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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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대구광역시
대구의 옛 명칭으로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 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다. 즉, 원래는 이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가 있었으나,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한자로 그 음을 빌려 표기하다가 가장 널리 쓰이는 '대구', '달구벌'이 정착한 것이다. 달구벌이라는 말의 연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1] , 신라의 계림 사상에서 기원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에서 유래했다는 연구자료도 있다. 즉, '닭의 벌판'을 뜻하는 '닭벌'을 음차한 게 '달구벌'.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대구시를 상징하는 새는 독수리다.[2] 다만, '달구' 또는 '달구화'와 같은 지명이 오늘날 확대된 대구광역시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현대의 대구광역시 중구와 달서구 성서, 서구 및 금호강 이남의 북구에 해당한다.
대구광역시 전역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규모의 지석묘(고인돌)군과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 유물의 존재로 말미암아, 삼한시대 혹은 그 전부터 군장 국가 형태의 소부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고대 삼한시대에 들어서는 진한의 소국인 다벌국, 혹은 달구벌국 혹은 탁국(卓國)이었으며, 서기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244년 조분 이사금 때 달성(현재 달성토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261년 첨해 이사금 때 완공되었다. 달성은 경주 월성과 비슷한 구조였으며, 해자를 포함했다. 달성 완공과 함께 나마 극종(奈麻 克宗)을 성주로 임명했다. 이후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통일신라시기에는 9주 5소경 중 양주 소속이었다. 이 때 지금의 대구 땅에는 위화군(喟火郡, 수성구), 위화군의 소속 영현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중구), 팔거리현(八居里縣, 북구 칠곡지구), 다사지현(多斯只縣, 달성군 하빈면), 설화현(舌火縣, 달성군 화원읍)이 있었다.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 달구화현은 대구현(大丘縣), 팔거리현은 팔리현(八里縣),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으로 고쳤다. 지금까지 사용하는 지명이 이 때 많이 등장했지만 신라 때는 이전 지명과 경덕왕이 고친 지명이 혼용되어 달구벌, 달벌 등의 지명도 계속 사용되었다.[3]
참조
689년 신문왕이 이 곳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기존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장보고군이 민애왕의 신라 관군을 상대로 20배 병력을 격파한 달벌대전이 이 곳에서 일어났다.
후삼국시대에는 수창군 호족 이재가 대구 지역을 다스렸다.
대구광역시의 지명 문서들에 가면 볼 수 있는 태조 왕건의 굴욕이 펼쳐졌던 곳이다. 한 눈에 보려면 여기로.
대구현 지역은 경산부(현 성주군)에 속했다. 수창군을 수성군(壽城郡)으로 고쳤고 지금의 수성구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서는 '대구'의 한자가 공자의 이름인 구(丘)와 같아 이름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조 때는 반려되었으나, 정조 초기 1783년 대구(大邱)로 한자를 바꿨는데 이 역시 순조 때까지도 함께 쓰이다가 이후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는 대구(大邱)로만 쓴다.
중국어권에서는 간혹 구(邱)와 구(丘)를 헷갈려 "大丘"로 쓴 사례도 있다. 둘 다 뜻이 언덕이고 현대 중국어 발음에서도 발음(qiu)과 성조(1성)가 같다. 일본어로는 그 쪽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가타카나로 "テグ(大邱)"로 쓰는데 간혹 일반인의 경우 한자를 헷갈려서 글자꼴이 비슷한 "대저(大邸)"로 쓰는 사례도 발견된다.
대구의 진산(鎭山)인 달성산의 명칭은 옛 지명 '달구벌'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이 정식 행정구역 명칭으로 남아 있어 도시명의 유래를 잇고 있다.
1419년(조선 세종 원년) 대구현[4] (중구, 달서구 성서, 서구, 북구 중 금호강 이남[5] )·수성현(시지를 제외한 수성구, 남구 일대)·해안현(동구 동촌, 공산)·하빈현(달성군 하빈면, 다사읍 일대)을 통합하여 대구군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601년과 1685년에는 화원현(달서구 월배, 달성군 화원읍, 옥포면)까지도 대구로 통합. 같은 시기에 풍각현도 대구로 통합되었지만 구 풍각현은 구한말 월경지 정리 개편으로 청도군에 편입되었다.
