년제 국공립대학(주간) 2만 명, 4년제 사립대학(주간) 3만 5천 명, 초급대 1만 명, 야간대 5천 명으로 산출한 숫자였다. 대학정비 결과 교수정년이 60세로 낮아지고 그 대신 명예교수제를 시행하였다.

대학의 경우에는 대학설치 기준령에 교수 1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부(주간)의 폐쇄,2부(야간)로만 존속시킨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제11대 김상협 문교부장관 명의로「대학 재정비」라는 제목하에 공문으로 1962년 2월 9일 대학에 보내왔다.

단국대학에 책정된 2부대학 680명 정원은 대학정비 기준으로 보면 야간대학 5만 명 가운데 드는 것이 었다. 결국 개교 16년을 굳건히 지켜온 우리 대학은 문교당국의 공문 한 장으로 1부 대학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근로학생을 위한 한 개의 2부대학으로만 그 존속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실로「대학재정비」의 공문이 우리 대학에 던져준 충격은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단국대학은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사상적 혼란으로 국가의 안위를 근심치 않을 수 없었던 시기에 거시적 안목으로 민족의 내일을 통찰하고 사학설립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1947년에 설립되었다. 그 사이 수많은 난관을 겪으면서도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약 5천 명의 졸업생을 사회에 배출하였으며, 교육 시설도 설립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충실해졌고, 기본재산도 우리나라 사립대학 중에서는 수위를 차지할 만큼 확충되었다. 더구나 그동안 외적 변동으로 말미암아 치른 수많은 진통을 무난히 극복하고 양적·질적 발전을 꾸준히 이루어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군사정부의 급진적인 문교정책은 그동안 장족의 발전을 이룩해 온 단국대학을 일대 암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결과적으로 단국대학은 개교 16년 이래의 최대 위축기를 맞이하였다. 교육면에서, 경영면에서, 그리고 학생·교직원의 의욕면에서 일대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1962년 3월 12일 문교부는 각 대학에 공문을 띄워 폐지되는 대학 및 학과의 재학생에 대한 전과 및 전·편·입학을 같은 해 4월 10일까지 완료하도록 시달하였다. 이때 폐지된 1부에 재학 중이던 학생과 교원 수는 학생 총 816명에 교원 38명이었다.

그러나 단국대학은 문교부 당국의 전•편입 시달에도 불구하고 적자경영을 무릅쓴 채 폐지된 1부의 잔류생을 위한 정상수업을 지속하였다. 그 이유는 대학에서 1년 이상 학습한 학생이 타교로 전출함으로써 입게 될 교과과정의 불연속 등에서 일어나는 수업상의 피해, 대학의 광범한 장학제도와 저렴한 등록금 혜택을 받아온 학생들이 타교로 전출함으로써 입게 될 경제적 피해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또 단국대학에서 창학 이래의 주류를 이루어 온 1부의 전통을 결코 쉽사리 버릴 수 없었고, 이것이 1부 부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대학은 대학설치기준령에 의한 대학정비작업에서 1부 폐쇄조치를 당하여 가장 암담한 시기에 들어섰 다. 1962년도에는 1부의 폐쇄로 인해 순전한 2부의 신입생 모집만이 있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저조하였다. 3차 모집에도 불구하고 상학과와 화공학과를 제외한 다른 학과는 정원에 미달하였다. 이렇듯 1962년도에 단국대학은 정원미달의 2부를 이끌고 간신히 명맥을 잇게 되었으므로 지난날의 성대하였던 모습이 오히려 무색하게 되어 버렸다.

이 무렵 비록 제도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1962년 2월 19일에 2부 대학의 한남동 이전으로 오랫동안 정들었던 신당동 교사에서 한남동 교사로의 이전을 완료하게 되었다. 한편 대학정비에 따라 2부는 종전의 6개 학과에서 8개 학과로 증설되었다. 이전한 2부대학은 한남동 교사의 법정학관을 사용하였고, 사무실은 동 학관의 2층에 자리하였다. 이로써 우리 대학은 대학 초기의 희비 얽힌 신당동 교사에서 완전 철수함으로써 옛 교사를 폐쇄하게 되었다.

3.3.2. 제2절 대학의 자활 의지[편집]



3.3.2.1. 장충식 교수의 부학장 취임과 1부(주간)의 부활[편집]

1962년 1부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잔류를 희망하는 일부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뒤늦게 타 대학으로의 전학을 희망하는 사례가 있었다. 1962년 9월 신학기를 맞아 김용진 학장서리는 "본 대학으로서는 현재 학생들이 취업할 때까지는 학생들을 그대로 계속 교육하고 또 재단으로서도 1부를 종전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고 있는 실정이니 학생들은 왜곡된 풍문에 동요되지 않도록 바란다”는 담화를 『단대신문』(1962년 9월 11일자)에 발표하였다.

1963년 6월 25일 그 동안 공석 중이던 부학장(학부 및 초급대)에 장충식 교수가 취임하고 도서관장도 겸임하였다. 당시 초미의 급무가 1부의 부활이었다. 이것은 참다운 의미의 대학의 아카데미즘을 구현하는 필수적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국대학의 1부 폐지결정 과정에는 납득할 수 없었던 당국의 조처를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과제였다.

1963년 9월 25일 박정숙 재단이사장과 김용진 학장의 명의로 1부의 부활과 대학원 설치에 관한 진정서를 군사정부 당국에 제출하였다. 이에 따르면 당초 군사정부가 교지·교사·교원·운동장·도서의 5종목으로 분류하여 재평가한 학교 시설능력이 학생 7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대로 1부 4년제 단과 대학으로 존치하게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대학의 경우에는 단지 교원 1명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 시설능력이 학생 699명으로 평가되었고 바로 그 1명 부족으로 말미암아 2부 대학으로 격하되었던 것이다.

이는 시설 능력의 산출에 있어서 중대한 착오였다. 즉 대학정비 당시 문교부는 재평가의 기준을 대한민 국 법령인 대통령령 제1063호「대학설치기준령」에 의하였으나, 실제 대학에 적용한 계산방식은 이 법령에 어긋난 것이었다. 위의 법령에 따라 정당한 계수가 산출되었더라면 1부 전체의 폐지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문교부의 대학정비당국 양모 소령으로부터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에 다만 우리 대학의 1부가 폐지된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받았을 뿐이었다. 이른바 대학정비는 정비시행세칙의 공개나 당사자 측에서 이의를 제청할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처리되었던 것이다. 또 그 주관기관인 문교부가 단 1명의 교수 부족에 대해 얼마든지 보완시킬 수 있는 사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획일적이고 기계적으로 처리해 버렸다는 점에서 행정상의 미숙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와 같은 사실을 대학정비 단행 몇 개월 후에야 알게 된 대학 재단에서 는 관계 요로에 시정을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은 그 요청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시정을 통보해 주지 않고 시일만 보내고 있었다. 이에 단국대학에서는 자세한 전후 사정과 대학의 실정을 들어서 장문의 진정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1963년 12월 16일 문교부는「대학운영 정상화 방침」에 따라 다시 심사하여 1부 학과의 부활을 인가하였다. 그리고 1964년 2월 10일 문교부가 4년제 정규대학 1부의 부활을 정식으로 인가함에 따라 1964학년도에 1, 2부 입학생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이로써 대학정비의 풍파가 단국대학에 미친 파동은 만 2년 만에 끝났다. 2부의 모집정원은 그 뒤에도 거듭 재조정되었고, 1965년 12월 17일 학칙변경인가에 따라 대폭적인 축소 조정이 있었다.

한동안 휩쓸고 지나간 대학정비의 파동은 비록 그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안일한 운영과 타성을 벗어나지 못한 구태의연한 한국 교육계에 자극제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단국대학도 그 기간 동안 갖은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는 가운데 자성과 전통 확인의 소중한 경험을 가질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이것을 밑거름으로 종합대학교로서의 웅비도 가능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1부의 폐지는 전대미문의 위기였지만 기회의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4. 제3편 종합대학교 시대의 개막[편집]



4.1. 제1장 종합대학교 승격과 중재 장충식[편집]



4.1.1. 제1절 시위와 혼돈 속에서도 변화하는 대학[편집]



4.1.1.1. 범정 장형 선생의 영면[편집]

1964년 12월 30일에는 단국대학 설립자이자 재단 이사장인 범정 장형 선생이 내수동 자택에서 향년 76세로 영면하였다. 장례는 1965년 1월 3일 단국대학 및 단국중학교·단국공업고등학교 학교장으로 엄수되었다. 이날 아침 9시 내수동 자택을 떠난 영구는 세종로와 종로, 장충동을 거쳐 오후 1시 한남동 교사에 마련된 영결식장에 안치되었다.

교직원과 학생을 비롯하여 각계 인사가 참석한 영결식에서 김용진 장례위원장, 독립운동가 이갑성, 이장섭 동창회장, 김숙현 이사, 김기석 전학장, 이영복 학생회장이 각각 조사를 하여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고인의 유해는 대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남동 교사 구내 본관 뒷산 중턱에 자좌오향으로 안장되었다(1967년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하면서 1975년 2월부터 묘소의 개수·정화 공사를 펴 9월 19일 추모비를 세우게 되었고 2007년 서울에서 죽전캠퍼스로 학교를 이전하면서 석주선기념박물관 뒷산의 정상에 이장함).

4.1.2. 제2절 중재의 종합대학교 승격 추진과 결실[편집]



4.1.2.1. '신념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편집]

해방 후 고난을 이겨내면서도 단국대학은 오직 민족자본에 의하여 꾸준히 발전해 왔다. 그러나 다른 대학은 학생을 증원하면서 종합대학교로 발전했는데 단국대학은 단과대학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여러 가지 교내외적인 여건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장으로 취임한 직후, 중재 장충식은 재학생들은 물론 졸업생들에게까지 전 단국인이 열망하는 종합대학교로의 승격 추진을 결심하였다.

장충식 학장은 신념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릴 것이라는 소신을 바탕으로 종합대학교 승격을 위해서 각 방면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종합대학교 승격안이 진행되기에는 당시 교내에 여러 가지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서 애로가 많았다. 첫째, 30대의 젊은 학장이었기 때문에 과연 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학내인들의 의구심이 많았다. 둘째, 이사진의 협조를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의 소극적 태도는 종합대학교가 될 수 있는 제반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들어 협조하지 않았다. 셋째, 문교당국의 불신도 한몫 하였다. 그들도 역시 단국대학이 종합대학교로서의 여건이 구비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취임 며칠 후인 11월 3일 강순원 이사를 만나 종합대학교 추진을 위한 이사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에 박정숙 이사장이 주재하는 간담회 형식의 이사회가 열렸고, 장 학장의 열의에 감복한 이사장은 흔쾌히 종합대학교 승격 추진사업을 승낙하였다.

