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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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발생 전후 행적
2.1. 의문점
3. 수사 종결
4. 유가족의 주장
5. 사건 이후
5.1. 범인 검거
5.2. 재판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buksori.jinbo.net/sub02_1.gif

1998년 10월 17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 간호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은희가 사망한 사건. 경찰은 정 양이 고속도로무단횡단했다가 일어난 교통사고사로 수사를 종결했으나 유족들은 여러 정황들로 성폭행 후 일어난 계획적인 살인이라고 주장했었다. 2013년 범인이 잡혔는데 조사 결과 계획 살인까지는 아니지만 집단 성폭행은 사실로 확인되어 경찰은 여론의 집중적인 비판에 시달렸다.




2. 사건 발생 전후 행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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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16일은 계명대학교의 축제 기간이었다. 정양은 경찰행정학부에서 주관한 '주막촌'이라는 행사에 참석했다. 금요일이라 다음 날에 별 일이 없었던 정양은 학부생들과 어울리며 을 마셨지만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그때 경찰행정학부생으로 동아리 친구이자 남자친구였던 1학년 박모 군이 술에 몹시 취해 그를 귀가시켜 주기 위해 밤 10시 30분쯤 함께 교문을 나섰다가 밤 10시 40분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박 군은 20분 후인 11시경 학교 정문 건너 성서 병원 앞에서 정신을 차렸지만 정 양이 보이지 않자 무선호출기로 호출했으나 답이 없자 혼자 귀가했다. 박 군은 사건 이후 경찰 조사에서 교문을 함께 나선 이 후 병원 앞에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20분 동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한편 다음 날인 10월 17일 새벽 5시 10분경 119로 교통사고 사망 신고가 들어왔다. 학교에서 약 4km 떨어진 구마고속도로 하행선 7.7km 지점[1]에서 덤프트럭이 무단횡단을 하던 행인을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는데 사망자가 바로 정 양이었다. 당시 52세였던 가해자인 덤프트럭 운전자 최모 씨가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던 정 양이 자신의 트럭에 치어 즉사했다고 신고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 양이 박 군과 함께 교문을 나선 전날 밤 10시 40분 이후부터 사고가 일어난 사고 당일 새벽 5시 10분까지 6시간 반 동안의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범인이 잡혔으니 조사를 해 봐야 윤곽이 나올 것이다.


2.1. 의문점[편집]


당시 유가족이 제기한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파일:external/buksori.jinbo.net/sub02_3.gif