1466년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01년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경상감영은 역사가 참 복잡한데, 조선 초기에는 경주부에 있었다가, 태종 7년(1407년)에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우도로 나누면서, 좌도는 경주부, 우도는 상주목에서 관할하도록 했다. 그러다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에 다시 경상좌/우도를 하나로 합치며 경상감영을 상주목에 두었다.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분리됐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하면서 성주의 속현 팔거현(현재 칠곡군), 대구도호부, 안동대도호부 등으로 이전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 대구도호부에 경상감영이 세워졌는데,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대구도호부는 아예 개발살이 나고(...) 감영은 안동대도호부로 옮겨갔다. 그러다 1601년, 안동대도호부가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대구도호부에 세워졌고 그 후로 경상감영은 쭉 대구도호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구한말 대구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현재의 청도군 각북면, 각남면, 풍각면(이상 구 풍각현 지역)까지도 대구부 관할에 있었으나, 1906년 청도군으로 편입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23부제로 개편되었을 때 대구부 소재지가 되었다.[6] 1896년 다시 13도제로 바뀌면서부터는 경상북도 관찰사 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풍각면, 각남면, 각북면을 청도군으로 이관했다. 또한 현풍군의 낙동강 북부 지역을 고령군으로 이관했다.
조선 말까지만 해도 대구는 경상도에서 경주, 상주, 진주보다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의 부설로 인해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 수운의 교차점에 위치한 대구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반면 경부선 철도 노선에서 소외된 경주, 상주, 진주는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 대구는 서울, 평양, 부산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1914년 4월 1일 실시된 부군면 통폐합으로 인한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부는 현재의 중구 일원만 대구부로 남고, 나머지 영역은 현풍군과 통합하여 달성군으로 분리되었다. 일본어로 대구는 たいきゅう(타이큐), 달성은 たつじょう(타츠죠)라 발음했다.
1917년 달성군 수성면 대봉동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1938년 달성군 성북면 남부, 달서면, 수성면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이 때, 성북면 북부(금호강 이북)는 공산면에 편입되었고, 달서면에 속했던 감삼동이 성서면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해안면은 동촌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때부터 공산면과 동촌면은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 동양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에 걸맞게 공산주의 색이 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짙은 지역이었다.[7] 1946년의 대구 10.1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상감영공원에 대구 10.1 사건의 흔적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시기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해방 후 1949년 대구부(府)에서 대구시(市)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잠깐 임시수도로 격상되어 정부기능이 집중된 적이 있었으나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이 대구역에 포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다시 부산에 임시수도 자리를 내주었다.
1957년 11월 달성군 동촌면, 공산면, 성서면, 월배면, 가창면을 대구시에 편입하여 대구시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었다. 이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게리맨더링이라 한다. 당시 대구시는 무려 기(己) 선거구까지 있었다. 그러나 5년 후…
1963년 동촌면을 제외한 4개 면[8] 을 달성군으로 복귀시켜 대구시의 영역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이 때 월배면과 성서면의 경계는 1958년과는 다소 달라졌다.[9] 또한 같은 해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 동구, 남구, 서구, 북구가 설치되었다. 공산면은 다시 외롭게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가,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 당시 재편입되었다.
1973년 7월 달성군 화원면 대곡리가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1975년 10월 서구 원대동 일부, 노곡동, 조야동 및 동구 신암동 일부가 북구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북구로 편입된 원대동 일부는 노원동이 되었고 신암동 일부는 대현동이 되었다. 달성군 월배면은 1979년, 성서면은 1980년에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980년 동구 남부가 수성구로 분리되었다. 이 때 신천동 중 국채보상로 이남 구간은 수성구 수성동4가가 되었다. 동시에 남구의 남산동과 대봉동 북부가 중구에 편입되고 남구에 잔류한 대봉동은 이천동으로 개칭되었다.[10]
1992년의 광고
1981년 7월 대구직할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현황.
1981년 7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12] 되면서 달성군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및 경산군 안심읍[13] , 고산면[14] , 칠곡군 칠곡읍[15] 을 편입했다.