일단 이사회의 승인을 얻은 장충식 학장은 문교부장관(문홍주)을 만나 이 뜻을 전하면서 승격에 따른 제반 서류 작성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장관은 이러한 장 학장의 뜻을 한 마디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 해 종합대학교 승격한 우석대학[28] 문제가 있고, 둘째는 대구대학의 종합대학교 승격을 거부하였다는 이유였다. 전자는 우석대학과 함께 서울에서 두 대학씩이나 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킬 수 없다는 것이며, 후자는 대구대학이 모 국회의원을 통해 오랫동안 승격을 추진하여 왔으나 결국 거절하였다. 이런 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단국대학을 승격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충식 학장은 이에 대하여 "여건이 갖추어지면 두 대학이 아니라 더 많은 대학이라도 승격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같은 장 학장의 강경한 자세에 장관은 "그러면 다른 단과대학을 하나 흡수 통합하면 고려하겠다"는 대안을 내어 놓았다. 이번에는 장 학장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종합대학교안이 벽에 부딪치자 장 학장은 이사진과 의논하고 마침내 청와대에 청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장 학장은 당시 대통령 비서관이었던 권상하를 만나러 청와대로 갔다. 장 학장은 권 비서관에게 준비해 간 종합대학교에 필요한 자료를 제시하며 우리 대학이 종합대학교가 되어야 할 여러 가지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권 비서관은 대화 내용을 옆에 있는 속기사에게 기록시켰다. 당시 기록된 대화를 살펴보면, 장 학장은 "우리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광활한 터전을 마련하겠다는데 항상 다 같은 대학이면서도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개탄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권 비서관과의 면담으로 장 학장의 청원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알려졌고, 대통령은 즉시 문교부장관과 국회 문공위원장이었던 이돈해 의원을 불러 "조건만 갖추어지면 단국대학교도 종합대학교로 승격시켜 주어야 한다"고 직접 지시하였다. 이에 거절하던 문교부장관이 장 학장을 직접 찾게 되었고, 승격에 대한 사무적인 절차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차관회의에서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이 안건과 관련이 없던 '모' 장관의 반대에 다시 부딪쳐 버렸다. 이 모 장관을 설득하기 위하여 장 학장이 직접 찾아가도 그는 면회조차 해주지 않았고, 그 사이 승격안은 국무회의에서 2차례나 보류되었다. 만약 3차에서도 보류되면 아예 이 안은 폐기되고, 이제까지 젊은 혈기와 신념으로 동분서주하였던 장 학장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즈음에는 이미 각 대학의 정원이 조정되었을 때이며 시기적으로도 사실상 늦은 시점이었다. 때문에 장 학장은 3차 국무회의만은 넘기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급한 마음에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을 찾아가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다행히 채택되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해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렸던 12월 30일의 안건이 단국대학에 대한 단독안건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렇게 반대하던 모 장관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해당부서 차관이 대신 참석하여 모 장관과 짠 듯 일관되게 이 문제를 반대하였다. 이 때 무임소장관으로 있던 김원태가 "자기 소관도 아닌데 차관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일침을 놓고 마침내 각의서를 통과시켰다. 한편, 모 장관이 그렇게 단국대학의 승격을 반대한 이유는 알고 보면 좀 황당하였다. 그가 모 대학의 증과·증원을 문교부장관에게 부탁하였다가 거부되자 장관에 대한 불만 표출을 엉뚱하게도 단국대학의 종합대학교 승격 문제에 연결시켜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파일: 종합대학 승격 기념 현판식.jpg
종합대학 승격 기념 현판식(1967)


4.1.2.2. 종합대학 승격인가 내용과 절차[편집]

1967년 2월 10일 단국대학 역사상 또 하나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대학이 창립된 지 20여 년 동안의 숙원이었던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쁨은 취임 이후 약 2개월에 걸쳐 굳건한 의지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해 낸 장 학장의 개가였다. 여기에 이사진과 동창, 재학생들의 열망과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무회의로부터 종합대학교 승격이 허락된 이틀 후에 맞게 된1967년 새해 아침, 장충식 학장은 새해 소감에서 "해방 후 최초의 민족대학이란 자부심과 설립자인 혜당과 범정의 창학 정신을 이어받아 종합대학교로의 운영에 이바지할 것"을 피력하였다. 이날 종합대학교 승격이 성사되도록 장 학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던 박정숙 이사장도 연두사에서 "앞으로 종합대학교로서의 내실을 기하고 헌신적으로 이끌어 나가겠다"고 소신을 밝혔다.

1967년 3월 13일 단국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장충식이 취임하였다. 장충식 총장은 취임식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지금까지의 행적과 앞으로의 방향을 뚜렷하게 판단하는 것이 전환기에 가져야 할 바른 태도라고 봅니다. 본 대학은 지금까지 발전을 위한 길고 견디기 어려운 준비를 지내왔으며 지금의 전환점을 시점으로 하여 비약적 발전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 중대한 출발점에서 관계자 여러분의 뜨거운 격려와 절대적인 협조 없이는 총장이 맡은 직분을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동안 누적되어 온 많은 일이 있습니다. 교수와 직원들을 위한 근본적인 대우문제, 대학의 질적 향상, 교사와 부속 연구실·실험실 등의 확충, 그리고 학생들을 위한 연구·후생·복지시설, 이외 같이 신설하고 개선해야 할 일들을 앞으로 관계자와 연구 검토하여 가급적 최단 시일 내에 완수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제들은 본인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근시안적인 안목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 장충식, 『단국대학교 60년사』 상, 163~164쪽.


종합대학 승격 후에 대학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교명을 바꾸자는 주장이 있었다. '한남'[29], '남강(南江)', '남강(南崗)' 등 구체적인 이름까지 제시하면서 논의를 하려 하였다. 장충식 총장은 창설 당시의 이념 등 깊은 뜻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온 전통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교명을 고수하면서 내실을 기함으로 대학발전을 계속하자는 뜻으로 설득하여 결국 '단국대학교'로 교명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4.2. 제2장 종합대학교 교육체제 및 시설 개편[편집]



4.2.1. 제1절 교육 및 연구 관련 건물의 신축[편집]



4.2.1.1. 교육 및 연구 관련 건물의 신축[편집]

종합대학교로 승격되기 이전의 중요 건물은 본부·문학관·이공학관·법정학관·도서관의 다섯개뿐이어서 종합대학교 규모로서는 많이 부족했다. 이처럼 빈약한 교육시설의 확충을 위하여 박정숙 이사장을 비롯한 여러 이사들과 장충식 총장은 비장한 각오로 시설확충 계획을 세우고 건설을 촉진해 나갔다. 이러한 의욕적인 건설의 추진은 종합대학교가 되고 난 지 몇 년 사이에 학교의 면모를 확연히 바꾸어 놓았다.

첫째, 28개 학과 가운데 유일하게 여학생만 모집하는 학과가 가정학과였다. 따라서 종합대학교 승격과 더불어 여학생을 위한 가정학관의 착공을 서두르게 되었다. 1967년 7월 11월에 착공하여 그 해 12월 27일에 준공을 보게 되었고 내부 시설을 갖추어 1968년 3월부터 개관하였다.

둘째, 1970년 9월 28일 종래의 '동양문제연구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다시 개편 발족된 '동양학연구소'는 1971년 국어국문학계에 원로학자인 일석 이희승 박사를 제2대 소장으로 초빙했다. 학계에 굴지의 업적을 쌓은 원로학자를 초빙하면서 연구를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연구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시설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학교 당국에서는 1975년 6월 3일 중앙도서관 서편에 잇대어 8층 첨탑형의 연구소 건물을 착공하여 12월 30일에 준공 개관하였다. 동양학연구소는 3층까지 사용하고 5층 이상은 교수들의 연구실로 활용되어 일명 '교수회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장 총장은 이 건물을 이희승 박사의 호를 따 '일석기념관'이라 명하였다.

셋째, 공업입국이란 시대적인 요구에 의하여 각 대학에는 공대들이 신설되었는데 우리 대학교도 공과대학 인가를 받아 공학 교육을 확대하였다. 그에 따른 시설의 필요에 의해 공학대학관을 1970년 12월 10일에 완공하였다. 공과대학관의 준공에 따라 종래의 이공학관은 상경학관으로 독립하였다.

넷째, 학생의 수가 더욱 늘어나게 됨으로써 강의실 부족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학교 당국은 처음 교육학부 및 단과대학에 소속되어 있던 각 교육학관을 착공하여 1973년 7월 9일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 28일 사범대학이 인가됨으로써 사범학관으로 개칭하였다.

다섯째, 1976년 9월 20일 개관을 보게 된 학생회관은 설립자인 혜당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혜당기념관'으로 명명하였다. 이렇게 건물에 특수한 이름을 붙여 시설의 확충을 계속하였다. 체육관은 범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범정기념관'으로 명명하였다고 민속박물관은 평생을 민속학연구에 몸 바쳐 온 석주선 교수를 기념하기 위해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으로 하였다. 석주선 교수는 동덕여대에서 복식관계의 민속자료 3천여 점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이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보냈다. 정년 후 우리 대학교의 대학원 교수로 부임함과 동시에 장충식 총장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이들 유물을 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석 교수는 이 민속자료를 기증하면서 "오직 학문적, 역사적 자료로 후학들의 복식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심정을 피력하였다.

4.2.1.2. 교육 관련 시설[편집]

종합대학교 승격 이후 필요한 시설 하나하나 확충해 나가면서 기왕의 건물에 대한 시설도 과감히 보완하여 강의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1973년도부터 기존 건물의 모든 목재 유리창을 철재로 바꾸어 놓는 한편, 각 건물에 최신식 화장실을 설비하였고, 각 70명 이상을 수용하는 강의실에 대해서는 철저한 방음시설을 설치하여 공부하는 대학시설이 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지로 남아 있거나 이미 조성되어 있는 교사 주변에는 각종 나무들을 심고 꽃을 가꾸며 학생들이 강의 여가에 쉴 수 있는 휴게시설을 만들어 전체적으로 캠퍼스를 아담하고 조용한 학문의 전당이 되도록 하였다.

