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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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바오로성당

파일:답동성당.gif
기본 정보
위치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50번길 2 (답동)
종교
가톨릭
교구
서울관구 인천교구
지위
주교좌 성당
주임신부
김흥주 베드로 몬시뇰(2020~)
보좌신부
홍현기 요셉(2023~)
본당설립
1889년 7월 1일 (134주년)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287호
인천 답동성당
仁川 沓洞聖堂
Incheon Dapdong Cathedral

소재지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50번길 2 (답동)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천주교 / 성당
면적
6,164㎡
지정일자
1981년 9월 25일
제작시기
조선 고종 22년 (1888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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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4. 역대 주임신부
5. 전례 시간표
6. 교통
7. 주변 시설 및 기타 정보
8. 외부 링크
9. 사적 제287호




1. 개요[편집]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50번길 2 (답동)에 자리잡은 천주교 인천교구 유일의 주교좌 성당이다. 정식 명칭은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 바오로 대성당이고, 줄여서 답동성당(畓洞聖堂)이라고 부른다. 주보성인은 '성 바오로'이다.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가톨릭 건축물기독교대한감리회 내리교회[1], 성공회 서울교구 내동성당[2]과 더불어 인천에서 유서 깊은 종교시설로 유명하다. 실제로 이 세 교회는 인천을 대표하는 가톨릭, 감리교, 성공회 교회로써 사이가 돈독한 편이고 정기적으로 연합음악회 등을 개최하는 등 교회일치운동에 모범을 보이는 곳이다. 성당 건물은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1981년 사적 제287호로 지정됐다.

건축물로서도 역사적 가치가 깊지만, 천주교 인천교구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현재의 성전 건물이 건축된 것은 1897년이지만 현 답동본당의 전신인 제물포본당[3] 자체가 설립된 것은 조선프랑스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후 3년이 지난 1889년이다. 인천지역 모든 가톨릭 성당의 모(母)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천교구 연혁을 보면 현재 본당으로 승격된 부평공소(현 인천 부평2동성당)나 소사공소(현 부천 소사성당) 등 인천시내 여러 공소가 원래 답동성당의 산하 공소였다. 그러다가 공소가 있던 지역의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답동성당에서 분가해 부평성당과 소사성당을 설립하는 등 본당이 널리 퍼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인천광역시와 주변 지역의 가톨릭 교세가 확장되고 답동성당이 낡고 좁다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현재의 답동성당으로는 교세를 수용하기 모자라며 주교좌성당이 더 필요하다"는 비판 아닌 비판이 있다.[4] 실제로 제2대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가 생전에 "답동성당이 협소함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2. 역사[편집]


19세기 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블랑 주교의 결정에 의해 제물포[5] 성당이 건립되었다.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블랑 주교는 제물포에 유진 코스트[6] 신부를 파견하였고,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니콜라 빌렘[7]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성당(답동성당의 원래 이름)을 1889년 7월 1일에 설립하게 된다.

빌렘 신부는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성전을 지을 공간을 마련한다. 1890년 용산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신 바오로 1890~1893)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해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수녀 파견을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가는 등 건립을 위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후 부임한 마라발 신부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성전 건립이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결국 1897년 7월 4일에 완공되었다.

최초의 성전이 건립될 당시인 1900년 성당 종탑에 3개의 종이 각각 봉헌·설치됐는데 각각의 종은 종 봉헌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3세, 조선대목구 교구장이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 마라발 신부 등 3명의 성직자들을 위해 봉헌됐다. 이 종은 이 당시 인천해관(현 인천세관)의 해관원으로 제물포성당 신자였던 청나라 사람 우리탕(吾禮堂)과 그의 부인인 스페인 사람 아말리아 우리탕이 주축이 돼 만들어졌고[8] 제물포성당에 다니던 신자들도 일부 돈을 냈다고 한다.

성당의 종은 종탑에 걸린 이후 매일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에 울리며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렸다. 그랬던 이 종은 한때 없어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 말엽 조선총독부는 무기 제작을 위한 군수품 공출 차원에서 쇠로 된 물건은 모조리 뺏어가고자 했다. 성당의 종도 공출 대상으로 낙점됐으나 이 당시 본당의 주임사제이자 본당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주임사제였던 임종국 바오로 신부가 기지를 발휘해서 종을 지켜냈다. 임 신부는 일본군 관계자에게 "종을 무기로 만들기보다 인천시내 곳곳에 설치해서 주민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는 용도로 쓰자"고 제안했고 총독부와 일본군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9] 임 신부의 제안대로 성당의 종 3개 중 1개는 성당 종탑에, 다른 1개는 인천부청 청사 인근인 응봉산 쪽에, 나머지 1개는 숭의동 쪽에 설치했다가 해방 이후 성당으로 모두 돌아오게 됐다. 성당으로 돌아온 종은 1990년까지 매일 세 차례 타종을 했으나 주변 지역 주민들의 민원과 종 보호를 위해 낮 12시와 오후 6시에만 녹음된 차임벨 형태로 종을 치고 있다.

