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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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위의 장수로 자는 치기(稚起). 진창군(晉昌郡) 명안현(冥安縣) 출신.
2. 개요[편집]
당화의 아버지 당요(唐繇)는 돈황(敦煌)에서 이고를 추대하여 서량 정권을 세우는데 기여하였다.
421년, 서량이 북량에게 멸망하자 당화는 형인 당계(唐契), 외조카 이보와 함께 이오(伊吾)로 달아났고 2,000명의 유민들과 함께 유연에 신종하였다. 유연에서는 당계를 이오왕(伊吾王)으로 봉하였다.
20년 뒤, 당화와 당계는 북위에 사자를 보내 귀순했으나 유연의 압박을 받아 결국 고창(高昌)으로 달아났고 유연의 욱구려오제는 장수 아약(阿若)에게 기병을 주어 당화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백력성(白力城)에 이르러 당화는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아약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 아약과 당계가 전사하였다. 당화는 잔당을 수습하고 전부왕국(前部王國)으로 달아났다. 당시 저거안주가 횡절성(橫截城)에 주둔해 있었는데, 당화는 횡절성을 공격해 함락하여 저거안주의 조카 저거수(沮渠樹)를 참수하고 다시 고녕성(高寧城)과 백력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당화는 다시 북위로 사람을 보내 귀순할 의사를 밝혔다. 당화는 차이락과 함께 저거안주를 공격해 물리쳤고 여기서 300명을 참수하였다.
448년, 태무제가 성주공(成周公) 만도귀(萬度歸)에게 언기(焉耆) 토벌을 명하면서 당화와 차이락에게도 종군을 명하였다. 당화는 조칙을 받들어 출정했고 때마침 만도귀가 유려성(柳驢城)을 비롯한 6개의 성에 항복을 설득하자 기회를 이용해 파거라성(波居羅城)을 함락하였다. 이후 당화는 쿠처를 정벌할 때 만도귀의 명에 따라 언기에 주둔하였다. 이때 유려성의 성주 을진가(乙眞伽)가 성을 점령하여 배반하자, 당화는 100명의 경기병을 이끌고 유려성으로 입성하여 을진가를 사로잡아 참수하였으며 북위의 서역 정벌에 공을 세웠다.
451년, 당화는 평성으로 입조하여 태무제를 알현했고 태무제의 두터운 총애와 더불어 귀빈으로 대접 받았다.
452년, 문성제가 즉위한 뒤 당화는 태무제 때 귀순하여 공을 세운 점을 인정받아 진남장군(鎭南將軍), 주천군공(酒泉郡公)에 봉해졌다.
태안(太安) 연간[1] , 당화는 제주(濟州) 자사로 전출되어 치적을 세웠다. 이후 내도대관(內都大官)으로 임명되어 사건을 심리할 때 가혹한 형벌을 내리지 않아서 칭송을 받았다.
당화는 황흥(皇興) 연간[2] 에 죽어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태상경(太常卿), 주천군왕(酒泉郡王)으로 추증되었고 선(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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