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벌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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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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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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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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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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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일본침공사례),
,364 ~ 404
(291 ~ 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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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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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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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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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칠중성 전투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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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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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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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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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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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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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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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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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칠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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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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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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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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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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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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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 ~ 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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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
-
원종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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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
-
후백제
대야성 전투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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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대야성 전투
,920,
-
후백제
서라벌 기습
,927,
고려
후백제
고창전투
,930,
후백제
고려
운주성 전투
,934,
고려
후백제




달벌대전
達伐大戰

시기
839년 음력 1월 19일 ~ 음력 1월 23일[1]
장소



신라 양주 수창군 대구현(달벌)
원인
신라 정치 권력 다툼.
교전 세력
청해진군+김우징군
(반란군)


신라 정부군
(진압군)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신라 군기.svg 김우징
파일:신라 군기.svg 김양[2]
파일:신라 군기.svg 장보고[3]
파일:신라 군기.svg 정연[4]
지휘관

파일:신라 군기.svg 민애왕
파일:신라 군기.svg 김흔(대흔)[5]
참가자}}}
파일:신라 군기.svg 염장
파일:신라 군기.svg 장변
파일:신라 군기.svg 낙금
파일:신라 군기.svg 장건영
파일:신라 군기.svg 이순행
파일:신라 군기.svg 김양순
참가자}}}
파일:신라 군기.svg 김이홍
파일:신라 군기.svg 윤린
파일:신라 군기.svg 김의훈
파일:신라 군기.svg 김민주
병력
청해진군 5,000여명
김양군 기병 3,000여명 이상
100,000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50,000명 이상 전사
결과
서라벌 함락과 민애왕 시해, 이후 신무왕 옹립.
1. 개요
2. 배경
3. 전개 및 경과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9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김우징을 장보고가 지원해 일으킨 쿠데타 중의 대승리.


2. 배경[편집]


제42대 흥덕왕이 일찍 죽은 아내 장화부인을 그리워한 탓에 그녀 사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아 후사없이 승하했고, 이에 차기 왕위를 두고 흥덕왕의 사촌인 김균정과 김균정의 조카인 김제륭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심복 김양[6] 등은 김균정을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에 먼저 들어갔지만, 김제륭을 지지하는 김명, 김이홍의 습격을 받았다. 김균정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김우징과 김양을 살아남으라며 도망치도록 했고, 결국 그는 김제륭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도망치던 김양 역시 배훤백(裴萱伯)의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은 건 덤이다.

어쨌든 살아남은 김우징과 김양은 각자 산야에 숨어 복수를 다짐하며 남은 병력을 수습한 후 837년 8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에 있었던 청해진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 장보고는 거사가 성공해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을 것 등의 모종의 약속을 받아낸 후, 김우징과 결탁해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서라벌로의 진격을 계획한다. 838년 2월 김양이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해 합류하고 838년 3월에 거사를 일으켰다.

한편 수도의 김제륭은 제43대 희강왕으로 즉위했지만 자신의 즉위를 도운 김명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곧 자살했고, 김명이 제44대 민애왕으로 즉위한 상황이었다.


3. 전개 및 경과[편집]


청해진군은 8천의 병력으로 북상해 지금의 광주광역시, 나주시 일대인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도착했다. 민애왕은 대감 김민주(金敏周)에게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게 했고,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시켜 기병 3,000명을 돌격시켜 신라 관군을 거의 모두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했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南原)에 이르러 신라 관군과 마주 싸워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동쪽으로 바로 더 진군하지 않고, 김우징은 군사들이 오랫동안 싸우느라 피로하다하여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쉬게 하는 한편 말들을 잘 먹였다. 이 해 겨울에 혜성이 서쪽 방향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청해진군의 여러 사람들이 축하하며 말했다.

“이는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1년 후인 839년 정월 19일, 장보고의 청해진 군사와 김양의 군사가 밤낮으로 행군하여 19일에 비로소 달벌(達伐, 대구)에 도착했다. 민애왕은 김양의 반란군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며 대장군 김흔[7]과 대아찬 윤린(允璘), 김의훈(金嶷勛)[8] 등에게 무려 1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거느리고 청해진군을 막도록 달벌에 파견했다. 신라 관군 100,000명의 병력은 이전 삼국시대나 이후 시대를 통틀어 봐도 손꼽힐 만한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관군이 급하게 모은 대군이라서[9] 사기가 낮았고, 태반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장보고의 사병이던 청해진군은 관군에 비하면 소수이지만 강력한 정예 병력들이였다. 결국 회전으로 맞붙은 끝에 청해진군은 수천명의 정예 군대로 무려 10배가 넘는 관군의 절반 이상을 전사시키고, 다수를 생포하는 대승을 거둔다. 대장군 김흔은 살아남았으나 전쟁에서 대패했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소백산에 들어가 갈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여생을 지냈다고 한다.[10]

서라벌에서 전전긍긍해 하던 민애왕은 달벌(대구)에서 주력군이 전멸한 소식을 듣고 측근들이 모두 허둥지둥 도망가자 본인도 어쩔 줄을 몰라 넘어져가며 달려 월유(月遊)의 집, 혹은 이궁(離宮, 별궁)에 숨었지만 결국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시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비록 폐위와 함께 비참히 시해당했지만 일단은 한때 왕이었음을 인정해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대왕의 예로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했다. 민애왕 김명과 함께 김균정 살해의 주동자라 할 수 있는 김이홍은 가족을 버리고 산으로 도주했으나 그를 증오하는 신무왕이 병사들을 보내 끝까지 추적했고 결국 추격해온 병사들한테 붙잡혀 죽고 만다. 그 외에 김양을 부상입혔던 배훤백 등은 관대하게 살려주었고, 그러자 연루된 여러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안심하면서, 정국이 안정되었다.

