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책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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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비판
3.1. 랴오닝성은 자원보고
3.1.1. 반론: 역사적인 수비의 문제점
3.2. 사회문화적 요소를 간과
3.3. 한반도는 과연 똥땅(...)인가
4. 번외: 신라 책임론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 근대사의 안타까운 흐름과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가 단군처음 나라를 세울 때부터 이미 잉태되어 있었다고 보는 우스개소리에서 나온 주장. 굳이 단군을 내세운 이유는 기록된 왕 중 단군 왕검이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단군이 대한민국의 터를 잡았다는 인식이 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상세[편집]


쉽게 말하면 터가 안 좋다는 것이다. 한반도 자체가 산지가 많고 농업 생산량이 풍부한 곳이 아닌데다가 옆에 있는 나라들이 하필이면 중국[1]일본[2]이라 자급자족도 겨우 할 만한 땅에서 호락호락찮은 이웃 국가들과 경쟁하려다 보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3]

또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몽골계, 퉁구스계 등 북방 민족 사이에 끼어 있어 항상 양면전선 혹은 그 이상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4] 중국-만주 쪽에는 압록강개마고원이 자연 방어선 역할을 하고, 일본은 바다가 막고 있다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쳐들어 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잘만 쳐들어 왔다.[5] 되려 반도의 지리적 입지상 교통의 요충지였던 탓에 수많은 침략에 시달렸다.[6]

결국 이러한 형세가 이어져 한반도는 인구와 자원이 모두 주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여기에 반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중국에 둘러 싸인 형국으로 인해 외부와의 해양 교류가 어렵다는[7] 지형적 단점까지 더해져 한반도는 개화까지 한참 늦게 된다.[8] 이 때문에 한반도는 끝내 일제 강점기분단을 겪었고, 그 잔재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한민국한반도 주변 4대 강국[9] 사이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지켜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 단군 책임론의 내용이다.

지정학보다 사회문화적 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반론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회문화적 요소 역시 지정학으로부터 영향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조선의 폐쇄성을 비판하지만 중국과 일본 역시 서양에 폐쇄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단지 그들은 지리적 이점 덕에 16세기부터 서양과의 교류를 시작했고 반면 조선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서양과의 접촉을 개시했다는 큰 차이가 있을 뿐.

3. 비판[편집]



3.1. 랴오닝성은 자원보고[편집]


단군 책임론은 진지한 논의라기 보단 인터넷 상의 개드립에 가깝다.[10] 사실 단군이 처음 터를 잡은 고조선의 영토는 요령, 즉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일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랴오닝성은 중국의 주요 천연가스/석유 산지 중 하나인데다가 철광석과 석탄도 풍족하게 나고, 랴오허 및 쑹화강 유역 사이에 둥베이 평원이라는 한반도보다도 드넓고 독일 면적과 맞먹는 수준의 매우 넓은 평야지대(35만 ㎢)가 있다. 또한 둥베이평원이 그냥 평야지대도 아니라 비료 없이도 농사가 가능한 비옥한 흑토지대가 다수 포함되었기 때문에 농업생산성이 높은 곡창이다.[11]

현재 보하이 만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유전지대가 있으며, 2021년에도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었다. # 이곳은 예전에 육지였기 때문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전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랴오닝성과 인접한 헤이룽장성에는 중국 최대의 유전의 하나였던 다칭유전도 있다. 게다가 랴오닝성의 철광석은 유명하며 이곳의 안산시는 대규모 제철소가 있다.

농업면만 하더라도 랴오둥 반도 일대는 밀-보리의 곡창이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시, 이성계가 군량부족을 핑계로 대자, 최영이 정벌 강행을 요구하면서 "요동은 곡창이라 점령만 하면 군량부족은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데서도 드러난다. 중국은 과거의 식량부족 사태 때문에 곡물 수출에 제한이 많지만, 랴오닝성은 현재도 밀-보리가 풍족하게 생산되어 곡물 수출지로 유명하다. 한국에 들어오는 밀-보리의 상당량은 랴오닝산이다.