교육시설의 확장도 이루어졌다. 약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스탠드를 갖춘 약 1,907㎡(577평)의 노천극장을 1972년 8월 31일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1972년에 음악교육과가 설치되면서 공과대학 7층에 음악 연주실을 마련하였다. 무대와 객석 그리고 준비실 등을 갖춘 330㎡(100평)의 제1연주실은 객석 250석에 완전 방음장치가 설치되어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건물은 각종 행사를 위한 소강당으로도 활용되어 학생회관이 건립된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 종합대학교에 걸맞은 중앙도서관 시설의 확장도 괄목할만한 발전이었다. 1972년 방학과 더불어 시설확충에 착공하여 개학과 함께 9월 중순 개관한 이곳은 도서관 이용자들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난방시설과 환기·소음 방지 시설도 갖추었다. 또 기존 도서관의 4층에 있던 박물관을 1층으로 확장·정리하여 이전하고 2·3·4층에 각 열람실을 새로 마련하여 명실상부한 대학중앙도서관의 면모를 갖추었다. 대학생들의 정서함양과 교양교육을 위한 단대방송국은 1973년 3월 공대 3층에서 8층으로 이전하면서 약 132㎡(40평)의 스튜디오 및 부대시설을 완비하고 방송에 필요한 기자재도 거의 완비하였다. 이때부터 대학 방송국다운 방송시설로 발전하였다. 1973년 8월 9일에는 범정 묘소 동쪽 편 숲에 전 2면의 테니스 코트를 처음으로 마련하여 개장하였다. 부대시설로 초보자의 연습을 위한 백보드가 마련되었고 탈의장 및 샤워실 등을 갖추었다.

시설 확충 부분에서 특별하게 주목해볼 부분도 있었다. 한남동의 대학 교지는 약 16만 5,290여㎡(5만여 평)으로 대학이 신당동에서 옮겨 올 당시에는 비교적 충분하였다. 그러나 종합대학교로 학교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 교지만으로는 학교시설물을 건설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쳤다. 이에 학교 당국에서는 각 방면으로 제2교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71년 5월 1일 당시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의 소유로 되어 있던 '성동구 내곡동 산 13의 234번지'의 780,165㎡(23만 6천 평)의 부지를 불하 매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교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그 해 7월 21일에는 문교부에 교육용 기본재산 증자보고를 마치고 영동캠퍼스(내곡동) 건립을 위한 마스터플랜의 설계에 들어갔다.

그 해 12월 11일 우리 대학교는 장기 종합개발계획에 착수하기 시작하였고, 진행을 담당할 종합기구를 설치하였다. 구성원들은 새로운 발전계획에 큰 희망을 가지고 기뻐했다. 당시 박정숙 이사장과 아시달의 합의에 의하여 장충식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단국대학교 종합개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종합개발위원회는 내곡동 교지에 대한 마스터플랜뿐만 아니라 한남동에 있는 교지도 내곡동으로 이전 이후 재개발계획을 동시에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르면 당시 서울캠퍼스(한남동)는 기존 캠퍼스에 사범학관을 신축하여 문과대·사범계·대학원 중심의 캠퍼스, 신 영동캠퍼스는 이학·공학·체육·예술계 중심으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신 영동캠퍼스에는 대학 본관, 중앙도서관, 이공계 전용 교사동, 미술관, 야구장 및 종합운동장, 기숙사 등 12만 8,925㎡(3만 9천여 평)에 이르는 교사동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이 마스터플랜에 투입될 공사비는 78억 9천여 만원으로 예상하였으며 5년 동안 추진하고, 이후 2차로 추가 마스터플랜을 추진한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또한 막대한 공사비 조달을 위해 장기적으로는 한남동 소재 서울캠퍼스를 매각하는 방안도 고려하였다.

파일: 영동캠퍼스 마스터플랜.jpg
영동캠퍼스(내곡동) 마스터플랜

이와 같이 대학교의 종합개발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1973년 4월에 가서는 1차 시안이 완성되고 검토에까지 들어갔다. 이 사안에 의하면 서울캠퍼스는 신축과 재배치 등을 계속 추진하도록, 내곡동 영동캠퍼스는 제1시안을 놓고 학사와 건축의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사안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종합대학교로서의 비약적인 도약을 위한, 대단국의 꿈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이 지역이 그린벨트 지역으로 설정됨으로써 모든 준비는 계획에만 그치고 말았다.


5. 제4편 천안캠퍼스 설립과 성장의 내실화[편집]



5.1. 제1장 천안캠퍼스의 설립[편집]



5.1.1. 제1절 지역거점대학의 필요성[편집]



5.1.1.1. 장곡마을 개발사업과 새마을운동[편집]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산업화로 경제발전이 가속화되었지만 농촌 부문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국가안보에 역점을 두었던 박대통령은 농촌의 근대화가 국가안보와 직결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의지가 새마을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박 대통령은 전국 종합대학교 총장 25명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대학에서도 새마을운동이 일어난다면 그 파급 효과는 더욱 증대되지 않겠는가?"라면서 대학의 새마을 사업 참여를 반겼다.[30] 이때 장충식 총장은 "학계의 원로들께서 여로모로 입장이 있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제가 있는 단국대학에서 먼저 새마을운동에 앞장서 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대통령과 대학 총장들 앞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해 대학의 사회봉사 의무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장충식 총장은 1972년 초 김유혁 교수에게 새마을운동을 전개할 방법을 연구하게 하였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행정 지도를 보고 주민 소득이 가장 낮은 곳을 찾았는데, 그 결과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즉 장곡사가 있는 장곡마을을 지목하였다. 장곡마을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산나물을 캐다가 시골 장에 내다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그마저 중간상인들의 농락으로 제값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교직원과 일부 학부형들이 나서서 장곡마을 농민들이 산에서 캐온 산나물 전략을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거래되는 최고가격으로 구입하였다. 그리고 구매한 전량은 교직원들에게 동대문시장의 최저가격으로 분배하고 그 차액을 학교가 부담하였다. 이와 같은 이중 가격제도는 장곡마을 주민들의 새마을운동 참여 의욕을 북돋우는 계기가 되었다.

첫 단추를 잘 끼운 대학교에서는 장곡마을에 매 호당 새끼돼지 한 마리씩을 분양하여 키우도록 하는 한편, 도 당국으로부터 하천 제방 보수공사 비용을 배정받아 모든 주민들에게 취로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 사업을 통해 얻은 노임 소득을 1가구 1통장으로 관리하도록 함으로써 오지 마을에 전기를 끌어들이는 사업에 큰 힘이 되게 하였다. 또 농민들에게 품종 개량 사업을 지도하여 농산물 증산이 이루어지고 따라서 소득도 늘어났다. 그리고 겨울철 농한기에 화투나 음주로 허송세월하는 주민들에게 가마니를 짜게 하여 전량을 사들이로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재단이 운영한 서산 염전에 가마니가 필요한 데 따른 것이다.

우리 대학교에서는 장곡마을 주민들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마을의 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먼저 청양군에서 수백 년 동안 방치한 하천 부지를 구입하여 시범 농장을 조성하기로 하고, 1973년 7월에 청양의 토지 641,937㎡(19만 4,186평)을 매입하였다. 당시 안성농업 전문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김봉구 교수를 교양학부 소속 교수로 초빙해 청양으로 파견하여 시범 농장 조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김교수는 일본 아오모리 지방에서 직접 '후지 품종'의 묘목을 수입해서 왜성 사과 과수원을 조성하였다. 당시 서울에 있는 농대 교수들과 현지 농민들은 이곳에는 사과나무가 자랄 수 없다고 비판하였으나, 몇 년이 지나자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한 조생종 후지 사과가 탐스럽게 열렸다. 이와 같이 여러 악조건 속에서 사과 농장이 성공한 것을 계기로 청양군 전체에 사과 등의 고수익 작물 재배 열기가 일어났다.

과수 재배를 희망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목적으로, 청양 농장에 농업 기술을 가르칠 기간농민학교도 개교하였다. 학교는 4개의 강의실과 별도로 40명을 수용할 수 이는 기숙사를 갖추었고, 교육비는 모두 무료였다. 박 대통령은 우리 대학교의 노력에 큰 관심과 호의를 보여 두 차례에 걸쳐 1천만 원이 넘는 하사금과 함께 트럭을 선사하였고, 정부에서는 유기춘 문교부 장관을 비롯해 민유동 충청남도지사, 장영순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그리고 많은 정부 기관의 간부들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장곡마을 개발사업의 마지막 단계는 농촌 시범 부락을 형성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농토가 없는 농민들에게는 희망에 따라 단국대 농장과 기간농민양성소에 취업시켜 직장을 마련해 주었고, 집 없는 농민들을 위해 약 1만 6,529(5천 평)의 토지를 사서 집을 지어 주었다. 주택 배치 형태를 말발굼 모양(마제형)으로 설계하여 입주 주민들의 협동 의식과 공동체 생활이 가능하도록 히였다. 마을 이름은 희망적 미래를 개척한다는 의미를 담아 '청양 비전 마을'이라 하였고, 주택 건설에 필요한 자금은 내무부에서 융자를 받았다. 이를 각 농가별로 분양해 주고 땅값과 집값은 농장에 취업해서 받은 월급으로 장기 분할해서 갚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대학교가 장곡마을에서 펼친 농민들의 생활환경 개선과 소득증대 사업이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였다.

5.1.1.2. 장충식 총장의 천안분교 구상[편집]

장충식 총장은 장곡마을 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이곳을 50여회 이상 방문하였다. 당시에는 도로 포장이 천안까지만 되어 있었고, 천안에서 청양까지는 자갈길로 이어진 비포장 도로였다. 장 총장은 이 길을 왕복하면서 서울로 집중되는 교육과 경제력이 다시 지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나라가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장 총장은 장곡마을 개발사업의 성공을 통해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지금이야말로 우리 대학교가 더 큰 일에 도전하여 교세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국가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장 총장의 생각은 지역거점캠퍼스 신설로 구체화 되었다.

지방분교 장소로 처음에는 홍성군이 물망에 올랐다.[31] 그러나 장 총장은 홍성이 경부고속도로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 학생들의 통학이 너무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여러 지역을 물색한 끝에 천안시가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곳에 대학을 세우면 천안으로서는 산업도시로 크게 발전할 것이고 교육도시로서도 큰 몫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장충식 총장은 처음부터 천안분교의 부지로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안서호(천호지) 뒤쪽의 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곳은 앞이 호수여서 경치도 좋거니와 남향의 야산과 평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공부하고 연구하기 좋은 입지였다. 1976년에 장 총장은 일면식도 없는 조대희 천안시장을 찾아가 천안에 대학을 세우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 천안시에서는 우리 대학교에서 지목한 안서호반에 관광호텔을 세워 천안을 관광도시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장 총장은 또 다시 조대희 시장을 찾아가 "이 아름다운 땅에 호텔을 세우기보다 젊은이들이 호연지기를 기르고 공부하는 캠퍼스를 세우도록 도와달라"고 설득하였다. 결국 이와 같은 장 총장의 간절한 설득에 조 시장도 동의하였고, 곧이어 부지 매입에 착수하였다.