1987년 1월 동구 연경동이 북구에 편입되고, 서구 본리동 일부가 남구에 편입되어 본동이 되는 등 각 구 사이에 미세한 행정구역 경계 조정이 있었다.
1988년 1월 1일 서구와 남구의 각기 일부[16] 를 분리하여 달서구를 설치했다.
1995년 1월 1일 대구직할시에서 대구광역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3월 1일 당시까지 경상북도 관할 군이었던 달성군을 편입하여 대구광역시 산하 기초자치단체로 두게 되었다. 이 당시 대구시는 내무부에 달성군뿐만 아니라 경산시(당시 경산시, 경산군)와 칠곡군 지천면, 동명면까지 대구시에 편입하는 안을 건의했고, 내무부도 이들 지역 모두 대구시에 편입시킨다는 방침이었으나# 경상북도의 반대로 인해 내무부와 당시 여당 민주자유당은 달성군만 대구에 편입시키는 안을 확정했다. 달성군이 생각보다 산지가 많은 편이고 행정구역도 월경지가 많아서 시가지와 산업단지가 분산되어 개발되며 현재까지도 평지가 많은 경산시(도농통합 이전 경산군 포함)를 편입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17] 당시 대구시 당국 역시 경산 편입을 염두에 두고 지하철 연장 등 도시계획을 수립했으나## 달성군만 편입되며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의 경산시 연장 등이 미루어졌다.[18]
시역 확장 외에도 달서구 분구 역시 검토되었으나#, 직할시(광역시) 자치구 분구 기준인 50만에 아슬아슬하게 미치지 못해# 분구에 실패했다.[19] 또한 달성군의 대구 편입 이후 가창면을 수성구에, 다사읍(당시 다사면), 하빈면을 서구 혹은 달서구에 편입하자는 주장도 제기됐으나#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구자춘의 반대로 기형적 행정구역이 유지되었다.
2005년에는 달성군청이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11동에서 달성군 논공읍으로 이전하였다.
2018년 3월 1일에는 달성군 유가면이 유가읍으로, 동년 11월 1일에는 현풍면과 옥포면이 각각 현풍읍과 옥포읍으로 승격했다.
2023년 7월 1일 군위군의 대구광역시 편입이 성사됐다.
1. 삼한시대 ~ 남북국시대[편집]
대구의 옛 명칭으로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 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다. 즉, 원래는 이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가 있었으나,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한자로 그 음을 빌려 표기하다가 가장 널리 쓰이는 '대구', '달구벌'이 정착한 것이다. 달구벌이라는 말의 연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1] , 신라의 계림 사상에서 기원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에서 유래했다는 연구자료도 있다. 즉, '닭의 벌판'을 뜻하는 '닭벌'을 음차한 게 '달구벌'.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대구시를 상징하는 새는 독수리다.[2] 다만, '달구' 또는 '달구화'와 같은 지명이 오늘날 확대된 대구광역시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현대의 대구광역시 중구와 달서구 성서, 서구 및 금호강 이남의 북구에 해당한다.
대구광역시 전역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규모의 지석묘(고인돌)군과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 유물의 존재로 말미암아, 삼한시대 혹은 그 전부터 군장 국가 형태의 소부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고대 삼한시대에 들어서는 진한의 소국인 다벌국, 혹은 달구벌국 혹은 탁국(卓國)이었으며, 서기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244년 조분 이사금 때 달성(현재 달성토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261년 첨해 이사금 때 완공되었다. 달성은 경주 월성과 비슷한 구조였으며, 해자를 포함했다. 달성 완공과 함께 나마 극종(奈麻 克宗)을 성주로 임명했다. 이후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통일신라시기에는 9주 5소경 중 양주 소속이었다. 이 때 지금의 대구 땅에는 위화군(喟火郡, 수성구), 위화군의 소속 영현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중구), 팔거리현(八居里縣, 북구 칠곡지구), 다사지현(多斯只縣, 달성군 하빈면), 설화현(舌火縣, 달성군 화원읍)이 있었다.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 달구화현은 대구현(大丘縣), 팔거리현은 팔리현(八里縣),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으로 고쳤다. 지금까지 사용하는 지명이 이 때 많이 등장했지만 신라 때는 이전 지명과 경덕왕이 고친 지명이 혼용되어 달구벌, 달벌 등의 지명도 계속 사용되었다.[3]
참조
689년 신문왕이 이 곳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기존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장보고군이 민애왕의 신라 관군을 상대로 20배 병력을 격파한 달벌대전이 이 곳에서 일어났다.