- 1. 신고자 최 씨는 당시 전과가 수십 개나 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진술이 앞뒤가 맞지 않는 데다 피해자 유족과 만나는 것조차 극구 기피했다. 경찰은 가족들의 교통사고 이의신청에도 불구하고 정양이 행방불명된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전혀 수사도 하지 않은 채 단순 교통사고라고 단정하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했다.
- 2. 사고 현장에는 출혈이 거의 없는 데다 시신에는 속옷이 모두 없어진 채 겉옷만 입혀져 있었다.
- 3. 피해자 유족은 정양의 학교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물증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없어진 속옷 중 팬티 거들만 사고지점 확인에 나선 동료학생 임모 군에 의해 사고 현장에서 인근에서 발견되었다. 이 팬티는 사고 현장에서 30m 떨어진 지점, 즉 사고 후 차를 세웠다고 최 씨가 말한 곳 가드레일 아래 도로 가장자리에서 발견되었다.
- 4. 이상하게 여긴 피해자 유족이 모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정양의 시신의 속옷을 확인하려고 하자 해당 병원 영안실 직원 이모 씨가 바지 주머니 안감을 내보이며 그것이 팬티라고 하면서 가족을 속이려 했다.[2] 거기다 사고 현장의 시신에는 원래 브래지어가 없었는데 병원에서 누군가가 깨끗한 새 것으로 입혀 놓았다. 더구나 경찰은 이 점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
- 5. 밤 10시 40분 정양과 함께 학교 교문을 걸어 나간 박군의 진술이 신빙성이 떨어졌다. 박군은 자신은 교문을 나선 이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박군은 '만취된 채로 잠을 자고 있었으며 그래서 아무 기억도 없다. 불과 20분 후인 11시경에 깨어 보니 학교 근처 S병원 앞이었고[3] 정양이 걱정되어 삐삐로 호출하였으나 회신이 없어 그냥 집으로 갔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진술을 했다. 하지만 수사경찰은 그 진술을 그대로 믿고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 6. 박군은 사고 발생일 영안실에 술이 취한 상태로 조문차 잠시 들렀다. 그리고 이틀 후 정양의 유족이 자세한 사고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왠지 끝까지 피하려 했고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몹시 화를 내자 마지못해 응하긴 하였으나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은 그저 '아무 기억이 없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만 하고 도망가듯 떠났다. 이후에는 아무리 연락해도 '아무 할 말도 없고 만날 이유도 없다'며 계속 피해 다녔다.[4]
- 7. 부검 결과 '역과(轢過, 자동차로 깔아뭉개고 지나가는 것)로 손상에는 출혈이 없어 역과시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는데도 달서경찰서에서는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
- 8. 부검 담당이었던 모 대학교 곽 모 교수가 부검 결과를 가족에게 숨기려고 했다. 부검 의뢰 사항과 엉뚱한 부검 결과만을 보고하였고 부검 진행 사항과 부검 내용 등에 관하여 가족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 9.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 유족과의 협조를 굉장히 기피했다. 이런 사건에서는 피해자 유족에게 오히려 협조를 구해야 하는데 피해자 유족이 협조를 원하는데도 극구 거절했다. 교통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있는데도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 봐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아예 수사 의지가 없었고 지문감식 같은 기초수사마저 기피했다.
- 10. 사고 운전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목격자가 있는데도 이를 숨겨 왔고 경찰 역시 이 목격자에 관한 수사를 하지 않았다. 사고 당시 덤프트럭 운전수 최씨에게는 항상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라다니던 동료 트럭 운전수이자 목격자 최모씨가 있었다. 그러나 최씨는 자신에게 유리한 목격자임에도 불구하고 사고 당시 목격자가 없었다고 진술했으며 유가족들이 수소문 끝에 찾아낸 목격자 최씨가 사고 현장에 차를 세우지도 않고 2차선으로 바꿔서 지나쳤다고 말했다.
- 11. '주막촌'을 열었던 해당 학부는 왠지 서명운동에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특히 박군은 정양의 동아리 친구로 자신이 술에 취해서 정양이 바래다 주려고 데리고 나갔다가 봉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족을 보면 피하고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으며 서명운동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 12. 담당형사가 가족이 수거해 온 속옷을 보고 '아줌마 속옷' 운운하며 정양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양의 쌍둥이 여동생은 언니 정양과 똑같은 팬티를 같이 선물받았므로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 13. 결정적으로 무리 없을 정도로만 술을 마신 정양이 왜 박군을 인근 병원 앞에 그냥 두고 본인은 집과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학교에서 4km 이상 떨어진 고속도로까지 갔을까?

이처럼 의문투성이인데도 경찰은 피해자 유족더러 '교통사고가 아님을 증명해 오면 운전자를 당장 구속하겠다'고 하거나 피해자 가족이 박군을 다시 조사하거나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하면 '요즈음은 강제수사를 할 수 없다'는 등 무책임한 행태만 거듭했다. 더구나 납득할 만한 해명도 없이 그저 '단순 교통사고'라고 우기기만 했다. 용의자가 체포된 후에 보면 상기 의문점 중 상당수는 유가족의 주장처럼 계획적인 은폐나 전문범죄조직의 소행은 아니라는 게 확인되었지만 반대로 경찰이 무성의하고 비협조적이었다는 것 역시 확실히 드러났다.