사실 안서호(천호지) 뒤편 야산 일대와 농토 66만 1,157㎡(20여만 평)에는 종중 땅이 있는가하면 서울에 거주하는 투기꾼 소유의 땅도 있었고, 일부는 조상 대대로 이어온 현지인의 땅이라 어느 누구도 대학에서 땅을 사자는 데 만만하게 응할 사람이 없었다. 장 총장은 지역 사회의 협력과 호의를 얻어서 부지 매입의 추진력을 확보하기로 결심하고, 충청남도 논산이 고향인 여운환 사무처장을 통하여 당시 천안시 번영회장이었던 한기수, 농협조합장이었던 권혁철 등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그 결과 '번영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 유지들이 대학 입장을 대신해서 소유자들을 설득하여 학교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천안분교 부지로 천안시 안서동 산 26번지의 임야 약 19만 8,347㎡(6만 평)이 선정되었다. 이 교지의 매입은 1976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에 걸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장충식 총장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부지를 마련한 뒤, 김유혁 교수를 중심으로 「천안캠퍼스 조성 10년 장기 계획」을 수립하여 문교부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교부에서는 천안에 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정원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결재를 미루었다. 이에 장 총장은 문교부 차관을 찾아가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 대학교가 서울에 있는데 청양까지 가서 새마을운동을 할 때 말리지 않았는가?"라고 되물었다. 결국 차관은 반대 의사를 철회하고 대학 설립에 동의하였고, 이후 행정적인 일도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5.1.2. 제2절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의 탄생[편집]



5.1.2.1. '단국대학교 천안분교 산업대학'으로 출발[편집]

파일: 천안캠퍼스 전경(1978).jpg
천안캠퍼스 전경(1978)

1977년 4월 11일 충남 천안시 안서동에 제2캠퍼스로 산업대학을 설립하기로 하고 장충식 총장과 천안 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로 단국대학교 천안분교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추진위원회에는 학사계획분과위원회, 건설본부, 그리고 종합설계분과위원회를 두고 본격적으로 학사 및 건설에 들어갔다. 건설본부에서는 8월 13일부터 캠퍼스 신축 착공과 함께 교지 정지 작업에 들어갔으며, 9월부터는 설계분과위원호에서 완성한 설계도에 의하여 1978년 3월에 산업대학 개교식을 하고 산업학관을 준공하여 그해부터 개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또 학사계획분과위원회에서는 박무성 위원장을 중심으로 향후 10년간의 학사발전계획을 단기와 장기로 분석, 성안하였다. 이러한 학사설계안에 따라 1차년도인 1978학년도에는 산업대학·농과대학 및 공과대학 소속 학과 중에서 우선순위에 의한 학과의 복합적인 설치를 문교부에 요청하였다. 천안캠퍼스는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천안분교 산업대학'으로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경영학과·농학과·전자공학과·건축공학과·토목공학과 등 5개 학과 35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여 3월 13일 개교식을 갖고 정식 출범하였다.

1979학년도에는 영여엉문·불어불문·독어독문·무역·회계·응용물리 등 6개 학과가 신설되었고, 기존학과는 증원이 인가되어 총 890명의 정원으로 늘어났다. 이후 1981년 3월 1일에 인문학부·사회과학부·이공학부·농학부·치의학부 5개 학부를 설치하였고, 1982년 10월 5일부터 인문과학대학·사회과학대학·이공대학·치과대학 등 4개의 단과대학을 설치함으로써 명실공히 지방 캠퍼스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농과대학은 단과대학으로 인가되지 않아 해당 계열의 재학생들이 불만이 많았는데, 이에 따라 문교부로부터 1983년 9월 8일자로 농과대학·예술대학 인가를 받아 1984학년도부터 단과대학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어 1987학년도에는 체육대학이 인가를 얻어 개설하게 됨으로써 천안캠퍼스의 학생 수가 서울캠퍼스보다 많아지는 등 10년 동안 천안캠퍼스는 장족의 발전을 가져왔다.

5.1.2.2. 수도권대학 기능 확보[편집]

장기계획으로 추진된 천안캠퍼스 건설공사는 부지조성공사인 토목공사를 마친 후에 1978년 8월 일차적으로 건축 연면적 7,826㎡(약 2,400여 평)의 산업대학 교사를 4층 콘크리트 슬라브 건축양식으로 신축하였고, 이어 같은 해 9월 20일 대학 정규규격의 400m트랙 운동장을 완공하였다. 이는 총 1만 3,223여㎡(4천여 평)의 필드에 수용인원 2만 5천 명의 매머드운동장으로, 2차 공사를 통해 본부석 스탠드와 화장실, 선수대기실 공사까지 완료하였다.

한편 1978년 5월말 우리 대학교에서 부담한 1,500만 원과 도·시 예산 3,500만 원이 투입되어, 노폭 11m, 포장 6m의 진입로 포장 공사가 임시 정문 앞까지 이루어졌다.

1979년 4월 1일 착공한 인문학관 건설공사는 1980년 2월 18일 완공되었다.[32] 그해 6월 중순에는 건평 727㎡(220평)에 400여 개의 좌석을 갖춘 학생식당이 1억 원의 경비를 들여 산업학관 앞 공터에 신축되었다. 또한 1980년 4월 5일 착공한 천안캠퍼스 기숙사가 총 수용인원 152명 규모로 1981학년도 신학기를 앞두고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6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천안시 신부동 234, 235번지의 대지 4,298여㎡(1,300여 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붉은 벽돌조 슬라브로 지어졌다. 이어 제1과학관이 착공 5개월여 만인 1981년 4월 29일에 개관되었는데, 이 건물은 총 공사비 16억 1,700여만 원이 투입되어 연건평 7,957㎡(2,407평), 지하 1층, 지상 4층의 붉은 벽돌의 슬라브로 지어졌다. 그 뒤 1982년 3월 5일 진입로 확장 공사가 임시 정문 수위실 전방 7000여m에 걸쳐 진행되었다. 11월 11일에는 진입로 조경공사가 250만원의 예산을 들여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8년생 목백합 150그루를 심는 조경공사는 같은 해 10월 26일부터 시작하여 보름만에 끝났다.

1984년 9월 17일 천안캠퍼스에 치과대학 교사 및 부속병원이 착공 1년 6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소요경비 약 83억 원을 투입하여 연건평 1만 694㎡(3,235평)에 지하 1층, 지상 5층의 철근콘크리트 라멘 구조로 지어졌다. 6월 20일 서독제 기자재 31대를 들여온 것을 시작으로 방학 중 나머지 기자재를 도입 완료하여 9월 28일 개관 및 개원하였다. 이어 1985년 3월 5일 기존의 학생식당과 그 주변부지 1만 8,842여㎡(5,700여 평)에 착공한 학생회관이 1986년 9월 3일에 완공되었다. 또한 1985년 6월 17일 이공대 토목과 부지에 착공한 농학관이 1986년 9월 3일 개관되었는데, 이 건물은 총 30여억 원의 예산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5층, 연건평 9,147(2,767평)의 최신식 내부시설을 갖춘 철근콘크리트 구조 건물로 되어있다. 이로써 천안캠퍼스는 수도권대학의 기능을 갖춘 국내 최초 지방캠퍼스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확보하게 되었다.

6. 제5편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 설립과 신캠퍼스 추진[편집]



6.1. 제1장 최덕수 열사 5.18 진상 규명 요구 분신[편집]


다른 대학들이 군부정권에 저항했던 민주열사들이 있듯, 단국대학교에도 이러한 민주열사가 있는데 바로 최덕수 열사이다.
최덕수 열사는 전북 정읍 출신의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법학과 학생으로, 1988년 5월 17일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교내에서 광주 영령 추모식에 나와 광주항쟁성명서를 낭독하고, 5월 18일 천안캠퍼스 시계탑 앞에서 군부정권에 5.18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이후 분신 9일만에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했다. 현재는 광주의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 현재도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와 천안캠퍼스 내에는 최덕수 열사를 기리는 비가 있다.

이 사건 이후로 천안캠퍼스 뿐만 아니라 당시 서울 한남캠퍼스에서도 최덕수 열사의 분신을 애도했으며, 서울캠퍼스 안에서 최덕수 열사의 노제가 치러졌다. 이후 단국대 서울캠 학생 수백 명이 열사의 분신에 분노하며 서울역까지 진군했다.

최덕수 열사 추모 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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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내에서 치러진 최덕수 열사 노제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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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수 열사의 분신 이후, 독재에 분노하며 서울역 앞에서 시위하는 단국대 서울캠 학생들 (1988)

최덕수 열사의 광주민중항쟁성명서 전문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겪은 지 8년여가 지난 현시점에서 아직도 진상은 규명되지 않은 채 허구적인 "말의 잔치"만이 넘쳐나는 현실이다. 5·18을 극소수 폭도들에 의한 난동이라고 선전하면서 진상을 호소(?)하던 정부 측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실시하겠다고 말하면서 오월 광주민중항쟁을 시민, 학생들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시인(?)하고 있다. 어떤 교포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은 몰라도 광주는 안다"라고 했듯이 광주민중 들의 뜨거웠던 항쟁은 이제 더 이상 광주만의 것이 아닌 전체 한민족의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세계인의 것이 되었으며, 제5공화국의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이었으며, 현재에도 가장 풀기 어려운 정치쟁점으로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80년 5월 광주, 조국의 장래와 민중의 인권과 생존권을 수호하려는 이 민족사의 전환기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역사적인 당위에 입각한 민족적 양심의 회복을 위한 반성과 자각의 시기이다. 둘째, 민주, 민권의 투쟁적 역량은 합의와 화해의 근거를 제시하며, 유신 잔재의 과감한 척결이 선행되어야 할 시기라는 점이다.이러한 이념을 가진 "민족 민주화 성회"는 15일부터 17일까지 연이어 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같은 두 가지 의미와 함께 불투명한 정국, 경제성장의 한계, 노동자의 연이은 농성, 자원민족주의를 내세운 냉엄한 국제 정세들을 예의주시하며, "지성적 결단" 과 "행동적 사고"로서 조국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젊은 양심세력인 대학인들의 일련의 움직임은 가벼운 낙관론을 부정하는 것이며, 역사의 오류를 재현할 수 없다는 애국충정에서 발로한 것이다.

이에 불구하고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를 내세운 전두환은 역사의 순리를 폭력과 학살로 대변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피의 현장을 "빛 고을" 광주로 잡았던 것이다. "빛 고을"이라 일컬어지던 광주가 하루 아침에 "핏 고을"로 변해 버렸으며,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라고 가르친 미제국주의는 만행을 묵인, 방조하는 단계를 넘어 동조한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가슴이 찢어졌다는 무수한 리버럴리스트의 나라 미국은, 어째서 80년 한반도의 광주학살에 동조한 것인가?