후삼국시대에는 수창군 호족 이재가 대구 지역을 다스렸다.
2. 고려[편집]
대구광역시의 지명 문서들에 가면 볼 수 있는 태조 왕건의 굴욕이 펼쳐졌던 곳이다. 한 눈에 보려면 여기로.
대구현 지역은 경산부(현 성주군)에 속했다. 수창군을 수성군(壽城郡)으로 고쳤고 지금의 수성구로 이어졌다.
3. 조선 ~ 대한제국[편집]
조선시대에서는 '대구'의 한자가 공자의 이름인 구(丘)와 같아 이름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조 때는 반려되었으나, 정조 초기 1783년 대구(大邱)로 한자를 바꿨는데 이 역시 순조 때까지도 함께 쓰이다가 이후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는 대구(大邱)로만 쓴다.
중국어권에서는 간혹 구(邱)와 구(丘)를 헷갈려 "大丘"로 쓴 사례도 있다. 둘 다 뜻이 언덕이고 현대 중국어 발음에서도 발음(qiu)과 성조(1성)가 같다. 일본어로는 그 쪽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가타카나로 "テグ(大邱)"로 쓰는데 간혹 일반인의 경우 한자를 헷갈려서 글자꼴이 비슷한 "대저(大邸)"로 쓰는 사례도 발견된다.
대구의 진산(鎭山)인 달성산의 명칭은 옛 지명 '달구벌'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이 정식 행정구역 명칭으로 남아 있어 도시명의 유래를 잇고 있다.
1419년(조선 세종 원년) 대구현[4] (중구, 달서구 성서, 서구, 북구 중 금호강 이남[5] )·수성현(시지를 제외한 수성구, 남구 일대)·해안현(동구 동촌, 공산)·하빈현(달성군 하빈면, 다사읍 일대)을 통합하여 대구군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601년과 1685년에는 화원현(달서구 월배, 달성군 화원읍, 옥포면)까지도 대구로 통합. 같은 시기에 풍각현도 대구로 통합되었지만 구 풍각현은 구한말 월경지 정리 개편으로 청도군에 편입되었다.
1466년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01년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경상감영은 역사가 참 복잡한데, 조선 초기에는 경주부에 있었다가, 태종 7년(1407년)에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우도로 나누면서, 좌도는 경주부, 우도는 상주목에서 관할하도록 했다. 그러다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에 다시 경상좌/우도를 하나로 합치며 경상감영을 상주목에 두었다.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분리됐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하면서 성주의 속현 팔거현(현재 칠곡군), 대구도호부, 안동대도호부 등으로 이전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 대구도호부에 경상감영이 세워졌는데,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대구도호부는 아예 개발살이 나고(...) 감영은 안동대도호부로 옮겨갔다. 그러다 1601년, 안동대도호부가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대구도호부에 세워졌고 그 후로 경상감영은 쭉 대구도호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구한말 대구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현재의 청도군 각북면, 각남면, 풍각면(이상 구 풍각현 지역)까지도 대구부 관할에 있었으나, 1906년 청도군으로 편입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23부제로 개편되었을 때 대구부 소재지가 되었다.[6] 1896년 다시 13도제로 바뀌면서부터는 경상북도 관찰사 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풍각면, 각남면, 각북면을 청도군으로 이관했다. 또한 현풍군의 낙동강 북부 지역을 고령군으로 이관했다.
4. 일제강점기[편집]
조선 말까지만 해도 대구는 경상도에서 경주, 상주, 진주보다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의 부설로 인해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 수운의 교차점에 위치한 대구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반면 경부선 철도 노선에서 소외된 경주, 상주, 진주는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 대구는 서울, 평양, 부산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1914년 4월 1일 실시된 부군면 통폐합으로 인한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부는 현재의 중구 일원만 대구부로 남고, 나머지 영역은 현풍군과 통합하여 달성군으로 분리되었다. 일본어로 대구는 たいきゅう(타이큐), 달성은 たつじょう(타츠죠)라 발음했다.