3. 수사 종결[편집]


1999년 12월 29일 달서경찰서장은 형사과장과 담당형사를 배석시킨 자리에서 사고 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팬티 거들이 '정양의 것이 맞다'는 가족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팬티는 축 늘어졌고 색깔이 바랜 것으로 보아 사고자의 것이 아니고 아줌마 팬티인 것 같다'면서 담당형사보다 더욱 해괴망측한 주장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사고현장에 출혈이 없는데도 경찰이 단순 교통사고라고 주장한 이유 등 의문점을 묻는 문서를 가족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달서경찰서장은 즉시 답변해 주기로 자신 있게 약속해 놓고도 두 달이 넘도록 아무 회신도 못한 채 전전긍긍했고 이후에는 소식이 없었다.

또 유가족 측은 후술할 인터넷 진상규명 홈페이지를 개설한 후 억울함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대한민국 경찰청, 대검찰청 등 수사관계기관과 청와대까지 제출했으나 하나같이 '관할 경찰서에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는 등의 무책임한 답변 뿐이었으며 기세등등해진 담당형사는 '결국 나한테 되돌아올 걸 왜 쓸데없이 엉뚱한 데 진정을 하느냐?'고 비아냥거렸다. 결국 유족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사건 해결을 촉구했는데 안타깝게도 사건 발생 후 10년이 훌쩍 넘어서도 진실이 밝혀지지 못했다.

한 마디로 가해자 최씨의 행적, 정양과 함께 학교를 나선 박군의 엇갈린 증언, 이해할 수 없는 경찰의 행동은 의문점을 남겼다. 그리고 가해자 최씨는 사건 이후 무죄 방면되었다. 다만 유족의 끈질긴 노력과 탄원으로 2005년 국과수에서 팬티 거들을 감정했는데 정양의 것이 맞으며 남자정액 성분이 검출되었다. 그러나 정액과 DNA 대조 결과 최씨와 박군의 것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너무 오래돼서 누구 것인지 불명확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재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경찰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대학교 1학년 여학생이 새벽 시간에 이상하게도 속옷도 입지 않은 상태로 뜬금없이 집과는 반대 방향인 한적한 고속도로를 횡단하다가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말이다. 반면 부검감정서에는 '고속도로를 횡단했다는 점, 집의 반대방향으로 가려 했다는 점, 혈중 알콜 농도가 0.13%로서 운동에 크게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라는 점 등은 흔히 보는 보행자의 교통사고와는 다르다' 며 '피해자가 사고 전 신변에 중대한 위협을 받아 매우 긴박한 상황임을 암시해준다'고 했다. 위의 여러 의문점들과 사고 현장 사진이 일부 사라진 것과 참고인 증언이 바뀌는 등 되짚어 봐야 할 게 많다. 그러나 경찰은 부검감정서가 나오기 한 달 전에 이 사건을 단순교통사고로 단정짓고 수사를 종결해 버렸다.


4. 유가족의 주장[편집]


누군가가 정양을 성폭행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살해한 후 가족이나 주변인물들의 도움으로 교통사고 해결사 조직을 동원하여 고속도로 무단횡단 교통사고로 위장하는 완전범죄를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범인들은 범행을 은폐하기 위하여 경찰의 적극적인 협조, 부검 교수의 묵인, 시체가 안장되었던 병원 영안실 직원의 협조를 구하기 위한 집요한 로비나 외압이 있었고 그 영향이 언론이나 학교 기구에까지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에 대한 증거는 전혀 없었으며 상술했듯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5]

5. 사건 이후[편집]


정양의 부모는 남구 대명3동 대명시장에서 채소가게를 15년 이상 해 왔고 사고 직전에는 반찬가게도 냈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게를 폐업했다가 나중에 다시 반찬가게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양에게는 오빠 한 명과 여동생이 두 명 있었는데[6] 오빠는 대학 졸업 후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며 추모사이트를 관리하고 있고 여동생들은 대학 졸업 후 취업했다.

실제로 당시 중앙 언론에서는 일부를 제외하면 이 사건에 대해 보도하지 않았고 지방 언론에서도 지나가는 식으로만 언급했다. 더군다나 안타깝게도 이 사건 자체가 이미 잊혀져 버렸으며 시간이 오래 흘렀기 때문에 공소시효도 곧 끝나고 그대로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을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943화에서 이 사건을 다룬다.