랴오닝성은 한반도에 비해 겨울이 매우 춥기는 하지만 (랴오닝성의 성도인 선양의 1월 평균기온 섭씨 -10도 이하), 미국으로 치면 미네아폴리스 정도인데, 이 정도 추위는 현대에는 사람이 못살 만한 추위는 아니며, 일자리만 제대로 있으면 얼마든지 사람이 많이 살 수 있다. 이곳의 성도인 심양은 경기도보다 약간 면적이 큰 면적을 보유하지만 (약 13000 평방km 경기도: 11700평방km) 인구는 800만이며 바로 옆의 푸순시까지 합하면 인구가 천만에 육박하니 겨울날씨가 조금 춥지만, 상당한 인구밀집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단군 조선이 세워질 당시의 시대의 기온은 고고학적으로 오늘날보다 상대적으로 온난한 기후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민족이 이곳을 계속 영역으로 보유했으면, 한반도와 합쳐 (한반도+랴오닝 면적 365000평방킬로) 독일, 일본급 (독일 360000, 일본 380000) 의 국토면적을 가지고, 인구도 1억2천만(한반도 7700만, 랴오닝 4400만)이 넘는데다가 산유국이기도 한 세계 4-5위 급의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까는 측에서는 출발점 위치는 좋게 잡아주었는데 후손들이 버리고 탈주해서 다 말아먹은 것이라는 농담을 한다.

3.1.1. 반론: 역사적인 수비의 문제점[편집]


그러나 랴오닝 주변은 북방 전투민족들이 주변에 도사리는 곳으로, 청나라 이전에는 중원정권도 삼켰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하던 곳이었다. 그 동쪽으로는 말갈(이후 여진), 서쪽으로는 흉노, 선비, 돌궐, 거란족이 있었으며, 중국 본토의 한족도 고대 이래로 이곳을 장악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수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12]

그래서 고조선이 (명목상) 이천 년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전국시대가 되자 연나라가 침공해 요령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이후 고조선을 정복한 한나라때까지 한족 세력이 이곳을 통치했다. 그러다 오호십육국 시대가 벌어지면서 선비족이 요령을 장악해 전연-전진-후연이 차례로 지배하다가 서기 400년경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요동 정벌에 성공하고 영토로 굳히면서 250년가량 다시 한국계 왕조가 차지했다. 이후 7세기 중반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 통치를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났고, 9세기경 발해가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그 이후에는 거란, 여진, 몽골 등의 기마민족이 이곳을 장악했다. 명나라 때 잠시 한족이 석권하는 듯했으나 결국 만주족에게 빼앗겼고, 청나라가 이곳을 기반으로 팽창하여 중국 전역을 장악하고 중원정권을 자처하면서 랴오닝이 중국에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만주한반도, 중원을 잇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최전방이나 전쟁터가 되기에 매우 쉬운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계속 보유하려면 주변의 유목 기마 전투민족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는데, 고구려발해를 제외한 한국계 국가는 이런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대륙의 생산력을 보유한 한족의 중원정권도 랴오닝을 쉽게 장악하지 못했으니, 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한민족이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본디 남만주 지방에 터를 잡았었던 한국계 왕조들이 남하한 것은 좀 더 온화하고 북방민족의 침탈에서 방어하기도 더 좋은 지역을 택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고려조선이 북진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정복전쟁을 수행하기에 애매한 군사력도 있었지만, 유목민의 방어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13] 고구려발해 때 군사력이 강했던 것은 북방민족들을 복속시켰기 때문인데, 발해 멸망 전후로 크게 성장한 북방민족들은 고려와 조선이 상대하기 버거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쯤 가면 만주는 고사하고 4군 6진조차 조선에서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개척이 성공적이지 못하여[14] 인구가 부족한 나머지 기존에 살던 여진족 부족들이 일정수준의 자치권을 행사했을 정도였다. 실제 조선인들이 연변 일대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해 만주족이 대거 중원지역으로 이주하며 만주 일대의 인구가 희박해지고 난 뒤부터였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대로 둥베이 평원 자체는 흑토지대가 있을 정도로 농사짓기에는 괜찮은 땅이었지만 중간에 산 하나 찾기 힘든 개활지였으므로 거란족, 여진족몽골족으로부터 방어하기에는 좋은 지역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고려말에 요동 반도 일대를 명나라가 차지하면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산악지대가 주가 되었다는것도 큰 요인이었다.