1917년 달성군 수성면 대봉동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1938년 달성군 성북면 남부, 달서면, 수성면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이 때, 성북면 북부(금호강 이북)는 공산면에 편입되었고, 달서면에 속했던 감삼동이 성서면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해안면은 동촌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때부터 공산면과 동촌면은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 동양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에 걸맞게 공산주의 색이 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짙은 지역이었다.[7] 1946년의 대구 10.1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상감영공원에 대구 10.1 사건의 흔적이 있다.
5. 대한민국 (대구직할시 승격 전)[편집]
1945년 8월 15일 해방 시기 대구부와 달성군의 행정구역 상황.
해방 후 1949년 대구부(府)에서 대구시(市)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잠깐 임시수도로 격상되어 정부기능이 집중된 적이 있었으나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이 대구역에 포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다시 부산에 임시수도 자리를 내주었다.
1957년 11월 달성군 동촌면, 공산면, 성서면, 월배면, 가창면을 대구시에 편입하여 대구시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었다. 이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게리맨더링이라 한다. 당시 대구시는 무려 기(己) 선거구까지 있었다. 그러나 5년 후…
1963년 동촌면을 제외한 4개 면[8] 을 달성군으로 복귀시켜 대구시의 영역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이 때 월배면과 성서면의 경계는 1958년과는 다소 달라졌다.[9] 또한 같은 해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 동구, 남구, 서구, 북구가 설치되었다. 공산면은 다시 외롭게 달성군의 월경지가 되었다가,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 당시 재편입되었다.
1973년 7월 달성군 화원면 대곡리가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1975년 10월 서구 원대동 일부, 노곡동, 조야동 및 동구 신암동 일부가 북구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북구로 편입된 원대동 일부는 노원동이 되었고 신암동 일부는 대현동이 되었다. 달성군 월배면은 1979년, 성서면은 1980년에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980년 동구 남부가 수성구로 분리되었다. 이 때 신천동 중 국채보상로 이남 구간은 수성구 수성동4가가 되었다. 동시에 남구의 남산동과 대봉동 북부가 중구에 편입되고 남구에 잔류한 대봉동은 이천동으로 개칭되었다.[10]
6. 대구직할시 승격 (1981년 7월) 이후[편집]
1992년의 광고
1981년 7월 대구직할시 승격 당시 행정구역 현황.
1981년 7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12] 되면서 달성군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및 경산군 안심읍[13] , 고산면[14] , 칠곡군 칠곡읍[15] 을 편입했다.
1987년 1월 동구 연경동이 북구에 편입되고, 서구 본리동 일부가 남구에 편입되어 본동이 되는 등 각 구 사이에 미세한 행정구역 경계 조정이 있었다.
1988년 1월 1일 서구와 남구의 각기 일부[16] 를 분리하여 달서구를 설치했다.
1995년 1월 1일 대구직할시에서 대구광역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3월 1일 당시까지 경상북도 관할 군이었던 달성군을 편입하여 대구광역시 산하 기초자치단체로 두게 되었다. 이 당시 대구시는 내무부에 달성군뿐만 아니라 경산시(당시 경산시, 경산군)와 칠곡군 지천면, 동명면까지 대구시에 편입하는 안을 건의했고, 내무부도 이들 지역 모두 대구시에 편입시킨다는 방침이었으나# 경상북도의 반대로 인해 내무부와 당시 여당 민주자유당은 달성군만 대구에 편입시키는 안을 확정했다. 달성군이 생각보다 산지가 많은 편이고 행정구역도 월경지가 많아서 시가지와 산업단지가 분산되어 개발되며 현재까지도 평지가 많은 경산시(도농통합 이전 경산군 포함)를 편입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17] 당시 대구시 당국 역시 경산 편입을 염두에 두고 지하철 연장 등 도시계획을 수립했으나## 달성군만 편입되며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의 경산시 연장 등이 미루어졌다.[18]
시역 확장 외에도 달서구 분구 역시 검토되었으나#, 직할시(광역시) 자치구 분구 기준인 50만에 아슬아슬하게 미치지 못해# 분구에 실패했다.[19] 또한 달성군의 대구 편입 이후 가창면을 수성구에, 다사읍(당시 다사면), 하빈면을 서구 혹은 달서구에 편입하자는 주장도 제기됐으나#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구자춘의 반대로 기형적 행정구역이 유지되었다.