5.1. 범인 검거[편집]


사건 발생 15년 후 공소시효[7]는 아직 지나지 않은 2013년 9월 5일 마침내 진범이 검거되어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이전까지 추정되었던 음모론과는 다르게 외국인 노동자에 의한 범행이었으며 살인은 아니고 집단 성폭행 사건이었다.

1998년 10월 16일 스리랑카인으로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성서산단에서 일하던 K 등 외국인 노동자 3명은 밤 10시가 넘어 일을 마치고 귀가하고 있었다. 이들은 귀가하던 도중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귀가하던 정 양을 발견하고 음욕이 생긴 것이다. 이들은 정 양을 납치해서 자전거에 실은 다음 구마고속도로[8] 굴다리 밑으로 끌고 가 집단 성폭행하였다. 그 일대는 사건 이후에는 주거지로 개발된 곳이지만 당시에는 비상활주로가 있었으며 논밭이 즐비하고 인적이 드문 우범지대였다.[9] 이들은 정 양을 성폭행하고 현금과 학생증 등을 뺏고 유유히 사라졌다. 하지만 피해자 정 양은 성폭행을 당한 충격에 휩싸여 있었던 데다 또다시 이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거라는 공포가 엄습했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빨리 신고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만 행동한 끝에 구마고속도로 무단횡단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때가 10월 17일 새벽 5시 30분경이었다. 하지만 정 양은 달려오던 24톤 덤프트럭을 피하지 못하고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단, 이것은 경찰이 범인의 자백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며 정양의 유가족들은 범인들이 증거 인멸을 위해 정 양을 고속도로에 밀어넣어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명한 점은 정양은 술을 많이 먹지 않았고 박군을 바래다주기 위해 나갔지만 술에 약해서인지 박군을 정문 건너편 병원 앞에 두고 본인은 멀리 대여섯 시간을 헤매다가 범죄의 표적에 걸려 희생당한 셈이다. K씨 등은 범행 당일 아침에도 성서산단의 한 공장에 출근해 태연히 일을 했으며 같은 공장에서 근무하던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자신들의 범행을 이야기하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10] 하지만 이들은 범행 당시 한국어가 서툴러 정 양 사건과 관련한 뉴스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정 양이 사망한 사실은 몰랐다고 한다. 이후 공범 2명은 2003년과 2005년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강제출국당했지만 주범 K는 뻔뻔하게도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한국에 눌러 살면서 스리랑카 식료품 수입 사업을 했다. K는 검찰에 붙잡히기 전 수 차례에 걸쳐 스리랑카를 오가기도 했으며 한국인과의 결혼으로 체류 자격은 얻었지만 국적은 아직 취득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주범 K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정신을 못 차리고 2011년, 2013년에 다시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는데 그때 K의 DNA가 채취, 보관되었고 정 양의 체내에 있던 정액과 대조해 본 결과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 진범으로 확인됐다. 위 사건들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여죄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범인 세 명중 한 명은 잡혔지만 공범인 2명은 스리랑카에 체류하는 것으로 알려져 경찰은 스리랑카 정부에 협조를 요청해 범인들을 한국으로 송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스리랑카 사이에 아직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송환이 쉽지 않을 듯하며 일본-브라질 간 처벌[11]에서 볼 수 있듯이 대리 처벌로 마무리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일단 법무부, 대검 등과 협의해 스리랑카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공범들에 대한 사법 공조 절차를 밟기로 했다.