- 이러한 행위를 한 우방은 누구의 우방인가?

- 그것은 분명하다.

- 독재정권의 우방임이!!!

예속적 독점재벌과 폭력적 살인 군부정권과 외세, 이것은 지난 80년 광주민중 항쟁과 민주화투쟁을 통해 확인된 한국 현대사의 큰 장애물이다. 역사는 이것이 바로 잡혀야 할 시기에 바로 잡혀야 하며, 그 시기를 놓치면 빗나간 역사는 보다 더 큰 희생과 재물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일제의 압제로 인하여 자주적인 발전의 터전을 철저히 유린당한 이 땅에서 80 년 광주민중항쟁들이 보여주었던, 한반도에 존재하는 반동세력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깨달음과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반 역사적인 집단과 가차없이 싸워 서만이 이길 수 있다는 투쟁의 정신이 우리가 광주민중항쟁에서의 얻은 값진 교훈인 것이다.이제 80년 이후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먼저 가신 이들에게 크나큰 빛을 진 우리는, 뜨거운 투쟁의 마음으로 반동세력과의 계속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 광주항쟁 비리주범 노태우를 처단하자!

- 오월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 발동하라!

1988. 5. 18 최 덕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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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덕수 열사 국민장 전단지 (1988)


6.2. 제2장 의과대학 신설과 부속병원 설립[편집]


1967년 종합대학 승격 당시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공과대학 등 3개 단과대학, 17개 학과에 모집정원은 390명이었던 대학교는 의과대학 설립을 추진할 무렵인 1988년에는 서울과 천안에 캠퍼스를 설치하여 13개 단과대학, 85개 학과에 3,950명에 이르는 매머드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종합대학 승격 20년 만에 국내 유수의 학과 편제를 가진 거대 사학으로 급성장한 것이다. 대학의 양적 체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평가가 높아지면서 동문, 재학생들 사이에는 국내 사립대학의 선두에 서려면 의과대학이 필수적이라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특히 1979년 충청남도 유일의 치과대학을 개설한 데 이어 치과병원을 개원하여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의과대학 설치, 운영에 대한 대학 내적 자신감도 더해지고 있었다. 세간의 대학 평가 기준이 1960년대에는 '종합대학 인가 여부'였다면, 1990년대에는 '의과대학 부속병원 보유 여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의과대학은 '전국 최고의 인재'들이 경합하는 선망의 학과였다. 의과대학은 자연히 대학 입시의 합격선을 상승시키는 견인차였고,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수익성이 높아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이에 따라 대학들은 서로 의과대학을 설치하고 부속병원을 세우려는 경쟁을 벌였다.

인기가 높은 만큼 진입장벽도 높았다. 의과대학 설립인가를 받으려면 문교부의 승인만이 아니라 보건사회부의 합의가 있어야 하였다. 의사는 전문직으로 공급인원을 조절해야만 의료인의 품질 저하나 과당경쟁을 막을 수 있다는 명분이었다. 장벽은 높고, 통과할 문도 좁은 탓에 결국 의과대학 설립은 '대통령의 결심'이 전제되는 막중한 사업이 되고 말았다.

팽창하는 교세와 의과대학에 대한 단국인의 열망은 장충식 총장으로 하여금 치열한 물밑 경쟁에 뛰어들도록 하였다. 의과대학 설립인가 경쟁에서 우리 대학교가 유리한 디딤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장충식 총장은 국가적 과제였던 '88 서울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중추적 사업을 맡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대 등 국립대 의과대학들이 예산 절감과 의사인력 수급조정 등을 이유로 정원 감축을 결정하였다. 이때 전문가들의 지지, 그리고 그동안 전력을 다해 스포츠 외교, '88 서울올림픽 준비 사업에 참여해온 점을 앞세워 장충식 총장이 정부를 설득하였다. 이 같은 정책 조정의 흐름을 타고 노력한 결과, 1987년 10월 교육부는 국립대 의과대학 정원 70명을 줄이는 대신에 단국대, 아주대, 울산대에 의과대학 신설을 인가한다는 발표를 하였다.[33]

1989년 1월 12일에 '단국대학교의료원 설립 및 종합건설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서울대학교병원연구소와 공동으로 「병원건립계획 및 기본설계(안)」을 수립하였다. 설계 단계에서 김병량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부)의 은사인 일본 쓰쿠바대 다니무라 히데히코 교수가 지원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고베예술대학의 총장이자 일본 병원건축학회 회장에 재임하고 있던 요시다케 교수가 자신의 제자들과 팀을 이뤄 부속병원 설계를 무료로 해주었다. 설계안에 따라 병원동은 지하 2층, 지상 6층, 총 6만 5,673㎡의 규모를 갖게 되었다. 병원 건물은 수직형 고층건물이라는 관행을 따르기보다는 입원동과 진료동을 구분한 저층분산식 병동을 짓기로 하였다.[34]

병원 기획단계에서 신축 사업비 규모는 약 1,100억 원 정도였다. 병원 공사비가 600억, 의료장비 구입비가 500억이었다. 그 뒤 처음 기획단계보다 병원 시설의 규모와 수준을 높여 공사비도 800억원으로 증가하여 총 1400억원이 투입되게 된 것이다. 막대한 자금이 투자되어야 하겠지만, 대학당국은 강남구 내곡동에 있는 영동캠퍼스 부지 74만 4,480㎡(22만 5,600평)를 담보로 하고자 했다. 해당 부지는 본래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개발이 불가능했지만, 그린벨트는 주택건설만 금지하고 골프장이나 체육시설 등의 설치는 가능한 땅이었다. 해서 당시 부동산업계에서는 그 가치를 600억~800억으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단국대는 이를 은행에 담보로 맡겨 병원 공사비를 조달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해당 부지는 1990년 9월 노태우 정부 하에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부지로 214억에 강매되면서 담보가 무산되고 만다. 이러한 악재와 함께 더해진 것은 노태우 정부 하에서 시행됐던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분당, 일산에 신도시를 건설해 서울 인구를 분산한다는 계획을 가졌는데 이를 위해 분당 일산에 대량의 주택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주택 건설은 건설 기자재와 인건비를 폭등시켰고, 이는 단국대학교 부속병원 착공 4개월 전의 일이었다. 결국 이러한 일 때문에 병원 공사비는 더욱 치솟았으며, 완공일도 점점 지연되고 말았다. 노태우 정부에게 내곡동 부지를 빼앗긴 단국대는 사업비를 충당할 담보 자산이 없어졌고, 제1금융권은 대출을 중단했다. 이에 자본 융통을 위해 제2금융권의 고금리 대출에 의지하면서 재정구조가 급속도로 취약해졌다.[35] 당시 상황을 장충식 총장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울며 겨자 먹기란 이런 말인가. …(중략)… 최소한 의과대학병원 건립에 필요한 경비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가치로 여겼던 땅이 없어지고 병원 건설비의 4분의 1밖에는 충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앞길이 캄캄하였다. 우선 구 서울은행이 우리 대학교의 주거래 은행이었는데 병원 설립자금을 대출받으려면 추가 담보를 설정하라는 요구가 왔다. 담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필요한 돈을 어음할인으로 융통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우리 대학교 재단이 빚에 시달리기 시작한 가장 큰 타격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장충식, 『시대를 넘어 미래를 넘다』, 543쪽.


심지어 부속병원 건설은 김영삼 정부의 특별 감사 실시로 한 때 중단되기도 하였다. 교육부의 특별감사 결과, 그동안 제2금융권을 통한 자금 조달을 시정하라는 조치를 이행하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1993년 8월 중단된 공사는 시공사인 극동건설의 호의[36]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극동건설은 병원 설립 취지에 공감한다는 차원에서 공사를 재개하였고, 1994년 3월 31에 모든 공사를 마쳐 1994년 4월 29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준공 및 개원식을 가졌다.[37]

파일: 의과대학 병원 준공식(1994).jpg
의과대학 병원 준공식(1994)


7. 1990년대[편집]


1993년 7월 20일 교육부는 단국대에 대한 특별감사 실사를 발표하였다. 4년간 보존해야 할 입학관련 서류를 폐기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 입시 부정행위 조사를 앞세웠지만, 갑자기 재정 감사로 방향을 바꾸더니 교육부 승인 없는 대출을 이유로 장충식 총장과 혜당의 외손인 이용우 이사장을 해임시키고 관선이사를 파견하였다. 동시에 대학병원 신축 과정에서 생긴 776억원의 부채를 한 달만에 상환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 같은 조처의 배경으로 장충식 이사장은 14대 대선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 측과의 면담을 거절했다는 이유를 꼽았다.[38] 당시 특별감사 중 교육부 장관은 장충식 총장을 불러 "노태우 대통령의 300억 원이 단국대 어디에 숨겨져 있냐"고 따졌다고 한다. 학생들과 교수, 교직원, 동문들의 반발과 자구책 노력으로 1993년 10월 "단국대의 부채변재가 원활히 진행된다"는 평가를 받고 관선이사 파견 방침도 철회되었다. 이 특별감사로 인해 삼성으로의 대학 인수가 무산되기도 하였다. 엄삼탁 당시 안기부 기획조정실장, 이수빈(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비서실장 등 삼성 실무진이 단국의 재정 상황을 직접 조사했고 장충식 총장은 이건희 회장과 독대한 끝에 삼성의 학교 인수가 확정적이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삼성에게 압력을 넣었고 인수가 취소되었다.참고[39]

7.1. 수지캠퍼스 건설[편집]