다만 랴오둥이 방어가 어렵다는 주장은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다. 랴오둥에 벌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창춘, 눙안방면의 북서부지역에 한정된 것이었다. 랴오둥의 중남부지역은 오히려 톈산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랴오허 동안 유역으로 북진하지 않는 이상은 랴오허의 제1지류인 훈허와 타이즈허가 중간에 횡측으로 흐르고 있으며, 동부지역으로는 쑹화강과 지류인 후이파 강이 버티고 있다. 무엇보다도 고구려가 이 요동 지역에 난공불락의 방어선을 세운 이후 수,당이 침공에 애를 먹은 것만 봐도 랴오둥은 공격자 입장에서 굉장히 까다로운 지역이었다. 게다가 발해도 거란과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하긴 했지만, 거란은 그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공략하는데 20년 가까이 세월을 허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부여부 쪽으로 우회하여 공격에 성공한다. 그럼에도 장령부를 위시로 한 발해의 서남부 요동 방어선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고, 후에 발해부흥운동의 거점으로 변모한다.

3.2. 사회문화적 요소를 간과[편집]


단군 책임론은 지나치게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주장이기도 하다. 환경적, 지정학적 특성이 국가 발전에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사회 문화적 요소들 역시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15] 예를 들어 똑같이 만주 땅에 자리잡았던 발해후금 역시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발해는 문왕 이후 당나라와 우호적이었고 유목민족인 거란에게 망했지만, 후금은 명나라와 대립했으며 해서여진, 몽골, 준가르 등의 유목민들을 전부 복속시켰다. 다른 예시를 들자면, 안다만 제도는 교역에 유리한 위치였지만, 그걸 교류에 이용하지 않아 몰락했다.

3.3. 한반도는 과연 똥땅(...)인가[편집]


물론 농경에 적합한 비옥도로 따지면 터키아나톨리아라던지, 우크라이나초르노젬이라던지 북미대평원, 남미팜파스 같은 기름이 철철 넘처 흐르는 땅에 비하면 척박해도 이런 척박한 땅이 없다. 날씨가 6개월마다 극단적으로 바뀌는 곳이 한반도다. 농담 중에는 미국 농부가 한국 농부가 농사짓는 땅을 보고 '미국에서는 주차장으로도 안 쓸 땅인데 이런데서 용케 농사를 짓는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한반도 땅이 그렇게 사람 살 땅이 못 되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기도 하다. 전 지구적으로 따지면 한반도는 사람이 사는 땅들 가운데 평균은 한다. 산지가 많은 건 교통이 나쁜 것이지, 강 깔린 평야 뒤로 산지가 많은 건 현대 농법 이전의 십년단위의 장기적인 생산력은 같은 면적의 그냥 평야보다 수백 배는 높다는 뜻이다. 겨울에 더럽게 추운 건 어떻게 보면 체온조절이 안되는 세균들과 기생충과 벌레들이 사람보다 먼저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1년에 한번씩 자연 냉각소독이 되어 줘서 문명이 휘청일 정도의 사람, 가축의 역병이나 식물병으로 인한 기근이 잘 안 생긴다는 뜻이다.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20세기 초에 질소를 잡아 두는 화학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인류의 농법은 지력(질소가 보충되기)을 회복시키고자 휴지기를 거쳐야 되었고,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매 시즌 농업이 가능한건 토양이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지역뿐이였다. 대표적인 곳이 나일강 하류, 황하 하류 같은 곳인데, 한국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이에 해당된다. 즉, 지속적으로 상류에서 새로운 토양과 미네랄이 그냥 비만 오면 떠내려와서 (그것도 안정적인 수원지인 산이 받쳐주는) 농업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는 비록 국토가 화강암 산지 투성이지만 덕분에 일단 농업용수, 식수로 쓸 물이 깨끗했고[16] 평야 지역이 많으며 바다와 인접해 해산물을 많이 수확할 수 있었던 서부와 남부 지역은 전근대에도 그럭저럭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먹고 살만한 땅이었다.[17]

