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치히 자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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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치히 자유시
Freie Stadt Danzig

파일:단치히 자유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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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파일:Free_City_Danzig_1930.svg.png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수도
단치히
정치 체제
공화제
국가원수
상원의장
언어
독일어
통화
단치히 굴덴

1. 개요
2. 지리
3. 역사
3.1. 성립
3.2. 나치당 집권 및 나치 독일에게 흡수
4. 단치히 자유시 출신 인물
5. 여담
6. 한국과의 관계
7. 외부 링크
8. 국가



1. 개요[편집]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떨어진 지금의 그단스크 지방에 위치한 도시국가였다. 면적은 1,966km2였고 인구는 1923년 기준으로 366,370명이었는데, 주민의 95% 쯤이 독일계였고 나머지가 폴란드계였지만 폴란드에 종속된 경향이 강했다. 폴란드는 이곳에 자국군을 주둔시킬 수 있었고, 세관도 통제할 수 있었다. 그 까닭으로는 폴란드가 이 단치히 없이는 내륙국이나 다름없기 때문. 하지만 그래봤자 폴란드 영토가 아니라는 자체로 한계가 명백했고, 단치히 바로 옆 발트해에 접한 짧은 해안선에다 '그디니아'라는 도시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게 또 단치히와의 갈등요소가 된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비교하면 홍콩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2. 지리[편집]


면적은 1,966 km²으로 영역 한가운데를 비스툴라 강(폴란드어: 비스와, 독일어: 바익셀)이 통과했다. 단치히 시와 그 인근의 여러 도시, 읍, 마을들을 관할하고 있었다.


3. 역사[편집]



3.1. 성립[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을 비롯한 동맹국이 패전하고, 11월 혁명으로 제정이 폐지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된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은 동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등의 식민지를 모두 포기해야 했다. 또한 본래 서프로이센의 주도였던 단치히 역시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 국제연맹에 의해 독립하였다. 그 까닭으로는 위에서도 서술했지만, 폴란드가 이 단치히 없이는 사실상 내륙국이었기 때문.[1] 1924년부터 냉동고, 식용유 제조공장, 철도, 조선소 등이 건설되어 발트해의 항구로 발전하였다.


3.2. 나치당 집권 및 나치 독일에게 흡수[편집]


1933년에는 95%의 독일계 주민의 지지를 받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했고, 대대적인 유대인 탄압 정책도 시작되었다.

나치 독일은 단치히 지역 반환을 구실로 폴란드 침공을 감행하였고, 이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자유시에서는 범게르만주의에 따라서 95%의 독일계 단치히 주민들이 정권을 장악한 나치당과 손잡아,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전쟁에 동참했다. 폴란드 군인들과 폴란드계 주민들은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등 전투에서 독일군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제압당하고 대다수가 총살당했다. 그리하여 나치 독일에 합병되고, 전쟁 말기에 와서 소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소련군 점령 아래에서 오데르-나이세 선이 그어지면서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합병되어 지금의 그단스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거주민 독일인들이 모두 추방되었고, 대신 소련에 합병된 커즌 선 이동에서 마찬가지로 추방당한 폴란드인들이 이 도시를 대신 채웠다.


4. 단치히 자유시 출신 인물[편집]




5. 여담[편집]


단치히 자유시 망명정부라고 자칭하는 단체가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2020년도 시점에서 단치히 자유시 망명정부는 사실상 페이퍼 단체로서 활동이 거의 없는 유령 단체이다. 단치히 출신 독일인 실향민 조직은 단치히 시민연합회(Bund der Danziger)이다. 매해 6월에 뤼베크(Lübeck)에서 연례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나치스독일을 위한 대안당 관련 인사들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며, 동맹 90/녹색당 소속의 질케 매렌호프(Silke Mählenhoff) 뤼벡시 부시장은 단치히 향우회 행사에 단골 연사이다.


6. 한국과의 관계[편집]


단치히 자유시가 존속하던 20세기 초중반 당시 한국은 주권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없었다.