대학당국은 1993년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 발표 하에 이뤄진 '대학설립준칙주의'로 인해 여러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자 대학 경쟁력 강화를 위해 새로운 대학 발전 동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당시 정부는 여러 대학들이 난립한 문제를 대학평가를 통한 차등지원으로 해결하고자 했는데, 이는 여러 대학들에게 대학평가 기준 충족을 강제하는 조처였다. 당시 단국대는 정부가 제시한 물리적 기준을 충족하기 어려웠는데, 서울캠퍼스의 부족한 교지는 법정기준 39.1%였고, 교사 면적은 법정기준 54.6%에 불과하였다. 또한 서울캠퍼스에 대한 법적 규제인 풍치지구 조성으로 4층 이상의 건물 신축이 불가능하게 되어 이공계가 발전하는 시대에 넓은 교육시설 확충하기 어려운 현실에 처해있었다. 1992년 10월 학교 법인은 처음에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천안캠퍼스와 통합을 결정하였다. 이에 1992년 10월 16일에 서울캠퍼스 이전계획서를 윤형섭 교육부 장관에게 제출하였고, 교육부는 1993년 4월 9일 단국대학교 이전계획을 승인하였다. 다만 천안캠퍼스와의 통합 안은 장충식 이사의 반대로 철회되고 1994년부터 수도권 인근에 신 캠퍼스 건설안이 채택되었다. 학교법인은 서울캠퍼스 매각대금을 2800억으로 잡고, 이 중 1000억 원으로 부채를 상환하며 신 캠퍼스 부지 매입비와 공사비를 1500억 원으로 추산해 나머지 300억원을 발전기금으로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 캠퍼스 부지 매입에 전력한 장충식 이사는 수도권 일대를 답사하다가 1994년 9월경 수지캠퍼스[40] 부지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일대 32만평을 소개받았다. 장충식 이사는 부지를 바라본 첫 인상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도시개발학을 전공한 김병량 교수를 대동하고 죽전에 있는 그 부지의 산 중턱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 안목으로는 이 이상 더 좋은 땅을 구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교통조건도 좋았다. 그 땅에서 경부고속도로가 차로 10분 정도로 멀지 않은 곳이라, 언제고 이 지역은 많은 인구가 들어설 개발가치가 큰 땅이었다. 거기에 분당 신도시와는 이웃동네로 가까웠다. 이 정도라면 아주 아름다운 캠퍼스를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 장충식, 『단국대학교 70년사』, 199쪽


1994년 11월 10일 이사회는 신 캠퍼스 부지 매입을 공식 의결하였다. 같은 날, 한남캠퍼스 부지(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산 8-14 일대) 13만 5천여㎡를 매각하기로 의결하였다. 평당 매도 가격은 702만 5천원으로, 총 2,870억여 원의 대금을 받기로 하였다.연합뉴스(1994.01.07)기사참조한국경제(17면 TOP, 2010.10.15) 기사참조

1994년 11월 2일 개교 47주년 기념식 서울캠퍼스 난파기념관에서 김학준 이사장은 제3캠퍼스(수지캠퍼스) 부지 매입을 계약했음을 공표하였다.단국대 서울캠퍼스가 분당신도시 인근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으로 오는 96년말까지 이전 서울캠퍼스 이전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학 당국은 1994년 11월 15일 '서울캠퍼스 이전계획 및 이사회 결의안'을 교육부에 제출하고 승인을 요청했다.

수지캠퍼스 부지에 대해 부지 매입에 참여한 도시계획부동산학부 김병량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새로 들어설 부지를 탐색할 때 장충식 이사님은 몇 가지 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남동에 위치하였던 서울캠퍼스와 천안캠퍼스의 중간에 위치할 것, 서울 강남구에서 차편으로 30~40분 이내의 거리일 것, 경부고속도로에서 가까울 것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후보지를 찾으러 다니다보니 이런 조건에 부합되는 땅은 모두 재벌들이 먼저 차지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엄두가 안날 가격으로 올라있었습니다. 부지를 매입해야 대학의 장기발전 계획도 입안할 수 있는데 참으로 초조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현재의 수지캠퍼스(현 죽전캠퍼스) 부지를 소개받아 장충식 당시 이사님을 모시고 답사를 갔습니다.

장충식 이사님의 조건에 딱 맞는 땅이었습니다. 당시 분당신도시 개발이 끝날 시기였고 용인 일대가 새로운 수도권의 택지로 급부상하고 있었죠. 현장에서 바라보면 경부고속도로 죽전휴게소와 직선으로 2km 정도로 가깝고, 전철 분당선, 43번 국도가 인접해 있었죠. 정부의 분당, 판교, 수원 일대의 교통망 확대 정책을 고려하면 이 땅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는 믿음이 바로 들 정도였습니다. 장충식 이사님은 이미 천안캠퍼스 개발을 통해 교육용 부지가 가진 잠재가치를 간파하는 능력을 보여줬는데 이때도 다시 한 번 탁월한 안목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 김병량, 『단국대학교 70년사』, 200쪽


부지 매입에는 행운도 뒤따랐다. 해당 부지가 넓이만 100만㎡(여의도의 30%)를 넘는 대형 필지였음에도 지주는 2명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매협상도 복잡하지 않았던 것이다. 본래 해당 지주는 골프장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주변 대기업 소유주와의 갈등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장충식 이사와 김학준 이사장은 소유주를 만나 대학교를 이전하려 한다는 진심을 밝히자 소유주는 완강하였던 매각 거절 의사를 굽히고 수지지구의 학교부지 매각을 결정하였다.

파일: 죽전캠과거1.jpg
수지캠퍼스[41] 개발 이전 모습

1995년 1월 '제3캠퍼스 마스터플랜'을 공모하였다. 마스터플랜의 입안에 필요한 기본 요건은 ① 국제수준의 교육경쟁력을 지원할 교지와 시설을 확보할 것 ② 대학설치기준령을 상회하는 시설수준을 제시할 것 ③ 탈 서울의 여건을 고려해 기숙사 시설의 확충을 전제할 것 ④ 정보통신망 및 첨단교육매체 운용이 가능한 기반을 구축할 것 ⑤ 보행자 위주의 이동선과 교사동 배치 ⑥ 자전거용 도로 및 1,500대의 주차공간 확보 ⑦ 1차 계획에서 16만 5천㎡(5만 평)의 교사동을 신축하고 2차년도에 6만 6천㎡(2만 평) 증축이 가능할 것 등이 있었다. 1차 기술심사와 2차 최종 심사를 통해 김진균 교수(서울대), 예탑종합건축사, 단우모람종합건축사 등의 작품이 후보군에 올랐고, 결국 김진균 교수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파일: 죽전캠초기마스터플랜.jpg
수지캠퍼스[42] 초기 마스터플랜

1995년 6월 교육부가 '단국대학교 수지캠퍼스' 이전 사업을 승인하였고, 7월에 신캠퍼스 부지에 대한 소유권 이전 등기도 완료되었다. 매입 비용은 약 500억 수준.참조 본래 1995년 하반기에 수지캠퍼스 신축 공사를 개시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언론을 통한 논란과 한남동 부지 매입 갈등으로 지연되고, 1996년 7월 19일에 수지캠퍼스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그후 완공 시기를 1998년 말로 결정했다. "수지 신캠퍼스 이전, 개교 60주년, 천안캠퍼스 개교 30주년..."

이러한 캠퍼스 이전 움직임에 학생들과 교수들, 동문들은 이전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94년 1월엔 '교수협의회 서울지회'가 서울캠퍼스 이전 반대를 결의하였으며, 2월엔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 총장실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점거 농성에 들어가 '이전계획 완전 철회, 이전 포기 문서화'를 주장하였다. 5월 18일인 총학생회 주도하에 전체비상총회가 열리고 총장실, 이사장실 등의 사무실에 들어가 집기들을 들어내고 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단국대 용인 수지캠퍼스로 이전


7.2. 단국대학교 법인 부도[편집]


1997년 한국경제를 강타한 1997년 외환 위기는 단국대학교를 빗겨가지 않았다. 수지캠퍼스 시공사인 극동건설기산이 1997년에 도산하면서 수지캠퍼스 건설이 중단된 것이다. 건설 중단은 단국대학교에 큰 타격이 되었다. 단국대학교는 이미 1994년 말에 약 1,570억 이상의 부채가 있던 상황이었다.[43]

1990년대 이후 단국대학교병원 신축 사업과 내곡동 부지 강제 매각으로 이어진 대학 법인의 재정은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게다가 재단이 마련한 자구책의 일환인 서울캠퍼스 매각 대금 역시 매수자인 세경진흥의 지불능력 부재로 이행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44] 이러한 상황에서 이자로만 매달 17억 원씩 빠져나가야 했다. 대학 당국은 자구책으로 각종 자산 및 부동산 매각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미 경제위기로 인해 재벌 대기업들이 갖고 있던 부동산 매물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아 부동산 매각도 쉬이 성사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사기 사건이라는 '변인호 어음 사기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결국 수지캠퍼스 공사 중단은 신탁계약으로 이뤄진 공사가 중단됨에 따라 막중한 채무관계로 되돌아 왔다. 대학은 자금 융통을 통해 해당 부채들을 갚으려 하였으나, 경제 위기로 인해 금융기관 역시 돈을 빌려줄 여건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학교법인은 1998년 3월 6일, 서울은행 한남동 지점에 돌아온 어음 166억 8천만 원을 결제하지 못해 국내 대학으로는 최초로 최종 부도 처리 되었다.[45] 사상 최초의 학교법인 부도 사건이었다. 단국대 관계자는 수익용 자산이 2조원 대에 달하고 당장 부동산 매각을 통해 3,000억 원 가량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이고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며 한겨레신문이 보도하였다. 이사회는 학교법인 부도라는 사태에 대한 해명으로 아래의 사과성명을 발표하였다.

"3월 6일자 학교법인 단국대학의 예기치 못한 부도사태로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중략)

학교법인 단국대학은 지난 '89년 천안캠퍼스에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건립하며 1천 5백억원을 투입하였고, 이로 인한 차입금 급증으로 그동안 적잖은 재정난에 시달려 왔습니다. 특히 1996년 착공한 신캠퍼스 신축공사에 1천 8백억원이 투입되어 어려움이 가중되던 중, 지난 해 말부터 IMF체제로 인하여 자금 시장이 경색되면서 이자부담이 크게 증가하여 끝내 부도를 맞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학교법인은 당면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가용재산을 갖고 있습니다. 관계당국에서도 학생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학사운영을 정상화하는 데 큰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줄 것을 확신합니다. 저희 구성원 모두는 앞으로 혼연일체가 되어 뼈를 깎는 자구노력과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합리화를 기하겠습니다."

- 단국대학교 이사회, 『단국대학교 70년사』, 234쪽


단국대 법인 부도 소식을 접한 교육부는 1998년 3월 9일 단국대에 대한 특별 감사를 실시했다. 이후 교육부는 대학의 부채는 3월 6일 현재 총 2,562억 원, 자산은 5,320억 원으로 학교 재산의 일부를 처분하면 빚을 모두 갚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특히 단국대학이 차입금 전액을 병원 건축비와 학교운영비로 사용하였으며 재산을 은닉하거나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등의 비리는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일부 재산의 매각을 허용해줄 방침이라고 밝혔다.

대학 법인 부도 이후 학생과 교수, 동문들의 구교운동으로 장학금, 상여금 반납 운동이나 기부금 운동이 벌어졌다. 이렇게 해서 모인 기금은 총 38억 3,268만여 원이었다. 이러한 구교운동과 IMF 체제 해소라는 시대적 배경은 결국 단국대 부도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하였다.