한반도 중남부가 인구를 부양하기 좋은 작물인 를 기르기에 좋은 지역이었던 점도 한반도가 높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요인이다.[18] 벼는 열대 저습성 작물인 까닭에 일조량이 많고 강우량이 풍부한 곳에서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한반도는 이 조건을 만족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벼가 열대성 작물이기 때문에 '에이 저기 베트남 같은 곳에선 이기작, 삼기작도 하는데 한반도는 잘해봐야 남부 일대에서 이모작이 한계지 않느냐?'라고 인식하긴 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점 때문에 벼농사의 단점 중 하나가 해결된 부분을 생각하면 그게 꼭 단점이라고 하긴 어렵다. 벼농사의 단점 중 하나는 바로 논에 있는데, 항상 물을 채워 놓아야 하니 여기서 여러 해충이나 질병이 발생하기 쉽다. 한국이나 일본은 온대기후임에도 연교차가 매우 심한 기후 덕분에 여름 한철의 높은 기온을 이용하여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벼농사를 지었다. 때문에 이 문제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해충 등이 생겼다 싶으면 겨울철 추위가 모두 자동으로 처리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중 고온다습한 중국 남부나 동남아, 인도 등 아열대기후/열대기후 지역들은 일 년 내내 논에 물을 채워서 삼모작, 사모작을 했기에 장구벌레 등 해충이나 병원균이 서식할 최적의 장소를 제공했다. 이로 인해 모기에 의해 전파되는 말라리아나 뇌염 등의 곤충 혹은 수인성 전염병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19] 결국 한반도 자체의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져 벼를 기르면서도 문제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조건 덕분에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봐도 낙후된 조건을 가졌던 조선 후기에도 한반도엔 적어도 1,600만명 정도는 거뜬히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정도면 동시기 비슷한 면적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그리 꿀리지 않는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당장 비옥한 영토로는 세계 어디 내놓아도 당당했고 전근대 유럽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의 경우에도 조선 후기와 비슷한 시기인 1700년대 중반 추정 인구가 2,460만명이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한반도는 우리 조상들이 저 정도 인구를 가지고도 입에 풀칠하고 소 기르면서 소가죽을 수출할 정도의 인구 부양력은 제공해 줬다.

근대 들어와서는 지하 자원이 극히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시 똥땅(...) 취급이긴 하지만, 애초에 지하자원이 철철 넘치는 땅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자원이 풍족한 땅은 국가들 간의 쟁탈전이 벌어지기 쉬운 땅이고 자원으로 인해 분쟁지역이 되는 경우도 잦기 때문이다.[20][21] 그리고 워낙 자원부국들이 넘처나는 시대라 채산성이 문제여서 그렇지 특정 지하 자원은 한반도에서도 풍부한 편인 것도 꽤 있다. 대표적으로 무연탄, 시멘트, 텅스텐 같은 자원은 꽤 풍부한 편이며 저 자원들은 대한민국이 경제부흥을 일으킬 때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반도는 특출나게 좋은 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특출나게 나쁜 땅도 아니라는 것이다.

4. 번외: 신라 책임론[편집]


일부 사람들은 현재 세력구도가 정립된 것이 삼국통일부터라는 인식에서 신라 책임론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통일신라 형성 이전까지[22]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희박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냥 타국 수준이 아니라 거의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중앙집권국가는 아니었지만 연맹 체제와 비슷했던 가야의 여러 나라들(금관국, 반파국, 안라국, 고자국 등)도 마찬가지였다.[23] 당대 시점에서는 같은 민족을 팔아먹고 타민족(중국)과 붙어먹은 것이 아니라 그냥 거슬리는 타국을 다른 국가와 연합해서 정벌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논의는 신라/평가 문서 참고.