현재의 모습으로 성당이 완성된 것은 1937년이다. 1930년대 중반 당시 인천부 관할 내 성당은 답동성당이 유일했고 이 성당으로 오는 신자 수가 1500명을 넘어서자 성당의 규모는 신자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제4대 주임신부인 드뇌 신부가 성당 증축 계획을 세웠고 1935년부터 본격적인 증축 작업에 돌입했다. 증축 공사는 1937년에 끝났고 제9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인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의 집전 하에 축성식을 거행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답동성당은 1950년 6.25 전쟁의 포화 속에도 일부만 훼손됐을 뿐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답동 언덕에 성당이 지어져 있어서 인천 원도심 어디서든 이 성당의 종탑이 보였기 때문에 이 시절부터 인천 원도심의 랜드마크가 돼왔다. 1961년 천주교 인천교구가 설정되면서 답동성당은 인천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정해졌다. 1970년대 사회 안팎에서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됐을 때는 서울 명동성당이 그랬던 것처럼 성당 바로 앞에 있던 인천 가톨릭회관과 함께 인천지역 민주화 운동의 성지 역할을 했고 1970년대 후반 이 성당의 주임을 맡았던 김병상 신부는 인천지역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의 대부가 됐다.

답동성당 주변은 2000년대부터 변화를 맞게 된다. 2001년 성당 뒤편의 인천박문초등학교가 100년의 답동 역사를 뒤로 하고 동춘동으로 학교를 옮겼고 이 자리를 인천교구청 별관 청사로 활용했다. 2010년부터는 인천 중구청에서 성당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 주변에 대한 공원 녹지화를 추진했다. 공원 녹지화 계획에 따르면 성당 마당 지하에는 주차장을 만들고 지상으로는 공원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공사가 진행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실질적인 공사가 시작된 것은 2016년부터다. 답동성당 측은 중구청에 성당 부지 일부를 넘겼고 인천교구는 2016년부터 옛 가톨릭회관에 있던 교구청 내 각 부서별 사무실을 송림동 옛 박문여중고 건물로 이전했다.

2017년 말부터 가톨릭회관과 회관 뒷편 언덕길을 철거하면서 '답동성당 관광 자원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실질적인 공원화 공사는 2021년부터 진행됐는데 옛 가톨릭회관 터를 계단공원으로 만드는 한편 성당 마당 지하 4개층 공간에 211면 규모의 주차장을 지었다. 공사는 2023년 5월에 마무리됐고 6월 21일 관광 자원화 사업 준공식을 진행했다. 관광 자원화 사업 완공 이후 차량 진입이 가능했던 성당 마당에 잔디공원이 조성되면서 성당 내 차량의 진입은 후문 쪽 박문유치원 앞까지만 가능해졌다.

성당 앞마당에는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를 비롯해 인천지역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기념하는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특히 관광 자원화 사업을 계기로 성당 마당 앞을 가리고 있던 나무들과 가톨릭회관 건물이 사라지면서 인천항 내항과 월미산 너머로 지는 석양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3. 결혼식장[편집]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서 특유의 웅장한 분위기를 보유한 문화재급 성당이기 때문에 천주교 인천교구 관내 신자 중에서는 이 성당에서 혼인성사의 거행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 무엇보다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종종 나온 적이 있기 때문에 답동성당에 대한 인기가 높은 편이다.

다만 주 5회의 혼인미사가 가능한(파밀리아 채플홀 포함 시 주 11회) 명동성당 대성전과 달리 답동성당은 주 2회(토요일 오후 1시, 주일 오후 1시 30분)로 예식 스케줄이 매우 한정돼 있다. 이 때문에 답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렵다. 자세한 혼인미사 계약 조건은 링크를 참조하자. 보면 알겠지만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다. 설령 계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불편사항은 존재한다. 우선 성당의 규모는 그럭저럭 큰 편이지만 피로연장으로 쓰이는 답동문화관 내 공간이 매우 한정적이라서 하객이 많을 경우 불편을 호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때문에 인천교구에서는 혼인미사를 전문적으로 치를 수 있는 본당을 최근 들어 건립해 이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막역 인근에 있는 동춘동성당이나 인천논현역 바로 앞에 있는 논현동성당이 그렇다.