8. 2000년대[편집]


학교법인은 2005년 들어 한국부동산신탁 파산관재인과 합의서를 체결하고 수지캠퍼스 건설 재개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후 9월 금호산업에 수지캠퍼스 공사 재개를 맡기는 계약을 맺었다. 드디어 2006년 4월 17일 공사가 재개되었다. 금호건설, 단국대 한남동 부지개발사업과 용인 수지캠퍼스 공사를 본격적으로 준비 수지 신캠퍼스 공사 재개, 2007년중 완공 1998년 5월 공사가 중단된 이후 8년만의 일이었다. 2007년 6월 30일 실직적인 공사가 완료되자 대한통운과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7월 2일부터 8월 14일까지 한남캠퍼스의 시설물 물류를 이전하였다. 물류 이전 작업은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작업으로써 93만여 권의 장서와 2만 2,000점의 유물을 비롯한 총 1만 4,300톤의 물류를 이전하기 위해 총 3,147대의 대형 트럭이 동원되었다.

2007년 8월 30일 수지캠퍼스의 준공 및 이전 기념식이 열렸다. 장충식 범은장학재단 이사장, 수지의 학교 부지...분명 학교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단국대 9월 수지로 캠퍼스이전..오늘 입학·비전선포 수지캠퍼스는 기존 서울 용산구 한남동 캠퍼스에 비해 전체 면적은 8.3배, 건물 면적은 2배 이상

이로써 1957년부터 2007년까지 약 50년 간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소재했던 단국대는 2007년 하반기부터 용인시 수지구의 수지캠퍼스로 완전 이전하게 된다.[46] 본래 한남동의 서관은 특수대학원으로 남겨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교육부 압박에 의해 실패하고 IBK에 매각했다. 링크를 보면 서울/분당/천안 3개의 캠퍼스 체제로 가려했다는 계획이 나와 있다. 2

단국대는 IMF 시절 부도가 났던 이력[47]이 있어 단국대에 대한 풍문과 소문이 확대되어 이전 직후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로 꼽고 있다.[48] [전교학신문]입시철 맞아 인터넷은 지금 대학훌리건 전쟁중(세계일보) 그래도 아직까지 단국대 한남캠의 흔적은 남아 있다. 현재 순천향대병원 버스정류장 쪽에 위치한 육교는 단국대앞 육교로 명명되어 있으며, ibk기업은행 건물은 옛 서관을 리모델링 한 것이다. 또한 한남더힐 아파트 주변 골목골목 가다보면 그때 장사하던 복사집이나 그런 것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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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서울캠퍼스 전경. 공대와 2부대, 학생회관, 교수회관등은 빠진 사진이다

단국대는 캠퍼스가 수지에 있고 교육부, 지자체, 동문회와 의논하여 '수지캠퍼스'로 정하였다. [대학 정시모집]단국대 수지캠퍼스 내년 2학기 완공 단국대 수지캠퍼스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해 대학비전 선포식 단국대학교 수지캠퍼스 ‘제2의 창학’ 하지만 수지캠퍼스 이전 즈음에 교육부, 지자체, 대학, 동문회에서 결정됐던 수지캠퍼스 이름에 대한 항의가 기흥구 보정동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들어왔다.

수지구 죽전동, 풍덕천동, 상현동으로 넘어오지 못한 기흥구 보정동 주민들은 수지구 죽전동, 풍덕천동, 상현동으로 편입해줄것을 기흥구에 요청했지만 기흥구와 일부 기흥구 주민들은(보정, 구성, 동백, 신갈) "기흥구 보정동이 수지구 죽전동, 풍덕천동, 상현동에 넘어갈 경우 기흥구(구성권역)의 지역세가 약해지고 특히 기흥구 구성, 동백 지역은 낙후되어 이 일대의 아파트 값이 더욱 하락할 것"이라며 기흥구 보정동의 수지구 죽전동, 풍덕천동, 상현동 편입에 반대하였다. 이후 기흥구 보정동 주민들은 최소한으로 수지구 죽전동 편입을 요청했지만 이것도 기흥구에서는 같은 이유로 반대를 고수하였다. 그러자 아파트값 하락을 우려한 기흥구 보정동 주민들은 차선으로 기흥구 구성, 동백 주민들과 담합하여 단국대학교의 학교 이름을 이용해 아파트 홍보효과(투기)를 기대하고 아파트 가격을 올리기 위해 당초 `수지캠퍼스'로 결정됐던 단국대 캠퍼스 이름을 "왜 수지냐?"고 반발하며 "죽전캠퍼스로 변경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후 수지구 죽전동, 풍덕천동, 상현동에 넘어오지 못한 기흥구 보정동 주민들의 이기심이 커졌는데 이들 주민들은 급기야 수지구 단국대 교내 학생들의 통학을 위해 경기고속 버스업체가 사용 중인 차고지 및 사무실을 "수지구 단국대가 교육연구시설 용도로 허가 받은 건물과 토지를 불법 용도 변경해 사용하는 정황이 있다"라며 "불법 버스차고지 버스노선을 신고하겠다"라고 이기심이 커졌다. 캠퍼스 이전으로 어수선했던 시기 학교 관계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캠퍼스 명칭과 도로명칭 공모절차를 진행했으며 명칭을 당선작 없이 실처장회의를 통해 수지구 죽전동 주민들의 일부 여론도 참작하여 '죽전센트로캠퍼스'로 교내에서 조치를 취하였고 캠퍼스 이름은 '죽전캠퍼스'로 점차 부르게 되었다.

단국대 죽전캠퍼스는 수지로 이전한 뒤 땅값이 매입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격[49]으로 올랐으며 강남, 분당, 수지로 이어지는 생활권은 경기도에서 윤택한 도시문화를 형성하고 있다.[50] 경기도 용인 수지지구에 건설된 죽전캠퍼스

파일: 죽전캠퍼스 이전 준공식.jpg
죽전캠퍼스 이전 준공식

이전 후 구 엠블럼에서 새로운 엠블럼을 발표했다. #

파일:단국대엠블럼.png
단국대 교표

단국대 죽전캠퍼스는 이전 후 국제관 건설 이후 예정된 70주년 기념관, 글로벌 CEO관, 산학협력관 등을 포함한 죽전 마스터 플랜을 살펴보면 다 완성될 시에는 크고 아름다운 캠퍼스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를 보면 서울의 비싼 땅값, 세금 부담을 완화하고 인서울의 프리미엄을 포기한 대신 확실하게 교육환경을 개선한 교육실험으로 볼 수 있다. 당시 5만평이 안되는 부지를 매도하고 7배가 넘는 35만평을 사들여 강의실, 실험실, 기숙사, 대학원동, 복지관 등을 비롯 본관, 별관, 국제관, 음악관, 미술관, 무용관, 학생관 등과 같은 공간을 넓히는데 기여를 하였는데 2017년 시가 기준으로 재단규모 5조원이 넘는 건실한 학교재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51]

9. 2010년대[편집]



9.1. 캠퍼스 통합[편집]


학교측에서는 캠퍼스 이전 이후, 외부 업체에 용역을 주어 학과 통폐합을 시작한다. 이원화캠퍼스갈아엎는 학제 변경의 시작은 2009년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는 '죽전캠퍼스 법과대학 법학과'에 '천안캠퍼스 법정대학 법학과'를 통합하는 일이 있었고, 이를 모델로 이후 2011년 여름에 죽전캠퍼스와 천안캠퍼스의 복수 존재하는 학과들을 정리 통합하는 현재의 학제 체제를 들고 나오게 되었다. 학생들은 반발하였으나 학교측은 늘 그래왔듯 개편안을 강행하였다. 개편안의 골자는, 크게 죽전캠퍼스에 있는 '어문계열'과 '자연과학대'의 천안으로의 통합과 천안캠퍼스에 설치된 '상경학' 및 '사회과학계열' 그리고 '공학대학'과 '예술계열학과 일부'를 죽전캠퍼스로 통합함으로서 유사 학과간 시너지 효과를 높이고 복수 학과를 폐지하여 대학 정원 감축 경쟁력 있는 신설 학과의 설치를 모색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교적 대규모 학과 폐지가 일어난 천안의 경우 취업 시장에서 각광받는 보건학 관련 단과 대학이 신설된 바 있다. 이후 2014년에 죽전캠퍼스와 천안캠퍼스 양 캠퍼스에 복수로 존재하는 학과들이 완전히 정리되면서 1차 개편이 마무리되었다. 통폐합의 결과 2014년부터 천안캠퍼스 또한 본교로 통합되어 이원화 캠퍼스가 되었다.[52] 물론 이원화캠퍼스 이전인 본/분교 체제 하에 입학한 재학생은 졸업시까지 본/분교 체제로 인정된다. 위에 나온 통합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인문계열·사범계열·상경계열·예술계열·공과계열등이 죽전캠퍼스로, 외국어(어학)계열·자연과학계열·체육계열·보건계열·의치약학대 등이 천안캠퍼스로 통폐합되는 양상을 띈다고 보면 편하다.