5. 기타[편집]


파일:1600257948.jpg
관련 개드립 중에는 단군을 훨씬 넘어서서 '공룡 책임론'(...) 같은 극단적인 것도 있다.이젠 고생물들까지 깐다. 한반도의 공룡은 얼마나 무능하면 석유조차 못 되었냐는 이야기다.

근데 사실, 현재 석유 형성 과정의 정설인 유기물 기원설에서는 대부분의 석유를 해양 플랑크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거기다 현재는 아예 무기물 기원설도 힘을 얻고 있다. 그러니 공룡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억울한 일이다.플랑크톤 책임론

그 외엔 이스라엘 버전으론 모세가 석유가 나는 땅이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다는 유대판 '모세 책임론'도 있다. "우리 이스라엘인이 모세에 대해 불만이 좀 있다. 그는 우리를 40년이나 광야를 헤매게 한 뒤 중동에서도 석유가 나지 않는 땅으로 이끌었다."라는 말을 한게 바로 이스라엘 총리이던 골다 메이어인데 그러나 그 시대에 석유는 있어봐야 난방 및 음식 만들때나 주로 쓰이거나 아님 전투용으로 쓰이는 기름일 뿐이고 기름진 풍요로운 땅이야말로 그 시대에서 천국과 같은 좋은 땅이니까. 그 석유가 자원으로서 평가를 받은 건 고작 200년도 채 안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24]

그런데 메이어의 푸념이 무색하게도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본토와 연안에서 채산성있는 유전과 가스전이 하나 둘씩 발견되면서 모세가 유대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한게 맞았음이 증명되었다.[25] 조상님의 혜안도 몰라보는 못된 후손 놈들

6. 관련 문서[편집]