“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11]

너는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로다. 내가 괘념치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이후 김우징이 제45대 신무왕으로 새로 즉위했지만 1년도 못 되어 승하하고 태자가 제46대 문성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문성왕은 장보고의 약속 이행 요구를 거절하고 장보고 휘하의 장수 염장을 매수해 장보고를 암살하한 후, 청해진을 싸그리 쓸어버렸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장보고를 주인공으로 다룬 <해신(드라마)>의 48회에 등장하며 실제 역사기록에 좀 더 양념을 쳐서 비중있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당나라의 무역금지령을 풀고자 양주로 간 장보고는 자미부인이 금지령을 대가로 당나라 환관 천상귀에게 한주의 옥토를 주려는 사실에 분노한다. 천상귀를 습격한 뒤 자미부인과 김명에 대해 분노한 장보고는 청해진으로 복귀하자마자 김우징을 추대하며 황도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한편 천상귀의 분노를 산 자미부인은 귀국하여 즉위한 김명, 민애왕을 축하하며 청해진 공격의 허락을 받고는 자신의 상단이 있는 무진주를 기점으로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해 청해진을 공격한다는 작전을 세운다. 이와 함께 자신의 사병들을 관군에 편입시키며 자신의 측근들이 관군의 지휘권을 장악하도록 한다. 한편, 평동군은 즉시 달벌로 진군해 황도를 장악하자는 김양과 무진주 점령을 우선하자는 장보고와의 대립이 있었다. 이때 염장이 장보고의 손을 들어주며 중재에 나섰고 이에 따라 김우징과 평동군 일부가 달벌로 향하는 척 위장을 하는 동안 김양과 장보고가 무진주를 함락시킨다는 양동작전이 수립된다.
이에 따라 김양이 무진주 외곽에 있던 사자금당을 공격해 무장해제시켰고, 장보고는 무진주로 잠입하여 자미부인의 지시로 무주도독으로 있던 병부령을 단숨에 항복시키면서 평동군은 큰 공성전 없이 무진주 무혈입성에 성공한다. 무진주에 있던 자미부인은 탈출하려 하다 염장에게 잡히나 지난 날 염장을 살린 대가로 풀려난 뒤 황도에 가서 무진주 함락을 알린 뒤 민애왕으로부터 전권을 받는다. 전권을 받은 자미부인은 남원경을 내주는 대신 평동군의 보급부대를 습격하면서 압도적인 수의 관군으로 달벌에서 대회전을 치루기로 작전을 수립한다. 이에 따라 관군은 평동군의 보급부대를 습격하였고 그 과정에서 보급대를 끌던 정화가 자미부인에게 납치된다. 자미부인은 장보고와 염장 그리고 김우징이 아끼던 정화의 목숨을 대가로 평동군의 철수와 김우징을 황도로 넘긴다는 협상을 시도하였고, 김우징이 협상에 응하려 했지만 장보고는 이를 거절한다.
이후 염장을 덕진포와 울주로 가는 배편을 통해 황도로 잠입시켜 정화를 구출하고 황도의 봉수대를 장악할 것을 지시한다. 자미부인이 이끄는 신라 관군은 달벌에서 장보고의 평동군과 대치하던 중 염장의 공작으로 황도 함락을 알리는 봉화가 오른다. 이에 자미부인은 노당과 구서당의 병력을 황도로 철수시켰고 평동군은 수가 줄어 든 관군과 전투를 벌인다. 결국 관군은 달벌에서 패했고, 황도로 돌아가던 관군 역시 벽령재에서 매복하던 김양의 병력에 소멸한다. 결국 황도도 평동군에 함락당하고 김양은 사령부령과 소수의 군관들과 함께 도주하던 민애왕을 제거한다. 역시 소수의 잔존 병력과 함께 울주로 도주하던 자미부인 또한 악연을 끝내려는 장보고의 추격에 붙잡혀 생포된다.


[1] 제44대 민애왕 김명이 붙잡혀서 사망한 날이다.[2] 달벌대전때 김우징군을 지휘한 실질적인 총사령관이다.[3] 달벌대전때는 청해진에 계속 머물렀기에 실제 전장에는 없었다.[4] 장보고를 대신해 청해진에서 파병한 5,000명의 병력을 이끌었다.[5] 달벌대전때 신라 조정군을 이끈 실질적인 총사령관이다.[6] 제29대 태종 무열왕 계통으로서 제38대 열조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배한 김주원의 증손자이다. 당연히 왕위 계승에서는 멀었다.[7] 혹은 대흔(大昕)[8]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성씨가 없이 이름이 '의훈'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에는 '김의훈'(金嶷勳) 혹은 '김억훈'으로 기록되어 있어 의훈의 성이 김씨인 것을 알 수 있다. 지증대사탑비의 기록에 통해서 김흔(대흔)의 경우처럼 산속에 들어가 절에서 생애로 마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9] 수도인 서라벌과 그 주변의 지역들에서 급하게 징집하여 모은 병력일 확률이 높다.[10] 참고로 이 사람의 딸이 조신의 꿈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이다.[11] 전한한신의 참모였던 괴철유방에게 붙잡혀 가서 했던 말이 원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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