2005년에는 달성군청이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11동에서 달성군 논공읍으로 이전하였다.
2018년 3월 1일에는 달성군 유가면이 유가읍으로, 동년 11월 1일에는 현풍면과 옥포면이 각각 현풍읍과 옥포읍으로 승격했다.
2023년 7월 1일 군위군의 대구광역시 편입이 성사됐다.
[1] 현존하는 비슷한 발음을 가진 낱말 중에서, 평북 방언으로는 갈기를 뜻하는 단어가 있고, 그 외에도 물건을 뭉쳐놓은 모양을 뜻하는 타래도 있다. 물체가 솟아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2] 그래서 대구 FC가 창단될 때 팀명을 '대구 이글스'로 정했다가 야구팀이냐는 반대여론이 거세서 그냥 평범하게 대구 FC로 팀명을 바꿨다.[3] 이 때문에 현대 대구의 지명 중에도 과거 달구벌과 달벌 등에 삽입된 '달(達)'자를 넣은 곳이 있다. 대표적인 지역이 달서구와 달성군.[4] 달구벌. 즉 오리지널 대구.[5] 무태조야동을 제외한 금호강 이북의 북구는 칠곡군 출신.[6] 대구 지역은 대구부 대구군, 현풍군.[7] 같은 시기 평양은 기독교 색이 짙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다.[8] 단 파동, 서변동, 동변동, 평광동은 대구시에 잔류하였다.[9] 원래 성서면 소속이었던 송현동이 이 때는 월배면으로 편입되었기 때문.[10] 쉽게 말해서 중구와 남구의 경계가 달구벌대로(당시 대동로, 대서로)에서 명덕로(당시 명동로, 명서로)로 변경되었다.[11] 해당 휘장은 일제강점기 대구부 시절부터 사용된 휘장으로, 한자 大邱를 형상화한 것이다. (참고) 앞 링크에 나온 9개 휘장 중 《내 고장 상징물총람》이 발간된 1987년에는 대구의 것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쓰였다. 각 자치구에서는 자체 휘장을 만들기 전에는 이 대구시 휘장 가운데 점을 빼고 中, 東 등 한자로 된 구 명칠을 넣어 사용하였다. 1996년부터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으나 현재도 맨홀 등에서 드물게 볼 수 있다. [12] 같은 날 경기도 인천시도 인천직할시로 승격되었다.[13] 현재의 동구 안심 1~4동 및 혁신동[14] 현재의 수성구 고산 1~3동(시지)[15] 1980년 칠곡면에서 승격, 현 북구 칠곡지구 일원[16] 서구 중 성서, 성당동 전역과 내당동 일부(현 두류동 일대), 남구 중 월배 전 지역[17] 사실 1981년 광명시 승격을 참고하면 1989년의 경산읍의 경산시 승격 역시 사실상 경산의 대구 편입 무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18] 달성군 대구 편입 후 1호선이 당초 종점이던 진천역에서 대곡역으로 한 정거장 연장되고(2호선이 착공되던 1996년 진천 ~ 대곡 구간을 착공해 2002년 대곡역이 개통했으며, 2016년에 설화명곡역까지 연장되었다.), 2호선의 차량기지 위치가 성서에서 다사읍으로 변경되며 2호선의 서측 종점이 문양역으로 변경된 사례를 고려하면 경산이 대구에 편입됐을 경우 충분히 경산 연장 구간까지 대구 시내 구간과 동시에 착공할 수 있었다.[19] 사실 이때 다사읍과 하빈면을 성서와 묶는 형태로 갔다면 충분히 분구될 수 있었고, 현재 겪고 있는 행정구역 문제도 깔끔히 해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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