10. 관련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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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형 선생의 활동은 경기도(인천·안성), 전라남도(목포·영광·송정·나주), 전라북도(정읍), 경상남도(창원·마산·진주·통영·부산·김해·밀양), 경상북도(청도·대구·영천·경주·포항·왜관·김천), 충청북도(영동·조치원·청주·괴산), 평안북도(박천·영변·정주·선천·신의주·구의주·양시·구안주·숙천), 평안남도(순천·영유·순안·평양·중화), 황해도(황주·겸이포·사리원·재령·해주·서흥·신막·개성) 등의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실시되었다.[2] 여운홍은 친일파지만 일제강점기 초기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3] 『독립신문』 1921년 10월 5일자, 「대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후원회」[4] 『동아일보』 1921년 12월 22일자, 「고학생친목회」 지방순회강연[5] 『동아일보』 1921년 12월 22일자에는 장형 선생의 지방순회강연을 보도하면서 "반도고학생친목회에서는 동기 휴학기간을 이용하야 해회 취지의 선전을 겸하야 대대적으로 지방순회강연차로 상공진흥회장 장형 씨와 고문 여운홍 양씨의 인솔하에"라고 보도하였다.[6] 반석현지편찬위원회, 『반석현지』, 길림인민출판사, 1999, 263~264쪽.[7] 「건국실천원양성소」 제5기수업생명부(백범김구기념관 소장 자료)[8] 『동아일보』 1947년 7월 20일자, 「신익희 한독당 탈당」.[9] 신익희의 한국독립당 탈당으로 인한 백범과 임시정부에 대한 배신[10] 이 때문에 국민대학교는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 이라고 홍보하며, 단국대학교는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학'이라고 홍보한다.[11] 박기홍은 1899년 12월 30일 삼화우체사 주사, 1902년 7월 28일 한성우체사 주사로 임명된 기록이 있다.[12] 박기홍의 별세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4년 10월 29일자에 "경성부 소재 장훈학교 설립자인 박기홍이 노환으로 별세하다"로 보도되었다.[13] 조희재 여사는 1892년생으로서 아호가 혜당(惠堂)이며, 풍양 조씨의 후예로서 박기홍과 결혼했다.[14] 토지 80여만 평[15] 혜당과 딸 박정숙이 대학 설립기금을 희사하였다는 것은 1947년 11월 2일자 『경향신문』과 『한성일보』에 "시내 돈암동 471의 47에 거주하는 혜당은 딸 박정숙씨와 더불어 고인이 된 남편의 유지를 계승하고 실천하고저 시가 1억원의 토지[14]를 희사하여 단국대하을 설립하게 되었다는데 …(후략)"라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16] 현재 건국대 박물관, 당시 조선정치학관에는 건국대, 국민대, 단국대가 있었다.[17] 이 건물은 현재는 낙원동 교사 라고 불려진다.[18] 건국대학교 설립자[19] "재단법인 단국대학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요구와 인류의 세계적 요망에 대응하기 위하야 오천년 유구한 문화를 여기에 재흥하고 만인공영(萬人共榮)의 진리를 부흥하고 혈맥에 흘러온 전통적 우수성을 민족적으로 회복하여 우리와 세계인류의 영원한 자주적 독립과 발전번영을 기도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정신을 여기에 광복하는 선도자와 창계자적 역할을 메고 나갈 문화사관(文化士官)을 양성하여 조선과 세계의 부흥을 위하여 동원되는 전선(全鮮)에 배속시키는 사업의 원천지가 되겠다는 자부와 자긍에서 만리붕정(萬里鵬程)에 오르는 배다. 정의(正義)는 이기고 진리(眞理)는 기리 빛날 것이다. 새 세계(世界)의 전개가 그 무대의 중심을 동방(東方)으로 전전(轉奠)하고 있으니 아득한 그 옛날 사해(四海)를 비치던 그 등대(燈臺)에 이제 봉화(烽火)는 높이 들렸다. 의(義)를 모르고 예(禮)를 상실한 옅은 지식의 무리들의 지배와 말발굽 아래서 억눌이어 그 천부(天賦)의 낙토(樂土)를 잃고, 그 문화를 짓밟히고 자유와 행복을 상실당한 채 유리전전(流離轉輾)하는 암흑의 천지(天地)가 몇 세기(世紀)를 되푸리하였는가. 우리는 하늘이 주신 인권(人權)과 그 천연(天然)의 자유를 확립하고 만인(萬人)이 갈길을 개척하여 자기로부터 세계가 한집으로의 낙원(樂園)을 건설하는 데 우리는 한 개의 횃불이 되고 진리의 전당(殿堂)이 되고 인류의 지표로의 사명을 스사로 수행하려는 것이다. 태동대륙(泰東大陸)에 아침이 열리니 이름하여 배달이라 한다. 대륙(大陸)과 대양(大洋)에 터전한 지리적 부(富)와 맥맥(脈脈)히 흐르는 피의 겨레 삼천만의 뭉치가 자기로부터 비롯하는 세계부흥(世界復興)의 성업(聖業)에 진군(進軍)될 것이다. 이 시대창조의 행진곡에 그 연주의 지휘봉은 들렸다. 우리는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힘을 아울러 우리와 우리의 후배들의 길이 그 진리를 찾고 일을 배우고 글을 닦아 진(眞)과 선(善)과 미(美)의 참된 일군이 여기에서 나고 여기에서 비롯하기를 기하여 한 개의 글집을 세우는 것이다."[20] 단국대학이 처음 선발한 입학생수는 법정학부(정치학과 240명, 법학과 240명)와 문리학부(사학과 240명, 수학과 120명, 물리학과 120명)를 합하여 960명이었다.[21] 당시 딘 소장은 축사에서 "단국대학은 한 여성(혜당 조희재 여사)의 힘으로 창립된 세계유일의 대학"이라고 찬사했다.[22] 1. 국립 서울대학교 2. 연희대학교 3. 고려대학교 4. 이화대학교 5. 성균관대학 6. 동국대학 7. 세브란스의과대학(연희대학과 통합 후 현 연세대학교) 8. 중앙여자대학(현 중앙대학교) 9. 경성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10. 국학대학(우석대학에 통합 후 우석대학은 다시 고려대와 통합됐다) 11. 청주상과대학(현 청주대학교) 12. 대구의과대학 13. 대구농과대학 14. 대구사범대학, 15. 대구대학(대구농과대, 대구사범대, 대구대와 통합 해 현 국립 경북대학교) 16. 국립부산대학 17. 광주의과대학(현 국립 전남대학교) 18. 춘천농과대학(현 국립 강원대학교) 19. 이리농과대학(현 국립 전북대학교) 20. 단국대학[23] 건국대학교, 『건국대학교 70년사』 1, 49~81쪽.[24] 조선정치학관은 어디까지나 단순 학교였고, 단국대학은 정부에서 공인받은 정규대학이었기에 그 졸업장의 무게감은 차원이 달랐다. 따라서 조선정치학관의 학생들이 단국대학으로 옮겨가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25] 현재 육군 논산훈련소가 바로 이 땅이다.[26] 다만 지금은 옛 부지에 아파트가 세워져서 지번이 바뀌어 현재 저 지번은 비어 있는 상태다.[27] 한남동에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있던 시절 1979년 12.12 사태 당시 정승화 총장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에 놀란 노재현 국방장관이 옆에 있는 단국대학교 한남캠퍼스 담을 넘어 숨어 있었던 일화가 있다. 드라마 제4공화국에도 나오는 장면이다.[28] 1966년~1971년까지 종합사립대학교로 존속되다가 경영난으로 고려대학교에 합병됨.[29]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 했다... 이후 대전에 실제로 한남대학교가 생겨나긴 했다.[30] 당시 대학 총장들은 대학에서 새마을운동을 하게 되면 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이와 같은 대통령의 제안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다.[31] 당시 청양군수로 우리 대학교의 장곡마을 개발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던 이기영 군수가 홍성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이 군수는 홍성군 소유 토지 약 26만 4,462㎡(8만 평)을 불하하여 줄 것이니 우리 대학교에서 분교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였다.[32] 총 공사비는 60여억 원이 투입되었다.[33] 본래 의과대학은 단대에 대해서만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으나 현대그룹의 울산대와 대우그룹의 아주대가 의과대학 인가 경쟁에 뛰어들면서 단대의 의과대학 인가는 어려워질 뻔 했다.[34] 입원실과 진료실이 같은 건물에 있으면 환자, 의료진, 방문객들의 동선이 뒤섞여 병고를 겪는 환자의 이동이 힘들어지는 불편을 막기 위해서였다.[35] 단국대 부도의 역사는 여기서 출발한 셈이다.[36] 당시 창업자 김용산 회장은 500억 원 정도의 공사비를 추가로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사비를 못 받더라도 우선 단대병원을 개원하도록 시공을 서둘러 마치겠다."는 각서까지 제출하면서 단국대 병원의 개원을 지원해주었다. 극동건설은 한남캠퍼스의 중앙도서관을 시공하기도 하였다.[37] 개원 당시 병상 규모는 600석이다. 현재는 850석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암센터가 완공되면 병상수 1000석이 넘는 대형병원으로 자리잡게 된다.[38] 출처: 장충식, 『시대를 넘어 미래를 열다』, 561쪽[39] 결국 삼성은 1996년 성균관대를 재인수하기로 결정했다.[40] 현 죽전캠퍼스[41] 죽전캠퍼스[42] 죽전캠퍼스[43] 출처: 1994년 12차 이사회회의록[44] 결국 이후 세경진흥은 매매약정을 취소당했다.[45] 서울은행도 당연히 단국대학교를 포함한 다양한 기업에 승인한 채무를 제대로 회수하지 못해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되어 조각조각 해체되었다.[46] 때문에 05, 06년에 입대한 서울캠퍼스 학생들이 군대를 갔다 오니 학교가 사라졌다더라~는 믿기 힘든 진실이 나돌고 있다.[47] 학교 자체가 권리의무주체가 되지 못해 학교법인이 경영상 부도가 난 것을 대학부도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48] 대학 훌리건들 사이에서는 다른 학교를 낮춰 부르는 비속어들이 사용되는데, 동국대학교를 ‘똥국대’로, 성균관대학교를 ‘병균대’로, 중앙대학교를 ‘중간대’로, 한양대학교를 ‘화냥대’ 등으로 부르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름들이 다수 등장하고 단골 메뉴로 단국대, 중앙대 등의 재단부도를 언급하고 있다. 개중에는 직접적으로 대학의 순위를 매기면서 경쟁대학을 자극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비방들이 명확한 근거보다는 소문과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49] 2009~2010년에 용인시에서 몇 안되는 땅 값이 떨어지지 않은 동네가 되었다.[50] 단국대가 용인 죽전지역에서 매입한 부지는 조선 중종 때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 본관 경주 김씨, 1473(성종 4)∼1533(중종 2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의 사패지지(賜牌之地, 나라에서 공신들에게 나눠준 부지)의 땅이었다. 당시 경주김씨 문간공(십청헌)파종회 및 김세필의 후손의 갈등에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단국대학교가 들어온다는 용인시의 오랜 설득으로 매매가 성사되었다. 참고로 단대가 사들인 땅은 약 36만 평이었다.[51] 참고로 재단규모는 죽전캠퍼스 35만평부지, 현대자동차 마북연구소, 현대모비스 마북 기술연구소, ㈜KCC 중앙연구소, 롯데인재개발원 용인캠퍼스 등이 존재하는 마북동 연구단지 앞산까지 단국대 소유부지이다. 그리고 천안캠퍼스 27만평부지로 현재 건물가격 그리고 충남 천안소재 단국대병원부지를 제외한 캠퍼스 교육시설의 65만4천605제곱미터(약20만평)과 충남 청양소재 ‘단국대부설청양농장의 68만2천314제곱미터(약20만6,400평)의 부지와 건물가격 등의 2017년기준 시가 총액이다. 2007년 이전 당시의 상황은 열악하였으나, 2014년 현재는 서관, 대학원동, 무용관, 국제관 등의 강의실을 포함한 건물이 신축되면서 강의실 규모가 확실히 늘었고, 서울캠퍼스 시절 극소수에게만 허용되었던 기숙사 수용률의 경우는 집현재(400여명) 웅비홀(민자, 1000여명) 진리관(930여명) 3동의 건설을 통해 재학생의 20%정도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52] 이에 따라 학번부여체계는 2014년부터 죽전캠퍼스쪽의 학번체계로 통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