  • 총, 균, 쇠
  • 자국 혐오
  • 한국사
  • 지정학
  • 단군
  • 원죄(기독교)[26]
  • 이웃나라/한반도 주변 4대 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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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토의 면적이 한반도와 비교도 되지 않으며 특히 농경 생산력이 월등한 강남 지역 개발이 마무리된 당송 이후부터는 단위면적당 생산력도 한반도를 압도한다.[2] 농토의 면적은 일본의 약우세이나 일본 열도는 전체적으로 한반도보다 위도가 낮고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온난한 편이며 벼농사 기술만 있다면 단위 면적당 농업 생산력도 더 뛰어나다. 한반도의 곡창지대인 삼남보다도 위도가 낮고 평균 기온이 높아 실질적인 농경 생산력이 한반도를 크게 상회하고 이러한 이유로 전근대 인구 추정에서도 일본 열도의 인구가 더 높게 추정된다. 게다가 근대에 편입된 홋카이도 역시 일본 내에서도 중요한 낙농업 생산 거점으로 육성되어 위도가 북쪽이라고는 해도 농업에 유리한 지형과 기후이다.[3] 웬만한 나라에서는 생산되는 암염도 한반도에서는 거의 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고대 삼국시대부터 해안가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4] 한민족이 만주의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만주를 회복하거나 혹은 완전히 개척,정복하려할때 발목잡는 것이 바로 일본의 존재였다. 고려의 요동 정벌이 불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왜구의 침입이었다.[5] 중국: 나당전쟁, 여요전쟁,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일본: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6] 사실 지정학적으로 주변에 나라를 많이 낀데다가 요충지이고, 규모조차도 어중간하거나 작은 나라들은 주변국들 등쌀 때문에 주구장창 강국으로 성장하기 힘든 것이 있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견제를 당하기 때문.[7] 한반도가 요충지라지만 중국이 일본으로 진출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만 그렇지 배 타고 무역할 때는 별로 가치가 없었다. 당장 해양무역의 통로였던 동남아시아와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이런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확실한 시장 가치를 증명해야 했지만, 앞서 나열한 수많은 악조건을 뚫고 그게 될 리가 없었다(...)[8] 조선과 일본을 가른 차이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도 어쩌면 이것이다. 화이관이나 상업 경시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서구와 만날 기회가 절망적으로 적었다.[9]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은 별론으로 해도 중국과 일본, 러시아[10] 진지한 논의였으면 "단군할배가 부동산 사기를 당해서(...) 후손이 고생한다"는 드립을 치지도 않았을 것이다.[11] 다만 시대마다 나타나는 기후의 차이와 대규모 인력이 필요한 개관 산업 등을 고려해야 한다. 전근대엔 한반도처럼 산이 많은 랴오둥 반도 자체는 개간하면 평안도와 대동소이한 땅이었지만 요동과 요서 사이의 드넓은 둥베이 평원은 요택이라는 거대한 늪지대로 차라리 천혜의 방어벽 역할을 하면 했지 대규모 농업지대가 될 수는 없었다.[12] 사실 지형상 랴오둥 반도의 천산 산맥은 방어하는데 그리 힘든 곳은 아니다. 문제는 너무 많은 세력들에게 요충지로 여겨져 공격당한다는 점이다.[13] 실제로 조선 성종 때 남만주 개척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이 이유 때문에 무산되었다.[14] 개마고원이 자리한 지역이라 농사에 불리했다.[15] 사회문화적 요소 역시 지정학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지만, 일단 정립된 후에는 지정학적 요소에 종속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16] 지구상에서 민물에 석회질 없는 지역이 그렇게 많질 않다. 당장 중국도 사천지역을 빼면 거의 다 석회질 물이라 차와 곡주가 발달했다. 그냥 한반도와 일본 열도 등이 전 세계적으로도 수질이 매우 좋은 몇 안 되는 지역에 속한다.[17] 한국에는 낭비한다의 관용어로 "물을 쓰듯 하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수자원의 중요성을 체감하기 어렵다. 물을 정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화강암과 장마철 덕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순수한 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문화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중국만 해도 깨끗한 물을 구하기 어려워 차를 끓여먹는 문화가 발달했고 유럽도 맥주, 와인 문화가 발달했다. 한편으로 동남아 같은 경우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이미지와는 달리 전근대에는 지금처럼 농사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한반도처럼 물이 적정한 수준으로 안정적으로 공급된 문화권은 미 동부나 인접한 일본 정도이다.[18] 한반도는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세계에서 거의 제일 먼저 인류가 벼를 재배하기 시작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벼의 원산지가 아님에도 작물로서의 가치를 먼저 알아봤다는 이야기다.[19] 중국 왕조들의 기록을 보면 남부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의 수명이 유의미하게 짧다.[20]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자원 위주 경제에 너무 의존하다가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나라들도 생각보다 많다. 대표적인 게 러시아로, 땅도 크고 자원도 풍부하지만 자원 의존 경제 탓에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21] 또한, 나우루는 자원 때문에 한때 풍족한 삶을 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원 때문에 망할 위기에 놓인 나라로 유명하다. 해당 문서에도 있다시피 한때 인광석을 팔아 대박을 터뜨렸지만 무분별한 채굴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광석이 빠르게 고갈되면서 쪽박찼다.[22] 심지어 고려 말기까지도 삼국 부흥 운동이 일어나는 등 통일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온전하지는 않았다.[23] 고구려와 백제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뿌리가 같다는 인식은 있었던 것 같지만, 백제가 부여 계승을 표방한 것을 보면 연대 의식까지는 없었던 듯. 애초에 이 둘은 고국원왕개로왕의 죽음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사이였다. 다만 삼국이 언어적으로 유사했던 것은 맞다.[24] 석유는 현대에는 1860년대에 처음 발견되었고, 19세기 후반까지 석탄의 대체자원으로 쓰이다가 19세기 후반에 미국이 석유 보일러 선박 개발에 성공하면서 단번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자원으로 급부상하였다.[25] 그 덕에 이제는 모세가 떠나온 애굽 땅에 가스를 수출하고 있다.[26] 수천년 전의 인물이 벌인 행동을 현대의 그것과 연관짓는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