1968년 서독에센에 있던 '단치히 망명 정부'에서 대한민국 외무부에 서울주재영사관설치를 허락해달라는 편지가 오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단치히 자유시 망명정부에 나치 냄새가 난다는 까닭으로 이를 거부했다.[2] 오늘날, 단치히 자유시 망명정부라 칭하는 단체는 독일, 베를린에 있다.

한편 로스비타 묄러(Roswitha Möller) 단치히 시민연합회 회장은 한국에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2019년 독일실향민 대표단 한국방문 행사 이후, 모종의 이유로 대부분의 도민회 간 교류가 휴면상태가 되었으나 함경남도-단치히 교류는 정치적, 종교적 중립성을 철저히 지켜가면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단치히 출신 독일 실향민 단체인 단치히 시민연합회는 한국의 이북 출신 실향민 단체인 함경남도 도민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 중이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상호 방문과 인적 교류 계획이 모두 취소되었으나, 코로나 위기 종식 이후 진행될 다양한 방식의 교류협력 방안을 놓고 상호간 활발히 협상 중이다. 예를 들어 실향민 후계 세대들을 위한 독일 유학 및 독일 현지 비즈니스 설명회 등이 신중히 검토 중이며, 실향민 관련 영상물 시사회 및 역사기록물 합동전시회 개최와 같은 공동 문화행사 프로그램 등이 또한 논의 중이다.


7. 외부 링크[편집]




8. 국가[편집]


독일어 원문

1절

Kennst du die Stadt am Bernsteinstrand,

umgrünt von ew'ger Wälder Band,

wo schlanke Giebel streben

empor zum Sonnenschein!

Ja, sollt' ich fröhlich leben,

in Danzig müßt es sein!

2절

Kennst du die Stadt, wo Turm an Turm

in Treue trotzt dem Zeitensturm,

wo stolze Schiffe gleiten

ins blaue Meer hinein!

Ja, sollt' ich tapfer streiten,

für Danzig müßt es sein!

3절

Kennst du die Stadt, wo deutsche Art

voll Kraft und Mut ihr Gut bewahrt,

wo deutsch die Glocken werben

und deutsch ein jeder Stein!

Ja sollt' ich selig sterben,

in Danzig müßt es sein!

한국어 번역

1절

그대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있고

영원한 숲에 덮여 있는 도시를 아는가?

경사진 지붕들이 우뚝 솟아 있는 곳!

아, 나는 오래 행복하게 살리라

아, 나는 오래 행복하게 살리라

단치히에서... 단치히에서...

그래, 그곳은 단치히일 것이다!

2절

그대는 건물들이 맞대어 서있고

시대가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도시를 아는가?

푸른 바다에서

배들이 유유히 떠다니는 곳!

아, 나는 용감히 싸우리라

아, 나는 용감히 싸우리라

단치히를 위해... 단치히를 위해...

그래, 그곳은 단치히일 것이다!

3절

그대는 독일인이 용기와 힘으로

그들의 가치를 지켜낸 도시를 아는가?

독일인의 종소리가 울리며

독일인의 초석이 있는 곳!

아, 나는 그곳에서 축복받으며 죽으리라

아, 나는 그곳에서 축복받으며 죽으리라

단치히에서... 단치히에서...

그래, 그곳은 단치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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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군 본부가 있는 그디니아가 있긴 했지만, 단치히가 없으면 폴란드의 항구도시는 단 1개에다가 해안선도 거의 사라지게 된다.[2] 일단 일개 임의단체가 주권국가의 외무부에 편지를 보내는 것부터 관심을 끌기 위한 행위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추축국과 연관된 것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2018년 4월 16일 베를린에서 단치히 시민연합회의 로스비타 묄러 회장과 대한민국 함경남도 중앙도민회의 염승화 회장간의 회동이 이루어졌으며 이 자리에서 적극적인 교류에 대한 담론들이 오가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