4. 역대 주임신부[편집]


순서
이름
기간
현재 소임지
초대
빌렘(J.Wilhelm)요셉
1888.7~1890.10
선종
2대
르비엘(E.Le.Viel) 에밀
1890.11~1893.4
선종
3대
마라발(J.Maraval) 요셉
1893.4~1904.3
선종
4대
드뇌(E.Deneux)에우제니오
1904.4~1937.6
선종
5대
임종국 바오로[10]
1937.6~1958.10
선종
6대
버크(J.Burke,장) 요한
1958.11~1963.8
선종
7대
설리반(H.Sullivan) 헨리코
1963.8~1968.4
선종
8대
강의선 힐라리오[11]
1968.4~1970.1
원로사목자
9대
박성규 베네딕도
1970.1~1975.11
원로사목자
10대
김병상 필립보[12]
1975.11~1980.2
선종
11대
김상용 힐라리오
1980.2~1984.3
원로사목자
12대
송주석 안셀모
1984.3~1986.2
선종
13대
강용운 시몬
1986.2~1992.2
선종
14대
정윤화 베드로
1992.2~1996.2
원로사목자
15대
이수일 제르바시오
1996.2~2000.1
선종
16대
이학노 요셉
2000.1~2004.1
원로사목자
17대
김용환 세례자 요한
2004.1~2009.1
원로사목자
18대
이민주 세례자 요한
2009.1~2014.1
연수성당 주임
19대
정귀호 다니엘
2014.1~2018.1
원로사목자
20대
최경일 빈첸시오
2018.1~2020.1
산곡3동성당 주임
21대
김흥주 베드로
2020.1~


5. 전례 시간표[편집]


미사
  • 주일 미사
    • 토요일 16:30 (어린이 미사), 19:00 (중고등부 미사)
    • 주일 6:00, 9:00, 11:00 (교중 미사), 16:00 (영어 미사), 19:00 (젊은이 미사), 21:00
  • 평일 미사
    • 월요일: 6:00
    • 화요일: 6:00, 19:00
    • 수요일: 6:00, 10:00
    • 목요일: 6:00, 10:00
    • 금요일: 6:00, 19:00
    • 토요일: 6:00

고해성사
  • 주일 미사 시작 30분 전
  • 평일 미사 시작 20분 전

유아 세례
  • 매월 첫 번째 토요일 17:30

병자 영성체
  • 매월 첫 번째 금요일 9:30

병자성사
  • 교우가 위급할 때 언제나 연락, 사무실 또는 본당 신부에게.

성시간
  • 매월 첫 번째 금요일 (19:00 미사에 이어서 진행)

혼인성사
  • 혼인 2개월 전 면담 신청 (사무실 문의)

6. 교통[편집]




7. 주변 시설 및 기타 정보[편집]


성당 바로 옆에 박문유치원이 있고 성당 아랫편에 인천교구청 역할을 했던 가톨릭회관이 있었으나 답동성당 관광 자원화 사업으로 인해 2018년 5월 철거됐다. 박문유치원 옆에는 답동문화관이라고 명명된 벽돌 건물이 있는데, 답동성당에서 혼인미사를 할 경우 이 건물 2층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다만 매우 좁다. 원래 성당 뒤편에는 인천박문초등학교가 있었는데 2001년 연수구 동춘동으로 이전했다. 이전 후 옛 학교 건물이 리모델링된 뒤 인천교구청 별관으로 사용됐다. 교구청이 송림동 옛 박문여자중학교박문여자고등학교 건물로 이사간 후에는 가톨릭 사회사목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성당 앞마당은 박문초등학교가 있던 시절에는 운동장으로 쓰였고 학교 이전 후에는 마당 전체를 돌마당으로 만들어 관광 자원화 사업 완성 전까지 주차장으로 썼다.

사실 답동성당의 최대 문제점은 주차 공간의 부족이었다. 성당 앞마당과 가톨릭회관 뒤편에 주차 공간이 있었으나 다 합쳐도 100대 미만의 차를 대는데 불과했다. 이 문제는 앞서 '역사' 문단에서 언급한 관광 자원화 사업을 통해 해결됐다. 성당 주차장으로 들어오려면 우현로 신포시장 앞 삼거리에 있는 출입구로 가면 된다. 참고로 이 주차장은 신포 지하상가와도 연결이 된다. 과거처럼 성당 후문 쪽으로도 차량 진입이 가능하지만[13] 공간이 워낙 좁기도 하고 박문유치원 통학버스와 답동성당 상주 신부들의 주차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후문 내방객의 주차는 불가능하다. 그냥 마음 편하게 성당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된다. 혹시 성당 주차장이 꽉 찼을 경우에는 인천교구 사회사목센터(옛 박문초등학교) 뒤편의 공영주차장이나 신포시장 쪽 공영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답동성당은 주차 공간이 좁은 대신 대중교통을 통해서도 편리하게 올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동인천역신포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으며 동인천역을 오가는 수많은 시내버스들도 신포시장 앞에 반드시 정차한다. 아울러 인천광역시중구가 적극 밀고 있는 개화기 거리 도보 관광 코스에 이 성당이 빠지지 않는데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내리교회, 성공회 내동성당, 신포국제시장,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등이 있다.