사람들은 숨진 피해자와 가족들, 그리고 사건의 범인으로 몰렸던 남자친구 박씨와 운전기사 최씨의 고통이 재판을 통해 정당한 보응을 받게 되길 기대했다. 뒤늦게나마 다행인 점은 만일 용의자였던 스리랑카인이 다른 사건으로 체포되지 않았다면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았을 것이다. 또 이 사건으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당시 경찰의 무성의하고 한심한 수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는데 상술된 대로 원래 유족들은 청와대, 대한민국 법무부, 인권위 등에 60여차례에 걸쳐 탄원·진정서를 내면서 경찰이 제대로 된 수사를 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관할 경찰서에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는 답변뿐이었다. 경찰은 당시 당신이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수사를 시작하겠다, 결국 나한테 되돌아 올 걸 왜 쓸데없이 엉뚱한 데 진정을 하느냐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참고로 당시 담당 경찰들은 퇴진했거나 이미 2011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5.2. 재판[편집]


발생한 지 오래된 사건이라 시효 문제가 중요하다. 당시 법률로 강간은 5년의 시효, 특수강간은 10년이어서 각각 2003년, 2008년에 만료되었다. 특수강도강간은 15년의 시효를 가진다. DNA 분석 등 과학자료가 있을 경우 10년씩 연장된다. 단, 이미 시효가 종료된 사건에 대해서는 연장되지 않는다. 이 법은 2010년에 시행되었으므로 강간, 특수강간은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어서 연장되지 않았다.

2014년 5월 30일 진범인 스리랑카인에 대하여 1심 법원(대구지방법원)에서 특수강도강간에 대하여는 증거부족으로 무죄, 포함되는 특수강도, 특수강간, 강도강간 혐의에 대해 공소시효 경과로 면소 판결을 내렸다. 팬티에서 나온 정액과 K의 정액이 일치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지만[12] 특수강도강간에 대해서는 증명이 불충분했다. 다만 이는 강간 사실에 대한 증거부족은 아니었다. 검찰도 기소를 위해 최대한 묘안을 짜낸 방법이었는데 강간과 특수강간으로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서 기소할 방법이 없어서 당시 K가 성폭행 후 현금과 학생증을 훔쳤다는 사실을 추가해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13] 그러나 15년도 지난 일이라 강도범행에 대해서는 증거가 불명확했고 결과적으로 특수강도강간은 증거 부족으로 무죄, 그 축소사실인 강간과 특수강간은 공소시효 경과로 면소가 된 것이다. K는 뻔뻔하게 모른다고만 일관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판결 결과에 대해 인터넷에서는 여론이 부글부글 끓었다.

2015년 6월 8일 검찰은 항소심에서 스리랑카 근로자 K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김영대 대구지방검찰청 제1차장검사는 재수사 과정에 믿을 만한 증인의 증언을 통해 1심에서 규명하지 못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고 밝혔으며 검찰은 다음달 16일 열릴 예정이었던 항소심 선고에서 유죄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특수강도강간을 구성하는 강도범행 부분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스리랑카 노동자로부터 K와 동료가 피해자의 현금과 학생증을 빼앗았다는 진술을 보강한 것이다.

2000년 4월 4일 MBC PD수첩에서 이 사건을 다룬 지 14년 만인 2014년 6월 21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다시 이 사건을 다뤘다. 한 법의학자는 당시 경찰에서 단순 교통사고로 편향적으로 생각했기에 제대로 수사를 할 기회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거기다 당시 경찰들은 사건 이후에도 당시와 별 다를 바가 없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여러 가지 문제로 진범을 코앞에 두고도 사실상 미제사건으로 남을 공산이 커진 것이다. 경찰은 아직도 그 범인이라는 DNA가 나온 스리랑카인의 숨진 정양에 대한 강간 시점에서부터 사망 시점까지 숨진 정양의 5시간 이상의 행적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2015년 8월 11일 대구고등법원 제1형사부는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스리랑카인 K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측의 증거가 불확실하고 강간죄의 공소시효가 경과되었다는 1심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앞서 다른 스리랑카 노동자가 강도 범행 사실을 전해 들었다는 진술이 증거로 사용되었지만 전문증거의 증거능력 문제, 증거능력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미 15년 전 일에 대한 진술인 데다 진술 중 엇갈리는 부분들도 있어 증명력 부족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검찰은 다시 항소할 것이라고 했으며 유가족들은 짜맞추기 수사라고 분노하면서 K씨가 아닌 제3의 범인이 있는것 같다는 주장을 이어갔다.기사[14]