주교좌성당이기 때문에 주일에 거의 매 시간 미사가 봉헌되는데, 오후 4시 미사는 영어로 봉헌된다. 인천지역에 있는 외국인 신자들을 위한 미사인데, 대부분은 필리핀동남아시아 출신 신자들이 이 미사에 온다. 천주교 인천교구에 파견된 필리핀인 신부가 영어 미사를 집전한다. 더불어 주일 밤 9시에도 미사가 봉헌되기 때문에, 낮미사나 저녁미사 참례가 어려운 이들에게는 미사 참례를 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8. 외부 링크[편집]




9. 사적 제287호[편집]



신부 홍요셉이 세운 벽돌 구조의 성당으로 1897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1937년 두차례에 걸친 내부공사가 있었지만, 비교적 옛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당의 평면은 십자형이며,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였으나 중요한 곳에는 화강석재를 의장적으로 사용하였다. 정면의 중앙과 양 옆으로 출입구가 나있고, 가운데 출입구 위로 장미꽃 모양의 창을 설치했다. 건물 중앙에 큰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다음, 끝부분에 장식적인 작은 탑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초에 지어진 우리나라 교회건물의 보편적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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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인천역과 답동성당 사이 언덕에 있다.[2] 자유공원 인근에 있다. 한국 성공회 최초의 교회이며, 성당은 파괴되어 50년대에 재건했다.[3] 당시 본당 이름이 제물포였던 것은, 본당 설립 시기 이 지역을 제물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현재 제물포역 인근 수봉공원 밑에 제물포성당이 있기는 하지만, 답동성당의 전신이었던 제물포성당과는 전혀 무관하다. 현재의 제물포성당은 1970년대에 설립됐다.[4] 주교좌성당이 꼭 하나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국내에도 대구대교구, 광주대교구, 수원교구, 부산교구 등 주교좌성당이 2곳인 교구들이 있다.[5] 역사적 의미에서 원래 제물포를 의미하는 지역은 현재 제물포역 인근 지역이 아니라 현재의 인천 원도심 주변을 뜻했다.[6] 서울대교구 명동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프랑스인 신부.[7] 안중근 토마스 의사 및 그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으며,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전 고해성사를 주었던 프랑스인 신부.[8] 이 당시 우리탕 부부는 인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부자였다고 한다. 상하이에서 만난 프랑스 후작이 전 재산을 우리탕에게 유산으로 물려줬는데 오늘날 자유공원 기슭에 대저택을 지을 정도로 돈과 땅이 많았다고 한다.[9] 비슷한 시기 명동성당의 종도 뺏길 뻔 했으나 이 당시 명동성당 보좌신부였던 노기남 신부가 기지를 발휘해 종탑의 끈을 끊고 종탑을 폐쇄하면서 종을 지켜냈다. 하지만 대성당 제대 앞에 있던 금속제 영성체 난간은 지키지 못했다. 오늘날 명동성당 제대 앞 영성체 난간이 나무 재질로 설치된 것은 이 때문이다.[10] 한국 천주교 94번째 신부. 답동성당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 이 당시는 천주교 인천교구가 설정되지 않았던 시점이었기에 경성대목구 소속 신부였다. 1986년 선종.[11] 한국 천주교 447번째 신부이자 천주교 인천교구가 1961년 설정된 이후 최초로 배출된 인천교구 소속 1호 한국인 신부(1963년 2월 서품). 현재 인천교구 소속 사제 중 서품 순번이 가장 빠르고, 현재 생존 중인 인천교구 소속 사제 중 가장 큰 어른이시다.[12] 한국 천주교 617번째 신부이자 인천지역 민주화 운동과 가톨릭계 노동 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원로 사목자. 재임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전국적인 반(反)유신·반독재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답동성당 주임을 맡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는데 1980년대 문 전 대통령이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김병상 신부와 알고 지냈다고 한다. 2020년 4월 25일 선종했으며 민주화 운동에 대한 생전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사망 이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13] 대신 일방통행이다. 신포시장 앞에서 인천기독병원 방향으로만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