결국 2017년 7월 18일 대법원에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여 스리랑카인 K씨에 대한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에 검찰은 스리랑카의 강간죄 공소시효가 20년이라 아직 처벌이 가능하다는 걸 노리고 K씨를 스리랑카로 추방한 뒤 DNA가 발견된 정액 등 물증을 스리랑카에 보내 현지 법원에서 형사처벌을 받도록 추진할 예정으로 전해졌다. 동아일보

그리고 스리랑카에서의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불과 4일 전에 K씨를 기소하는 데 성공했다! 기사 처벌되면 최고 5년의 징역을 선고받을 거라고 한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피해자의 아버지가 애초부터 스리랑카인은 범인이 아니었다고 주장을 하였다.

2021년 4월 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는 성폭행 피해자 A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부모에게 각각 2천만원씩, 형제 3명에게 각각 500만원씩 총 5,500만원[15]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사고 발생 직후 단순 교통사고로 성급히 판단해 현장 조사와 증거 수집을 하지 않고, 증거물 감정을 지연하는 등 극히 부실하게 초동 수사를 했다”면서 “이는 현저히 불합리하게 경찰의 직무상 의무를 위반해 위법하다. 피고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원고들에게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2000년 4월 4일 MBC PD수첩에서 이 사건을 다룬 후[16] 14년 만인 2014년 6월 21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다시 이 사건을 다뤘다. 2018년 11월 3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후속보도가 있었다.(#1143)[17]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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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정구역으로는 본리동으로 장기지구가 있는 곳이다.[2] 이 씨는 2000년 방영된 PD수첩에서는 증언을 번복했다.[3] 참고로 이 병원은 사건 이후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4] 박군이나 운전자의 태도는 죄책감이나 과거 전과에 대한 걱정 때문 등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당시 가족들로서는 의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5] 그러나 유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소중한 딸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경찰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협조적이고, 불친절하고, 수사에 무성의하며 오히려 유가족을 조롱하기까지 하는 상황이었으니 가족들로서는 원통한 나머지 음모론을 의심해도 이상할 게 없다.[6] 상술했다시피 둘 중 하나는 쌍둥이 여동생이었다.[7] 2010년부로 DNA가 채취된 성범죄 사건에 한해 공소시효를 10년 연장하는 법이 발효되었으나 이미 시효가 지난 죄목엔 적용되지 않고 다른 죄목은 시효 연장이 없더라도 시효가 지나지 않은 상태.[8]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9] 일례로 용산역은 2005년에 개통되었다. 주변 장기지구 아파트 단지 입주는 이 사건으로부터 6년 후인 2004년에 이루어졌다.[10] 실제로 성서산단에는 외국인 근로자들끼리 외국 남자들이 한국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졌다고 한다.[11] 일본인을 강도 살해하고 도망친 브라질인을 브라질 정부가 체포해서 34년 5개월의 징역을 선고한 사례가 있다.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송환은 거부했고 대신 브라질에서 살인죄로 기소해 처벌한 사건이다.[12] 유전자 11개 중 일부는 확인이 안 됐는데 법의학자 말로는 오래되어서 자연적으로 훼손됐을 거라고 봤다. 만약 경찰이 그 팬티를 받은 즉시 유전자 검사를 했더라면 모두 확인됐을 것이다. 다만 절차가 늦어서 범인들이 빠져나갈 시간을 주었다는 거지 이미 검출된 DNA만으로도 죄가 성립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강간죄의 공소시효가 끝나서 기소가 불가능하다.[13] 특수강도강간의 공소시효기간은 15년이라 2013년에 만료되는데 10년 더 연장하면서 기소가 가능했다.[14]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근거는 없는 음모론에 가까운 울분이다.[15] 1998년부터의 지연손해금까지 계산하면 총 1억 3,000만원.[16] 취재는 권문혁 PD가 맡았다.[17] 한동안 다시보기가 지원되었으나 현재는 한국-쓰리랑카 양국 논의 등 복잡한 사정으로 다시보기에서 사라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